광복 80주년, 태극기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 Hot 뉴스 2025. 8. 16. 00:2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소음과 폭력으로 오염된 태극기 되찾아와야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우리는 흔히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 조약이 1876년 일본과 체결했던 강화도조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 태극기가 등장하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조선이 이 조약을 교린관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조약체결에 반대하는 보수 유생들에게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잇는 것에 불과하다고 반박하였어요.

 

1882년 조미조약 체결 때 성조기와 함께 처음 등장한 태극기

 

그러므로 청과의 사대외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이후, 조선은 청의 속방이 되었어요. 그에 따라 청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기 때문에 독립국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내정과 외교는 자주국이었습니다. 사대외교는 전근대 사회에서 강대국과 약소국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방식이었어요. 조선의 입장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강화도조약 1조에서 조선이 ‘자주지방’이라고 한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그들은 독립과 자주를 분리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라고 종용한 것도 청이었고 1881년에 「조선책략」을 통해 미국과의 수교를 주선했던 것도 청이었어요. 그들은 오히려 이런 기회를 통해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것을 세계적으로 과시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청이 조미수호조약 체결과정에 개입하려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속방이라는 문구를 넣으려는 이홍장의 요구도 거절했습니다. 따라서 1882년 5월 22일 조약이 체결될 때, 태극기가 미국의 성조기와 함께 게양되었어요. 조선은 엄연히 독자적인 국가라는 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당시 미국 측 대표였던 슈펠트가 보관하고 있던 문서를 통해서도 확인이 되었는데요.

 

미국에서 1882년 발간된 [Flags of Maritime Nations]에 실린 태극기.

 

이후에도 1883년 영국과 수호조약을 맺을 때, 1886년에 프랑스와 수교를 했을 때에도 태극기를 사용했습니다. 당시 조선이 제공한 태극기가 그들의 외교문서에 그대로 남아 있어요. 1883년 미국에서 루시어스 푸트 공사를 조선에 파견한 것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과 홍영식 등의 보빙사가 미국에 파견되었습니다. 이들은 9월 19일 숙소였던 보스턴의 호텔에 처음으로 태극기를 걸었어요.

 

독립의 상징 독립문 위에 새겨진 태극기

 

태극기가 조선의 국기로 제정된 것은 1883년 1월 27일이었습니다. ‘이미 국기가 제정되었으니 팔도와 사도에 알려 사용하라’는 고종의 지시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하지만 그에 앞서 1882년 9월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개화파 박영효가 고베의 숙소에 태극기를 게양했습니다. 그가 남긴 기록에는 ‘일찍이 임금에게 명을 받았던 것이다’라고 해서, 독자적인 시도가 아님을 알 수 있지요.

 

고종이 1880년대에 미국인 고문관 데니에게 하사한 태극기.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 후에도 청은 끊임없이 세계 외교무대에서 조선이 속방이라는 것을 강조하려 들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상태를 유길준은 양절체제라고 설명했는데요. 그것은 청에게는 속방이면서 세계 각국과는 독립국으로 조약을 체결한 모순적인 상태를 의미했습니다. 고종은 청의 속방론에 맞서 일본과 미국에 상주 외교사절을 파견했어요.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참석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두 나라가 맺었던 시모노세키 조약의 결과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철회하였고 조선은 이제 독립국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독립은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어진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청의 간섭 없이 조선에 대한 보호국화 정책을 시도했던 것인데요. 그러나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의 개입으로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대한제국관을 소개한 프랑스 주간지

 

아관파천으로 인해 러시아의 영향력이 극대화 되었음에도 고종의 정치적 주도권이 회복되었어요. 당시 갑오개혁의 주역들은 살해, 유배, 망명을 당했지만 구미세력과 가까웠던 개화파들이 정권에 참여하고 이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를 구성했습니다. 이들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독립문의 건립을 추진했어요. 그래서 독립문 위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태극기는 당연히 금지되고 말았어요. 하지만 태극기는 곧 국권회복의 상징이 되었고 1919년 3.1 운동에서도 전국적으로 한국인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왔습니다. 따라서 일제는 태극기를 '불령선인'의 상징으로 보아 제조 및 소지를 금지하였어요. 따라서 깊숙이 감추어 두었던 태극기가 진관사, 백양사 등에 보관되어 훗날 발견되었습니다.

 

진관사에 보관되었던 태극기

 

3.1 운동 때도, 임시정부도, 독립군도 사용한 한국인 공통의 상징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되면서 민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대한이라는 국호와 태극기라는 국기를 그대로 사용했어요.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독립군도, 미국에 이주한 동포들이 설립한 대한인국민회도 태극기를 한국의 국기로서 활용했습니다. 태극기는 한국인이라는 동질성을 확인하는 공통의 상징이 되었어요. 따라서 해방의 날을 맞이했을 때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 3.1절 2주년 기념식

 

1945년 12월 중앙문화협회가 발행했던 「해방기념시집」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24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요. 그 가운데 ‘아침’을 썼던 창원 출신의 김달진 시인은 “천길 만길 깊은 바다 밑에/ 긴 밤을 어둠 속에 몸부림 치며/ 큰 열을 가슴 속에 쌓고 달구었더니/ 집집마다 추녀 끝에 태극기 나부낀다/ 거리마다 지축을 울리는 함성/ 오늘 이땅 산천은 크게 웃었다”라고 했습니다.

 

1945년 해방기념시집

 

하지만 일장기가 게양되어 있던 조선총독부 국기게양대에 나부낀 것은 성조기였어요. 9월 8일에 들어온 미군이 군정을 실시했기 때문입니다. 태극기가 올라간 것은 1946년 1월 14일이었는데요. 김구 주석을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들이 귀국했을 때에도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을 했습니다. 이어서 열린 모든 행사에서도 태극기는 한국인을 상징하는 깃발이 되고 있었어요.

 

북한에서도 1948년 7월 10일까지 태극기를 사용했음이 당시의 모든 영상자료를 통해 확인됩니다. 그런데 1947년 소련 측이 불만을 제기하여 결국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는데요. 그 결과 1948년 7월 10일에 열린 북조선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태극기를 내리고 인공기로 교체했습니다. 태극기의 근거가 된 주역이 미신이며 일정한 표준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어요.

 

1948년 7월 1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는 국기로 태극기를 정식으로 채택하였습니다. 다만 대한민국 국기를 태극기로 한다는 조항은 헌법에는 넣지 않기로 했어요. 그런데 태극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도안인지는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확정할 필요가 있어서 1949년 1월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마침내 1949년 10월 15일에 「국기제작법」 고시가 확정되어 규격이 확정되었어요.

 

‘국기에 대한 맹세’ 강요한 박정희, 태극기에 발포한 5.18 계엄군

 

박정희 정부는 특히 새마을운동을 통해 태극기를 보급하고 국기에 대한 예절교육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유신 선포와 함께 국기게양식과 강하식을 진행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정하여 강제로 외우게 하였지요. 1978년 국군의 날부터는 전국의 모든 방송을 통해 국기강하식과 함께 애국가를 내보냈습니다. 이는 독재정권이 자신들의 권위를 뿌리내리려는 의도가 있어 반발을 사기도 했어요.

 

그러나 이에 맞선 민주화운동 세력들도 태극기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했습니다. 특히 1980년 광주민주항쟁에서는 태극기를 앞세워 자신들이 국민주권을 대변하고 있음을 나타내려 했어요. 오히려 계엄군이 시민군이 태극기를 달고 다니는 것을 폭도의 행동으로 매도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태극기로 희생자들을 담은 관을 감싸며 애도했어요. 태극기를 든 시위대에게 발포한 것은 계엄군이었습니다.

 

5.18 당시 시신을 감쌌던 피에 물든 태극기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1989년에 규격화나 훈련을 통한 길들임을 의도한다는 비판을 받고 국기하강식은 폐지되었어요. 그리고 ‘국기에 대한 맹세’도 간소화되었습니다. 김영삼 정부에서 국기의 존엄성만 강조하지 않고 국민과 가까이 하는 상징물로 만들어가겠다고 밝힌 이후에 디자인화가 권장되었어요. 그것이 가장 극대화된 것은 2002년 월드컵에서 대대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성조기와 함께 등장한 ‘태극기 부대’

 

그런데 2016~2017년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탄핵 반대 집회와 박근혜 지지 집회를 주도하면서 ‘태극기 부대’가 나타났어요. ​이후에도 문재인 정부 퇴진 운동, 윤석열 지지 등 극우 성향의 시위와 집회에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들은 태극기뿐 아니라 성조기, 심지어 이스라엘기를 흔들며 집회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이를 통해 보수적 개신교인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태극기 부대의 정치적 영향력은 응집력과 목소리가 크기 때문에 보수 정치권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요, 하지만 최근 직접적 영향력이나 주도권은 크게 줄어든 상태입니다. 이들이 동원한 대중들이 대단한 것 같아도 선거에 참여한 세력들은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극기 부대’가 일으키는 소음과 폭력은 태극기라는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어요.

 

‘애국보수’를 자칭하지만 실제로는 한미동맹을 맹신하면서 친미사대주의를 보이고 있으며 독도나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 보상금 등 문제에서 일본에 대한 비판을 저지하는 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더구나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를 신봉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빨갱이로 규정하고 있어요. 따라서 이들은 애국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태극기를 모독하고 있는 것인데요.

 

<태극기 함께 해온 나날들> 특별전에서 태극기 소중함 되새깁시다

 

이제 저들에 의해 오염된 태극기를 민족 정체성과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되찾아 와야 합니다. 우선 저들에게 ‘태극기 부대’ 또는 ‘태극기 집회’라는 명칭을 부여하지 말아야 해요. 더 이상 이들이 태극기를 대표하는 왜곡된 사회현상을 방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시대착오적인 극우 사대주의자들이 모인 것에 불과하며, 민주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곧 소멸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럴 때 우리 역사에서 태극기가 갖는 의미를 다시 한번 알아보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지금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11월 16일까지 <태극기 함께 해온 나날들>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중요하고 뜻깊은 자료들을 많이 모아서 보여 주고 있어요.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관람해 보시기를 추천드릴게요. 특히 청소년들에게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한국갤럽] ‘윤봉길’ 안창호‘ 이어 ’홍범도‘ ’김좌진‘

일본 호감도 2022년 21%에서 38%로 급등세
대통령 직무 평가 ‘긍정’ 59%…한 달 새 5%p↓

 

'항일 독립운동가' 하면 가장 많이 생각나는 인물은 안중근, 유관순, 김구 등의 순으로 조사됐다. 윤봉길, 안창호, 홍범도, 김좌진, 이승만, 이봉창, 윤동주 등이 뒤를 이었다. 10년 전 조사와 비교해 명단이나 순위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홍범도의 급상승이 눈에 띈다.

 

한국갤럽이 12~14일 광복 80주년을 맞아 '항일 독립운동가' 하면 생각나는 인물을 물은 결과(3명까지 자유응답), '안중근'(47%), '유관순'(45%), '김구'(43%)를 가장 많이 떠올렸고, '윤봉길'(23%), '안창호'(19%), '홍범도'(8%), '김좌진'(5%), '이승만'(3%), '이봉창', '윤동주'(이상 1.6%)가 뒤를 이었다. 남성은 안중근(52%), 여성은 유관순(51%)을 가장 많이 답했다.

 

왼쪽부터 안중근, 유관순, 김구(존칭 생략)

 

‘홍범도’ 10년 전 15위에서 일약 6위로 상승

 

이번 조사에서 상위에 언급된 분들은 대부분 10년 전 조사와 변동이 없다. 특히 상위 5인 중에서는 ‘유관순’과 ‘김구’만 순위를 바꿨을 뿐이다. 가장 큰 변화는 10년 전 조사에서 0.7%로 15위였던 ‘홍범도’가 이번에 8%로 6위에 오른 것이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이끈 홍범도(1868-1943) 장군은 지난 2021년 8월 15일 카자흐스탄에서 유해 봉환, 2023년 이맘때 육군사관학교 내 흉상 이전 논란 등으로 인지도 상승한 것으로 보인다(2025년 7월 교내 존치 확정).

 

올해는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116년 되는 해다. 동아시아 전체의 항일 투쟁에 영향을 준 인물로 기려지며, 그의 생애는 뮤지컬 〈영웅〉(2009 초연), 영화 〈하얼빈〉(2024) 등으로도 재현된 바 있다. 유관순(1902-1920) 열사는 3.1 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천안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검거돼 일제의 고문에 18세 짧은 생을 마감했다.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은 1919년부터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해 1921년 이후 임시정부를 이끌며 항일 투쟁을 주도했고, 1945년 해방 후에는 민족통합을 통한 완전 독립국을 모색하는 등 우리 역사상 중요한 정치 지도자다. 김구, 안중근, 유관순은 2019년과 2024년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도 꼽혔다.

 

윤봉길(1908-1932) 의사는 폭탄을 투척해 일본군 요인을 살상한 훙커우공원 의거로 널리 알려져 있고,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은 일제강점기 민족개조·교육입국론을 주장하며 학교 설립과 양성에 힘쓴 교육자·사상가다. 청산리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 한인애국단원으로 일왕 투탄 의거를 시도한 이봉창(1901-1932) 의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일제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 윤동주(1917-1945) 등이 생각나는 독립운동가 상위권에 올랐다.

 

일본 호감도: 1989년 이래 최고 수준

2019년 12% → 2022년 21% → 2025년 38%

 

일본에 호감 가는지 물은 결과 38%가 '호감 간다'(이하 '호감도'), 45%가 '호감 가지 않는다'(이하 '비호감')고 답했다. 17%는 의견을 유보했다. 일본 호감도는 여성(32%)보다 남성(45%), 20대(61%)와 30대(53%), 성향 진보층(33%)보다 보수층(46%)에서 높은 편이다.

 

 

1989년 이후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부침을 거듭해왔다. 일명 '고노 담화' 발표 후인 1993·1994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이듬해인 2003년 30%대 중반까지 올랐다가 2005년 일본 시마네현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 후 20%로 급락하기도 했다. 일본 호감도 최고치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발생 직후 41%, 최저치는 아베 내각 출범 후 양국 갈등 장기화, 무역 분쟁으로 한국 내 일본 불매 운동이 확산하던 2019년 12%다.

 

이번 일본 호감도 상승은 정치·문화적 기류 변화 영향으로 보인다. 2024년 10월 선출된 이시바 일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부정적이며, 한일 역사 관련해 온건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일본정부관광국(JNTO)에 따르면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작년 한 해 약 882만 명, 올해도 상반기에만 478만 명을 넘어 전체 방일 외국인 중 최다 비중을 차지했다.

 

참고로, 과거 일본 국가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2023년 3월, 당시 일본 정부가 식민 지배 등 과거사에 대해 반성한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8%에 불과했다. 독도 영유권 또한 과거사만큼 양국 간 골 깊은 문제다. 지난 2013년 8월 일본 정부는 자국민의 61%가 '독도는 일본 땅'으로 본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홍보 영상을 배포했다. 이듬해인 2014년 3월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한국인의 98%가 '독도를 명백한 우리 땅'으로 봤다('영유권이 명확하지 않은 지역' 1%, 의견 유보 1%).

 

일본 사람에 대한 호감도는 더 높아 2025년 56%

저연령일수록 우호적: 20대 77%, 70대 이상 36%

 

일본 사람에게는 한국인 중 56%가 '호감 간다' 26%가 '호감 가지 않는다'고 답했다. 18%는 의견을 유보했다. 일본 사람에 대한 호감도 역시 2022년 46%에서 10%포인트 상승했다. 저연령일수록 우호적이며(20대 77%; 70대 이상 36%), 일본 비호감자(452명) 중에서도 37%가 일본 사람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지난날에도 일본 국가와 일본 사람에 대한 한국인의 느낌은 달랐다. 일본 호감도가 12%에 불과했던 2019년에도 일본 사람에 대해서는 41%가 호감을 표했다.

 

대통령 직무 수행 평가: 4주 전보다 5%p 하락

 

이재명 대통령이 현재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지 잘못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지 물은 결과(2점 척도, 재질문 1회), 59%가 긍정 평가했고 30%는 부정 평가했다. 11%는 의견을 유보했다.

 

 

4주 전(7월 3주) 조사와 비교하면 직무 긍정률이 5%포인트 하락, 부정률은 7%포인트 상승했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 응답자 특성에서 이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고, 특히 더불어민주당 지지층, 성향 진보층(90% 내외), 40·50대(70%대)에서 두드러진다. 중도층은 64%가 긍정적, 무당층에서는 긍·부정(35%·43%) 격차가 크지 않으며 보수층과 국민의힘 지지층에서만 부정론(56%, 66%)이 우세하다.

 

 

경제/민생 ‘잘한다’, 특별사면 ’잘못한다‘

 

대통령 직무 수행 긍정 평가자에게 그 이유를 물은 결과(이하 '가중적용 사례수' 기준 593명, 자유응답) '경제/민생'(15%), '전반적으로 잘한다'(9%), '소통'(8%), '민생회복지원금', '열심히 한다/노력한다'(이상 6%), '직무 능력/유능함', 전 정부 극복', '외교'(이상 5%), '서민 정책/복지', '추진력/실행력/속도감', '노동 정책'(이상 4%) 순으로 나타났다.

 

직무 수행 부정 평가자는(303명, 자유응답) '특별사면'(22%), '과도한 복지/민생지원금'(11%), '외교'(10%), '도덕성 문제/자격 미달', '경제/민생'(이상 7%), '인사(人事)', '전반적으로 잘못한다'(이상 5%) 등을 이유로 들었다. 부정 평가 이유 1순위가 4주 전 '과도한 복지'에서 '특별사면'으로 바뀌었다.

 

정당 지지도: 더불어민주당 41%, 국민의힘 22%.

 

2025년 8월 둘째 주(12~14일) 현재 지지하는 정당은(당명 로테이션, 재질문 1회) 더불어민주당 41%, 국민의힘 22%,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각각 3%, 진보당 1%, 이외 정당/단체 2%, 지지하는 정당 없는 무당(無黨)층 28%로 나타났다. 6월 대선 후 더불어민주당 40%대, 국민의힘 20% 안팎 구도가 이어지고 있다.

 

 

성향별로는 진보층의 71%가 더불어민주당, 보수층에서는 46%가 국민의힘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중도층에서는 더불어민주당 42%, 국민의힘 14%, 특정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유권자가 34%다.

 

국힘당 대표 후보 선호도는 김문수 크게 앞서

 

현재 국민의힘 대표 예비경선을 통과한 후보 4인 중 누가 당대표가 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보는지 물은 결과(후보명 순서 로테이션) '조경태' 22%, '김문수' 21%, '안철수' 18%, '장동혁' 9%로 나타났고, 30%는 의견을 유보했다. 국민의힘 지지층(222명, 표본오차 ±6.6%포인트) 중에서는 절반가량(46%)이 김문수, 그다음으로 장동혁(21%)을 지목했다.

 

이번 국민의힘 지도부 선거에는 당원 선거인단 투표를 80%, 일반 여론조사를 20% 비율로 반영한다. 단, 일반 여론조사는 전체 유권자가 아닌 국민의힘 지지층과 특정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무당(無黨)층 기준이다. 해당 기준(국민의힘+무당층 507명, 표본오차 ±4.4%포인트)으로 보면 김문수 31%, 안철수, 장동혁 각각 14%, 조경태 8%, 의견 유보 33%다.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결선 투표로 승자를 가린다. 결국 관건은 사전에 가늠하기 어려운 당원 선거인단의 표심이다. 2025년 4월 국민의힘 대선 경선 당원 선거인단은 약 77만 명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전국 유권자(약 4440만 명)의 2%를 밑도는 규모다. 즉 전국 유권자 1000명을 무작위 추출했을 때 표집되는 국민의힘 당원 선거인단은 20명 안팎이며, 이는 분석 가능한 인원이 아니다.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 특별사면은 찬반 팽팽

 

이번 광복절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돼 오늘 0시 석방된 조국 전 혁신당 대표의 사면에 대한 여론은 찬성 43%, 반대 48%로 찬반 격차가 크지 않았다. 9%는 의견을 유보했다.

 

연령별로 보면 40·50대는 찬성이 60%에 육박하고, 이외 연령대에서는 반대가 50% 이상이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성향 진보층에서는 사면 찬성(70%대), 국민의힘 지지층·보수층에서는 반대(80% 안팎)가 강했다. 중도층은 찬반 엇비슷(43%:50%), 무당층은 반대로 기울었다(20%:63%). 이재명 대통령 긍정 평가자(593명) 중에서는 66%가 사면 찬성, 25%가 반대했고, 부정 평가자(303명)는 대부분(93%) 반대했다.

 

이번 조사는 8월 둘째 주(12~14일)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1007명에게 전화면접방식으로 진행됐다. (표본오차: ±3.1포인트, 95% 신뢰수준, 응답자 이념성향: 보수 298명, 중도 315명, 진보 268명. 기타 자세한 사항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 강기석 기자 >

 

 

[윤미향 광복절 특별기고]     길원옥의 아리랑

 

                                                                                윤미향 전 국회의원

1. 길원옥의 슬픈 노래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예부터 숱하게 들어오던 노래다. 그런데 길원옥을 만나기 전에는 이 노래가 그렇게 슬픈 노래인 줄 몰랐다. 길원옥이 부르는 '한 많은 대동강아' 노랫가락과 가사를 듣고 있노라면 열세 살, 평양 보통강 주변에서 '철없이 노는 것 좋아하던' 길원옥의 어린 시절로 빠져들어 가게 된다.

 

그러다가도 금방 그 '까불던' 성격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게 되었다며 위안소에서의 폭력을 자신 탓으로 여기며 견디던 십대의 어리디어린 길원옥도 생각난다. 또 어느새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올 줄 알았더니 인천항에 도착한 이후 분단으로 인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십대의 어린 소녀가 타향에서 홀로 살아내야 했던 기구한 인생이 노랫가락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한다. 어찌 그리 굽이굽이 영화 같은 삶이 있을 수 있을까?

 

길원옥은 말했다. "그야말로 내가 정대협이라는 단체를 알아 가지고 이렇게 나오기 전에는 나는 이런 인생이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그 수많은 굴곡진 역사에 대해 길원옥은 "너무나 험하게 살았어요. 그 괴로운 생각, 가슴 아픈 생각을 일일이 가슴에 품고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질 못했을 거예요"라며 구체적으로 기억하기를, 말하기를 회피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길원옥의 한숨과 애환을 어떻게 내가 감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 글을 쓰면서 그녀의 인생을 되돌아보니, '광복 80년' 동안 길원옥은 광복의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꼈다. 그녀의 전 인생에 비하면 20여 년은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열세 살 집을 떠난 뒤 그때부터 줄곧 홀로 세상과 맞서며 그 세월의 굽이굽이에 서린 상처, 막막함, 절망, 슬픔, 분노, 그것들로 가득 채워진 기억을 안고 살았을 그녀의 애환 옆에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고맙고 위로가 됐다.

 

길원옥 할머니의 투쟁과 삶은 윤미향을 빼놓고 말하기 어렵다. 사진=윤미향 전 의원 페이스북
 

2. 길원옥을 처음 만났던 2002년 그때 정대협

 

내가 길원옥을 처음 만난 것은 2002년이었다. 당시 길원옥은 홀로 인천의 한 영구임대주택에 살고 있었다. 다른 피해자들은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 공개 기자회견 이후부터 1992년에 신고가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 시기에 피해자 대부분을 만났다. 길원옥은 그보다 10년이나 늦게 만난 셈이다.

 

2002년 그해에 정대협은 1991년 말부터 신고를 한 피해자들 중 수요시위에 참석하고 일본 정부 상대의 소송 원고가 되는 등 적극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아울러 외부 공개를 꺼리며 사회와 단절되어 살고 있던 피해자들도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찾을 수 있도록 1대1 사례에 맞는 세심한 지원 활동을 계획으로 세웠다.

 

즉, 당당하게 사회에 자신의 모습과 목소리를 드러내 활동가로 살 수 있도록 길을 만드는 것을 시도했다. 당사자가 나서기를 꺼려하는 의사를 중시하면서도, 혹시 그 꺼려함이 한국 사회 때문이라면 우리가 한국 사회를 열심히 변화시켜 나가겠다는 의지도 전해드리고, 함께 활동가가 될 수 있도록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 보자는 것이었다. 특히 조선 시대뿐 아니라 광복 후 한국 사회에서 '넙데기' '쪼깐이' 등으로 불렸던 여성들이 자신의 이름을 찾는다는 것은 여성 인권 운동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2002년 그해 정대협은 피해자로 신고는 했지만 지역사회에서 피해를 숨긴 채 홀로 살고 계신 분들에 대해 지역사회 시민단체 혹은 시민들과 1대1 짝꿍을 맺어드리는 활동을 본격화했다. 내 동네에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곁에서 누군가 피해자를 응원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드리고 싶었다. 작은 동네에서 본인이 피해자임을 드러내도 지역사회가 피해자를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지하고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함으로써 피해자와 지역사회가 함께 치유되는 그런 과정을 만들어가고 싶었다.

 

이를 위해 우선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구, 선후배, 목회자, 시민단체 분들을 접촉했다. 만남 이후 지역으로 직접 찾아가 피해자들의 삶과 유의할 점 등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고, 지역 분들과 함께 피해자들을 방문하여 소개하고 '라포' 형성이 되도록 연결해 드렸다. 그 후 지역 분들이 피해자들을 정대협보다 더 자주 찾아가서 뵙고, 할머니의 생활 불편을 해결하는 활동(청소·도배 등)도 하고, 할머니의 생신을 챙겨드리고, 지역 나들이도 함께 가는 등 지역사회가 결코 피해자들을 '주홍글씨'를 입혀서 보고 있지 않다는 노력을 했다.

 

정대협에서는 그 활동에 소요되는 경비를 지원하고 지역 활동에 동행하기도 하는 등 한 분 한 분의 사례에 맞는 복지 활동을 벌였다. 그때부터 전남 해남에 피해자를 지원하는 '해남나비' 모임이 만들어져 활동을 시작했고, 통영·거제, 마산·창원·진해(마창진 시민모임), 전북, 충북 청주 등의 지역에서도 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들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대구의 경우에는 정대협활동 이전에 이미 단체가 결성되어 대구·경북 지역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작은 꿈은,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피해자들의 증언을 채록해 '구술 증언집'을 발간하는 것이었다. 1993년 정신대연구소와 정대협이 공동으로 '위안부' 할머니 19명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증언 1집을 냈다. 이후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2001년에는 2000년 '일본군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준비하면서 만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모아 5집까지 피해자 63명의 증언을 실어 출간했다.

 

정대협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피해자들 중 구술이 가능한 분들의 이야기도 계속 증언집으로 담아 기록으로 남기자는 뜻을 세우고 증언팀을 구성했다. 증언팀에는 나를 포함하여 정대협 상근활동가들이 직접 참석하였다. 증언팀은 그동안 출간한 5권의 증언집에 포함 안 된 할머니들 76명의 기초자료를 분석하고, 구술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피해자 리스트를 정리하여 접촉을 시도하였다. 우선 정대협 활동가들이 직접 피해자들을 찾아뵙고 증언집 발간 활동을 말씀드렸다. 증언팀이 찾아와도 된다는 동의를 하신 분들을 찾아뵙기 시작했다.

 

길원옥도 그 피해자 중 1인이었다. 길원옥은 다른 피해자들보다 한참 늦은 1998년에서야 피해 신고를 하게 되었고, 여성가족부로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생활안정지원법>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뿐, 길원옥은 정대협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길원옥 할머니를 찾아뵙고 정대협의 계획을 설명드리기 위해 내가 직접 찾아 나섰다.

 

그날, 할머니는 "나는 죄 많은 여자"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혹시 할머니가 훗날 갖게 되신 기독교 신앙 때문인가?'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 '할머니는 죄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주기를 바란다는 그런 강한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가 죄 많은 여자가 아니라, 할머니를 그렇게 만든 일본 정부와 군대,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한국 정부와 한국 사회가 죄가 많은 거죠. 저도 할머니께 죄인입니다." 나에게서 그 말이 나오자마자 마치 소녀같이 수줍은 표정을 지으시며 웃으시던 할머니를 잊을 수가 없다. '그동안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구나.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거구나.'

 

할머니는 증언집 발간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주셨고, 그에 따라 증언팀 내에서 길원옥 담당팀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하여 길원옥 할머니에 대해 그때부터 정대협 생존자 복지 활동으로서의 방문, 증언팀의 구술을 청취하기 위한 방문이 각각 이루어졌다.

 

2016년 1월 28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의 피해자 쉼터에서 길원옥(왼쪽), 김복동 할머니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민변은 이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안을 발표한 한일 외교장관 회담이 국제 인권 기준에 부합하는지 확인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유엔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2016.1.28. 연합
 

3. 일본군 '위안부'가 된 길원옥

 

"나는 열세 살에 평양, 집을 떠나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길원옥입니다. 처음에는 만주로 끌려갔다가 나중에는 석가장인가 하는 데로 끌려갔어요.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간다고 해서 배를 탔는데, 평양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인천항으로 오는 것이었어요. 그때가 내 나이 열여덟이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러고 살고 있습니다."

 

길원옥은 1928년 음력으로 10월 23일에 태어났다. 양력으로 날짜를 계산해 보면 1928년 12월 4일이다. 열세 살, 1940년에 만주로 끌려갈 당시 계절이나 시기를 정확하게 몇 월쯤인지 기억 못하고 있지만, 만으로 11~12세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고물상을 하던 아버지가 도둑맞은 물건을 샀는데, 그게 그만 들통이 나서…." "누군가 나에게 가막소 벌금이 이십 원인가, 십 원인가 하는 그런 소리를 들었어요."

 

아직 철부지였던, 까불쟁이 길원옥은 공장에서 기술도 가르쳐주고 돈도 벌게 해준다는 말에 가족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을 떠나 기구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되었다.

 

"저는 아직 생리도 없었던 아이였습니다. 군인들에게 당할 때 피가 나왔습니다만, 저는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먼저 와 있었던 언니들이 '병이 아니야' 하고 가르쳐 주었지만, 그런 것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모를 만큼 어린아이였습니다." "생리가 나올 때는 그래도 좀 봐주겠지 했어요. 피가 나오니까 봐주겠지… 뭐라 할 말이 없어."

 

겪지 않은 사람들이 그 치욕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피해자 대부분이 그랬지만 특히 나이가 어린 길원옥에게 위안소에서의 성폭력은 감당하기 무지막지한 일이었다.

 

"반항을 하다 일본군도로, 빼지 않고 그냥 내리쳤으니까 그렇지, 빼가지구 쳤으면 죽었을 텐데…. 시방까지도 이렇게 흉터가 크니, 옷이 피에 젖어서 뱃겨내지를 못하고 찢어냈다니까." "상상을 하면 나도 사람인데 왜 그런 사람들한테 원한을 안 가지갔어요. 가지지. 그래서 난 도대체가 그 사람들을 상상을 하고 싶지가 않아요. 잊을라 그래요."

 

그런데 길원옥은 만주에서 '요꼬네'라는 성병에 걸렸고, 위안소 관리인은 그 병을 치료한다고 하면서 나팔관을 묶어버렸다. 당시에는 사실도 몰랐다가 해방 후 산부인과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평생 아이도 낳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 일로 인해 길원옥은 더 이상 군인을 상대할 수 없게 되었다. 위안소 관리인은 사람을 붙여 길원옥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집에 돌아온 후에 병이 완치되었다.

 

그런데 길원옥은 다시, 이번에는 중국 석가장이라는 곳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되어야 했다. 두 번째 간 곳도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군인을 상대하는 위안소였다는 것을 석가장에 도착한 후 알게 되었고, 자기 자신이 바보였다고 탓했다. 다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전쟁이 끝났지만 끝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석가장에서 마지막 귀환선을 타고 인천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향길이 아니었다. 트럭에 타라고 하여 탔더니 서울 장충단 공원에 와서 내려줬다고 한다.

 

"해방이라고 했지만 좋은 것도 모르겠고, 다른 사람들은 만세를 외치는데 저는 어디 숨을 곳이 없을까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했어요." "그것을 숨기고 사느라고 얼마나 가슴 졸이며 살았는지 몰라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하루 앞둔 13일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 세워진 고인이 된 피해 할머니들 흉상 앞에 꽃이 놓여 있다. 2025.8.13. 연합
 

4. 해방, 그러나 분단

 

종전은, 광복은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위안소에서의 탈출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터, 일본군 '위안부'로서의 삶의 연장이었고, 분단과 가부장적 한국 사회가 가하는 폭력과 억압 속에서 '해방'되지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가해국 일본 정부는 전쟁터에서 여성들을 사살하거나 버리고 갔고, 위안소에 남아있던 여성들의 경우 중국군 혹은 러시아군에 의해 '일본 여자'라고 총격을 당하기도 했다. 현지인들이 일본 여자가 아니고 조선에서 끌려온 여자라고 하여 겨우 총격을 피해 살아났던 수원의 안점순 할머니는 같은 위안소에 있던 여자들이 그렇게 죽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미 연합군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끌려온 '위안부'들에게 가한 집단 강간, 성노예 등 인권유린 범죄를 파악하고 있었고 전쟁 막바지에 사살, 유기 등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음을 수집했음에도 침묵하고 일본 정부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가해자의 범죄는 한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은폐된 채 면죄부가 주어져 있었다. 많은 피해자가 전쟁터에서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으며, 집으로 돌아온 피해자들의 경우에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로 다녀온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했거나, 어쩔 수 없이 부모에게 말한 경우에도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강요당했다.

 

더욱이 연합군은 전후 처리 과정에서 남북 분단이라는 상처를 만들었다. 유럽에서는 전쟁 도발국인 독일이 분단되었는데, 아시아에서는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분단되지 않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이 분단된 것이다. 만약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화가 없었다면 남북 분단은 연합군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논의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분단은 미·소의 책임도 예외일 수 없지만 일제 식민지화가 그 근본 책임이다. 분단은 한반도가 식민지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볼 수 없는 상징이기도 하다.

 

분단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끝나지 않은 전쟁을 만들었다. 분단 뒤 이남에 '해방군'으로 주둔한 미군과, 미군을 지원하는 한국 정부에 의해 일부 피해자들은 다시 성착취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서 미군 '위안부' 피해자가 된 것이다. 사회는 그들을 '더러운 여자'들이라고 손가락질하고 공격하며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했지만, 당시 정부는 여성들이 벌어들이는 외화로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며 이를 '애국적 행위' '개인적 외교활동'으로 장려하고 칭송했다.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서 다시 미군 '위안부' 피해자가 되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끼여 살아야 했다.

 

분단은 고향과 집이 분단선 이북에 있는 남쪽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또한 분단선 이남에 고향과 집이 있는 북쪽의 피해자들이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여전히 광복되어가는 여정에 놓이게 했다. 길원옥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열세 살에 집을 떠나 90살이 다 되도록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부모와 다섯 명의 형제가 있습니다만, 붙잡혀간 그 날 이후 지금까지 못 만나고 있습니다." "평양집 주소는 평양시 서성리 76번지 26호인데, 서성구는 평양 시내, 암동 제1번지가 가막소(감옥소)인데, 가막소 바로 뒷동네가 나 사는 데 였어요. 보통강하고 가까웠지요." "우리 아버지 성함은 길창봉, 어머니는 김두칠, 오빠는 길원도, 원세, 언니는 원죽, 동생은 원학이."

 

위안소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는 많은 부분을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것을 기억했더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거예요"라며 말하기를 회피하다가도 동네와 가족들 이야기를 할 때에는 얼마나 목소리가 또렷또렷하고 힘이 있던지…. 아마도 어린 나이에 가족과 이별하여 할머니가 될 때까지 여전히 가족을 그리워하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함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2014년, 유엔인권이사회 의장실을 방문하여 세계 1억인 서명을 전달할 때도 길원옥은 "제 고향은 평양이구요, 나이 열세 살에 나왔습니다"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2020년에도 길원옥은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살아있을 때 단 한마디라도 일본 정부에게 진정한 사죄를 받는 거, 그리고 평양집으로 가는 거, 그것이 소원"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내가 죽기 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향으로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말씀하실 때, 나는 할머니께 약속을 했었다. "그럽시다. 갑시다. 제가 모시고 갈게요"

 

길원옥 할머니뿐 아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우 할머니에게도 해방은 되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고향이 함경남도 삼수군 금수면 용천리이다. 나눔의집에 사시던 김순옥 할머니는 집이 평양 모란봉 앞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도 역시 중국으로 어린 나이에 끌려갔다가 전쟁터에 버려져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2006년에야 중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셨다. 그러나 그것은 귀향이라 할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것일 뿐, 사망 전까지 가족도, 일가친척도 아무도 만날 수 없었으며, 결국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셨다. 평양시 기림리 139번지가 집인 김화선 할머니, 함경남도 원사시 서구동 원산역전 호떡집이 집인 박순희 할머니, 평양시 사항리 1-6번지가 집인 김은례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박영숙, 김향순, 이춘례, 조순덕, 이선옥 할머니도 분단으로 인해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셨다.

 

이러한 할머니들의 절절한 사연으로 인해 나는 고향이 조선인 피해자 명단을 작성하여 남북교류가 활발할 때, 정부에 위안소에서 돌아온 후 분단 때문에 집으로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들이 가족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인도적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진전되지는 못했다.

 

북에서 공개된 피해자들 중에도 고향이 남쪽인 피해자들이 많다. 함경남도 신포리에 사시다 돌아가신 박복이 할머니는 경남 진주에서 열일곱 살에 대만으로 끌려간 후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강원도 통천군 미평리에 사시다 돌아가신 최순환 할머니는 서울시 로남동이 집인데, 열여섯 살에 중국으로 끌려갔지만 분단으로 인해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황해남도 연안군 소아리에 사시다 돌아가신 강길순 할머니는 전북 김제 출신이다. 함경남도 단천시 신동리에 사신 곽금녀 할머니는 충남 천안군 백이리에서 열일곱 살 때 중국 목단당으로 끌려가셨다. 함경북도 화성군 극동로동지구에 사시던 리복녀 할머니는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북수리에서 중국 목단강으로 끌려가셨다.

 

이 외에도 북의 조대위(조선 일본군성노예 및 강제련행보상대책위원회)가 펴낸 증언집에 수록된 피해자들의 출신 지역을 보면 이남 출신이 17명이나 된다. 거의 절반이 이남에 집이 있는 것이다. 그 지역을 보면 △전라도 8명 △경상도 4명 △서울 경기 4명 △충청도 1명이다.

 

2010년 4월 7일 오후 서울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 912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에서 길원옥 할머니가 발언하고 있다. 2010.4.7. 연합
 

5. 나그네 길원옥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피해자들은 '가족' 중심으로 모든 사회 문화가 조성되고 행정이 이루어지던 한국 사회에서 '나그네'처럼 떠돌이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지내던 피해자들의 경우에도 '보호자'인 가족, '남편' 혹은 '자식'이 없음으로 인해 다른 가정 있는 남자들에게 '집적거림'을 당하거나 성적인 희롱감이 되기도 했다.

 

그것이 싫어서 김복동 할머니의 경우에도 부산 다대포에서 장사를 할 때 한 남자와 함께 살았다. 그 남자가 곧 병에 걸려 오랜 시간 병치레를 하고 돈을 벌어야 했지만 가게에 그냥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남자들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바람막이가 되었다고 했다. 늘 신발장에 남자 신발을 놓아두었다는 할머니들도 있다.

 

일가친척 아무도 없는 길원옥의 분단 이남에서의 생활은 어땠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길원옥이 인천항으로 왔을 때 18세(만 16세)였다. 아직 청소년, 어린 길원옥은 해방과 함께 다시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이남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이로 지내는 신세가 됐다.

 

해방 후 길원옥은 인천항에 내려 서울 장춘단 집결지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천안으로 갔다. 첫 번째 정착지였다. "어떤 아주머니가 자기를 따라가자고, 가면 옷도 입혀주고 먹여도 주고, 돈도 벌게 해준다고. 그래서 천안으로 갔어요." 길원옥은 술집에 취직을 하여 노래 부르고 술따르는 '접대부'로 살았다. 천안에서 다시 온양으로. 그리고 포천으로. "색시들 놓고 술 파는 집에서 술 따르는 일이었지." 길원옥은 '술 따르는 일'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아직 어린 길원옥에게는 끝나지 않는 전쟁이었다.

 

그 경험 끝에 길원옥은 이렇게 말한다. "왜 동기간이 필요하고 부모가 필요하냐, 일가친척이 없으면은 울타리가 없으면은 아무리 힘을 써야 힘을 쓸 수가 없어. 친구가 암만 저길 해도 친구는 친구지." 여기까지가 길원옥이 10대, 20대에 도움이 될 가족도 친척도 없이 홀로 겪어낸 일이었다.

 

결국 길원옥은 서른 살 즈음, 아들을 입양하여 키우며 이남을 떠돌아다니는 것을 멈추고 이산가족 신청도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돈이 되는 것은 다 했어요. 번데기 장사, 배추 장사, 밀주 장사, 암달러 장사까지."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 아들을 신학대학에 보내고, 대학원까지 보내 목회자로 만들었다.

 

길원옥은 일흔 살이 넘어 정대협을 만났고, "내가 이런 대접을 받으며 살날이 있을 줄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하시며 함께 사는 손영미 소장님에 대해서는 "내 꺼 내 꺼" 하시다가 "소장님은 저에게 친정엄마 같고, 또 때로는 시엄마 같고, 딸 같고 그래요" 하셨다. 비로소 열세 살 길원옥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면서 빼앗긴 '돌봄'을 받는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2004년 5월 23일 일본의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제2차 국제연대협의회에 참석한 북한 일본군 위안부 리상옥 할머니(왼쪽)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지난 일제시대의 아픔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자 남한 일본군 위안부 길원옥 할머니가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2004.5.23. 연합
 

6. 길원옥과 리상옥의 만남

 

길원옥과 같이 분단 이북이 고향인 피해자들의 '이산'의 아픔은 정대협 활동에 또 다른 숙제를 안겼다. 1991년부터 유엔에서, 일본에서, 독일에서,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 피해자들이 오가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자는 활동은 연대의 힘을 만드는 것도 중요했지만, 피해자들의 가족 만남과 고향 방문 문제를 해결하는 것 역시 중요했다.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에 참석했던 이남의 김은례 할머니가 북의 피해자를 만나서 손을 꼭 맞잡고 서 있는 모습을 뉴스에서 본 길원옥은 자신도 언젠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2004년 5월에는 서울에서 일본의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회의를 개최하였고, 이때 북에서 홍선옥 조대위 위원장 등 대표단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리상옥 할머니가 방남하였다. 그때 길원옥 할머니가 달려 나가 고향에서 오신 리상옥 할머니의 방남을 환영하며 손을 잡고 기뻐하던 모습, 홍선옥 위원장 앞에서 자신이 평양 출신이라면서 가족을 찾고 싶다고 열의를 다해 말씀하시던 모습이 눈에 생생하다. 그 모습은 나에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의 아픔과 마찬가지로 '열세 살에 집을 떠나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길원옥'의 또 다른 아픔을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을 갖게 했다.

 

드디어 2008년 5월 3~7일 동안, 길원옥 할머니를 모시고 평양을 방문하였다. 우리겨레하나되기국민운동본부에서 북을 방문하는 일정에 평양이 고향인 길원옥 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다녀올 수 있었다. 집을 떠난 지 67년 만이었다. 길원옥이 가는 곳마다, 만나는 이북 사람들에게 "혹시 성이 뭐예요?" "혹시 이웃에 길 씨 성을 가진 사람 없나요?" 그렇게 물으면 금방 삼삼오오 모인 북 주민분들 사이에서 열띤 토론이 시작되었다. 무리 속으로 들어가 소맷자락 붙잡던 할머니의 모습이 참 슬프고 아팠다.

 

가끔 길원옥은 엄마에 대한 이야기, 고물상 하시던 아버지 이야기, 아버지보다 더 무서웠던 오빠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때는 어김없이 손가락 끝이 허공을 돌며 평양 시내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특별히 자신을 사랑하고 이뻐했던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는 울음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도 역력했다.

 

"한번 생각하면 아버지가 이름을 안 부르고 '작은네야' 하고 불렀거든. 당신 밥에는 쌀이 몇 알탱이가 들어가지만 다른 사람 밥에는 강냉이하고 수수가 밥이지. 그 흰 쌀밥 나한테 먹이려고. 엄마가 그걸 보고 막 야단을 치지. 아, 아부지가 이렇게 사랑을 했는데, 내가 받은 것만큼 내가 남한테도 베풀어야겠는데, 나는 베풀 데가 없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이미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직도 내 눈에는 평양 보통강변과 을밀대가 눈에 훤하고, 우리 집 서성리 76번지 26호 주변 거리가 영화처럼 떠오르는데… 아버지를 가둬뒀던 감악소가 있던 암동 거리,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아버지가 언제 나오나 기다리고 있는 어린 내 모습도 눈에 보이는데…." "우리 어머니는 참 고왔어요. 머리에 생선이랑 물건들을 이고 장사하러 나가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북녘이 고향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다른 이산가족과 사연이 다르다. 대부분의 이산가족은 한국전쟁 당시 월남해 가족과 헤어졌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제 강점기에 끌려가 해방 뒤 돌아왔으나 38선에 가로막혀 고향으로 가지 못한 경우이다. 일제에 의해 가족과 생이별했고 해방 뒤에는 미국과 소련이 그은 분단선에 막혀 부모, 형제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2020년, 길원옥 할머니와 마지막 새해를 함께 맞이했을 때였다.

 

"할머니, 새해가 됐어요. 올해 소원은 뭐에요?" "소원은 무슨… 다 늙어서… 소원이라면 딱 하나야. 평양 가는 거지."

 

2016년 3월 9일 미국을 방문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오른쪽)가 8일(현지시간) 워싱턴DC 근교의 한 한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난해 말 발표된 한국과 일본 정부 간의 군위안부 문제 합의 내용을 비판하고 있다. 왼쪽은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2016.3.9. 연합
2018년 3월 8일 서울 영등포구 하이서울유스호스텔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주최로 열린 제15차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에서 길원옥 할머니(왼쪽)가 윤미향 정대협 공동대표와 대화 도중 밝게 웃고 있다. 2018.3.8. 연합
 

7. 꿈이었던가? 아, 꿈이었다면 좋겠다

 

나는 길원옥과 20여 년을 동지로 함께 걷는 축복을 받았다. 할머니는 나를 향해 "대장, 대장" 하며 나이도 어리고 젊은 활동가를 존중하고 의지해줬다. 그런 할머니와 달콤한 동지 관계를 맺으며 세계를 순례했다. 긴 순례 캠페인 동안 할머니와 한 방 혹은 한 침대 위에서 잠을 자며 피해 후유증이 할머니를 꿈속에서 어떻게 괴롭히는지도 봤고, 그 모습을 보며 홀로 울기도 했고, 피해자의 고단한 활동에 죄책감도 가지며 그렇게 걸었다.

 

그 여정에서 나는 할머니께 숱한 약속을 했다. 일본 정부가 사죄하고 배상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하던 약속이었다. 또한 끝까지 할머니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할머니가 내 손을 놓아도, 나는 할머니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했다. 마지막 할머니 하늘나라 보낼 때, 할머니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엄하고 따뜻하게 보내드리겠다는 약속도 했다. 열세 살 너무나 어린 길원옥이 걸었던 인생을 생각하며 나는 정말로 그 손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나 스스로도 믿었다. 하지만,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손영미 소장이 5년 전, 할머니와 손을 놓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 검찰과 언론에 의해 손영미가 윤미향과 공모하여 '치매가 걸려 자기 결정을 할 수 없는 길원옥 할머니의 돈을 갈취했다'는 식의 보도들은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활동가들과 맺어진 사랑, 공적인 사명감으로 견디며 살아온 손영미 소장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김복동 할머니도 계시지 않고, 길원옥 할머니도 계시지 않는 지금 분단된 한반도는 나에게 '종북주의자' '빨갱이' '간첩 마누라'라는 꼬리표에 이어 '앵벌이' '사기꾼' '횡령범'이라는 꼬리표까지 붙여주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30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 미국, 독일, 캐나다, 호주, 영국, 프랑스, 스위스,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 등 세계 곳곳을 다녔다. 유엔과 ILO도 여러 차례. 그런데 그런 나에게 대한민국 공안은 '종북주의자'라는 파일명을 붙여 사찰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내가 일본에 들어갈 때마다 한국 공안이 일본 공안에 내 일정을 미리 전달하고, '그 여자 빤스까지 벗겨'라는 지시를 여러 차례 내렸다. 나를 담당했던 전직 국정원 직원은 나보다 늘 하루 먼저 도착해서 내가 공항으로 입국할 때 바로 내 옆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 출장에서 나의 일정은 오로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목적에 집중되었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행사장, 미팅장, 호텔을 반복적으로 오가다 공항으로 출발해서 귀국. 참 인간으로서는 재미없는 삶이라고 할 정도로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들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공간에 한일 공안이 함께 머물렀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2007~2011년까지 4년 동안의 개인 이메일들과 당시 정대협 사무처장이었던 양노자 씨의 개인 이메일 계정을 본인의 동의나 수색 여부 등에 대한 통지도 전혀 없이 수색하고, 혐의가 발견되지 않으니까 종료 후 통지서를 보냈다. 그나마 개인통신보호법이 작동되고 있었기에 사후에라도 보고를 해서 알 수 있었다.

 

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국의 정보기관에서 활동가들을 위협하면서까지 탄압하는 이유가 되었을까? 바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이 분단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여전히 전쟁을 획책하고 그 전쟁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 한미일 공안 정치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2017년 문재인 정부 들어 활동한 '2015 한일 위안부 조사 TF' 단장의 조사 보고 발표에서도 드러난다.

 

"한·일 관계 악화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략에 부담으로 작용함으로써 미국이 양국 사이의 역사 문제에 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외교 환경 아래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 협상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조속히 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았다."

 

이는 내가 국회의원 후보가 되면서 더욱 노골화되었다. 비례대표 후보 신청 소식이 알려지자 가장 먼저 일본 극우 매체가 "그가 국회의원으로 변신하면 위안부 문제로 한국 정부에 대일 강경 자세를 더 강화하라고 촉구할 거라는 분석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이어서 곧바로 한국의 극우 매체 조선일보는 "윤 이사장이 국회의원 당선 가능성이 높은 비례대표 7번을 받게 되자 일본 정부가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기사를 썼다가 후에 삭제했으며, 서울경제도 '시민당 비례7번 예의주시하는 일본 정부'라는 기사를 썼다.

 

"반미 외치던 시민당 비례 윤미향, 딸은 미국 유학, 남편은 보안법 기소자"라는 기사. '돈미향' '앵벌이' '흡혈귀' '악마' 같은 극단적 표현들.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 좌파"라는 국민의힘 허은아 의원 발언 보도. "윤미향은 인류가 낳은 가장 잔인한 악마"라는 서민 교수 인용 기사. '그 돈들은 조총련으로 갔을 것' '파렴치한 위선자' '기생충' '간첩' 등 온갖 막말과 댓글이 신문과 방송, 유튜브, 인터넷에 도배되었다.

 

전 주한 일본대사 무토 마사토시는 JB프레스라는 언론에 <전 위안부의 고발이 벗겨낸 위안부단체 전 대표의 정체>라는 글을 기고하고, 정의연을 "위안부 문제를 이용해 북한과 연계함으로써 일한 대립이 심화하기를 바라는 단체"로 매도했다. 일본의 극우 매체 산케이신문은 기사와 사설을 총동원해서 윤미향의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다. '윤미향' 보도량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일 최다를 갱신했으며,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한 2020년 5월 7일부터 3년간 언론진흥재단 '빅카인즈'에 등록된 54개 언론사에서만 1만 7557건의 기사를 발생시켰다.

 

또한 2023년 8월 30일부터 9월 2일 일본 간토 대진재조선인희생자 추모회에 참석한 것과 관련해서 다시 "윤미향 의원이 친북 조총련이 주최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추도 행사에 참가했다"는 동아일보의 단독기사를 시작으로 52개 언론사에서 일주일간 무려 500여 건의 기사를 쏟아냈다. 이후 앵벌이, 사기꾼 윤미향에 다시 종북주의, 빨갱이,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 기사들로 도배되었고, 당시 대통령이던 윤석열은 직접 '국채를 흔드는 세력'이라 비난하며 살해에 가까운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질세라 윤석열 정당은 "즉각 의원직에서 사퇴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공격했다. 고소·고발도 잇따랐다.

 

이 사건들의 후속 진행은 국회의원직을 떠난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가인 나는 일제 식민지화와 분단 그 경계에 아직도 서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가 16일 별세했다. 향년 97세. 사진은 2019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복동 할머니 빈소를 찾은 길 할머니의 모습. 2025.2.17 연합
19일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제1688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시민들이 길원옥 할머니 영정에 헌화하고 있다. 2025.2.19. 연합
 

8. 광복 80주년, 길원옥의 해방을 위하여

 

앞에서 살펴봤듯이 우리에게 광복 80주년은 동시에 분단 80주년으로 기억되고 있다. 분단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정한 광복이라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건이 수시로 발생한다. 피해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전쟁의 위협은 여전히 한반도 안에서 진행형이다. 분단의 장기화, 고착화로 인해 남북은 상호 적대 국가로 규정한 채 싸워왔다.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 그 갈등은 극에 달했다. 남북관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전쟁을 일으켜 권력을 지키려는 최악의 술수까지 있었음이 최근 드러나고 있다.

 

이런 윤석열을 부추기며 일본과 미국 정부는 그들의 군사적, 정치적 욕망을 채우기 바빴다. 한국의 하늘과 바다, 땅은 자위대까지 끌어들인 거대한 미군의 군사 연습지로 전락했다. 영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지난 20년간 한미 군사 훈련이 132회 진행되었으며, 이는 아태지역 국가들 중 가장 많은 횟수다. 윤석열 정부 들어 2023년에는 60회 이상 훈련이 진행되었고, 2024년에는 한미·한미일 군사 연습이 총 109회 275일 동안 진행되었다. 광복 80주년, 전후 80년에도 결코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는 현실을 마주한다.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분단 이남의 피해자들, 분단 이북의 피해자들. 그들의 유해라도 고향 땅을 밟아볼 수 있도록 뒤늦은 노제와 장례식을 꿈꿔본다. 유엔의 인권침해 피해자 배상 원칙이 정하고 있는 '원상회복' 조치는 피해자들이 이미 고인이 된 상태에서도 끝나지 않는다. 고향을 방문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도록, 일제 식민지로 인해 나눠진 남북, 미국과 소련이 갈라놓은 한반도를 하나로 만드는 일에 남북과 일본의 시민들이 함께 연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80주년 광복절 경축사
“9·19 군사합의 선제적·단계적 복원“
“일, 신뢰 훼손되지 않게 노력해주길“

 

 
 
이재명 대통령이 1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80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
 

 

이재명 대통령은 15일 “현재 북측의 체제를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일체의 적대행위를 할 뜻도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며 “남북 간 우발적 충돌 방지와 군사적 신뢰 구축을 위해 ‘9·19 군사합의’를 선제적으로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윤석열 정부 3년 동안 최악의 수준으로 악화된 남북 대화와 협력의 물꼬를 트기 위한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80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분단으로 인해 지속된 남북 대결은 우리 삶을 위협하고, 경제발전을 제약하고, 나라의 미래에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며 “낡은 냉전적 사고와 대결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한반도의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리공영·유무상통 원칙에 따라 남북 주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교류 협력 기반 회복과 공동성장 여건 마련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날 이 대통령 경축사의 주된 화두는 ‘공존’과 ‘평화’였다. 12차례 평화를 언급한 이 대통령은 지난 정부에서 악화된 남북관계를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먼 미래를 말하기에 앞서 지금 당장 신뢰 회복과 대화 복원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라며 “국민주권 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전단 살포 중단,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등의 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또 “우리 정부는 실질적 긴장 완화와 신뢰 회복을 위한 조치를 일관되기 취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남북기본합의서와 6·15 공동선언, 10·4 선언, 판문점 선언, 9·19 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의 기존 합의를 존중하는 동시에 그동안 약속해온 대로 “9·19 군사합의를 선제적·단계적으로 복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평화로운 한반도는 ‘핵 없는 한반도’”라며 “남북, 미북 대화와 국제사회의 협력을 통해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나가면서,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발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공감대를 넓혀나가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로 나아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한·일 양국은 오랫동안 굴곡진 역사를 공유해 왔기에 일본과 관계를 정립하는 문제는 늘 중요한 과제”라며 “우리 곁에는 여전히 과거사 문제로 고통받는 분들이 계시다. 입장을 달리하는 갈등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본 정부가 과거의 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양국 간 신뢰가 훼손되지 않게 노력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오는 23~24일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 대통령이 구체적인 과거사 언급을 피한 채 미래를 함께 강조한 것이다.

 

특히 이 대통령은 한일 양국의 경제협력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60년 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양국 국민 간 왕래는 1만여 명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연간 1200만 인적 교류의 시대에 진입했다”며 “한국과 일본이 산업 발전 과정에서 함께 성장해 온 것처럼, 신뢰를 기반으로 미래를 위해 협력할 때 초격차 인공지능 시대의 도전도 능히 헤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국내 정치에 대해서는 “낡은 이념과 진영에 기초한 분열의 정치에서 탈피해, 대화와 양보에 기초한 ‘연대와 상생의 정치’를 함께 만들어갈 것을 거듭 촉구한다”며 ‘통합’의 정치를 약속했다. 이 대통령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은 분단을 빌미 삼아 끝없이 국민을 편 가르며 국론을 분열시켰다”며 “이제 우리 안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증오와 혐오, 대립과 대결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국민의 삶과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할 뿐이라는 것이 지난 80년간 우리가 얻은 뼈저린 교훈”이라고 말했다.  < 엄지원 기자 >

 

다음은 이 대통령 경축사 전문.

존경하는 5,200만 국민 여러분,

700만 재외동포 여러분,

그리고 독립유공자와 유가족 여러분,

80년 전 오늘, 우리는 빼앗겼던 빛을 되찾았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을 감격으로 환하게 밝힌 그 빛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방에 대한 불굴의 의지, 주권회복의 강렬한 열망으로

스스로를 불사른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일궈낸 것이었습니다.

광복절은 단지 독립을 이룬 날이 아닙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의 미래를 정하고,

우리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되찾은 날입니다.

지난 80년 동안 대한민국은 눈부신 성취를 이뤘습니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냈고,

군사력 5위, 경제력 10위권 선진 민주국가로 우뚝 섰습니다.

 

김구 선생이 염원했던 문화강국의 꿈도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인이 우리말로 노래 부르고,

영화, 드라마, 만화, 문학 등

우리가 만든 콘텐츠를 즐기고 있습니다.

다시는 빼앗기지 않을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독립투사들과 애국선열들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취였습니다.

 

음수사원(飮水思源),

물을 마실 때 그 물의 기원을 생각한다는 말처럼,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것은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응당한 일입니다.

자랑스러운 항일투쟁의 역사를 기리고,

독립유공자의 명예를 지키는 것은

우리 공동체의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지키는 길입니다.

독립투쟁의 역사를 부정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하는 행위는

이제 더 이상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두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외면한다면

또 다른 위기가 닥쳤을 때 과연 누가 공동체를 위해 나서겠습니까?

공동체를 위해 특별한 희생을 치르신 분들에 대하여 예우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 공동체도 더욱 튼튼해질 것입니다.

 

우리 정부는 독립투쟁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국민과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생존 애국지사분들께 각별한 예우를 다하고,

독립유공자 유족의 보상 범위도 더 넓히겠습니다.

해외 독립유공자 유해봉환을 적극 추진하고,

미서훈 독립유공자들을 찾아내어

모두가 합당한 예우를 받을 수 있게 하겠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의 굴곡진 역사는 ‘빛의 혁명’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이었습니다.

빼앗긴 빛을 되찾고, 그 빛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3.1혁명의 위대한 정신이 임시정부로 이어지고,

한반도 삼천리 방방곡곡을 넘어, 온 세계에서

독립투쟁의 불길로 번지며

마침내 우리는 다시 빛을 찾았습니다.

분단과 전쟁의 캄캄한 절망 속에서도

우리 국민은 희망을 놓지 않았고,

독재의 엄혹한 추위 속에서도 소중한 빛을 지켜냈습니다.

4.19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으로

민주화의 빛을 환하게 밝혔고,

세계사에 없는 두 번의 무혈 평화혁명으로

이 땅이 국민주권이 살아있는 민주공화국임을 만천하에 선언했습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까지 이어진 ‘빛의 혁명’은

일찍이 타고르가 노래한 ‘동방의 등불’이

오색 찬란한 응원봉 불빛으로 빛나는 감격의 순간이었습니다.

어둠이 있기에 빛의 소중함을 알았고,

빛이 있기에 어둠에 맞설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광복으로 찾은 빛을 다시는 빼앗기지 않도록,

독재와 내란으로부터 지켜낸 빛이 다시는 꺼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함께 지켜냅시다.

그것이야말로 ‘빛의 혁명’의 진정한 완성이며,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에 화답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선조들은 고난 속에서도

부강한 나라,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동양의 평화를 역설했고,

침략의 아픔에도 높은 문화의 힘을 염원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분단은

이 간절한 염원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분단 체제는 국토를 단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장벽이 되어 우리 국민을 갈라놓고 있습니다.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은

분단을 빌미 삼아

끝없이 국민을 편 가르며 국론을 분열시켰습니다.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국민주권을 제약한 것도 모자라

전쟁의 참화 속으로 국민을 몰아넣으려는 무도한 시도마저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 안의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선조들이 바라던 나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증오와 혐오, 대립과 대결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고,

국민의 삶과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할 뿐이라는 것이

지난 80년간 우리가 얻은 뼈저린 교훈입니다.

 

분열과 배제의 어두운 에너지를

포용과 통합, 연대의 밝은 에너지로 바꿀 때

우리 사회는 더 나은 미래로 더 크게 도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언제나 위기 앞에서

작은 차이를 넘어 더 큰 하나로 뭉쳤습니다.

나라 잃은 슬픔을 딛고 목숨 바쳐 독립을 쟁취해 낸 것도,

전쟁의 폐허를 딛고 눈부신 산업화를 이뤄낸 것도,

금 모으기로 IMF 외환위기를 극복해 낸 것도,

무장병력을 동원한 내란에서 헌정질서를 지켜낸 것도

바로 우리 국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정치는

우리 국민의 기대와 눈높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정치문화를 바꿔야 합니다.

정치가 사익이 아닌 공익 추구의 기능을 회복하고,

국민이 정치를 걱정하는 비정상적 상황을 끝낼 때

우리 안에 자리 잡은 갈등과 혐오의 장벽도 사라질 것입니다.

낡은 이념과 진영에 기초한 분열의 정치에서 탈피해

대화와 양보에 기초한 연대와 상생의 정치를 함께 만들어갈 것을

이 자리를 빌려 거듭 제안하고 촉구합니다.

선조들이 바라던 부강한 나라, 함께 잘사는 나라,

국민주권이 온전히 실현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향해 함께 손잡고 나아갑시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분단으로 인해 지속된 남북 대결은

우리 삶을 위협하고, 경제발전을 제약하고,

나라의 미래에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낡은 냉전적 사고와 대결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한반도의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할 때입니다.

적대 상태의 지속은 남과 북 주민 모두에게

아무런 이익이 되질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평화가 흔들릴 때 어떤 불행이 생기는지

우리는 이미 지난 역사를 통해 가혹할 정도로 체험했습니다.

평화는 안전한 일상의 기본이고,

민주주의의 토대이며,

경제 발전의 필수조건입니다.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보다,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 즉 평화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숱한 부침 속에서도 이어지던 남북 대화가

지난 정부 내내 끊기고 말았습니다.

엉킨 실타래일수록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풀어야 합니다.

먼 미래를 말하기에 앞서

지금 당장 신뢰 회복과 대화 복원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신뢰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만들어집니다.

국민주권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전단 살포 중단,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등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정부는 실질적 긴장 완화와 신뢰 회복을 위한 조치를

일관되게 취해나갈 것입니다.

 

남과 북은 서로의 체제를 존중하고 인정하되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의 특수관계입니다.

남북기본합의서에 담긴 이 정신은

6.15 공동선언, 10.4 선언, 판문점 선언, 9.19 공동선언에 이르기까지

남북 간 합의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기존 합의를 존중하고,

가능한 사안은 바로 이행해 나갈 것입니다.

우선, 현재 북측의 체제를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일체의 적대행위를 할 뜻도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특히, 남북 간 우발적 충돌 방지와 군사적 신뢰 구축을 위해

‘9.19 군사합의’를 선제적 단계적으로 복원해 나가겠습니다.

나아가 공리공영·유무상통 원칙에 따라

남북 주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교류 협력 기반 회복과 공동성장 여건 마련에 나서겠습니다.

 

광복 80주년인 올해가 대립과 적대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공존과 공동성장의 한반도 새 시대를 함께 열어갈 적기입니다.

신뢰를 회복하고, 단절된 대화를 복원하는 길에

북측이 화답하길 기대합니다.

 

한편으로, 평화로운 한반도는 ‘핵 없는 한반도’이며,

주변국과 우호적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한반도입니다.

비핵화는 단기에 해결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어려운 과제이나,

남북, 미북 대화와 국제사회의 협력을 통해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나가면서,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발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공감대를 넓혀나겠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올해는 광복 80주년이자 한일수교 60주년입니다.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로 나아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입니다.

한·일 양국은 오랫동안 굴곡진 역사를 공유해 왔기에

일본과 관계를 정립하는 문제는 늘 중요한 과제입니다.

우리 곁에는 여전히 과거사 문제로 고통받는 분들이 계십니다.

입장을 달리하는 갈등도 존재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독립지사들의 꿈을 기억합니다.

가혹한 일제 식민 지배에 맞서면서도

언젠가는 한·일 양국이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던 선열들의 염원을 이어가야 합니다.

 

일본은 마당을 같이 쓰는 우리의 이웃이자

경제 발전에 있어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중요한 동반자입니다.

60년 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양국 국민 간 왕래는 1만여 명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연간 1천2백만 인적 교류의 시대에 진입했습니다.

우리의 국력 또한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산업 발전 과정에서

함께 성장해 왔던 것처럼,

우리 양국이 신뢰를 기반으로 미래를 위해 협력할 때

초격차 인공지능 시대의 도전도 능히 헤쳐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국익중심 실용외교의 원칙으로

셔틀외교를 통해 자주 만나고 솔직히 대화하면서

일본과 미래지향적인 상생협력의 길을 모색하겠습니다.

신뢰가 두터울수록 협력의 질도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일본 정부가 과거의 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양국 간 신뢰가 훼손되지 않게 노력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럴 때 서로에게 더 큰 공동 이익과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지리라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는 지금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습니다.

공급망 재편과 통상 질서의 급격한 변화,

첨단기술 경쟁에 따른 산업대전환,

기후위기로 인한 에너지 전환의 복합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가야 합니다.

한미 관세협상은 하나의 파도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또 다른 파도가 시시각각 밀려올 것입니다.

급변하는 질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국가의 미래가 흔들리고 국민의 삶이 위협받게 됩니다.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따라잡지 못하고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치이다 마침내 국권을 빼앗겼던

120년 전 을사년의 과오를 되풀이할 수는 없습니다.

2025년 을사년은 그때와 달라야 합니다.

높은 파도에 휩쓸려 난파되느냐,

위기를 기회로 바꿔 도약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한걸음 뒤처지면 고단한 추격자 신세이지만

반걸음 앞서가면 무한한 기회를 누리는 선도자입니다.

반도체, 인공지능 등 첨단과학 기술을 육성하여

변화에 적극 대응해야 합니다.

에너지 고속도로를 비롯한 에너지 전환의 속도를 높여

미래를 앞장서 열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문화도 더욱 갈고 닦아

소프트 파워로 세계를 선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새로운 100년의 도약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지만,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되찾은 자주독립의 빛이,

우리 국민이 이룬 민주주의의 빛이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우리 국민의 저력이 다시 발휘된다면,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걸어온 것처럼,

우리가 나아갈 길도 잃지 않고 찾아갈 수 있습니다.

세계를 선도하는 대한민국,

평화와 번영이 가득한 나라,

국민주권의 빛이 꺼지지 않는 나라로 함께 갑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