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짙어지는 국정원의 계엄 사전 기획 의혹

 

총선 전 민간인 불법 사찰과 사전 계엄 검토?
국정원의 어두운 역사 – 간첩 조작과 공안정국
윤석열의 내란 준비와 도구가 된 종북 프레임

 

계엄 벌어진 그날 밤, 국정원의 수상한 움직임
실세 홍장원의 과거 행적과 특검 기소의 충격
시민 저항으로 막은 내란과 국정원 개혁 과제

 

민주당 윤건영 의원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중대한 내용을 폭로했다. 국정원이 계엄 선포 훨씬 전인 2024년 초부터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김민웅 촛불행동 대표 등 30여 명의 민간인을 불법 사찰하고, 그 결과를 매주 윤석열 대통령실에 보고했다는 것이다. 계엄을 선포하기 3개월 전인 2024년 9월에는 '계엄상황시 대공수사권 행사 가능 여부 검토'라는 제목의 문건까지 작성했다고 윤 의원은 고발했다.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이 특정 부서나 내부 보고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내용은 국정원 모든 부서에 조직적으로 배포됐고, 각 부서는 이에 대응하는 더 구체적 문건들을 준비했다고 한다. 하나의 부서가 아니라 조직 전체에 대한 동원 시도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를 근거로 윤건영 의원은 "국가정보원이 불법 계엄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주도적으로 준비했다"고 지적했고, 한발 더 나아가 국정원이 "비상계엄의 최초 기획자일 수 있다"는 파격적 주장까지 내놓았다. 

 

 여당 정보위 간사로 내정된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이 19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 정부 국정원의 계엄 사전 공모 및 조직적 계엄 가담 의혹과 관련해 발언하고 있다. 2026.8.19 연합뉴스

 

이것은 결코 근거 없는 억측이 아니며 충분히 설득력 있는 추정이다. 왜냐하면 국정원은 이 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핵심적인 비밀 정보기관이자, 동시에 가장 오랜 억압적 국가기구였기 때문이다. '반국가 세력', '종북 좌파'라는 프레임을 생산해낸 원조가 바로 이 조직이며, 국가보안법을 무기 삼아 숱한 간첩 조작 사건을 만들어내고 그때마다 공안 정국을 조성해온 어두운 역사를 갖고 있다.

 

유신 시절 중앙정보부가 저지른 인혁당 재건위 조작 사건이나 김대중 납치 사건에서부터, 국가안전기획부 시절의 각종 간첩단 조작에 이르기까지, 이 기구의 이름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그 뿌리는 숨길 수가 없었다.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군사독재자들, 그리고 그 이후의 보수우파 정권들이 정치적 반대 세력을 억누르는 데 가장 의존했던 권력기관이 바로 이 조직이었다.

 

중앙정보부에서 국가안전기획부로,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꿔왔지만 그 문제점들은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았다는 의심의 시선이 존재해 왔다. 민주당 계열 정권들이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을 법으로 금지하거나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보수우파가 다시 정권을 잡을 때마다 이러한 개혁의 흐름을 되돌리려는 시도가 반복돼 왔다.

 

윤석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검사 출신의 최측근 인사들을 국정원 요직에 배치해 이 기구를 자신의 정치적 무기로 삼으려 했다. 실제로 국정원은 윤석열 정권 초기부터 이른바 '민주노총 간첩단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공안 사건을 잇달아 터뜨리며, 결과적으로 훗날의 내란으로 이어지는 길을 앞장서 닦아놓았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시점부터 윤석열은 공개 석상에서 툭하면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국정원식 언어와 사고방식이 대통령의 입을 통해 그대로 흘러나온 장면으로 보였다. 이런 윤석열이 자신의 정치 생명과 모든 것을 걸고 벌인 절체절명의 쿠데타 시도 과정에서, 정작 자신이 무기삼아 장악해온 국정원의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믿기가 어려웠다.

 

관련 방송 화면 갈무리

 

실제로 12월 3일 계엄의 늦은 밤에 국정원에는 130여 명의 직원이 출근해서 각종 회의를 진행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이 정도 규모의 '심야 비상 소집'이 직원들의 자발적 판단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것은 누구라도 납득하기 어렵다. 여기에 더해, 당시 선거관리위원회 청사로 출동했던 군 간부에게 여인형 방첩사령관이 '곧 검찰과 국정원이 올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증언도 남아있다.

 

방첩사 간부와 검찰청 검사, 그리고 국정원 처장 사이에 오간 통화 기록 역시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국회에서 계엄 해제 결의안이 통과되며 계엄이 해제된 새벽 시간대에도 국정원이 계엄사령부에 인력을 파견하려 한 정황이 최근 추가로 밝혀졌다고 한다. 계엄이 끝난 뒤에도 조직 차원에서 계엄사와의 연결 고리를 유지하려 했다면, 단순한 방관자나 협조자 수준을 넘어서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모든 사실관계를 종합하면, '국정원이 내란을 미리 알고 함께 기획하고 준비했다'는 윤건영 의원의 추정은 상당히 강력한 정황적 뒷받침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그동안 내란 저지에 기여한 인물로 알려져 왔던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에 대한 의문이 다시 제기된다. 홍장원은 30년 가까이 국정원에서 경력을 쌓아온 조직 내부의 핵심 인사이며, 이른바 블랙요원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곧 그가 국정원의 어두운 역사와 관행으로부터 자유로운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박근혜 정권 시절 국정원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 국정원이 저지른 민간인 사찰,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이른바 '댓글부대'를 동원한 여론 공작, 나아가 내란음모 조작 사건과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에 이르기까지, 그가 이러한 흐름과 무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이러한 과거 때문인지 그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에서 밀려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윤석열이 집권하면서 그는 다시 국정원의 주요 보직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무엇보다 그는 명목상 상관인 국정원장 조태용을 사실상 건너뛰어 대통령 윤석열에게 직접 보고하는, 조직 내 '실세 중의 실세'로 통해왔다는 점이 여러 경로를 통해 알려져 있다. 

 

국가정보원법 위반, 직무유기, 위증 등의 혐의를 받는 조태용 전 국가정보원장이 11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2025.11.11. 연합뉴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윤석열이 쿠데타를 감행한 직후 국정원장인 조태용이 아니라 굳이 홍장원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도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렵다는 말이 있었다. 또한 윤건영 의원의 지적대로 '국정원이 내란을 미리 알고 함께 기획하고 준비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조직의 2인자였던 홍장원만 이 흐름에서 배제된 채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내란이 벌어진 그날 밤 홍장원이 구체적 지시를 내리고 역할을 수행했다는 증언과 증거들이 드러나면서, 최근 종합특검이 그를 조태용과 함께 내란 혐의로 정식 기소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소식은 그동안 홍장원을 '윤석열의 위법한 지시를 거부하고 내란을 막아내는 데 기여한 용기 있는 내부고발자'로 기억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함께 의문을 안기고 있다.

 

그가 처음부터 내란에 반대했던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내란에 일부 발을 담그고 있다가 상황이 실패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어느 순간 태도를 바꿔 돌아섰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12월 3일 밤의 쿠데타를 막아낸 진짜 힘이, 목숨을 걸고 국회와 거리로 뛰쳐나온 평범한 시민들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해주는 이야기가 된다.

 

바로 그 시민들의 힘이 민주당을 비롯한 정치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국회에서 신속하게 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키도록 만들었고, 동시에 내란 세력 내부에서도 균열과 이탈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돌이켜보면 12월 3일 직후에도 홍장원의 일부 진술에는 석연치 않은 대목이 존재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체포 대상자 명단을 받아 적으면서 민주노총 양경수 위원장의 이름을 잘 몰랐다고 했었다.

 

그러나 국정원의 핵심 간부가, 이 나라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단체이자 국정원의 오랜 감시와 탄압의 주된 표적이었던 민주노총의 위원장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는 설명은 잘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최근에도 홍장원은 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면서 '국정원은 계엄의 무풍지대였다', '나도 TV를 보고 처음 계엄 선포를 알았다'는 등 쉽게 납득하기 힘든 취지의 주장들을 내놓았다.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이 26일 '계엄 정당화 메시지 전달' 의혹과 관련해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경기도 과천 권창영 2차 종합 특별검사팀으로 출석하고 있다. 2026.6.26. 연합뉴스

 

물론 아직 진실이 완전히 밝혀졌다고 볼 수는 없으며, 앞으로 진행될 추가 수사와 재판 과정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부에서는 이렇게 홍장원 진술의 신빙성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자칫 윤석열의 12·3 내란 자체에 대한 사법적 심판까지 함께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형사재판에서 특정 증인이 기소됐다 해서 그동안의 모든 진술을 일괄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각 진술과 증거를 개별적으로 따져 신빙성을 판단하는 것이 옳다.

 

무엇보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윤석열의 내란죄는 홍장원 한 사람의 진술 여부와 무관하게 이미 수많은 종합적인 물증과 다수의 독립적인 증언들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어 온 사안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함께 겪어낸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며, 어느 한 증인의 신뢰도 문제로 그 본질이 흔들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앞으로 수사와 재판을 통해 더 많은 사실이 밝혀져야겠지만, 만약 홍장원이 뒤늦게나마 내란 세력에게서 등을 돌리고 민주주의의 편에 서게 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 스스로가 더 철저히 성찰하며 국정원 조직과 이번 내란, 그리고 국정원의 어두운 과거에 관한 진실을 규명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재명 정부 역시 이러한 사태를 계기로, 국정원의 더 철저하고 근본적인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 전지윤 사회운동가·연구평론가 >

 

대북전략 선회… “11월 중간선거 겨냥한 카드”
이란 공격 실패로 인한 실점 만회 나선 듯
'비핵화 전제 대화'전략 포기한 현실적 접근

 

"김정은과 만나게 될 것" 구체 일정은 안밝혀
한미 연합훈련 축소 발표 등 일관된 행보
한국 핵추진 잠수함 개발 인정과도 연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월 19일 워싱턴 D.C. 백악관 루즈벨트 룸에서 암호화폐 업계 임원들과의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6.8.19. AFP 연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9일 북한이 “매우 강력한 핵무기를 57발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하지 않았던 이제까지의 미국정부 공식입장과 배치되는데다 구체적인 보유 핵무기 수치까지 밝혔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그가 이번 가을에라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측근들을 독려하고 있다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18일 보도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 신문은 북미 두 정상의 만남을 오는 11월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에 맞춰 성사시키려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 덧붙였다.

 

미국 의회조사국은 지난 5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북한이 “이미 최대 90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핵분열성 물질을 생산했고, 그 중에서 약 50발은 제조를 끝냈을 가능성이 있다”는 민간단체의 추산을 소개했지만, 미국정부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 스웨덴의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지난 6월 세계 핵무기 보유 현황을 정리한 연례 보고서에서 북한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핵탄두 수를 약 60발로 추정했다.

 

실패한 비핵화 전제 대화전략 포기한 현실적 접근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 사실을 사실상 인정함으로써, 비핵화를 전제한 이제까지의 대북 정책으로는 북한과의 어떤 대화도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판단의 토대 위에서 어떤 식으로든 북한과의 대화에 나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북한이 현상태에서 더는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고 동결한 토대 위에서 먼저 대화를 시작하고 종국적으로 비핵화를 이뤄낸다는 이재명 정부의 대북 전략과도 충돌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안에 김 국무위원장을 만날 예정인지 묻는 기자들 질문에 “만나게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북한으로부터 그런 답신을 받았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미 연합훈련 축소 발표 이후 일관성 지닌 발언들

 

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6일 ‘미국에 비적대적인 북한’에 대한 한미 연합훈련 ‘자유 방패’를 대폭 축소시키라고 피터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에게 지시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트루스 소셜을 통해 밝혔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올해 안에, 어쩌면 11월 초 중간선거 전에 만나려 하고 있다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 날인 17일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자신의 대화 제의에 응해 왔다고 기자들에게 얘기했으나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란공격 실패로 인한 실점 만회할 유력 카드?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일련의 발언들에 대해 외신들은 대체로 교착상태에 빠진 이란과의 종전협상으로 인한 정치적 손실을 만회하기 위한 외교적 성과를 보여 주려는 중간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이란의 신정체제 붕괴 및 체제 전환, 핵무기개발계획 폐기를 노렸던 미국의 지난 2월 말 이란 선제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호르무즈 해협 봉쇄까지 자초함으로써 세계경제에 악영향을 끼쳐, 트럼프 정권은 미국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비판을 받아 왔으며 지지율은 바닥상태다. 로이터 통신 등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은 33%로, 트럼프 2기 정권 들어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란과의 전쟁으로 한층 더 불리해진 상황에서 예고된 11월 중간선거에서의 패배를 피해 갈 돌파구로 북한과의 대화 재개라는 카드를 꺼내들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국 핵추진 잠수함 개발 인정과도 연결

 

한편 일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최근 이런 발언들을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개발과 보유를 인정한 미국의 결정과도 연결시켜,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보유 인정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사실상 인정했을 경우 피하기 어려운 미국과 한국 내의 반발을 완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기도 한다. 핵추진 잠수함 개발 및 보유는 핵무기의 개발 보유가 아니라는 점에서 핵무기 개발 보유에 대한 국내외적 반발을 피해가면서, 언제라도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잠재적 핵보유국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까다로운 대북 대화조건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고, 그것이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는데도 유효할 수 있다는 지적들이 있다.   < 한승동 기자 >

 

북미협상의 한국 패싱 극복할 북방경제론

 

트럼프가 던진 북한 김정은과의 회담 가능성
한국에는 외려 외교적 압박 카드 활용할 수도
우린 버티면서 평화협정 당사자 자격 요구해야
최근 확대 강화된 북중러 경제협력 움직임
정치보다 경제 이익 앞세워 접근하면 안될까?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회동의 가능성을 시사한 것은 11월 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란과 우크라이나 양대 전쟁으로 코너에 몰린 트럼프의 위기돌파용이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다. 그런데 왜 하필 김정은 회동인가. 이란전쟁 명분은 이란 핵프로그램 중단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석유에너지 통제와 전쟁특수, 즉 미 군수자본이 개입된 경제이익이라는 건 불문가지이다. 문제는 호르무즈해협 통제력을 이란이 가져간 사실상 패전 상태로는 핵프로그램 폐지라는 명분도 공중분해 되고, 전쟁 장기화로 인한 물가상승과 서민생활 악화, 경기침체, 그에 따른 민심이반(트럼프 최저 지지율 33%, 로이터)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참에 핵프로그램 폐지 이슈로 모양이 비슷한 북한의 김정은을 소환해 화제를 돌릴 수만 있다면 꽤 괜찮은 낚시밥이 되지 않을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회동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15일 이 사진을 본인의 트루스 소셜에 올렸다. 2026. 08. 15 시민언론 민들레

 

북미회담 의제 될 가능성 거의 없는 북핵

 

트럼프-김정은 회동이 성사된다고 해도 북핵은 더 이상 의제가 될 수 없다. 트럼프의 베네수엘라와 이란에 대한 참수작전 실행으로 북핵 폐기 운운은 물 건너간 것이다. 만약 그래도 핵 의제가 올라온다면 현재핵 최소화, 미래핵 동결 정도는 가능할 지도 모른다. 이미 넉넉한 핵 보유상태에서, 기술적 진화라면 모를까 공격적 핵 추가란 별 의미없는 일이라는 낙관적 생각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실제 가능한 의제가 궁금해진다. 2026년 미국과 북중러 동북아 국가들간 일련의 회담 과정과 두만강 북중러 3각 물류 라선특구화가 답이 될는지 모른다. 5월 중미 정상회담(베이징)에서는 무역 투자 불균형 완화, 핵심 광물과 기술 수출 통제, 외교안보 국제 현안 등이 주 의제였던 바, 양국간 주요 수출입품목(농산물 에너지 항공기 등) 구매 확대, 희토류와 반도체 등 상업마찰 완화 등이 부분 협상된 바 있다. 그러나 정작 핵심 의제인 이란·우크라이나 전쟁, 대만문제, 북한 비핵화 등은 무합의, 심지어 의례적인 공동성명도 없었다. 정상회담 정례화 정도가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대폭 확대 강화된 북중러 북방경제권

 

한편 6월 북중 정상회담은 ‘북중 전략적 혈맹’, 당·정·군 전방위 실질 협력 공조체계 확대, 대만 등 중국 핵심이익 지지 및 다자(UN 등)무대 공조 등을 채택하였다. 북측 관련 핵심 포인트는 비핵화 개념 배제 및 양국 핵심이익 상호지지 및 경제밀착 가속이다. 즉 초점은 그간 대북 제재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던 중국이 경제 밀착 단계로 공공연히 방향 전환했다는 것이다. 이는 2024년 북러 신조약(포괄적 전략적 동반자관계 조약 ; 유사시 상호 자동 군사개입)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북러 밀착을 의식한 것으로 보이며, 핵심이익 지지란 그간 북중관계를 소원하게 했던 북핵을 잠재 승인(UN 제재 불참)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김정은 북한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이의 회담이 지난 8일 금수산 영빈관에서 진행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9일 보도했다. 2026.6.9 연합

 

사실 북중회담 이전에도 중국은 이미 신의주-단둥 교류를 조심스럽게 확대하고 있었지만 이번 북중회담은 그 조차도 제낀 것으로 보인다. 즉 아직은 교역량이 대단치 않으나 북중러라는 북방경제의 새로운 교역권이 성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수준은 두만강 일대 3국 접경지대 동북아 물류 거점화에 따른 신두만강대교 및 철도 도로 확장, 라진항 이용 및 동해 출해권, 라진선봉특구화(원자재 공급 및 가공) 가동 정도다. 다만 두만강을 통한 동해 진출, 러시아 일본 유럽 북미로 직접 이어지는 중국의 북방경제권 확대가 눈에 뜨이는 데 세계 경제 2위 중국의 잠재력 평가가 관건이다.

 

트럼프-김정은 회동에서 기대되는 최대치와 최소치

 

이제까지 미국 아시아태평양전략의 관례에 따르면 중국은 잠재 주적, 북한은 핵보유 돌출 행동대 변수(부시 정부 시절 ‘4대 악의 축’) 쯤으로 평가될 것이다. 이쯤 되면 트럼프의 김정은 회동이 시사하는 윤곽은 이렇다. 핵보유국을 회담에 끌어들여 핵프로그램 관리에 대한 트럼프의 지속적 관심사를 자연스럽게 노출시키고 미국의 대 중국 및 북러 협약 견제, 나아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NDS전략이 환기되며, 한일 등 동맹국의 방위비분담 독촉과 대 이란전 동맹국 협조 불참 지탄이 종합적으로 결부되는 그림이 읽힌다. 회담 성사 여부에 관계없이 이것은 동아시아 외교군사 패턴에 슬쩍 파문을 던지는 일종의 ‘잽’이라면 적정할까. 방위분담 독촉과 2026년 미군사전략 재편, 이란전 환기 정도의 의미라면 실 성사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즉 던져두는 것만으로도 일거양득, 방위비 갹출 독촉과 다른 한편 국제 인지전 환기라는 최소치의 회동 시사 가치가 성립한다.

 

시레 회담이 성사되면 여기에 몇 가지 선심성 경제협력, 댓가 또는 유명무실한 대북 제재 해제를 밑밥으로 추가할 수는 있다. 대개 비군사적 의제로 인도적 지원, 관광 교통 문화예술, 경제적 의제로서는 희토류 등 자원개발 합작 등이 고려될 법한 범주다. 종합하면 현재핵 동결과 미래핵 차단, 그 대가로 1990년대 핵감시 대가 수준 이상의 대북지원 또는 북한 자원개발 합작이 북미 회담 성사시 가능한 최대치 의제가 아닐까 싶다.

 

패싱 당할 위기를 전화위복 기회로 삼을 수 없을까?

 

문제는 이 회담에서 한국은 2019년 트럼프-김정은 회동 때처럼 소외(패싱)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덧붙여서 방위분담 GDP 3.5% 증액의 지지부진과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의 한 지구 단위로써의 역할(동맹현대화)을 질책당하는 것도 문제다. 한국은 이른바 트럼프의 동맹약탈 프로그램의 만만한 호구로 남아 있어야 할까.

 

그러나 접근을 달리하면 이것도 기회다. 언제는 전작권이 없어서 개성공단이 개척된 것도 아니지 않는가. 지금은 두 개의 전쟁으로 미국의 국력이 가장 쇠진되었을 시기이고, 그들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은 미국 본토 수호로 축소되어 있다. 대북 제재는 더 이상 무의미하고 미국의 주력 제조업들은 국내용 고립주의로 쪼그라들거나, 다른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

 

대세적으로 보면 미국이 외면한 기후문제는 지구 공동의 대응이 아니면 점차 더 심화될 것이고 슈퍼엘니뇨가 내년쯤 울트라슈퍼엘니뇨로 확대되면 미국이 지난 상호관세 파동을 넘어 더 큰 국제적 지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정도라면 방위비 분담 독촉시 대가성 요구, 즉 북미회담의 이해관계 당사자, 전작권 주권 반환 당사자 자격으로 유명무실 대북 제재 대폭 완화, 한반도 평화협정 등을 의제로 하는 회담 동참권을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돈 못 낸다는 자세로 적극 버티는 것도 방법이다. 33% 지지율 트럼프 임기래 봐야 이제 2년 남짓, 레임덕이 코앞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북방경제에 대한 기대

 

트럼프-김정은 회동은 이런저런 경로로 한반도 유화국면에 일조할 또 하나의 기회라면 기회다. 그 실속은 자원과 인구, 영토가 풍부한 북방경제에 대한 기대라고 본다. 한국의 주 교역처는 중국(20%), 미국(18%), 아세안(30% ; 베트남 9% 포함)이지만, 남방과 북미 시장은 사실상 이미 포화상태다. 확장 가능성은 같은 문화전통, 언어, 지역, 핏줄이 일치함에도 교역이 중단된 북측, 러시아의 신흥시장, 세계의 공장인 중국과의 국제분업이다. 유럽까지 북방항로는 주교역로인 싱가폴 수에즈 항로의 70% 수준인 13000km에 불과해서 이 통로의 수익성은 이미 충분히 검증된 것이다. 최근 중국은 전역 오지를 고리로 잇는 황금대외곽순환망(2만7천km)을 2030년 계획으로 추진 중이다. 그간 일대일로 철도망이 한계에 봉착한 대신으로 대륙간 내수용 건설경기를 도모한다. 성공여부는 몰라도 솔직히 그 자유로움은 부럽다.

 

강화된 북중러 경제협력 체계에서 북한의 역할을 들러리 정도로 과소평가하는 건 옳지 않다. 북한은 시장사회주의가 본격화된 지 오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북한이 성장하는 동안 한국은 완전 소외될 것이다. 남북 합작 개성공단이 폐쇄된 동안 북한의 대체 교역, 즉 대중국 교역은 UN 대북 제재 전 수준을 회복하거나 훌쩍 넘어섰다(2025년 30억 달러 수준), 우리가 손 놓고 있는 동안 임가공 형태의 제조 무역 유통, 대중국 무역의존도가 급증(98%), 고전적 자립 계획경제 수준을 간단히 넘어서 나름 국제분업의 한 축(2024년 북한 성장률 3.5% 추정)을 담당한다.

 

중요한 사실은 북중러 간 경제교류는 저임금에 기초한 단순 제조 임가공 수준을 넘어서는 징후가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주요 광물자원 매장량이 세계적 수준(최소 3000조 원∼1경 원 이상, 마그네사이트 세계 3위, 철광석 50억 톤, 희토류, 텅스텐 등)이다. 이를 익히 아는 중국은 대북 제재 시절에도 접경지역 광산(무산 철광산, 혜산 동광산 등) 합작사업을 대대적으로 진행, 러시아 역시 대북자원 협력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이다.

 

11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바라본 개성공단(오른쪽). 북한의 철거작업으로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 건물의 저층부만 남아있다. 왼쪽 사진은 지난해 11월에 찍은 센터 건물. 2026. 1. 11 연합

 

정치·외교로 어려우면 경제적 잇속으로 뚫자

 

우리는 대륙 진출 육로가 막힌 80년 분단, 절름발이 구조다. 최고수준 기술과 풍부한 자본의 남과 세계적 지하자원을 갖춘 북이 통일도 포기하고 협력도 포기할 건가. 두 개의 국가론이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거론도 안 되던 개념이다. 국경이란 지리상의 경계에 불과하다. 장사란 수지가 맞으면 어제의 적도 오늘의 동지가 되는 법이다. EU를 보라, 국경과 정치·외교는 분리되어도 경제통합으로 자유롭게 넘나들며 실익을 확장하지 않는가. 압록강 하구 단둥과 신의주를 왕래하는 주민이 적어도 10만이고, 몽골에 이마트와 CJ가 대세이고, 카자흐스탄 블라디보스톡의 고려인, 조선족 자치주 연길 직항로로 백두산 탐방 인파가 하루에 수만 명이다. 우리도 신두만강 대교 북중러 경제협력에 슬쩍 끼어들면 안 되나.

 

휴전선만 말이 없다. 훗날 우리 후대가 현재의 경직된 남북관계를 두고 시대변화를 못 따라가는 우매함이라고 욕해도 할 말 없다. 유연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간 미국이 먼저 움직이고 북한이 응해야 그에 맞춰 겨우 기동하는 경제외적 시스템에 너무 길들여 있는지 모른다. 좀 손해보면 어떤가. 개성공단이 그랬던 것처럼 경제적 이해부터 맞춰보면 안 되나. 시간이 가면 결국 민족의 공통이해로 통일된다는 대승적 생각이 필요한 시절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한미동맹에 연연하지 않을 배짱과 실속 챙기기라는 생각이다. 첫째, 둘째, 셋째도 독립이고 통일이라는 백범 김구 선생이 생각나는 8월이다.    < 백일 전 울산과학대 교수 >

 

절박한 트럼프, 11월 중간선거 전 북미대화 재개 성과 서두르나

 
 

유력 계기 중 APEC은 중간선거 이후…'옥토버 서프라이즈' 노릴지 주목

핵보유국 용인 원하는 김정은, 초조한 트럼프 처지 활용해 주도권 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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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판문점에서 만난 북미 정상  [연합 자료사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내 북미대화 재개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면서 11월 초 중간선거 이전에 외교적 성과를 확보하려 서두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중간선거 직전인 10월에 터트려 판세에 영향을 미치는 이른바 '옥토버 서프라이즈'를 노릴 수 있다는 관측이다. 그러나 북미대화가 전격 재개되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의 절박한 처지가 북한에 훨씬 유리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미국의 중간선거는 11월 3일이다. 한국의 총선과 비슷한데, 현직 대통령 임기 중간에 치러지는 탓에 국정 심판의 성격을 갖는다.

 

대체로 현직 대통령에게 불리한 선거다. 이란전쟁 장기화에 따른 민심 악화의 부담을 진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중간선거 패배에 따른 국정 동력 상실을 크게 우려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트럼프 대통령이 전격적인 한미연합훈련 대폭 축소 지시를 통해 북미대화 재개를 추진하는 것도 중간선거를 앞두고 국면 전환의 의도가 크다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문제는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중간선거까지 70여일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라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가급적 신속하게 외교적 성과로 내세울 수 있는 결과물을 받아 들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는 북한이 호응을 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18∼19일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아시아를 방문하는 김에 김 위원장과 회담을 하는 쪽에 무게가 실려있다.

 

그러나 APEC은 중간선거 이후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김 위원장의 대면 회담 성사와 외교적 성과 도출의 극적인 효과를 중간선거 전에 연출하고 싶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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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 [AP=연합]

 

일각에서는 북미정상회담을 '옥토버 서프라이즈'로 삼으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한다. 미국의 중간선거와 대선은 11월 초에 고정돼 있는데 선거를 앞두고 예기치 못하게 벌어져 판세를 뒤흔드는 사건을 옥토버 서프라이즈라고 한다.

 

통상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정이지만 외교정책의 기존 문법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이라면 가능할 수 있는 시나리오다.

 

가장 극적인 효과를 줄 수 있는 방식은 '현직 미 대통령의 역사상 첫 방문'으로 기록될 트럼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이지만 경호와 보안은 물론 당국 간 사전 준비라는 측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고집하지 않는 한 쉽지 않은 선택지다.

 

중간선거 전에 김 위원장과 대면 회담을 성사시키지 못하더라도 최대한 미국 유권자들에게 성과로 내놓을 수 있도록 외교적 진전을 도모하려는 시도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6개월 가까이 이란전쟁의 출구가 보이지 않아 절박한 트럼프 대통령과 달리 김 위원장이 호응할지는 여전히 불분명한 상황이다.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초조한 처지를 최대한 활용해 북한의 핵심 이익을 관철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상당한 수준의 핵역량을 갖춘 이상 비핵화는 논의 대상이 아니라는 게 김 위원장의 입장이다. 비핵화 논의를 배제하고 트럼프 대통령을 만날 수 있다면 김 위원장으로서는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용인되는 엄청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지난해 9월 중국 베이징을 찾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및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톈안먼 망루에 올라 열병식을 지켜본 데 이어 트럼프 대통령과 비핵화 논의 없는 회담까지 관철한다면 강대국이 너나없이 손을 내미는 핵보유국 지도자로서 국제적 위상을 크게 끌어올리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싱가포르에서 열렸던 2018년 6월 1차 북미정상회담 공동성명에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가 명시된 데 이어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제재완화를 포함한 미국의 상응 조치 교환이 핵심 의제였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북한의 요구 수준 자체가 다른 상황이다.

 

북한은 제재를 한미연합훈련과 함께 대북적대시 정책의 대표적 조치로 보고 폐기를 요구해왔고 제재완화는 여전히 북한에 중요한 문제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으로 숨통이 트이면서 예전만큼 절실하지는 않다는 평가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백악관에서 '북미대화 재개의 목표가 비핵화인가'라는 질문에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비핵화를 질색하는 김 위원장을 협상 테이블에 끌어내려고 즉답을 피한 것으로 보이지만 북한 비핵화 목표에서 후퇴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문제는 미국과 동맹의 이익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기보다 개인적 친분을 토대로 한 협상을 중시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6월 이란과 종전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을 때도 항복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양보를 했다는 비판이 쇄도할 정도로 합의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인 바 있다.

 

특히 김 위원장과의 회담이 성사된다면 실무협상이 거의 없는 채로 정상 간 담판에 집중하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톱다운' 방식이 주를 이룰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선언적 선물'에 트럼프 대통령이 더 큰 '선물 보따리'를 안겨주고 성과와 치적으로 포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  백나리 기자 >

 

 

 

2006∼2010년 1기 조사위 당시 시가 2천373억원 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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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본회의 통과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국가귀속 특별법  [연합]

 

2010년 이후 사라진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16년 만에 올 연말부터 재가동된다.

국가 차원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환수가 다시 본격화할 전망이다.

16일 법조계에 따르면 친일파 재산을 국가에 환수하는 내용을 담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은 오는 12월 3일부터 시행된다.

 

특별법은 2006년 설치된 1기 조사위가 2010년 해산된 이후 새로운 친일 재산을 찾아낼 법적 기구가 없다는 미비점을 보완하고자 마련됐다.

 

특별법은 친일 재산 은닉 시도를 막기 위해 친일파 후손들이 관련 재산을 처분했더라도 그 처분의 대가까지 환수 대상으로 명시한다.

 

친일 재산을 적발해 신고한 사람 등에 대한 포상금 규정을 신설하는 조항도 포함됐다.

 

법무부와 공식 백서 등에 따르면 1기 조사위는 2006년 7월부터 2010년 7월까지 4년간 친일파 168명의 2천359필지에 대해 국가귀속을 결정했다.

 

이미 친일 재산을 제삼자에게 처분한 친일파 후손 24명에 대해서는 친일 재산 확인 결정을 내렸다.

이를 통해 국가가 환수한 재산은 당시 시가 기준 총 2천373억원으로 집계됐다.

 

이후 법무부는 1기 위원회에서 밝혀진 친일 재산에 대한 소송 관련 업무를 수행해 왔다.

작년 10월에는 친일파 이해승 후손이 경기 의정부시 호원동 토지 31필지를 매각해 챙긴 78억원에 대해 부당이득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법무부는 지난 6월 22일 조사위 설립준비단을 발족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설립준비단은 법무부를 비롯해 행정안전부, 국가보훈부, 산림청 등 관계 부처 인력 11명으로 꾸려졌다.

 

단장은 이영창 검사(사법연수원 33기)가 맡았다.

이들은 조사위 출범 전까지 관련 법규를 마련하고 조사 계획을 수립하는 등 친일 재산 환수를 위한 기초 역할을 담당할 예정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추후 환수된 친일 재산은 순국선열·애국지사 사업기금에 우선적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  최윤선 기자 >

 

법무부, 친일재산조사위원회 설립준비단 발족 정성호 법무부 장관(왼쪽)이 22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이영창 친일재산조사위원회 설립준비단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기념 촬영하고 있다. 2026.6.22 [법무부 제공]
 
 
 

친일재산조사위 16년 만에 재출범 "최소 325억원 환수"

이 대통령 이어 정성호 법무 "유공자 후손 지원에"
친일재산귀속법 12월 3일 시행에 발 맞춰
이해승·신우선·임선준·박희양 등 환수 소송
처분한 경우도 대가를 환수하게 근거 마련
신고한 사람에 포상하는 근거 조항도 신설
6월에 조사위 설립준비단 발족 11명 활동 중
1기 때 2373억원 환수, 얼마나 늘어날지 관심
이해승 후손 소유 스위스그랜드호텔에 눈길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13일 서울 서초구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열린 '제81주년 광복절 기념 독립유공자 후손 대한민국 국적증서 수여식'에 참석해 기념사하고 있다. 2026.8.13 연합

 

"지난 6월 2일 '친일재산귀속법'이 공포된 만큼,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이 부당 축적한 재산을 조사·환수하여 역사에 대한 확실한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 국가에 귀속된 친일 재산을 더욱 책임 있게 관리해, 그 재원이 독립유공자와 유가족에 대한 예우와 지원에 온전히 쓰일 수 있도록 만들겠다."

 

이재명 대통령의 제81주년 광복절 경축사 가운데 한 대목이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도 같은 날 친일재산 환수를 통해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소셜미디어에 밝혔다. 정 장관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2기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다시 출범하면 최소 325억원 이상의 친일재산을 환수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봐 눈길을 끌었다.

 

때마침 배우 하영(본명 안하영)의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행적과 그가 후대에 물려준 막대한 재산 논란이 불거진 데 이어 민족문제연구소도 안상호가 친일 활동을 한 것이 맞다고 인정하며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자산이 제대로 된 청산 작업 없이 후손들에게 승계돼 기득권으로 유지되는 것을 성찰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친일재산 환수를 위한 법적 기반도 마련됐다. 친일재산귀속법은 제3자에게 매각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미 처분된 친일재산에 대해서도 그 대가를 환수해 독립유공자와 유족을 위해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지난 6월 2일 공포된 법은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오는 12월 3일 시행된다.

 

법이 시행되면 2010년 해산됐던 친일반민족재산조사위원회가 다시 구성된다. 새 위원회는 최장 5년 동안 친일재산 환수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정 장관은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친일재산 환수를 주요 국정 과제로 추진해 왔다고 설명했다. 그는 “법무부는 독립지사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며 “이재명 정부 출범 직후부터 친일 재산 환수를 주요 과제로 추진했고, 그 결실로 지난 5월 친일재산귀속법이 국회를 통과했다”고 설명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중단됐던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들을 대상으로 한 재산 환수 소송도 재개됐다. 정 장관은 “이해승·신우선·임선준·박희양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들을 상대로 한 재산 환수 소송을 다시 시작했다”며 “정미칠적 임선준의 후손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는 1심에서 국가의 전부 승소가 확정됐다”고 전했다.

 

1기 조사위 활동 종료 이후 법무부가 기존에 확인된 친일재산을 대상으로 소송 등을 통해 환수 업무를 이어왔다.  지난해 10월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조선 귀족 이해승의 후손이 경기 의정부시 호원동 토지 31필지를 매각해 얻은 78억원을 돌려달라며 부당이득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1일 오후 서울 충무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회의실에서 김창국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마지막 전원위원회가 열리고 있다. 위원회는 이날 친일재산 관련 내용을 정리한 백서를 오는 7일 발간한다고 밝혔다. 2010.7.1 연합 자료사진

 

법무부와 관련 백서 등에 따르면 1기 친일재산조사위(김창국 위원장)는 2006년 7월부터 2010년 7월까지 4년간 활동하며 친일반민족행위자 168명이 보유한 토지 2359필지에 대해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다. 친일재산을 제3자에게 이미 처분한 후손 24명에 대해서는 별도로 친일재산 확인 결정을 했다. 당시 국가가 환수한 재산은 시가 기준 2373억원에 이르렀다. 2010년 10월 12일 해산된 뒤 관련 활동은 법무부로 이관됐다.

 

1기 위원회의 '친일 재산 국가 귀속 현황 자료'에 따르면, 경기도는 494만 4435㎡(397필지)로 전체(812만 4381㎡·1199필지)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두 번째인 충청남도(193만 6582㎡·252필지)의 2.5배를 웃도는 규모로 여의도 면적(290만㎡)의 약 1.7배에 이른다. 경기도 시·군별로는 포천시 내 재산 면적이 160만 9105㎡(89필지)로 가장 넓었고, 이어 의왕시 77만 3752㎡(1필지), 남양주시 45만 6778㎡(9필지) 순이었다.

 

1기 활동 종료 이후 별도의 조사 기구가 사라지면서 새롭게 발견되는 친일재산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이번 특별법은 이런 제도적 공백을 메우는 데 초점을 맞췄다. 특히 친일재산을 후손 등이 이미 처분한 경우에도 처분 대가를 환수할 수 있도록 근거를 명확히 했다. 재산을 매각하거나 다른 형태로 바꿔 은닉하는 방식으로 국가 귀속을 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다.

 

친일재산을 찾아내 신고한 사람 등에 대한 포상금 지급 근거도 새로 마련됐다. 민간 신고를 활성화해 오랜 기간 숨겨진 재산을 추가로 발굴하겠다는 취지다

 

정부는 조사위 재출범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법무부는 지난 6월 22일 친일재산조사위원회 설립준비단을 발족했다. 준비단은 법무부를 비롯해 행정안전부와 국가보훈부, 산림청 등 관계 부처에서 파견된 인력 11명으로 구성됐다. 단장은 이영창 검사(사법연수원 33기)가 맡았다.

 

준비단은 조사위가 공식 출범하기 전까지 하위 법규를 정비하고 조사 대상과 방식, 세부 조사 계획 등을 마련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부처별로 흩어진 토지·등기·보훈 관련 자료를 연계해 추가 환수 대상 재산을 찾아내는 작업도 핵심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조사위가 출범하면 1기 조사 당시 확인하지 못했거나 이후 새롭게 드러난 친일재산을 중심으로 조사 범위가 확대될 전망이다. 이미 처분된 재산의 매각대금 등도 환수 대상에 포함되면서 실제 국가 귀속 규모가 얼마나 늘어날지도 주목된다. 법무부 관계자는 “추후 환수된 친일재산은 순국선열·애국지사 사업기금에 우선적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과 김용만(왼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3일 이재명 대통령 주최로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가유공자 및 보훈 가족 초청 오찬에서 인사하고 있다. 2026.8.13 연합
 

백범 김구의 증손자로 이 법안을 대표발의한 김용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2일 이데일리 인터뷰를 통해 "나라를 배신하고 개인의 이익과 영달을 위해 썼던 것을 이번에는 반드시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하는 게 역사 정의라고 생각한다”며 "2010년 이후 친일재산 환수를 위한 사실상의 국가행위는 없었다. 이번 특별법은 실질적인 매각 대금, 그 이익금 자체를 환수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대법원도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이 재산을 처분해 얻은 이득은 별도의 입법을 통해 환수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며 “그 취지를 반영해 처분대가까지 환수하는 조항을 신설했다”고 덧붙였다.

 

김 의원실에 따르면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확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 가운데 실제 재산 환수로 이어진 사례는 5%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는 “과거 파악한 친일재산도 대부분 환수하지 못한 채 위원회 활동이 끝났다”며 “환수 대상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미환수 재산에 대한 전수조사를 신속히 진행하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김 의원은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갖고 계신 분들께 국가 차원에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이번만큼은 대형 친일재산 환수라는 실질적 성과를 통해 역사 정의가 세워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앞으로도 이런 조사와 환수가 상시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국민들이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위치한 스위스그랜드호텔.(전 그랜드힐튼서울) [스위스그랜드호텔 홈페이지 갈무리]

 

한편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이슈와 관련해 몇년이나 개발이 지지부진했던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스위스그랜드호텔 부지에도 눈길이 갈 것으로 보인다. 최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스위스그랜드호텔 건물과 부지 소유권은 지난달 이우영 동원아이엔씨 회장과 관계 법인 등에서 '홍제353PFV'로 이전됐다. 프로젝트금융투자회사(PFV)는 특정 부동산 개발사업을 위해 설립하는 특수목적법인(SPC)이다.

 

부동산 개발업체(디벨로퍼) 연합와이앤제이가 추진하는 이번 사업은 호텔과 주변 필지 등 약 1만 2000평 규모 부지의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약 1300가구 규모의 아파트와 부대시설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다.

 

키움증권은 부지 매입 잔금과 초기 사업비 등에 쓰일 약 4500억원 규모의 브릿지론을 단독으로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체 부지 매입대금과 초기 사업비는 5000억~6000억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해당 부지는 2020년대 초반부터 여러 차례 개발이 추진됐지만 자금 조달에 난항을 겪어 장기간 속도를 내지 못했다. 이번 소유권 이전과 대규모 자금 조달로 사업이 다시 출발선에 섰지만 고층 아파트 개발을 위해서는 종상향 등 인허가 절차가 필요하고, 친일재산 관련 논란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실제 개발 완료까지는 변수가 남아 있다는 평가다.

                                                                                                          < 임병선 기자 > 

 

민문연 "안상호 친일...친일파 기득권 대물림 성찰해야"

이토 히로부미 추모, 대정친목회 가입 등 행적
『친일인명사전』 빠진 건 기준에 못 미쳤기 때문
등재 안 됐다고 친일파 면죄부 주어진 것 아냐
전문직을 모두 배제했다는 주장은 명백한 오해

 

임종국 "친일 행위보다 반성 없는 태도가 문제"
박유하 "친일 강박증과 순결 강박증 빚은 결과"
배기성 "어떻게 '오욕을 끌어안으라' 말하는가"
"조봉암 손가락 잃은 사연 안다면 그럴 수 있나"

 

광복절 81주년을 하루 앞두고 일제강점기 전문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안상호 관련 논란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최근 언론 및 온라인 공간을 통해 배우 하영(본명 안하영)의 증조부 안상호(1874∼1927)의 친일 행적과 후손들의 언행에 대한 논란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는 것이 계기가 됐다.

 

민족연구소는 대체로 사실에 부합하지만 일부 과도한 해석이나 오류가 있어 적지 않은 혼란이 일어나고 『친일인명사전』에 안상호의 이름이 수록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았다면서 안상호의 실제 행적과 역사적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보도자료는 세밀한 내용으로 짜였다.  ▲ 안상호의 주요 친일 행적 ▲ “어떤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고 친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신중론에 대해 ▲ “친일인명사전에서 전문직은 모두 다 뺐다”는 주장에 대해 ▲친일파 명단마다 수록 인원이 다른 이유 ▲ 친일인명사전 미등재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 연좌제적 비난 경계와 구조적 성찰의 필요성 등이다.

 

연구소는 먼저 안상호가 대한제국 관립일어학교와 도쿄 자혜의원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전문직 의사였지만, 화려한 이력 이면에 다음과 같은 친일 · 부일 협력 행적이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라고 정리했다. 

 

● 일제침략의 원흉 이토 추도 : 1909년 11월,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해 민간에서 조직한 ‘국민대추도회(대한국민추도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실제 추도회가 진행되지는 않았으나, 관민추도회와 별도로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식민통치 및 수탈기구 참여 : 경성부윤의 자문기구이자 일제 식민통치를 뒷받침한 지방행정 보조기구인경성부 협의회원(1914, 1918, 1920, 관선 임명직)을 역임했다. 또 식민지 금융수탈기구인 경성 종로금융조합의 조합장(1922∼1927)을 지냈다.

● 내선융화 및 친일단체 활동 : 경성신사의 씨자총대(신도 대표, 1915), 내선융화 단체인 대정친목회(대정실업친목회) 평의원(1916), 반일운동 배척을 표방한 동민회 회원(1924) 및 평의원(1925∼1927)으로 활동했다.

● 동화주의의 내면화: 『매일신보』(1918.12.10.) 기사에서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일본 사람과 똑같다”, “조선 사람과 상관이 없다”라며 밝히는 등 일제의 동화정책을 전면적으로 내면화한 대표적 인물로 소개되었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 '일선동화'의 모범가정으로 소개된 안상호의 가족 사진. 1918년 12월 10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안상호는 "나는 일본 사람과 똑같다. 지금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매운 음식은 조금도 못 먹는다"며 "다섯 자녀들은 일본어만 쓰고 조선말은 전혀 하지 못한다. 조선 사람과는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연합

 

「왕세자전하(王世子殿下) 가례(嘉禮) 전에 일선동체(日鮮同體)의 가정방문(家庭訪問): 전연(全然)히 내지화(內地化)한 의사 안상호씨의 가정」

-> 安商浩씨는 일선동체의 가정을 만드는데도 제일 먼저 성공의 기를 들었다. (중략) 기자는 먼저 살림 재미를 물었다. 안씨는 ‘그렇지요 별수 있나요 나는 무엇[무릇] 일본사람과 똑같지요. 나는 지금 조선옷은 한 벌도 없습니다. 그리고 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어요. 일본사람과 똑같지요. 그러하니까 불편한 점은 조금도 없어요. (중략) 조선 사람과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어요. (중략)’ 안씨는 지금부터 열두해 전에 의친왕이 동경에 계실 때에 의친왕의 시의로 있었는데 그때에 씨의 부인 磯子와 서로 알게되어 기자부인의 모친에게 청혼을 하여 전후 열한해 동안 고락을 같이 하였는데 (중략) 자녀가 모두 5남매이며 (중략) 안씨가 도리어 아내를 따라서 일본사람이 된 셈이다. (중략) ‘나는 조금도 조선사람하고 상관이 없으므로 일본에 사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고 열 한 해 동안을 조선에 있었어도 조선말은 한마디도 못해요’

 

물론, 대정친목회와 동민회에 이름을 올렸다고 친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신중론을 펴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대정친목회는 고문 이완용 · 민영휘, 회장 조중응 등 거물 친일파들을 중심으로 조선인 전직 관료 · 귀족 · 대지주 · 실업가들이 결집하여 ‘내선융화’를 표방하며 결성한 단체다. 

 

조선인의 단체 결성과 결사 활동이 극도로 억압되던 1910년대 무단통치 아래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1930년 전시체제기에 반강제적으로 조직된 전쟁협력단체와는 결성 배경과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당시 조선인 단체로는 종교단체를 제외하면 대정친목회가 거의 유일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친일 엘리트의 모임이었던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유력자와 일제 당국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자임했다. 나아가 3·1운동 전후 일제가 이른바 문화통치(민족분열책)를 획책할 당시, 대정친목회는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민족의 저항 의지를 무력화하는 정신적 · 사회적 협력기구로 기능했다. 이들은 3·1운동을 반대하고 일제 통치에 순응하면서 ‘독립불능론’을 주장하는 한편, 산업의 발달과 문화 향상을 내세우는 개량주의적 ‘실력양성론’을 펼쳤다.

 

안상호는 이 단체의 평의원(1916.11.29)으로 명단이 확인된다고 밝힌 연구소는 시대적 상황과 단체의 성격을 고려할 때, 평의원(일종의 대의원 격)으로 참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친일 행위라고 강조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부 유튜브 방송 등에서 “친일파인명사전 708명에서 전문직(의사, 변호사) 이런 사람들은 다 뺐다”, “시대의 아픔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취지의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전하며 두 가지 명백한 사실관계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2009) 수록 인원은 총 4389명이다. 한 방송에서 언급된 “708명”은 2002년 광복회가 자체 선정한 692명에 국회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의원모임)이 16명을 추가하여 발표했던 ‘친일파 708인 명단’을 혼동한 것이다.

 

둘째, 『친일인명사전』이 전문직을 일괄 배제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해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문화·예술·종교·법조·언론·교육 등 각 분야 친일 인물이 다수 등재되어 있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기준에 따르면, 기술직이나 전문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 수록 대상이 되지는 않지만, 복수의 친일협력단체에 가담했거나 지속적이고 능동적인 부일 행적이 입증된 전문직 인사는 엄격한 심의를 거쳐 사전에 수록하였다. 즉, 핵심 기준은 친일행위의 자발성·반복성·지속성과, 식민통치기구 내 특정 지위(귀족, 중추원, 고등관, 경찰간부, 군장교, 친일단체 간부급) 여부였으며, 전문직 여부는 면책 사유가 될 수 없었다.

 

안상호의 경우, 단순한 의료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경성부 협의회원, 대정친목회 및 동민회 평의원, 경성종로금융조합장 등 식민통치기구와 관변단체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지식인과 전문직 인사들의 친일은 사회적 영향력과 이데올로기 확산 효과가 막대했다는 점에서 결코 그 역사적 책임을 가볍게 볼 수 없다.

 

자연스럽게 친일파 명단마다 수록 인원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그 차이는 기준의 자의적 왜곡 또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 아니라, 조사 주체의 성격, 조사 목적, 법적‧학술적 기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48년 제헌국회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인신 구속과 공민권 제한 등 직접 처벌을 목적으로 출범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조직적 방해와 경찰의 특위 습격으로 조기 와해되었다. 2005년 출범한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는 법적 행정처분이 따르는 국가기구였기 때문에 지위 자체보다는 엄격한 행위 입증에 집중하였고, 입법 당시의 여야간 절충 등 태생적 한계로 인해 규모가 1006명에 머물렀다.

 

반면 민간 학술단체가 주도한 『친일인명사전』은 반민족행위자만이 아니라 부일협력자까지 포함하였으며, 식민통치를 지탱한 고등관료, 고등경찰, 군 장교 등 ‘지위범’을 포함하고 만주 등 해외 지역까지 범위를 확장하였으며, 지식인과 전문직의 역사적 책임을 가장 포괄적이고 엄정하게 물었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안상호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연구소는 강조했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여부는 편찬위원회의 선정 기준과 행위의 자발성, 적극성, 반복성, 지속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뒤 결정했다는 것이다. 2009년 발간 당시 민족문제연구소가 축적한 자료로는 안상호의 친일 행적이 선정 기준에 미달했기 때문에 편찬위원회의 결정으로 수록을 보류하였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해방 60여 년 만에 결실을 맺은 사전 편찬 작업은 당시 축적된 학술 연구 성과와 사료의 한계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인력과 자료 부족으로 인해 판단이 보류된 인물도 다수 존재했다. 『친일인명사전』을 비롯한 과거사 기록 사업은 완료된 결과물이 아니라 사료의 발굴과 검증을 통해 ‘보유편’과 ‘개정증보판’으로 이어지는 현재진행형 학술 사업이다. 새롭게 확인되는 관보, 신문 기사, 단체 명부 등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학술 검증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라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번 논란의 본질에 대해 배우 개인이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조상의 식민지 협력 이력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 성찰 없이 발언하여 대중에게 상처를 준 ‘역사인식과 성찰 부재의 문제’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조상의 과오를 성찰 없이 미화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소비한 태도에 대한 겸허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역사적 과오에 대한 법적·정치적 책임은 행위 당사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원칙이며, 선대의 과오에 대한 단죄를 후손에게 전가하는 연좌제적 발상은 민주 사회에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연구소는 분명히 했다. 그러나 강성현 교수가 지적했듯, “어떤 제도가 그 이력을 씻어주었나… 이 질문들이 ‘연좌는 안 된다’는 한 문장에 막혀버릴 때 가장 크게 손해 보는 쪽은 친일 청산이라는 의제 자체다”라는 경고를 새겨야 한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단순히 ‘후손에 대한 연좌제 금지’라는 방어 논리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 하에서 형성된 전문직 계보와 사회적 자산이 해방 후 청산 없이 어떻게 기득권으로 승계되고 세습되었는지에 대한 구조적 질문과 역사적 성찰로 이어져야 마땅하다는 것이 민족문제연구소가 내린 결론이다.

 

 

앞서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사무처장은 지난 13일 YTN 라디오 '장성철의 뉴스명당'에 전화로 출연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싣는 기준, 검증 문제, 이번 논란의 의미와 파장 등을 짚어봐 눈길을 끌었다.  방 처장은 이번 논란이 불거진 파장의 의미를 묻는 진행자에게 "연초부터 우리는 스타벅스 탱크 데이, 배재고 사태를 겪지 않았나?" 되묻고 "지금도 우리는 그 문제가 비단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지 않나?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하영 씨의 행동이나 태도가 적절치 않았지만, 그러면 과연 우리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 얼마나 성찰하고 지속적으로 보고 있는가. 이렇게 스스로 돌아봐야 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역사를 돌아보는 한 방법으로는 올해 초 네덜란드에서 약 40만 명의 나치 당원 명부가 공개돼 화제가 됐던 일을 떠올렸다. 독일 역시 1000만 명의 나치 당원 명부가 공개됐다. 독일 인구 6명 중의 한 명정도가 나치 당원이었다. 그 명단이 언론사 <디 차이트> 홈페이지에 공개돼 독일 사람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만들어놓았다고 소개했다.

 

아울러 방 처장은 "이렇게 명단을 공개하는 뜻은 '저 집안은 나치 당원 집안이야'라고 지목하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찰하는 계기, '우리 할아버지가 집안에서 인자한 어르신이었는데 역사적으로 이런 악행에 가담했거나 방관했구나' 이렇게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태도로 사건을 들여다봤으면 좋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방 처장은 "평생을 친일파 연구에 바친 임종국 선생께서 살아계셨다면 오늘의 하영 씨 논란에 어떤 말씀을 해주셨을까?" 묻는 진행자에게 "이런 어록을 남기셨다. '친일했던 일제 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반성과 화해,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더 문제다. 이런 문제를 우리가 철저하게 바꾸지 않는다면 민족사의 기강은 헛말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바꾸지 않는다면 민족 사회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런 말씀이 요즘 상황에 적절하지 않나 싶다"고 답했다.

 

아울러 방 처장은 "앞서 모범적인 사례가 있다. 한 여배우(이지아)는 처음에 할아버지가 친일파로 등재돼 있어서 억울해 했지만, 비공식적으로 (연구소를) 찾아와 저희와 함께 그(할아버지의) 행적을 함께 공부를 했다. 그 분은 지금도 계속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상의 행적을 반성하고 있지 않나?"고 되묻고 "연예인은 어쨌든 공인으로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런 공적인 태도가 필요하고, 하영 씨가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성숙하고 훌륭한 배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배우 하영과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넷플릭스와 연합 자료사진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자 '제국의 위안부'로 숱한 비난과 질타를 받았던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까지 나섰다. 박 교수는 11일 밤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당대 최고의 의사" 안상호를 둘러싼 친일 논란을 두고 "친일 강박증과 순결 강박증이 빚은 결과"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안상호에 대해 "조선의 양의 1호이자 대한제국 1호 국비유학생으로, 대한제국이 만든 인재였다"고 소개한 뒤 "귀국 후 순종 주치의가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고 부도 따라왔을 것"이라며 "친일로 쌓은 명예라기보다 스스로의 실력과 국가의 지원으로 의료계 파이오니아(개척자)가 된 이로 보인다"고 적었다. 특히 안상호가 을사오적 이완용을 치료한 이력과 관련해서는 "이완용이 아니라 서민이라도, 가능하다면 당대 최고 의사였던 그에게 치료받고 싶었을 것"이라며 "아픈 사람이라면 실력 있는 의사에게 치료받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한 발 나아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도층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도 "정치·경제·문화·교육 모든 분야에서 리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교육부터 활동까지 구조적으로 친일파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들을 부정한다면 일제시대 내내 인재를 키우지 말았어야 했다"며 그렇게 한다면 조선인 정치가와 기업인, 학교장 등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된다고 지적했다.

 

또 하영을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인 조상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수십만명이 모였다는 지원병 지원자들 가운데 당신의 조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창씨개명을 신청한 조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자신이 이런 발언을 하는 이유를 "규탄부터 하고 보는 당신의 폭력이 한 사람을 사정없이 죽이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순결 강박, 친일 강박증이 이 모든 걸 만든다"며 "치유하려면 오욕을 내 것으로 끌어안는 태도부터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역사 강사 배기성 씨는 13일 유튜브 채널 '최욱의 매불쇼'에 나와 "과거 일본군 병사와 위안부가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고 망언을 늘어놓은 박 교수가 또다시 수많은 일본 식민지배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씨는 특히 "치유하려면 오욕을 내 것으로 끌어안는 태도" 운운한 것은 일제 식민 지배에 희생된 많은 이들을 참담하게 모욕하는 언동이라고 격분했다.

 

재판정의 죽산 조봉암. 그는 늘 의수였던 일곱 손가락을 가리기 위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마치 결박당한 것처럼 보이는 자세로 앉아 있곤 했다. 

 

그는 죽산 조봉암이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재판받을 때 왜 늘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는지 아느냐고 진행자 등에게 묻고는 일곱 손가락을 잃은 사연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만주의 교도소에서 7년 수감돼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첫사랑이었던 아내가 옥바라지를 하다 동사했다는 소식을 전하던 일본인 간수가 '아내가 세상을 떠나게 만들었으니 너 같은 존재는 목숨을 끊는 게 낫지 않느냐'고 모욕하자 흥분해 이로 손가락들을 끊었는데 실제로 끊어졌다는 것이다. 너덜너덜해진 손가락들을 당국이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그 상태로 지내다 감옥을 나와서야 어렵사리 의수를 마련해 손가락들을 감춘 채 살아갔다는 슬픈 얘기를 전했다. 

 

배 강사는 "이런 잔인하게 슬픈 얘기들을 안다면 어떻게 감히 '오욕을 내 것으로 끌어안으라'고 망발을 늘어놓을 수 있느냐"고 따져물었다.

 

당연히 누리꾼들의 박 교수 비판도 이어졌다. 한 누리꾼은 "시대적 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업을 수행한 '구조적 친일'과는 다른 문제"라며 안상호가 당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어를 사용하지 않고 의복과 음식, 생활방식 등을 일본식으로 했다고 자랑한 것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생계형 협력과 자발적 내선일체를 같은 선상에 놓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안상호처럼 최초의 서양의사 가운데 한 명이었던 김필순, 이태준, 박서양 등은 근대 의학을 배운 엘리트였지만 망명과 의료 활동, 독립운동 지원의 길을 선택했다. 따라서 "그 시대에는 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만으로 모든 행적을 덮기는 어렵다는 비판이 나온다.

 

또 다른 누리꾼은 "그럼 독립운동가들은 물욕이나 명예욕이 없어서 목숨 걸고 항일했느냐"며 "시대가 지났다고 친일 매국노들이 이해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지금이라도 청산해야 할 대상"이라고 비판했다.                                                  < 임병선 기자 >

 

 

 

100년 전에는 나라를 지키려 했고,
오늘은 우리말을 지키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면우 곽종석 선생의 후손이
30년 가까이 이어 온 ‘우리말 독립운동’

 

남상락 자수 태극기, 한국독립운동인물사전

 

독립운동가 남상락 선생께서 손수 만드신 자수 태극기가 물결치는 광복절입니다. 올해로 광복 81돌을 맞았습니다. 81년 전 우리는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나라를 빼앗겼던 겨레가 다시 나라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광복절을 맞을 때마다 저는 한 가지 물음을 던져 보게 됩니다.

 

나라의 '광복'은 이루어졌는데 우리말의 '광복'도 이루어진 것일까요?

 

우리는 오늘도 수많은 어려운 한자말과 외래어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정기관의 문서도, 학교의 배움말도, 언론의 기사도, 새로운 기술의 이름도 많은 사람에게 낯선 말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제는 생성형 인공지능까지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달라진 세상에서 만들어지고 퍼지는 말 가운데 우리말의 자리는 얼마나 든든하게 지켜지고 있을까요?

 

저는 그래서 오래 전부터 ‘우리말 독립’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우리말 독립'은 한자말이나 외래어를 모두 몰아내자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의 말과 문화를 닫아걸자는 것도 아닙니다. '토박이말'을 바탕으로 우리말을 튼튼하게 가꾸고, 필요한 말은 우리 힘으로 살펴 받아들이며, 우리 생각과 삶을 우리말로 당당하게 펼칠 수 있는 언어의 주권을 세우자는 뜻입니다. 저는 그 일을 서른 해 가까이 해 오고 있습니다.

 

면우 곽종석 선생상, 유림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공가의 후손, 교실에서 우리말 독립을 시작했습니다

 

저의 외증조부는 을사늑약 뒤 항일 의병을 일으키고 유림 독립운동인 파리장서 운동을 이끄셨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이십니다. 증조부께서도 일제강점기에 단발령과 창씨개명을 거부하시며 겨레의 자존을 지키며 사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선조들의 이야기는 제게 단순한 집안의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는 이 물음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아왔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 답을 조금씩 찾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어려워하는 까닭이 정말 아이들의 능력이 부족해서일까요? 혹시 교과서에 나오는 낯선 말 때문에 배우기도 전에 겁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교실에서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말을 옛날 교과서에서 썼던 쉬운 우리말로 풀어 주었습니다.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맞모금', '약분' 같은 낱말을 아이들이 그 말의 뜻과 생김새를 바로 떠올릴 수 있도록 '포유류'는 '젖을 빨리니' '젖빨이짐승', '양서류'는 '물에도 살고 뭍에도 사니' '물뭍짐승', '파충류'는 '기어 다니니' '길짐승', '대각선'은 '마주보는 금끼리 이은 금이니' '맞모금', '약분'은 '분모와 분자를 똑같이 줄이니' '맞줄임'과 같이 풀어 설명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말을 쉽게 바꾸었더니 생각이 살아났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우리말을 살리는 일은 말만 살리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구나. 그것이 제가 평생 해 온 우리말 운동의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문해력 위기는 어려운 한자말이나 외래어를 몰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쉬운 토박이말을 바탕으로 생각의 뼈대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제 굳은 믿음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30년을 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저는 서른 해 가까이 학교 안팎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토박이말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수업도 하고 강연도 하고 글도 써 왔습니다. 언론과 방송을 통해 우리말의 가치를 알렸고, 시민들과 함께 토박이말을 배우고 나누는 일도 이어 왔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의 책임자들, 국회의원과 지방의원, 도지사와 시장, 교육감, 정치인과 유명 방송인들에게도 수없이 제안하고 도움을 부탁드렸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많지 않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체감할 만큼의 응답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뜻을 같이해 주시는 교사와 학부모, 시민의 수도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임인 (사)토박이말바라기의 참모람(정회원) 수를 보면 그런 현실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때로는 가까운 분들에게서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남들처럼 승진 점수나 챙겨 교감·교장이나 되지, 왜 돈도 안 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데없는 일에 돈과 시간과 힘을 낭비하느냐?,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그림8)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정위원들이 현충사를 방문하고 찍은 기념 사진이다. 표준어사정위원회에는 서울 출신 26명, 경기 11명, 각 도 대표 36명 등 73명의 위원이 참여해 표준어의 어휘를 사정(司正)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가운데 검은 안경테 안경을 쓴 이가 민세 안재홍이다. 출처: 한글학회

 

영화 《말모이》에서 주인공 아버지가 주인공을 보고 "조선이 독립될 것 같으냐? 조선이란 나라가 없어진 지 삼십 년이다, 삼십 년! 삼십 년을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라는 대사가 떠올랐고 영화 속 인물들이 품었던 ‘이 일이 정말 가능하겠느냐’는 의심이 오늘날 제 주변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0년 가까이 했는데도 세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것일까요? 저는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30년을 했는데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둘 이유가 아니라, 아직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제가 혼자 바라는 것만으로는 우리말의 큰 흐름을 바꾸기 어렵습니다. 정치인과 학자, 교육자와 시민 가운데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많아도 이루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모습은 때로 캄캄한 어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또 한 걸음을 내딛고자 합니다.

 

독립운동에도 이름 없이 함께하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 독립운동가들 곁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자신의 형편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독립운동 자금을 보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내놓고, 독립운동가들을 도와주셨습니다.

 

토박이말바라기 누리집

 

우리말 운동에도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토박이말바라기에는 해마다 회비를 꼬박꼬박 내주시는 참모람(정회원)도 계시고 일이 있을 때 마다 돈 또는 물품으로 우리말 독립운동을 이어 갈 힘을 보태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도 않고 특별한 보상을 받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도움에 보답하는 길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차가운 외면 속에서도 우리말의 가치를 믿고 손을 잡아주시는 그분들의 마음에 보답하는 길은, 어떤 비바람이 불어도 뜻을 굽히지 않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임을 굳게 믿기 때문에 이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자연 환경운동'이 이룬 기적처럼, '말 환경운동'의 새길을 열어야 합니다

 

저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을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종 큰 임금님처럼 백성의 말을 살피고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지도자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힘들게 이룬 부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내놓으셨던 분들처럼 우리말의 앞날을 위해 마음과 재산을 내놓으시는 훌륭한 기업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젠가는 많은 국민께서 이 일의 가치를 알아주시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가능성을 환경운동에서 보고 있습니다.

 

환경운동이 그랬듯, 우리말 운동도 언젠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환경을 지키자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합니다. 쓰레기를 줄이고, 물과 공기를 지키고, 생태계를 보전해야 한다는 데 많은 국민께서 공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수십 년 전 환경운동이 처음 태동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먹고살기 바빠 죽겠는데 무슨 환경 타령이냐", "당장 공장 돌려 돈 버는 게 급하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밥 먹여 주느냐"며 차갑게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일찍부터 환경의 소중함을 깨달은 분들이 계셨고, 그분들과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이 하나둘 모였습니다. 학교에서는 환경교육이 이루어졌고, 법과 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신문과 방송은 끊임없이 환경 문제를 알렸습니다. 기업도 환경을 중요한 과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환경운동은 우리 사회의 큰 흐름이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말 운동도 그렇게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말을 좀 편하게 쓰면 어떠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우리가 생각하고 배우고 서로의 느낌과 생각을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환경입니다. 자연환경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 애쓰듯이, 언어환경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우리말 환경 지킴이’로 키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저는 교육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토박이말을 배우고 익혀 마음껏 부려 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토박이말을 옛날에 쓰던 낡은 말로 여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쓸 수 있고, 새로운 생각을 담아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살아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토박이말을 잘 알고 부려 쓸 수 있게 된다면 그 아이들은 미래의 ‘우리말 환경 지킴이', '우리말 환경 운동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쓸모를 알고, 어려운 말을 만나면 왜 어려운지 묻고, 더 알맞고 쉬운 말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문해력의 한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해력은 어려운 낱말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을 듣고 읽어 뜻을 제대로 헤아리고, 자기 생각을 알맞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힘입니다.

 

앞으로 개정할 교육과정에는 누리과정부터 고등학교까지 넉넉하면서도 촘촘하게 토박이말을 어릴 때부터 즐겁게 배워 익혀 부려 쓸 수 있도록 성취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말의 바탕을 알고, 우리말로 생각하고, 우리말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우리말 도로 찾기-국립중앙박물관

 

글자는 지켜 왔지만, 말은 충분히 지키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되찾은 뒤 우리는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을 비롯해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우리 글자를 갖고 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글자는 말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릇을 잘 지키는 일만큼 그 안에 담긴 말의 삶을 돌보는 일도 중요합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말의 광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우리말의 민주화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행정과 교육과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여러 정책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겨레가 오랜 세월 이어 온 고유한 말, 토박이말을 가꾸고 살리는 정책은 어디에 있을까요?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정책과 운동이 있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언어환경을 건강하게 가꾸기 위한 사회적 노력은 충분할까요?

 

인공지능(AI) PG. 연합

 

이제는 이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습니다.

 

지은슬기(인공지능, AI) 시대, 우리말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무엇보다 지은슬기(인공지능, AI) 시대에는 이 문제가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아이들은 사람뿐 아니라 지은슬기(인공지능, AI)와도 말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은슬기(인공지능, AI)가 우리말의 뜻과 결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의 토박이말을 얼마나 풍부하게 알고 있는지도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저는 토박이말 자료와 옛말 자료를 살펴 지은슬기(인공지능, AI) 시대에 우리말의 바탕을 어떻게 넓혀 갈 수 있을지 연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낯선 외국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우리말로 그 뜻을 헤아리고 알맞은 이름을 찾아보는 일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은슬기(인공지능, AI)가 우리말을 가르치는 시대가 아니라, 우리도 지은슬기(인공지능, AI)에게 우리말의 깊이와 결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새로운 언어 주권입니다.

 

광복 81돌, 이제는 함께 걸을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저는 지난 서른 해 가까이 혼자 앞장서 온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혼자는 아니었습니다. 학교와 강연장에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신 분들이 계셨고, 글을 읽어 주신 독자들이 계셨습니다. 토박이말을 함께 배우고 쓰자며 손을 내밀어 주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무엇보다 말 없이 회비를 내며 토박이말바라기를 지켜 주신 참모람들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이 계셨기에 저는 지금도 이 길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광복 81돌을 맞아 다시 한 번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나라를 되찾은 지 81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말의 광복도 함께 생각해 주십시오.

 

정치인들께는 토박이말 정책을 고민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교육자들께는 아이들의 배움 속에 토박이말의 자리를 넓혀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학자들께는 우리 토박이말의 가치를 더 깊이 연구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언론과 방송인들께는 쉬운 우리말을 쓰는 일이 얼마나 큰 사회적 힘을 갖는지 보여 주고 쉬운 토박이말을 바탕으로 한 말글 나눔을 일상화 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기업인들께는 돈이 되는 일만큼 다음 세대의 말과 문화를 위한 일도 가치 있다는 것을 살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는 하루에 한마디라도 토박이말을 더 살펴 써 보자고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서로 만나 힘과 슬기를 모을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일이 한 사람이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모이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광복은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나라를 되찾은 뒤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가꾸며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100년 전 독립운동가들께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내놓으셨다면, 오늘 우리는 다음 세대가 살아갈 말의 터전을 가꾸어야 합니다.

 

​방탄소년단(BTS)의 월드투어 '아리랑' 지난 11일과 12일 독일 뮌헨 공연 모습 @빅히트뮤직 X(트위터)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문화에 열광하는 오늘, 그 문화의 가장 깊은 곳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써 온 말이 있습니다. 노래도, 드라마도, 영화도, 음식도, 이야기도 결국 말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 고유의 말인 토박이말을 문화의 바탕으로 다시 바라볼 때입니다. 먹고사는 일도 중요합니다. 돈을 버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음 세대가 어떤 말을 배우고, 어떤 말로 서로 생각을 나누며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을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우리 고유의 글자인 '한글'을 지키는 일만큼이나, 그 글자에 담기는 알맹이인 우리의 고유한 말인 '토박이말'을 지키는 일에 국가적 힘을 쏟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말을 쓰느냐가 내일 아이들이 살아갈 언어의 풍경을 만듭니다.

 

광복절에 태극기를 다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우리 토박이말 한마디를 더 살펴 써 보시면 어떨까요? 그리고 저와 같은 뜻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이제는 혼자 걷지 말고 함께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서른 해 가까이 걸어왔습니다. 아직 세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이 길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100년 전에는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고, 오늘은 우리말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을 함께 걸을 한 분 한 분을, 저는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 이창수 기자 >

 

이승만이 지워버릴 뻔한 귀한 한글 이름 ‘서울’

 

한성→ 경성→ 서울, 이름 변천사에 아롱진 사연들

조선 때부터 백성들은 한성 보다 서울 더 즐겨 써
80년 전 서울시 헌장, 미군정 법령으로 서울 확정
미국 유학파 김형민 초대 서울시장이 강력 주장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자유시→ 서울특별시
이승만 호 딴 우남시로 바꾸려다 반발 크자 철회
중국어 표기는 수교 이후 ‘汉城’에서 ‘首尔’로 변경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경성부(京城府)를 서울시라 칭하고 차(此)를 특별자유시로 함. 서울시의 관할 구역은 현 중구, 종로구, 동대문구, 성동구, 서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영등포구로 하되 금후 법률에 의하야 차를 변경함을 득(得)함.”

 

1946년 8월 10일 미군정장관 아처 린 러치 소장이 공표한 서울시 헌장의 제1조 조문이다. 미국의 도시자치 헌장을 본떠 만든 7장 58조의 서울시 헌장은 경성(京城)이란 수도 명칭을 서울로 바꾸고 경기도에서 분리해 도(道) 수준으로 승격시킨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는 그해 9월 18일 공표되고 10일 뒤부터 시행된 미군정 법령 제106호에 의해 확정됐다. 서울특별자유시가 서울특별시가 된 것은 지방자치법이 발효된 1949년 8월 15일이었다.

 

1946년 8월 10일 미군정청 관보에 실린 서울시 헌장 한글 공포문 표지(왼쪽)와 영문 공포문 본문 첫 장(오른쪽), (서울시)

 

서라벌 소부리 쇠벌… ‘서울’의 어원은 무엇일까

 

서울이란 이름이 공식화된 지 올해로 80주년을 맞았다. 훨씬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서울이라고 불렀으나 법령으로 정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어서 그때부터는 글로도 모두 서울이라고 썼다. 마을이나 도로에 한글 지명을 쓰는 경우는 있지만 도시명을 우리말로 지은 것은 서울이 유일하다.

 

사전적으로 ‘서울’은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첫 번째는 보통명사로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곳’이고, 두 번째는 고유명사로 ‘한강 하류에 위치한 면적 605㎢의 도시’를 가리킨다.

 

서울의 어원은 신라 수도 서라벌(徐羅伐·경주)에서 비롯됐다는 학설이 다수다. 소수설은 백제 수도 사비(泗沘·부여)를 일컫는 소부리(所夫里·소벌)나 후고구려(태봉) 수도 철원(鐵原)의 우리말 쇠벌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도성의 범위를 놓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논쟁을 벌이다가 눈 녹은 자리를 경계로 삼았다는 일화를 들어 ‘눈울타리’를 뜻하는 ‘설(눈)울’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일찍이 백제가 서울의 한강 남쪽에 위례성(慰禮城)을 쌓고 도읍을 삼았다가 고구려가 점령해 남평양성(南平壤城), 혹은 북한산군(北漢山郡)으로 불렀다. 통일신라 때는 한산주(漢山州)에 속한 한양군(漢陽郡)이었다. 고려에 들어와 양주(楊州)로 바뀐 뒤 문종 때인 1067년 남경(南京)으로 승격했다. 숙종은 비기(秘記) 예언에 따라 1104년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궁궐을 짓고 천도를 추진하기도 했다.

 

260년 전 서울 경계는 중랑천(동), 불광천(서), 한강(남), 북한산(북)

 

조선 태조 이성계는 개국 2년 만인 1394년 한양으로 천도했으니 올해로 정도(定都) 632주년이다. 왕자의 난을 거치며 1399년 정종이 개경으로 환도했으나 1405년 태종이 다시 옮겨오면서 지금까지 수도의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자 2004년 헌법재판소는 관습헌법을 내세워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인왕산의 서울 성곽. 조선 태조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뒤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따라 도성을 쌓았으나 한성부 권역은 성밖 10리까지였다. (이희용 촬영)

 

한양 도성(한성)은 내사산(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 마루금을 따라 쌓았지만 한성부 구역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해서 도성 밖 10리까지였다. 지형에 따라 경계가 일정하지는 않아 동북쪽에는 ‘5리를 더했다’는 가오리(加五里)란 지명도 있다. 일설에는 미아리고개에서 장사 지내는 곡소리가 임금에게 들리지 않도록 5리를 더 가라고 했다고 한다. 1765년(영조 41년) 간행된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 따르면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불광천, 남쪽은 한강, 북쪽은 북한산까지를 경계로 삼고 벌채나 매장 등을 금했다.

 

1820년경 한양 도성과 주변의 모습을 그린 실측 지도 수선전도(首善全圖).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벼슬 이름은 판한성부사와 한성부윤을 거쳐 예종 때 한성판윤으로 개칭했다. 품계는 판서와 같은 정2품이었다. 조선 왕조 512년 동안 한성판윤이 2012대를 내려왔으니 평균 재임 기간은 3개월에 불과했다. 특히 고종 재위 43년간은 429명이나 됐다.

 

한성부 청사는 이조와 호조 사이 지금의 KT 광화문빌딩 자리에 있었다. 행정구역은 5부(部) 52방(坊)으로 구분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양주군 고양주면 일부(중곡동 일대)와 고양군 하도면 일부(수색 일대)가 각각 한성부 두모방과 연희방에 편입되고 5부가 5서(署)로 개편됐다.

 

1904년의 한성부 관아 정문. KT 광화문빌딩 자리에 있던 한성부는 조선 말기 들어 여러 군데를 전전했다. (서울역사박물관)

 

19세기 독립신문도 발행처를 서울로 표기

 

일반 백성은 공식 명칭인 한성보다 서울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덕무의 『앙엽기』,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는 각각 ‘徐蔚(서울)’, ‘徐兀(서올)’, ‘徐鬱(서울)’로 표기했다. 서양인들도 서울로 불러 나라 밖에 그렇게 알려졌다.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은 국문판과 영문판에서 발행처를 각각 ‘조선 서울’과 ‘Seoul Korea’로 표기했다.

 

1896년 8월 27일 자 독립신문(62호) 한글판(위)과 영문판(아래). 발행처를 각각 ‘조선 서울’과 ‘Seoul Korea’로 표기했다. (독립기념관)

 

일제는 1910년 8월 27일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뒤 10월 1일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개칭하고 경기도 소속으로 격하시켰다. 성저십리 가운데 대부분을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시키고 일본인 거류지가 있는 용산 일대와 동대문·서대문·서소문 밖 일부만 경성부에 남겨놓았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5서는 5부로 환원되고 각 방은 동(洞)과 면(面)으로 바뀌었다. 일부 지역에는 통(通), 정(町), 정목(丁目) 등의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을 도입했다.

 

1936년 조선총독부가 대경성계획을 추진하면서 북쪽은 정릉천,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홍제천, 남쪽은 안양천과 대방천까지 경계가 늘어났다. 한강 이남의 영등포도 비로소 서울로 편입됐다. 1943년에는 구제(區制)를 실시해 7개구로 나누고 이듬해 마포구를 신설했다. 경성부 기관장은 초창기에 사무관급이었다가 1933년 이후 장관급으로 격상됐다. 18명 모두 일본인이었고 평균 재임 기간은 23개월이었다.

 

1930년대 경성(서울) 중심부 모습. 왼쪽의 경성부청(서울시청)에서 세종대로가 뻗어 있고 오른쪽 위에 지금은 철거되어 없는 조선총독부가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을지로 충무로 등 이름 붙인 2대 경성부윤 김형민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이뤄지자 금산 군수와 전남도청 관리를 역임한 김창영이 쓰지 게이고 경성부윤으로부터 업무를 인계받았다. 9월 9일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업무가 이원화됐다. 군정부윤은 제임스 킬러프 소령에 이어 제임스 윌슨 중령, 민정부윤은 총독부 관리 출신 이범승에 이어 김형민이 각각 맡았다. 각각 1대와 2대로 치지만 김창영을 초대 경성부윤으로 보기도 한다.

 

김창영과 이범승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수록된 인물인 반면 김형민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다.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와 미시간대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할 때 친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됐다. 해방 직후 3·1석유상사를 운영하다가 웨슬리언대 인맥으로 주한미군 사령관 존 하지 중장에게 발탁돼 경성부윤이 된 데 이어 1946년 9월 28일 서울특별자유시 초대 시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나이 39세로 최연소 기록이다.

 

광복 후 2대 경성부윤이자 초대 서울시장인 김형민. 최연소 서울시장인 그는 일본식 지명을 우리 식으로 바꾸고 서울시 이름을 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독립기념관)

 

김형민은 1946년 6월 30일 부임하면서 일제 잔재인 정, 통, 정목을 각각 동, 로(路), 가(街)로 바꾸면서 한국사의 위인 이름을 붙였다. 황금정통(黃金町通·고가네마치도리)은 을지로, 본정통(本町通·혼마치도리)은 충무로, 죽첨정(竹添町·다케조에초)은 충정로, 원정(元町·모토마치)은 원효로가 됐다.

 

미군정이 서울이란 이름을 정할 때도 김형민이 강력하게 서울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도 식자들은 한성 등 한자식 옛 명칭을 선호했다. 각계 인사 90명으로 구성된 경성부 고문회의는 “한성시라고 쓰고 서울시라고 읽는다”는 어정쩡한 결론을 냈다. 그러나 미군은 영문 표기 ‘Seoul’과 일치하는 서울을 선호해 미국 유학파인 김형민과 의견이 일치했다.

 

김형민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로도 넉 달 더 시장에 재직하다가 윤보선에게 물려줬다. 3·1석유상사로 돈을 벌어 대한극장도 세웠으나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낸 국쾌남에게 넘겼다. 1998년 5월 2일 별세해 고향인 전북 익산에 묻혔다가 2003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됐다.

 

미군정청 주요 인사들. 왼쪽부터 민정장관 안재홍, 사령관 존 하지 중장, 부사령관 앨버트 브라운 소장, 김형민 서울시장, 고문 서재필. (국가기록원)

 

서울시 명칭까지 우남 이승만에게 바치려던 아첨꾼들

 

서울이란 명칭은 법제화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아 도마에 올랐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5년 9월 18일 개정을 제안하는 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서울이 수도를 일컫는 보통명사이지 땅 이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성 이름을 묻는 프랑스 선교사의 질문에 사람들이 서울이라고 답하자 프랑스 사람이 소리낼 수 있는 음을 취해 쓴 것이 외국에 잘못 알려졌으니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뜨거운 논쟁이 펼쳐졌다. 이승만에게 아부하려는 권력 추종자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당대의 지식인들도 가세했다. 한글 전용론자인 최현배는 ‘큰 벌판’을 뜻하는 ‘한벌’을 제안했다. 국무위원과 정부위원 등으로 수도명칭제정연구위원회가 발족했고 서울시도 수도명칭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여론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이승만 호인 우남(雩南)이 1423표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한양 1117표, 한경(韓京) 631표, 한성 353표였다.

 

당시는 파고다공원(탑골공원)과 남산공원 등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지고 남산 정상의 팔각정과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건설 중이던 시민회관을 각각 우남정과 우남회관으로 명명하는 등 이승만 우상화가 한창일 때였다. 이승만시라고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1950년대 후반에 촬영한 서울 남산 정상의 팔각정. 우남정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수도 이름을 살아 있는 집권자의 호로 바꾸려는 시도는 거센 반발을 불렀다. 결국 이승만은 1957년 1월 20일 한도(韓都)가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하며 “내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서울의 이름을 우남특별시로 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여러 사람이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렇게 될 것(우남시로 바뀔 것)이니 그냥 둬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내가 강권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4·19혁명이 일어나 없던 일이 됐다.

 

서울대 총장 모시려다 한성대 총장 잘못 초청

 

80년 전 서울이란 명칭이 확정됐어도 한자 문화권에서는 한동안 옛 명칭대로 불렀다. 그래도 일본은 일찍부터 가타가나를 써서 ‘게이조(京城)’ 대신 ‘ソウル(소우루)’로 바꿔 부르고 있는 반면 중국은 늦게까지 ‘한청(汉城·漢城)’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서울과 한성을 다른 도시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한성상회와 서울상회를 구분하지 못하고 서울신문과 서울방송을 한성신문과 한성방송이라고 불렀다. 서울대 총장을 초청하려다가 한성대 총장에게 초대장이 잘못 가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인왕산 범바위에서 남산 쪽으로 내려다본 서울시 야경. 서울시는 세계인들이 가장 방문하고 싶은 도시의 하나가 됐다. (이희용 촬영)

 

정부는 1992년 한중 수교 직후부터 개선 방안을 마련하려고 했으나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나와 좀처럼 결론을 내지 못했다. 2005년 1월에야 중국식 발음으로 ‘서우얼(Shouer)’인 ‘수이(首尔·首爾)’로 확정하고 중국과 대만 정부에 협조를 요청했다. 관공서나 공항 등을 시작으로 바꿔나가고 있지만 아직도 기존 명칭대로 부르는 사례가 간혹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지형 특성을 반영하고 주요 관광명소를 시각화한 서울 일러스트 관광지도. (서울관광재단)

 

서울은 80년 전 이름이 법제화됐을 때보다 면적은 4배 이상, 인구는 10배 이상 늘어났다. 특히 1970년대 영동 지구 개발이 서울의 팽창을 가속화했다.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이란 의미였으나 1975년 성동구에서 떨어져나올 때 강남구로 명명되면서 차츰 사라지고 영동대교, 영동대로, 영동시장, 영동고등학교 등 일부에만 지명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서울의 구가 25개에 이른다.

 

서울의 발전은 외형적 성장에만 그치지 않았다. 1988년 올림픽 개최 이후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가 됐고 경제 성장, 민주 혁명, 한류 등으로 세계인이 가장 방문하고 싶어하는 도시의 하나가 됐다. 만일 그 이름이 서울이 아니라 우남이었어도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누릴 수 있었을까?                                                                                                < 이희용 기자 >

 

남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본 서울시 전경. 고층빌딩이 빼곡한 가운데 왼쪽부터 인왕산, 북악산, 낙산이 감싸고 있고 뒤로 북한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이희용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