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 칼럼 "슬픈 현실 인정할 때…다 끝나" "동맹국들, 트럼프 침략·탐욕에 저항 선택" "미국 동맹국, 자동으로 번영·안보 구가? 과거의 안일한 가정 더는 유효하지 않아"
"중견국들, 사안별로 작동하는 연합 구축" "패권국과 단둘이 협상한다면 약자 위치, 더 나은 대우 받고자 서로 경쟁할 건가?"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20일 스위스 다보스 포럼 연설이 지구촌에 큰 반향을 부르고 있다.
베네수엘라 불법 침공과 대통령 납치, 기소와 덴마크 반자치령인 그린란드 강탈 추진, 캐나다 51번째 주 편입 주장 등으로 대변되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힘'에 의한 일방주의와 약육강식 질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중견국들의 연대'를 통한 새로운 국제 질서의 구축을 호소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카니 총리는 이날 세계경제포럼(WEF) 연례회의 연설에서 "세계 질서의 파열, 즐거웠던 허구의 종말, 그리고 냉혹한 현실의 시작에 관해 얘기하고자 한다. 여기선 거대하고 주요한 강대국의 지정학이 어떤 한계나 제약에도 구속받지 않는다"라고 트럼프를 겨냥했다. 그는 "우리는 매일 강대국 경쟁 시대에 살고 있고, 규칙 기반 질서가 퇴색 중이며, 강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자는 당해야 하는 일을 당한다는 사실을 되뇌게 된다"라며 '힘의 질서' 본질을 간파한 투키디데스 격언을 인용했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20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례 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6. 01. 20 [AFP=연합]
카니, 다보스 포럼서 '트럼프 야욕' 질타 "세계 질서 파열, 즐거웠던 허구의 종말"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주도 '규칙 기반 국제 질서'의 공과를 따졌다. 카니는 캐나다 같은 '중견국들'은 이 질서 속에서 예측 가능성이란 혜택을 보고 가치 중심적 외교 정책을 추구하며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는 규칙 기반 국제 질서 얘기가 부분적으로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면서 강대국들은 편의에 따라 스스로에 면죄부를 주고 무역 규칙은 비대칭적으로 집행되며, 국제법도 피고에 따라 달리 적용돼왔다는 점을 털어놨다.
실상이 그렇기는 해도, '규칙 기반 국제 질서'란 허구는 나름 유용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카니는 "특히 미국의 패권은 공공재의 제공, 공해상 항로 개방, 안정적 금융 시스템, 집단 안보, 분쟁 해결 체제 지원 등에 도움이 됐다"면서 그래서 '일부 거짓'을 알면서도 그 질서에 동참해왔다고 해명했다.
이젠 솔직해질 때가 됐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카니는 "우리는 전환이 아닌, 파열의 한복판에 있다"며 "지난 20년 금융, 보건, 에너지, 지정학 분야에서 터진 일련의 위기들은 극단적 글로벌 통합의 리스크를 드러냈고, 더 최근에는 강대국들이 경제 통합을 무기로, 관세를 지렛대로, 금융 인프라를 강압으로, 공급망을 착취할 취약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통합이 종속의 원천이 될 때 통합을 통한 상호 이익이란 거짓 속에서 살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약자들의 힘은 정직함에서 나온다"고 덧붙였다.
현 상황에 대해 "중견국들이 의존해 온" 세계무역기구(WTO), 유엔, 기후변화당사국총회(COP) 등 집단적 문제 해결을 위한 다자기구 자체가 위협받게 되면서, "많은 국가가 에너지, 식량, 핵심 광물, 금융 및 공급망에서 더 큰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동일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2일 스위스 다보스포럼 참석을 마치고 백악관으로 돌아왔다. 2026. 01. 22 [로이터=연합]
"미국 동맹국, 자동으로 번영·안보 구가? 과거의 안일한 가정 더는 유효하지 않아"
카니 총리는 "요새화된 국가들의 세상은 더 가난해지고, 더 취약하고, 지속 가능성이 떨어진다"라며 "강대국들이 권력과 이익의 거침없는 추구를 위해 규칙과 가치라는 가식마저 벗어 던진다면 거래주의로부터 얻을 이익은 복제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패권국들은 지속해서 관계를 수익화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동맹국들은 불확실성 대비하고자 다변화할 것이다. 보험을 들고 선택지를 늘려 주권을 재건할 것이다. 한때 규칙에 근거했던 주권은 갈수록 압박을 견뎌내는 능력에 기초하게 될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이 대목에서 카니는 "캐나다와 같은 중견국둘아 무력하지 않다...인권 존중, 지속 가능한 발전, 연대, 각 국가의 주권과 영토 보전이라는 우리의 가치를 포괄하는 새 질서를 구축할 역량이 있다"면서 중견국들의 연대를 호소했다.
카니는 "회복력에 대한 집단적 투자는 각기 요새를 쌓는 것보다 싸다. 표준 공유는 파편화를 줄인다. 상호보완은 포지티브섬게임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캐나다가 지리상 미국에 붙어 있고, 미국의 동맹국이 되면 "자동으로" 번영과 안보를 누릴 거라는 "과거의 안일한 가정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면서 핀란드 알렉산더 스투브 대통령이 말한 '가치 기반 현실주의'에 기초해 전략 태세의 근본적 전환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덴마크의 반자치령인 그린란드의 누크항에 보트들이 정박해 있다. 2026. 01. 22 [AP=연합]
'가치 기반 현실주의'로 원칙과 실용 추구 "중견국들, 사안별로 작동하는 연합 구축"
그러면서 "원칙적이면서도 실용적"인 게 목표라고 소개했다. 주권, 영토 완전성, 유엔 헌장에 부합하지 않는 무력 사용 금지, 인권 존중 등 "근본 가치들"에 대한 공약에선 원칙적이고, 때론 진보는 점진적이며 이해관계는 엇갈리고 모든 파트너가 우리의 모든 가치를 공유하는 건 아니란 점을 인정하는 점에선 실용적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우리는 더 이상 가치의 힘에만이 아니라, 우리 힘의 가치에도 의지하고 있다"며 ▲ 에너지, 인공지능(AI), 핵심 광물, 신규 무역로를 위한 1조 달러 투자 ▲ 2020년대 말까지 국방비 두 배 증액 ▲ 유럽연합(EU)과 포괄적 전략적 동맹 합의 ▲ 중국·카타르와 전략적 파트너십 체결 등 지난 6개월 4개 대륙에서 12개의 무역·안보 협정 체결 ▲ 인도, 아세안, 태국, 필리핀,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와 자유무역협정을 협상 진행 등을 대표적 사례로 제시한 뒤, "글로벌 문제 해결을 돕기 위해 '가변적 기하학(협력 구조)', 즉 공통의 가치와 이익을 바탕으로 사안별로 서로 다른 연합체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카니는 "이는 함께 행동할 충분한 공통분모를 지닌 파트너들과 사안별로 작동하는 연합을 구축하는 것이다"라며 "중견국들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식탁에 앉지 않으면 메뉴로 오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강대국들은 현재론 혼자 길을 갈 능력이 있다. 시장 규모와 군사력, 조건을 강요할 지렛대를 가지고 있다. 중견국은 그렇지 못하다"라고 지적했다.
트럼프에게 중국은 경쟁, 경계, 또 때로 경멸의 대상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는 중국은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잘 안다. ‘국가안보전략 202’는 중국과 관련해서는 다국적 접근법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도널드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10월 30일 부산에서 미중 정상회담을 마친 뒤 회담장을 나서고 있다. (연합)
"패권국과 단둘이 협상한다면 약자 위치, 더 나은 대우 받고자 서로 경쟁할 건가?"
카니는 "패권국과 단둘이 협상한다면, 우리는 약자의 위치에서 협상하게 된다. 제시된 것을 수용할 뿐이다...이건 주권이 아니라, 종속을 받아들이면서 주권이 있는 척 연기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강대국 경쟁의 세계에서 사이에 낀 국가들은 선택해야 한다. 더 나은 대우 받고자 서로 경쟁할 것인가, 아니면 연대해 영향력 있는 '제3의 길'을 만들 것인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견국들을 향해 세 가지를 호소했다.
첫째, 있는 그대로 현실을 말하라. 여전히 '규칙 기반 질서'가 작동하는 듯이 말하지 말고 강대국들이 경제 통합을 강압의 수단으로 사용해 이익을 추구하는, 격화된 강대국 경쟁 체제라고 말하라.
둘째, 일관되게 행동하라. 동맹과 경쟁자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하라. 중견국들이 한쪽의 경제적 협박은 비판하면서 다른 쪽의 협박엔 침묵하면 안 된다.
셋째, 옛 질서의 복원이 아닌, 새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연대에 나서자 등이다. 카니는 "강대국들엔 그들의 힘이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뭔가가 있다. 가식을 멈추고, 현실을 그대로 말하며, 국내에서 힘을 기르고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것이 캐나다의 길이다"라고 강조했다.
미국으로 압송되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홍콩 SCMP 캡처] 연합
NYT 칼럼 "슬픈 현실 인정할 때…다 끝나" "동맹국들, 트럼프 침략·탐욕에 저항 선택"
이 연설에 대해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프렌치는 '카니 독트린'이란 22일 자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우여곡절과 기복은 있겠지만, 슬픈 현실을 인정할 때가 된 것 같아 두럽다. 다 끝났다"라고 썼다. 그는 최근 노벨 평화상 수상 불발에 대한 불만으로 "더는 순수하게 평화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다"란 내용으로 노르웨이 총리에 보낸 트럼프의 서한과 카니의 다보스 연설을 거론한 뒤 "이번 주, 이 두 사건이 동시에 발생해 미국과 세계에 분명한 신호를 보냈다. 미국이 주도해 온 민주주의 동맹이 파열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맹과의 신의를 깼고, 우리 동맹국들은 트럼프의 침략과 탐욕에 굴복보단 저항을 선택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프렌치는 "카니가 기립 박수를 받은 이유는 굴복을 촉구해서가 아니다. 대신에 본질적으로 미국에 필적할 새로운 강대국을 창설할 수 있는 동맹화된 통합과 협력의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자존심이 있는 국가들은 속국이 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택은 저항이냐, 굴복이냐가 아니라, 저항의 형태를 결정하는 문제다. '중견국들'이 국가적 요새를 구축할 것인지, 미국을 뺀 새로운 동맹과 협정을 맺을지의 문제다"라고 주장했다. < 이유 기자 >
트럼프, 캐나다 총리 “패권” 비판에 “평화위 초청 철회” 뒤끝 작렬
22일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가 퀘벡시티에서 각료회의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발언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이 주도하는 ‘평화위원회’에 함께 하자고 초대했던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에 대한 초청을 철회했다. 카니 총리가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 종언을 고한 연설을 한 뒤로,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뒤끝’ 조처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각)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올린 ‘카니 총리에게’로 시작하는 글에서 “이 서한을 통해 평화위원회가 캐나다의 가입과 관련해 귀하에게 보냈던 초청을 철회함을 알린다”라고 밝혔다. 이어 평화위가 “역사상 가장 권위 있는 지도자들의 위원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20여개국이 참여한 평화위원회를 공식 발족했다. 캐나다는 평화위 초대를 수락하겠다면서도 영구 이사직 자리를 위해 거액을 지불하지는 않겠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 평화위는 10억달러를 내면 영구 이사직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각국에 제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카니 총리에 대한 초청을 거둬들인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외신들은 20일 카니 총리가 다보스 포럼에서 한 연설에 주목했다. 그는 직접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으면서도 “미국의 패권”을 언급하며 “강대국”들이 경제 통합을 “무기”로 휘두른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캐나다와 같은 중견국들이 불리하다며 뜻을 같이하는 중견국들끼리 세계 무대에서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오래된 세계질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도 했다.
이튿날 다보스 무대에 오른 트럼프 대통령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캐나다 총리의 연설을 봤다면서 “그는 그다지 고마워하지 않았다”며 “캐나다는 미국 덕분에 존재한다”, “다음 발언 때는 이 점을 명심하라”고 쏴붙였다.
22일 카니 총리가 다시 반격에 나섰다. 그는 이날 퀘벡시티에서 열린 각료회의에서 “캐나다와 미국은 경제, 안보, 풍부한 문화 교류 등 여러 분야에서 놀라운 파트너십을 구축해왔다. 하지만 캐나다가 미국 덕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캐나다가 번영하는 이유는 우리가 캐나다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캐나다 공영방송(CBC)이 전했다. < 김지은 기자 >
감정을 선택 · 증폭해 특정 방향으로 유도 민주주의 전복 않고도 기능 마비 시켜 해법은 비난 아닌 민주주의 확대와 진화
홍순구 작가
저는 앞선 칼럼에서 극우를 인간의 본성이나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반복되어 온 보편적 현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극우는 근대 이전 사회의 정치 형태도 아닙니다. 극우는 근대에 이르러 인간이 이성과 합리성, 과학과 산업을 통해 역사를 진보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된 이후, 그 확신이 현실의 정치 공간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파열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근대의 취약성에서 발생한 정치적 산물이라는 점을 전제로 삼았습니다. 근대는 인간 이성에 대한 강한 신뢰에서 출발했습니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국민국가의 형성은 인간이 스스로의 이성으로 사회를 설계하고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성과 합리성은 현실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국가 간 경쟁과 전쟁 동원이라는 정치 현장 속에서 점차 변질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고, 인류는 이성과 기술의 축적만으로는 공동체를 지켜낼 수 없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확인하게 됩니다.
국제연합과 세계인권선언은 이러한 역사적 파국 이후에 등장한 최소한의 반성적 장치였습니다. 인간의 존엄, 전쟁의 금기, 인권의 보편성, 협력과 공존의 원칙은 근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국제적 규범으로 제도화되었습니다. 이 규범을 정치제도의 형태로 구체화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물론 오늘날 세계 각국은 거의 예외 없이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현실의 정치제도가 본원적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사례는 너무도 많습니다. 선거는 존재하되 시민의 통제가 작동하지 않거나, 법치는 유지되나 권력이 상호 견제되지 않으며, 제도는 남아 있지만 주권재민의 실질이 소멸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인간 존중, 주권재민, 삼권분립에 따른 권력의 상호 견제를 골간으로 하는 정치제도로서, 더 큰 진보를 약속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오류를 교정할 수 있는 제도로서의 정치, 다시 말해 공존과 공영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적 대안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극우는 민주주의와 분명한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시민의 숙의와 책임, 권력의 제한과 통제를 전제로 하는 정치라면, 극우는 감정의 동원과 배제의 정당화, 권력의 집중을 통해 이 전제를 무너뜨립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가 지향해 온 정치제도가 공히 민주주의라는 사실은, 극우가 단순한 하나의 정치적 선택지가 아니라 현대 정치질서 그 자체에 대한 도전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구체적인 양상은 뒤에서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의 목적은 극우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극우를 인간의 감정 탓으로 환원하는 것도 이 글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그 반대입니다. 극우가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욕심, 혐오, 공포, 굴욕과 같은 감정을 어떻게 선택적으로 끌어내고, 결합하며, 정치적으로 조직하는지를 차분히 분석하는 일입니다. 극우는 감정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감정을 특정한 방향으로 배열하고, 그것을 정치적 행동으로 전환하는 기술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2편에서 다루고자 하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극우는 어떤 감정을 연료로 삼는가. 그 감정들은 왜 민주주의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동원되는가. 그리고 왜 이 감정의 정치가 민주주의와 공존할 수 없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극우는 언제든 다시 ‘자연스러운 선택지’처럼 등장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극우가 가장 먼저 손대는 영역, 즉 인간의 감정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욕심, 혐오, 공포, 굴욕. 이 네 가지 감정이 어떻게 결합되어 극우 정치의 핵심 동력이 되는지를 차례로 분석하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 제도와 권력의 문제로 논의를 확장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2021년 1월 6일, 도널드 트럼프의 ‘도난당한 선거’ 주장을 신봉한 지지자들이 미국 연방의사당에 난입한 장면. 이 사건은 민주주의가 외부의 쿠데타가 아니라, 선거·감정·선동을 통해 내부에서 마비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다. (미국 연방의사당 폭동, 워싱턴 D.C., 2021.01.06 /출처 : 로이터(Reuters), 게티이미지(Getty Images))
■ 극우가 포획하는 인간의 감정들
― 욕심·혐오·공포·굴욕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극우 정치는 이념이나 정책보다 먼저 감정을 호출합니다. 욕심, 혐오, 공포, 굴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감정이지만, 극우는 이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다루지 않습니다. 선택하고, 증폭시키고, 특정 방향으로만 흐르도록 조직합니다. 이 과정에서 감정은 개인의 심리 상태를 넘어 집단 동원의 연료가 됩니다. 따라서 이 절에서 던져야 할 질문은 “사람들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가”가 아니라, “누가, 어떤 목적을 위해, 어떤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해 이 감정들을 결합하고 동원하는가”입니다. 이 글에서 다루는 네 가지 감정—욕심(Desire/Greed), 혐오(Disgust), 공포(Fear), 굴욕(Humiliation/Resentment)—은 인간 감정의 전체 목록이 아닙니다. 이는 전체주의 연구, 정치심리학, 현대 극우 분석에서 극우 정치가 반복적으로 정치화해 온 핵심 정동의 교집합입니다. 민주주의가 인간의 감정을 억압하려는 체제가 아니라 감정이 직접 권력이 되지 않도록 완충하는 체제라면, 극우는 바로 그 완충 장치를 제거하고 감정을 곧바로 정치의 원리로 끌어올립니다.
● 욕심(Desire / Greed)
― 발전의 동력은 어떻게 탐욕과 약탈의 정치로 변하는가
욕심, 혹은 욕망은 본래 인간 사회의 발전을 추동해 온 중요한 동력이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자신의 성취를 확장하려는 욕망 자체는 비난의 대상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 욕망이 정치적으로 조직되는 방식입니다. 욕망이 제도 개혁이나 공공선의 확대를 향할 때, 그것은 사회의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몫의 회수’와 ‘특권의 정당화’로 번역되는 순간, 욕심은 더 이상 발전의 에너지가 아니라 탐욕과 약탈의 정치로 변질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욕심은 경제적 동기만이 아니라, 정치적 동원의 언어로 바뀝니다. 이 심리적·정치적 전환을 가장 체계적으로 분석한 연구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권위주의 성격 연구입니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테오도어 W.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입니다. 아도르노는 『권위주의적 성격(The Authoritarian Personality)』에서, 파시즘적 성향이 단순한 이념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불안과 좌절이 특정한 심리 경로를 통해 조직된 결과임을 분석했습니다. 그 핵심은 “위로는 동일시, 아래로는 공격”이라는 구조입니다. 대중은 강력한 지도자와 사회적 엘리트에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불안을 상쇄하고, 동시에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게 공격성을 전가함으로써 좌절의 출구를 찾습니다.
이 관점에서 파시즘은 단순히 질서와 권위를 숭배하는 이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안과 욕망을 결합해, “내 몫을 회수해야 한다”는 충동을 정치적 행동으로 바꾸는 방식입니다. 극우 세력은 집권 이전에는 기존 지배엘리트를 위선적 기득권으로 공격하고, 평등과 정의를 가로막는 장애물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나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곧바로 ‘질서를 지휘하는 지도자’에 대한 숭배를 요구하고, 그 체제가 지목한 약자 집단에게 분노를 집중시킵니다. 이 과정은 항상 “그것이 나의 이익이며,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언어로 포장됩니다. 아도르노의 분석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이유는, 극우 정치에서 대중의 욕망이 결코 자유로운 개인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불안 속에서 조직된 집단 심리로 작동함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 독일에서 나치즘은 경제 붕괴의 원인을 구조 개혁의 과제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독일인의 몫이 빼앗겼다”는 회복 서사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공산당과 유대인은 독일 대중의 정당한 몫을 가로챈 집단으로 지목되었고, 욕망은 곧 혐오와 결합했습니다. 이때 욕심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동력이 아니라, 타인의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자신의 몫을 되찾으려는 약탈적 충동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 구조는 오늘날 미국 극우 정치에서도 반복됩니다. 도널드 트럼프와 MAGA 정치가 지난 40여 년간의 신자유주의 정책 실패, 산업 공동화, 금융자본 중심 경제 구조를 문제 삼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구조 개혁이 요구되는 지점을 비켜가면서, 책임을 “외부”로 옮기는 방식으로 욕망을 조직합니다. 대신 “미국이 빼앗겼다”, “동맹국과 이주민이 백인 노동자의 일자리를 훔쳐갔다”는 서사를 끊임없이 반복해 왔습니다.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는 미래 비전이 아니라, 상실된 몫을 되찾겠다는 욕망을 집단적으로 자극하는 장치였습니다. 여기서 욕망은 구조 개혁의 요구가 아니라, 배제와 회수의 정치로 조직됩니다.
한국 극우 정치에서도 욕망의 정치화는 다른 언어를 사용할 뿐, 구조는 유사합니다. 특히 주목할 지점은 ‘공정’ 담론입니다. 공정한 경쟁은 분명 중요한 사회 원리입니다. 그러나 한국 극우가 2030 남성층을 중심으로 확산시킨 공정 담론은 사회적 정의라는 전제를 의도적으로 제거한 채 작동해 왔습니다. 구조적 불평등의 교정, 교육·고용·자산의 출발선 격차,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 같은 문제는 공정 담론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습니다. 이 공정 담론은 개인의 성공과 출세를 절대화합니다. 최고 엘리트 대학, 최고 부자, 승자만이 정당하다는 인식이 반복적으로 주입됩니다. 이 과정에서 권력자의 위법이나 내란 행위조차 “능력 있는 엘리트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합리화됩니다. 윤석열과 같은 권력자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옹호가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엘리트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공정 담론이 승자독식 구조를 ‘공정한 게임의 규칙’으로 미화한다는 점입니다. 모든 경쟁에서 능력 있는 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체제를 정의로 포장하며, 빈부 격차나 사회 이동성의 붕괴는 개인의 실패로 환원됩니다. 이 논리는 곧바로 강력한 반페미니즘과 결합합니다. "여성과 소수자가 남성의 몫을 빼앗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따라서 공정을 회복하려면 그 권리를 다시 회수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의 극우와 한국의 극우 청년층은 반페미니즘이라는 공동 전선을 형성합니다. 공정 요구의 이면에는 언제나 “내가 가질 몫을 누군가가 빼앗아갔다”는 프레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프레임이 반복 주입될수록, 욕망은 사회 기득권 구조를 향한 개혁 요구로 향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보다 약하다고 여겨지는 집단을 향한 적대와 배제의 감정으로 배출됩니다. 욕심이 정치적으로 조직되는 이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발전의 동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약탈을 정당화하는 감정이며, 민주주의를 경쟁의 공동체가 아니라 전리품을 둘러싼 투쟁의 장으로 전락시키는 위험한 에너지입니다.
● 혐오(Disgust)
― 혐오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허가’된다
인간은 낯선 타인을 만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혐오하지는 않습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실질적인 피해가 없는 한, 인간의 기본 반응은 경계이지 혐오가 아닙니다. 낯섦에 대한 경계는 진화적 반응일 수 있지만, 배척과 제거를 정당화하는 혐오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감정입니다. 혐오가 정치가 되는 결정적 순간은, 누군가가 “그들을 배제해도 된다”, “그들은 보호받을 자격이 없다”는 도덕적·사회적 허가를 내릴 때입니다.
이 지점을 가장 날카롭게 분석한 이론가가 마사 C.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 1947– )입니다.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Hiding from Humanity)』에서 혐오를 단순한 개인 감정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내부에서 붕괴시키는 정치적 결과물로 분석합니다. 그녀가 던진 핵심 질문은 “혐오는 언제 위험해지는가”입니다. 혐오는 사적 감정에 머물 때가 아니라, 공적 판단의 기준으로 승인되는 순간—즉 법과 정책, 행정 판단, 여론 형성의 정당한 근거로 받아들여질 때—비로소 민주주의의 원칙을 직접적으로 침식합니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혐오는 언제나 ‘비인간화’를 동반합니다. 혐오의 대상은 시민이 아니라 오염원, 위협, 짐승, 침입자로 재현됩니다. 이때 평등권은 자동적으로 배제됩니다. 극우 정치는 바로 이 지점을 활용합니다. 혐오는 증오보다 효율적입니다. 증오는 논쟁을 부르지만, 혐오는 토론의 대상 자체를 제거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혐오는 상대를 반박할 대상으로 남겨두지 않고, 공존의 자격 자체를 지워버립니다. “그들과 왜 공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순간, 민주주의는 작동을 멈춥니다.
여기서 ‘허가’가 실제로 작동하는 통로는 대체로 일정합니다. 먼저 정치 지도자의 언어가 “상식”과 “솔직함”의 이름으로 경계선을 넓힙니다. 다음으로 언론과 유사언론, 플랫폼 알고리즘이 그 언어를 반복·증폭시키며, 혐오를 ‘여론’의 형태로 굳힙니다. 마지막으로 행정과 제도의 언어가 그 여론을 ‘정상적 판단’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혐오는 사적 감정이 아니라 공적 규범이 됩니다. 바로 이 단계에서 배제는 차별이 아니라 “질서”가 되고, 공격은 범죄가 아니라 “자기방어”로 포장됩니다.
미국 극우 정치에서 이 구조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이주민을 ‘범죄자’, ‘오염된 존재’, ‘국가를 병들게 하는 침입자’로 반복적으로 묘사해 왔습니다. 그는 멕시코 이주민을 “범죄자와 강간범”으로 일반화하며 국경 장벽 건설을 정당화했고(The Washington Post, 2015.06.16), 무슬림을 대상으로 한 입국 금지 정책을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상식적 조치”로 설명했습니다(The New York Times, 2017.01.27). 또한 이주민이 “미국의 피를 오염시키고 있다(poisoning the blood of our country)”는 표현을 사용해 강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The Guardian, 2023.12.16). 이러한 발언과 정책에서 이주민, 무슬림, 성소수자는 정책적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미국 사회를 더럽히는 존재’로 재현됩니다. 그 결과 추방, 입국 금지, 가족 강제 분리와 같은 국가 폭력은 예외적 조치가 아니라 ‘질서 유지를 위한 정상적 행정’으로 포장되었습니다. 혐오가 공적 판단의 근거로 승인되는 순간, 인권 침해는 법과 상식의 이름으로 합리화됩니다.
한국에서도 혐오의 정치화는 점점 노골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혐중 정서’입니다. 중국인과 중국계 이주민은 부정선거의 배후, 범죄 집단, 질서를 파괴하는 집단으로 일반화되어 호명됩니다. 실제 범죄 통계나 제도적 근거와 무관하게, “중국인이 문제다”라는 단순화된 서사가 반복적으로 확산됩니다. 주요 관광지와 집회 현장에서 “차이나 아웃”, “중국인 추방”과 같은 구호가 등장하는 장면도 더 이상 예외적 현상이 아닙니다(서울경제, 2025.08.25).
이 혐오는 단순한 감정 표출에 그치지 않습니다. 음모론과 결합하면서 공적 정당성을 획득합니다. 중국이 선거를 조작하고, 여론을 통제하며, 한국 국가 주권을 침탈하고 있다는 서사는 사실 검증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상식’처럼 유통됩니다. 이때 중국인과 중국계 시민에 대한 배제는 인권 침해가 아니라 ‘국가를 지키는 행동’으로 포장됩니다(경향신문, 2025.02.02).
여기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누가 이 혐오를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이 혐오를 허가했는가입니다. 혐오는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승인됩니다. 정치 지도자, 언론, 영향력 있는 오피니언 리더가 “그 분노는 정당하다”, “그 혐오는 현실 인식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혐오는 사적 감정에서 공적 규범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그 이동이 제도와 행정 언어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혐오는 되돌리기 어려운 규범이 됩니다. 이 점에서 혐오는 네 가지 감정 가운데 가장 위험합니다. 욕심은 제어될 수 있고, 굴욕은 치유될 수 있으며, 공포는 완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혐오는 한 번 제도와 여론 속에 허가되는 순간, 타협과 복구가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혐오는 민주주의의 시민을 제거하고, 대신 ‘처리해야 할 대상’을 만들어냅니다. 극우 정치가 혐오를 가장 집요하게 동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혐오가 공적 언어가 되는 순간, 내부에서부터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이주민·외국인을 배제 대상으로 호명하는 구호와 상징이 집회 현장에서 공공연히 등장하는 장면. 혐오는 개인 감정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가 “배제해도 된다”고 허가할 때 공적 규범으로 전환된다. 출처 : 반이주·외국인 혐오 시위 장면 / 유럽·미국 사례 / AP·로이터 사진
● 공포(Fear)
― 민주주의를 폐기하지 않고 ‘잠시 멈추게’ 만드는 감정
공포는 위협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러나 극우 정치가 동원하는 공포는 자연 발생적 감정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설계되고 반복적으로 주입되는 정치적 장치입니다. 극우가 조작하는 공포는 실제로 발생한 단일 사건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특정 상태, 특정 상황이 “이미 도래했거나 곧 도래할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대중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위협, 혹은 과장된 위험에 노출되며, 그 결과 공포는 현실 인식이 아니라 정치적 동원의 감정으로 전환됩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공포가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권력 전략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입니다. 독일 나치즘은 집권 직후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체제 전복 음모로 규정함으로써 “국가가 내부의 적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집단적 공포를 확산시켰습니다. 실제 위협의 실체와 무관하게, 공포는 ‘예외적 조치’를 요구하는 명분으로 기능했습니다.
이 구조를 가장 날카롭게 이론화한 인물은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입니다. 다만 분명히 할 점은, 슈미트가 이 개념을 전체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치즘의 결단적 권력 행사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제시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에서 “실질적인 주권자는 비상 상태를 결정하는 자”라고 규정하며, 비상사태가 선언되는 순간 민주적 규범과 법적 절차는 유보되고 권력은 ‘보호자’를 자처한 자에게 집중된다고 보았습니다. 슈미트에게서 공포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예외를 항구적 통치 원리로 전환시키는 정치적 기제였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이론은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분석하는 통찰이면서 동시에, 전체주의 권력을 합리화하는 위험한 논리로 작동했습니다.
이 틀로 보면, 도널드 트럼프의 행위는 우발적 선동이 아니라 일관된 공포 정치의 귀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트럼프는 2020년 대선 패배 이후, 선거 결과를 ‘도난당한 선거(stolen election)’로 규정하며 지지자들에게 체제 붕괴의 위기의식을 반복적으로 주입했습니다. 그는 연방 사법부, 주 정부, 선거관리기구까지 모두 “부패한 체제”로 묶어 지칭했고, 그 결과 2021년 1월 6일 미 의사당 점령은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헌정 질서를 되찾기 위한 행동”이라는 자기정당화 속에서 발생했습니다(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 2021.01.06;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 2021.01.06; 로이터(Reuters), 2021.01.07). 이 과정에서 핵심은 실제 권력 장악이 아니라, 민주적 권위의 무력화였습니다. 의회와 선거 제도가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체제로 묘사될 때, 비상적 개입은 ‘필요한 선택’으로 둔갑합니다. 트럼프의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 트럼프는 2기 행정부 출발 이후, 지속되는 자신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체제 전복 세력”으로 규정하며 주방위군 투입과 주둔을 정당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WTTW, 2025.06.10; KCRA, 2025.06.10). 주방위군의 문제는 실제 투입 여부보다, 군사적 상징이 민주적 갈등 해결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곧 “정치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 상황”이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낳습니다. 공포가 충분히 조성되면, 군의 존재 자체가 질서와 안정을 상징하는 정치적 언어로 기능하게 됩니다.
한국의 경우도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령을 언급하며 야당과 비판 세력을 “종북”, “공산전체주의”, “입법 독재 세력”으로 규정하는 언어를 반복해 왔습니다(MBC, 2023.10.29; 매일노동뉴스, 2024.12.05). 이 담론의 핵심은 실제 안보 위협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국가가 이미 ‘비상 상황’에 들어섰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있습니다. 입법부의 견제, 사법적 비판, 시민사회의 반대는 정상적인 민주적 갈등이 아니라 ‘체제 붕괴의 전조’로 재구성됩니다. 이때 공포는 말에 그치지 않고, 국가의 권력 장치를 호출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공포 담론이 반복될수록, 치안·수사·사법의 언어가 정치의 전면으로 이동하고, 반대는 비판이 아니라 ‘위험’으로 취급됩니다. 이때 계엄령은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공포 정치가 도달하고자 하는 상징적 종착점입니다. 계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순간, 민주주의는 공식적으로 폐기되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정지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슈미트가 말한 예외 상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작동합니다. 공포는 민주주의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대신 “지금은 평상시가 아니다”라는 말로 민주주의를 잠시 멈추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잠시’는 언제든 권력에 의해 연장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공포는 극우 정치의 가장 효율적인 감정입니다. 혐오가 적을 만들고, 분노가 동원을 낳는다면, 공포는 예외적 권력을 요청하게 만듭니다. 민주주의는 공포 속에서 가장 쉽게 스스로를 유보합니다. 이 때문에 공포 정치에 대한 경계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제도적·시민적 대응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공포가 예외를 부르고, 예외가 권력을 고착화한다는 이 오래된 메커니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 굴욕(Humiliation / Resentment)
―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복수를 호출하는 정치
굴욕은 단순한 좌절이나 실패의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지위가 하락했다고 인식할 때, 그리고 그 하락이 ‘정당하지 않다’고 해석될 때 형성되는 감정입니다. 이 감정은 쉽게 정치화되며, 특히 민주주의 체제에서 자신의 우월성이나 기득권이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강력한 정치적 원한으로 전환됩니다.
이 감정을 현대 정치이론의 차원에서 분석한 대표적 이론가가 웬디 브라운(Wendy Brown, 1955– )입니다. 브라운은 『상처 입은 정체성의 정치(States of Injury)』에서, 사회적 좌절과 인정의 상실이 어떻게 집단적 정체성 정치로 고착되는지를 분석합니다. 그녀에 따르면 굴욕은 개인의 심리 상태가 아니라, 제도적 실패와 사회적 배제 경험이 축적되며 형성되는 구조적 감정입니다. 이 감정은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하는 정체성을 낳고, 그 피해 의식은 곧 ‘되갚아야 할 과거의 모욕’으로 재서사화됩니다. 브라운 이론의 핵심은, 극우 정치가 굴욕을 미래를 향한 개혁의 동력으로 전환하지 않고, 과거의 상실과 모욕을 복수해야 할 부채로 전환시킨다는 점입니다. 이때 민주주의의 시간 감각은 왜곡됩니다. 민주주의는 본래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공공선을 확장하는 제도이지만, 굴욕 정치 속에서는 과거의 질서를 회복하거나, 잃어버린 위계를 되찾는 것이 정치의 목표로 설정됩니다.
이 구조는 미국에서 분명하게 관찰됩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이 동맹국과 외국에 의해 “약탈당했다”, 이주민과 소수자가 “정당한 미국인의 일자리와 지위를 빼앗았다”는 서사를 반복적으로 제시해 왔습니다(ABC News, 2025.04.03; C-SPAN, 2024.09.21).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제 지표의 실제 변화가 아니라, “우리가 예전만큼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집단적 굴욕감의 주입입니다. 트럼프 정치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는 미래 비전이라기보다, 상실된 위계에 대한 복수 선언에 가깝습니다.
한국 극우 정치에서도 유사한 굴욕 감정의 동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한국 극우는 자신들을 민주화 이후의 ‘패배한 주류’로 상정하며, 과거 권위주의 시기의 국가·안보·성장 담론이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을 집단적 모욕으로 재해석합니다. 이 과정에서 민주적 제도는 진보가 아니라 ‘빼앗긴 권력’의 증거로 왜곡됩니다. 구체적으로, 야당의 입법 활동을 “입법독재”로 규정하거나, 사법부의 판결과 헌법적 견제를 “국민 다수의 의사를 무시한 엘리트의 폭거”로 호명하는 담론이 반복되었습니다(경향신문, 2025.01.25; 경향신문, 2026.01.14). 이는 단순한 제도 비판이 아니라, “원래 우리가 지배해야 할 국가를 도둑맞았다”는 굴욕 서사의 재생산입니다. 더 나아가 일부 극우 담론에서는 1987년 체제 이후의 민주화 자체가 ‘좌파에게 국가를 내준 치욕의 역사’로 묘사되며, 과거 권위주의적 국가 운영 방식이 오히려 ‘정상 상태’였다는 인식이 은근히 확산됩니다. 이때 굴욕은 경제적 불안이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대신, 특정 집단―야당, 진보 시민사회, 언론, 사법부, 혹은 ‘좌파 엘리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감정 정치로 고정됩니다. 이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제도의 개선 과제가 아니라, 과거의 모욕을 설욕하지 못하게 막는 적과의 전쟁으로 바꾸는 효과를 낳습니다. 결국 굴욕의 정치는 민주주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는 정치이며, 미래의 가능성을 닫고 과거의 위계를 복원하려는 충동입니다. 브라운의 분석이 오늘날 다시 읽히는 이유는, 극우 정치가 왜 정책 실패나 비전의 빈곤을 감정의 복수극으로 대체하는지를 정확히 설명해주기 때문입니다. 굴욕이 정치의 중심 감정이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토론의 장이 아니라 복수의 무대로 변질됩니다.
■ 감정은 어떻게 제도가 되는가
― 극우 정치의 제도적 확장 경로
앞에서 살펴본 욕심, 혐오, 공포, 굴욕은 그 자체로는 아직 정치 체제가 아닙니다. 감정은 흩어져 있을 때 정치가 되지 못합니다. 극우 정치의 핵심은 이 감정들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고, 일상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제도적 통로를 확보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극우는 감정을 동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감정이 국가 운영의 논리처럼 보이도록 제도화합니다. 이 지점에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은 다음입니다. 극우는 왜 선거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가. 왜 특정 정치인의 퇴장 이후에도 유사한 언어와 행동 양식이 반복되는가. 그 이유는 감정이 권력 장치로 고정되는 순간, 극우가 하나의 정치 세력이 아니라 정치 운영 방식으로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극우가 감정을 제도로 전환하는 경로는 대체로 세 단계를 거칩니다. 첫째, 감정의 정당화(正當化)입니다. 욕심은 ‘공정’으로, 혐오는 ‘상식’으로, 공포는 ‘안보’로, 굴욕은 ‘국민 자존’으로 번역됩니다. 이 단계에서 감정은 더 이상 개인의 심리가 아니라, 공적 판단의 기준으로 승인됩니다. 분노는 ‘솔직함’이 되고, 배제는 ‘질서’가 됩니다.
둘째, 감정의 전문화(專門化)입니다. 경찰, 검찰, 정보기관, 사법부, 행정 권력, 그리고 미디어와 플랫폼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감정들을 관리하고 재생산합니다. 공포는 치안과 안보의 언어로, 혐오는 법 질서와 도덕의 언어로, 욕심은 경쟁과 성과의 언어로, 굴욕은 국가적 위기의 언어로 재구성됩니다. 이때 정치의 실패는 사라지고, “관리의 필요성”만 남습니다.
셋째, 감정의 일상화(日常化)입니다. 비상은 사건이 아니라 상태가 되고, 예외는 임시가 아니라 상시가 됩니다. 시민은 판단의 주체가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 되며, 정치적 갈등은 숙의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 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극우는 더 이상 거리의 선동이 아니라, 행정과 사법, 미디어의 일상 언어 속에 스며듭니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극우는 민주주의를 전복하지 않고도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제도는 남아 있으나, 그 제도를 작동시키는 시민적 정신은 소진됩니다. 투표는 존재하지만 책임은 사라지고, 법은 남아 있지만 정의는 공백이 됩니다. 그러면, 이 제도적 확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취하는지, 다시 말해 치안국가, 사법정치, 플랫폼 권력, 비상상태의 일상화, 반계몽, 시민의 해체라는 여섯 개의 구조가 어떻게 하나의 극우적 질서를 구성하는지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감정이 아니라 권력의 형식이 문제입니다.
시위와 정치적 갈등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도심과 국가기관 주변에 배치된 주방위군 병력. 군의 존재가 ‘질서와 안정’의 상징으로 소비되는 순간, 민주적 갈등은 정치가 아니라 안보의 문제로 재구성된다. 출처 : 미국 주방위군 배치 장면, 2021~2025 / AP·로이터
■ 극우가 지향하는 정치체제
― 윤석열 정부와 트럼프 2기, MAGA 체제가 드러낸 극우의 실체
저는 앞선 글에서 극우를 일시적 감정 폭주나 특정 집단의 일탈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욕심·혐오·공포·굴욕이라는 인간의 감정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선택되고, 조직되며, 제도화되는지를 분석했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분명합니다. 이 분석이 현실 권력의 작동 방식과 어떻게 맞물리는지, 다시 말해 극우가 실제로 어떤 국가를 만들려 했고, 만들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 기준에서 볼 때, 지난 윤석열 정부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1·2기, 그리고 이를 떠받치는 MAGA 세력은 극우 정치의 전형적 모습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2026년 현재는 트럼프 2기가 출범한 지 1년을 넘긴 시점으로, 극우가 더 이상 ‘가능성의 위험’이 아니라 현실의 통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국면입니다. 관건은 이들이 스스로를 무엇이라 부르느냐가 아니라, 극우의 작동 원리와 목표를 권력 행사로 구현했는지 여부입니다. 앞서 제시한 네 가지 기준에 따라 다시 살펴보면 공통된 구조가 드러납니다.
첫째, 욕심의 정치화입니다.
두 정부 모두에서 권력은 공공의 이해를 조정하는 장치라기보다, 자기 세력의 정치적·경제적 이해를 확대·고착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감세, 규제 완화, 국가 자원의 편중된 배분은 정책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지배 연합의 이익을 구조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욕심은 사회적 성취를 향한 동력이 아니라, “원래 내 몫”이라는 권리 담론으로 번역되었고, 공공성은 체계적으로 후퇴했습니다.
둘째, 혐오의 제도화(制度化)입니다.
트럼프–MAGA 세력은 이주민과 소수자, 외부 세력을 ‘국가를 좀먹는 내부의 적’으로 규정해 왔습니다. 윤석열 정부 시기 한국 사회에서 확산된 극우 담론 역시 중국인, 진보 세력, 시민운동을 ‘국가를 위협하는 존재’로 호명했습니다. 혐오는 정책 실패와 구조적 문제의 책임을 외부 집단에 전가하는 가장 손쉬운 도구였고, 동시에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효과적인 정치 자원이었습니다. 이때 배제는 차별이 아니라 ‘질서’와 ‘상식’으로 포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혐오가 반복될수록, 행정과 수사, 공적 담론의 언어는 점점 더 ‘배제의 정상화’ 쪽으로 미끄러지게 됩니다. 혐오가 제도화된다는 것은, 결국 ‘시민’이 아닌 ‘대상’이 행정의 언어로 등장하는 순간을 뜻합니다.
셋째, 공포의 상시화(常時化)입니다.
정치적 반대는 경쟁이나 비판이 아니라 ‘체제 전복의 위협’으로 재정의되었습니다. 그 결과 검찰, 사법, 치안, 군사 권력이 정치의 전면으로 호출되었고, 민주적 절차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장애물로 취급되었습니다. 트럼프는 시위와 반대 세력을 폭동과 내란의 언어로 규정하며 군과 주방위군 동원을 공공연히 언급했고, 윤석열 정부 역시 야당과 시민사회의 비판을 체제 위협의 문제로 환원하는 언어를 반복했습니다. 공포는 시민을 판단의 주체에서 관리의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핵심 장치였습니다.
넷째, 굴욕과 원한의 정치화(政治化)입니다.
트럼프는 미국이 동맹과 외국에 의해 ‘약탈당했다’는 서사를 반복하며 과거의 영광 회복을 정치적 목표로 제시했습니다. 윤석열 정부를 떠받친 극우 담론 역시 ‘국민이 무시당했다’, ‘정당한 권리가 침해당했다’는 언어를 통해 사법 판단과 입법 절차마저 적대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미래를 설계하는 정치 대신, 과거의 모욕을 되갚는 정치가 호출된 것입니다.
이 네 가지 감정의 정치화는 하나의 귀결로 수렴됩니다. 권력의 독점, 민주적 절차의 무시 또는 우회, 자기 세력만의 정치적·경제적 이해의 극대화, 그리고 필요할 경우 군과 강제력을 동원한 국민 위협입니다. 이는 개인적 권위주의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구조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통치 방식의 핵심 요소입니다. 더 나아가 트럼프 2기와 MAGA 세력은 1945년 이후 인류가 어렵게 합의해 온 최소한의 규범, 즉 국제연합 체제와 세계인권선언이 상징하는 현대적 가치 질서 자체를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인권의 보편성, 다자주의, 전쟁 금기에 대한 합의는 ‘국가를 약화시키는 제약’으로 취급됩니다. 이는 파시즘의 참화를 거쳐 형성된 현대 세계의 규범으로부터의 이탈이며, 사실상 근대가 드러낸 결함을 반복하는 파시즘적 질서로의 귀환 시도로 읽힐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윤석열 정부와 트럼프 1·2기, 그리고 MAGA 세력이 보여준 통치 방식은 정책 실패나 개인적 성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세력의 지배를 강화하고 영속화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도구화하는 정치체제이며, 감정의 정치화를 통해 제도와 권력을 잠식하는 전형적인 극우의 모습입니다. 이런 체제는 민주주의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아 대한민국의 민주시민이 무엇을 분명히 선택하고 어떤 과제를 수행해야 이러한 극우적 정치체제를 실제로 극복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이는 추상적 가치 선언이 아니라, 지금 이 사회가 직면한 현실적 행동 과제의 목록이 될 것입니다.
■ 극우를 넘어서는 길
― 민주주의의 확대와 국가 권력의 재민주화라는 과제
극우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통치 방식의 문제입니다. 욕심·혐오·공포·굴욕은 언제나 인간 사회에 존재해 왔지만, 그것이 극우적 정치체제로 전화되는 순간은 분명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제어 장치가 무너지고, 권력이 이 감정들을 선택해 결합하고 제도화할 때입니다. 따라서 극우에 대한 대안은 감정적 비난이나 도덕적 규탄일 수 없습니다. 극우의 대척점은 민주주의이며, 해법은 민주주의의 확대와 진화에 있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단순히 “선거가 있는 체제”로 이해해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극우는 선거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거를 통과한 권력을 발판으로 삼아 민주주의의 핵심 장치들을 내부에서 잠식합니다.
그렇다면 과제는 분명합니다. 민주주의를 다시 ‘작동하는 통치 원리’로 복원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국가 기간 조직 전체를 시민 주권의 논리에 따라 재정렬하는 것입니다. 그 출발점은 검찰 권력의 구조적 재편, 즉 검찰개혁의 완수입니다.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났듯, 검찰은 더 이상 중립적 사법 기관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선택적 수사, 편의적 기소, 정치적 시간표에 따른 판단은 법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실질은 민주적 통제를 우회하는 권력 행사였습니다.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는 더 이상 제도 실험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 조건입니다. 다만 “개혁”이라는 이름이 붙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도가 바뀌는 순간보다 더 위험한 순간은, 바뀐 제도가 관성에 붙잡히는 순간입니다.
최근 정부가 입법예고한 공소청·중수청 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사와 기소의 분리를 표방하지만, 설계의 세부로 들어가면 ‘검사 우위의 관성’이 다시 주입될 수 있다는 우려가 여권 내부에서조차 공개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공소청이 수사기관에 보완수사를 요구하거나, 수사 과정에 실질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구조가 남는다면, 간판만 바뀐 채 ‘지휘–종속’ 관계가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보완수사권 문제를 “시간을 두고 논의해야 한다”는 취지로 언급했고, 이 쟁점은 현재 법안 논의의 중심으로 부상해 있습니다. 아울러 공소청·중수청 법안의 설계 과정에서 봉욱 청와대 민정수석이 검찰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는 문제 제기가 시민사회단체와 여권 내부에서 제기되었다는 보도도 이어졌습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포획되었는가”라는 인물 판단이 아니라, 제도 설계가 어떤 결과를 낳는가라는 구조의 문제입니다. 개혁의 목적이 검찰 권력의 해체와 분산에 있다면, 그 과정에서 다시 검찰 우위를 복원할 수 있는 조항과 관행이 남아서는 안 됩니다. ‘수사–기소 분리’는 선언이 아니라 권한 구조입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추상적 개혁 과제의 나열이 아니라, 개혁의 시간표를 시민 앞에 분명히 고정시키는 일입니다. 시민사회와 국회는 정부의 개혁안을 “통과시키느냐, 막느냐”의 정쟁으로 소비할 것이 아니라, 언제 무엇을 어떻게 검증할지의 기준을 공개적으로 요구해야 합니다.
입법예고 이후 1~3개월은 방향을 고정하는 시간입니다. 공소청·중수청 설계에서 ‘검사 우위’를 재생산할 수 있는 쟁점 조항, 특히 보완수사 요구권과 수사 개입 구조를 공개 토론의 중심에 올려야 합니다. 동시에 추진단과 자문 과정, 조문 설계의 근거, 비교 법제 검토 결과를 문서로 공개해 누가 어떤 판단에 따라 이 제도를 설계했는지를 시민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국회 차원의 공청회와 청문 절차를 통해 각 조항이 ‘검찰 권력 분산’이라는 목표에 비추어 어떤 효과를 낳는지 검증하는 작업도 병행되어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의 관성이 되살아나는 순간, 민주주의는 또 한 번 큰 비용을 치르게 됩니다.
이어지는 3~6개월은 분리의 ‘실질’을 법문에 새기는 단계입니다. 수사기관의 종결권과 기소기관의 기소권을 엄격히 분리하고, 기소기관의 수사 개입을 예외적·사후적 통제 수준으로 제한하는 규범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인사·예산·감찰 권한이 다시 특정 조직에 집중되지 않도록, 공소청과 중수청의 지휘체계와 감찰체계를 분산하고 외부 통제 장치를 상설화해야 합니다. 개혁은 조직을 쪼개는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재집중을 구조적으로 차단하는 문제입니다.
그다음 6~12개월은 ‘이행’을 강제하는 시간입니다. 권한 이전, 인력 재배치, 사건 이관, 교육과 규정 정비 같은 과정에서 권력은 언제든 비공식 네트워크로 다시 결집하려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시행령과 내부 규정의 투명성, 그리고 정기적인 공개 점검입니다. 법이 바뀌는 순간보다, 집행이 관성에 붙잡히는 순간이 민주주의에 더 위험합니다.
마지막으로 12~24개월은 평가의 시간입니다. 수사–기소 분리가 실제로 작동했는지, 권한 남용이 줄었는지, 정치적 수사와 편의적 기소의 유인이 제도적으로 억제되었는지를 지표로 공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수정과 보완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한 번 바꾸고 끝나는 제도”가 아니라, 오류를 교정하는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과제는 사법제도의 민주적 통제 강화입니다. 사법부가 민주주의의 최종 방어선이라는 믿음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제는 사법 권력이 시민의 기본권과 헌정 질서를 실제로 보호할 때에만 성립합니다. 판결이 반복적으로 정치적 균형을 무너뜨리고, 헌법 정신이 아니라 권력의 이해에 봉사할 때, 사법은 보호막이 아니라 족쇄가 됩니다. 사법기구의 인사 구조와 책임성, 투명성을 강화하고, 명백한 법 왜곡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는 제도적 장치를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사법 독립’과 ‘사법 무책임’을 분명히 구분하는 일입니다.
세 번째 과제는 언론 제도의 구조적 개혁입니다. 극우 정치가 감정을 조직할 수 있었던 핵심 조건 중 하나는, 언론이 공론장의 수호자가 아니라 감정 증폭기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권력과 자본에 종속된 언론 구조에서는 혐오와 공포가 ‘의견’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고, 거짓과 왜곡은 ‘균형’이라는 언어로 정당화됩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언론은 중립을 가장하는 언론이 아니라, 사실과 공공성에 책임지는 언론입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소유 구조 개혁과 공적 책임 강화는 극우 대응의 핵심 과제입니다.
네 번째 과제는 혐오 정치 자체를 무력화하는 제도적 장치의 마련입니다. 즉 차별금지법과 혐오방지법의 제정입니다. 극우는 언제나 “표현의 자유”를 방패로 삼아 혐오를 정치 자원으로 활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혐오는 의견이 아니라, 특정 집단을 공적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행위입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감정을 허용하는 체제가 아니라, 공존을 파괴하는 감정의 정치화를 제한하는 체제입니다. 차별금지법은 도덕적 선언이 아니라, 극우의 감정 동원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핵심 안전장치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개혁의 전제 조건은 제도 그 자체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시민의식의 지속성입니다. 극우의 발호는 언제나 경제적 위기 국면에서 가속화되었고, 시민 감시가 느슨해질 때 제도 내부로 침투했습니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시민이 권력을 감시하고, 설명을 요구하며, 책임을 묻는 일상적 실천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작동합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강조되어야 할 과제는 분명합니다. 시민사회는 특정 정부의 성공이나 실패를 넘어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장기적 목표를 기준으로 국가 권력 전체에 개혁의 시간표를 요구해야 합니다. 국회와 정부를 상대로 개혁 과제를 명확히 제시하고, 정기적으로 이행 여부를 평가하며, 지연과 후퇴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이는 정권 교체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지속가능성과 민주주의의 진화를 위한 시민적 책무입니다.
극우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시민이 사라진 자리에 출현하는 정치적 구조입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한 번 성취되면 자동으로 유지되는 제도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정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더 멀리, 더 깊게 밀어붙이는 용기입니다. 그것만이 잠복하고, 준비되고, 반복해서 현재화되는 극우를 실제로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 이병권 인문연구가 >
우물쭈물 하다 정부안 굳어지면 최악 이 대통령 보완 수사권에 유연한 태도 정부안 마련 과정 불투명도 정당성 훼손
의구심과 믿음 사이 갈팡질팡하는 대통령 지지자들
검찰개혁을 둘러싼 논란의 소용돌이가 거세다. 법무부가 지난 1월 12일 공소청법과 중대범죄수사청법 두 법안을 입법예고한 이후, 민주당과 시민사회는 물론 이재명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마저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해온 검찰 체제를 온존시킬 교묘한 장치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는 비판이 그 핵심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1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수사와 기소의 분리를 변치 않는 ‘대원칙’이라 단언하면서도, 공소청의 보완수사권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있다”며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본인이 검찰권 남용의 상징적 피해자임을 환기하면서도, 검찰개혁의 본질은 권력 박탈이 아닌 ‘국민의 권리 구제와 인권 수호’에 있다는 논리로 보완수사권 유지의 정당성을 우회적으로 역설했다. 이 대통령이 보완수사권의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통정리’가 논란을 잠재우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솔직히 말하면 기자회견을 지켜보는 내내 정부안에 대한 의구심의 잔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취임 이후 국정을 스마트하게 이끌어온 이 대통령이 자신의 핵심 공약인 검찰개혁을 적당한 타협으로 매듭짓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의 이 우려가 부디 한낱 기우에 그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조직 쪼개기’로 검찰 부활 노림수인가, 지능적 지연작전인가
정부안을 면밀히 살필수록 석연치 않은 대목들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무엇보다 경악스러운 지점은 안이 마련된 과정의 불투명성이다. 검찰개혁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던 자문위원 6명은 법안 초안조차 구경하지 못했다는 폭로와 함께 집단적으로 사퇴했다. 이들은 수개월간의 숙의 결과가 형해화되고 논의조차 되지 않은 조항들이 삽입된 점을 지적하며, “기만적 행정의 들러리로 전락했다”는 치욕스러운 심경을 토로했다. 자문위의 권고는 깡그리 무시된 채 검찰 출신들이 설계한 기득권 수호안만 남았다는 이들의 비판 성명은 이번 개혁안의 정당성을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검찰개혁 방향을 두고 정부와 여당을 비롯한 정치권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14일 국회 소통관에서 조국혁신당 박은정 의원의 주선으로 검찰개혁 추진단 자문위원으로 참석했던 6명의 법조인과 교수들이 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6.1.14. 연합
정부안의 세부 내용은 더욱 수상쩍다. 특히 중수청의 조직 편제는 상식적 궤도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 수사 인력을 변호사 자격 유무에 따라 ‘수사사법관’과 ‘전문수사관’으로 이원화한 것이 그 정점이다. 수사 영역에서 변호사 자격을 필수 요건으로 내세운 것은, 결국 현직 검사들을 중수청으로 수평 이동시켜 조직을 장악하려는 정교한 포석으로 읽힌다. 두 직급이 대등하다는 법무부의 강변은 현실을 외면한 궤변에 불과하다. 검사 출신 사법관들이 중수청의 주도권을 쥐고 친정인 공소청과 폐쇄적 네트워크를 가동한다면, 이는 개혁이 아니라 사실상의 ‘검찰청 부활’일 뿐이다.
형사소송법 개정 없는 조직 개편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현행 형사소송법은 검찰의 무소불위한 권력을 뒷받침하는 법적 토대이며, 이를 개혁하지 않는 한 기소와 수사의 완전한 분리는 불가능하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조직 쪼개기'를 통한 전시성 개혁이라는 비판이 설득력있게 들리는 이유다. 공소청 및 중수청 법안 제정과 형사소송법 개정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불가분의 과제임에도, 법무부는 보완수사권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핵심을 비껴가고 있다. 이러한 유보 결정은 개혁의 의지를 의심케 한다. 나아가서 최악의 경우 논의의 장만 열어둔 채 개혁안을 뭉개고 가겠다는 지능적인 지연작전으로 해석될 소지가 다분하다.
윤창렬 국무조정실장이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공소청법·중대범죄수사청법 공청회에서 정부안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2026.1.20. 연합
우물쭈물 10월이 오면 검찰 독재 망령 살아난다
정치 일정을 보면 우려는 더욱 현실화된다. 2월부터 정국은 6월 3일 지방선거 국면으로 돌입한다. 공소청 및 중수청 법안 처리도 빠듯한 상황에서, 검찰개혁 자체를 반대하는 국민의힘과의 협상까지 남아 있다. 6월 선거가 끝나면 7~8월 정치 하한기가 오고, 9월 정기국회는 곧바로 국정감사에 돌입한다.
그러는 사이 10월 2일이 되면 검찰청은 법적으로 폐지되고 공소청 및 중수청 체제로 돌입한다. 이것이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다. 공소청 검사들은 형사소송법에 근거해 중수청 수사관들에게 "이것은 넣고 저것은 빼라"며 보완수사를 요구할 수 있고, 사건 송치 이전에 수사기록을 받아보며, 재수사를 명령할 수도 있다. 악명 높은 '털이수사'로 불리는 별건수사도 가능하다.
보완수사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이들은 중수청의 수사권 독점이 이승만 정권 시절의 ‘경찰 독재’를 재현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비대해진 경찰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검찰의 보완수사권이 필수적이라는 논리다. 이러한 주장은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전형적인 프레임 전환에 불과하다.
이승만 정권 하의 경찰은 대통령의 권력을 수호하는 정치적 도구로 전락해 온갖 전횡을 일삼았으나, 이는 독재 정권의 명령을 수행하는 하수인에 불과했다. 스스로가 정치적 주체로 등장해서 검찰 쿠테타를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온갖 악폐를 자행한 ‘검찰 독재’와 이승만 정권하의 경찰을 동일선상에 두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견강부회라고 할 수 있다.
중수청 견제 장치는 검찰 보완수사권 아닌 외부 감시망 구축
중수청의 권력 독점과 그로 인한 ‘괴물’의 등장을 경계한다면 그 해법은 검찰의 수사권 존치가 아닌 정교한 외부 감시망의 구축에서 찾아야 한다. 수사 과정의 투명성을 확보할 감찰 기구와 입법부의 실질적인 견제 장치가 마련된다면 수사권 오남용의 여지는 최소화된다. 특히 중수청 수사관들에게는 기소권이라는 무기가 없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공소청이 수사 결과를 엄격히 검토하고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구조 속에서, 중수청은 결코 과거 검찰과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한병도 원내대표, 한정애 정책위의장 등이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공소청법·중대범죄수사청법 공청회에서 기념 촬영하고 있다. 2026.1.20. 연합
검찰 해체의 당위성은 민주헌정체제의 수호라는 관점에서 명백하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독점하며 거대 정치 세력으로 변모한 현 검찰 체제는 민주적 통제 기제 위에 군림하며 헌법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 목격된 검찰권의 초헌법적 행태는 무소불위의 권력에 대한 견제 장치가 부재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여실히 증명했다.
우리 사회의 여타 권력 기구들이 민주적 통제 안으로 편입되는 동안, 오직 검찰만이 그 울타리 밖에서 거대 법조 카르텔을 형성하며 절대 권력을 향유해 왔다. 1987년 시민항쟁으로 민주화가 실현된 이후 탄생한 민주개혁 정권들은 각종 권력기관에 시민적 통제장치를 마련했지만, 검찰만은 예외로 남았다.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정적을 제거하거나 개혁의 걸림돌이 되는 세력을 제거하는 데 검찰의 ‘칼날’이 유용했기 때문이다.
검찰 권력 근본적 재편은 이재명 정부의 시대적 소명
이재명 정부에 부여된 시대적 소명은 민주주의와 배치되는 검찰 권력의 근본적 재편이다. 검찰 독재와의 치열한 대결 속에서 집권한 정부인만큼, 개혁의 성패는 정권의 정당성과 직결된다. 여기에서 ‘실용적 타협’을 모색하는 것은 개혁의 본질을 훼손하는 길이다. 권력자가 검찰을 장악하거나 선의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역사적으로 늘 실패해 왔다.
수사권과 기소권이라는 무소불위의 칼을 쥔 검찰 조직은 본능적으로 권력의 자기 증식을 꾀하기 마련이다. 늑대의 야성이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듯, 검찰의 생리는 민주적 절차를 거부한다. 8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기득권의 중심에서 배양된 독재 DNA는 오직 완전한 해체를 통해서만 도려낼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검찰개혁을 완수할 수 있는 역사적 골든타임이다. 이때를 놓치면 검찰 개혁의 기회는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수사·기소권을 거머쥔 검찰의 생리는 권력의 하강기에 반드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칼날로 변모할 것이다. 시대적 소명인 검찰개혁을 실용주의나 온정주의로 호도하여 유야무야 넘긴다면, 바로 그 순간이 이재명 정부의 위기가 시작되는 시점이 될 것이다. < 장정수 기자 >
21일 법원이 한덕수 전 총리에게 중형을 선고하며 제시한 이유는 단순한 양형 판단을 넘어, 헌법 해석과 적용에 관한 중요한 원칙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것은 헌법이라는 규범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사회현실 속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정의돼야 한다는 점을 사법부 스스로 확인한 것이었다. 헌법이 ‘과거’에 갇혀 있지 않아야 과거로의 퇴행을 막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헌법을 '헌법답게' 해석한 것이었다. 또한 국민적 불신 속에 놓인 사법부가 여전히 민주주의의 최후보루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도 아울러 보여준 판결이었다.
이번 판결의 재판부 선고 이유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기존 내란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은 이 사건의 형을 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이다. 이는 죄와 형벌 판단에 있어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1960년이나 1980년 등 과거 내란 사건들이 발생했던 때와 12·3 내란이 발생한 2024년의 대한민국은 크게 다른 나라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당당한 선진국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차지하는 위상 역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이 같은 대한민국의 달라진 위상에서 ‘친위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초래한 경제적·정치적 충격은 과거의 내란과 동일한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달라진 현실에는 달라진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 재판부의 설명이었다.
내란 우두머리 방조 혐의를 받는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2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26.1.21. 연합
흔히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한다. 이 말에는 과거는 고정된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과 문제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돼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헌법 역시 마찬가지다. 헌법은 단지 하나의 법조문이 아니라, 한 사회의 정신이자 역사다. 역사가 헌법을 만들고, 헌법은 다시 역사를 규정한다. 따라서 헌법의 해석은 언제나 현재의 눈에서 새로워져야 하고 깊어져야 한다.
민주주의가 성숙하고, 주권자로서 국민의 존엄성이 제도적으로 확립된 사회에서 헌정 질서를 파괴하려는 시도는 훨씬 더 중대한 범죄라는 것, 내란죄의 무게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쌓아온 민주주의의 깊이만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이번 판결에 담겼다. 내란 범죄는 과거와 동일한 죄목이더라도 그 범죄로 인한 한국 사회와 민주주의의 훼손의 크기는 같을 수 없다. 내란이라는 범죄의 중대성은 대한민국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진전만큼 더 커졌다는 재판부의 판단은 그 점에서 헌법에 대한 새롭고 혁신적인 해석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하고 상식적인 판단이다.
이번 판결에서 또 하나 주목할 대목은 ‘저항권’에 대한 해석이다. 재판부는 12·3 내란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고, 내란 행위가 몇 시간 만에 종료된 사실을 언급하며, 이것이 내란 가담자들의 자제나 절제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는 것, 무장한 계엄군에 맨몸으로 맞서 국회를 지켜낸 국민들의 용기, 즉 국민의 저항이 내란을 저지했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재판부의 설명은 계엄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시킨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한 것이다. 이는 저항권을 추상적 선언을 넘어서 현실에서 작동하는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판단이다. 국회에 신속히 진입해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한 정치인들의 행동, 과거 내란의 어두운 기억을 떠올리며 위법한 명령에 저항하거나 최소한 소극적으로 참여한 군인과 경찰의 태도까지, 재판부는 ‘적극적 저항’과 ‘소극적 저항’을 함께 평가했다. 저항권을 한국 민주주의를 지키고 작동시키는 힘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 판결은 사법부가 헌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이해가 판결에 어떻게 반영돼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기준점으로 삼을 만하다. 헌법을 '죽어 있는 문자'에 가두지 않고,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살아 있는 규범으로 읽어낸 사법적 상식의 구현이다.
이번 판결은 하나의 사건에 대한 판결을 넘어 사법부에 하나의 과제를 분명히 제시한다. 이를 한국 사법부의 예외가 아니라, 사법부의 보편적 상식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다. 오늘날 사법부는 국민들로부터 깊은 불신을 받고 있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가 아닌 '기득권의 최후보루'이며 성채라는 조롱 섞인 비판을 사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판결이라는 점에서 이번 판결의 의미는 더욱더 크다. 사법부는 한 번의 올바른 판결을 통해서도,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보여줬다. 그것이 법관 한 명, 재판 하나하나가 갖고 있는 힘이고 위력이며 또 그만큼의 위험성이다. 힘과 위력과 함께 위험성의 담장 위를 걷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번 판결은 헌법의 정신과 민주주의의 현실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이 제시하는 사법부 신뢰 회복의 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바로 여기에 사법부 개혁의 출발점이 있을 것이다. 사법개혁은 제도 개편이나 인사 쇄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 그것이 사법개혁의 출발이며, 그리고 결론이다. < 이명재 기자 >
한덕수 중형, 내란 심판 이제 시작…"지귀연도 단호해야"
이진관 재판부 판결에 주요 시민사회단체 환영
참여연대 "국민 염원 부응…지귀연 재판부 주목" 민변 "윤석열·김용현 등에도 엄중 심판 내려야" 민주노총 "내란에 어떠한 관용도 있을 수 없다"
한덕수 재판을 맡은 이진관 부장판사(왼쪽)와 윤석열 재판을 맡은 지귀연 부장판사. 연합사진 편집
내란 중요임무 종사 등 혐의로 기소된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2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부장판사 이진관) 판결을 통해 특검 구형량보다 8년이나 많은 징역 23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자 주요 시민사회단체들이 잇따라 환영 입장을 내고 있다. 이들은 12·3 비상계엄으로부터 1년이 넘어서야 나온 이번 사법부 판단으로 인해 비로소 내란 세력에 대한 역사적 심판이 첫걸음을 뗀 것이며, 무엇보다 수괴 윤석열 재판을 맡고 있는 지귀연 재판부가 반드시 그 기조를 이어받아 준엄한 철퇴를 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참여연대는 논평에서 "재판부는 12·3 비상계엄이 국회와 선관위 등의 기능을 군과 경찰을 동원해 무력화한 '국헌문란 목적의 폭동'이므로 내란에 해당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계엄 포고령이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 의회 민주주의와 영장주의, 언론·출판의 자유 등 헌법 질서를 소멸시키려는 목적에서 발령된 것이라며 '위로부터의 내란, 즉 '친위쿠데타'라는 점을 확인했다"면서 "12·3 비상계엄은 내란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 415일이 지나서야 사법부의 판결로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당연하고 기다리던 판결"이라고 밝혔다.
이어 "특히 재판부는 12·3 내란을 전후해 부정선거 음모론이나 '국민 저항권' '계몽적 계엄' 운운 등 극우세력의 망상적 주장이 확산되고 있는 현실이나, 지난 권위주의 정권의 종식 이후 달라진 시대상과 국가적 위상 등을 감안해도 더 이상 과거의 내란죄 양형 기준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며 "그러면서 새로운 양형 기준을 제시, 특별검사 측의 구형량보다도 훨씬 높은 징역 23년형을 선고했다. 이는 권력자들의 친위쿠데타를 엄정하고도 철저하게 처벌하라는 국민의 염원과 명령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12·3 내란은 1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민주사회에 완전히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깊이 남겼다. 극우세력의 망상적, 음모론적 주장이 SNS 등지에서 계속 확산하고 있으며 제1야당 국민의힘 또한 여전히 이들과 단절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12·3 내란에 대한 사법부의 단호하고도 확실한 처벌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따라서 지귀연 재판부가 윤석열과 김용현 등 일당에 대해 형을 선고할 때에도 이러한 단호한 처벌 기조가 반드시 관철되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참여연대는 "그것만이 지난 시기 사법부가 내란 종식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비판을 불식하고 우리 민주주의를 제대로 회복하는 단초가 될 것"이라며 "이제 시민의 눈과 귀는 지귀연 재판부에게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를 받는 한덕수 전 국무총리(왼쪽)가 2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 출석해 있다. 2026.1.21. 연합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도 성명을 내고 "이번 판결은 12·3 비상계엄이 '내란'임을 사법부가 명시적으로 확인한 첫 사례로, 내란 주동자들에게 엄중한 형사책임이 있음을 공표한 사건"이라며 "우리는 이번 유죄 판결을 환영하고, 재판부가 윤석열·김용현 등 내란 핵심 책임자들에게도 신속하고 엄중한 판결을 내릴 것을 촉구한다"고 전했다.
또 "이번 판결은 권력 남용 사태를 예방해야 할 국무총리의 의무를 명확히 했을 뿐만 아니라 12·3 비상계엄이 형법상 '내란'임을 확정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로써 '유혈 충돌이 없었기에 국헌문란의 목적도 없었다'는 윤석열과 김용현 측의 주장은 어떠한 타당성도 없는 억지 선동임이 확인됐다"면서 "무엇보다 특검의 구형량을 상회하는 엄중한 형량이 선고된 것은 시민들의 엄중한 처벌 요구에 마침내 법원이 응답했다고 볼 수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지귀연 재판부는 오는 2월 예정된 윤석열 내란 수괴의 선고 공판에서도 이번 한덕수 판결을 본보기 삼아 엄중한 심판을 내려야 할 것"이라며 "김용현, 조지호, 김봉식 등 내란 주요 가담자들과 대통령 경호실, 국무위원 등 현재 진행 중인 모든 재판에서 유의미한 선고가 내려질 때 비로소 진정한 내란의 종식이 실현될 수 있다. 사법부가 헌법 수호의 최후 보루로서 제 역할을 다할 때까지 끝까지 감시하고 지켜볼 것"이라고 했다.
민주노총 역시 성명을 통해 "이번 판결은 헌법 질서를 파괴한 내란을 '국헌문란 목적의 폭동'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그 책임을 분명히 물은 사법 정의 선언"이라면서 "헌법을 유린하고 총칼로 국민을 겁박했던 반국가 세력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며, 무너진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어 "한덕수는 국정 운영 2인자로서 윤석열의 미친 칼춤을 멈춰 세우기는커녕 내란의 주역으로 가담했다. 그자는 내란 행위에 적극 가담했고, 사후에는 계엄 선포문 작성과 폐기 등 범죄를 은폐했다"면서 "헌법과 국민이 부여한 권한을 내란에 봉사한 자에게 어떠한 변명도, 어떠한 관용도 있을 수 없다. 징역 23년은 그가 저지른 민주주의 파괴 행위에 비하면 결코 무겁지 않다"고 단언했다.
나아가 "노동자와 시민을 적대시하며 헌정을 중단시키려 했던 자에게 관용이란 있을 수 없다. 이번 선고는 시작일 뿐"이라며 "내란의 정점에 있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엄중한 선고가 뒤따라야 한다.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사유화해 내란을 획책하고 국민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수괴와 내란 세력을 단죄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회복"이라고 강조했다. < 김호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