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와 무역전쟁중 국경 호수명 변경 지시…"대서양·태평양 이름 바꿀수도"

캐나다 총리 "온타리오호, 미국 독립보다 오래된 이름… 항상 그렇게 불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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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  [AP=연합]

 

최우방 캐나다와 무역전쟁에 돌입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과 캐나다 사이의 온타리오호를 '아메리카호'로 바꾸라고 지시하며 캐나다를 도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7일 백악관에서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 지대에 있는 온타리오호의 이름을 '아메리카호'로 바꾸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틀 전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개명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데 이어 행정명령 서명으로 실행에 나선 것이다.

 

행정명령에는 온타리오호의 가장 깊은 지점이 미국 영토에 있어 호수 수량 대부분에 대한 권리가 미국에 있다는 주장이 포함됐다.

 

또한 온타리오호를 포함해 오대호를 보호하는 데 미국이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내용도 들어갔다.

 

행정명령에 따라 미 내무부는 미국의 지명체계에서 온타리오호를 아메리카호로 바꿔야 한다.

 

미국과 캐나다의 무역전쟁이 악화하는 가운데 호수 이름 변경으로 캐나다를 자극하는 도발적 조치에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캐나다에도 아메리카호로 부르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캐나다 관료들은 우리를 아주 나쁘게 대했다. 못된 사람들"이라며 캐나다가 미국을 등쳐먹고 있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 서명 몇시간 후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엑스에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언제나 온타리오호로 불릴 것"이라고 받아쳤다.

 

카니 총리는 온타리오라는 말이 원주민 웬다트족 언어에서 왔으며 '그 호수는 아름답고 크다'라는 뜻이라면서 캐나다 연방의 탄생이나 미국의 독립선언보다 오래된 "400년 이상 된 이름"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미국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무역관계와 외교정책, 국가기념물, 지명도 바뀌고 있다"고 덧붙였다.

 

온타리오호는 캐나다 온타리오주와 미국 뉴욕주 사이에 있는 대형 호수다. 북미지역 5대호 중 하나로 양국의 국경 역할을 하며 이 호수의 이름을 따서 1867년 캐나다의 온타리오주가 생긴 것이라고 AP통신은 전했다.

 

온타리오주는 대미 반발의 선봉에 서 있다. 더그 포드 온타리오주총리는 미국의 위협에 물러서지 않겠다며 연일 트럼프 대통령을 비난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명칭을 일방적으로 변경한 건 처음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초 취임과 동시에 멕시코만을 미국만으로 바꾸는 행정명령에 서명했으며 AP통신이 멕시코만 표기를 고수하자 소속 기자의 백악관 행사 출입을 막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우리에게 (미국식으로 개명된) 만도 있고 호수도 있다. 이제 필요한 건 바다"라며 "대서양이나 태평양 이름을 바꿔야 할 수도 있다. 아마도 우리는 바꿀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 백나리 기자 >

 

"트럼프 거리→타코 거리로 바꿀까" 캐나다 - 미 개명 신경전

 수도 오타와 도로명 변경 추진…관세 갈등 고조

 

캐나다 오타와에 있는 '트럼프 길'(Trump Avenue)  [캐나다 노슬리 오타와 캡쳐=연합]

 

캐나다가 오랜 북미 우호 상징이던 '트럼프 거리' 명칭을 '타코 거리'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양국 간 관세 신경전이 한층 고조되게 됐다.

 

27일 캐나다 수도 오타와 시의회는 전날 센트럴파크 구역 내 주택가 도로인 '트럼프 길'(Trump Avenue)의 이름을 바꾸기 위한 첫 단계 안건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공원 이름이기도 한 캐나다의 센트럴파크 구역은 뉴욕의 주요 지명이나 인물, 문화적 요소에서 도로 이름을 많이 따왔다. '트럼프 길'은 1990년대 후반 뉴욕의 유명한 부동산 사업가이던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명명됐다.

 

오타와 시의회의 이번 결정은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과 캐나다 사이 호수인 온타리오호 이름을 '아메리카호'로 바꾸려고 하는 데 맞불을 놓는 셈이다.

 

양국 간 관세·무역 마찰이 격화하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이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하겠다고 말하는 등 도발이 이어지자 오타와 시의원들이 그의 이름을 딴 도로명을 거북하게 여기면서 이뤄진 조치다.

 

팀 티어니 오타와 시의원은 CNN과 인터뷰에서 "주민들로부터 다양한 대체 도로명 제안이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거론되는 대체 도로명으로는 '오바마로', '온타리오로', '캐나다로' 외에도 트럼프 대통령을 비꼬는 용어인 '타코'(Trump Always Chickens Out·트럼프는 항상 겁먹고 물러선다)에서 따온 '타코로' 등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실제 도로명이 바뀌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도로명을 변경하려면 해당 거리에 거주하는 가구 절반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이후 공청회 등 주민 의견 수렴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 1기이던 2021년에도 이 도로의 62가구를 대상으로 개명 찬반 투표를 진행했지만 찬성 21표, 반대 21표, 기권 20표로 부결된 바 있다.

 

당시 반대표를 던진 주민들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호감보다는 주소 변경으로 감수해야 하는 불편 때문에 반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 김승욱 기자 >

 

 
 

작년 5월 트럼프 행정부의 하버드 유학생 비자 발급 중단 시도 계기

 

                                 하버드대 기념품 매점  [게티이미지 AFP=연합 자료사진]

 

작년에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하버드대 유학생에 대한 비자 발급 중단을 추진한 것을 계기로 하버드 경영대학원(HBS)이 유럽이나 캐나다에 해외 운영 거점을 두는 방안을 한때 검토했다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2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FT에 따르면 HBS는 이런 방안을 놓고 작년에 포르투갈의 노바 경영·경제대학원, 스위스 로잔 소재 국제경영개발원(IMD), 런던 비즈니스 스쿨(LBS), 캐나다 토론토대 등 잠재적 파트너들과 논의를 벌였다.

 

HBS는 "당시 우리는 불확실한 비자 상황 때문에 유학생들을 위해 미국 바깥의 선택지를 검토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런 상황은 현실화되지 않았으며 현재 추가 검토가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고 FT에 설명했다.

 

그러나 하버드대 법인의 마리아노-플로렌티노 쿠에야르 이사는 하버드대가 "외국에 몇몇 거점을 두는 방안을 추가로 검토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8월 들어 발언한 바 있다.

 

그는 데이비드 데밍 하버드대 학부대학 학장이 진행하는 팟캐스트에 출연해 "(하버드는) 근본적으로 미국 기관이지만, 글로벌 역할과 글로벌 관계를 가진 대학이기도 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쿠에야르 이사의 발언은 HBS뿐만 아니라 하버드대 전반에 관한 것이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작년 5월에 "국가안보상 이유"를 들어 하버드대에서 공부하거나 연구하려는 유학생, 방문연구원, 교환교수 등에 대한 비자 발급을 중단하는 조치를 시행하려고 했다.

다만 이 조치는 연방법원들에서 제동이 걸려 아직 시행되지는 않은 상태로 법정 다툼이 계속되고 있다.

 

데이비드 바흐 IMD 총장은 지난해 유학생 비자 발급 중단 위협이 있은 후 하버드 교수진이 가르치는 경영전문석사(MBA) 1학년 학생 집단을 IMD에 유치하되 IMD도 교육 일부에 기여토록 하는 방안을 놓고 예비적 논의가 있었다고 FT에 확인했다.

 

하버드가 미국 외 지역에서 기업 임직원 대상 단기 과정을 실험적으로 운영한 적은 있지만, HBS의 2년제 정식 MBA 과정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소재 HBS 본교 캠퍼스에만 개설해왔다.

 

HBS MBA 과정 학비는 17만 달러(2억3천500만원)다.

미국 대학들의 유학생 유치 실적은 최근 2년간 감소했다.

이민과 취업에 대한 제한 조치, 그리고 보다 전반적인 정치적 환경 등 요인으로 지원자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 임화섭 기자 >

 

 

 

 

"실제로는 사진 속 기러기가 독수리를 쫓아내고 생존 대결에서 승리" 

 
 
백악관이 엑스(X·옛 트위터) 계정에 올린 사진 [백악관 엑스 화면 캡쳐]

 

"캐나다 기러기를 쥐어박는 미국의 용맹한 독수리라고?"

백악관이 캐나다를 상대로 한 무역 전쟁 속에 마치 미국을 상징하는 동물인 독수리가 캐나다 상징인 기러기를 제압하는 듯한 사진을 게시했다가 오히려 망신을 사게 됐다.

 

실제로는 사진 속 기러기가 독수리를 쫓아내고 생존 대결에서 승리했다는 뒷얘기가 공개됐기 때문이다.

 

백악관 26일 소셜미디어 엑스(X·옛 트위터) 공식 계정에 자연 다큐속 한 장면을 포착한 사진을 게시했다.

 

이 사진은 흰머리수리 한마리가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날카로운 발톱으로 큰기러기 한마리의 목을 움켜쥔 채 바닥으로 짓누르고 있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백악관은 그러면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캐나다를 상대로 한 무역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했다는 취지의 문구도 남겼다.

 

이는 미국을 상징하는 국조인 흰머리독수리가 캐나다 상징인 기러기를 제압했다고 포장하면서 양국 간 무역전쟁 속에 캐나다의 심기를 긁으려는 신경전의 하나로 풀이됐다.

 

하지만 이러한 조롱밈은 소셜미디어 공간에서 곧장 역풍을 맞았다.

백악관이 퍼다 쓴 사진이 실제 다큐 영상에서는 큰기러기의 승리로 끝난 정반대 상황이었다는 게 댓글로 속속 밝혀졌기 때문이다.

 

일부 댓글에 따르면 문제의 사진은 2025년 2월 미 온타리오주 호수에서 촬영된 다큐 속 한장면으로, 20분에 걸친 대결 끝에 기러기가 독수리를 상대로 반격에 성공했으며, 결국 독수리는 포기한 채 물러났다는 것이다.

 

특히 백악관이 당시 영상을 촬영한 원작자에게 저작권과 관련해 허락을 구했는지 여부도 불분명한 상황이어서 무단 게시 논란도 일고 있다.

 

이러한 해프닝은 미국이 캐나다를 상대로 한 무역 전쟁에서 뜻밖의 반격에 직면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미 이웃인 캐나다를 상대로 50% 관세 폭탄을 꺼내들고 무역 전쟁의 포문을 열었으나 캐나다는 이에 물러서지 않은 채 마크 카니 총리를 필두로 맞불 관세를 터트리며 강공에 나선 상황이다.                                                    < 신유리 기자 >


백악관 엑스(X·옛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게시물   [백악관 엑스 화면 캡쳐]
 
 
 

 

8월22일 국치일, 116년 전 그날의 일그러진 초상들

● COREA 2026. 8. 29. 04:5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공포한 8월 29일, 백성은 통곡하고 왕공족은 웃었다

 

‘조선귀족령’ 왕족, 고관대작 76명 작위 수여
극히 일부만이 수작 거부, 자결, 망명 등 저항
‘조선귀족 일본관광단’ 천황에게 감사 인사

 

고종 독살설, 의친왕 독립운동설도 진실 아냐
대한민국에서 지금도 황손 자처 해괴한 짓
가장 큰 책임자들에게 더 엄한 책임 물어야

 

1910년 8월 22일 융희제 앞에서 열린 어전회의에 참석했던 대한제국의 대신들은 대부분 병합에 찬성하였습니다. 융희제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전권을 주어 한일병합에 관한 조약에 조인하였고, 8월 29일에 공식적으로 반포를 하였습니다. 이날부터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8월 22일은 조인한 날이고, 29일은 반포한 날이었습니다. 이번 8월 29일은 116년째 되는 국치일이지요.

 

이 날을 맞이하여 나라가 국권을 잃고 치욕을 당할 때, 당시 대한제국을 지배하던 최고 권력자였던 황실과 고위 관료들은 과연 어떤 행태를 보였는지 똑바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가진 것 없고 나라로부터 받은 것 없었던 민초들이 목숨을 걸고 의병에 가담하였으니까요. 더구나 광복절을 전후하여 한 배우의 조상 이야기로 말미암아 일어난 친일 논란을 보면서 역사의 무게를 새삼 더 느끼게 됩니다.

 

일본 육군대신의 통감 부임 후 일사천리 진행된 병합조약

 

1910년 7월 23일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제3대 통감으로 대한제국에 출현했는데요. 그는 조슈번 출신의 육군 대장으로서, 가쓰라 내각의 육군대신을 맡고 있었지요. 특이하게도 그는 조선통감으로 오면서도, 육군대신을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임하면서 이미 일본 내각을 통과한 ‘한일합병 조약문’을 가지고 왔어요. 8월 16일에 이완용과 조중응 등 친일파 대신을 통감 관저로 비밀리에 불러들여 병합조약에 대한 상의를 마쳤습니다.

 

 

제3대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

 

데라우치 통감이 제시한 병합안에 대해 총리대신 이완용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다만 ‘한국’이라는 국호의 존속과 황제의 칭호를 ‘왕 전하’로 해달라고 요청하였어요. 국민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습니다. 일본은 국호에 대해서는 원안대로 ‘조선’을 유지했지만, 황실의 칭호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만 양보했어요. 원래 일본 측의 병합조약안에는 왕이 아니라 태공 및 공 전하로 호칭할 계획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융희제는 [조선총독부 관보] 제1호를 통해 일본에 국권을 넘긴다는 것과 국민들에게 일본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내용의 ‘칙유’를 발표했습니다. 같은 지면에 데라우치 총독의 ‘유고’가 실려 있는데요. 일제의 조선 통치에 대한 시행 강령을 알리는 글로서, 상단에는 일본어로 하단에는 국한문혼용으로 쓰여 있어요. 그 중에서 가장 앞에 있는 내용이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예우’, ‘협력자에 대한 작위 및 은사금 수여’였습니다.

 

 

조선총독부 관보 제1호

 

이왕가로 전락한 대한제국 황족들, 융숭한 예우에 만족

 

병합 이후 황실의 호칭은 순종을 이왕으로, 고종을 이태왕으로, 황태자 영친왕을 ‘왕세자’로 격하시켜 왕족으로 불렀어요. 그리고 의친왕과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은 이강공, 이희공이라는 공족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왕공족은 일본 황족에 편입된 것이 아니라, 조선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신분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었어요. 궁내부가 폐지되고 ‘이왕가’와 관련된 사무를 담당하는 기구로서 이왕직이 설치되었습니다.

 

일본 측은 대한제국 황실이 병합에 강력히 저항하지 않고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식민 통치를 신속하게 안착시키고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하는 데 매우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일제는 조약 체결 이후 황실 가족이 품위를 유지하며 안락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막대한 세비와 예우를 제도적으로 보장했어요. 결과적으로 대한제국 황실은 왕공족 신분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통치 체제에 흡수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융희제 순종

 

그리고 일본 황실업무를 담당하는 궁내성의 하부기구로, 조선의 ‘왕공족’의 업무를 담당하는 이왕직이 설치되었어요. 경비는 ‘이왕’의 세비로 충당하는데, 조선총독부 예산에 따르면 이왕가 세비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일본 화폐 150만 원, 1921년부터는 180만 원이었습니다. 쌀값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일본 화폐 1원이 현재 1만 3000원 가량으로 추산되기 때문에, 현재 금액으로는 200억 원 정도 되는 규모입니다.

 

천황에게 감사인사 올린 ‘조선귀족 일본관광단’

 

한편 일본은 ‘조선귀족령’을 반포하여 왕실의 종친이나 고관이었던 사람들에게 일본의 정책에 순응하고 협력한 공로를 인정하여 5단계의 작위를 주어 이들을 식민 지배의 보조 세력으로 회유, 포섭하려 했어요. ‘조선귀족’ 역시 일본 화족에 편입된 것이 아니라, 조선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신분이었습니다. 수작자의 선정은 통감부가 1차 심사하여 일본 정부로 보내면, 내각회의에서 논의를 거친 후 천황의 재가를 받는 절차를 밟았어요.

 

 

백작 작위를 받은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결국 왕실의 친척 10명에게 후작 6명 백작 2명 자작 2명을, 대한제국에서 대신을 지냈던 자를 중심으로 백작 1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등 모두 66명에게 작위를 주었습니다. 데라우치 총독이 주재하는 10월 7일에 열렸던 수작식에는 76명 중 50여 명이 참석했지요. 이들은 마차와 가마를 타고 의기도 당당하게 희열에 들떠 수작식에 참여했는데, 이 광경을 보도한 언론은 “일장 가관이었다”고 꼬집었습니다.

 

부인을 포함해서 모두 74명으로 구성된 ‘조선귀족 일본관광단’은 1910년 10월 23일부터 11월 중순까지 20여 일의 일정으로 일본 주요 도시와 명승지를 돌아보며 ‘문명국’ 일본의 발전상을 시찰하고 다녔어요. 특히 관광단 일행은 일본 천황의 생일인 11월 3일의 천장절 행사에 특별 초대받아 천황이 하사한 음식을 즐겼습니다. 다음 날 관광단 일행 중 22명은 직접 천황을 ‘배알하고 수작의 감사인사를 올렸다’고 하지요.

 

 

조선귀족 일본관광단

 

극히 일부만이 수작 거부, 자결, 망명 등으로 저항

 

1911년 1월 13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실에서 공족 및 조선귀족에 대한 은사공채권 교부식이 열렸습니다. 수작자들은 현금일시불이 아니라 최고 50만 4000원에서 최저 2만 5000원에 해당하는 은사공채를 받았어요. 참고로 이강공과 이희공은 83만 원이었습니다. 각 은사공채의 원금은 5년 거치 50년 이내 상환이었고, 매년 3월과 9월 두 번에 걸쳐 5%의 6개월 분 이자를 지급받았습니다. 하지만 일제 지배 기간이 50년이 못되어 원금을 받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76명 가운데 8명은 작위와 은사금을 받지 않았습니다. 김석진, 조정구, 민영달, 유길준, 윤용구, 조경호, 한규설, 홍순형 등인데요. 그 가운데 김석진은 자살을 했으며, 그의 아들 김영한도 습작을 거부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사위 조정구는 자결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어요. 민영달은 만주로 망명해서 신흥강습소에 재정지원을 하고 대동단에 가담했습니다. 이들에게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수여되었어요.

 

 

작위를 거부하고 자결한 김석진 의사의 묘비.

 

한편 유길준, 윤용구, 조경호, 한규설, 홍순형은 수작을 거부했지만, 이후에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훈되지 않았습니다.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기는 했지만, 의친왕의 장인이었던 김사준은 보안법 위반, 김윤식과 이용직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법적 처벌을 받고, 김가진은 상하이로 망명하여 작위를 박탈당했어요. 하지만 이들의 경우에도 서훈을 받지 못했습니다.

 

역사의 진실 가리는 고종 독살설, 의친왕 독립운동설…

 

작위를 거부하거나 거절하는 행위에 대해 「조선귀족령」을 비롯한 어디에도 법적·강제적 조항은 없습니다. 또 이로 인해 신체적으로 고통을 받거나 물리적·경제적으로 직접 피해를 입었다는 사례도 찾을 수 없지요. 작위를 받은 것이 일제 측의 일방적인 강요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즉시 작위를 거부하거나, 수용했더라도 독립운동과 관련해 실작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수작은 강제병합을 당연하게 여기고 협력했다는 반증이지요.

 

그런데 병합 이후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자들은, 현재 대표적인 친일파로 지목되어 있고 재산환수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귀족보다 더 높은 왕족 지위와 고액의 은사금을 받은 대한제국 황실과 그 구성원들은, 가장 심한 친일파로 지목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을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식으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주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있는 현실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심지어 근거도 없어 고종 독살설을 퍼뜨리는 경우도 있어요. 이는 역사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낭설입니다. 고종은 일본제국의 조선 지배에 어떤 위협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황족 여성과 결혼해서 일본군의 장군까지 오른 영친왕을 동정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요. 더구나 근거도 없이 의친왕이 독립운동을 주도라도 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반성은커녕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황손을 자처하는 해괴한 짓을 용납하면 안되겠지요.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을 선포한 이유

 

1917년 7월 중국 상하이에서 선포된 대동단결선언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융희 황제가 삼보(三寶)를 포기한 8월 29일은 즉 우리들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이때 순간도 멈추거나 쉼이 없음이라. 우리들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그의 황제권 소멸의 때가 즉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 최종의 하루는 즉 신한국 최초의 하루이니, 어찌 연관 없겠는가. (중략) 비한인(非韓人)에게 주권 양여는 근본적 무효요."

 

 

대동단결선언문

 

따라서 1910년 융희제의 주권 포기는 국민들에게 대한 묵시적 선위이기 때문에, ’우리 동지는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 대통(大統)을 상속할 의무가 있도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언에서 말하는 ‘삼보’는 토지와 국민과 정치를 의미하고, ‘선위’라는 말은 ‘권위를 양도한다’는 뜻인데요. 대동단결선언은 신규식, 신채호, 박은식, 윤세복, 조소앙, 박용만 등 내로라하는 명망가 14인이 만들었습니다.

 

독립지사들은 일본인에게 넘긴 주권 양여는 근본적인 무효라고 주장했어요. 그리고 이미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독립운동이 대한제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님을 선언한 것입니다. 3.1운동 이후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것은 갑작스런 것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황실과 고위관료들이 일본으로부터 왕공족, 귀족으로 우대를 받으며 재정지원을 받은 것에 대한 거부선언이었습니다.

 

친일 역사의 해결은 어떻게 가능할까

 

최근에 한 여배우가 별 생각 없이 집안 이야기를 했다가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마침 광복절이다 보니 더 반응이 뜨거웠지요. 사실 증조부 안상호는 의학사에서나 언급될 뿐, 일반적으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가 친일파인 것은 맞고 여러 친일단체의 임원을 했으므로 비판받을 여지가 충분하지요. 하지만 『친일인명사전』 등에 굳이 수록되지 않았을 정도로 그의 친일행위가 두드러졌던 것은 아닙니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 '일선동화'의 모범가정으로 소개된 안상호의 가족 사진. 1918년 12월 10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안상호는 "나는 일본 사람과 똑같다. 지금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매운 음식은 조금도 못 먹는다"며 "다섯 자녀들은 일본어만 쓰고 조선말은 전혀 하지 못한다. 조선 사람과는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연합

 

증조부가 범한 잘못으로 자손들이 책임을 지는 것은 연좌제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친일을 정당화하거나 옹호하게 되었을 때 그것은 본인의 책임이 됩니다. 그런데 자신들 사주들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감싸던 언론들의 과열된 보도를 보면, 평소에 친일문제에 단호한 태도를 보여온 사람들조차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가 있어요. 이 기회에 잘 반성하고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그동안 TV 다큐멘터리와 토론 프로그램을 통해 친일문제는 빨리 정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해 왔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냥 묻어버릴 것이 아니라 진상규명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망각과 은폐로는 해결되지 않고, 역사의 빚으로 남아 이자가 계속 불어나니까요. 이제는 당사자들이 세상에 없는 상황에서 반성도 처벌도 사실상 어렵기 때문에, 친일문제를 어느 선에서 해결할 것인지도 사회적 논의가 필요합니다.

                                                                                                          < 주진오 역사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