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식민지배를 얼버무린 1965년 한일기본조약
학생, 정치인, 기독교계, 예비역 장성까지 함께 반대
60년 후 실질적 조약 개정 요구하는 한일 시민연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일본 도쿄에서 정식으로 조인되었습니다. 이전 14년에 걸쳐 한일 양국은 외교관계 정상화, 청구권 문제, 재일교포 문제 등 다양한 현안을 포함한 회담을 진행해 오고 있었는데요. 1964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치열한 국민들의 반대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막무가내로 밀어부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한일기본조약은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국회의 비준 동의를 거쳐야 했어요. 7월 14일에 난투극을 벌인 끝에 날치기로 발의한 비준안을 8월 14일, 야당이 전원 퇴장한 가운데 여당인 공화당 단독으로 통과시켰습니다. 일본에서는 12월에 참의원에서 비준이 이루어졌고, 1965년 12월 18일, 서울에서 양국이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조약은 공식 발효되었어요.
힘으로 밀어부친 조약을 단식과 의원직 사퇴로 막아선 야당
6월 14일 제1야당인 민정당과 제2야당 민주당은 한일기본조약 반대투쟁을 위해 합당하여 민중당을 창당하였습니다. 의원들은 국회에서 비준될 경우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하고, 6월 22일 조인 이후, 국회의원 57명과 지도부는 조약 무효를 주장하며 국회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했습니다. 당권 경쟁에서 패해 고문로 있던 윤보선은 무기한 단식농성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들 내에 탈당과 당 해체로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와 원내 반대투쟁에 머물려는 온건파의 갈등이 고조되었습니다. 윤보선이 7월 28일 탈당계를 냈으며, 8월 9일 민중당 의원 58명이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습니다. 당시에는 국회의원이 탈당하면 바로 의원직을 박탈 당하게 되어 있었는데, 6명의 의원만이 탈당계를 제출하였습니다.

8월 13일 이효상 국회의장은 윤보선·서민호·김도연·정일형·정성태·김재광 등의 의원직 상실을 선포했어요. 이로써 국회의원 수는 175명에서 169명으로 감소했습니다. 당시 의석 분포는 공화당 110석 민중당 55석 무소속 4석이었어요. 잔류한 민중당 의원 가운데에는 김대중과 김영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정치권의 반대투쟁에 앞장섰던 서민호 의원의 수난
그 가운데에는 서민호 의원이 포함되어 있었는데요. 1903년에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그는 보성고보를 다니던 중, 임시정부가 보낸 지령문을 돌리다가 6개월 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 후 일본 와세다대학과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를 졸업한 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어요. 그는 조선어학회를 후원하다가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광복 후 미군정에 의하여 1946년 6월 전라남도 광주부윤, 같은 해 10월 전라남도 지사에 임명되기도 했는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 고흥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어요. 그는 지주 출신의 우익 인사로서 반공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는 줄곧 이승만 극우 독재정권에 맞선 정치적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1951년 국회에서 국민방위군 의혹사건과 거창양민학살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발언으로 이승만 정권의 미움을 사게 되었어요. 1952년 순천에서 자신을 살해하려던 군인을 쏘아 죽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명백한 정당방위였지만 8년형을 받고 복역 중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쫓겨나자 바로 석방되었어요. 정치적 탄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그를 ‘한국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9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고 정치활동 금지를 당했지만, 1963년에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용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1964년 정기국회에서 ‘대통령을 탄핵한다’라는 제목으로 박정희의 퇴진을 요구했어요. 굴욕적이고 매국적인 외교로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고 있는 사태를 더 묵과할 수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1965년에는 한일기본조약 비준에 반대하면서 의원직을 사퇴하기에 이르렀고, 동생 서석순 교수는 교수단 시국선언을 주도했지요.
그 후 서민호는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전국 주요 도시를 다니며 시국강연회를 통해 식민지배 청산 미흡, 민족 자존심 훼손 등을 집중적으로 비판했어요. 그의 거침없는 비판과 민주사회주의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진보정당 활동으로 박정희 정권 때에만 세 차례나 투옥되었습니다.
보수 기독교단과 예비역 장성들도 반대투쟁에 동참
7월 1일 한경직, 김재준, 강원용, 함석헌 등 개신교 지도자 100여 명은 서울 영락교회에서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국민의 애국적인 의사표시를 권력으로 내리누르는 행위를 즉각 중지하라”며, 국회는 한국 역사의 장래를 위해 비준을 거부할 것을 촉구했어요.

7월 5일에는 영락교회에서 2천여 신도가 참여해 ‘국가를 위한 연합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이날 기도회는 기독교계 한일협정 비준 반대 500만 서명을 목표로 정했어요. 한경직과 김재준은 한국 교회의 예수교장로회(예장)와 기독교장로회(기장)의 지도자로, 이들이 함께 열었던 구국 기도회는 보수 개신교 세력까지 참여한 매우 드문 사례였습니다.
함석헌은 자택에서 한일협정 비준 반대를 위한 삭발 단식에 들어갔어요. 또한 7월 8일부터 10일까지 전국의 예수교장로회 산하 2000여 교회 약 50만 명의 신도들이 구국 금식 기도회를 개최했고, 8월 8일에는 영락교회에서 윤보선 등 3천여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위한 금식 연합 기도회’를 개최하고 행진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7월 14일에는 예비역 장성 11명이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어요. 장관과 중앙정보부장, 참모총장을 역임한 김홍일, 김재춘, 송요찬, 손원일, 이호 등 과거 군정과 박정희 정권하에서 최고위원 또는 장관을 역임하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들이라서 놀라움을 주었고 반대운동 진영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그동안의 한일 교섭이 비정상적인 경로에 의해 독선적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조약 내용이 일본 측 제안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고 비하며 한일회담 과정과 협정의 부당함을 논박했어요. 이들은 8월 25일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투쟁에 관한 성명서를 다시 발표했고, 위수령이 선포되자 '국군 장병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배포했습니다.
이들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호소하고 위수령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러자 이들 중 네 명을 박정희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구속했습니다. 이들이 박정희를 "국가에 불행을 불러일으키는 집권자들이야말로 이적 행위자이며 국민 단합을 파괴하는 반민족 행위자이며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반국가 행위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기 때문이었어요.
식민지배 청산을 외면한 채 맺은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조약
박정희가 폭력적으로 강행한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자 국민들은 '왜놈과의 국교정상화는 제2의 경술국치이자 을사조약이다', '피 흘려 나라를 지켜낸 호국영령과 애국자들이 크게 통곡한다', '국민과의 합의도 없는 왜놈과의 국교정상화는 친일 매국 정권의 독재다'라는 등의 반대 입장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조약의 조인을 끝내 막을 수 없었어요.

이 조약의 문제점은 식민지 지배 청산의 부재, 과거사 문제의 미해결,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외교, 경제적 종속 우려, 민주주의 및 주권 침해 문제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후 지금까지 한일관계에서 끊임없이 갈등과 충돌이 계속되는 원인을 제공했어요.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한일기본조약에는 일제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인정하지 않은 채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어요. 조약 제2조에서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했지만, 애매한 표현을 사용해 한국과 일본이 각각 다른 해석을 하도록 여지를 남겼습니다.
박정희 정부가 일본에 지나치게 저자세로 협상에 임했다는 비판이 있었지요. 청구권 문제에서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배상 요구가 배제되었습니다. 독도 영유권 문제 등 주요 현안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어요. 일본 자본과 상품의 침투로 인해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되는 구조가 고착화될 위험성이 강조되었습니다.
‘빛의 혁명’ 없었다면 제2의 굴욕적 한일기본조약 없었을까?
무엇보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등 식민지배 관련 피해자들의 권리와 보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양국 간 해석 차이로 인해 과거사 문제가 지속적으로 남게 되었지요. 한일청구권협정에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명시했으나, 개인 피해자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배상 문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이 협정으로 모든 배상 문제가 끝났다는 입장을 고수하지만, 한국 대법원 등은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결하며, 피해자들은 여전히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데요. 이로 인해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등 과거사 피해자 문제는 현재까지도 한일 간 갈등의 핵심 현안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와 달리 1972년 중일 공동 성명에서는 배상금은 받지 않았지만, "중국 국민에게 중대한 손해를 끼친 것에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어요. 아울러 일본의 지배를 4년도 받지 않았던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한국보다 더 많은 액수의 배상금이 지급되었습니다. 버마의 경우 3억 4000만 달러, 필리핀은 5억 5000만 달러를 받았어요.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되자 미국은 즉각 이를 환영하였습니다. ‘한·일국교 정상화’는 한·미·일 3국 정부가 추구했던 목표가 상호 부합한 가운데 이루어졌어요. 즉 ’경제난 해결’이라는 한국의 필요와 ’식민지배 피해청산’의 부채를 경제협력이라는 포장지를 씌워 해소하려는 일본의 요구, 그리고 미국의 대중국 봉쇄를 위한 동아시아 지역통합의 전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인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2025년의 을사년에 60년 전의 굴욕적인 한일기본조약에 버금가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했어요. 특히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김태효 1차장의 행적을 보아, 신한일선언을 통해 독도 공동소유를 비롯한 일방적 양보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친위쿠데타의 실패로 무산되었지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요.
한일기본조약 60주년 맞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한일 시민연대
2025년 5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체결 60년을 맞아 한일 시민사회 원로와 지식인 146명이 참여한 ‘공동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선언은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 및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조약과 협정이 불법 무효임을 확인한다”며, 한일기본조약 제2조의 해석을 양국이 통일할 것을 촉구했어요.

일본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책임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재일조선인 차별 철폐,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 등도 과제로 제시했어요. 이에 앞서 1월에는 일본 지식인들이 도쿄에서 “한일기본조약의 일본 측 해석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시각이 담겨 있다”며, ‘병합조약 등은 원천 무효’라는 한국 해석을 따라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한일 시민사회는 기자회견, 공동선언, 범국민 서명운동, 한일 동시 기자회견 등 다양한 연대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데요. 6월 20일 일본과 동시 기자회견에서는 한일기본조약 제2조의 애매한 ‘이미 무효’ 표현 대신, ‘불법 무효’로 명확히 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습니다. 또 ‘한반도 두 국가’ 현실 반영 등 조약 해석 개정도 제안되었어요.
이번 발표는 2010년의 ‘한일병합조약 원천무효’ 선언의 문제의식과 시민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한일기본조약의 실질적 개정과 과거사 청산을 더욱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214명이 참여했던 선언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 대법원 판결 등 과거사 문제 해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어요. 2025년 선언이 그보다 더 많은 성과를 거두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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