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왜곡 이진숙 '재조명 포럼'…'학문' 조항 악용해

 

'소요 사태', '딥스테이트'에 "첩의 자식들" 극언도
확인된 사실 백지로 돌리는 게 연구 아냐
이진숙 공천한 국민의힘 "토론회 부적절"
공당이라면 공천이 잘못 됐는지 답해야

 

공적 공간 그렇게 합부로 빌려줄 수 있나
5·18 더 연구하자는 주장 반대할 수 없어
학문은 검증하겠다는 약속 따라붙어야
그 약속이 빠지면 누군가의 알리바이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8조 제1항은 5·18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한 사람을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 처벌 대상에는 신문과 방송, 전시물과 공연물, 그리고 “공연히 진행한 토론회, 간담회, 기자회견, 집회, 가두연설 등에서의 발언”도 들어간다. 그런데 같은 조 제2항에는 예외가 있다.

 

“제1항의 행위가 예술·학문, 연구·학설, 시사사건이나 역사의 진행과정에 관한 보도를 위한 것이거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목적을 위한 경우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법이 학문을 위해 남겨둔 문이다.

 

8월 13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재조명 국회 공개포럼’이 열렸다. 이진숙 국민의힘 의원과 새역사국민운동이 공동 주최했다. 이 의원은 5·18이 특정 진영의 소유물이 되어서는 안 되며, 불편한 질문이 나오더라도 학술적으로 접근할 길은 열려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 문으로 무엇이 들어왔을까.

 

국민의힘 이진숙 의원 주최로 13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의 재조명 국회공개포럼'에서 참석자들이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2026.8.13 연합
 

그 안에서 나온 말들

 

이영훈 새역사국민운동 공동대표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소요 사태”라고 불렀다. 한국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으로 ‘딥스테이트’를 거론하면서 그것이 형성되는 결정적 계기를 1980년 5월 광주에서 찾았다.

 

그는 5·18이 법적으로 민주화운동이라는 점을 인정했고 북한군 개입설에도 선을 그었다. 그렇다면 ‘소요 사태’와 ‘딥스테이트’라는 해석은 무엇에 기대고 있을까.

주동식 전 국민의힘 광주 서구갑 당협위원장은 호남과 주사파를 “순망치한 관계”라고 규정했다. 이어 5·18 문제의 해결을 거론하면서 “대외적으로는 고립”, “내부적으로는 분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파들은 첩의 자식들”이라는 표현도 나왔다.

 

객석에서는 고성과 항의가 터졌다. 참석자 사이에 물병이 날아가고 멱살잡이가 벌어졌으며 폭행 신고를 받은 경찰도 출동했다. 이진숙 의원은 이런 소란으로 행사가 중단되는 것이 특정 세력의 목표라는 취지로 말하며 포럼을 계속했다.

여기까지 듣고 나면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우리는 어디까지를 학문이라고 불러야 할까.

 

학문의 자유와 ‘성역’

 

학문에는 불편한 질문을 던질 자유가 있어야 한다. 국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질문을 금지하기 시작하면 연구는 권력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일이 된다. 그렇다고 질문을 던지는 순간 대답까지 연구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료를 찾아야 한다. 사료의 출처와 맥락을 따져야 한다. 기존 연구와 대조해야 한다. 자기 주장에 불리한 증거에도 답해야 한다. 새로운 해석이라면 새 사료를 제시할 수도 있고, 이미 알려진 자료를 더 설득력 있게 읽을 수도 있으며, 기존 설명보다 나은 논증을 보여줄 수도 있다.

 

5·18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군 문서가 발견될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증언이 나올 수도 있다. 이미 알려진 자료에 새로운 질문을 던져 기존 해석을 수정할 수도 있다. 기존 조사와 판결의 사실인정을 바꿀 만한 근거가 있다면 검토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실제로 아직 규명할 영역도 남아 있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헬기 사격을 확인하고 북한군 개입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고 규명하는 등의 성과를 냈지만, ‘군에 의한 발포 경위 및 책임 소재’를 비롯한 핵심 과제 일부에는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연구가 파고들 곳은 그런 빈틈이다. 그런데 이번 포럼에서 눈에 띈 것은 새로운 사료보다 새로운 이름이었다.

 

민주화운동은 ‘소요 사태’가 됐다. 국가폭력의 역사는 ‘딥스테이트’의 탄생 이야기와 연결됐다. 새로운 이름에는 그것을 떠받칠 근거가 필요하다. 새 사료가 될 수도 있고, 기존 자료를 새롭게 읽는 해석이나 더 설득력 있는 논증이 될 수도 있다.

 

5·18 문제를 두고 고립과 분열을 말하는 대목에서는 이야기가 1980년 광주를 떠난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밝히던 자리에 앞으로 특정 지역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정치 전략이 들어선다.

 

이진숙 의원은 5·18이 특정 진영의 소유물이 되어서는 안 되며 불편한 질문도 학술적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에도 “더 이상의 토론은 필요 없다”는 태도가 5·18을 성역으로 강요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성역’이라는 말에는 묘한 기능이 있다. 누군가 5·18을 성역이라고 부르는 순간, 아직 논쟁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배역이 정해진다. 기존의 연구와 조사 결과를 지키자는 사람은 금기를 떠받드는 사람이 되고, 그것을 공격하는 사람은 금기에 맞서는 용감한 사람이 된다. 논증을 시작하기도 전에 배역이 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연구가 금지돼 있었을까. 이영훈 대표 자신은 포럼에서 5·18에 관한 역사적 담론이 특정 정치세력에 의해 장악됐다고 주장하며 이를 해체하고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연구 성과가 한쪽에 더 많이 축적돼 있다는 사실에서 곧바로 다른 쪽의 연구가 금지돼 있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 사이를 채울 근거가 필요하다. 연구가 적었던 것과 연구를 못 하게 한 것은 다른 이야기지 않는가.

 

역사에 성역을 둘 이유는 없다.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다시 살피고, 틀린 사실이 드러나면 고치면 된다. 다만 연구의 문을 열어둔다는 말이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을 그때마다 백지로 돌려놓자는 뜻까지 품지는 않는다.

 

이영훈 새역사국민운동 공동대표가 13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국민의힘 이진숙 의원 주최 '5.18 민주화운동의 재조명 국회공개포럼'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2026.8.13 연합

 

‘성역’과 ‘자학사관’

 

이런 논법에는 비교해볼 만한 선례가 있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논쟁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가해, 1980년 광주의 국가폭력은 역사적 맥락도 다르고 가해와 피해의 구조도 다르다. 여기서 비교하는 것은 사건의 크기나 성격보다 논쟁의 방식이다. 상당한 검증을 거친 가해의 역사를 다시 논쟁 가능한 상태로 돌려놓을 때 어떤 언어가 사용될까.

 

일본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공식 자료에서 창립 계기 가운데 하나로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위안부’ 서술을 직접 거론한다. 자신들이 만든 교과서는 ‘자학사관’을 배제하고 일본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서술했다고 설명하며, 최근까지도 ‘자학사관’의 극복과 ‘긍지 있는 교과서’를 운동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자학사관’이라는 말에는 독특한 전환이 들어 있다.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전쟁 중의 가해를 얼마나 정확하게 기술했느냐는 질문이 뒤로 밀린다. 그 사실을 가르치는 일이 일본을 어떻게 보이게 만드느냐는 질문이 앞으로 나온다. 역사적 사실을 따지는 자리에 국가적 자긍심이라는 다른 척도가 들어오는 순간 질문 자체가 변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서 왜 우리를 나쁘게 말하는가로 옮겨가는 셈이다.

 

‘성역’과 ‘자학사관’은 뜻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논쟁에서 하는 일에는 닮은 구석이 있다. ‘성역’이라는 표현은 기존의 사실인정을 옹호하는 사람을 금기를 지키는 사람으로 만든다. ‘자학사관’이라는 표현은 가해의 역사를 기록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자기 나라를 깎아내리는 사람으로 만든다. 사실을 반박하기 전에 그 사실을 말하는 사람의 자격부터 문제 삼는 방식이다.

 

물론 역사 해석은 계속 바뀐다. 역사학은 그렇게 발전해왔다. 새로운 문서가 발견되면 기존 해석을 바꾸고, 잘못 알려진 숫자가 있으면 바로잡고, 통설을 뒤집을 증거가 나오면 통설도 버린다.

 

역사학은 원래 수정된다. 그래서 역사 연구에서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수정과 부정적인 의미의 ‘역사수정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사료와 더 나은 해석, 더 설득력 있는 논증으로 기존 설명을 고치는 것은 역사학의 일상적인 작업이다.

 

여기서 문제 삼는 역사수정주의는 축적된 증거를 무시하거나 선택적으로 다루면서 정치적 목적에 맞춰 가해의 사실을 축소하고 다시 불확실한 문제로 돌려놓는 움직임을 가리킨다.

 

스벤 잘러(Sven Saaler)는 현대 일본의 민족주의와 역사정치를 분석하면서 역사수정주의와 정치의 결합을 추적했다. 다케나카 아키코(竹中晶子)는 1995년 이후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 기억에서 나타난 수정주의적 전환을 분석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수정 자체보다 그 근거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면 이 차이가 더 선명해진다. 1993년 고노 담화에서 일본 정부는 당시 일본군이 위안소의 설치와 관리, 위안부의 이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밝혔다. 모집 과정에서는 많은 경우 여성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회유와 강압 등을 통해 모집됐으며, 때로는 행정·군 관계자가 직접 모집에 관여했다고 설명했다. 피해 여성들에게 사죄와 반성도 표명했다. 이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회피하지 않고 역사 연구와 교육을 통해 기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뒤에도 역사정치는 계속됐다. 교과서와 ‘위안부’, 전쟁 책임을 둘러싼 수정주의적 운동은 이어졌다. 야마구치 도모미(山口智美)는 일본과 미국에서 벌어진 ‘위안부’를 둘러싼 ‘역사전쟁’을 연구하며 현대 일본 우익의 역사수정주의가 국경을 넘어 전개되는 양상을 분석했다.

여기서 역사부정의 조금 더 세련된 형태를 볼 수 있다. 언제나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이미 확인된 사실을 다시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처럼 만들어놓는 방법도 있다. 이 글에서는 그것을 ‘재논쟁화’라고 부르겠다.

 

재논쟁화는 이미 논의된 문제를 다시 연구하는 행위 일반을 뜻하지 않는다. 기존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 자체도 문제 삼지 않는다. 새로운 사료나 더 나은 해석과 논증을 제시하지 않은 채, 기존의 재판과 국가 조사, 사료와 선행연구 가운데 자기 주장에 불리한 근거에는 충분히 답하지 않으면서 이미 상당한 검증을 거친 사실의 확정성만 계속 낮추는 방식이다.

 

모든 사실을 지울 필요도 없다. 일부는 인정해도 된다. 대신 “기존 통설이 편향돼 있다”,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그동안 질문하는 것조차 금지돼 있었다”고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사실과 의견의 경계가 흐려진다. 어느 순간 재판과 조사와 연구를 거쳐 확인된 사실도 여러 견해 가운데 하나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물음표 자체에는 죄가 없다. 학문은 물음표로 움직인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새로운 자료가 있는가. 기존 자료를 더 잘 설명하는 해석이 있는가. 지금까지의 설명보다 설득력 있는 논증이 있는가.

 

다시 5·18로 돌아가 보자. 새로운 군 문서가 발견돼 발포 경위에 관한 기존 설명을 바꿀 수도 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가 기존 조사 결과의 일부를 뒤집을 수도 있다. 이미 알려진 자료를 새로운 관점에서 읽어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런 작업 없이 민주화운동이 ‘소요 사태’로 불리고, 이미 축적된 연구를 두고 ‘성역 때문에 질문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질문은 달라진다.

 

무엇을 새로 밝혔는가. 그리고 무엇을 다시 논쟁거리로 만들려 하는가.

한국 사회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가해를 축소하거나 흐리는 역사수정주의를 오래 비판해왔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국가폭력을 대할 때도 같은 판단 기준을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남의 역사수정주의를 바라볼 때 세운 기준과 우리 자신의 역사를 바라볼 때 적용하는 기준이 달라서는 곤란하다. 역사 인식을 둘러싼 논쟁은 책과 토론회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런 역사인식 논란을 거친 사람이 정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고, 다시 국회의원의 이름으로 국가기관의 공간에서 행사를 열면 문제는 정치적 책임의 영역으로 넘어온다. 그래서 이번 포럼의 주최자를 다시 보게 된다.

 

만 기자 = 이영훈 새역사국민운동 공동대표가 13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 국민의힘 이진숙 의원 주최 '5.18 민주화운동의 재조명 국회공개포럼'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2026.8.13 연합

 

누가 그를 국회로 보냈는가

 

국민의힘은 이번 행사와 거리를 뒀다. 원내지도부는 개최 전에 이진숙 의원에게 취소를 요청했다. 행사 다음 날인 8월 14일에는 최은석 원내수석대변인이 포럼 강행을 “상당히 부적절”하다고 평가하고 재발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당은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에 동의한 적이 있고 민주화운동 계승에 관한 입장도 확고하다고 설명했다. 이진숙 의원의 윤리위 회부 여부에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했다.

 

이 입장은 그대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질문도 더 정확해진다. 당이 포럼의 개최를 부적절하다고 판단한다면, 그보다 앞서 이진숙을 국회의원 후보로 선택했던 판단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진숙은 과거 5·18 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로 표현하거나 항쟁에 나선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SNS 게시물에 공감을 나타내 논란을 빚었다. 2024년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는 “좋아요 연좌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앞으로 ‘손가락 운동’에 조금 더 신경을 쓰겠다고 답했다.

 

2026년 2월에는 5·18 사적지인 전일빌딩245에서 예정됐던 그의 강연을 광주시가 직권 취소했다. 광주시는 과거 5·18 관련 언행과 행사의 정치적 성격을 들어 조례상 ‘공익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석 달가량 뒤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는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로 이진숙을 단수공천했다. 5월 4일 최고위원회는 공관위의 단수공천안을 최종 확정했다.

 

단수공천에는 당의 판단이 들어간다. 국민의힘이 이진숙의 5·18 역사관 때문에 공천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런 인과관계를 주장할 필요도 없다.

 

더 단순한 질문이면 충분하다. 과거의 역사인식 논란을 안고 있던 후보를 당이 단수공천하고 최고위원회가 확정했다. 석 달여 뒤 그 의원이 연 포럼을 같은 당 지도부가 사전에 만류했고, 행사 다음날에는 공식적으로 ‘부적절’하다고 평가했다.

 

날짜만 놓고 보면 이렇다. 5월 1일, 이진숙의 단수공천이 이루어지고, 5월 4일, 국민의힘 최고위에서 공천이 확정되었다. 8월 13일, 그가 공동 주최한 국회 포럼에서 5·18을 ‘소요 사태’라고 부르는 발표와 5·18 문제를 고립과 분열로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8월 14일, 국민의힘 지도부가 포럼 강행을 ‘부적절’하다고 공식 평가하고 재발 방지를 언급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제 5월의 공천 판단과 8월의 ‘부적절’ 판단 사이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당이 설명할 차례다. 행사는 의원 개인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공천은 당의 선택이었다. 둘을 함께 설명할 책임도 남는다.

 

예외가 원칙을 삼킬 때

 

5·18 특별법이 학문과 연구에 예외를 둔 것은 필요한 선택이었다. 국가가 역사 해석을 독점하는 사회보다 불편하고 엉뚱한 주장까지 연구의 장에서 검증할 수 있는 사회가 낫다.

 

그래서 제8조 제2항은 중요하다. 법은 행사 이름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제1항이 정한 허위사실 유포 행위에 해당하는지, 그리고 제2항의 예술·학문, 연구·학설 등의 목적을 위한 경우인지가 법률상 쟁점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 판단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재논쟁화’는 이 글에서 역사정치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특별법의 법률요건과는 별개다.

 

법원이 판단할 문제는 더 구체적이다. 어떤 발언이 제8조 제1항의 허위사실 유포에 해당하는지, 해당한다면 제2항의 예외가 적용되는지를 따져야 한다. 그 행사가 학문적으로 설득력 있는 연구였는지를 평가하는 일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좋은 연구와 합법적인 표현은 서로 다른 범주다. 엉터리 연구도 표현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정부가 연구의 질을 심사해 발언 허가증을 발급하는 사회도 바라기 어렵다.

 

그래서 이번 포럼을 비판하는 가장 강한 방법은 질문 자체를 막는 데 있지 않다. 질문하게 두면 된다. 실제 발언이 특별법 위반에 해당하는지, 제8조 제2항의 예외가 적용되는지는 구체적인 법적 절차에서 가려질 문제다.

 

국회도 자기 공간을 어떤 기준으로 빌려줄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토론의 역사관과 정치적 내용을 사전에 심사해 허가 여부를 정하자는 뜻은 아니다. 그런 장치는 얼마든지 정치적 검열로 변할 수 있다.

 

누가 대관을 신청할 수 있는지, 국회나 국가기관의 공식 입장으로 오인될 가능성을 어떻게 막을지, 안전과 시설 이용 목적을 어떤 절차로 판단할지 같은 기준을 명확히 하는 쪽이 낫다.

광장에서 하는 말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하는 말은 같은 말일까. 장소가 발언을 진실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국가기관의 공간은 행사에 일정한 공적 권위를 빌려준다. 그 권위를 누구에게 어떤 절차로 빌려줄 것인가는 국회가 답할 문제다.

 

5·18 당시 계엄군이 헬기 사격을 한 광주시 동구 금남로 전일빌딩. 사진 속 원안을 중심으로 공중 정지 상태의 헬기에서 사격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5·18기념재단

 

학문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5·18을 더 연구하자는 주장에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연구하면 된다. 새로운 사료를 찾을 수도 있다. 이미 알려진 자료에 다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기존 조사와 연구보다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을 수도 있다. 아직 규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발포 책임자 등 일부 핵심 과제를 규명하지 못한 만큼 후속 연구의 여지도 실제로 남아 있다. 역사학은 그렇게 움직인다. 일본의 역사도 한국의 역사도 예외일 이유가 없다.

 

문제는 그런 작업 대신 새로운 이름만 나올 때다. 민주화운동에는 ‘소요 사태’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가폭력의 역사에는 ‘딥스테이트’라는 설명이 붙었다. 5·18 문제를 고립과 분열로 다루자는 정치적 주장도 같은 무대에 올라왔다.

 

그리고 그 무대에서는 학문의 자유가 거론됐다. 법이 어디까지 허용하는지는 법원이 판단할 일이다. 하지만 학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에는 다른 책임이 따라온다. 자료를 내놓고, 기존 연구와 씨름하고, 자기 주장에 불리한 근거에도 답하며 자신의 해석을 검증에 내놓겠다는 책임이다.

 

책임 없이도 말할 자유는 있다. 하지만 그런 말을 굳이 학문이라고 불러줄 의무까지 생기지는 않는다. 법은 학문을 위해 작은 문 하나를 열어두었다. 그 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문 위에 ‘학문’이라고 써 있다는 이유만으로 안쪽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연구가 되는 것도 아닌 것이다.

 

학문이라는 이름에는 검증하겠다는 약속이 따라붙어야 한다. 그 약속이 빠지는 순간, 학문은 자유를 지키는 이름에서 누군가의 알리바이로 변한다.    < 정승호 기자 >

 

‘5·18 폄훼 토론’ 강행한 이진숙… “국힘 의원 전원 불참”

 

‘임을 위한 행진곡’ 조롱에 전두환 옹호까지 등장
이진숙 “5·18 성역? 우리 자유 구속, 유공자 공적 알려야”
“좌파는 첩의 자식” 주장까지… 5·18부상자회 항의에 몸싸움도

  
▲이진숙 국민의힘 의원과 새역사국민운동은 8월13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5·18민주화운동의 재조명, 국회공개포럼’을 개최했다. 사진=윤수현 기자

 

“5·18이 성역이 되는 게 바람직한가.”(이진숙 국민의힘 의원)
“딥스테이트가 5·18 광주소요 사태를 계기로 형성됐다.”(이영훈 새역사국민운동 공동대표)
“호남을 대외적으로 고립시켜야 한다.”(주동식 자유주의작가회의 공동의장)

 

이진숙 국민의힘 의원이 국회도서관에 5·18민주화운동 폄훼와 전두환씨 옹호 발언을 불러왔다. “광주는 어두운 세력의 소굴”이라는 주장을 내놓은 단체 새역사국민운동과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날 행사에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폄훼가 이어졌으며, 5·18민주화운동 당시 강경 진압을 거부한 군인과 경찰에 대한 비난도 나왔다. 계엄군 진압의 최종 책임자 전두환씨에 대한 옹호 발언도 쏟아졌다. 약 200석의 국회도서관 대강당은 인산인해를 이뤘지만, 국민의힘 의원들은 한 명도 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진숙 국민의힘 의원과 새역사국민운동은 13일 오후 2시 서울 영등포구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5·18민주화운동의 재조명, 국회공개포럼>을 개최했다. 이 의원은 국민의힘 원내지도부 만류에도 행사를 강행했다. 손수조 미디어대변인·장성호 서울 구로을 당협위원장, 이 의원이 위원장으로 있는 국민의힘 미디어위원회의 일부 위원만 행사에 참석했다.

 

이진숙 의원은 축사에서 “5·18이 성역이 되는 게 자유대한민국에서 바람직한 일인가. 성역으로 규정되면 말이나 행동을 금하는 게 많아지면 우리 자유는 구속된다”며 “5·18 유공자 명단과 관련해, 유공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업적이 있는지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명단 공개는 보수 세력이 가장 많이 내놓는 주장 중 하나이며, 5‧18민주유공자 명단은 정보공개법에 따라 비공개 대상이다. 

 

▲이진숙 국민의힘 의원과 새역사국민운동은 8월13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5·18민주화운동의 재조명, 국회공개포럼’을 개최했다. 사진=윤수현 기자

 

토론회를 주최한 새역사국민운동의 이영훈 공동대표는 개최사에서 “우린 5·18 북한군 개입설을 믿지 않는다”며 무분별한 역사왜곡 주장에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지만, 실제 강연에선 전두환씨에 대한 찬양과 5·18민주화운동 역사왜곡 주장이 이어졌다. 이영훈 대표는 “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이 불명예스럽게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중도하차한 사건을 보면 딥스테이트(Deep State,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권력 집단)가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며 “한국적 의미의 딥스테이트가 형성된 결정적 계기는 46년 전 있었던 19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소요 사태”라고 주장했다.

 

또 이 대표는 “이진숙 의원 말고 다른 국민의힘 의원들이 적어도 두세 명은 모습을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오겠다고 한 분이 있었지만 다 취소하는 연락을 받았다”며 “약 20개 매체에서 ‘이진숙 의원이 광주를 모독하는, 부정하는 어둠의 세력을 국회로 끌어들인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 뉴스를 보고 약속을 취소한 것 같다”고 했다.

 

이 대표는 강연에서 박정희·전두환 옹호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친일파가 아니었으며, 자주국방을 외친 근대화 혁명가였다”고 했고, 관중들은 박수 세례를 이어갔다. 이 대표는 “78년 대한민국 역사에 주류가 있다면 1단계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건국과 호국의 역사다. 2단계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국의 역사이며, 3단계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국과 민주정치 연착륙”이라며 “통행금지, 해외여행 금지는 모두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해제했고, 7년 단임제 약속도 지켰다”고 했다.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조롱까지 나왔다. 이 대표는 임을 위한 행진곡 일부를 재생한 뒤 “가사에 ‘산 자여 따르라’는 부분이 있는데, 어디로 따라가나. 어디로 따라갈지도 모르는데 따르라고 한다”며 “이런 정체불명의 노래는 안 된다”고 했다.

 

김용삼 펜앤마이크 대기자는 5·18민주화운동 강경 진압을 거부한 정웅 당시 31사단장, 공수여단의 발포 허용 요청을 거부하고 강경 진압을 중지할 것을 지시한 전교사령관, 강경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온건 대처를 주문한 안병하 전라남도경찰국장을 “5·18 광주 사건을 악화시킨 3인방”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이 초동대처를 잘 했다면 5·18민주화운동 피해가 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동식 자유주의작가회의 공동의장은 “대한민국에 정통 주인은 이승만 그리고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맥락이다. 비유를 하자면 좌파들은 첩의 자식들”이라며 “호남 5.18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대외적으로는 고립시켜야 된다. 내부적으로는 분열을 시켜야 된다”고 했다.

 

▲이진숙 국민의힘 의원이 8월13일 개최한 ‘5·18민주화운동의 재조명, 국회공개포럼’에서 전두환씨 옹호 발언이 이어지자 청중 간 몸싸움이 불거졌고, 이진숙 의원이 이를 말리고 있다. 사진=윤수현 기자

 

행사 중 전두환씨 옹호 발언이 이어지자 관중석에서 “살인마 전두환”이라는 항의가 나왔고, 이에 보수성향 관중들이 “빨갱이” 등 욕설과 고성을 내지르면서 10분간 장내 소란이 불거졌다. 양측의 몸싸움까지 불거졌고, 국회 방호과 직원들과 경찰도 출동했다.

 

이진숙 의원은 “이런 사태로 행사를 중단하게 하는 게 특정 세력의 목표”라며 항의하는 이들을 ‘특정 세력’으로 규정했는데, 이들은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등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해 부상을 입은 피해자들이었다. 현장에 있던 황인곤 부상자회 서울지부 사무국장도 미디어오늘에 “5·18민주화운동이 불거진 지 46년이 지났는데, 국민의힘은 언제까지 우리를 물고 늘어지려 하는가”라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한번 들어보기 위해 왔는데, 이런 행사를 개최한 것 자체가 비열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진숙 국민의힘 의원과 새역사국민운동이 8월13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5·18민주화운동의 재조명, 국회공개포럼’을 개최한 가운데, 민주당 전남광주지역구 의원들이 행사장 앞에서 “5·18 왜곡폄훼 이진숙은 사퇴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행사 중단을 요구했다. 사진=윤수현 기자

 

전남광주에 지역구를 둔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행사장을 항의방문했다. 이들은 “5·18 역사 날조 방조 국민의힘 규탄”, “5·18 왜곡·폄훼 이진숙은 사퇴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이 의원 제명을 요구했다. 박균택 의원은 “우리는 민주주의 자산인 5·18민주화운동을 지키고, 내란범들을 옹호하며 반민주적 행태를 보인 이진숙 의원의 제명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불법적이고 반민주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도서관을 사용할 수 없는 행사임에도 사용하도록 방치한 국회도서관장의 해임을 촉구한다”고 했다.                     < 윤수한 기자 >

 

광주를 조롱하는 이진숙의 '5·18 소품극'

홍순구 만평작가의 '동그라미 생각'

 

국회는 대한민국의 헌법 가치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공적 공간이다. 극우적 역사 왜곡에 배양토가 되거나, 정치적 야심을 채우기 위한 혐오와 선동의 장터로 변질돼서는 안 된다.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헌정사가 감당해야 했던 가장 큰 고통이자, 피로 지켜낸 민주주의의 뼈대다. 여야를 막론하고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 그 역사적 정당성과 민주적 가치를 헌법으로 공인하려는 노력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비록 전반기 국회 문턱을 넘지는 못했지만, 5·18이 일궈낸 민주주의의 가치는 결코 정치적 합의에 따라 흔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와중에 최근 이진숙 의원의 행보는 5·18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 상식과 공동체의 윤리마저 가차 없이 내팽개치고 있다. 그는 이전 광주를 찾아 사과를 요구하는 시민들 앞에서 고개 숙이기는커녕 갈등을 키우더니, 급기야 이번에는 ‘새역사국민운동’이라는 극우 단체를 국회로 불러들여 5·18을 폄훼하는 난장을 주도하고 있다. “광주는 이 나라를 분열시키고 패망의 길로 이끌게 될 어두운 세력의 소굴”이라는 패륜적 망언이 국회 마이크를 타고 울려 퍼지도록 판을 깔아준 것이다.

 

이것을 단순한 무지나 개인의 소신으로 치부하는 일은 너무 비겁하다. 헌법 개정을 통해 역사의 진전과 국민 통합을 이루려던 공동체의 노력이 좌절된 틈을 타, 이 의원이 오히려 그 균열을 정치적으로 파고들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5·18 역사왜곡처벌법이라는 법적 경고가 엄존함에도, 국회의원이라는 지위를 방패 삼아 극우 세력의 입을 빌려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신이 속한 진영의 강성 지지층을 결집하고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라면, 역사적 정의와 국민적 통합쯤은 얼마든지 제물로 바쳐도 된다는 식의 정치라면 그것은 소신이 아니라 퇴행이다. 5·18을 둘러싼 역사의 진실을 다시 갈등의 도구로 끌어내는 순간, 정치가 무너뜨리는 것은 과거의 합의만이 아니다. 민주공화국이 어렵게 쌓아온 공동체의 신뢰까지 함께 무너진다.

 

더 큰 문제는 이 의원의 무리수가 단지 한 정치인의 일탈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장동혁 국민의힘 당대표가 당내 극우 세력의 맹종을 단호히 끊어내지 못한 채, 오히려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정치적 힘에 기대는 나약한 행태를 보이는 것이 이런 일탈을 키우는 토양이 되고 있다. 공공의 이익과 헌법적 가치를 수호해야 할 제1야당 지도부가 극우 세력의 확산을 외면하고 방조하는 사이, 당은 어느새 역사의 퇴행을 품어주는 피난처로 전락하고 있다.

 

국회는 대한민국의 헌법 가치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공적 공간이다. 극우적 역사 왜곡에 배양토가 되거나, 정치적 야심을 채우기 위한 혐오와 선동의 장터로 변질돼서는 안 된다. 역사의 진실에 눈을 감고 헌정 질서를 조롱하는 이들이 공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지도부가 이를 묵인한 채 극우의 그늘에 기대는 일을 방치한다면 우리 민주주의는 걷잡을 수 없는 퇴행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진숙 의원의 무모한 정치적 각개전투도, 이를 방조하는 국민의힘 지도부의 비겁한 침묵도 이제는 멈춰야 한다. 5·18을 다시 정치적 갈등의 한복판으로 끌어내려는 행위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중립이 아니다. 아쉬울 때만 국립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헌법 전문 수록에 찬동하는 척만 하며, 5·18을 더 이상 정략적 소품으로 악용해서는 안 된다.     < 홍순구 시민기자 > 

 

민주 “이진숙 제명 촉구 결의안 낼 것…국회를 5·18 폄훼의 장으로 전락시켜”

 

국힘당에도 제명 촉구

 

한병도 더불어민주당 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와 참석 의원들이 13일 국회 로텐다홀 계단에서 열린 ‘민생입법 방해, 5·18 역사 왜곡 국민의힘 규탄대회’에서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
 

더불어민주당은 이진숙 국민의힘 의원이 13일 국회도서관에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자유민주 관점에서 보는 학술포럼’을 강행한 데 대해 국회의원 제명 촉구 결의안을 내겠다고 밝혔다.

 

한병도 민주당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 본청 중앙홀에서 연 ‘민생입법 방해, 5·18 역사왜곡 국민의힘 규탄대회’에서 “국회를 5·18 민주화 운동 폄훼의 장으로 전락시키려는 천박하고 저열한 시도를 결코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며 “진보, 보수를 떠나 일말의 인간성이라도 있다면 5·18을 폄훼하고 장난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이 의원에게 행사를 취소하고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라”고 요구했지만, 이 의원은 행사를 예정대로 진행했다. 한 원내대표는 “이진숙 의원은 대한민국 국회의원 자격이 없다. 민주당은 즉각 국회의원 제명 촉구 결의안을 제출할 것”이라고 했다.

 

광주에 지역구를 둔 박균택 의원은 국민의힘을 향해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겠다던 과거 약속이 진심이라면, 윤석열 내란 세력과 절연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국민의힘 지도부가 이진숙 의원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의원을 당장 당에서 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이 의원과 함께 해당 행사를 주최한 새역사국민운동은 뉴라이트 인사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대표로 있는 곳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국가 폭력이 기획한 학살이라 정의함은 온당하지 않다”거나 “광주는 이 나라를 분열시키고 다시 한번 패망의 길로 이끌게 될 어두운 세력의 소굴”이라 주장하는 단체다.                          < 고경주 기자 >

 

이진숙, '새역사국민운동'과 반역사적 학술 포럼 

 

"광주가 나라 분열시킨다"
"광주, 나라를 패망으로 이끌 세력의 소굴" 
"5·18은 사태…이승만·박정희 독재 마땅"
민주당 "처참한 역사인식, 저급한 선동"

 

진보당 "참담하다…국회 포럼 용납 안돼"
전종덕 "5·18 정신 헌법 전문에 새겨야"
이진숙, 5·18 비하 글 '좋아요' 누르기도
배재고 탱크데이 사태 땐 응원 화환 보내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가 2024년 7월 25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4.7.25 연합

 

5·18 광주민주화운동 폄훼 등 역사 인식으로 논란을 빚어온 국민의힘 이진숙 의원이 국회에서 '5·18운동을 자유민주주의 관점에서 재조명하자'는 공개포럼을 연다. 해당 포럼은 "광주의 젊은이들은 어릴 적부터 반국가의 상징에 둘러싸인 채 반국가의 정치와 역사를 교육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단체와 함께 주최한다.

 

이 의원은 13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새역사국민운동'과 공동으로 '자유민주 관점 5·18 학술 포럼'을 주최한다고 12일 밝혔다. 새역사국민운동은 "광주는 이 나라를 분열시키고 다시 한번 패망의 길로 이끌게 될 어두운 세력의 소굴"이라고 규정하는 단체로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은 정당하다" "자유 대만의 수호를 위해 (한국이) 국제전쟁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해오고 있다.

 

이 의원이 해당 포럼을 주최한다는 소식에 더불어민주당 이주희 원내대변인은 시민언론 민들레와 통화에서 "(이진숙 의원이) 국회 들어오자마자 국회 한복판에서 역사 왜곡을 저지르고 있다"면서 "역사에 대한 만행이고, 국회의원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 박해철 대변인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의원을 향해 "국회를 극우 역사관의 무대로 전락시키고 있다"며 "역사 왜곡 세력에게 국회의 문을 열어주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 대변인은 "해당 단체는 5·18 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부르고, 광주가 '반문명·반근대 민중·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서 "이미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조사와 사실관계 확인을 통해 증명된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국가폭력의 책임을 부정하려는 주장이 '학술'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이는 역사왜곡일 뿐"이라고 했다.

 

박 대변인은 "이 의원의 5·18 관련 논란은 처음도 아니"라면서 "과거 5·18을 비하하는 글에 '좋아요'를 눌러 문제가 됐고,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는 '5·18단체는 이권단체'라는 제목의 영상도 게시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의원은 5·18을 둘러싼 논란이 일 때마다 부적절한 언행으로 비판받아 왔다"면서 "이번 포럼 개최 역시 이러한 처참한 역사 인식과 저급한 왜곡 선동의 행보를 이어가는 행태"라고 질타했다.

 

이진숙 국민의힘 의원실 주최 토론회 포스터. 2026.08.12. 국회 홈페이지

 

진보당도 "5·18 광주항쟁 부정하는 반역사적 토론회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노혜령 대변인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충격적이다 못해 끔찍하기까지 하다"며 "반역사적·반사회적 인식을 가진 단체가 5·18 광주항쟁의 정신을 훼손하는 토론회를 개최하고, 그 대표가 토론에 참여하는 것에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 대변인은 "토론회 참여자의 면면도 한심하기 그지없다"면서 "조선일보 기자 출신의 김용삼 씨는 새역사국민운동 대표인 이영훈 씨와 함께 '반일종족주의'를 발간하고,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해온 인사"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는 5월 광주에 많은 빚을 졌다"며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의 민주주의는 군사독재에 맞서 피로 항거한 시민들의 희생 위에 세워져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숭고한 민중의 투쟁을 폄훼하려는 그 어떠한 시도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며 "이진숙 의원은 즉각 토론회 개최를 중단하라"고 외쳤다.

 

국민의힘을 향해서도 "이번 토론회를 이진숙 의원 개인의 행사로 치부하지 말라"면서 "토론회가 중단되도록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라"고 촉구했다.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이 31일 오전 정부과천청사 방통위 청사로 출근하고 있다. 2024.7.31 연합

 

진보당 전종덕 의원도 성명을 내고 "5·18 민중항쟁을 모독하는 반역사적 망동 즉각 중단하라"고 말했다.

전 의원은 "민주주의의 숭고한 전당인 국회가 또다시 극우세력의 역사 왜곡과 혐오 선동장으로 난도질당할 위기에 처했다"면서 "분노와 참담함을 넘어 대한민국 헌정사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민주주의의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반역사적 망동"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이진숙 의원이 국회 안으로 불러들인 '새역사국민운동'은,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는 궤변을 서슴지 않는 세력"이라면서 "국가 폭력에 의한 참혹한 학살을 한낱 '우연의 겹침'으로 치부하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의 폭정을 미화·찬양하는 데 앞장서 왔다"고 비판했다.

 

전 의원은 "이진숙 의원은 5·18의 역사적 의미를 들먹이며 뒤로는 극우 망언의 판을 깔아주는 비열한 물타기를 즉각 중단하라"며 "반역사적 학술 포럼을 즉각 취소하고, 5·18 영령들과 광주시민, 그리고 국민 앞에 사죄하라"고 질타했다.

 

이어 "5·18 민중항쟁이 일어난 지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5·18을 모독하고 왜곡하는 반역사적 망동이 끊이지 않고 있다"면서 "5·18은 더 이상 극우세력의 역사왜곡과 정치적 폄훼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 의원은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온전히 새겨 역사왜곡 세력의 망동을 원천 차단하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역사 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면서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으로 광주의 진실과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굳건히 지키겠다"고 했다.

 

이진숙의 반복된 극우 역사관

 

이 의원의 역사 인식은 여러 차례 문제가 됐다. 윤석열 정권에서 방송통신위원장을 지낸 이 의원은 과거 5·18을 '폭도들의 선동'이라고 주장한 글에 '좋아요'를 눌러 공감을 표시해 비판을 받은 바 있다. 해당 글은 2023년 6월 2일 이 의원의 SNS에 달린 댓글로 "무고한 시민들조차 폭도들의 선동선전에 의하여 사망자가 속출하게 된 비극의 날" "홍어족(광주 시민을 혐오하는 표현)들에게 유리한 해석으로 광주사태를 악용하므로 애꿎은 전두환 대통령만 희생양으로 발목을 잡아"라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진숙 의원이 과거 자신의 페이스북에 달린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혐오하는 표현이 적힌 댓글에 좋아요를 눌렀다. 2026.08.12. 이진숙 페이스북 갈무리

 

이 의원은 이 문제로 2024년 7월 방통위원장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지적을 받으면서도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좋아요 연좌제' '지인 연좌제'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소셜미디어에서 '좋아요' 표시를 하는 것에 조금 더, 손가락 운동에 조금 더 신경을 쓰겠다"고 되레 비꼬았다. 이에 민주당 황정아 의원이 "손가락 운동에 신경을 쓰겠다는 (말은) 명백한 조롱"이라며 "사과하라"고 요구했으나, 이 의원은 사과를 거부했다.

 

이후 MBC 선배 기자인 민주당 정동영 의원(현 통일부 장관)이 "5·18 희생자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라"며 "5·18 희생의 무게가 손가락 운동만큼의 무게냐"고 따져묻자, 그제야 이 의원은 "그 용어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했다.

 

당시 인사청문회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 인식도 문제가 됐다. 최민희 과방위원장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 후보자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냐"고 묻자, 이 의원은 "논쟁적인 사안이기 때문에 답변하지 않겠다"며 입을 닫아 논란이 됐다.

 

민주당 김우영 의원은 지난해 8월 20일 국회 과방위에서 인사청문회 당시 이 의원의 위안부 관련 답변 태도에 대해 "종군기자 출신이 종군위안부 강제성에 대해 답변할 수 없다는 답변 자체가 본인의 정체성과 관련해 본인 경험과 삶을 부정하는 것 아니냐"며 맹비난한 바 있다.

 

이 의원의 역사 인식 문제는 국회의원 당선 뒤에도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달 5일 이 의원은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 내용을 담은 혐오 발언을 응원가로 불러 문제를 일으킨 배재고등학교에 응원 화환을 보내기도 했다. 이 의원이 공개한 응원 화한 리본에는 "스타벅스가 5·18과 무슨 관계가 있냐" "배제고 학생들과 함께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에 대해 대구참여연대는 지난달 6일 논평을 내고 "배재고 학교장과 총동창회가 사과문을 발표하고 5·18 묘역 참배를 통해 성숙하게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 마당에 국회의원이라는 공인이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전도된 가치관, 저급한 정치를 하고 있다"며 이 의원을 강력 규탄했다.

 

이진숙 의원이 지난 7월 5일 서울 배재고에 화환을 보냈다며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사진이다. 2026.08.12. 이진숙 페이스북 갈무리

 

반복된 역사 인식 논란으로 이 의원은 광주에서 강연을 하려다가 취소된 일도 있었다. 지난 2월 8일 이 의원은 5·18 사적지인 광주 전일빌딩에서 강연을 계획했지만, 광주시는 정치적 목적의 시설 사용을 금지하는 조례에 따라 대관을 취소했다. 당시 광주전남 촛불행동은 "5·18 사적지에서 5·18을 모욕하는 극우인사의 강연은 안될 말"이라고 항의했다.

 

전일빌딩은 5·18 당시 전남도청 정면에 위치했던 건물로, 계엄군의 헬기 사격 탄흔이 남아있는 곳이다. 무려 245발의 흔적이 발견돼 건물 이름 자체가 '전일빌딩 245'로 바뀌었다.

                                                                                                             < 김시몬 기자 >

 

 

 

 

 

백범 김구의 '혈의', 한 시대의 비극을 기록하다

● COREA 2026. 8. 14. 02:0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피 묻은 유품이 품은 해방정국의 비극
분단된 시대의 야만과 미완의 해방 증언

 

1. 총성이 멎은 뒤에 남은 것

 

역사는 문서로만 남지 않습니다. 때로는 한 벌의 옷이, 한 장의 혈서가, 한 점의 핏자국이 시대를 증언합니다. 기록에는 해석이 스며들 여지가 있지만, 피는 변명이 끼어들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독립운동사에는 그렇게 ‘정직한 유물’들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혈서, 윤봉길 의사의 피 묻은 유품, 그리고 백범 김구의 혈의(血衣)가 그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혈서는 단지동맹 때 손가락을 끊어 쓴 글과 혈인으로, 동지들에 의해 보존되어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피 묻은 옷과 유품은 홍구공원 의거 뒤 일본 측에 압수되거나 수습된 것들 가운데 일부가 광복 후 돌아와 보존되고 있습니다. 반면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입었던 옷이나 수의는 현재 전해지는 실물이 없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재판기록과 형무소 기록, 유족과 동료들의 증언을 통해 남아 있습니다.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을 맞고 서거한 백범의 모습. 얼굴의 상처 부위에는 응급처치의 흔적이 남아 있고, 백범은 흰옷을 입힌 채 침상에 안치되어 있다. 평생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살아온 백범은 일제의 감옥과 추격을 견뎌 살아 돌아왔으나, 해방된 조국에서 총탄에 쓰러졌다.

 

백범 김구의 혈의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2층 집무실에서 안두희의 흉탄을 맞을 때 입고 있던 옷입니다. 일요일 아침 새로 갈아입은 정갈한 여름옷이었습니다. 백범은 새로 갈아입은 지 불과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깨끗한 백의 차림으로 경교장 안에서 사람을 만나고 일을 보다가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흰 섬유 위에 번진 붉은 피가 더욱 선명하게 남은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안두희가 저격하는 순간 백범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총탄 세 발이 그의 몸을 관통한 뒤 책상 뒤편 창유리까지 뚫고 나갔습니다. 총알이 지나간 유리에는 구멍이 생겼고, 창틀과 그 주변에도 피가 튀었습니다. 당시의 유리창은 그날의 사격 방향과 현장의 참상을 보여주는 물적 증거로 남았습니다.

 

총격을 받고 쓰러진 백범은 침상으로 옮겨졌습니다. 측근들과 의료진은 심폐소생과 지혈을 시도했습니다. 상처 부위를 확인하고 청진기를 대기 위해 조끼적삼과 저고리, 조끼의 왼쪽 어깨와 가슴 부위를 급히 가위로 절개했습니다. 오늘날 혈의에 남아 있는 절개 흔적은 쓰러진 백범을 살리려 했던 사람들의 다급한 손길이 남은 표시입니다.

 

측근들은 경교장에 있던 여름용 모시 이불로 피를 닦고 백범의 몸을 덮었습니다. 시신을 눕힌 침상의 시트와 머리를 받친 베개, 몸을 덮었던 모시 이불도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유족은 그것들을 세탁하지 않고 그대로 수습했습니다. 백범이 마지막까지 사용하던 침구는 한 사람의 임종을 받아낸 물건이자, 경교장의 비극을 간직한 현장 유물이 되었습니다.

 

백범이 입고 있던 한복 조끼에는 은으로 만든 단추 세 개가 달려 있었습니다. 총격 직후 백범을 옮기고 응급처치를 하는 과정에서 단추가 실에서 떨어져 피로 젖은 집무실 바닥에 굴렀습니다. 유족들은 그 단추들을 찾아 따로 수습했습니다. 훗날 단추를 조끼에 다시 달지 않고 별도의 유품으로 보관한 것은 그 떨어진 상태 자체가 총격과 수습의 순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백범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날 경교장에 있던 사물들은 총성이 멎은 뒤에도 말없는 증언을 이어갑니다.

 

2. 백범의 혈의는 어떻게 보존되었나

 

백범의 혈의는 모두 8종 10점입니다. 조끼적삼 한 점, 저고리 한 점, 조끼 한 점, 개량속고의 한 점, 바지 한 점, 대님 두 점(양쪽), 양말 두 점(양쪽), 개량토시 한 점입니다.

 

상의는 안쪽부터 조끼적삼과 저고리, 조끼를 입었습니다. 조끼적삼은 오늘날의 면 내의 상의와 비슷한 얇은 속옷입니다. 저고리는 한여름에 입는 얇은 항라 계열의 옷감으로 지어졌고, 그 위에 조끼를 덧입었습니다. 하의는 오늘날의 사각팬티 또는 짧은 속바지와 비슷한 개량속고의 위에 흰 바지를 입고, 바짓부리를 대님으로 묶었습니다. 갈색 양말 한 켤레도 함께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 개량토시 한 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시는 붓글씨를 쓰거나 문서를 다룰 때 소매가 흘러내리거나 바닥에 끌리는 것을 막기 위해 팔에 끼던 봉지 모양의 생활용품입니다. 백범은 늙어서도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편지를 쓰고, 휘호를 쓰고, 성명서를 작성하고, 자주독립과 통일을 염원하는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미군정 당국에 출두할 때도 토시를 착용했습니다. 혈의에 남은 토시는 백범의 일상과 공적 활동을 함께한 생활사 자료입니다.

 

그러나 혈의를 보존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백범 서거 뒤 경교장은 유족이 계속 머물며 지킬 수 있는 집이 아니었습니다. 경교장은 백범의 소유가 아니었고, 유족과 측근들은 그곳을 비워야 했습니다. 백범이 사라진 뒤 경교장을 감시하는 이승만 정권과 군·특무기관의 경계는 냉엄했습니다. 언제 군경이 들이닥쳐 유품과 문서를 압수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백범의 차남 김신과 기요비서(기밀비서) 김우전은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교장에 쌓여 있던 민감한 문서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경교장 집무실과 비서실에는 국내외 연락망, 편지와 명부, 방문객들의 이름이 적힌 방명록, 성금과 관계된 자료 등 정치적으로 미묘한 기록이 많았습니다. 그것들이 정권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백범과 교류한 독립운동가와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에게 화가 미칠 수 있었습니다.

 

김우전과 김신은 중요한 문서와 편지, 명부와 방명록을 골라 경교장 지하 아궁이에서 불태웠습니다. 백범과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역사의 일부를 자신들의 손으로 태워야 했던 것입니다. 기록을 경시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긴박한 보안 조치였습니다.

백범이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을 맞을 당시 입고 있던 피 묻은 옷. 흰 저고리와 바지 곳곳에 검붉게 굳은 혈흔이 선명하게 남아 있고, 상의에는 총격과 응급처치 과정에서 생긴 흔적도 보인다. 백범의 혈의는 조끼적삼·저고리·조끼·개량속고의·바지·대님·양말·개량토시 등 8종 10점으로 200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혈의 일괄’로 국가등록문화재가 되었다.

 

그러나 백범이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피 묻은 옷은 한 점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김신과 비서들은 백범의 피가 자주독립과 남북통일을 향한 열망, 그리고 해방 정국의 비극을 증언할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유족은 혈의를 세탁하지 않았고, 핏자국과 탄흔, 의료진이 잘라낸 흔적을 모두 수습해 오동나무 함에 넣었습니다. 아들 김신은 정권의 감시와 가택수색을 염려해 유품함을 벽장 깊숙한 곳이나 일반 가구 뒤에 감추고 살았습니다. 위험이 커지면 믿을 만한 친지나 절의 지인에게 잠시 맡겼고, 이사할 때에는 다른 물건보다 혈의함을 먼저 챙겼습니다.

 

훗날 김신은 회고록에서 아버지의 혈의가 든 상자를 빼앗기거나 훼손당할까 평생 가슴을 졸이며 살았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는 공군참모총장 등 국가의 고위직에 오른 뒤에도 아버지의 유품만큼은 안전하다고 마음 놓지 못했습니다. 한 나라의 장군이 된 아들이 아버지의 마지막 옷을 정권의 눈에서 숨겨야 했다는 사실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또 다른 비극을 보여줍니다.

 

유족은 그렇게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혈의를 집안 깊은 곳에 비장했습니다. 혈의가 담긴 함을 약 50년 만에 다시 열었을 때는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짙은 피비린내가 배어 나왔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유족과 관계자들은 피가 굳은 옷과 냄새 앞에서 끝내 통곡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은 냄새는 그날의 경교장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듯 사람들을 1949년 6월 26일로 되돌려놓았습니다.

 

많은 서류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불길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혈의는 오동나무 함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방명록은 경교장을 드나든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혈의는 한 시대의 비극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3. 혈의는 어떻게 문화재가 되었나

 

백범의 혈의는 처음부터 국가가 관리한 문화재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이 간직한 아버지의 마지막 옷이었고, 정권의 감시 속에서 숨겨야 했던 위험한 유품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가족의 손에서 비밀스럽게 보존되다가 전문기관의 보존처리를 거쳐, 마침내 국민 전체가 지켜야 할 역사유산이 되었습니다.

 

혈액이 묻은 옷감은 시간이 지나면 혈흔이 굳고 섬유가 약해지거나 딱딱하게 경화합니다. 오동나무 함 속에서 수십 년을 보낸 백범의 혈의도 장기 보존을 위한 전문적인 처리가 필요했습니다.

 

보존처리를 앞두고 유족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옷에 밴 피와 오염을 씻어내고 깨끗한 한복의 모습으로 복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핏자국을 그대로 남겨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일반적인 세탁과 복원의 관점에서 보면 피는 제거해야 할 오염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범의 혈의에서 피는 유물의 본질을 이루는 역사적 증거였습니다.

 

유족과 보존 전문가들은 혈흔을 지우지 않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날의 피와 탄흔, 응급처치 과정에서 생긴 절개 흔적 자체가 없애서는 안 될 역사 기록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보존의 목적은 옷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피와 훼손의 흔적을 그대로 지닌 채 더 이상 삭지 않도록 지키는 데 있었습니다.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혈의의 상태를 조사하고 과학적인 보존처리를 시행했습니다. 옷감에 생긴 곰팡이와 추가 손상의 원인이 되는 물질을 제거하고 섬유를 안정시키되, 백범의 피와 탄환이 남긴 흔적은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혈흔을 검사해 백범의 혈액형이 AB형이라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200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이자 백범 서거 60주년이었습니다. 문화재청은 백범 관련 유품의 역사적·문화재적 가치를 조사해 「2009년도 등록문화재 등록조사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 결과 백범이 암살당할 당시 입고 있던 의복 8종 10점은 「백범 김구 혈의 일괄」이라는 명칭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439호에 등록되었습니다. 등록일은 백범 서거 60주기인 2009년 6월 26일이었습니다. 현재는 지정번호를 앞세우기보다 국가등록문화유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문화재청이 혈의를 높이 평가한 것은 조끼적삼과 저고리에 남은 탄흔, 의복 전체를 물들인 혈흔, 의료진이 가위로 잘라낸 절개 흔적이 백범 암살 당시의 상황을 직접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토시와 속옷, 바지, 대님, 양말까지 당시의 착장이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생활사적 가치가 컸습니다.

 

혈의는 한때 김신의 소유로 백범김구기념관에 소장되었고, 이후에는 재단법인 김구재단이 소유와 관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경교장에는 현장을 이해하도록 제작한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원본은 온도와 습도, 빛을 통제할 수 있는 별도의 보존 환경에서 관리되고 있습니다. 1949년에는 아들이 목숨을 걸고 숨겨야 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60년이 흐른 뒤에는 대한민국이 함께 보존해야 할 역사유산이 되었습니다. 혈의가 문화재가 된 것은 옷 자체의 가치가 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내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죽음과 그 시대의 비극을 국가의 공적 기억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재가 된 것은 피 묻은 한복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옷에 남은 탄흔과 핏자국, 아들이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감추며 살아온 세월, 그리고 뒤늦게 그 가치를 깨달은 국민의 기억이 함께 문화유산이 된 것입니다.

 

4. 혈의와 함께 남은 마지막 현장

 

혈의는 백범의 죽음을 증언하는 가장 직접적인 유물이지만, 그날의 경교장을 기억하는 유물은 혈의 하나만이 아닙니다. 백범의 손때가 묻은 벼루와 먹도 남았습니다. 서거 직전까지 붓글씨를 쓰는 데 사용했던 벼루에는 검은 먹물과 백범의 피가 섞였습니다. 유족은 먹물을 씻어내거나 새로 갈지 않고 그 상태로 보존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피와 먹이 한데 섞인 채 벼루 안에서 굳었습니다. 붓글씨를 쓰던 일상과 총격으로 끊긴 마지막 순간이 한 벼루 안에 함께 남은 것입니다.

 

백범 피격 직후 촬영된 사진에는 창유리에 두 개의 총탄 구멍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 뒤 경교장은 중화민국 대사관저, 월남대사관 등을 거쳐 1967년부터 병원시설로 사용되면서 내부가 크게 개조됐다. 2005년 강북삼성병원이 백범 집무실을 복원하면서 당시 사진을 바탕으로 두께 5mm의 투명 아크릴판에 두 개의 총탄 구멍을 재현해 유리창에 덧붙이는 방법으로 총탄 구멍을 재현했다.

 

피 묻은 모시 이불과 베개, 침상 시트도 수습되었습니다. 백범의 조끼에서 떨어진 은단추 세 점도 별도로 보관되었습니다. 백범의 몸을 관통한 총탄이 뚫고 나간 창유리 역시 현장을 증언합니다. 유리에 난 두 개의 탄흔은 안두희가 서 있던 위치와 총탄이 날아간 방향, 백범이 쓰러진 자리를 물리적으로 보여줍니다. 말과 기록이 엇갈리더라도 총탄이 남긴 구멍은 그날의 방향을 바꾸어 말하지 않습니다.

 

이 유물들은 각각 따로 존재하지만 하나의 장면을 이룹니다. 피 묻은 옷, 떨어진 은단추, 피와 먹이 섞인 벼루, 붉게 물든 침구, 총탄이 뚫은 창유리가 모여 백범의 마지막 시간을 복원합니다. 어느 하나도 스스로 말하지 않지만, 서로를 마주 놓으면 경교장 2층에서 벌어진 일이 선명하게 되살아납니다.

 

흉탄은 백범의 육신을 쓰러뜨렸지만, 그가 남긴 뜻까지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같은 겨레가 분단된 나라가 온전한 나라인가, 민족의 자주보다 강대국의 이해가 우선 되어야 하는가, 정치적 반대자를 폭력으로 제거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백범의 죽음 뒤에 더 선명해졌습니다.

 

총탄은 백범의 행동을 중단시켰지만, 그의 죽음은 자주와 통일이라는 문제를 더 크게 남겼습니다. 백범의 노선이 현실정치에서 반드시 성공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거됨으로써 열려 있던 하나의 정치적 가능성이 닫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5. 한 벌의 옷이 증언하는 시대의 비극

 

백범의 혈의는 먼저 정치적 반대자를 대하는 시대의 야만을 증언합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토론하고 설득하며 국민의 판단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총탄은 논쟁을 끝내고 한 사람을 영원히 제거했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잔혹한 범행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정치적 반대자를 포용하고 경쟁하는 민주적 질서가 뿌리내리지 못한 해방 정국의 야만성을 보여줍니다. 백범과 생각이 달랐던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의 남북협상과 통일정부 노선에 반대하는 세력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는 논쟁과 선거, 역사의 평가로 다투어야 할 문제였습니다. 총탄은 그 모든 과정을 한순간에 빼앗았습니다.

 

혈의는 또한 ‘미완의 해방’을 증언합니다. 백범은 일제의 감옥과 추격, 사형의 위협을 견디며 살아 돌아왔습니다. 중국 대륙에서 수십 년을 떠돌면서도 조국에 돌아갈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온 독립운동가는 해방된 조국의 한복판에서 쓰러졌습니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끝났지만, 백범이 꿈꾸었던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남과 북은 갈라졌고, 외세의 이해와 내부의 적대가 민족의 앞날을 가로막았습니다. 백범의 혈의는 해방이 곧 독립의 완성은 아님을 보여주는 아픈 증거입니다. 식민지에서는 살아남았으나 해방된 조국에서는 살아남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피가 그 역설을 말합니다.

 

백의를 적신 피는 한 시대의 가능성에 대한 종언이기도 했습니다. 백범이 살아 있었다면 분단을 막거나 통일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정치 노선이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남과 북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은 채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주장하던 거대한 정치적 존재가 사라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남과 북의 대립 사이에서 다른 길을 모색할 가능성, 분단이 고착되기 전에 민족 내부의 대화와 타협을 시도할 가능성,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해방 후 국가 건설에 더 크게 참여할 가능성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한 사람을 제거하는 일이 한 시대의 가능성까지 사라지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백범의 혈의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였는지를 가장 정직하게 증언하는 유물입니다.                        < 임순만 언론인 >

 

 

'당정대' 조사한다더니 '참고인, 안 나와도 그만'

 

박지원 "피의자 소환하고 역지사지 응해야"
한동훈 "수사 지휘 없애더니 민주당이 지휘"

주진우, 추경호 시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위헌·위법 판단할 수 없어 추에 의총 요청"
우원식 의장 표결 시간 앞당긴 탓 돌리기도
특검, 계엄 정당화 메시지 윤과 신원식 기소
합수부에 협조 지시 해경 김종욱·안성식도

 

무소속 한동훈 의원이 1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민의힘 부산시당이 연 '2차 공공기관 이전, 왜 부산이 답인가' 토론회에 참석해 손뼉 치고 있다. 앞줄은 왼쪽부터 국민의힘 이헌승 의원, 정점식 원내대표, 이성권·김도읍·조경태 의원. 2026.8.11 연합

 

2차종합특검(권창영 특별검사)이 비상계엄 다음날 ‘당정대 회의’와 관련해 12일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해 달라고 요청한 한동훈 무소속 의원이 출석하지 않자 곧바로 재소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종합특검팀은 이날 오후 언론 공지를 통해 “한 의원에게 당정대 회의 관련 참고인 신분으로 금일 오전 10시까지 출석하라는 통지서를 의원실을 통해 전달했으나, 한 의원은 출석 여부에 대한 답변 없이 불출석했다”며 “불출석 사유서도 제출하지 않았다”고 알렸다. 특검팀은 “수사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을 고려해 한 의원에 대한 재소환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종합특검은 12·3 불법 비상계엄이 해제된 이후 열린 ‘당·정부·대통령실(당정대) 회의’에서 12·3 내란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개발됐다고 의심하고 있다. 2024년 12월 4일 새벽 국회 의결을 통해 비상계엄이 해제된 이후 같은 날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에서 당정대 회의가 열렸다. 국민의힘 측에선 당시 한동훈 대표와 추경호 원내대표, 나경원·김기현 의원, 정부 측에선 한덕수 국무총리와 박성재 법무부 장관, 방기선 국무조정실장이 참석했다. 대통령실 측에선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 신원식 국가안보실장, 홍철호 정무수석, 김주현 민정수석이 자리했다. 이후 오후 5시쯤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과 한 의원, 한덕수 전 총리,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만나 후속 대책을 논의했다.

 

종합특검은 그날 오후 7시에 열린 삼청동 안가 회동이 당정대 회의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안가 회동에는 당정대 회의에 참석했던 박성재 장관과 김주현 수석을 비롯해 이상민 장관, 이완규 법제처장, 한정화 법률비서관이 모였다. 박 전 장관, 김 전 수석, 이 전 처장은 국회 국정조사에서 안가 회동이 ‘단순 친목 모임’이었다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합의33부(재판장 이진관)는 지난 6월 박 전 장관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하면서 안가 회동이 윤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계엄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옹호하는 논리를 구축한 회의였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 자리에서 내란의 책임을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게 전가해 윤 전 대통령 수사를 차단하는 방안이 논의돼 윤 전 대통령에게도 보고됐다고 판단했다.

 

한 의원은 소환 통보 사실이 알려진 직후인 지난 6일 페이스북을 통해 "저는 계엄 당일 여당 대표임에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계엄을 저지했다"며 특검의 소환 시도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선거 기간에 아무 이유도 없이 출국금지시켜놓고 몇 달씩 멋대로 연장해 가면서도 한 번도 부르지도 못하더니, 이제 와서 보여주기식 언플(언론플레이)이나 하는 이재명 정권의 정치특검이 하려는 정치수사를 도와줄 생각은 없다"며 조사에 응할 뜻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특히 한 의원은 지난 9일에 다시 글을 올려 특검 측의 언론 인터뷰 내용을 거론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당시 특검 관계자가 언론을 통해 "한 의원이 '출국금지만 걸어놓고 부르지 않는다'고 하길래 이번에 정식으로 소환했다", "참고인이니 와도, 안 와도 그만이다"는 취지로 발언한 점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 의원은 "이재명 정권의 정치특검이 저를 소환한다고 ‘언플’해놓고서 '안 와도 그만이고, 출금해놓고 왜 안 부르냐니 불렀다'고 말했다고 한다"며 "'안 와도 그만'이고 '출금해놓고 왜 안 부르냐니 불렀다'는 것은 '뒷골목 깡패의 언어'지 '수사기관의 언어'가 아니다"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핵심 당사자인 한 의원이 출석하지 않고 특검이 재소환을 포기함에 따라 특검팀은 한 의원을 조사하지 않고 최종 수사 결과 정리 수순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종합특검이 한 의원을 재소환할 계획이 없다고 밝힌 데 대해 한 의원을 '참고인'이 아니라 '피의자'로 소환하라고 압박했다. 박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2차 종합특검팀이 한 의원을 참고인 신분으로 두 번째 소환 통보했지만 한 의원이 거부했다"며 한 의원을 향해 역지사지(易地思之) 심정으로 특검 소환에 응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한 의원은 검사, 법무장관 출신으로 수사할 때 참고인이 불출석하면 어떻게 했냐"며 "특검도 한 의원을 참고인이 아니라 내란 개입 혐의 피의자로 소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에 한 의원은 "박 의원이 정치특검에게 저를 피의자로 부르라고 수사지휘했다"고 맞받아쳤다. 그는 이날 페이스북에 "검사의 수사지휘 없애더니 이젠 민주당이 직접 수사지휘를 한다"며 "정치특검이 민주당 수사 지휘에 따르나 보겠다"고 경고했다. 이어 "박 의원은 계엄을 막은 저 대신 숲에 숨은 이재명 대통령, (밤) 10시에 감기약 먹고 잤다는 김민석 전 총리나 출국금지하고 부르라고 정치특검에게 수사지휘하라"고 비꼬았다.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이 1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2·3 비상계엄 당시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방해한 혐의로 기소된 추경호 전 원내대표 9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2026.8.12 [공동취재] 연합

 

한편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추경호 대구시장의 국회 계엄해제 표결 방해 혐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비상계엄 선포 직후 정보가 부족해 위헌·위법성을 판단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국민의힘 원내대표였던 추 시장이 혼란한 상황에서 정보 공유를 위해 계엄 해제 표결 전 국민의힘 의원총회를 소집한 행위는 정당했다는 취지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4부(재판장 한성진)는 추 시장의 내란 중요임무 종사혐의 공판을 열었다. 이날 재판에는 주 의원과 같은 당 박수민 의원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들은 12·3 내란 당시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가 계엄 해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국민의힘 의원 18명 중 2명이다. 주 의원은 검사 출신으로 윤석열 정부 대통령실에서 법률비서관을 지냈다.

 

주 의원은 자신이 당 지도부에 긴급의총 소집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는 “상식적으로 저뿐만 아니라 다른 의원들도 의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정보가 한정적인 상황이라 의견을 나누고 정보를 공유할 필요도 있었다”고 말했다.

 

‘12·3 계엄 해제를 의결하기 전, 계엄 선포가 위헌·위법이라고 판단했느냐’는 추 시장 측 변호인 질문에 주 의원은 “저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주 의원은 “당시 정보가 한정돼 위법성 여부까지 판단하기는 불가능했다”며 “(민주당 의원들이) 150명을 넘어서 무조건 해제되는 상황이어서 (국민의힘 의원들끼리는) 이후 정국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로 논의가 넘어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 의원의 설명과 달리 국민의힘 의원들이 의원총회를 열자고 논의하던 시점에는 민주당 의원들이 150명 이상 모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주 의원은 의총 장소가 국회에서 당사로 변경된 점, 당사에 모인 국민의힘 의원들이 표결에 참여하지 못한 주된 원인은 국회 출입 봉쇄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주 의원은 “(국회가) 다시 열렸다가 봉쇄됐고, 출입을 통제한 시간과 강도가 시시각각 변했다”며 “의원들은 국회가 막혀있고 혼란스러우니 당사로 갔다”고 말했다.

 

오히려 우원식 당시 국회의장이 표결을 예고했던 시간보다 앞당겨 국민의힘 의원들이 표결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주 의원은 “본회의장에서 민주당 의원조차도 우 전 의장에게 ‘왜 표결을 빨리하지 않느냐’고 항의했다”라며 “저는 이재명 대통령(당시 민주당 대표)의 출입 시간을 맞췄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주 의원은 “(이 대통령의) 출입이 이뤄지고 나서 빠르게 (표결을) 하려다 보니까 고지 시간보다 앞당긴 것”이라며 “정말 긴급했다면 이 대통령 출입과 상관없이 신속히 의결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갑자기 (표결을) 당기다 보니까 (국민의힘 의원들이) 들어오기에 현실적으로 어려웠다”고 했다.

 

12·3 내란 당시 국민의힘 원내대표였던 추 시장은 계엄 선포 직후 의원총회 소집 장소를 ‘국회→당사→국회→당사’로 3차례 바꿔 국민의힘 의원들이 계엄 해제 의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국회의 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은 ‘재석 190명 전원 찬성’으로 통과됐는데, 국민의힘 의원은 108명 중 18명만 참여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페루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페루 리마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윤 대통령 오른쪽은 신원식 국가안보실장. 2024.11.16 연합 자료사진

 

오는 23일로 수사 기한이 종료되는 종합특검은 이날도 기소를 이어갔다. 비상계엄 선포 직후 우방국에 계엄을 정당화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지시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윤 전 대통령과 신원식 전 국가안보실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윤 전 대통령은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로, 신 전 실장을 내란중요임무종사 및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윤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일인 2024년 12월 3일부터 다음날까지 이틀에 걸쳐 미국, 영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주요 우방국에 비상계엄을 정당화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파한 혐의를 받는다. 이에 따라 직권을 남용해 국가안보실, 외교부 등 소속 공무원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도록 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종합특검이 윤 전 대통령을 기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가 받는 재판은 다시 8개로 늘어났다. 윤 전 대통령이 기소된 사건은 이번 사건까지 아홉 건인데 한 건은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내려졌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체포방해 등 혐의 사건이 지난달 9일 대법원에서 징역 7년형이 확정됐다.

 

신 전 실장은 윤 전 대통령, 김태효 전 국가안보실 제1차장과 순차 공모해 비상계엄을 정당화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파하도록 해 내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대외적인 지지를 확보하려 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검팀은 앞서 지난달 29일 김 전 차장을 12·3 비상계엄 선포 후 우방국에 계엄을 정당화하는 메시지를 전달한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이에 따라 특검은 "법원에 해당 재판과 김 전 차장의 재판을 병합해 심리해줄 것을 요청했다"며 "공범 3명에 대해 동일 절차에서 재판이 진행되길 바란다"고 했다.

 

종합특검은 또 김종욱 전 해양경찰청장과 안성식 전 해경 기획조정관은 각각 내란부화수행 및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김 전 청장과 안 전 조정관은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직권을 남용해 합동수사본부 해경 인원을 증원 편성하고 해경청 구금시설을 제공하려고 시도한 혐의를 받는다. 직원 1명을 합동참모본부에 정부 연락관으로 파견해 내란 행위에 부화수행했다는 혐의도 있다.

 

당시 김 전 청장은 연락관 파견을 반대하는 부하 직원의 의견을 묵살하고 "한 명이라도 파견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다만 연락관이 계엄사에 도착하기 전 해경에서 비상계엄이 해제됐다는 통보를 받아 연락관 파견을 해제했고, 연락관도 계엄사 도착 전에 복귀한 것으로 파악됐다.

 

안성식 전 조정관은 윤 전 대통령의 충암고 후배로 2023년부터 방첩사와 교류하며 계엄 합동수사본부(합수부)에 해경이 자동 편제되도록 내부 규정을 변경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인물이다. 그는 비상계엄 선포 이후 소집된 전국 지휘관 화상회의에서 파출소 청사 방호를 위한 총기 휴대 검토와 합수부 파견 인력 증원 등을 주장한 것으로 조사됐다. 회의 이후 안 전 조정관이 '계엄 사범들이 많이 올 것 같으니 유치장을 비우고 정비하라'고 지시했다는 진술도 나왔다.

 

앞서 특검팀은 지난달 3일 두 사람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범죄혐의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 임병선 기자 >

 

 

 

검찰개혁 지지자를 아이히만에 비유하고 모독
보완수사권 폐지는 검찰 개혁의 필연적인 결론
한국 리버럴세력, 단일하지도 철저하지도 않다

 

지배 질서의 일부가 된 자유주의 세력의 문제점
사실과 맥락이 틀린 레닌과 소비에트 구호 비유
어설픈 인용보다 검찰 피해와 고통에 공감부터

 

<한겨레>의 아주 오랜 독자로서 꼭 챙겨보는 필자의 글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글도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세영 논설위원의 글은 시간이 부족하면 잘 챙겨보지는 않았다. 지적 능력과 지식을 과시하는 듯한 문장들, 그리고 불필요하게 길고 이해하기 어려운 글이라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간결하고 명료하며 힘 있는 문장들을 좋아하는 개인적 선호도 작용했다. 그래서 이번 검찰 관련 칼럼 역시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온라인 공간에서 많은 이들이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내용인지 궁금증과 호기심이 생겨 글을 찾아 읽게 되었다. 끝까지 읽고 느낀 것은 실망감과 함께, 너무 나갔다는 씁쓸함이었다. 이번 검찰 개혁 법안이 통과되는 과정 속에서, 그것을 주도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모습이 "아렌트가 피고인 아돌프 아이히만한테서 감지해 낸 감정 상태"라고 단정 지은 문장이 대표적이다.

 

이 문장은 검찰의 무소불위 권력을 해체하기 위해 싸워 온 수많은 시민과 정치인들을,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인종 학살을 기획하고 집행한 나치 핵심 학살자에 비유하며 매도하고 조롱한 셈이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두고 제시한 '악의 평범성'을 검찰 개혁이라는 민주적 권력 통제 시도에 왜곡 적용하여, 시민적 열망을 무비판적 광기나 사유 부재의 상태로 깎아내린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한겨레 이세영 논설위원의 칼럼 화면 갈무리 

 

이런 식으로 검찰 개혁의 과제와 지지자들을 깔아뭉개고 욕보이는 화법은, 검찰 개혁에 원래부터 반대해 온 윤석열과 국민의힘, 그리고 친검 족벌 언론들의 입을 통해서는 오랫동안 식상하도록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진보적 개혁 언론인 <한겨레>의 논설위원이라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훨씬 더 깊이 있고 품격 있는 접근을 기대하는 것이 독자로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이세영 논설위원은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 논의를 가리켜 "최초의 목적 자체를 증발시켜 버리는 증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진단은 그가 과연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사회에서 검찰 개혁이 왜 그토록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제기되었는지, 그 역사적 이유와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한국 검찰 문제의 핵심은 기소권뿐만 아니라 수사권까지 한 손에 쥐고 스스로 수사하고 기소하며 처분까지 내리는 유례없는 '권력의 독점'에 있었다. 이러한 권력의 분리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할 때, 수사권의 변형된 일부인 보완수사권의 폐지는 '목적의 증발을 보여주는 증상'이기는커녕, 너무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논리적 결론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보완수사권은 남겨두자'는 이재명 정부 일부 관료들과 법무부의 타협적 주장에 대해, 많은 검찰 개혁 지지자들이 '검찰 개혁의 목적은 어디로 갔느냐'고 강력히 반발했다. 더욱이 이해할 수도 없고 동의할 수도 없는 것은 이세영 논설위원이 '검찰 수사권 박탈'을 "한국 리버럴의 핵심 슬로건"이라고 규정하는 부분이었다. 이것은 왜곡이 아니면 오판이다.

 

먼저, 한국의 리버럴(자유주의) 세력은 결코 단일하지 않다. 이세영 논설위원이 몸담고 있는 <한겨레>나 <경향신문> 같은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개혁 언론들이 그동안 검찰 개혁에 대해 보여준 심드렁한 태도만 보더라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대개 많은 자유주의적 지식인과 언론들은 검찰 개혁에 무관심하거나, 흔히 '먹고사는 문제'와 무관한 여야 간 진흙탕 정쟁 정도로 깎아내리기 일쑤였다.

 

나아가 그들은 오히려 엘리트 검사들의 시각과 법률가적 논리에 이입하여 그들의 편에서 문제를 접근하고 설명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것은 '자유주의 세력'이 역사 속에서 언제나, 어디서든 억압적 국가기구의 민주적 개혁이나 근본적 구조 개혁의 문제 앞에서 불철저하고 타협적인 한계를 드러내 왔다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자유주의 세력이 자유주의적 개혁 과제에서 오히려 한 발 빼고 타협하는' 이 모순적 현상은, 오늘날 그들이 기존 지배체제와 권력 질서의 일부라는 사실과 관련 있다. 오늘날의 자유주의 세력은 과거 봉건적 질서에 피를 흘리며 싸우던 혁명적 자코뱅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자본주의 체제와 국가기구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는 기득권의 일부이다.  

 

아이히만. 나무위키

 

예컨대 미국 민주당의 리버럴 주류 세력이 트럼프의 집권과 극단적 폭주를 가능하게 만든 비민주적인 승자독식 선거제도나 헌정체제의 구조적 허점을 굳이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다. 비민주적인 그런 제도 자체가 자신들이 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만든 오랜 정치적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더욱 심화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 주도의 강력한 자본 축적 과정과 권위주의적 방식이라도 동원해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국가의 억압기구는 지배 엘리트 모두의 유용한 통치 도구였다. 따라서 '한국 자유주의 세력의 핵심 과제'로서 검찰 수사권 박탈을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왜 정부 수립 후 78년이 지나도록, 더구나 자유주의 세력이 국가권력을 공유하게 된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40년 가까이 검찰 수사권 박탈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미루어져 왔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또한, 자유와 민주주의의 핵심적 걸림돌인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지식인, 언론 대다수가 큰 관심이 없는지 설명할 수 없다.

 

나아가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갖추고 있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일에도, 한국의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표 계산을 더 앞세우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자유주의 세력은 억압적 국가기구의 민주적 개혁과 철저한 민주적 권리를 약속하지만, 막상 권력을 잡으면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쉽게 타협하고 물러섰다는 게 진실에 가깝다. 또 자신들의 정권 안정과 통치를 위해 억압적 국가기구를 활용하기도 했다.

 

현재 이재명 정부가 검사 출신의 인사를 민정수석 자리에 거듭 임명하고,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이재명 정부의 검찰은 다르다'라는 발언으로 거센 반발을 산 이유도 비슷하다. 검찰이라는 칼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음에도, '우리가 잡은 검찰은 다를 것'이라는 착각과 타협이 반복된다. 그렇기에 이세영 논설위원이 이번 칼럼의 첫 부분에서 레닌을 인용한 것은 뜬금없으면서도 지적 허세로 느껴진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슬로건을 중시하던 혁명가 레닌조차도 구체적 상황에 맞게 구호를 수정하거나 폐기할 줄 알았다'고 강조하며 자신의 급진성도 보여주고 싶었던 듯 하지만, 이것은 현재 한국의 상황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1917년 당시 레닌과 볼셰비키가 펼쳤던 구체적 실천과도 맞지 않다. 우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는 레닌과 볼셰비키에게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전략적 방향이었다.   

 

1920년의 레닌. 위키피디아

 

이 구호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전제군주) 정권을 타도한 이후,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한계 안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와 농민의 자치 기구인 소비에트 권력으로 이행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이정표였다. 혁명의 궁극적 과제와 권력의 계급적 성격에 관한 문제를, 정세에 따라 언제든 폐기할 수 있는 구호의 문제로 설명하는 것은 무지가 아니면 왜곡에 가깝다.

 

1917년 7월의 불리한 정세 속에서 이 구호가 잠시 보류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소비에트 내부에서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한 9월에 이 구호는 즉시 되살아났다. 무엇보다 이 구호는 단지 레닌이 발명해 낸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공장과 거리의 투쟁 속에서 볼셰비키 당원들과 노동자 대중이 스스로 만들어 낸 열망의 결정체였기에 지도부의 임의적인 판단으로 철회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레닌과 볼셰비키의 강령과 역사를 조금만 살펴본다면, 그들이 차르 체제의 억압 기구였던 검찰과 사법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철저한 개혁을 항상 핵심적 과제로 제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검찰의 기소 독점권과 관료적 면책권을 해체하고, 모든 수사 과정과 재판을 대중 앞에 투명하게 공개하며, 특권화된 법률 관료들을 언제든 선출하고 파면해야 한다는 요구를 내걸었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차르 전제 정권이 민중을 수탈하고 권력을 유지하던 핵심 수단이 바로 비밀경찰과 검찰, 사법부,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반동 언론이었고, 레닌과 볼셰비키 스스로가 바로 그러한 검찰 권력의 표적 수사와 편파 기소, 독일의 첩자로 몰아가는 여론재판과 마녀사냥에 의해 수많은 동지를 잃었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왼쪽에서 두 번째)와 한동수 변호사(네 번째) 등이 6월 5일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바람직한 검찰개혁을 위한 시민 주도 신형사소송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조국혁신당 박은정 의원 페이스북
 

따라서 이세영 논설위원이 진심으로 '레닌에게서 지혜를 배워라'고 충고할 생각이었다면, 기득권과의 어설픈 타협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철저하게 검찰 권력을 해체해야 하며, 특히 '검찰 수사권의 박탈'이라는 전략적 방향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게 더 타당했다. 물론 레닌과 볼셰비키가 언제나 옳았던 것은 아니며, 그들이 구축한 체제의 한계와 오류에 대해서는 오늘날 비판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대목이 수없이 많다.

 

그렇기에 지금 중요한 것은 레닌이나 아렌트 같은 이름을 과시적으로 끌어와 어설프게 인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78년이라는 세월 동안 검찰 권력에 의해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이 얼마나 참혹한 피해와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직시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목도해 온 보통의 시민들이 왜 그토록 거리와 광장에서 '검찰 개혁'을 외쳐 왔는지 그 절박한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 전지윤 사회운동가·연구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