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 광복절 특별기고] 길원옥의 아리랑

1. 길원옥의 슬픈 노래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예부터 숱하게 들어오던 노래다. 그런데 길원옥을 만나기 전에는 이 노래가 그렇게 슬픈 노래인 줄 몰랐다. 길원옥이 부르는 '한 많은 대동강아' 노랫가락과 가사를 듣고 있노라면 열세 살, 평양 보통강 주변에서 '철없이 노는 것 좋아하던' 길원옥의 어린 시절로 빠져들어 가게 된다.
그러다가도 금방 그 '까불던' 성격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게 되었다며 위안소에서의 폭력을 자신 탓으로 여기며 견디던 십대의 어리디어린 길원옥도 생각난다. 또 어느새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올 줄 알았더니 인천항에 도착한 이후 분단으로 인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십대의 어린 소녀가 타향에서 홀로 살아내야 했던 기구한 인생이 노랫가락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한다. 어찌 그리 굽이굽이 영화 같은 삶이 있을 수 있을까?
길원옥은 말했다. "그야말로 내가 정대협이라는 단체를 알아 가지고 이렇게 나오기 전에는 나는 이런 인생이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그 수많은 굴곡진 역사에 대해 길원옥은 "너무나 험하게 살았어요. 그 괴로운 생각, 가슴 아픈 생각을 일일이 가슴에 품고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질 못했을 거예요"라며 구체적으로 기억하기를, 말하기를 회피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길원옥의 한숨과 애환을 어떻게 내가 감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 글을 쓰면서 그녀의 인생을 되돌아보니, '광복 80년' 동안 길원옥은 광복의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꼈다. 그녀의 전 인생에 비하면 20여 년은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열세 살 집을 떠난 뒤 그때부터 줄곧 홀로 세상과 맞서며 그 세월의 굽이굽이에 서린 상처, 막막함, 절망, 슬픔, 분노, 그것들로 가득 채워진 기억을 안고 살았을 그녀의 애환 옆에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고맙고 위로가 됐다.

2. 길원옥을 처음 만났던 2002년 그때 정대협
내가 길원옥을 처음 만난 것은 2002년이었다. 당시 길원옥은 홀로 인천의 한 영구임대주택에 살고 있었다. 다른 피해자들은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 공개 기자회견 이후부터 1992년에 신고가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 시기에 피해자 대부분을 만났다. 길원옥은 그보다 10년이나 늦게 만난 셈이다.
2002년 그해에 정대협은 1991년 말부터 신고를 한 피해자들 중 수요시위에 참석하고 일본 정부 상대의 소송 원고가 되는 등 적극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아울러 외부 공개를 꺼리며 사회와 단절되어 살고 있던 피해자들도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찾을 수 있도록 1대1 사례에 맞는 세심한 지원 활동을 계획으로 세웠다.
즉, 당당하게 사회에 자신의 모습과 목소리를 드러내 활동가로 살 수 있도록 길을 만드는 것을 시도했다. 당사자가 나서기를 꺼려하는 의사를 중시하면서도, 혹시 그 꺼려함이 한국 사회 때문이라면 우리가 한국 사회를 열심히 변화시켜 나가겠다는 의지도 전해드리고, 함께 활동가가 될 수 있도록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 보자는 것이었다. 특히 조선 시대뿐 아니라 광복 후 한국 사회에서 '넙데기' '쪼깐이' 등으로 불렸던 여성들이 자신의 이름을 찾는다는 것은 여성 인권 운동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2002년 그해 정대협은 피해자로 신고는 했지만 지역사회에서 피해를 숨긴 채 홀로 살고 계신 분들에 대해 지역사회 시민단체 혹은 시민들과 1대1 짝꿍을 맺어드리는 활동을 본격화했다. 내 동네에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곁에서 누군가 피해자를 응원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드리고 싶었다. 작은 동네에서 본인이 피해자임을 드러내도 지역사회가 피해자를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지하고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함으로써 피해자와 지역사회가 함께 치유되는 그런 과정을 만들어가고 싶었다.
이를 위해 우선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구, 선후배, 목회자, 시민단체 분들을 접촉했다. 만남 이후 지역으로 직접 찾아가 피해자들의 삶과 유의할 점 등에 대한 교육을 진행하고, 지역 분들과 함께 피해자들을 방문하여 소개하고 '라포' 형성이 되도록 연결해 드렸다. 그 후 지역 분들이 피해자들을 정대협보다 더 자주 찾아가서 뵙고, 할머니의 생활 불편을 해결하는 활동(청소·도배 등)도 하고, 할머니의 생신을 챙겨드리고, 지역 나들이도 함께 가는 등 지역사회가 결코 피해자들을 '주홍글씨'를 입혀서 보고 있지 않다는 노력을 했다.
정대협에서는 그 활동에 소요되는 경비를 지원하고 지역 활동에 동행하기도 하는 등 한 분 한 분의 사례에 맞는 복지 활동을 벌였다. 그때부터 전남 해남에 피해자를 지원하는 '해남나비' 모임이 만들어져 활동을 시작했고, 통영·거제, 마산·창원·진해(마창진 시민모임), 전북, 충북 청주 등의 지역에서도 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들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대구의 경우에는 정대협활동 이전에 이미 단체가 결성되어 대구·경북 지역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작은 꿈은,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피해자들의 증언을 채록해 '구술 증언집'을 발간하는 것이었다. 1993년 정신대연구소와 정대협이 공동으로 '위안부' 할머니 19명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증언 1집을 냈다. 이후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고, 2001년에는 2000년 '일본군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을 준비하면서 만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모아 5집까지 피해자 63명의 증언을 실어 출간했다.
정대협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피해자들 중 구술이 가능한 분들의 이야기도 계속 증언집으로 담아 기록으로 남기자는 뜻을 세우고 증언팀을 구성했다. 증언팀에는 나를 포함하여 정대협 상근활동가들이 직접 참석하였다. 증언팀은 그동안 출간한 5권의 증언집에 포함 안 된 할머니들 76명의 기초자료를 분석하고, 구술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는 피해자 리스트를 정리하여 접촉을 시도하였다. 우선 정대협 활동가들이 직접 피해자들을 찾아뵙고 증언집 발간 활동을 말씀드렸다. 증언팀이 찾아와도 된다는 동의를 하신 분들을 찾아뵙기 시작했다.
길원옥도 그 피해자 중 1인이었다. 길원옥은 다른 피해자들보다 한참 늦은 1998년에서야 피해 신고를 하게 되었고, 여성가족부로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생활안정지원법>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뿐, 길원옥은 정대협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길원옥 할머니를 찾아뵙고 정대협의 계획을 설명드리기 위해 내가 직접 찾아 나섰다.
그날, 할머니는 "나는 죄 많은 여자"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혹시 할머니가 훗날 갖게 되신 기독교 신앙 때문인가?'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 '할머니는 죄 많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 주기를 바란다는 그런 강한 느낌이 들었다.
"할머니가 죄 많은 여자가 아니라, 할머니를 그렇게 만든 일본 정부와 군대,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한국 정부와 한국 사회가 죄가 많은 거죠. 저도 할머니께 죄인입니다." 나에게서 그 말이 나오자마자 마치 소녀같이 수줍은 표정을 지으시며 웃으시던 할머니를 잊을 수가 없다. '그동안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구나.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거구나.'
할머니는 증언집 발간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주셨고, 그에 따라 증언팀 내에서 길원옥 담당팀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하여 길원옥 할머니에 대해 그때부터 정대협 생존자 복지 활동으로서의 방문, 증언팀의 구술을 청취하기 위한 방문이 각각 이루어졌다.

3. 일본군 '위안부'가 된 길원옥
"나는 열세 살에 평양, 집을 떠나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길원옥입니다. 처음에는 만주로 끌려갔다가 나중에는 석가장인가 하는 데로 끌려갔어요.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간다고 해서 배를 탔는데, 평양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인천항으로 오는 것이었어요. 그때가 내 나이 열여덟이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러고 살고 있습니다."
길원옥은 1928년 음력으로 10월 23일에 태어났다. 양력으로 날짜를 계산해 보면 1928년 12월 4일이다. 열세 살, 1940년에 만주로 끌려갈 당시 계절이나 시기를 정확하게 몇 월쯤인지 기억 못하고 있지만, 만으로 11~12세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고물상을 하던 아버지가 도둑맞은 물건을 샀는데, 그게 그만 들통이 나서…." "누군가 나에게 가막소 벌금이 이십 원인가, 십 원인가 하는 그런 소리를 들었어요."
아직 철부지였던, 까불쟁이 길원옥은 공장에서 기술도 가르쳐주고 돈도 벌게 해준다는 말에 가족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을 떠나 기구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되었다.
"저는 아직 생리도 없었던 아이였습니다. 군인들에게 당할 때 피가 나왔습니다만, 저는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먼저 와 있었던 언니들이 '병이 아니야' 하고 가르쳐 주었지만, 그런 것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모를 만큼 어린아이였습니다." "생리가 나올 때는 그래도 좀 봐주겠지 했어요. 피가 나오니까 봐주겠지… 뭐라 할 말이 없어."
겪지 않은 사람들이 그 치욕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피해자 대부분이 그랬지만 특히 나이가 어린 길원옥에게 위안소에서의 성폭력은 감당하기 무지막지한 일이었다.
"반항을 하다 일본군도로, 빼지 않고 그냥 내리쳤으니까 그렇지, 빼가지구 쳤으면 죽었을 텐데…. 시방까지도 이렇게 흉터가 크니, 옷이 피에 젖어서 뱃겨내지를 못하고 찢어냈다니까." "상상을 하면 나도 사람인데 왜 그런 사람들한테 원한을 안 가지갔어요. 가지지. 그래서 난 도대체가 그 사람들을 상상을 하고 싶지가 않아요. 잊을라 그래요."
그런데 길원옥은 만주에서 '요꼬네'라는 성병에 걸렸고, 위안소 관리인은 그 병을 치료한다고 하면서 나팔관을 묶어버렸다. 당시에는 사실도 몰랐다가 해방 후 산부인과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평생 아이도 낳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 일로 인해 길원옥은 더 이상 군인을 상대할 수 없게 되었다. 위안소 관리인은 사람을 붙여 길원옥을 집으로 돌려보냈고, 집에 돌아온 후에 병이 완치되었다.
그런데 길원옥은 다시, 이번에는 중국 석가장이라는 곳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되어야 했다. 두 번째 간 곳도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군인을 상대하는 위안소였다는 것을 석가장에 도착한 후 알게 되었고, 자기 자신이 바보였다고 탓했다. 다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전쟁이 끝났지만 끝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석가장에서 마지막 귀환선을 타고 인천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향길이 아니었다. 트럭에 타라고 하여 탔더니 서울 장충단 공원에 와서 내려줬다고 한다.
"해방이라고 했지만 좋은 것도 모르겠고, 다른 사람들은 만세를 외치는데 저는 어디 숨을 곳이 없을까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했어요." "그것을 숨기고 사느라고 얼마나 가슴 졸이며 살았는지 몰라요."

4. 해방, 그러나 분단
종전은, 광복은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위안소에서의 탈출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터, 일본군 '위안부'로서의 삶의 연장이었고, 분단과 가부장적 한국 사회가 가하는 폭력과 억압 속에서 '해방'되지 못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가해국 일본 정부는 전쟁터에서 여성들을 사살하거나 버리고 갔고, 위안소에 남아있던 여성들의 경우 중국군 혹은 러시아군에 의해 '일본 여자'라고 총격을 당하기도 했다. 현지인들이 일본 여자가 아니고 조선에서 끌려온 여자라고 하여 겨우 총격을 피해 살아났던 수원의 안점순 할머니는 같은 위안소에 있던 여자들이 그렇게 죽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미 연합군은 일본군이 조선에서 끌려온 '위안부'들에게 가한 집단 강간, 성노예 등 인권유린 범죄를 파악하고 있었고 전쟁 막바지에 사살, 유기 등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음을 수집했음에도 침묵하고 일본 정부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가해자의 범죄는 한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은폐된 채 면죄부가 주어져 있었다. 많은 피해자가 전쟁터에서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으며, 집으로 돌아온 피해자들의 경우에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로 다녀온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했거나, 어쩔 수 없이 부모에게 말한 경우에도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을 강요당했다.
더욱이 연합군은 전후 처리 과정에서 남북 분단이라는 상처를 만들었다. 유럽에서는 전쟁 도발국인 독일이 분단되었는데, 아시아에서는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분단되지 않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이 분단된 것이다. 만약 조선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화가 없었다면 남북 분단은 연합군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논의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분단은 미·소의 책임도 예외일 수 없지만 일제 식민지화가 그 근본 책임이다. 분단은 한반도가 식민지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볼 수 없는 상징이기도 하다.
분단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끝나지 않은 전쟁을 만들었다. 분단 뒤 이남에 '해방군'으로 주둔한 미군과, 미군을 지원하는 한국 정부에 의해 일부 피해자들은 다시 성착취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서 미군 '위안부' 피해자가 된 것이다. 사회는 그들을 '더러운 여자'들이라고 손가락질하고 공격하며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했지만, 당시 정부는 여성들이 벌어들이는 외화로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며 이를 '애국적 행위' '개인적 외교활동'으로 장려하고 칭송했다. 이들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서 다시 미군 '위안부' 피해자가 되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끼여 살아야 했다.
분단은 고향과 집이 분단선 이북에 있는 남쪽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또한 분단선 이남에 고향과 집이 있는 북쪽의 피해자들이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여전히 광복되어가는 여정에 놓이게 했다. 길원옥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열세 살에 집을 떠나 90살이 다 되도록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부모와 다섯 명의 형제가 있습니다만, 붙잡혀간 그 날 이후 지금까지 못 만나고 있습니다." "평양집 주소는 평양시 서성리 76번지 26호인데, 서성구는 평양 시내, 암동 제1번지가 가막소(감옥소)인데, 가막소 바로 뒷동네가 나 사는 데 였어요. 보통강하고 가까웠지요." "우리 아버지 성함은 길창봉, 어머니는 김두칠, 오빠는 길원도, 원세, 언니는 원죽, 동생은 원학이."
위안소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는 많은 부분을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것을 기억했더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거예요"라며 말하기를 회피하다가도 동네와 가족들 이야기를 할 때에는 얼마나 목소리가 또렷또렷하고 힘이 있던지…. 아마도 어린 나이에 가족과 이별하여 할머니가 될 때까지 여전히 가족을 그리워하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함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2014년, 유엔인권이사회 의장실을 방문하여 세계 1억인 서명을 전달할 때도 길원옥은 "제 고향은 평양이구요, 나이 열세 살에 나왔습니다"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2020년에도 길원옥은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살아있을 때 단 한마디라도 일본 정부에게 진정한 사죄를 받는 거, 그리고 평양집으로 가는 거, 그것이 소원"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내가 죽기 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향으로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말씀하실 때, 나는 할머니께 약속을 했었다. "그럽시다. 갑시다. 제가 모시고 갈게요"
길원옥 할머니뿐 아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우 할머니에게도 해방은 되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고향이 함경남도 삼수군 금수면 용천리이다. 나눔의집에 사시던 김순옥 할머니는 집이 평양 모란봉 앞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도 역시 중국으로 어린 나이에 끌려갔다가 전쟁터에 버려져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2006년에야 중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오셨다. 그러나 그것은 귀향이라 할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것일 뿐, 사망 전까지 가족도, 일가친척도 아무도 만날 수 없었으며, 결국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셨다. 평양시 기림리 139번지가 집인 김화선 할머니, 함경남도 원사시 서구동 원산역전 호떡집이 집인 박순희 할머니, 평양시 사항리 1-6번지가 집인 김은례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박영숙, 김향순, 이춘례, 조순덕, 이선옥 할머니도 분단으로 인해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셨다.
이러한 할머니들의 절절한 사연으로 인해 나는 고향이 조선인 피해자 명단을 작성하여 남북교류가 활발할 때, 정부에 위안소에서 돌아온 후 분단 때문에 집으로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들이 가족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인도적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진전되지는 못했다.
북에서 공개된 피해자들 중에도 고향이 남쪽인 피해자들이 많다. 함경남도 신포리에 사시다 돌아가신 박복이 할머니는 경남 진주에서 열일곱 살에 대만으로 끌려간 후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강원도 통천군 미평리에 사시다 돌아가신 최순환 할머니는 서울시 로남동이 집인데, 열여섯 살에 중국으로 끌려갔지만 분단으로 인해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셨다. 황해남도 연안군 소아리에 사시다 돌아가신 강길순 할머니는 전북 김제 출신이다. 함경남도 단천시 신동리에 사신 곽금녀 할머니는 충남 천안군 백이리에서 열일곱 살 때 중국 목단당으로 끌려가셨다. 함경북도 화성군 극동로동지구에 사시던 리복녀 할머니는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북수리에서 중국 목단강으로 끌려가셨다.
이 외에도 북의 조대위(조선 일본군성노예 및 강제련행보상대책위원회)가 펴낸 증언집에 수록된 피해자들의 출신 지역을 보면 이남 출신이 17명이나 된다. 거의 절반이 이남에 집이 있는 것이다. 그 지역을 보면 △전라도 8명 △경상도 4명 △서울 경기 4명 △충청도 1명이다.

5. 나그네 길원옥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피해자들은 '가족' 중심으로 모든 사회 문화가 조성되고 행정이 이루어지던 한국 사회에서 '나그네'처럼 떠돌이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지내던 피해자들의 경우에도 '보호자'인 가족, '남편' 혹은 '자식'이 없음으로 인해 다른 가정 있는 남자들에게 '집적거림'을 당하거나 성적인 희롱감이 되기도 했다.
그것이 싫어서 김복동 할머니의 경우에도 부산 다대포에서 장사를 할 때 한 남자와 함께 살았다. 그 남자가 곧 병에 걸려 오랜 시간 병치레를 하고 돈을 벌어야 했지만 가게에 그냥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남자들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바람막이가 되었다고 했다. 늘 신발장에 남자 신발을 놓아두었다는 할머니들도 있다.
일가친척 아무도 없는 길원옥의 분단 이남에서의 생활은 어땠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길원옥이 인천항으로 왔을 때 18세(만 16세)였다. 아직 청소년, 어린 길원옥은 해방과 함께 다시 누구의 도움 없이 홀로 이남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이로 지내는 신세가 됐다.
해방 후 길원옥은 인천항에 내려 서울 장춘단 집결지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천안으로 갔다. 첫 번째 정착지였다. "어떤 아주머니가 자기를 따라가자고, 가면 옷도 입혀주고 먹여도 주고, 돈도 벌게 해준다고. 그래서 천안으로 갔어요." 길원옥은 술집에 취직을 하여 노래 부르고 술따르는 '접대부'로 살았다. 천안에서 다시 온양으로. 그리고 포천으로. "색시들 놓고 술 파는 집에서 술 따르는 일이었지." 길원옥은 '술 따르는 일'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아직 어린 길원옥에게는 끝나지 않는 전쟁이었다.
그 경험 끝에 길원옥은 이렇게 말한다. "왜 동기간이 필요하고 부모가 필요하냐, 일가친척이 없으면은 울타리가 없으면은 아무리 힘을 써야 힘을 쓸 수가 없어. 친구가 암만 저길 해도 친구는 친구지." 여기까지가 길원옥이 10대, 20대에 도움이 될 가족도 친척도 없이 홀로 겪어낸 일이었다.
결국 길원옥은 서른 살 즈음, 아들을 입양하여 키우며 이남을 떠돌아다니는 것을 멈추고 이산가족 신청도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돈이 되는 것은 다 했어요. 번데기 장사, 배추 장사, 밀주 장사, 암달러 장사까지."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 아들을 신학대학에 보내고, 대학원까지 보내 목회자로 만들었다.
길원옥은 일흔 살이 넘어 정대협을 만났고, "내가 이런 대접을 받으며 살날이 있을 줄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하시며 함께 사는 손영미 소장님에 대해서는 "내 꺼 내 꺼" 하시다가 "소장님은 저에게 친정엄마 같고, 또 때로는 시엄마 같고, 딸 같고 그래요" 하셨다. 비로소 열세 살 길원옥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면서 빼앗긴 '돌봄'을 받는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6. 길원옥과 리상옥의 만남
길원옥과 같이 분단 이북이 고향인 피해자들의 '이산'의 아픔은 정대협 활동에 또 다른 숙제를 안겼다. 1991년부터 유엔에서, 일본에서, 독일에서,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 피해자들이 오가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자는 활동은 연대의 힘을 만드는 것도 중요했지만, 피해자들의 가족 만남과 고향 방문 문제를 해결하는 것 역시 중요했다.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여성국제법정에 참석했던 이남의 김은례 할머니가 북의 피해자를 만나서 손을 꼭 맞잡고 서 있는 모습을 뉴스에서 본 길원옥은 자신도 언젠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2004년 5월에는 서울에서 일본의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협의회 회의를 개최하였고, 이때 북에서 홍선옥 조대위 위원장 등 대표단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리상옥 할머니가 방남하였다. 그때 길원옥 할머니가 달려 나가 고향에서 오신 리상옥 할머니의 방남을 환영하며 손을 잡고 기뻐하던 모습, 홍선옥 위원장 앞에서 자신이 평양 출신이라면서 가족을 찾고 싶다고 열의를 다해 말씀하시던 모습이 눈에 생생하다. 그 모습은 나에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의 아픔과 마찬가지로 '열세 살에 집을 떠나 아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길원옥'의 또 다른 아픔을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을 갖게 했다.
드디어 2008년 5월 3~7일 동안, 길원옥 할머니를 모시고 평양을 방문하였다. 우리겨레하나되기국민운동본부에서 북을 방문하는 일정에 평양이 고향인 길원옥 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다녀올 수 있었다. 집을 떠난 지 67년 만이었다. 길원옥이 가는 곳마다, 만나는 이북 사람들에게 "혹시 성이 뭐예요?" "혹시 이웃에 길 씨 성을 가진 사람 없나요?" 그렇게 물으면 금방 삼삼오오 모인 북 주민분들 사이에서 열띤 토론이 시작되었다. 무리 속으로 들어가 소맷자락 붙잡던 할머니의 모습이 참 슬프고 아팠다.
가끔 길원옥은 엄마에 대한 이야기, 고물상 하시던 아버지 이야기, 아버지보다 더 무서웠던 오빠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때는 어김없이 손가락 끝이 허공을 돌며 평양 시내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특별히 자신을 사랑하고 이뻐했던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는 울음을 참느라 애쓰는 모습도 역력했다.
"한번 생각하면 아버지가 이름을 안 부르고 '작은네야' 하고 불렀거든. 당신 밥에는 쌀이 몇 알탱이가 들어가지만 다른 사람 밥에는 강냉이하고 수수가 밥이지. 그 흰 쌀밥 나한테 먹이려고. 엄마가 그걸 보고 막 야단을 치지. 아, 아부지가 이렇게 사랑을 했는데, 내가 받은 것만큼 내가 남한테도 베풀어야겠는데, 나는 베풀 데가 없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이미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직도 내 눈에는 평양 보통강변과 을밀대가 눈에 훤하고, 우리 집 서성리 76번지 26호 주변 거리가 영화처럼 떠오르는데… 아버지를 가둬뒀던 감악소가 있던 암동 거리,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아버지가 언제 나오나 기다리고 있는 어린 내 모습도 눈에 보이는데…." "우리 어머니는 참 고왔어요. 머리에 생선이랑 물건들을 이고 장사하러 나가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북녘이 고향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다른 이산가족과 사연이 다르다. 대부분의 이산가족은 한국전쟁 당시 월남해 가족과 헤어졌지만,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제 강점기에 끌려가 해방 뒤 돌아왔으나 38선에 가로막혀 고향으로 가지 못한 경우이다. 일제에 의해 가족과 생이별했고 해방 뒤에는 미국과 소련이 그은 분단선에 막혀 부모, 형제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2020년, 길원옥 할머니와 마지막 새해를 함께 맞이했을 때였다.
"할머니, 새해가 됐어요. 올해 소원은 뭐에요?" "소원은 무슨… 다 늙어서… 소원이라면 딱 하나야. 평양 가는 거지."


7. 꿈이었던가? 아, 꿈이었다면 좋겠다
나는 길원옥과 20여 년을 동지로 함께 걷는 축복을 받았다. 할머니는 나를 향해 "대장, 대장" 하며 나이도 어리고 젊은 활동가를 존중하고 의지해줬다. 그런 할머니와 달콤한 동지 관계를 맺으며 세계를 순례했다. 긴 순례 캠페인 동안 할머니와 한 방 혹은 한 침대 위에서 잠을 자며 피해 후유증이 할머니를 꿈속에서 어떻게 괴롭히는지도 봤고, 그 모습을 보며 홀로 울기도 했고, 피해자의 고단한 활동에 죄책감도 가지며 그렇게 걸었다.
그 여정에서 나는 할머니께 숱한 약속을 했다. 일본 정부가 사죄하고 배상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하던 약속이었다. 또한 끝까지 할머니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할머니가 내 손을 놓아도, 나는 할머니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했다. 마지막 할머니 하늘나라 보낼 때, 할머니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엄하고 따뜻하게 보내드리겠다는 약속도 했다. 열세 살 너무나 어린 길원옥이 걸었던 인생을 생각하며 나는 정말로 그 손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나 스스로도 믿었다. 하지만,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손영미 소장이 5년 전, 할머니와 손을 놓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졌다. 검찰과 언론에 의해 손영미가 윤미향과 공모하여 '치매가 걸려 자기 결정을 할 수 없는 길원옥 할머니의 돈을 갈취했다'는 식의 보도들은 할머니에 대한 사랑과 활동가들과 맺어진 사랑, 공적인 사명감으로 견디며 살아온 손영미 소장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김복동 할머니도 계시지 않고, 길원옥 할머니도 계시지 않는 지금 분단된 한반도는 나에게 '종북주의자' '빨갱이' '간첩 마누라'라는 꼬리표에 이어 '앵벌이' '사기꾼' '횡령범'이라는 꼬리표까지 붙여주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30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 미국, 독일, 캐나다, 호주, 영국, 프랑스, 스위스,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 등 세계 곳곳을 다녔다. 유엔과 ILO도 여러 차례. 그런데 그런 나에게 대한민국 공안은 '종북주의자'라는 파일명을 붙여 사찰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내가 일본에 들어갈 때마다 한국 공안이 일본 공안에 내 일정을 미리 전달하고, '그 여자 빤스까지 벗겨'라는 지시를 여러 차례 내렸다. 나를 담당했던 전직 국정원 직원은 나보다 늘 하루 먼저 도착해서 내가 공항으로 입국할 때 바로 내 옆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 출장에서 나의 일정은 오로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목적에 집중되었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행사장, 미팅장, 호텔을 반복적으로 오가다 공항으로 출발해서 귀국. 참 인간으로서는 재미없는 삶이라고 할 정도로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들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공간에 한일 공안이 함께 머물렀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2007~2011년까지 4년 동안의 개인 이메일들과 당시 정대협 사무처장이었던 양노자 씨의 개인 이메일 계정을 본인의 동의나 수색 여부 등에 대한 통지도 전혀 없이 수색하고, 혐의가 발견되지 않으니까 종료 후 통지서를 보냈다. 그나마 개인통신보호법이 작동되고 있었기에 사후에라도 보고를 해서 알 수 있었다.
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국의 정보기관에서 활동가들을 위협하면서까지 탄압하는 이유가 되었을까? 바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이 분단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여전히 전쟁을 획책하고 그 전쟁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 한미일 공안 정치에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2017년 문재인 정부 들어 활동한 '2015 한일 위안부 조사 TF' 단장의 조사 보고 발표에서도 드러난다.
"한·일 관계 악화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략에 부담으로 작용함으로써 미국이 양국 사이의 역사 문제에 관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외교 환경 아래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 협상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조속히 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았다."
이는 내가 국회의원 후보가 되면서 더욱 노골화되었다. 비례대표 후보 신청 소식이 알려지자 가장 먼저 일본 극우 매체가 "그가 국회의원으로 변신하면 위안부 문제로 한국 정부에 대일 강경 자세를 더 강화하라고 촉구할 거라는 분석이 나온다"고 보도했다. 이어서 곧바로 한국의 극우 매체 조선일보는 "윤 이사장이 국회의원 당선 가능성이 높은 비례대표 7번을 받게 되자 일본 정부가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기사를 썼다가 후에 삭제했으며, 서울경제도 '시민당 비례7번 예의주시하는 일본 정부'라는 기사를 썼다.
"반미 외치던 시민당 비례 윤미향, 딸은 미국 유학, 남편은 보안법 기소자"라는 기사. '돈미향' '앵벌이' '흡혈귀' '악마' 같은 극단적 표현들.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 좌파"라는 국민의힘 허은아 의원 발언 보도. "윤미향은 인류가 낳은 가장 잔인한 악마"라는 서민 교수 인용 기사. '그 돈들은 조총련으로 갔을 것' '파렴치한 위선자' '기생충' '간첩' 등 온갖 막말과 댓글이 신문과 방송, 유튜브, 인터넷에 도배되었다.
전 주한 일본대사 무토 마사토시는 JB프레스라는 언론에 <전 위안부의 고발이 벗겨낸 위안부단체 전 대표의 정체>라는 글을 기고하고, 정의연을 "위안부 문제를 이용해 북한과 연계함으로써 일한 대립이 심화하기를 바라는 단체"로 매도했다. 일본의 극우 매체 산케이신문은 기사와 사설을 총동원해서 윤미향의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다. '윤미향' 보도량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일 최다를 갱신했으며,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한 2020년 5월 7일부터 3년간 언론진흥재단 '빅카인즈'에 등록된 54개 언론사에서만 1만 7557건의 기사를 발생시켰다.
또한 2023년 8월 30일부터 9월 2일 일본 간토 대진재조선인희생자 추모회에 참석한 것과 관련해서 다시 "윤미향 의원이 친북 조총련이 주최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추도 행사에 참가했다"는 동아일보의 단독기사를 시작으로 52개 언론사에서 일주일간 무려 500여 건의 기사를 쏟아냈다. 이후 앵벌이, 사기꾼 윤미향에 다시 종북주의, 빨갱이,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 기사들로 도배되었고, 당시 대통령이던 윤석열은 직접 '국채를 흔드는 세력'이라 비난하며 살해에 가까운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질세라 윤석열 정당은 "즉각 의원직에서 사퇴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공격했다. 고소·고발도 잇따랐다.
이 사건들의 후속 진행은 국회의원직을 떠난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가인 나는 일제 식민지화와 분단 그 경계에 아직도 서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8. 광복 80주년, 길원옥의 해방을 위하여
앞에서 살펴봤듯이 우리에게 광복 80주년은 동시에 분단 80주년으로 기억되고 있다. 분단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정한 광복이라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건이 수시로 발생한다. 피해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전쟁의 위협은 여전히 한반도 안에서 진행형이다. 분단의 장기화, 고착화로 인해 남북은 상호 적대 국가로 규정한 채 싸워왔다. 지난 윤석열 정부에서 그 갈등은 극에 달했다. 남북관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전쟁을 일으켜 권력을 지키려는 최악의 술수까지 있었음이 최근 드러나고 있다.
이런 윤석열을 부추기며 일본과 미국 정부는 그들의 군사적, 정치적 욕망을 채우기 바빴다. 한국의 하늘과 바다, 땅은 자위대까지 끌어들인 거대한 미군의 군사 연습지로 전락했다. 영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지난 20년간 한미 군사 훈련이 132회 진행되었으며, 이는 아태지역 국가들 중 가장 많은 횟수다. 윤석열 정부 들어 2023년에는 60회 이상 훈련이 진행되었고, 2024년에는 한미·한미일 군사 연습이 총 109회 275일 동안 진행되었다. 광복 80주년, 전후 80년에도 결코 전쟁이 끝나지 않고 있는 현실을 마주한다.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분단 이남의 피해자들, 분단 이북의 피해자들. 그들의 유해라도 고향 땅을 밟아볼 수 있도록 뒤늦은 노제와 장례식을 꿈꿔본다. 유엔의 인권침해 피해자 배상 원칙이 정하고 있는 '원상회복' 조치는 피해자들이 이미 고인이 된 상태에서도 끝나지 않는다. 고향을 방문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도록, 일제 식민지로 인해 나눠진 남북, 미국과 소련이 갈라놓은 한반도를 하나로 만드는 일에 남북과 일본의 시민들이 함께 연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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