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나비문화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14일 저녁 서울 종로구 옛 주한일본대사관 인근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나비문화제’가 열려 참석자들이 ‘기림일 선언’을 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평화 돌풍, 그들의 굳센 바람과 우리의 힘찬 바람이 만나!”

 

14번째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기림일)을 맞아 14일 저녁 서울 종로구 평화로에서 열린 나비문화제 무대에는 평화가 돌풍이 되길 바라는 피해자와 시민의 마음을 담은 문구가 내걸렸다. 쏟아지는 소나기에도 200여명의 시민이 왼쪽 가슴에 노란색·보라색 나비 모양 리본을 달고 자리를 지켰다.

 

이날 나비문화제는 6년만에 온전한 소녀상 곁에서 열렸다. 극우 단체들의 훼손 우려로 2020년부터 소녀상을 둘러싼 채 설치됐던 바리케이드는 지난 5월 철거됐다. 한 시민이 안긴 노란 꽃을 무릎에 둔 소녀상과 사진을 찍으려는 시민 행렬이 이어졌다.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은 1991년 8월14일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1997년 작고)씨가 최초로 피해 사실을 증언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2017년부터 정부 차원의 법정기념일로도 지정됐다. 위안부 피해 생존자 이용수(98)씨는 영상을 통해 “오늘은 다른 날이 아닌 기림일이다. 정말 잊어선 안 된다”며 “여러분, 건강하시고 (도움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감사를 전했다. 피해자 박필근(98)씨도 “일본한테 보상도 받고 잡(싶)고, 사과도 받고 잡다. (나비문화제에) 많이 와주어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을 맞아 14일 저녁 서울 종로구 옛 주한일본대사관 인근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나비문화제’가 열리는 동안 소녀상 위로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다. 김정효 기자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위한 투쟁이 36년째 이어지는 가운데, 피해 생존자들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며 ‘피해생존자 없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걱정도 커지고 있다. 현재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5명이다. 한경희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며 “피해자들의 굳센 바람과 우리들의 힘찬 바람이 만나 전쟁과 폭력, 차별과 혐오를 밀어내는 더 큰 평화의 바람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참여자들은 일본 정부에 △전쟁범죄 인정과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법적 배상 △역사지우기 중단과 재발방지 위한 교육 △군사대국화 중단을, 한국 정부에 △일본 정부에 책임 이행을 촉구하고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했다.

 

무엇보다 폭력과 혐오에 맞선 연대를 다짐했다. 이들은 기림일 선언에서 “전쟁이 없고, 폭력이 없고, 혐오가 없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더욱 크게 목소리 내고 세계 시민사회와 굳건히 연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장종우 기자 > 

 

 

 

국적회복 매년 증가… 법무부, 10월까지 집중 처리기간

 
국적회복 신청 급증세에 전담 조직 '국적심사원'도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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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회복 등 문구 적힌 서울 행정사무소 [연합]

 

법무부는 오는 10월까지 석 달 동안 동포를 위한 국적회복 집중 처리 기간을 운영한다고 12일 밝혔다.

 

현행 국적법은 과거 한국 국민이었던 외국인이 법무부 장관의 국적회복 허가를 받아 다시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 국적을 회복하면 1년 안에 외국 국적을 포기하거나 행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관련 서류를 법무부에 제출해야 한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는 집중 처리 기간 하루 평균 처리 건수의 4배 이상(총 3천973건)을 처리해 허가 심사 기간을 평균 13개월에서 9개월로 단축할 계획이다.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는 엄정한 심사체계를 확립하는 한편 처리 기간을 단축하고 업무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국적 심사 전담 조직인 '국적심사원' 신설도 추진하고 있다.

 

국적회복 신청자는 2021년 3천69명에서 지난해 5천82명으로 4년간 65.6% 증가했다.

 

지난해 국적회복이 허가된 사람은 4천37명으로 미국인(2천586명)이 가장 많았으며 캐나다(656명), 호주(133명), 일본(131명), 뉴질랜드(118명)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한국 국적으로 귀화·회복을 신속 처리하기 위해 심사체계 개선을 지속해 추진하겠다"며 "국적 심사 전담 조직 신설에도 노력해 내·외국인이 체감할 수 있는 신속하고 공정한 이민정책 서비스를 구현하겠다"고 밝혔다.      <  최원정 기자 >

 

백범 김구의 '혈의', 한 시대의 비극을 기록하다

● COREA 2026. 8. 14. 02:0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피 묻은 유품이 품은 해방정국의 비극
분단된 시대의 야만과 미완의 해방 증언

 

1. 총성이 멎은 뒤에 남은 것

 

역사는 문서로만 남지 않습니다. 때로는 한 벌의 옷이, 한 장의 혈서가, 한 점의 핏자국이 시대를 증언합니다. 기록에는 해석이 스며들 여지가 있지만, 피는 변명이 끼어들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우리의 독립운동사에는 그렇게 ‘정직한 유물’들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혈서, 윤봉길 의사의 피 묻은 유품, 그리고 백범 김구의 혈의(血衣)가 그것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혈서는 단지동맹 때 손가락을 끊어 쓴 글과 혈인으로, 동지들에 의해 보존되어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피 묻은 옷과 유품은 홍구공원 의거 뒤 일본 측에 압수되거나 수습된 것들 가운데 일부가 광복 후 돌아와 보존되고 있습니다. 반면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입었던 옷이나 수의는 현재 전해지는 실물이 없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재판기록과 형무소 기록, 유족과 동료들의 증언을 통해 남아 있습니다.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을 맞고 서거한 백범의 모습. 얼굴의 상처 부위에는 응급처치의 흔적이 남아 있고, 백범은 흰옷을 입힌 채 침상에 안치되어 있다. 평생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살아온 백범은 일제의 감옥과 추격을 견뎌 살아 돌아왔으나, 해방된 조국에서 총탄에 쓰러졌다.

 

백범 김구의 혈의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2층 집무실에서 안두희의 흉탄을 맞을 때 입고 있던 옷입니다. 일요일 아침 새로 갈아입은 정갈한 여름옷이었습니다. 백범은 새로 갈아입은 지 불과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깨끗한 백의 차림으로 경교장 안에서 사람을 만나고 일을 보다가 총탄에 쓰러졌습니다. 흰 섬유 위에 번진 붉은 피가 더욱 선명하게 남은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안두희가 저격하는 순간 백범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총탄 세 발이 그의 몸을 관통한 뒤 책상 뒤편 창유리까지 뚫고 나갔습니다. 총알이 지나간 유리에는 구멍이 생겼고, 창틀과 그 주변에도 피가 튀었습니다. 당시의 유리창은 그날의 사격 방향과 현장의 참상을 보여주는 물적 증거로 남았습니다.

 

총격을 받고 쓰러진 백범은 침상으로 옮겨졌습니다. 측근들과 의료진은 심폐소생과 지혈을 시도했습니다. 상처 부위를 확인하고 청진기를 대기 위해 조끼적삼과 저고리, 조끼의 왼쪽 어깨와 가슴 부위를 급히 가위로 절개했습니다. 오늘날 혈의에 남아 있는 절개 흔적은 쓰러진 백범을 살리려 했던 사람들의 다급한 손길이 남은 표시입니다.

 

측근들은 경교장에 있던 여름용 모시 이불로 피를 닦고 백범의 몸을 덮었습니다. 시신을 눕힌 침상의 시트와 머리를 받친 베개, 몸을 덮었던 모시 이불도 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유족은 그것들을 세탁하지 않고 그대로 수습했습니다. 백범이 마지막까지 사용하던 침구는 한 사람의 임종을 받아낸 물건이자, 경교장의 비극을 간직한 현장 유물이 되었습니다.

 

백범이 입고 있던 한복 조끼에는 은으로 만든 단추 세 개가 달려 있었습니다. 총격 직후 백범을 옮기고 응급처치를 하는 과정에서 단추가 실에서 떨어져 피로 젖은 집무실 바닥에 굴렀습니다. 유족들은 그 단추들을 찾아 따로 수습했습니다. 훗날 단추를 조끼에 다시 달지 않고 별도의 유품으로 보관한 것은 그 떨어진 상태 자체가 총격과 수습의 순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백범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날 경교장에 있던 사물들은 총성이 멎은 뒤에도 말없는 증언을 이어갑니다.

 

2. 백범의 혈의는 어떻게 보존되었나

 

백범의 혈의는 모두 8종 10점입니다. 조끼적삼 한 점, 저고리 한 점, 조끼 한 점, 개량속고의 한 점, 바지 한 점, 대님 두 점(양쪽), 양말 두 점(양쪽), 개량토시 한 점입니다.

 

상의는 안쪽부터 조끼적삼과 저고리, 조끼를 입었습니다. 조끼적삼은 오늘날의 면 내의 상의와 비슷한 얇은 속옷입니다. 저고리는 한여름에 입는 얇은 항라 계열의 옷감으로 지어졌고, 그 위에 조끼를 덧입었습니다. 하의는 오늘날의 사각팬티 또는 짧은 속바지와 비슷한 개량속고의 위에 흰 바지를 입고, 바짓부리를 대님으로 묶었습니다. 갈색 양말 한 켤레도 함께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 개량토시 한 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시는 붓글씨를 쓰거나 문서를 다룰 때 소매가 흘러내리거나 바닥에 끌리는 것을 막기 위해 팔에 끼던 봉지 모양의 생활용품입니다. 백범은 늙어서도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편지를 쓰고, 휘호를 쓰고, 성명서를 작성하고, 자주독립과 통일을 염원하는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미군정 당국에 출두할 때도 토시를 착용했습니다. 혈의에 남은 토시는 백범의 일상과 공적 활동을 함께한 생활사 자료입니다.

 

그러나 혈의를 보존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백범 서거 뒤 경교장은 유족이 계속 머물며 지킬 수 있는 집이 아니었습니다. 경교장은 백범의 소유가 아니었고, 유족과 측근들은 그곳을 비워야 했습니다. 백범이 사라진 뒤 경교장을 감시하는 이승만 정권과 군·특무기관의 경계는 냉엄했습니다. 언제 군경이 들이닥쳐 유품과 문서를 압수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백범의 차남 김신과 기요비서(기밀비서) 김우전은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교장에 쌓여 있던 민감한 문서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경교장 집무실과 비서실에는 국내외 연락망, 편지와 명부, 방문객들의 이름이 적힌 방명록, 성금과 관계된 자료 등 정치적으로 미묘한 기록이 많았습니다. 그것들이 정권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백범과 교류한 독립운동가와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에게 화가 미칠 수 있었습니다.

 

김우전과 김신은 중요한 문서와 편지, 명부와 방명록을 골라 경교장 지하 아궁이에서 불태웠습니다. 백범과 함께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역사의 일부를 자신들의 손으로 태워야 했던 것입니다. 기록을 경시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긴박한 보안 조치였습니다.

백범이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을 맞을 당시 입고 있던 피 묻은 옷. 흰 저고리와 바지 곳곳에 검붉게 굳은 혈흔이 선명하게 남아 있고, 상의에는 총격과 응급처치 과정에서 생긴 흔적도 보인다. 백범의 혈의는 조끼적삼·저고리·조끼·개량속고의·바지·대님·양말·개량토시 등 8종 10점으로 200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혈의 일괄’로 국가등록문화재가 되었다.

 

그러나 백범이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피 묻은 옷은 한 점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김신과 비서들은 백범의 피가 자주독립과 남북통일을 향한 열망, 그리고 해방 정국의 비극을 증언할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유족은 혈의를 세탁하지 않았고, 핏자국과 탄흔, 의료진이 잘라낸 흔적을 모두 수습해 오동나무 함에 넣었습니다. 아들 김신은 정권의 감시와 가택수색을 염려해 유품함을 벽장 깊숙한 곳이나 일반 가구 뒤에 감추고 살았습니다. 위험이 커지면 믿을 만한 친지나 절의 지인에게 잠시 맡겼고, 이사할 때에는 다른 물건보다 혈의함을 먼저 챙겼습니다.

 

훗날 김신은 회고록에서 아버지의 혈의가 든 상자를 빼앗기거나 훼손당할까 평생 가슴을 졸이며 살았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는 공군참모총장 등 국가의 고위직에 오른 뒤에도 아버지의 유품만큼은 안전하다고 마음 놓지 못했습니다. 한 나라의 장군이 된 아들이 아버지의 마지막 옷을 정권의 눈에서 숨겨야 했다는 사실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또 다른 비극을 보여줍니다.

 

유족은 그렇게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혈의를 집안 깊은 곳에 비장했습니다. 혈의가 담긴 함을 약 50년 만에 다시 열었을 때는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짙은 피비린내가 배어 나왔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유족과 관계자들은 피가 굳은 옷과 냄새 앞에서 끝내 통곡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은 냄새는 그날의 경교장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는 듯 사람들을 1949년 6월 26일로 되돌려놓았습니다.

 

많은 서류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불길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혈의는 오동나무 함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방명록은 경교장을 드나든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혈의는 한 시대의 비극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3. 혈의는 어떻게 문화재가 되었나

 

백범의 혈의는 처음부터 국가가 관리한 문화재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이 간직한 아버지의 마지막 옷이었고, 정권의 감시 속에서 숨겨야 했던 위험한 유품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가족의 손에서 비밀스럽게 보존되다가 전문기관의 보존처리를 거쳐, 마침내 국민 전체가 지켜야 할 역사유산이 되었습니다.

 

혈액이 묻은 옷감은 시간이 지나면 혈흔이 굳고 섬유가 약해지거나 딱딱하게 경화합니다. 오동나무 함 속에서 수십 년을 보낸 백범의 혈의도 장기 보존을 위한 전문적인 처리가 필요했습니다.

 

보존처리를 앞두고 유족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옷에 밴 피와 오염을 씻어내고 깨끗한 한복의 모습으로 복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핏자국을 그대로 남겨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일반적인 세탁과 복원의 관점에서 보면 피는 제거해야 할 오염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범의 혈의에서 피는 유물의 본질을 이루는 역사적 증거였습니다.

 

유족과 보존 전문가들은 혈흔을 지우지 않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그날의 피와 탄흔, 응급처치 과정에서 생긴 절개 흔적 자체가 없애서는 안 될 역사 기록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보존의 목적은 옷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피와 훼손의 흔적을 그대로 지닌 채 더 이상 삭지 않도록 지키는 데 있었습니다.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혈의의 상태를 조사하고 과학적인 보존처리를 시행했습니다. 옷감에 생긴 곰팡이와 추가 손상의 원인이 되는 물질을 제거하고 섬유를 안정시키되, 백범의 피와 탄환이 남긴 흔적은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혈흔을 검사해 백범의 혈액형이 AB형이라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200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이자 백범 서거 60주년이었습니다. 문화재청은 백범 관련 유품의 역사적·문화재적 가치를 조사해 「2009년도 등록문화재 등록조사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그 결과 백범이 암살당할 당시 입고 있던 의복 8종 10점은 「백범 김구 혈의 일괄」이라는 명칭으로 국가등록문화재 제439호에 등록되었습니다. 등록일은 백범 서거 60주기인 2009년 6월 26일이었습니다. 현재는 지정번호를 앞세우기보다 국가등록문화유산이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문화재청이 혈의를 높이 평가한 것은 조끼적삼과 저고리에 남은 탄흔, 의복 전체를 물들인 혈흔, 의료진이 가위로 잘라낸 절개 흔적이 백범 암살 당시의 상황을 직접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토시와 속옷, 바지, 대님, 양말까지 당시의 착장이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점에서도 생활사적 가치가 컸습니다.

 

혈의는 한때 김신의 소유로 백범김구기념관에 소장되었고, 이후에는 재단법인 김구재단이 소유와 관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경교장에는 현장을 이해하도록 제작한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원본은 온도와 습도, 빛을 통제할 수 있는 별도의 보존 환경에서 관리되고 있습니다. 1949년에는 아들이 목숨을 걸고 숨겨야 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60년이 흐른 뒤에는 대한민국이 함께 보존해야 할 역사유산이 되었습니다. 혈의가 문화재가 된 것은 옷 자체의 가치가 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내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죽음과 그 시대의 비극을 국가의 공적 기억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재가 된 것은 피 묻은 한복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옷에 남은 탄흔과 핏자국, 아들이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감추며 살아온 세월, 그리고 뒤늦게 그 가치를 깨달은 국민의 기억이 함께 문화유산이 된 것입니다.

 

4. 혈의와 함께 남은 마지막 현장

 

혈의는 백범의 죽음을 증언하는 가장 직접적인 유물이지만, 그날의 경교장을 기억하는 유물은 혈의 하나만이 아닙니다. 백범의 손때가 묻은 벼루와 먹도 남았습니다. 서거 직전까지 붓글씨를 쓰는 데 사용했던 벼루에는 검은 먹물과 백범의 피가 섞였습니다. 유족은 먹물을 씻어내거나 새로 갈지 않고 그 상태로 보존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피와 먹이 한데 섞인 채 벼루 안에서 굳었습니다. 붓글씨를 쓰던 일상과 총격으로 끊긴 마지막 순간이 한 벼루 안에 함께 남은 것입니다.

 

백범 피격 직후 촬영된 사진에는 창유리에 두 개의 총탄 구멍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 뒤 경교장은 중화민국 대사관저, 월남대사관 등을 거쳐 1967년부터 병원시설로 사용되면서 내부가 크게 개조됐다. 2005년 강북삼성병원이 백범 집무실을 복원하면서 당시 사진을 바탕으로 두께 5mm의 투명 아크릴판에 두 개의 총탄 구멍을 재현해 유리창에 덧붙이는 방법으로 총탄 구멍을 재현했다.

 

피 묻은 모시 이불과 베개, 침상 시트도 수습되었습니다. 백범의 조끼에서 떨어진 은단추 세 점도 별도로 보관되었습니다. 백범의 몸을 관통한 총탄이 뚫고 나간 창유리 역시 현장을 증언합니다. 유리에 난 두 개의 탄흔은 안두희가 서 있던 위치와 총탄이 날아간 방향, 백범이 쓰러진 자리를 물리적으로 보여줍니다. 말과 기록이 엇갈리더라도 총탄이 남긴 구멍은 그날의 방향을 바꾸어 말하지 않습니다.

 

이 유물들은 각각 따로 존재하지만 하나의 장면을 이룹니다. 피 묻은 옷, 떨어진 은단추, 피와 먹이 섞인 벼루, 붉게 물든 침구, 총탄이 뚫은 창유리가 모여 백범의 마지막 시간을 복원합니다. 어느 하나도 스스로 말하지 않지만, 서로를 마주 놓으면 경교장 2층에서 벌어진 일이 선명하게 되살아납니다.

 

흉탄은 백범의 육신을 쓰러뜨렸지만, 그가 남긴 뜻까지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같은 겨레가 분단된 나라가 온전한 나라인가, 민족의 자주보다 강대국의 이해가 우선 되어야 하는가, 정치적 반대자를 폭력으로 제거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백범의 죽음 뒤에 더 선명해졌습니다.

 

총탄은 백범의 행동을 중단시켰지만, 그의 죽음은 자주와 통일이라는 문제를 더 크게 남겼습니다. 백범의 노선이 현실정치에서 반드시 성공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거됨으로써 열려 있던 하나의 정치적 가능성이 닫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5. 한 벌의 옷이 증언하는 시대의 비극

 

백범의 혈의는 먼저 정치적 반대자를 대하는 시대의 야만을 증언합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토론하고 설득하며 국민의 판단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총탄은 논쟁을 끝내고 한 사람을 영원히 제거했습니다. 그것은 한 개인의 잔혹한 범행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정치적 반대자를 포용하고 경쟁하는 민주적 질서가 뿌리내리지 못한 해방 정국의 야만성을 보여줍니다. 백범과 생각이 달랐던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의 남북협상과 통일정부 노선에 반대하는 세력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는 논쟁과 선거, 역사의 평가로 다투어야 할 문제였습니다. 총탄은 그 모든 과정을 한순간에 빼앗았습니다.

 

혈의는 또한 ‘미완의 해방’을 증언합니다. 백범은 일제의 감옥과 추격, 사형의 위협을 견디며 살아 돌아왔습니다. 중국 대륙에서 수십 년을 떠돌면서도 조국에 돌아갈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온 독립운동가는 해방된 조국의 한복판에서 쓰러졌습니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끝났지만, 백범이 꿈꾸었던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남과 북은 갈라졌고, 외세의 이해와 내부의 적대가 민족의 앞날을 가로막았습니다. 백범의 혈의는 해방이 곧 독립의 완성은 아님을 보여주는 아픈 증거입니다. 식민지에서는 살아남았으나 해방된 조국에서는 살아남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피가 그 역설을 말합니다.

 

백의를 적신 피는 한 시대의 가능성에 대한 종언이기도 했습니다. 백범이 살아 있었다면 분단을 막거나 통일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정치 노선이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남과 북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은 채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주장하던 거대한 정치적 존재가 사라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남과 북의 대립 사이에서 다른 길을 모색할 가능성, 분단이 고착되기 전에 민족 내부의 대화와 타협을 시도할 가능성,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해방 후 국가 건설에 더 크게 참여할 가능성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한 사람을 제거하는 일이 한 시대의 가능성까지 사라지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백범의 혈의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였는지를 가장 정직하게 증언하는 유물입니다.                        < 임순만 언론인 >

 

 

'당정대' 조사한다더니 '참고인, 안 나와도 그만'

 

박지원 "피의자 소환하고 역지사지 응해야"
한동훈 "수사 지휘 없애더니 민주당이 지휘"

주진우, 추경호 시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위헌·위법 판단할 수 없어 추에 의총 요청"
우원식 의장 표결 시간 앞당긴 탓 돌리기도
특검, 계엄 정당화 메시지 윤과 신원식 기소
합수부에 협조 지시 해경 김종욱·안성식도

 

무소속 한동훈 의원이 1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민의힘 부산시당이 연 '2차 공공기관 이전, 왜 부산이 답인가' 토론회에 참석해 손뼉 치고 있다. 앞줄은 왼쪽부터 국민의힘 이헌승 의원, 정점식 원내대표, 이성권·김도읍·조경태 의원. 2026.8.11 연합

 

2차종합특검(권창영 특별검사)이 비상계엄 다음날 ‘당정대 회의’와 관련해 12일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해 달라고 요청한 한동훈 무소속 의원이 출석하지 않자 곧바로 재소환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종합특검팀은 이날 오후 언론 공지를 통해 “한 의원에게 당정대 회의 관련 참고인 신분으로 금일 오전 10시까지 출석하라는 통지서를 의원실을 통해 전달했으나, 한 의원은 출석 여부에 대한 답변 없이 불출석했다”며 “불출석 사유서도 제출하지 않았다”고 알렸다. 특검팀은 “수사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을 고려해 한 의원에 대한 재소환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종합특검은 12·3 불법 비상계엄이 해제된 이후 열린 ‘당·정부·대통령실(당정대) 회의’에서 12·3 내란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개발됐다고 의심하고 있다. 2024년 12월 4일 새벽 국회 의결을 통해 비상계엄이 해제된 이후 같은 날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삼청동 국무총리 공관에서 당정대 회의가 열렸다. 국민의힘 측에선 당시 한동훈 대표와 추경호 원내대표, 나경원·김기현 의원, 정부 측에선 한덕수 국무총리와 박성재 법무부 장관, 방기선 국무조정실장이 참석했다. 대통령실 측에선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 신원식 국가안보실장, 홍철호 정무수석, 김주현 민정수석이 자리했다. 이후 오후 5시쯤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과 한 의원, 한덕수 전 총리,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만나 후속 대책을 논의했다.

 

종합특검은 그날 오후 7시에 열린 삼청동 안가 회동이 당정대 회의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안가 회동에는 당정대 회의에 참석했던 박성재 장관과 김주현 수석을 비롯해 이상민 장관, 이완규 법제처장, 한정화 법률비서관이 모였다. 박 전 장관, 김 전 수석, 이 전 처장은 국회 국정조사에서 안가 회동이 ‘단순 친목 모임’이었다고 주장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합의33부(재판장 이진관)는 지난 6월 박 전 장관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하면서 안가 회동이 윤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계엄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옹호하는 논리를 구축한 회의였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 자리에서 내란의 책임을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게 전가해 윤 전 대통령 수사를 차단하는 방안이 논의돼 윤 전 대통령에게도 보고됐다고 판단했다.

 

한 의원은 소환 통보 사실이 알려진 직후인 지난 6일 페이스북을 통해 "저는 계엄 당일 여당 대표임에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계엄을 저지했다"며 특검의 소환 시도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선거 기간에 아무 이유도 없이 출국금지시켜놓고 몇 달씩 멋대로 연장해 가면서도 한 번도 부르지도 못하더니, 이제 와서 보여주기식 언플(언론플레이)이나 하는 이재명 정권의 정치특검이 하려는 정치수사를 도와줄 생각은 없다"며 조사에 응할 뜻이 없음을 명확히 했다.

 

특히 한 의원은 지난 9일에 다시 글을 올려 특검 측의 언론 인터뷰 내용을 거론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당시 특검 관계자가 언론을 통해 "한 의원이 '출국금지만 걸어놓고 부르지 않는다'고 하길래 이번에 정식으로 소환했다", "참고인이니 와도, 안 와도 그만이다"는 취지로 발언한 점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 의원은 "이재명 정권의 정치특검이 저를 소환한다고 ‘언플’해놓고서 '안 와도 그만이고, 출금해놓고 왜 안 부르냐니 불렀다'고 말했다고 한다"며 "'안 와도 그만'이고 '출금해놓고 왜 안 부르냐니 불렀다'는 것은 '뒷골목 깡패의 언어'지 '수사기관의 언어'가 아니다"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핵심 당사자인 한 의원이 출석하지 않고 특검이 재소환을 포기함에 따라 특검팀은 한 의원을 조사하지 않고 최종 수사 결과 정리 수순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종합특검이 한 의원을 재소환할 계획이 없다고 밝힌 데 대해 한 의원을 '참고인'이 아니라 '피의자'로 소환하라고 압박했다. 박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2차 종합특검팀이 한 의원을 참고인 신분으로 두 번째 소환 통보했지만 한 의원이 거부했다"며 한 의원을 향해 역지사지(易地思之) 심정으로 특검 소환에 응하라고 촉구했다. 이어 "한 의원은 검사, 법무장관 출신으로 수사할 때 참고인이 불출석하면 어떻게 했냐"며 "특검도 한 의원을 참고인이 아니라 내란 개입 혐의 피의자로 소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에 한 의원은 "박 의원이 정치특검에게 저를 피의자로 부르라고 수사지휘했다"고 맞받아쳤다. 그는 이날 페이스북에 "검사의 수사지휘 없애더니 이젠 민주당이 직접 수사지휘를 한다"며 "정치특검이 민주당 수사 지휘에 따르나 보겠다"고 경고했다. 이어 "박 의원은 계엄을 막은 저 대신 숲에 숨은 이재명 대통령, (밤) 10시에 감기약 먹고 잤다는 김민석 전 총리나 출국금지하고 부르라고 정치특검에게 수사지휘하라"고 비꼬았다.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이 12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2·3 비상계엄 당시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방해한 혐의로 기소된 추경호 전 원내대표 9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2026.8.12 [공동취재] 연합

 

한편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추경호 대구시장의 국회 계엄해제 표결 방해 혐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비상계엄 선포 직후 정보가 부족해 위헌·위법성을 판단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국민의힘 원내대표였던 추 시장이 혼란한 상황에서 정보 공유를 위해 계엄 해제 표결 전 국민의힘 의원총회를 소집한 행위는 정당했다는 취지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4부(재판장 한성진)는 추 시장의 내란 중요임무 종사혐의 공판을 열었다. 이날 재판에는 주 의원과 같은 당 박수민 의원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들은 12·3 내란 당시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가 계엄 해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국민의힘 의원 18명 중 2명이다. 주 의원은 검사 출신으로 윤석열 정부 대통령실에서 법률비서관을 지냈다.

 

주 의원은 자신이 당 지도부에 긴급의총 소집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는 “상식적으로 저뿐만 아니라 다른 의원들도 의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정보가 한정적인 상황이라 의견을 나누고 정보를 공유할 필요도 있었다”고 말했다.

 

‘12·3 계엄 해제를 의결하기 전, 계엄 선포가 위헌·위법이라고 판단했느냐’는 추 시장 측 변호인 질문에 주 의원은 “저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주 의원은 “당시 정보가 한정돼 위법성 여부까지 판단하기는 불가능했다”며 “(민주당 의원들이) 150명을 넘어서 무조건 해제되는 상황이어서 (국민의힘 의원들끼리는) 이후 정국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로 논의가 넘어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 의원의 설명과 달리 국민의힘 의원들이 의원총회를 열자고 논의하던 시점에는 민주당 의원들이 150명 이상 모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주 의원은 의총 장소가 국회에서 당사로 변경된 점, 당사에 모인 국민의힘 의원들이 표결에 참여하지 못한 주된 원인은 국회 출입 봉쇄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주 의원은 “(국회가) 다시 열렸다가 봉쇄됐고, 출입을 통제한 시간과 강도가 시시각각 변했다”며 “의원들은 국회가 막혀있고 혼란스러우니 당사로 갔다”고 말했다.

 

오히려 우원식 당시 국회의장이 표결을 예고했던 시간보다 앞당겨 국민의힘 의원들이 표결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주 의원은 “본회의장에서 민주당 의원조차도 우 전 의장에게 ‘왜 표결을 빨리하지 않느냐’고 항의했다”라며 “저는 이재명 대통령(당시 민주당 대표)의 출입 시간을 맞췄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주 의원은 “(이 대통령의) 출입이 이뤄지고 나서 빠르게 (표결을) 하려다 보니까 고지 시간보다 앞당긴 것”이라며 “정말 긴급했다면 이 대통령 출입과 상관없이 신속히 의결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갑자기 (표결을) 당기다 보니까 (국민의힘 의원들이) 들어오기에 현실적으로 어려웠다”고 했다.

 

12·3 내란 당시 국민의힘 원내대표였던 추 시장은 계엄 선포 직후 의원총회 소집 장소를 ‘국회→당사→국회→당사’로 3차례 바꿔 국민의힘 의원들이 계엄 해제 의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국회의 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은 ‘재석 190명 전원 찬성’으로 통과됐는데, 국민의힘 의원은 108명 중 18명만 참여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페루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15일(현지시간) 페루 리마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윤 대통령 오른쪽은 신원식 국가안보실장. 2024.11.16 연합 자료사진

 

오는 23일로 수사 기한이 종료되는 종합특검은 이날도 기소를 이어갔다. 비상계엄 선포 직후 우방국에 계엄을 정당화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지시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윤 전 대통령과 신원식 전 국가안보실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윤 전 대통령은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로, 신 전 실장을 내란중요임무종사 및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윤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일인 2024년 12월 3일부터 다음날까지 이틀에 걸쳐 미국, 영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주요 우방국에 비상계엄을 정당화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파한 혐의를 받는다. 이에 따라 직권을 남용해 국가안보실, 외교부 등 소속 공무원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도록 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종합특검이 윤 전 대통령을 기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가 받는 재판은 다시 8개로 늘어났다. 윤 전 대통령이 기소된 사건은 이번 사건까지 아홉 건인데 한 건은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내려졌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체포방해 등 혐의 사건이 지난달 9일 대법원에서 징역 7년형이 확정됐다.

 

신 전 실장은 윤 전 대통령, 김태효 전 국가안보실 제1차장과 순차 공모해 비상계엄을 정당화하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파하도록 해 내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대외적인 지지를 확보하려 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검팀은 앞서 지난달 29일 김 전 차장을 12·3 비상계엄 선포 후 우방국에 계엄을 정당화하는 메시지를 전달한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이에 따라 특검은 "법원에 해당 재판과 김 전 차장의 재판을 병합해 심리해줄 것을 요청했다"며 "공범 3명에 대해 동일 절차에서 재판이 진행되길 바란다"고 했다.

 

종합특검은 또 김종욱 전 해양경찰청장과 안성식 전 해경 기획조정관은 각각 내란부화수행 및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김 전 청장과 안 전 조정관은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직권을 남용해 합동수사본부 해경 인원을 증원 편성하고 해경청 구금시설을 제공하려고 시도한 혐의를 받는다. 직원 1명을 합동참모본부에 정부 연락관으로 파견해 내란 행위에 부화수행했다는 혐의도 있다.

 

당시 김 전 청장은 연락관 파견을 반대하는 부하 직원의 의견을 묵살하고 "한 명이라도 파견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다만 연락관이 계엄사에 도착하기 전 해경에서 비상계엄이 해제됐다는 통보를 받아 연락관 파견을 해제했고, 연락관도 계엄사 도착 전에 복귀한 것으로 파악됐다.

 

안성식 전 조정관은 윤 전 대통령의 충암고 후배로 2023년부터 방첩사와 교류하며 계엄 합동수사본부(합수부)에 해경이 자동 편제되도록 내부 규정을 변경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인물이다. 그는 비상계엄 선포 이후 소집된 전국 지휘관 화상회의에서 파출소 청사 방호를 위한 총기 휴대 검토와 합수부 파견 인력 증원 등을 주장한 것으로 조사됐다. 회의 이후 안 전 조정관이 '계엄 사범들이 많이 올 것 같으니 유치장을 비우고 정비하라'고 지시했다는 진술도 나왔다.

 

앞서 특검팀은 지난달 3일 두 사람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범죄혐의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 임병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