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박자 느리지만 정확하게 판단하던 '좌장'


자신 앞세우지 않고 공동의 자리를 떠받쳐
늘 지금보다 다음 단계를 고민하던 정치인
남아 정리했고, 책임 졌으며, 다음을 준비
단단한 정치, 책임 미루지 않는 태도 절실

 

 

이해찬 전 총리가 영면에 들었다. 그의 죽음은 한 정치인의 생애가 끝났다는 사실을 넘어 한국 민주주의가 하나의 시대를 정리하고 다음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 그가 언제나 시대의 전면에 서 있던 인물은 아니었지만, 민주주의가 흔들릴 때마다 제도와 조직의 중심을 붙들고 버텨온 정치인이었다. 화려한 언변보다 구조를, 순간의 승리보다 지속을 선택했던 그의 정치적 태도는 한국 민주주의가 체력을 길러내는 데 깊이 기여했다.

 

나에게 이해찬은 텔레비전 속 정치인이기 이전에 같은 시공간을 통과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보다 세 살 위였다. 나이 차는 크지 않았지만, 그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는 앞에 서서 끌고 가는 타이프는 아니었지만, 방향을 먼저 잡고 그 방향이 틀어지지 않게 지켜 보는 사람이었다.

 

1980년대 중반, 나는 민통련 민족학교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그는 민족학교의 운영위원이자 강사로 활동하며 언제나 좌장의 자리를 맡았다. 강의는 한국 근현대사, 사회과학 이론, 민족주의 경제학 등을 중심으로 짜여 있었고,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비판적 사회의식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당시 민족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훗날 제13대 국회에 진출하게 되는 이른바 ‘평민당 영입파’ 재야 인사들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이 시기의 활동은 1988년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화민주당에 그가 영입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민통련과 민족학교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치밀한 전략가’라는 평가를 안겨주었고, 그 뒤 정책과 선거 전략에 능한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당시 민족학교와 민통련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도 훗날 민주당 계열의 핵심 인적 자원으로 자리 잡았다.

 

그 시절, 내가 만난 이해찬은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고, 토론을 장악하려 들지도 않았다. 다만 토론이 감정으로 흐르거나, 각자의 옳음이 충돌하며 자칫 싸움으로 번질 때면, 짧고 단정한 말로 흐름을 정리했다. “그건 지금의 쟁점이 아닙니다.” “그건 판단 이전에 감정의 문제입니다.”

 

당시 대정부 투쟁에 대해서는 “나는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패배주의를 제일 싫어합니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말은 길지 않았지만, 그가 입을 열면 방 안의 공기는 다시 가라앉았다. 열정이 넘치던 시절, 그는 언제나 한 박자 느리게, 그러나 정확하게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토론이 길어지고 술자리가 이어지던 날들도 많았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면 계산이 문제였다. 그럴 때 그는 말 없이 지갑을 꺼냈다. 누가 보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고, 그것을 미덕처럼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때 책임을 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태도였다. 지금 돌아보면, 그의 정치적 태도는 이미 그 사소한 장면들 속에 응축되어 있었다. 자신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공동의 자리가 무너지지 않게 떠받치는 태도였다.

 

나무위키

 

그 무렵 이해찬은 서울대 인근 신림동 고시촌에서 ‘광장서적’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회과학 서적이 빼곡히 꽂힌 그 공간은 단순한 서점이 아니었다. 학생운동권의 사유가 모이고 토론이 축적되던 장소였고, 시대의 질문들이 오가던 작은 공론장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책을 사고, 논쟁을 벌이고,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거리의 집회만큼이나 그런 일상의 공간을 중요하게 여겼다. 민주주의는 광장에서 분출될 수 있지만, 결국 이런 공간들을 통해 사유로 축적되고 제도로 이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분명했다.

 

이해찬의 정치 인생은 군사독재 말기에서 시작해 민주화 이후의 제도화 과정, 그리고 촛불 이후의 정치 재편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거의 빠짐없이 관통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단번에 완성될 수 있는 체제로 보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조정, 때로는 후퇴를 거치며 축적되는 과정이라는 인식이 그의 정치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늘 ‘지금’보다 ‘다음 단계’를 고민하는 정치인이었다.

 

그가 한국 민주주의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제도의 안정화였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는 거리의 열정과 도덕적 정당성에 비해 제도적 완성도가 충분히 따라오지 못하는 불균형을 안고 있었다. 이해찬은 이 간극을 메우는 데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집중했다. 그는 선거에서 이기는 정치보다, 이긴 이후에도 민주주의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정치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이 신념은 그의 입법 활동과 행정부 운영, 정당 조직 관리 전반에 일관되게 드러났다.

 

2019년 열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10주기 추모 사진전'에서 추모사를 하는 이해찬 전 총리. 연합 자료사진
 

총리 재임 시절에도 그는 행정의 안정성과 정책의 지속성을 중시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기보다 이미 작동하고 있는 제도를 점검하고 조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급진적 변화를 기대하던 이들에게는 답답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성숙한 선택이었다. 제도는 개인의 의지로만 움직이지 않으며, 사회적 합의와 행정적 역량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힘을 갖는다. 그는 이 점을 누구보다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정당 정치에서도 그의 역할은 분명했다. 이해찬은 정당을 단순한 선거 기계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핵심 제도로 보았다. 계파 갈등과 내부 분열이 반복되는 상황에도 그는 조직이 붕괴되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데 주력했다. 때로는 강단 있는 결정을 내렸고, 때로는 조정과 중재를 통해 갈등을 관리했다. 그 과정에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정당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그가 맡았던 역할은 ‘패배의 시간’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민주주의는 승리의 순간보다 패배 이후에 더 혹독한 시험에 든다. 선거에서 지고, 여론이 등을 돌리고, 내부가 흔들릴 때 정당과 정치인은 쉽게 무너진다. 이해찬은 바로 그 순간에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남아서 정리했고, 책임을 졌으며, 다음을 준비했다. 개인의 정치적 이해만 놓고 보면 손해에 가까운 선택이었지만, 민주주의 관점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역할이었다.

 

물론 그의 정치가 언제나 옳았던 것은 아니다. 그의 판단과 결정에 대해 지금도 평가가 엇갈리는 지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민주주의의 규칙을 벗어나 문제를 해결하려 한 적은 없다는 점이다. 위기의 순간에도 그는 제도 안에서 해법을 찾으려 했고, 그 과정에 발생하는 정치적 비용을 감수했다. 이는 민주주의 정치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태도이지만, 실제 정치 현실에서 이를 끝까지 지켜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1985년 민통련 민족학교 시절의 이해찬. 박용수 사진작가
 

이해찬의 삶이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민주주의는 영웅에 의해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름이 크게 남지 않는 수많은 관리와 조정, 책임의 축적 위에서 유지된다. 그는 그 조용한 노동을 기꺼이 맡았던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때로 과소평가되었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한국 민주주의의 제도와 구조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이제 그가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태도와 기준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국 민주주의는 여전히 미완이며,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럴수록 우리는 이해찬이 보여주었던 느리지만 단단한 정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를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가 평생 지키려 했던 민주주의가 다음 세대의 손에서 더욱 성숙해지기를 바라며, 그가 앞서 걸어간 그 자리를 조용히 기억한다.

 

고인이 마지막 가시는 길, 그를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졸시 한 편을 남긴다. 그가 무척 그리울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이

한 시대의 무게를 대신

짊어질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말이 아니라

시간으로 증명했다

 

앞으로 나서기보다

흐름을 세우고

부서지기 쉬운 제도 곁에

묵묵히 서 있던 사람

 

열광의 순간보다

패배의 저녁을 지켰고

박수보다

책임의 언어를 선택했다

 

당신이 남긴 것은

이름이 아니라

규칙이었고

목소리가 아니라

버팀목이었다

 

이제 그 긴 호흡을 내려놓고

역사의 깊은 자리에서

편히 쉬소서

 

당신이 지켜온 중심은

이제 남은 이들의 몫으로

조용히 이어질 것이오

 

-박철 '민주주의 표상, 이해찬의 생애를 기리며'                    < 박철 기자 >

 

당신의 혜안 더 필요할 때 홀연히 떠나셨네요

 

한 정치부 기자가 회고하는 이해찬 전 총리
DJ와 맞짱 토론, 비판적 직언 서슴지 않아
노무현 진가 알아보고 이재명엔 방패 역할
플랫폼 정당 전환 · 시스템 공천 도입 업적

 

이해찬 전 총리가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토록 갑작스러운 이별이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비보를 접하는 순간, 그분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는 험난했던 민주화 투쟁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민주개혁 진영이 낳은 최고의 전략가였습니다.

 

대학 시절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온몸을 던졌던 그에게, 두 차례의 옥고는 피할 수 없는 시련이었습니다. 1980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5.18 내란 당시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투옥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탄압에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재야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뒤, 1987년 시민항쟁 때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상임집행위원을 맡아 항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격동의 과정에서 다양한 논의가 분출하고 충돌하는 국면에서도, 그는 냉철한 시선으로 해법을 찾아내곤 했습니다.

 

한겨레신문 정치부 기자 시절, 저는 옛 민주당을 출입하며 그를 거의 매일 당사에서 뵈었습니다.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민주당에서 이해찬 전 총리는 당내에서 단연코 능력을 인정받은 유망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당내에서 김대중 총재와 각종 정국 현안을 놓고 맞장 토론을 펼칠 수 있는 단 한 사람. 비판적 직언도 서슴지 않던 그에게 김대중 총재는 때로 언짢아했지만 그의 높은 식견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김대중 총재의 2선 후퇴를 주장하는 정풍운동에 앞장섰을 때, 김 총재는 이해찬 전 총리의 공천 배제를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뛰어난 능력을 지닌 그를 배제하는 것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김 총재는 결국 그 결정을 철회했습니다.

 

2016년, 김종인 씨가 민주당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의 총괄선대본부장으로 추대된 후, 이해찬 전 총리는 총선 공천에서 컷오프되어 탈락했습니다. 현재 민주당 당대표인 정청래 의원도 함께 컷오프됐습니다. 김종인 씨는 뚜렷한 근거도 없이 '정무적 판단'이라는 말로 이해찬을 공천에서 배제했습니다. 아마도 이는 1988년 13대 총선 당시의 악연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러나 그는 세종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낙승을 거둔 뒤 민주당에 복당해서 대표에 당선돼 민주당의 현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노태우 정권 청와대 경제수석 출신의 거물 정치인이었던 김종인은, 운동권 출신 정치 초년생에 불과했던 평민당 후보 이해찬에게 관악구에서 패배했습니다. 언론이 김종인의 낙승을 예상했던 그 선거에서 이해찬은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는 당시 크게 회자되었습니다.

 

훗날 이해찬 전 총리가 들려준 일화가 있습니다. 개표 도중 민정당 후보였던 김종인의 무더기 표가 쏟아져 나와 개표가 중단되었다고 합니다. 평민당 선거운동원들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개표장이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 그는 운동원들을 차분히 설득한 뒤 선관위에 개표 속개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당시 김종인을 5% 이상 앞서고 있었기에, 문제의 표를 인정하더라도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만약 부정선거 의혹 제기로 개표가 장시간 중단된다면, 오히려 민정당 측에서 진짜 개표 부정을 자행해 당락을 뒤집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군사독재의 잔재가 여전히 강고했고, 안기부와 경찰 같은 권력기관들이 부정선거를 서슴지 않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이 에피소드는 이해찬 전 총리의 재빠른 상황 판단력과 전략적 사고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또한 그는 민주운동권 출신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노무현 대통령의 진가를 일찌감치 알아본 정치인이었습니다. 재야 출신 인사들 대부분이 민주화투쟁 경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노무현을 정치 지도자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그는 이미 노무현을 진정한 지도자로 인정하고 그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당시 노무현을 지도자로 인정한 이는 이해찬과 유시민,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다소 괴퍅할 정도로 까칠했던 성정의 소유자였던 그였지만, 사람을 보는 눈만큼은 누구보다 예리했습니다.

 

 

그의 혜안은 이재명 대표를 대통령감으로 일찍이 주목했고, 정치권에서 뚜렷한 기반이 없었던 이재명 대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자 방패가 되어주었습니다. 민주당 내 일각에서 이재명 대표를 제거하려 온갖 패악질을 자행할 때도, 이해찬 전 총리는 흔들림 없는 멘토이자 후원자였습니다.

 

이해찬 전 총리는 민주당을 인터넷 기반의 플랫폼 정당으로 변모시킨 장본인이었습니다. 당 대표 시절이었던 2018년, 그는 웹 기반의 당원 플랫폼을 구축하여 당원 전용 온라인 시스템 및 투표 기능을 도입했습니다. 그 결과 민주당의 당원 가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명실상부한 당원정당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스템 공천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총선 1년 전까지 공천 룰을 확정하여 공개하고, 그 룰에 따라 전 지구당을 동일한 기준으로 심사한 뒤 경선을 거쳐 공천자를 확정하는 제도였습니다.

 

이처럼 이해찬 전 총리는 민주당을 초현대식 민주정당으로 변모시킴으로써, 180석의 거대정당으로 비약할 수 있는 굳건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내란 척결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시점에 이해찬 전 총리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깝고 가슴이 먹먹합니다. 문재인 정부 초기, 민주 진영의 20년 장기 집권 플랜을 주창했던 그의 전략적 혜안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지금, 그가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빈자리가 얼마나 클지는 가늠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이해찬 전 총리님, 이제 그 무거운 짐 내려놓으시고 부디 편히 쉬시기를 기원합니다.

                                                                                                            < 장정수 기자 >

 

이해찬의 때 이른 죽음, 결국 고문 후유증 때문이었나

 

"하도 맞아서 죽었구나 소문도" 회고록에 언급
"고춧가루 고문…연탄집게로 눈깔 뺀다 들이대"
"아침에 불려 나갔다 오후에 시체처럼 돌아와"

"고문당한 사람을 보는 게 더 큰 심리적 고통"
"동지와 인간에 대한 믿음 없었다면 못 견뎌"
김근태·김홍일 별세 때 "고문 후유증" 깊은 애도

본인도 점차 말투 어눌해지고 몸 둔화, 손 떨어
당대표 때 닷새간 입원…곧바로 선거운동 진력
정치 일선 은퇴 뒤 지팡이나 부축에 의지 거동

이해찬 죽음 계기로 "피해자 전수조사" 목소리

 

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5일 베트남에서 치료 중 별세했다고 민주평통이 밝혔다. 향년 73세. 사진은 1988년 3월 31일 제13대 총선에 출마한 관악구 이해찬 후보의 유세. 2026.1.25. 연합 자료사진
 

• 1974~1975 :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투옥, 안양교도소와 대전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 1980~1982 : 80년, 복학과 함께 복학생협의회장을 맡았다. 5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배 중 연행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10년형을 선고받고 육군교도소, 안동교도소, 춘천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2022년 9월 돌베개에서 출간된 <이해찬 회고록> 중 맨 뒷부분 연보(年譜)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는 이처럼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기 민주화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분투하다 당국에 체포돼 혹독한 구타와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곤 했다.

지난 25일, 그가 너무 이른 나이인 73세에 심근경색으로 타계하자 열악한 수감 생활을 동반한 그 시절 고문 피해의 후유증이 결국 건강과 수명에 악영향을 미친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이 전 총리는 생전에 자신이 고문당했던 일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경우가 드물지만 회고록에서는 당시 상황이나 소회를 비교적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대담자인 민주당 최민희 의원이 "대표님은 고문당한 얘기를 전혀 하지 않으셨어요. 물론 고문이나 가혹행위를 당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관련 얘기를 안 하는 게 금기이긴 하지만 용기를 내어 여쭙니다. 수사받는 동안에도 가혹행위를 당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2022년 9월 돌베개에서 출간된 '이해찬 회고록'
 

"그때 내가 고생을 좀 했어. 처음으로 고춧가루 고문도 당하고. 나중에 누가 그러는데 내가 죽은 줄 알았대요. 하도 맞아서. 아이고, 이해찬이 죽었구나 그렇게 흉하게 소문이 나고 그랬대. 학생들이 많이 잡혀 왔는데 문리대가 제일 많았고 의대생들도 많았어요. 성균관대에서도 잡혀 오고. 동대문경찰서 관할은 다 잡혀 왔어. 그중에서 나는 주모자급이 돼 있었어요. (…)

 

나는 수사 끝나고 유치장으로 넘어가서도 매일 불려 가서 고문당하고 맞았어요. 수배자들 행적을 대라고. 근데 나는 진짜 몰랐거든. 내가 알면 대겠는데 정말 모른다, 그랬지. 그때가 초봄이어서 쌀쌀했어요. 연탄난로를 때고 있었는데 연탄집게를 빼 가지고 이놈의 새끼 눈깔을 뺀다고 들이대는 거야. 그 순간은 진짜 공포스러웠어요. 일주일을 그렇게 아침에 불려 나갔다 오후에 시체처럼 돌아오니 저러다 죽는 거 아니냐고 그랬던 거예요.

 

영장이 떨어지고도 구치소로 보내 주지 않아서 7월까지 유치장에 있었어요. 하도 많이 잡아들여서 구치소에 방이 없었던 거야. 나처럼 캠퍼스 행동대 역할을 한 정도에게 내줄 독방도 없고. 유치장에는 쥐가 왔다 갔다 하고 빈대는 너무 많았어. 밥은 꽁보리밥에 단무지. 처음에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는데 배가 고프니까 어떻게 해. 먹는 거지."

 

다음과 같은 회상들도 그의 심신에 인장처럼 깊이 새겨졌던 고문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동지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못 견뎠을 거야. 언제든 잡혀가고, 구속되고, 죽을 수도 있는데…. 얼마 전에 사위랑 얘기하다가 내가 고문받은 얘기가 나왔어요. 우리 손자가 옆에서 듣고 깜짝 놀라서는 할아버지를 고문했다고요? 아이고 무서워라, 하더라고. 역사 유튜브 같은 걸 보면서 독립운동가들이 고문당한 얘기를 들었대요. 그런데 할아버지도 당했다고 하니 놀란 거야.

 

70, 80년대를 돌아보면 다들 목숨을 내걸고 싸웠어요. 험난한 과정에서도 동지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살았고. 민주화 세력이 그런 혹독한 시기를 같이 이겨 냈다는 점에서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아요."

 

"자료를 보기가 싫었어요. 지나간 일들을 다시 보려고 하니까 정글로 들어가는 거 같아. 쭉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구만. 아이고, 어떻게 용케 살아왔다. 대담 준비를 하면서 가끔 꿈을 꿨어요. 보안사(현 방첩사)에 잡혀가는 꿈, 안 잡혀가려고 싸우고 그런 꿈을 꿨어요. 가위 눌리는 거지.

 

예전에 고문당할 때도 막연히 느꼈지만, 고문당한 사람을 보는 게 더 충격이 큰 것 같아요. 문리대 친구들이 고문당한 나를 보고 죽었다고 생각했대. 고문이 심리적으로도 큰 고통을 남기는 거야. 나하고 같이 다녔다고 소문이 잘못 난 친구가 잡혀가서 고문을 당한 일이 있었어요. 이번에 그 일도 꿈을 꿨어."

 

2011년 12월 30일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별세했다. 이날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에서 이해찬 전 총리가 조문하고 있다. 2011.12.30. 연합
 

그와 마찬가지로 고문 피해자였던 김근태 전 의원과 김홍일 전 의원이 그 후유증으로 큰 고통을 겪다 별세했을 때 이 전 총리는 동병상련과 함께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김근태 전 의원은 2011년 11월 29일 뇌정맥혈전증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다 2차 합병증이 겹치면서 패혈증으로 한 달 만에 숨을 거뒀고(향년 64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은 파킨슨병을 앓다 2019년 4월 20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쓰러져 신촌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향년 71세).

 

"김근태 고문과는 70년대 학생운동 때부터 40년 동안 같이해오며 경찰과 싸우고 감옥 갔던 그런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특히 종로 파고다 공원에서 참 많이 싸웠던 것 같아요. 김 고문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너무 심하게 받아 가을 찬바람만 불면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어왔어요. 해가 갈수록 심해졌는데 아마도 금년이 한계인 것 같습니다. 아직 한창 활동할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이런 상황을 맞아 안타깝습니다." (2011년 12월 29일 김근태 전 의원이 의식 불명 상태로 입원해 있던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을 나오며.)

 

"김홍일 전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이기도 했지만, 정치적 동지이자 독재정권에 맞서 온몸을 바친 민주화 운동의 투사였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 독재정권의 조작 사건으로 가혹한 고문과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평생 후유증에 시달리셨습니다. 저와 함께 정치를 30년 가까이 해오면서 김홍일 전 의원은 굉장히 따뜻하고 폭이 넓은 정치인이었습니다. 유명을 달리한 것을, 다시 한 번 고인의 숭고한 뜻을 기리면서 영면을 기원합니다." (2019년 4월 22일 더불어민주당 대표로서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며.)

 

이 전 총리는 본래 말투가 또박또박 명료했으나 2010년대 들어 말이 어눌해지거나 자주 끊기고 몸놀림이 둔화되며 손을 떠는 증상을 나타내곤 했다. 항간에 파킨슨병 투병설까지 떠돌자 이를 묻는 기자에게 "별소리가 다 나온다. 일부 언론의 과장 보도"라고 일축하기도 했지만 건강은 점차 악화되는 것으로 보였다.

 

2020년 3월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에는 총선을 코앞에 두고 과로 등에 따른 건강 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해 닷새나 머물렀다. "당원들께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갑자기 몸이 나빠져서 병원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고 오히려 미안해한 그는 퇴원하자마자 곧바로 4·15 총선 선거운동에 뛰어들어 또 몸을 돌보지 않았다. 정치 일선에서 은퇴한 뒤에도 간간이 강연과 축사 등 외부 일정을 소화하긴 했지만 지팡이를 짚거나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고 걸음을 옮겨야 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5일 베트남에서 치료 중 별세했다고 민주평통이 밝혔다. 향년 73세. 사진은 2024년 11월 13일 국회에서 당시 이해찬 상임고문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함께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출범식에 참석하는 모습. 2026.1.25. 연합 자료사진
 

이 전 총리가 베트남 호찌민에서 열린 민주평통 아태지역회의 운영위원회 참석차 출장을 떠났다가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으로 병원에 이송된 뒤 25일 끝내 세상을 떠나자 이를 계기로 과거 고문 정권 및 그 하수인과 부역자들을 향한 분노를 표시하는 한편, 피해자들에 대한 온전한 치유와 전수조사 등을 위해 우리 사회와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전우용 역사학자는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김홍일, 김근태, 이해찬 등 젊은 시절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분들의 만년(晩年) 모습은 대체로 비슷했다"며 "저분들에게 고문을 지시했던 자들과, 저분들을 직접 고문했던 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 할까?"라고 개탄했다.

 

이어 "고문을 지시하고, 고문을 실행하고, 고문당한 사람을 기소하고, 고문당한 사람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던 자들 중 스스로 '양심고백'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민주화 운동'이 곧 '양심 회복 운동'이었기에,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서 "이해찬 선생님, '양심 없는 자들'은 갈 수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도 "고문이란 조작된 진술을 얻기 위해 수사·정보기관이 극한의 고통,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고통과 공포감을 가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고문 앞에 장사 없다'는 것이고, 오죽하면 민주화 운동의 핵심 구호가 '고문 없는 나라에 살고 싶다'는 것이었겠는가"라며 "(김근태·이해찬) 두 분 다 직접 사인은 있겠지만 고문 후유증의 증상을 겪고 있었고 수명 단축에까지 악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누구는 민주화 운동으로 영예를 받아 누린 것처럼 논란을 벌이지만, 민주화 운동 자체가 혹독한 고문과 옥살이를 동반한 엄청난 고난의 길이었음을 가끔 잊고 있다. 이번 기회에 고문의 실체를 세세하게 조사하고, 치료도 하고, 그럼으로써 개인적 고난의 무게도 이해하고, 독재 권력이 사람들에게 무슨 악행을 했던가도 생생하게 드러냈으면 한다"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도 그런 방면에 노력을 더 기울일 필요가 있다. 민주유공자법도 그런 바탕 위에서 제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승종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세간에서는 이해찬 전 총리가 평생 짊어지고 온 고문의 후유증이 그의 생을 앞당겼으리라 짐작한다. 한 개인의 강인한 의지로도 끝내 이겨낼 수 없었던 생물학적 파괴, 그것이 바로 독재가 남긴 잔인한 유산"이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겪었을 육체적·정신적 고통은 이제 개인의 서사를 넘어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나아가 "이제 국가가 나서야 할 때다. 이해찬 전 총리의 죽음을 단순히 한 정치인의 퇴장이 아닌, 고문 피해 세대의 마지막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고문의 후유증을 총체적으로 조사하고, 생존해 있는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의료 지원과 심리 치유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최소한의 도리다. 전수조사를 통해 숨겨진 눈물을 닦아주고 고문이라는 야만의 역사를 종결짓는 것만이 역사의 이름으로 정의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김호경 기자 >

 

“약자 고통 치유하려던 큰 스승”…이해찬 전 총리 빈소 조문 시작

우원식·김민석·정청래 등 빈소 찾아

 

2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고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다. 공동취재 사진
 

베트남 출장 중 별세한 고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 수석부의장(전 국무총리)의 기관·사회장이 시작됐다. 조문에 나선 동료 정치인과 지인들은 미소 띤 이 부의장 생전 모습이 담긴 영정 앞에서 입을 굳게 다문 채 눈시울을 붉혔다.

 

고 이해찬 수석부의장의 영정과 주검을 실은 운구 차량은 27일 아침 9시께 양 옆으로 도열한 의장대와 정치인들 의전 속에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전날 밤 11시50분(현지시각) 베트남 현지를 출발한 지 한 나절여만이다. 베트남 출장 도중 호흡이 약해지는 증상이 나타나 응급실로 이송된 이 전 부의장은 베트남 호치민의 한 병원에서 지난 25일 끝내 목숨을 잃었다. 향년 73살.

 

동료이자 선배, 스승이이었던 정치인을 잃은 정치권 인사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영정과 유가족 앞에 고개를 숙였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산 증인이고 민주 정부를 만드는 데 역대 정권에 큰 기여를 하신 분이다. 무엇보다도 힘들고 아픈 사람이 있으면 먼저 나서서 그분들의 고통을 치유하려고 했던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라고 고인을 기렸다. 이어 “그분이 뜻했던 나라를 제대로 세우고 힘이 약한 사람들을 제대로 보호하는 정치, 그 뜻을 잘 이어가야 되겠다 하는 생각으로 오늘 조문을 했다”고 했다.

 

김민석 국무총리, 우원식 국회의장,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2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빈소를 조문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날 아침 빈소에는 김민석 국무총리와 정청래 민주당 대표를 비롯해 민주당 소속 정치인 50여명이 이 부의장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영정 한 쪽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이 전한 화환이 놓였다. 김 총리와 정 대표는 상주의 자리에서 함께 조문객을 맞기도 했다.

 

서영교 민주당 의원은 “청천벽력 같은 비보 였다. 아직 총리님을 보내드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애통함을 전하며, “남북평화, 남북통일을 위해 애쓰기 위해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을 맡으셨는데, 우리들이 이어서 남북평화와 통일을 이어가야 겠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문정복 민주당 최고위원도 “건강이 안 좋으셨는데 공직을 맡아 최선을 다해 수행하다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당에서 애도기간을 설정했고, 온 당원이 한마음이 돼서 추모하는 절차를 마련했다”고 했다.

 

이 부의장 장례는 이날부터 31일까지 더불어민주당과 민주평통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기관·사회장으로 치러진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상임 장례위원장을 맡고, 시민사회 및 정당 상임공동 장례위원장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정청래 민주당 대표가 맡았다. 이날 오후부터 일반 시민도 이 부의장 빈소에 조문할 수 있다.                                 < 김수연 기자 >

 

이해찬 향한 각별한 예우…베트남 정부 “고향서 돌아가셨다 여겨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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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 페이스북 갈무리
 

25일 타계한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의 주검이 27일 오전 국내로 운구된 가운데, 베트남 호찌민시 현지에서 관련 절차를 밟은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귀국 과정을 전했다.

 

이해식 민주당 의원은 27일 새벽 페이스북에 ‘이해찬 전 대표님과 함께 귀국한다’는 제목의 글을 올려 “호찌민시 떤선녓 국제공항 카고 터미널에서 관포식이 거행됐다. 대표님이 누워계신 관에 대형 태극기가 펼쳐져 덮였을 때 다시 콧등이 시큰해졌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주인공 동호가 ‘왜 관에 태극기를 덮냐’고 궁금해했다는 대목이 떠올랐다. 1980년의 태극기와 오늘의 태극기가 겹쳐 보였다”고 했다.

 

이 의원은 고인이 생전에 쌀국수와 호찌민을 좋아했다고 전하며 “(부인인) 김정옥 사모님은 ‘가족들과 의원들, 정부 관계자들을 호찌민시까지 불러들여 쌀국수를 맛보게 하고 호찌민 시내 구경을 시켰다’며 애써 웃음을 보였다”고 밝혔다.

 

이 의원은 “베트남 정부는 대표님 가시는 길에 각별한 호의를 베풀었다”며 “우리의 시장 격인 호찌민시 인민위원장은 어제 병원으로, 부위원장은 오늘 법의학센터로 각각 방문해 가족을 위로하고 의원단을 만났다”고 말했다.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 페이스북 갈무리

 

이 의원은 호찌민 떤선녓 국제공항 의전실로 찾아온 응우옌 밍 부 베트남 외교부 수석 차관의 말도 전했다. “베트남도 유교 전통을 가진 나라로서 집안이든 나라든 큰 어른이 돌아가시면 그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잘 안다. 한국과 베트남의 돈독한 관계를 고려한다면 타국에서 돌아가신 게 아니라 고향이나 진배없는 곳에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해달라.”

 

베트남에서 함께한 김영배 민주당 의원 역시 “베트남 정부의 배려와 정성을 잊지 않겠다”며 이날 페이스북에 현지 사진을 여러 장 올렸다. 사진 속에서 고인의 부인인 김정옥씨와 대통령 정무특별보좌관인 조정식 민주당 의원 등이 태극기로 덮인 관에 손을 대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전날 팜 투 항 베트남 외교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지난 며칠 동안 호찌민시 인민위원회, 관계 기관과 협력해 이 수석부의장에게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며 팜 민 찐 총리 등 베트남 지도부가 한국 정부와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고인은 대한항공 KE476편을 통해 이날 오전 6시53분께 인천공항으로 운구됐으며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차려진다.                                                    < 송경화 기자 >

 “신규 원전 33,34호기 이르면 2037년 준공”…공론화 한달도 안 돼 졸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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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울주군에 위치한 새울 3, 4호기 공사현장 전경.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정부가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11차 전기본)에 포함된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공론화 절차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일사천리’로 이 같은 결정을 내려, 시민·환경단체들의 반발이 거세질 전망이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2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두 차례 정책토론회(12월30일, 1월7일)와 국민 여론조사(1월21일 발표)를 거친 결과, 11차 전기본에 반영된 신규원전 계획이 추진돼야 한다는 답변이 60% 이상이었다”며 원전 건설 추진 계획을 밝혔다. 윤석열 정부 때 수립된 11차 전기본은 2038년까지 대형 원전 2기와 소형모듈원전(SMR) 3기 규모(700MW급)의 신규 원전을 추가하기로 했으나, 재생에너지 ‘전환’을 공약했던 이재명 정부는 이에 대해 공론화 절차를 밟겠다고 했었다.

 

이날 김 장관은 “기후대응을 위해 전 분야에서 탄소배출을 감축해야 한다. 특히 전력 분야의 탄소감축을 위해 석탄·가스(LNG) 발전을 줄일 필요가 있어서 재생에너지와 원전 중심의 전력 운영이 필요하다”며 신규 원전 건설을 추진하는 배경을 설명했다.

 

정부는 향후 부지 공모 작업 등 본격적인 원전 건설 절차를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원전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은 조만간 부지공모를 시작하고 약 5~6개월간의 부지평가·선정 과정을 거친 뒤 2030년 이후 건설허가 획득, 이르면 2037년 준공을 목표로 관련 절차를 추진한다. 11차 전기본에 포함된 신규 대형 원전 2기는 국내에 들어설 33, 34번째 원전이다.

 

다만 신규 원전 건설을 둘러싸고 시민·환경단체들의 반발도 거세질 전망이다. 정부가 진행한 공론화 기간이 한 달여에 불과했을 뿐 아니라 충분한 논의가 진행되지 못했다는 인식이 크기 때문이다. 환경운동연합과 에너지전환포럼, 에너지정의행동 등은 최근 성명을 통해 “한국 전력 시스템에 신규 원전이 진짜 필요한지, 원전을 지을 부지가 있는지, 재생에너지와 공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실질적인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며 “정해진 결론(원전 건설)을 정당화하려는 호감도 조사를 ‘국민의 뜻’과 공론화로 포장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 옥기원 기자 >

 

신규 원전 찬성 60%대지만…“정부, 결론 정해놓고 공론화” 비판

이재명 대통령 기자회견서 재차 ‘불가피’ 피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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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울주군에 새울 3·4호기 원전이 건설 중이다. 새울 3호기는 지난달 말 원자력안전위원회로부터 운영허가를 받았고, 새울 4호기는 올해 말∼내년 초 준공이 목표다. 한국수력원자력 제공
 

국민 다수가 미래 에너지 정책에서 재생에너지 확대가 가장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신규 원전(핵발전) 건설에는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이처럼 ‘재생에너지와 원전을 동시에 늘리자’는 식의 결론이 뻔한 여론조사를 실시한 데 대해, 안전사고 및 핵폐기물 문제 등 미래세대 부담이 큰 신규 원전 건설을 합리화하기 위해 형식적인 공론화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기후에너지환경부(기후부)는 21일 두 기관(한국갤럽·리얼미터)이 각각 1500여명 대상으로 실시한 ‘미래 에너지에 대한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정부는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에 포함된 신규 원전(대형 원전 2기, 소형모듈원전 1기) 건설 계획을 계속 추진할지를 두고 공론화 절차를 진행하고 있는데, 두 차례 정책토론회를 연 데 이어 실시한 여론조사다.

 

조사 결과, 응답자들은 앞으로 ‘확대 필요한 발전원’으로 재생에너지(한국갤럽 48.9%, 리얼미터 43.1%)를 가장 많이 꼽았다. 확대가 필요한 이유로는 ‘친환경’(한국갤럽 32.4%, 리얼미터 33.4%), ‘미래세대’(한국갤럽 25.6%, 리얼미터 20.1%), ‘안정적’(한국갤럽 15.9%, 리얼미터 22.1%) 등이 꼽혔다.

 

이처럼 재생에너지를 가장 선호하는 여론이 높은데도, ‘원자력 발전이 필요하다’는 의견 역시 80%대에 달할 정도로 높게 나타났다. 한국갤럽 조사에선 89.5%, 리얼미터 조사에선 82%의 응답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원자력 발전은 안전하다’는 의견도 60%대(한국갤럽 60.1%, 리얼미터 60.5%)로 나타났다. 11차 전기본에 포함된 신규 원전 계획을 ‘추진해야 한다’는 응답도 60%대(한국갤럽 69.6%, 리얼미터 61.9%)로 높게 나타났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지난달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바람직한 에너지믹스 1차 정책토론회’에 참석해 여는 발언을 하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 제공
 

전날 국무회의에서 “국민의 압도적 원전 찬성 여론”을 언급했던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사실상 신규 원전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뜻을 연이틀 내비쳤다. 이날 이 대통령은 전날 자신의 발언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할지 최종 결정이 남았으니 공론화도 거치고 의견 수렴도 하고 논쟁도 열어놓고 하자”는 것이 자신의 뜻이라면서도, “미래 엄청난 에너지 수요가 있는데 재생에너지는 간헐성 문제가 있다”, “국가 계획도 확정됐는데 정권 바뀐다고 마구 뒤집으면 예측 가능성이 떨어져서 경영 주체의 판단에 장애를 주는 측면이 있다”, “국제적으로 원전 수출이 중요한 과제이기도 하고, 시장도 엄청나게 사실 늘어나고 있다”는 등 신규 원전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발언을 주로 내놨다. “이것(신규 원전 건설) 때문에 불편하거나 불만 있는 국민들, 특히 원천적 입장을 가지신 분들”이 있다며 “그 점도 고려해야겠다”고도 말했다.

 

이에 대해 시민사회에서는 정부가 결론을 미리 정해두고 형식적인 절차를 밟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정부가 신규 원전이 실제로 필요한지 과학적·기술적 검증은 하지 않고 국민 여론 뒤에 숨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정책위원은 “정부가 진짜 미래세대를 위한다면 원전 30기(건설 중 포함)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신규 2기를 더 지을 필요가 있는지, 짓는다면 해당 원전을 어디에 둘지, 늘어나는 핵폐기물 처리는 어떻게 할지를 먼저 치열하게 고민했어야 한다”면서 “이런 부분을 모두 무시하고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인기투표를 하는 식으로 여론조사 결과 뒤에 숨는 정책 추진은 미래 부담만 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여론조사는 결과가 이미 예측 가능할 정도로 무의미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간 정부 기관, 환경단체 등에서 실시한 조사에서 ‘재생에너지 선호도가 가장 높다’, ‘인공지능 시대 전력 수급을 위해 원전이 필요하다’ 등의 여론은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기 때문이다. 기후솔루션이 지난해 6월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조사 결과에선 응답자 92.6%가 재생에너지의 전반적 확대에 찬성한다고 답했고, 한국에너지정보문화재단의 2024년 ‘에너지 국민인식조사’에선 81.9%가 원전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김현우 탈성과대안연구소장은 “앞서 두 차례 형식적인 토론회와 답이 정해진 여론조사 절차로 신규 원전 건설을 합리화하려는 계획을 국민 숙의를 모은 공론화로 포장해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

 

이날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여론조사는 공론화 절차 중 하나로, 앞으로 전문가 의견 수렴 등도 거친 뒤 신규 원전 건설 추진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옥기원 고경주 기자 >

 

AI 전력 수요 많아 원전 건설해야 한다고?

 

위험천만한 핵발전의 정치화 "비효율"

더 크고 많은 데이터 센터가 아니라
현장과 로봇 등 기기 내부로 옮겨져
신규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투입될 비용
효율 향상, 수요 관리 쓰는 것이 합리적

                                                         이정윤 '원자력 안전과 미래' 대표

 

최근 인공지능(AI)을 이유로 신규 원전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반복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폭증하고 있으며, 이를 감당하려면 24시간 안정적인 기저전원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신규 원전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김용범 정책실장의 발언 이후, 시간축이 맞지 않는다고 문제를 제기했던 대통령의 입장도 다소의 변화가 감지된다. 여기에 원전에 우호적인 여론조사 결과까지 더해지며, 원전 확대는 마치 ‘피할 수 없는 선택’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원전 확대론자들 주장과 반대 방향으로 발전하는 AI 산업

 

겉으로 보면 합리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 주장은 AI 기술이 실제로 어떤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채, 원전이라는 결론을 먼저 정해 놓고 미래를 단순화한 정책 판단에 가깝다. AI 전력 수요를 이유로 한 원전 확대는, 기술의 진화를 감안하지 않고 가정할 때만 성립하는, 기술 진화 이전의 전제 위에 세워진 정책으로 볼 수 있다.

 

AI 확산으로 전력 수요가 증가할 가능성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증가하느냐다. 현재의 전력 수요 전망과 원전 확대 논리는 AI가 곧 대규모 중앙집중형 데이터센터이며, 이런 구조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가정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은 이미 현실에서 흔들리고 있다.

 

AI 산업의 실제 방향은 ‘더 크고 더 많은 데이터센터’가 아니라 더 작고 더 가까운 AI로 이동하고 있다. 로봇, 자율주행, 스마트팩토리, 의료기기, 산업 제어와 같은 분야에서는 AI 연산을 원거리 데이터센터로 보내는 방식이 비용·지연·에너지 측면에서 한계에 도달했다. 그 결과 AI의 핵심 기능인 ‘추론'(Inference)은 중앙 서버가 아니라 현장과 기기 내부에서 수행되는 구조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는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산업 현장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해외 매체들은 현대차그룹과 로봇 전문 계열사 보스턴다이내믹스가 최근 'CES 2026'에서 공개한 피지컬 AI 비전과 로봇 기술 경쟁력에 잇달아 좋은 평가를 내렸다고 현대자동차 그룹이 지난 18일 전했다. 사진은 CES 2026 현대차그룹 전시관에서 아틀라스가 자동차 부품을 옮기는 작업을 시연하는 모습. (현대자동차·기아 제공)

 

물론 초대형 ‘학습'(Training)용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는 일정 부분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AI 전력 수요의 전부인 것처럼 일반화하고, 그 증가를 전제로 수십 년간 되돌릴 수 없는 원전 건설을 정당화하는 정책 판단은 전체의 흐름을 놓친 것이다. 실제로 AI 활용의 다수는 학습보다 반복적인 추론이며, 중앙집중형 추론구조는 점차 비효율로 인식되고 있다.

 

기술 변화 예측 아닌 기득권 유지 위한 전제

 

엣지·온디바이스 AI 반도체 기술은 이런 변화를 구체화한다. 대규모 데이터센터에서는 전력의 상당 부분이 연산 자체가 아니라 냉각, 네트워크, 대기전력에 소모된다. 반면 엣지 AI에서는 이런 ‘연산 외 전력’이 구조적으로 줄어든다. 동일한 AI 추론을 기준으로 볼 때, 전력 소비 구조 자체가 질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흐름은 일부 기업만의 실험이 아니다. 글로벌 반도체·플랫폼 기업들 역시 저전력 AI, 엣지 추론, 온디바이스 AI를 핵심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다. 앞으로 AI 경쟁력은 누가 더 많은 전기를 쓰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적은 전력으로 같은 지능을 구현하느냐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초미세 공정(2나노미터급) 반도체와 같은 공정 미세화 역시 이런 전환을 가속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전력 수요 전망과 원전 논리는 이런 기술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채, 데이터센터 중심 구조가 유지된다는 가정 아래 계산되고 있다. 이는 변화하는 기술 현실을 반영한 예측이라기보다, 기존 전력 시스템의 공급 중심·대형 발전 위주 구조를 유지하려는 전제 설정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지난 21일 재가동에 들어갔다가 제어장치 고장으로 하루만에 가동 중단한 일본 니가타 현 가시와자키가리와 원전..  지난 19일 촬영. 아사히신문 1월 22일 
 

원전은 한 번 건설하면 되돌릴 수 없는 위험한 선택

 

AI 시대의 에너지 정책에서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많이 생산할 것인가”가 아니다. “기술 변화까지 감안해도 되돌릴 수 있는 선택인가”이다. 엣지 AI와 저전력 나노칩 반도체라는 현실적인 기술 경로가 이미 작동하고 있는데도 전력 수요 예측을 크게 잡아 한 번 건설을 시작하면 수십 년간 되돌릴 수 없는 원전을 선택하는 것은 정책적으로 매우 위험하다.

 

더구나 안전성을 위해 설정된 원전의 경직성을 완화하겠다며 탄력운전을 도입해 오히려 위험성 증가와 출력 저감에 따른 경제성 저하를 감수하면서 신규 원전 건설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자기모순에 가깝다. 차라리 신규 원전 건설에 투입될 비용을 에너지 효율 향상, 수요 관리, 저장 기술과 계통 보강에 투자하는 편이 가용 재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측면에서 훨씬 합리적이다.

 

AI 전력 수요를 이유로 한 신규 원전 주장은 이제 합리적 선택이라 보기 어렵다. 이것은 미래를 설계하는 정책이라기보다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그에 맞는 이유를 덧붙이는 정치적 결정에 가깝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성급한 원전 확대가 아니라 그 결론을 가능하게 만든 전제부터 다시 검증하는 일이다.   

 

원전 증설은 '우리'를 파괴하는 행위

일방적인 '청정에너지' 홍보, 위험은 감춰
공개토론과 국민적 의사결정 절차 거쳐야

 

매달 집으로 날아오는 전기요금 고지서에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항목이 하나 있다. 바로 '전력산업기반기금'이다. 지난해까지 우리는 전기요금의 3.7%를 이 기금으로 냈다. 정부는 최근 이를 2.7%로 낮췄지만 오랜 기간 연간 2조 원이 넘는 막대한 금액 가운데 상당액이 원자력 발전 관련 연구·홍보·산업 지원에 사용되어 왔다.

 

세금이나 다름없는 공적 예산으로 원전 홍보를 하는 나라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원전 홍보'란 무엇인가? 수억 원을 들여 지하철 광고판과 유튜브 영상에 “원전은 청정에너지”, “탄소 없는 미래”라는 문구를 내보낸다. 원전이 탄소 배출이 적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그 화려한 포장 뒤에는 핵폐기물 문제가 있다. 10만 년 이상 격리해야 할 고준위 핵폐기물을 어디에 묻을지, 그 천문학적 비용은 누가 댈지 여전히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대대손손 불안과 위험을 물려주는 짓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사고가 났을 때의 재앙적 위험 비용도 충분히 강조되지 않은 채 오로지 ‘전기 생산 단가가 싸다’는 당장의 경제성만 부각된다. 마치 화장실 없는 아파트를 지어놓고 겉모습만 번지르르하니 명품 주거지라며 분양하는 것과 같다. 정보를 균형 있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돈으로 국민에게 반쪽짜리 진실만 전하는 셈이다.

 

5일 오전 부산 기장군 고리원전 앞에서 탈핵시민행동이 신규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탈핵희망전국순례'에 앞서 출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탈핵시민행동은 이날 부산 고리원전을 출발 세종, 청와대까지 16일간 신규 핵발전소 반대 도보 행진을 펼친다. 2026.1.5 연합
 

선진국들은 이러한 행태를 단순한 예산 낭비가 아닌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는 문제로 본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정부 홍보 활동에 대해 ‘객관성 원칙’을 확립했다. “국가는 기업처럼 자기 상품을 팔기 위해 소비자를 설득하거나 심리적으로 유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한국처럼 원전의 장점만 강조하는 편향된 광고를 독일 정부가 집행했다면, 즉각 위헌 판결을 받고 관련 예산은 집행 중단됐을 것이다. 스위스도 비슷하며, 대만 입법원은 국영 전력회사의 일방적 원전 홍보 예산을 의회 권한으로 견제한 모범을 보였다.

 

그렇다면 한국은? 감사원은 문재인정부의 탈원전 정책 관련 공무원들을 줄줄이 징계했지만, 최근 증가한 원전 관련 예산과 그 편향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정권에 따라 감사 기준이 달라진다면, 감사원은 독립된 헌법기관이 아니라 정권의 도구에 불과하다. 국회의 상임위 의원들도 이 문제를 알고 있다. 그러나 여야 할 것 없이, 자기 정권 때는 눈감고 상대 정권 때만 비판하는 이중 잣대가 반복된다. 예산 삭감이나 조건부 승인 같은 실질적 견제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독일은 후손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는 윤리에 입각해 국민이 의사결정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독일은 8주에 걸쳐 온 국민이 공개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원전은 후손에게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탈원전을 결정, 의회투표에서 85% 지지로 통과시켰다. 당시 독일 국민은 재생에너지가 갖는 경제적 이점도 보았지만, 무엇보다 핵폐기물의 비윤리성이 결정적이었다. 혹자는 메르켈 정부를 비난하지만 본질은 국민의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전기요금 상승과 에너지 위기라는 고통을 겪었음에도 국민들은 스스로의 결정을 감내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1978년 국민투표로 탈원전을 결정했다. 완공된 원전도 가동하지 않고 폐쇄한 채 지금 2020년 기준 소비전력의 78%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고 있다. 독일은 2025년 기준으로 전기 소비의 약 56%를 재생에너지가 맡고 있으며, 2030년까지 80%를 목표로 하고 있다.

 

원전은 한마디로 ‘화장실 없는 아파트’다. 원전 증설은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다. 핵폐기물이라는 해결불가능한 존재를 미래세대에 남겨 희생을 강요하는 행위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 행위를 본보기로 보여줌으로써 후손들을 잘못 이끄는 비윤리적인 행위다. 후손을 희생해도 좋다는 부모의 악행을 후손들이 본 받으면 인류는 절멸한다.

 

원전은 재생에너지 확대 시대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미 국내에는 26기의 원전이 가동 중이며, 전체 전력의 30% 이상을 공급하고 있다. 그런데도 신규 원전 2기를 추가로 짓겠다는 정책은 과연 합리적인가? 한국방송통신대 이필렬 명예교수는 최근 이투뉴스 인터뷰를 통해 “기후변화를 늦추기 위해 당장 탄소배출량을 줄이고 전력공급을 늘려야 한다며 바로 시작해도 십수년이 걸린다는 원전 2기를 만든다는 발상이 맞는 것이냐”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또 “이미 26기가 가동되고 있고, 전력의 30% 이상을 원전이 공급하고 있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탓할 게 아니라 우리가 잘하는 2차전지와 결합해 태양광과 풍력을 대폭 늘리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전은 부하추종이 어렵다는 기술적 한계를 안고 있다. 한번 가동하면 쉽게 중단할 수 없어, 급증하는 태양광·풍력 전력을 수용하기 어려워진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지면 전력계통에 무리가 생기고, 원전 출력을 강제로 줄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기존 원전들만으로도 이러한 조절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2024년 한해동안 가동중단 사례가 빈번히 발생한 것은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을 보여준다. 새 원전을 지어도 전기요금은 오르고, 정작 제대로 가동하지 못해 ‘좌초자산’이 될 위험이 크다.

 

원전업계는 “2032년까지 출력제어 기술을 개발해 재생에너지와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우리 원전은 프랑스와 달리 잦은 출력 변동을 전제로 설계되지 않았다. 잦은 변동은 핵연료봉 안전성 훼손과 고장 위험을 높인다. 과거 한빛원전 사례가 그 증거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RE100은 원전을 배척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은 1인당 재생에너지 생산량이 주요 선진국에 비해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15년간 다른 나라들이 에너지전환을 추진해왔는데, 우리는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다. 에너지부문 관료들의 소극적 의사결정이 큰 원인이다.

 

여론조사에 기댈 일이 아니다

 

그런 관료들이 여전히 정책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원전 증설의 실효성이 불확실한데도 기존 이해관계자를 우선하는 정책이 이어지고 있다. 여론조사만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정부는 민간 여론기관을 인용하며 국민 과반수가 원전 추가건설을 찬성한다고 발표하지만, 질문 문항의 신빙성이 낮은 끼워맞추기식 설문이 많다. 최근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신규원전 추진 응답이 많았다고 하지만, 질문 지문이 “재생에너지 불안정성을 보완하고 전력수요 증가를 대응하기 위해 원자력을 활용하는 에너지믹스를 추진한다”는 전제를 먼저 주입한 뒤 묻는 방식이었다. 시민사회는 이를 “정책을 미리 정해놓고 핑곗거리를 만든 것”이라고 비판한다. ‘자신의 동네에 건설해도 좋으냐’고 물으면 답변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 여론조사를 마치 국민적 지지인 양 제시하는 것은 기만에 가깝다.

 

이필렬 교수는 "공개업무보고 때 대통령이 원전에 대해 세세하게 묻고 확인하는 걸 보고 여러 측면을 모두 고려해 섣불리 나서지 않을 것으로 봤는데, 갑자기 기후부 장관이 원자력이 기후변화 대응과 AI 데이터센터를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히더라”며 “윤석열 정권이 만든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여론조사로 핑곗거리가 생겼다”고 통렬히 지적했다.

 

왜 다른 길을 선택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가

 

원전 증설은 다른 선택을 손쉽게 포기하는 행위다. 지금은 시민이 직접 전기를 생산하고 관리하는 ‘에너지 민주주의’ 시대다. 그 길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중앙 집중식 기득권에 굴복하는 것이다. 여러 선진국처럼 우리에겐 이미 다른 길이 열려 있다. 에너지 생산과 소비를 지역 단위로 일치시키는 ‘지산지소’ 원칙은 에너지 자립과 지역 혁신을 가져올 수 있다. 특히 이필렬 교수가 강조한 대로,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인 이차전지 기술을 재생에너지와 결합하면 간헐성 문제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태양광과 풍력을 대폭 늘리는 정책이야말로 진정한 기후위기 대응이다.

 

에너지 권한이 대규모 원전에 묶일수록 시민의 주권은 약화된다. 원전 증설은 에너지 생산 주도권을 시민으로부터 박탈하여 소수 기득권에게 헌납하는 행위다.

 

또한 초가속으로 진화하는 AI와 첨단 기술은 우주태양광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우주에서 24시간 청정 에너지를 송전하는 기술은 이미 실증 단계에 들어섰으며, 미국·중국·유럽·일본이 2026년 이후 실증 미션을 추진 중이고 2030년을 본격 실행시기로 잡고 있다. 이 부문에는 한화 등 한국 민간기업들도 적극적이다. 아직 경제성과 기술적 과제가 남아 있지만 지금과 같은 AI능력이 가속화되는 시점에서는 어떤 상황이 올지 모른다. 정부가 이에 더 적극적인 관심을 보일 책임이 있다.

 

헌법이 규정하는 생명권 건강권 환경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

 

우리 헌법 제35조와 제10조는 국민의 환경권, 생명권, 건강권을 명시한다. 사고 시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줄 수 있는 원전을 증설하는 것은 국가가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헌법적 책무를 약화시키는 행위다.

 

우리는 세계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인구밀집지역에 원전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지진과 자연재해 앞에서 원전은 언제든 통제 불능의 재앙으로 돌변할 수 있다. 한반도가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님에도 “공학적으로 안전하다”는 맹신에 빠져 증설을 외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연초 월성원전 전산제어실 화재 사건처럼 위험은 은폐되기 쉽다. 원전은 태생적으로 위험을 숨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 동남해안 산업심장부가 반세기 노력의 결실을 잃을 수 있다.

 

주권자 국민의 역할과 정부의 도리

 

원전 증설을 멈추는 것은 단순히 전력 수급 방식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어떤 가치를 지향할지, 후손들에게 어떤 도덕적 기반을 물려줄지에 대한 존엄한 응답이다. 지금의 원전 중심주의는 우리 공동체의 안전, 정의, 미래를 파괴하는 ‘내부의 적’이 되고 있다. 올해가 체르노빌 40주년이다. 언제까지 원전의 볼모가 되어야 하는가? 원전 증설은 ‘우리’를 파괴하는 행위다. 후손을 희생시키려는 부모의 악행을, 후손들이 본 받아 되풀이 하면 인류는 절멸한다.

 

이젠 당대의 국민들이 직접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20여년 전 부안 핵폐기물 사태로 위험을 각인한 바 있다. ‘원전을 용인할 것인가, 우리 동네에도 받아들일 결기를 가질 것인가’를 국민이 결정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뿐아니라 가까운 대만도 국민투표로 결정했다. 조작 가능성 있는 여론조사에 맡길 것이 아니라, 공개토론과 국민적 의사결정 절차를 요구해야 한다. 그것이 주권자 국민의 역할이며, 국민주권을 내세우는 정부의 도리다.                                                          <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

 

 

지명 28일 만, 인사청문회 이틀 만에 결정
"국민 눈높이 부합 못 해…통합 의지는 유지“

민주 "파격 인사와 화합은 높게 평가받아야"
혁신 "이 후보자 욕심에 버티고만 있던 상황"
진보 "고위 공직자 불법 이득 전수조사해야"

 

이재명 대통령이 25일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의 지명을 철회했다. 사진은 지난 23일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 출석 모습. 2026.1.25. 연합
 

이재명 대통령이 25일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 지명을 철회했다. 이 후보자를 지명한 지 약 한 달 만이고, 국회에서 인사청문회가 열린 지 이틀 만이다.

 

홍익표 정무수석은 이날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브리핑을 열고 "이 대통령은 이 후보자에 대해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인사청문회와 그 이후 국민적 평가에 대해 유심히 살펴봤다"면서 "숙고와 고심 끝에 이 후보자의 지명을 철회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앞서 이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이 후보자를 새 정부의 초대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 후보자가 장관으로 지명된 직후부터 장남의 위장 미혼 부정 청약 및 특혜 입학 의혹, 후보자 본인의 보좌진 갑질 의혹,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이 터졌다. 

 

홍 수석은 "이 후보자는 보수정당에서 3차례나 국회의원을 지냈지만 안타깝게도 국민주권정부의 기획예산처 장관으로서 국민 눈높이에 부합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통합은 진영 논리를 넘는 변화와 함께 대통합의 결실로 맺어질 수 있다"며 "통합 인사를 통해 대통합의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고자 하는 대통령의 숙고와 노력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홍 수석은 기자의 '이번 낙마로 대통합의 의미가 퇴색된 것 아니냐'는 질문에 "후보자가 국민적 눈높이와 도덕적 기준에 부합하지 못해 취임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면서 "특정 진영 한쪽에 계신 분이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의 전문성을 가진 분을 폭넓게 쓰겠다는 근본적 취지, 대통령의 통합 의지는 계속 유지된다"고 답했다.

 

자진 사퇴가 아닌 지명 철회 형식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보수 진영 인사를 모셔왔던 만큼, 지명 철회까지도 인사권자로서 책임을 다한 것으로 이해해 달라"고 했다. 

 

다만 '차기 후보자도 상대 진영에서 물색할 수 있냐'는 질문에 "기획예산처 장관 자리에 한정된 게 아니라 앞으로 인사가 다양하게 여러 가지가 있지 않겠나"라면서 "고려하는 요소 중 하나가 우리 사회 통합이라는 것이지 예산처 장관을 정해놓고 통합적 자리라서 보수 진영 인사로 모시겠다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홍익표 정무수석이 25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에 대한 지명철회 브리핑을 마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6.1.25. 연합
 

더불어민주당 박해철 대변인은 국회 소통관에서 이 대통령의 이 후보자 지명 철회와 관련해 "겸허히 수용하고 국민 통합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의 대도약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박 대변인은 "그간 제기된 여러 의혹의 심각성과 국회 청문회에서의 소명 과정, 그리고 사회 각계각층에서 전달된 우려, 무엇보다 엄정한 국민 눈높이와 정서적 수용성을 고려한 고심의 결과"라고 말했다.

 

이어 "이 후보자 지명의 배경에는 불법계엄과 내란사태로 더욱 심화된 사회적 갈등 상황에서, 한쪽 진영에 치우치지 않는 '모두를 위한 정부'를 통해 국민 통합의 물꼬를 트고자 했던 이 대통령의 진심이 있었다"면서 "특히 과거 보수정당에서 여러 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을 정치적 지향과 진영 논리를 과감히 넘어, 국가 예산을 기획하는 중책을 맡기려 했던 파격적 인사와 화합의 제스쳐는 후보자의 자질 문제와 별개로 높게 평가받아 마땅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보자에게 제기된 의혹이 국민께서 납득하실 수준으로 소명되지 못했고, 국민의 걱정을 불식시키지 못했다"면서 "국민적 우려와 시민사회의 지적을 겸허하고 낮은 자세로 수용하며, 향후 더욱 엄격하고 공정한 인사 기준의 마련을 위해 정부와 함께 고민할 것을 분명히 약속드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모든 기준은 국민이 될 것"이라며 "국민 통합을 위한 노력 또한 한 치의 소홀함이나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국민의 눈높이'를 존중한 대통령님의 결정을 존중한다"며 "대통령님의 고뇌가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오기형 의원도 "진영논리를 넘어 국민통합을 위한 인사는 계속 검토해야 하지만, 지명 철회는 부득이하다"면서 "부동산 청약 과정이나 재산신고 누락 등 의혹에 대해 충분한 해명이 되지 않았다. 내란에 대한 종래 입장에도 비판이 많았다"고 했다.

 

조국혁신당 박병언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이 후보자 지명 철회는 잘한 결단"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애초부터 국민들은 탕평인사라는 취지에는 지지를 보냈으나, 그 대상으로 이혜훈이 적임자인지 의문을 제기했다"면서 "내란에 대한 옹호부터 점수를 잃고 시작한 이 후보자는 철회 전까지의 시간 동안 해명에만 급급했을 뿐 경제정책에 대한 전문적인 기조 제시도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박 대변인은 "위장 미혼부터 갑질 의혹, 입시 의혹 모두 해명은커녕 수사 대상임이 드러났다"면서 "특히 후보자 지명 과정에서 대통령실에 인사 자료를 부실하게 제출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행태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정책 제시도 없고, 근거 있는 해명도 못하면서 결국 자리 욕심에 버티고만 있는 상황이었다"며 "앞으로 이 정부 첫 기획예산처 장관의 중책을 제대로 책임질, 국민 누구나 수긍할 후보자를 잘 찾아 주길 기대한다"고 했다.

 

진보당 신미연 대변인도 "이 후보자를 둘러싼 각종 의혹은 고위 관료층에 뿌리내린 기득권 대물림이 얼마나 강력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면서 "재산 축적과 자녀의 출세를 위해 보여준 각종 '위장'과 '편법'은 국민에게 깊은 박탈감과 분노를 안겼다"고 했다.

 

신 대변인은 "철저한 수사를 통해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나아가 고위 공직자의 편법·불법을 통한 부당 이득에 대한 전수조사 등 기득권 대물림의 실상을 확인하고, 끊어 내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 김민주 기자 >

쿠팡 미국 투자사들 한국 정부 상대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 제기 예고

 

 

방미 중인 김민석 국무총리가 22일(현지시간) 워싱턴 콘래드호텔에서 동포간담회를 하고 있다. 총리실 제공

 

국무총리실은 23일 쿠팡의 미국 투자사들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 제기를 예고하면서 김민석 국무총리의 발언을 인용한 것과 관련해 “전체적 발언 맥락과 무관한 자의적 편집과 의도적 왜곡”이라고 반박했다.

 

총리실은 이날 오후 보도설명자료를 내고 “김 총리 발언은 그간 누적된 대한민국 경제의 불공정한 관행을 엄정히 바로잡고, 이를 통해 공정한 시장 질서를 확립함으로써 투자자들에게 신뢰받는 경제질서를 만들자는 취지의 발언”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총리실과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미국의 쿠팡 투자사인 그린옥스와 알티미터는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근거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S 중재 신청을 제기하겠다는 의향서를 이재명 대통령과 정홍식 법무부 국제법무국장을 수신인으로 명시해 공식 통지했다.

 

투자사들은 중재 신청 의향서에 “김 총리는 규제 당국에 쿠팡의 데이터 유출 사건에 대한 단속을 ‘마피아를 소탕하는 것과 같은 결의로 접근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며 한국 정부의 대표적인 쿠팡에 대한 위협 사례로 김 총리의 과거 발언을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총리실은 해당 발언에 대해 “지난해 12월19일 금융위원회와 공정거래위원회 등 업무보고에서 김 총리가 한 발언”이라며 “그간 누적된 대한민국 경제의 불공정한 관행을 엄정히 바로잡고, 이를 통해 공정한 시장 질서를 확립해 투자자들에게 신뢰받는 경제질서를 만들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총리실은 “특정 기업이나 특정 국가 소속 기업들을 강하게 제재하거나 응징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이 아니며, 실제로 발언 내용에서 특정 기업이나 특정 국가는 물론 쿠팡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한 바 없다”고 했다.

 

방미 중인 김 총리는 이날 미국 하원의원들과의 오찬에서 일부 의원들이 쿠팡 사태 관련 한국 정부의 대응에 대해 문의한 것에 대해 “쿠팡에 대한 차별은 전혀 없으며 차별적인 대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한·미관계는 신뢰 관계에 있다”고 말했다.

 

김 총리는 “한국은 조지아 사건이 한국 노동자이기 때문에 차별받은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마찬가지로 쿠팡도 미국 기업이라는 이유로 취한 조치가 아니며 전혀 차별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 이유진 기자 >

 

정성호 법무부 장관 “쿠팡 미국 투자사 중재 의향서, 근거 없는 주장”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30일 국무회의가 열리는 청와대 세종실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정성호 법무부 장관이 쿠팡 미국 투자사의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의향서 제출을 두고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국익 보호라는 원칙 아래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 장관은 2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쿠팡의 일부 미국 투자사들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근거 없는 주장을 담아 ISDS 중재의향서를 제출하고 미국 정부 개입을 요청했다”며 이같이 밝혔다.

 

정 장관은 “대한민국 국민 3370만명의 개인정보를 노출한 쿠팡의 부실한 관리와 무책임한 태도가 이번 사태의 본질”이라며 “책임은 한국의 쿠팡 자회사에 있는데 미국 모회사에 투자한 소수 지분의 투자사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압박에 나서는 모습이 국제법 법리나 정의에 부합하는지도 의문”이라고 썼다.

 

법무부는 전날 “쿠팡의 주주인 미국 국적 투자사 그린옥스와 알티미터 등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근거해 ISDS 중재의향서를 한국 정부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중재의향서는 청구인이 중재를 제기하겠다는 의사를 상대 국가에 밝히는 서면으로 정식 중재 제기는 아니다. 의향서 제출 90일 이후 정식으로 중재를 제기할 수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이들은 중재의향서에서 지난달 1일 발생한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 이후 국회와 정부가 쿠팡을 겨냥해 진상조사 등 각종 행정 처분과 위협적인 발언을 했고, 이는 공정·공평 대우 의무, 최혜국 대우 의무 등 한미 FTA 규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관련해서 수십억 달러의 손해가 발생했다고도 했다.

 

정 장관은 “향후 절차에 대비해 감정적 대응이 아닌 철저하고 냉철한 법리적 판단에 기반한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대한민국 국민의 권익과 국익 보호라는 분명한 원칙 아래 관련 법률 쟁점을 차분히 검토하며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 이창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