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원식 의장, 9월3일 중국 전승절 행사 참석

● COREA 2025. 8. 22. 14:4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박지원 등 한중의원연맹 여야 의원 6명 동행

 

 
 
우원식 국회의장이 지난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를 찾은 다이빙 주한중국대사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우원식 국회의장이 다음 달 3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열리는 ‘전승절’(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기념일) 행사에 참석한다.

의장실은 22일 언론 공지를 통해 “중국 정부가 우원식 의장을 80주년 전승절 행사에 공식 초청한 데 대해 참석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우 의장의 이번 방중에는 국회 한중의원연맹을 주축으로 더불어민주당 박지원·김태년·박정·홍기원 의원, 국민의힘 김성원 의원, 조국혁신당 김준형 의원 등이 동행한다. 의장실은 “한중 이해도가 높은 의원들”이라고 설명했다. 한중의원연맹 회장과 부회장은 김태년·박정 의원이 맡고 있다.

 

애초 중국은 전승절 80주년을 앞두고 해외 정상들을 초청하는 등 대대적 행사를 예고하며 이 대통령의 전승절 행사 참석을 타진했으나, 이 대통령의 참석이 어려워지자 지난 20일 국가 의전 서열 2위인 우 의장을 초청했다.

 

한·중은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당시인 1992년 8월 수교했다. 수교 당시 공동성명에는 “대한민국 정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 합법 정부로 승인하며,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중국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 하어영  기민도 기자 >

 

신임 국회 법사위원장에 추미애 의원 "당선"

● COREA 2025. 8. 21. 11:4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국회본회의,  ‘주식 차명 거래’ 이춘석 사임안 의결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의원이 당선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
 

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에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6선)이 임명됐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총 173표 중 164표 얻은 추미애 의원이 법사위원장에 당선됐다”고 밝혔다.

 

국회는 이날 본회의를 열어 이춘석 전 법제사법위원장(무소속) 사임 건을 의결하고, 추 의원을 법제사법위원장에 임명하는 건을 통과시켰다.

 

추 의원은 이날 법사위원장으로 선출된 직후 “중책을 맡겨 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하다”며 “이번 법사위원장 선출은 검찰과 언론, 사법 개혁 과제를 완수하라는 국민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뜻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했다.

 

한편, 이 전 위원장은 지난 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휴대전화로 본인의 보좌관 차아무개씨 명의로 주식을 거래하다가, 이 장면이 언론 카메라에 찍혀 ‘주식 차명 거래’ 의혹이 불거졌다. 이 의원은 논란이 커지자 5일 민주당을 탈당하고, 법제사법위원장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 의원을 금융실명법·이해충돌방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수사 중이다.

                                                                                      < 김채운 기자 > 

광복 80주년 기획 ‘기억을 역사로’---    끌려간 사람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가족들이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기증한 강제동원자의 모습. 연인원 780만명의 청·장년이 군인으로, 노무자로 강제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제공

 

“나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막 안 타려고 울었어. 선생님이 체면이 있다 사정하더라고 그래서 부산역인지 어딘질 모르는디 갔제. 5일 만에 일본이더라”

 

1945년 초, 전남 나주 영산포초등학교 6학년 이금덕은 졸업을 앞두고 ‘근로정신대’로 동원됐다. 행선지도 모르고 끌려간 일본, 그는 도야마현 후지코시 공장에 배정돼 일본 군용기 부품을 만들었다. 그의 나이는 불과 12세였다.

 

지난 2008년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회)가 발간한 구술기록집에 포함된 강제동원 피해자 이금덕의 증언이다. 강제동원 피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설립한 위원회는 지난 2005년부터 2013년부터 구술록 16권을 발간했다. 범정부 차원에서 진행된 유일한 구술조사를 바탕으로 동원 배경부터 해방 이후 귀환 과정까지 강제동원 전 과정을 담았다.

 

위원회는 구술조사의 이유에 대해 “잠자고 있던 생존자들의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 만들기’ 과정”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강제동원의 기억은 역사가 되지 못했다. 향후 추가 진상조사와 연구를 염두에 두고 진행된 구술조사였지만 위원회 해체 이후 흐지부지해지며 제대로 된 후속연구도 이뤄지지 못했다.

 

일본이 강제동원의 흔적을 지우고 있는 군함도를 비롯해 국내외 곳곳으로 끌려간 피해자들의 동원경로와 과정이 담겼지만 교육용으로도 활용되지 못한 채 ‘잊힌 기록’이 됐다. 가해자인 일본의 ‘망각’을 지적하면서도 피해자가 일제의 강제동원의 증거를 스스로 지우는 내부 모순을 드러냈다.

 

                                  1941년 도항증명서.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광복 80주년, 강제동원의 경험을 증언해줄 피해자는 대부분 우리 곁을 떠났다. 기억을 계승하기 위해선 남은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경향신문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길’을 그리기 위해 강제동원 구술록 15권, 일본군 ‘위안부’ 구술록 1권, 총 219명의 이야기를 분석했다. 이는 지난 80년 동안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일이다.

 

구술록은 증언자가 사용한 방언, 행동묘사까지 그대로 기록해 발언 과정의 감정 변화까지 생생하게 담았다. 이로 인해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분석은 불가능했다. 또 조사원마다 질문 내용과 순서가 달랐고, 피해자는 질문과 관계없이 기억나는 대로 발언하는 경우가 많아 총 6177페이지의 구술을 전부 읽고, 정확한 내용을 확인했다. 경향신문은 이를 통해 역사가 되지 못한 ‘기억’을 잇고, 계승할 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219명 평균 연령, 만 18.9세
‘만 14세 미만’ 피해자 3.2%
부양가족 있던 30대도 끌려가

 

이들의 기억을 통해 남은 것은 ‘강제성’을 입증할 증거였다. 구술기록에 참여한 강제동원자 219명의 동원 평균 연령은 현재 성년의 기준보다 낮은 만 18.9세였다. 이중 국제노동기구(ILO)의 강제노동협약에 따라 강제노동이 금지된 만18세 미만 동원피해자는 전체 구술자의 42.9%(94명)에 달했다. 아동노동 기준 위반인 만14세 미만 강제노동자도 3.2%(7명) 존재했다. 일본은 1919년 ILO의 초대 창립국으로 참여해 1932년 강제동원협약을 비준했다. 때문에 이는 당시 강제동원은 ILO협약을 무시한 명백한 불법적인 행위다.

 

 

겉으론 ‘지원’의 형태를 띄기도 했지만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노동’이었다. 이금덕처럼 초등학교를 다니거나 갓 졸업한 만12세 학생도 동원돼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부양할 가족이 있어도, 자녀가 있어도 동원을 피할 수 없었다. 만32세로 구술록 중 최고령 동원자였던 민병주는 딸의 결혼을 보기 위해 사정을 한 끝에야 동원을 연기했다. 딸을 시집 보내자마자 그는 일본으로 동원돼 가족들과 생이별을 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동원길에 올랐다고 증언했다. 길을 걷다가 징용장도 없이 순사한테 끌려가 그날로 강제동원되는 경우도 있었다. 한번 동원대상이 된 순간, 예외는 없었다.

 

동원 피해자 대부분은 일본(당시 일본령 사할린 포함, 65.3%, 143명)이나 일본 외 지역(20.1%, 44명)으로 떠났다. 피해자들은 기차를 통해 일본을 오가는 연락선이 다니는 부산항으로, 일부는 여수항으로 ‘수송’됐다. 일제가 점진적으로 구축한 장항선, 경부선, 호남선, 경전선 등 철도는 전국 곳곳에 흩어진 동원자들을 항구로 빠르게 실어나르는 역할을 했다. 철도와 항만은 조선을 근대화하기 위해 만든 기반시설이 아닌, 효율적인 인적수탈을 위한 도구였다.

 

                                               강원여관 숙박 증명서. 국가기록원

 

‘강제동원의 길’ 시작점인 집결지
47.9%가 읍사무소 등 관공서 지목
연락선 있는 부산항·여수항으로 ‘수송’

 

구술록에서 확인한 주요 경로는 다음과 같다. 강원 서부/서울/수도권/충청권/경상권→부산→일본 시모노세키(관부연락선 탑승), 서울/충청권/전라권→여수→일본(관려연락선 탑승), 전라권→제주 징용, 강원 동부→원산→부산→일본 시모노세키(관부연락선 탑승), 전라권→부산→일본 시모노세키(관부연락선 탑승)이다.

 

구술록 분석으로 ‘강제동원 길’의 시작점인 집결지도 확인했다. 집결지를 증언한 96명 중, 절반에 가까운 47.9%(46명)가 읍사무소·군청 등 관공서에서 모였고 기차역(15.6%, 15명), 학교(14.6%, 14명), 여관(13.5%, 13명)이 뒤를 이었다. 이중 여관을 제외하면 대부분 현재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곳들이다. 추가 조사가 진행된다면 보다 정확한 동선 및 조선총독부의 조직적 개입 여부까지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김경민  김찬호 기자 >

 

“도항 직전 ‘알몸 소독’ 당해”···219명 증언으로 복원한 ‘강제동원의 길’

 

광복 80주년 기획 ‘기억을 역사로’---    끌려간 사람들

 

 

 

           1952년 미군이 촬영한 부산역, 부산세관, 부산항 1부두 모습/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제공

 

9268개. 공장, 탄광, 지하시설 등 일본 제국주의(일제)가 한반도에 남긴 전쟁유적 숫자다. 문헌과 현지조사 등으로 확인된 곳 중 정부나 지자체 보고서가 발간된 곳은 321개. 일제가 36년간 남긴 상처 중, 약 3.46% 수준이다.

 

일제강점기 전쟁유적은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등과 연결되지만 지금껏 채 5%도 조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가 ‘야만의 시대’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증언’ 덕분이었다.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폭로한 ‘김학순’, 일본제철(구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강제동원 책임을 물은 ‘이춘식’ 등의 증언은 광복 후 수십 년간 역사의 빈틈을 메웠다.

 

그로부터 80년이 지났다. 생생했던 ‘목소리’는 대부분 멈췄다. 이들이 세상을 떠나며 생긴 틈으로 “강제동원도 일본군 ‘위안부’도 없었다. 증언은 거짓이다”는 주장이 파고들었다. 이제라도 멈춰버린 증언을 사실로 확인해야만 할 필요성이 커졌다.

 

경향신문은 정부가 발간한 구술록 속 강제동원 피해자 219명의 증언을 처음으로 전수 분석했다. 그들의 기억으로 지난 80년간 한 번도 알려지지 않았던 ‘강제동원의 길’을 복원했다. 전국 역, 관공서, 학교, 여관 등에서 집결한 강제동원자들은 기차를 타고 여수역, 부산역 등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연락선으로 갈아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전국 주요역과 철도는 이들을 수송하는 핵심역할을 했다. 항구는 이들을 강제동원지로 실어나르는 기지였다.

 

219명의 기억을 쫓아 직접 따라가 본 길 위에는 참혹한 ‘폭력’의 역사가 있었다.

 

1944년 7월,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김희경의 길

 

김희경은 덕수국민학교 고등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4년 7월, 일본 후지코시강재주식회사로 강제동원됐다. 만 14세 때였다. 250명이 함께 동원됐는데 집결지는 ‘경기도청’(현 광화문 광장 남쪽)이었다. 이들은 ‘부민회관’(현 서울시의회)에서 일제를 홍보하는 영화를 한 편 봤다. 오후에는 ‘조선신궁’(현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으로 이동해 참배한 뒤 ‘경성역’(서울역)으로 걸어서 이동했다. “남대문을 내려보니까는 요즈음 시청광장에 사람 모이잖아요. 가족들이 그렇게 모여있어요. 아침에 아무것도 없이 나갔는데 도시락들을 싸가지고, 애들을 멕여 보낼라고. 서울역 가는 그 일대가 꽉 차서, 그걸 말로 표현을 못 해요.” 김희경은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10대도 가리지 않고 무작위 차출
가축·화물용 짐칸에 빽빽이 실어
일본과 연결 지점인 부산으로 수송

 

이는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위원회)가 2008년 발간한 구술집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그 경험과 기억’에 나오는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위원회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총 16권의 구술기록집을 남기고, 2015년 해체됐다. 정부가 발간한 책이지만 전권 열람이 가능한 곳을 찾기 어려울 만큼 구술집은 잊혔다. 그런데 이 책들에는 어디서도 듣지 못한 이야기가 조각조각 실려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끌려간 ‘이동 경로’에 관한 것이다.

 

                             남산 조선신궁 전경/국립중앙도서관 조선신궁조영지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역(경성역) 모습/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다시 김희경의 증언이다. 경성역에 도착한 그는 그날 저녁 8시, 기차를 탔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비 내리는 새벽이었다. “아마 새벽쯤 됐어, 비가 막 부슬부슬 오는데 250명이 춥고, 앉아가지구선 있는데, 한 아이 두 아이 울기 시작하더니 250명이 다 우는 거야.” 이날 가족품을 떠나 온 아이들이 함께 울었던 곳은 ‘부산역’이었다.

 

일제강점기 부산은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관문이었다. 부산항 제1부두에는 ‘관부 연락선’이 닿았다. “연락선이 단순히 일본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연결한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면 곧바로 기차로 갈아타고 중국을 갈 수 있다는 의미의 ‘연락’ 입니다. 역이나 항구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거죠,”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은 당시 부산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1930년대 부산 제1부두 관부연락선 터미널 모습. 잔교역 구조다./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일본, 한반도, 중국을 연결하는 구조의 핵심은 ‘잔교역’이었다. 잔교역은 부두 위에 건설한 간이역을 말한다. 기차에서 내린 승객이 몇 걸음만 옮기면 곧바로 배에 오를 수 있다. 모든 환승과정이 역과 항구안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한 극도로 효율적인 구조지만 뒤집어보면 완벽히 통제된 구조다.

 

그런데 김희경은 잔교역이 아닌 부산역에서 하차했다. 경부선에서 갈라져 나온 철도가 잔교역과 이어짐에도 부산역에서 하차했다면, 그 이유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 일제는 김희경을 비롯한 250명의 아이를 역 밖으로 데리고 나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디로 갔나

 

부산으로 이동해 곧바로 ‘관부 연락선’을 탔을 것이란 추측은 시작부터 깨졌다. 증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김희경의 기억이 부산에 이르러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만 14세 아이가 처음 가 본 도시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억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219명의 증언자 가운데 비슷한 시기, 같은 장소를 거친 증언을 전부 찾았다. 그 결과, 1944년 5월 도쿄 누마즈공장으로 동원된 오일순, 1944년 10월 히로시마 조선소로 동원된 홍순의가 특정됐다. 같은 해 5월, 7월, 10월에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끌려간 이들의 기억에서 하나의 장면이 공통적으로 떠올랐다. 이들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인간 소독’이었다.

 

“자그마한 배를 타고 어느 도섬에 가니께네, 창고 같은 이런 데가 있었어요. 들어가보니까 새카만, 저 소독수라 소독수. 그 안으로 들어가라 하는 거예요”, “어딘지 들어갔는데 아 소독물 저저저, 모야 냄새 지독한 크레졸. 우유물 같이 허연 물에 넣고 소독시키는 거야, 몸을”, “약물로 소독을 했다고 사람을”.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시기 부산에 머물렀지만 마치 한 공간에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이들 증언이 맞다면 ‘강제동원의 길’에는 소독이라는 과정이 추가돼야 했다. 문제는 장소였다. 누구도 소독을 당한 위치를 정확히 특정하지는 못했다. 다만, ‘소독하러 가는 길’을 묘사한 경우가 있었다. “부산에서 그 오륙도 지나설랑 조금 더 가면 조그만 섬이 있었어요, 그 섬에 들어가서 약물로 소독을 했다고 사람을”(김민경, 1944년 히로시마 기계제작소 동원), “부산 와가지고 지금은 모르겠는데, 어디 섬인데 부산에. 섬에 가서 우리를 소독을 시키는기라”(박군자, 1944년 도쿄 누마즈 공장 동원). 이들 증언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설명은 그곳이 ‘섬’이라는 것이었다.

 

                     1941년 일제가 발행한 부산 시가지도/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제공

 

옛 부산역 근방, 자그마한 배로도 갈 수 있는 거리, 오륙도를 볼 수 있는 방향에 있는 ‘섬’. 1941년 일제가 제작한 부산 시가지도를 구해서 펼치고, 해당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곳을 찾았다. 딱 한 곳이 나왔다. 부산 ‘영도’다.

 

일제에 조선인은 무엇이었나

 

일제강점기 영도는 배를 건조하고, 수리하는 조선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현재 ‘깡깡이 마을’로도 유명한 해안가 일대에는 일본인 조선소가 밀집해 있었다. 1934년에는 최초의 도개교(다리 상판 한쪽을 올려 배가 지나갈 수 있게 한 다리)인 영도다리가 건설됐다.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만나는 대교동·남항동 일대와 ‘영도정’이라 불린 봉래동·청학동 일대는 대표적인 일본인 거주 지역이었다.

 

                    지난 8월 1일 부산 중구 일대에서 바라본 옛 영도 다나카 조선소/부산|권도현 기자

 

영도의 산업적 특성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영도에는 조선업을 지탱할 ‘노동력’이 필요했다. 영도에도 강제동원자가 있었고,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창고 ‘건물’이 있었다면 ‘창고가 있는 섬’이라는 소독 과정을 설명한 증언과 맞아떨어진다.

 

지난 1일, 영도에서 만난 박호석씨는 이렇게 말했다. “있었습니다. 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해방 후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기도 했습니다. 그 건물을 허물고 1969년에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박씨가 지목한 곳은 부산 영도구 봉래동2가에 있는 ‘봉래 아파트’ 자리였다.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근로 보국대 기숙사’라고 불렀다. 근로 보국대는 일제가 시행한 강제동원의 한 갈래였다. 위치를 확정하기 위해 마지막 교차검증을 했다. 1952년 미군이 영도를 찍은 사진을 입수해 똑같은 구도로 영도를 촬영했다. 그리고 두 사진을 천천히 겹쳤다. ‘봉래 아파트’ 위로 또 하나의 건물이 겹쳐졌다. 이른바 ‘나가야식 숙소’라고 불리는 기다란 형태의 ‘목조’ 건물. 영도 ‘근로 보국대 기숙사’였다.

 

1952년 부산 봉래산에서 내려다 본 영도 전경. 붉은색원 부분이 ‘영도 근로보국대’ 자리다./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제공

       지난 1일 영도 봉래산에서 바라본 영도 전경. 붉은색 원 부분이 과거 ‘영도 근로보국대’ 자리다./부산|권도현 기자

 

영도를 소독 장소로 특정하자 신빙성 없어 보였던 증언도 해석됐다. 홍순의는 “부산 건너 대마도라는 데가 있어, 목선 타고 건너가는데 거기가 얼마 안돼요. 인제 거기에 가서 목욕(소독)하는거요”라고 증언했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직선거리는 약 50㎞ 정도인데 이른바 ‘쓰시마 해류’라고 불리는 강하고 빠른 해류가 흐른다. 나무배를 타고 가깝다고 느끼며 왕복했다고 보긴 어렵다. 반면, 부산 중구 일대에서 영도까지 최단거리는 불과 200m정도다. 영도다리가 놓이기 전부터 나무배가 영도와 부산을 이었다. 홍순의가 영도를 대마도로 착각했다고 하면, 증언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다.

 

‘더럽고 불결한 존재’라는 인식
인근 영도로 옮겨 벌거벗겨 ‘소독’
60~70년이 지나도 선명한 치욕

 

그럼에도 반드시 설명돼야 할 의문 한 가지가 남는다. 증언자들이 강제동원 된 시점은 1944년이다. 이때는 이미 영도다리가 있었다. 증언자들은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갔다”고 일관되게 말했다. 답은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 연구위원이 내놨다. “영도다리를 걸어서 건너면 곧바로 일본인 거주지가 나옵니다. 조선인 징용자는 결코 이곳을 지나가지 못했을 겁니다. 일제는 이들을 미개하고 불결한 존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실제로 일제는 조선인이 ‘전염병’을 퍼뜨릴 가능성을 극도로 경계했다. 당시 조선총독부 관보, 신문 기사 등에는 “조선인은 불결하고 전염병의 온상”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사용됐고, 이를 근거로 일본인 전용 목욕탕·공원 등의 출입 제한이 이뤄졌다. 결국, 1940년대 관점에서 보면 조선인 강제동원자가 배를 타야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52년 영도 제일교회 주변 모습/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제공

 

위원회 조사관으로 소독 과정에 대한 구술을 받은 허광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 소장은 피해자들의 증언 당시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증언을 듣는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일본으로 도항하기 직전, 알몸으로 벗겨진 채 소독을 당했다고 설명하는 모습입니다. 그 경험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모욕적이었는지 이미 6~70년이 지났음에도 증언자들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일본인도 소독을 받아야 연락선에 오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습니다.”

 

‘강제동원의 길’이 보여주는 것

 

영도에서 소독을 마친 이들은 다시 부산항 제1부두로 끌려 나왔다. 그제야 관부연락선을 탈 수 있었다. 덕수초 → 경기도청 → 조선신궁 → 경성역 → 부산역(현 부산 중앙동 교보생명빌딩) → 영도 근로 보국대(봉래 아파트) → 부산항 제1부두(구 부산 국제여객터미널) → 관부연락선 → 일본 시모노세키로 이어지는 강제동원 주요 경로 중 하나가 비로소 완성됐다. 이 길은 1944년 7월, 서울에서 동원된 김희경이 실제로 걸었던 길이다. 구술록에 기록된 1943~44년 서울 출신 강제동원자들도 거의 예외 없이 같은 동선을 밟았다. 답사 결과, 서울 시내 구간은 도보로 약 2시간, 부산역에서 영도 근로보국대까지는 2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직접 따라가 본 ‘강제동원의 길’은 몇 가지 분명한 의미를 드러냈다. 우선, 도주를 막으면서 목적지까지 신속히 수송하기 위한 최적 경로였다. 예를 들어 집결지로 이용된 여관, 역, 항구는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곳에 있었다.

 

수송 수단으로 사용된 ‘철도’는 조선총독부 산하 철도국에서 관할 하며 감시와 통제를 극대화할 수 있는 도구였다. 철도는 항구와 함께 ‘일제가 한반도를 근대화했다’는 증거로도 활용된다. 그러나 이 철도 위에서 당시 강제동원자들은 목숨을 건 탈출을 했다. 김명환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식으로 탈출을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1942~1945년까지 홋카이도탄광기선주식회사가 노무자 송출 현황을 기록한 ‘부산왕복’이라는 자료에 따르면 1944년 한 해, 경성역에서 부산역으로 이동하던 강제동원자의 탈출률이 42%에 달했다. 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갔다면 설명되지 않는 수치다.

 

이동 과정의 처우 역시 민족 차별적 성격을 드러낸다. 기차로 이동하면서 “객실에 앉아서 갔다”는 증언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인제 어디다가 싣느냐. 짐차여 사람타는 차에는 안 태우고, 소새끼 태우는 곳간이여. 튀지 못하게 할라고, 그거는 인간 타는 데가 아니에요.” 만 15세에 강제동원된 권석순은 기차 안 풍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화물칸으로 수송한 이들을 소독까지해서 배애 태우는 과정을 종합하면, 일제가 당시 조선인 강제동원자을 어떻게 인식했는지가 드러난다.

 

 

경향신문이 분석한 219명 중 176명은 김희경처럼 자신이 끌려갔던 이동과정을 일부라도 구술했다. 이들이 증언한 경로는 크게 평양/서울/춘천/서산/부여/전주 → 대전역 → 부산역 → 부산항 제1부두 → 관부연락선 → 일본 시모노세키, 익산/군산/장성/순천/순창/고흥 → 여수항 → 관려연락선 → 일본 시모노세키, 목포 유달 국민학교 → 목포 선창 → 소안도/추자도 → 제주도/우도 강제동원 등이다. 독특한 점은 관려연락선이 있었음에도 전라도 지역에서 부산으로 이동해 일본으로 가는 경우도 많았다는 점이다. 조건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부산에서 출발해 일본으로 가는 정기항로가 경제적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면서도 “1944년 후반이면 이미 해안선이 봉쇄돼 이동 중 배가 격침될 가능성이 컸다는 점 역시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근대화론 허구·폭력 흔적 여전한데
후속 연구 없어 방치된 증언들
강제동원, 아직까지 미제로 남아

 

이처럼 강제동원자들의 이동 경로, 증언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많다. 그럼에도 이를 활용한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할 수 없었어요. 증언을 정리해 후속 연구가 가능하도록 해야 했지만 그럴 시간도 예산도 없이 위원회가 해체됐습니다.” 위원회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한 정 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 정부는 이들의 ‘증언’을 확인해 객관적 역사로 남기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광복 후 80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정확히 몇 명이 끌려가서 몇 명이 돌아오지 못했는지조차 모른다.        < 김찬호 김경민 기자 >

 

독립기념관. 인권위, 방통위, 감사원, KBS, 검찰…

그뿐인가...진화위, 동북아 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역사단체들...

 

                                                                             송요훈 편집위원(전 MBC 기자)

 

얼굴값을 한다는 건 결코 칭찬이 아니다. 얼굴은 잘생겼는데 못난 짓을 골라 한다는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생긴 대로 논다는 말도 있다. 그건 외모를 비하하는 게 아니다. 하는 짓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TV 화면에 김건희가 비칠 때마다 그런 느낌을 받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최시중이 감히 ‘정명’ 운운하며 모욕 주던 이명박 시절

 

이름값을 하라는 말도 있다. 이름은 근사한데 하는 짓은 영 딴판이라는 거다. ‘정명(正名)’이란 이름값을 하라는 말도 되고 이름값을 못 할 거면 이름을 바꾸라는 말도 된다. MBC 기자 시절에 ‘정명’이란 말을 듣고 심한 모멸감을 느낀 적이 있다.

 

이명박 정권의 첫 방통위원장은 ‘방통대군’으로 불리던 최시중이었다. 이명박의 멘토이고 실세로 알려지며 호가호위하던 최시중은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MBC의 정명(正名)은 무엇인지 돌아보라’는 일장 훈시를 했었다. 그 말은 ‘공영방송의 주인은 국민’이니 하는 헛소리 집어치우고, 주인 찾아 민영화를 하라는 것이고, 정권 비판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는 거였다. 수신료가 아닌 광고가 주요 수입원이지만 콘텐츠에 경쟁력이 있어 광고주 눈치도 안 보고, 사주가 없으니 권력에서도 독립된 ’공영방송 MBC’를 만들려 했고,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던 우리는 최시중 방통위원장의 조롱 섞인 훈시에 심한 모멸감을 느꼈었다.

 

독립기념관장 김형석.

 

유엔묘지에서 풀이나 뽑아야 마땅한 독립기념관장

 

뜬금없이 최시중의 ‘정명’이 떠오른 건 순전히 독립기념관장 김형석의 망언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미화하는 뉴라이트 사관을 갖고 있다는 그는 독립기념관이 주관하는 8.15 광복절 기념식에서 ‘광복은 연합군의 선물’이라는 망언을 했다. 광복이 연합군의 선물이라는 건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것이고 일제 치하에서 노예로 살다가 공짜로 독립을 얻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독립을 기념해야 할 이유가 없고 독립기념관이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독립기념관이 없으니 당연히 독립기념관장이란 자리도 없을 것이다.

 

윤석열이 내리꽂은 ‘뉴라이트’ 독립기념관장 김형석은 역사를 보는 다른 시각도 있고, 그런 시각을 존중하는 것이 통합이라며 자신의 망언을 ‘두둔’했다.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 독립기념관은 일제에 맞서 나라를 찾으려는 독립 투쟁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그의 말대로 ‘광복은 연합군의 선물’이라면 김형석은 독립기념관장이 아니라 유엔묘지에서 풀을 뽑고 휴지를 줍는 자원봉사나 해야 딱 어울릴 사람이다. 그것이 ‘뉴라이트’ 김형석에겐 정명(正名)이다.

 

인권위원장 안창호.

 

미소 속 차별과 비하 숨긴 인권위원장 안창호

 

국가인권위원회는 소수자,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차별을 없애고 다양성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기구이다. 그런데 국가인권위원장 안창호는 그 반대로 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마초 기질까지 갖춘 그는 온화한 미소를 띤채 소수자 인권을 부정하고 다양성을 거부하고 차별을 인정하며 여성을 비하하는 행태를 당당하고 태연하게 한다. 그런 사람이 기관장으로 있는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름을 국가차별위원회로 바꿔야 한다. 그게 정명(正名)이다.

 

국가권익위원장  유철환.

 

국가권익위원회는 또 어떤가. 권익위의 이전 이름은 부패방지위원회였다는 것이 말해주듯 권익위의 임무는 부정부패를 예방하고 공직사회의 청렴성을 지키는 거다. 그런 권익위가 대통령 윤석열의 부인 김건희의 디올백 선물에 ‘문제 없음’이란 면죄부를 발부하였다. 그 과정에서 권익위 공직자로서 평생을 부패 방지에 헌신해온 권익위의 부패방지국장은 자괴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반면에 윤석열의 서울 법대 동기이고 친구라는 권익위원장 유철환은 껌딱지처럼 아직도 그 자리에 붙어 연명하고 있다. 유철환이 기관장으로 있는 한 권익위는 ‘부패장려위원회’로 간판을 바꿔 달아야 한다. 그게 또한 정명(正名)이다.

 

방송통신위원장 이진숙.

 

‘엠빙신’ 출신 극우 여전사가 장악한 방통위

 

방송통신위원회의 첫 번째 임무는 방송의 독립성을 지키는 거다. 그런데 방통위원장 이진숙은 어떠한가. 이른바 ‘빵진숙’으로 불리는 이진숙은 공직자로서의 자질 부족은 차치하고, ‘극우 여전사’라는 별명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이진숙은 MBC 보도를 책임진 보도본부장이었는데 ‘엠빙신’으로 불리던 그 당시의 MBC 보도는 MBC 역사에서 최악이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윤석열이 방통위원장으로 내리꽂은 극우 여전사 이진숙은 방송의 독립은커녕 KBS와 MBC를 윤석열의 선전도구로 만들려 했다. 윤석열의 지령을 받은 이진숙의 폭주에 법원의 제동이 없었다면 윤석열에게 맞장 뜨던 MBC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윤석열 치하의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장악위원회였고, 그 산하의 방송심의위원회는 사실상 방송검열위원회였다.

 

KBS 사장 박장범.

 

윤석열·김건희에게 정성을 다했던 아첨꾼 방송 KBS

 

공영방송 KBS의 로고송은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이다. 그런데 윤석열 치하의 KBS는 ‘윤석열에게 정성을 다하는 권력의 방송’이었고 ‘김건희에게 정성을 다하는 아첨꾼 방송’이었다. 지금 KBS 사장은 기자 출신 박장범이다. 그는 앵커 시절에 대통령 윤석열과의 대담에서 김건희가 받은 디올백을 디올백이라 하지 못하고 ‘외국회사의 쬐끄만 파우치’라고 했고, 김건희에게 주었다고 하지 못하고 그 앞에 놓고 왔다 얼버무렸었다. 몸이 자동으로 꼬이고 닭살이 돋게 하는 그 아부성 표현으로 얻은 별명이 ‘파우치 박’이고, 방송가에선 그 덕에 KBS 사장이 되었다는 말이 널리 회자되고 있다. 준조세인 수신료로 운영되는 KBS는 ‘국민에게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으로 돌아가야 하고 ‘파우치 박’이 KBS를 떠나야 한다. 각자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정명(正名)이다.

 

감사원장 최재해.

 

죽은 정권에만 칼질을 해 댄 감사원의 장님 무사 최재해와 유병호

 

내가 알고 있는 감사원은 국민이 낸 세금이 쓰여야 할 곳에 제대로 쓰이는지 살피는 기관이다. 그런데 윤석열 치하에서 감사원은 이전 정부에 대한 정치 보복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임무가 바뀌었다. 공론화로 결정한 탈원전 정책이 잘못되었다며 칼을 들이댔고,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통계는 조작이라며 칼을 들이댔고, 문재인 정부 당시 임명된 기관장을 쫓아내려고 칼을 들이댔다. 그렇게 조자룡 헌 칼 쓰듯 칼을 휘둘러 ‘정치 보복 흥신소’라는 악명까지 얻었지만, 김건희가 연루된 한남동 관저 공사 비리에는 ‘안 보여~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보여~’ 하며 두 눈 뜨고 장님 행세를 하였다. 앉은뱅이 주술사가 어깨 위에 올라앉아 조종하는 장님 무사의 행태가 그러할 것이었다. 감사원을 죽은 권력에는 칼을 휘두르고 산 권력에는 아부하는 간사한 기관으로 전락시킨 최재해 감사원장과, 감사위원으로 지위가 오른 전 사무총장 유병호는 국민 세금으로 월급을 받아가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300만원 어치 아니라 수천 만원 어치 엿 먹어야 할 검찰

 

국민권익위가 ‘김건희 디올백’에 문제없다는 면죄부를 발부하자 권익위 게시판에는 "300만 원 상당의 우리 전통 엿을 선물 드려도 문제가 되지 않을지 문의드립니다" 등등의 조롱 섞인 질문이 쏟아졌다.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일해온 권익위 직원들은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다. 검찰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출장 조사’로 김건희의 비위를 맞추던 윤석열의 검찰은 김건희에게 ‘혐의 없음’ 면죄부를 발부하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했지만, 권력과 먼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다수의 검사들은 몹시 부끄러웠을 것이다.

 

윤석열-김건희 부부가 기를 쓰고 거부하던 특검이 발족하고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니 300만원짜리 디올백은 새발의 피였다. 서희건설에선 매관매직 청탁용으로 의심되는 수천 만원짜리 다이아 목걸이를 받았고, 통일교에선 해외 원조 이권과 관련하여 몇천 만원짜리 다이아 목걸이를 받았다. KBS의 ‘파우치 박’ 사장에겐 그 다이아 목걸이도 외국회사의 소소한 장신구일까? 지금도 대통령이 윤석열이라면 권익위도 검찰도 수천 만원짜리 다이아 목걸이 받은 김건희에게 또 면죄부를 발부하지 않을까.

 

이름값 못하는 자들, 집이든 감옥이든 제자리로 보내라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나라는 ‘빅 브라더’가 모든 걸 감시하고 통제하는 독재국가다. 그런데 정부기구의 이름은 그 반대다. 언론을 검열하고 사상을 통제하는 부처는 진리부이고, 반정부활동을 감시하고 사상범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는 부처는 애정부이다. 책을 안 읽는다고 알려진 윤석열이지만 <1984>는 읽은 것 같다.

 

다시 한번 정명(正名)을 쉽게 풀어 말하자면 이름값을 하라는 거다. 아니면 하는 일에 맞게 이름을 바꾸거나. 감사원, 국가인권위원회, 국민권익위원회, 방송통신위원회, KBS 그리고 독립기념관… 이름값을 하도록 해야 한다. 염치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염치를 모르면 이름값을 못 한다. 임기제는 임명권자의 눈치나 살피지 말고 각 기관의 임무에 맞게 소신껏 일하라는 것이지 임기 동안에 네 맘대로 해도 된다는 ‘권한 오남용 자격증’이 아니다. 윤석열-김건희 부부가 감옥에 갔듯이 정명에 반하여 권력에 아부하거나 권한을 오남용하던 자들도 제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집이든 감옥이든.             < 송요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