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동키호테 불장난

● 칼럼 2024. 10. 21. 14:4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동키호테 불장난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청와대 행정관 오정은과 사업가인 한성기·장석중 등 3명은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의 조선 아태평화위원회 소속 박충 참사관을 만난다. 이들은 박충에게 대통령 선거 직전 휴전선 인근에서 무력시위를 벌여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접전을 벌이며 이른바 ‘차떼기 사건’과 아들 병역의혹 등으로 고전하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돕기 위해 북한에 무력시위를 해달라는 상식 밖의 이적성(利敵性)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선거승패에 목을 매달 정도로 다급했다 하나, 적군에게 아군을 향해 총을 쏘아달라는 제안과 거래를 하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자칫 남북간 전쟁으로 비화할 수도 있는 무력도발을 적에게 요청하는 충격적 발상이 청와대 직원까지 나서 ‘선거용’으로 악용됐다는 데서 비판여론이 폭발했다. 보수정권들이 민심을 돌리기 위한 충격요법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온 ‘북풍’ 사건의 하나인, ‘총풍사건’(銃風事件)이었다.

앞서 전두환 군사정권 막바지에 민심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열망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당시 궁지에 몰린 정권은 1986년 10월30일 갑자기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해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고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려 한다며 ‘평화의 댐’ 건설계획을 터뜨렸다. 모든 매체가 동원돼 금강산댐으로 북한이 수공작전을 펼치면 서울이 완전히 잠긴다는 공포여론 조성에 나서 국민적 모금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그런데 10.30 금강산댐 발표 다음 날, 정부는 재빠르게 건국대학에서 점거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헬기까지 동원해 강경진압, 1천5백여명을 연행해 그중 1천288명을 ‘용공좌경분자’로 구속하는 대규모 특공작전을 벌였다.

비현실적인 금강산댐 수공설을 퍼뜨리며 시위 학생들을 용공분자로 낙인찍은 군사정권의 반공몰이 공세로 인해, 반정부적 민주회복 투쟁은 잠시 주춤하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안기부가 벌인 ‘북풍공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 다음해 1987년 초여름, 6.10 민주항쟁으로 직선제개헌이 쟁취되었으니, 거짓과 폭력이 결코 오래 가거나 승리할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역대 군사 독재정권이 고비마다 ‘북풍’을 악용했다는 사실은, 과거 북한을 방문했던 특사에게 김정일이 “남쪽에서 총선을 앞두고 우리 군대에게 돈을 줄테니 판문점에서 중화기를 흔들어 달라고 주문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는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의 회고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취약한 남북정권 간에 암묵적인 소위 ‘적대적 공생’의 일단을 엿볼 수도 있는 증언이다.

민주화 이후 그 속셈을 간파당해 ‘양치기 소년의 늑대’처럼 효용이 사그러든 그 북풍과 총풍이, 독재를 흉내내는 어리숙한 정권 아래서 전쟁망령으로 되살아 나는 것일까.

한국의 드론이 평양 상공에 침략해 전단을 살포했다고 북한이 연일 펄펄뛰며 ‘끔찍한 참변’을 들먹여 위협하고 있다. 북은 특히 “한국 군부가 주범”이라면서 전방부대에 전투태세 명령까지 내려 일촉즉발의 불안을 자아낸다. 한국 국방부는 “북 정권의 종말”을 경고하며 ‘할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강하게 맞받아 치지만, 드론을 보낸 주체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애매한 태도를 보여 사태를 조장한다는 불신도 사고있다. 일부에서는 “윤 정권이 국정난맥의 늪을 벗어나려고 신북풍을 이용하는 게 아니나”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사태의 근본원인이 대북 풍선 전단살포에서 비롯돼 북이 오물풍선으로 받아치고, 대북 확성기에 북 또한 대남 확성기 대응으로 에스컬레이트 된 끝에 무인기로 강대 강 선제위협을 가한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번 사태에 미국의 책임도 거론했다. 한국이 ‘전작권’도 없는데 미국 용인없이 감행했겠느냐는 것이다. 민간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암암리 지원한다는 CIA를 겨냥한 것일 수도 있다.

드론을 한국 군이 보낸 것인지, 민간단체가 보낸 것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어느 쪽이든 위험한 불장난 임에는 틀림없다. 만에 하나 남북간 충돌로 번져 전쟁에 휘말린다면, 그야말로 상상조차 하기싫은 민족공멸의 참상을 감당해야 한다. 혹여 정권의 치부를 가리고 곤경을 모면해 보겠다는 꼼수의 발상이라면, 나아가 충돌을 빌미로 ‘계엄’ 운운까지 노린 공작이라면, 그야말로 민족을 불구덩이 제물로 삼은 천인공노할 반민족 반인륜적 만행이고 동키호테 같은 전쟁놀음이 아닐 수 없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물론이고 이스라엘-하마스, 헤즈볼라 전쟁도 현대 첨단전쟁이 얼마나 잔학한지를 보여준다. 과거 전쟁은 나름대로 정의를 앞세운 응징과 보복에 그쳤던 것과 달리, 이제는 전쟁의 명분도 원칙도 불분명한데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특징을 보인다고 말한다.

노벨상을 받은 한강 작가는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매일 죽어 나가는데, 잔치를 할 수는 없다”며 수상 회견을 피했다. 그런 품격과 인간애를 지닌 노벨상 작가를 배출한 한쪽에서는 최고의 작가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전쟁 불장난을 ‘소꿉장난’쯤으로 여기는 모리배들이 설치는 요즘 한국이다.   < 편집인 김종천 >

 

[목회칼럼]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

● 칼럼 2024. 10. 21. 14:1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 기쁨과 소망]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

 

박원철 목사 < 늘사랑교회 담임목사>

 

      어떤 쥐 한 마리가 있었다. 이 쥐는 항상 불평불만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한 마법사가 왜 그렇게 불평불만을 하면서 살아가는가 살펴보았더니, 같은 집에 살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그 쥐를 너무나도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법사가 불쌍히 여겨 그 쥐를 고양이로 변화시켜 주었다. 그랬더니 고양이로 변한 이 쥐는 또다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그 이유인즉 같은 집에 사는 개 때문에 못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법사는 개로 바꾸어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동네 산속에 사는 호랑이 때문에 못살겠다고 불평불만을 토로했다. 그래서 호랑이로 바꾸어 주면서 ‘이제는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는데, 호랑이로 변한 이 쥐는 또 다시 사냥꾼 때문에 못살겠다고 불평불만하면서 하소연했다. 그러자 마법사가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다시 쥐가 되거라. 너는 쥐새끼의 마음 밖에 가질 수 없으니 나도 어쩔 수 없구나.”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태도가 우리의 행동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불평불만에 사로 잡혀 사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어도 감사할 줄 모른다. 감사할 줄 모르니 삶이 행복하지가 않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감사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막히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막히고, 물질과의 관계도 막힌다. 모든 것이 막히고 열리지 않는다.

감사하는 일과 불평하는 일을 기준으로 사람들을 나누어 보면 3가지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평생 불평불만만 하는 사람이다. 둘째, 불평할 것은 불평하고 감사할 것은 감사하는 사람이다. 셋째, 무슨 일을 만나든지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런 3종류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

    사실 감사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감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다. 미숙한 사람과 성숙한 사람의 차이는 보는 시각에 있다.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것에 집중하고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인해 감사한다. 그러나 미숙한 사람은 받은 것보다는 받지 못한 것에 집중한다. 자신에게 있는 것보다 없는 것에 집중한다. 내가 가진 것보다 남이 가진 것에 집중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자신에게 없는 것에 대해 원망하고 불평불만한다. 또한 미숙한 사람은 현재의 불행만 바라보며 불평불만한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미래의 소망과 축복을 바라보며 감사한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숙한 영혼은 감사하는 영혼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성숙도는 그 사람이 얼마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에 의해 측정할 수 있다. 그의 마음 속에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지에 의해 측정할 수 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 얼마나 감사하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가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감사하는 사람은 범사에 밝고 긍정적인 부분만 보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똑같은 눈을 가지고도 어둡고 부정적인 면을 보면 불행해진다. 소유하지 않은 것, 잃은 것을 보면 불행해진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것, 아직도 할 수 있는 것, 내 안에 감추어진 보화를 보게 되면 행복해진다.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므로 감사는 더 큰 기적을 낳고, 감사는 더 큰 축복을 얻게 한다.

 

"군복 입어도 할 말 못하면 병신?" "답할 필요 못느껴?"

민의의 전당서 내보인 적개심과 독기가 불안한 까닭

국군은 '통수권자의 군대'가 아닌 '국민의 군대'이다

 

김진호 에디터

 

"아무리 군복을 입어도 할 이야기는 해야죠. (황희 의원이 여인형 방첩사령관의 발언 예의를 지적하자) 군복 입었다고 할 이야기 못하고 가만히 있는 게 더 병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용현, 8일 국방부 국정감사 발언)

의정사에 길이 남길 어록

지난 8일 국회 국방위원회 국방부 국정감사장에서 장애인 비하 용어가 튀어나왔다. 수감기관장인 김용현 국방장관의 입에서다. 많은 언론은 'XX' '병X' 등으로 표기했다. 정확한 사실 전달을 방해한다는 판단에 말 그대로 전한다. 대한민국 의정사에 길이 남겨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어록이다.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의원이 국회 위증 내용을 전하면서 여인형 사령관과 장관의 '흐리멍텅한 대처'를 탓하자, 장관은 '흐리멍텅한 사람'으로 바꿔 빈정댔다. 위증 내용을 확인하는 김 의원의 발언 도중 "흐리멍텅한 사람에게는 흐리멍텅한 사람만 보이는 것이죠"라고 하더니, 잠시 뒤 장관 본인의 답변 내용에 대해 확인을 요청받자 "흐리멍텅한 사람에게는 흐리멍텅한 사람만 보이는 것이죠, 예~."라고 반복했다. 귀찮다는 듯 머리를 상하로 몇 차례 흔들면서 내뱉은 말이다. 국회에 대한 존중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국회 위증죄가 최고 10년 형에 처할 수 있다는 경고에 "10년이 아니라 100년이라도 살 테니까 말씀하세요"라며 거듭 비아냥거렸다.

 

김용현 국방장관이 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국정감사도중 발언하고 있다. 2024.10.8. [연합]
 

윤석열 정부 들어 고위 관료들의 국회 답변 태도가 문제가 된 건 처음이 아니다. 어느새 일상적인 국회 풍경이 됐다. 그러나 이날 전‧현직 군복은 공격적으로 '선'을 넘었다. 2017년 육군 중장으로 군복을 벗기 전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김용현이 어떻게 저렇게 변했나"라면서 혀를 찬다. 여 사령관도 도긴개긴이다. 현역 군인이라는 점에서 심각성이 더할 뿐이다. 지난 8월 초 김용현 경호처장 한남동 공관에서 있었던 방첩사·특전사·수방사 사령관 회동에 대한 질의응답에서 신원식 당시 국방장관이 보고받았는지를 확인하는 김 의원의 질의에 "답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답했다. 김 장관은 이 과정에서 "군을 분열시키지 마라"고 외쳤다.

"군을 분열시켰다"고?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발언과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했다. 사과라고 보기엔 애매했다. 장관은 "군복 입은 사람이 할 말을 해야 한다는 취지인데 표현이 과했다는 점에서 유감"이라고 말했다. 사령관은 말이 길었다. "개인적으로 무려 한 달 동안 개인적으로, 여러 공개 석상에서, 유튜브를 통해서 참기 힘든 인격적 모독도 받았다. 의원 말씀에 격하게 발언한 것도 있었다"고 역시 유감을 표했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특정 고교 출신이 군통수권자-국방장관-방첩사령관 자리에 앉았다. 역사적으로 '계엄의 발'이었던 3개 사령부 수장의 회동 이후 계엄령을 우려하는 여론이 일었다. 국민적 불안을 해소하기는커녕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장면은 기괴했다. 야당 의원들의 질의가 "군을 분열시켰다"는 말에 대해서는 사과는커녕 유감 표명도 없었다.

유튜브 중계 화면에 비친 장관과 사령관의 눈에는 적개심이 가득했다. 대놓고 국회를 무시하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2024년 10월 현재, 대한민국 의회 민주주의의 수준, 아니 의회 민주주의를 대하는 장관과 사령관의 수준이었다.

 

김용현 국방장관이 1일 서울 광화문 광장 관람석에서 제76회 국군의 날 시가행진을 지켜보면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무언가 설명을 하고 있다. 2024.10.1. [연합]
 

장관은 군복을 입고 있던 시절 합참 작전본부장 자격으로 국회 증언석에 앉았었다. 당시 '육군중장 김용현'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 때만 해도 의원들의 질의에 예의를 다해 응했었다"고 말한다. 2017년 송영무 국방장관 군사보좌관실 과장 시절 여인형 대령을 기억하는 이는 "당시만 해도 문재인 정부 국방정책을 적극 찬성하던 이였다"라고 전한다. 대한민국 흑역사에 '하나회'를 비롯해 군내 사조직은 있었지만, 군통수권자가 포함된 고교동창이 거론되는 것 자체가 불온하다. 전대미문의 일이기에 국민을 불안케 한다. 그런데도 장관과 사령관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왜일까?

장관은 군 경력이 화려하다. 육사 38기로 육군 17사단장,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을 지낸 뒤 2017년 11월 군복을 벗었다. 본인은 대장 진급을 위해 노력했겠지만, 뜻을 접었다. 5년이 지났다. 잊을 만한 무렵 '인생 로또'가 터졌다. 충암고 1년 후배가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나서는가 하더니 대통령에 덜컥 당선된 것. 그냥 후배가 아니다. 충암고 학도호국단 연대장 자리를 물려준 이였다. 대통령경호처장으로 2년 4개월 동안 용산 대통령실 이전 작업을 지휘했다. 유독 그의 경호처장 시절 과잉 경호와 '입틀막'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1월 전주 전북특별자치도 출범식에서는 처장이 직접 나서 완력을 행사했다. 진보당 강성희 의원이 경호처 직원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나가는 과정에 그가 손으로 내려치는 장면이 포착된 것.

"사람이 왜 저렇게 변했을까…"

1인에 대한 넘치는 충성은, 만인에 대한 오만으로 뒤틀린다. 7년 전 일개 대령에서 사령관으로 거듭난 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날 국방부 국감장에서 벌어진 일은 단순한 소동에 그치지 않는다. 섬뜩한 기운마저 풍겼다. 선량을 저렇게 대하면 일반 국민은 어떻게 여기겠는가.

 

윤석열 대통령이 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여인형 국군방첩사령관에게 삼정검 수치를 수여하고 있다. 2023.11.6. [연합]
 

전·현직 군복의 일탈이 가능했던 건 주군의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일 거다. 20여 차례 법안 거부권을 행사하며 새 역사를 쓰고 있는 통수권자이다. 국회에서 내보인 말과 행동이 죄다 단 한 명의 오디언스를 상대로 한 퍼포먼스라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군복'도 입신양명을 추구할 자유가 있다. 그런데 국군은 통수권자의 군대가 아니다. 군인복무기본법 제5조 제1항은 국군이 '국민의 군대'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안팎으로 안보 정세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럴 때 군과 국방 수뇌부가 1인만 바라본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다. 국회는 일개 장관, 일개 사령관이 어르고 뭉갤 대상이 아니다.

[편집인 칼럼] 탐욕자들이 부르는 동물적 재앙

● 칼럼 2024. 10. 4. 13:3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한마당]  동물적 탐욕의 재앙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문명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 듀런트(1885~1981)는 그의 방대한 저서 ‘문명 이야기’(The Story of Civilization)에서 인류역사에 기록된 3,421년 중 전쟁이 없었던 해는 268년 뿐으로, 7.8%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미래학자인 앨빈 토플러는 1945년부터 1990년까지를 취합해 총 2,340주 동안 지구촌에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단 3주일 뿐이었다고 전했다. 인류가 사실상 전쟁과 함께 살아왔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옥스퍼드 대학의 맥스 로저 경제학 교수는 지난 600년 동안의 전쟁을 통한 사망률을 분석해 보니 요즘 우리는 특별한 평화의 시기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해마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률은 일정수준을 이뤘고, 두 차례 세계대전으로 인해 그 최대값과 최소값이 20세기에 나왔지만, 전쟁 이후 급격한 감소세로 돌아서 요사이는 평균 산출된 전쟁사망자가 0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평화시대’라는 말을 실감하는가.  전혀 아닌 것 같다. 
3년째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해, 이스라엘은 최고의 우방인 미국 마저 ‘패싱’하며 무차별 살상전으로 하마스와 헤즈볼라 초토화 작전에 몰두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정부군과 반군 대결 등 사상자 숫자가 제대로 집계되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크고 작은 전투와 전쟁이 각처에서 날마다 벌어진다.

성경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자신이 지은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축복의 명령을 말씀한다. 그런데 금단의 열매를 먹고 사악해진 인간은 창조주가 강조한 축복의 언약에서 유독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대목에 마음이 꽂혀 용렬해졌는지 모른다. 유사이래 정복하여 지배하려는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해 남의 것을 빼앗고, 죽이고, 짓밟는 약육강식의 동물적 습성을 지속해 오고 있다. 

동물의 세계에는 그래도 균형이 이뤄진다. 동물의 왕 사자는 약한 동물들을 무자비하게 사냥 하지만, 배가 부르면 눈앞에 멋잇감이 있어도 공격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연계 스스로 공생 공존하는 섭리다. 허나 사람은 다르다. 배가 부르고 곳간이 넘쳐도 사냥감을 발견하면 또 다시 잔인하게 죽이고 탈취해 기어이 지배욕을 채우는 무한의 탐심을 발동한다. 

물론 사람의 인성이 다 같지는 않다. 아무리 상대가 허약해도 존중해주며 상생의 대상으로 삼는 선하고 자비로운 감성과 이성을 지닌 이들이 더 많다. 그들은 침탈이 아닌 화해와 평화를 추구한다. 그런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은 인간사와 국제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돼, 선악의 판단보다 강자의 논리와 힘의 논리가 우선하고 횡행한다. 어쩌면 갈수록 심화되어 피아 갈라치기로 분열과 적대를 넘어 상대를 죽이고 나만 살겠다는 독존적 행태와 사악하고 뻔뻔한 자들의 논리로 ‘확장 진화’하는 세상이다. 

이스라엘을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넣고 있는 네타냐후 총리 같은 인물들이 바로 그런 무모하고 독선적인 극단적 탐욕자들이다.막무가내 네타냐후는 전쟁을 멈추면 총리직이 위태롭다고 한다. 총리를 그만두면 곧바로 형사소추를 당할 부패한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해도 개인의 안위에 눈이 멀어 나라를 전쟁으로 몰아가 수많은 인명살상을 부르는 그야말로 비열하고 잔인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최근 탄핵여론이 비등한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은 자신과 부인의 비리와 부정부패 의혹을 뭉개고 덮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검찰은 물론 국가 주요 권력기관들이 내로남불의 방패막이가 되어 국민을 위한 국정은 내팽개친지 오래다. 국정 최고 의결기구인 국무회의 마저 특검법안의 대통령 거부권 행사 보조기구로 전락한 상태다. 국가기관이 오로지 대통령 일가 범죄의혹 방어에 악용되면서 총체적 국정 난맥을 초래하고 있는 불행하고 몰상식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계엄 준비설까지 나도는 비정상적인 상황에, 무리한 혈세를 쏟아부어 탱크와 전투기까지 동원한 시가지 군사퍼레이드를 곱잖게 보는 국민의 눈총과 불안은 그들 안중에 있을 리가 없다. 와중에 전쟁불사의 대 북한 적대발언을 수시로 내뱉는 것에서 동물적 충동공격의 위험성을 본다.

비루한 탐욕자들이 평화를 깨고 비참한 전쟁을 부를 수도 있다.  민주주의가 불의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호벽은 아니다.  아무리 법과 제도와 윤리를 강조해도 탐욕의 리더십은 이를 교활하게 회피하고 무력화한다.  국민의 판단과 선택의 중요성을 백번 강조해도 모자라는 이유다. 다수결 승자독식 구조에서 순간의 착각과 오판이 불러오는 미래는 불행과 퇴행과 저주의 동물세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뒤늦게 후회하다 보면 주권자 자신의 탐욕이 결국 탐욕자를 만들어 낸 것임을 깨닫지만, 이미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는 남는다. 

한달 남짓 남은 대선에서 미국인의 선택은 비단 미국뿐만 아니라, 국제사회 전 인류의 장래에 자칫 눈물과 재앙이 될 수도 있다. 해리스와 접전을 벌이고 있는 트럼프는 거짓선동과 적대정치를 만연케 하고, 기후협약 탈퇴로 지구촌의 기후위기를 가속화 시킨 장본인이다. 

한때 김정은과 협상을 벌였기에 한반도 통일에 도움을 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트럼프든 해리스든 공통점은 그들의 최우선이 정복과 지배에 능한 미국익(美國益) 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인이 명심할 일은 우수한 지도자를 택해서 한국익(韓國益) 최우선의 길을 열어가는 것 만이 정복과 지배를 떨치고 번영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