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날더러 난을 일으켰다고 하느냐
왜놈한테 나라 팔아먹은 너희들이 반란자다

허락을 받았느냐고? 진리 펴는데 무슨 허락!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허락받고 치우나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동학농민혁명(1894~5)의 주역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이 봉기한 지 1년 만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사형을 당하기까지 모두 5차례 심문을 받았다. 당시 법무부 재판관과 일본 영사가 배석했고, 법무부 관료 서광범이 묻고 전봉준이 답했다.

문: 네 이름이 무엇이냐?

답: 전봉준이다. (중략)

문: 왜 난을 일으켰느냐?

답: 어찌하여 날 보고 난을 일으켰다 하느냐? 난을 일으킨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 아니냐?

문: 관아를 부수고 민병을 일으켜 죄 없는 양민을 죽게 한 것이 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답: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중략)

문: 그럼 너도 최시형(해월)에게서 봉기의 허락을 받았는가?

답: 진리를 펴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 충의(忠義)란 본심(本心)이다. 그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면 그대는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

 

녹두장군 전봉준은 1894년 말 전북 순창군 피노리에 피신해 있다가 옛 부하인 김경천의 밀고로 붙잡혔다. 현재 이곳에는 '녹두장군 전봉준관'이 들어서 있다. 2017.1.28. [연합]
 

자유의 본질 꿰뚫은 동서의 두 혁명가와 친일파 이광수의 ‘강자 동일시’

나는 이 짧은 대화(?) 속에 ‘프레임 전쟁’이 있다고 본다. 비록 전봉준은 물리적 전쟁에선 져서 만 40에 세상을 떠났지만, 프레임 전쟁에서는 이겨서 지금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다. 프레임 전쟁에서 이기는 비법은 사물을 풀뿌리 민초의 입장에서 보는 것, 가장 낮은 자의 관점을 잃지 않는 것,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춘원 이광수는 이와 180도 다르게 보았다. 그에게 ‘프레임 전쟁’은 없다. 차라리 대적할 수 없는 강한 상대방의 프레임 속으로, 그것도 아주 깊숙이 들어가 버리는 게 그의 ‘생존전략’이었다. 그는 1940년 9월 <매일신보>에서 “조선인은 전연 조선적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 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길이 있다고/ 조선 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읊어댔다. 강자를 만나 도저히 싸울 수도, 도망갈 수도 없을 때는 차라리 강자 앞에 무릎 꿇고 ‘형님, 뭐든 할 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쇼’하는 마인드, 한마디로, ‘강자 동일시’ 심리다. 그 뒤 80여 년이 흐른 지금, 서글프게도 우리는 개인 이광수가 아닌, 대통령 이광수를 보고 있다. 미국과 일본 앞에 간과 쓸개까지 모두 내어줄 것처럼 행세하는 대통령 이광수! 그에게 까짓것, 독도 정도야 ‘껌값’ 아닐까? 만일 녹두장군이 ‘환생’하여 대통령 이광수와 독대한다면 과연 뭐라 일갈했을까?

당시 조선에서 혁명가로 ‘짧고 굵게’ 살고 간 전봉준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구 반대편에서 살았던 혁명가가 있었다. 쿠바의 독립 영웅, 시인이자 교육자인 호세 마르티(1853~1895)다. 그는 “억압받고 있는 나라에서 시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혁명전사가 되는 것뿐”이라며 기꺼이 투쟁에 나섰다. 오랫동안 쿠바를 지배, 수탈, 착취하던 스페인 제국주의에 맞서려는 결단! 전봉준의 일갈처럼 “그대 발등에 불이 떨어진다면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하는 단호함이다. 또 호세 마르티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려 들지 않는 사람만이 자유를 위해 투쟁할 자격이 있다”고도 했다. 이는 또한 “난을 일으킨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이 아니냐?”며 호통을 치던 전봉준의 소신과 통한다. 130년 전 같은 지구 위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렇게도 마음이 통하는 이들이 목숨을 바쳐 참된 자유와 평등, 우애의 세상을 위해 ‘짧고도 굵은’ 삶을 살다 갔다. 새삼,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베르톨트 브레히트)을 느낀다.

국정관리 능력 자체가 없는 것 같은 ‘제왕 같은 보스’ 대통령

최근에 전봉준과 호세 마르티를 이토록 간절히 떠올리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를 강박적으로 외치는 2024년 8월의 윤석열 덕이다. (물론, 그의 ‘자유’는 우리가 아는 ‘자유’와 전혀 다르다. 그의 자유가 돈과 권력의 자유라면, 우리의 자유는 돈과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니까.) 윤석열 대통령은 1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을지훈련 및 제36회 국무회의’에서도 이렇게 발언했다. “우리 사회 내부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 북한은 개전 초기부터 이들을 동원해 폭력과 여론몰이, 선전·선동으로 국민적 혼란을 가중하고 국민 분열을 꾀할 것이다. 이러한 분열을 차단하고 전 국민의 항전 의지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적극 강구해야 한다.”

처음에 나는 귀와 눈을 의심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40년 전 전두환 시절이나 50~60년 전 박정희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 때문! 찬찬히 행간을 읽어 보면, ‘전쟁 준비’ 중인 것으로 보인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특검 당시, 마치 ‘정의로운’ 검사인 것처럼 이미지 관리를 잘한 덕에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이가 불과 3년도 못 돼 ‘제왕 같은 보스’로서 국정을 주무르다니, 정말 꿈같은 이야기다, 악몽이 따로 없다!

게다가 대통령의 눈에는 사실이나 진실도 “허위 정보와 가짜뉴스”로 보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대통령 부부나 국정에 대한 비평 내지 비판은 ‘공격’으로 느껴지는 걸 넘어 “북한의 회색지대 도발”로 인식되는 것 같다. 이 정도면 국정관리 능력 자체가 검토 대상이다. 큰일이다!

통치 안정성 해치는 정권, 자본은 언제까지 용인할까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1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이날 기념식은 광복회가 불참해 반쪽이 됐다. 2024.8.15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등 공신이었던 조선, 중앙, 동아 등 보수언론조차 이미 ‘레임덕’ 같은 용어를 써가며 ‘정치적 거리두기’를 한다. 2024년 벽두의 대통령 신년사에 대해서도 조‧중‧동은 (기존의 ‘우호적’ 분위기와는 달리) 이구동성으로 “아쉽다”고 했다. 아마 4.10 총선을 앞둔 훈수였을 터! 그 뒤 조선일보는 장기적 안목 없이 즉흥적으로 행해지는 대통령실 인사에 대해 “정상이 아니”라며 꼬집었고, (검찰 조사를 받은 건지 검찰을 조사한 건지 모를 정도로 모호했던) 김건희 명품백 무혐의 결정을 앞두고 “받은 것 자체가 부적절”이라 쏘아댔다. 중앙일보는 대통령이 ‘얼차려 사망’ 훈련병 영결식 날 술자리를 가진 걸 두고 “진정한 보수라면 이럴 수 있나”며 질타했고, 동아일보도 “오염수 우려, 괴담으로만 보면 안 돼”라고 어깃장을 놓기도 했다. (작년 8월 이후 꼬박 1년간 일본은 윤 정부의 동의 아래 후쿠시마 핵폐수를 매번 8천 톤 가까이, 모두 8차례나 바다에 방류했다. 방사능투성이 바닷물은 돌고 돌다 결국 우리에게도 올 것이다.) 이제 그들도 대통령을 슬슬 ‘버리는’ 분위기 내지 ‘헤어질 결심’인 듯!

냉정히 보건대, 재벌과 파트너인 보수언론은 (마치 미국이 그러하듯) 한국 정부가 ‘통치의 안정성’을 유지해야 ‘지속 가능한 축적’을 이룰 수 있다는 계산이다. 자본의 목적은 누가 뭐래도 이윤 획득인데, 그러려면 ‘세상이 조용해야’ 한다. 이런 통치의 안정성을 기대할 수 없다면 자본은 정권을 가차 없이 ‘버린다.’ 솔직히 보자면, 그 정권이 국힘당이건 민주당이건 큰 차원에서는 마찬가지다. 이왕이면 국힘당 계열이 더 확실하겠지만, 민주당 정권조차 자본의 ‘지속 가능한 축적’에 정면으로 도발하지 않고 통치의 안정성만 유지해 준다면 ‘일단, 오케이’다. 이는 이미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확실히’ 증명된 바다. 물론, 보수언론과 재벌들, 그리고 정치 검찰과 정치 경찰, 나아가 보수 학계 및 보수 지식인들은 ‘민주당’ 권력을 길들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그 수단은 명백히 돈과 정보, 그리고 협박이다.

정치 검사의 심문에 맞선 ‘반국가세력’의 ‘프레임 전쟁’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앞서 살핀, 녹두장군 전봉준의 심문 과정을 ‘오늘에 되살려’ 이렇게 각색하고픈 충동을 강렬히 느낀다.

문: 너희는 누구냐?

답: 너들이 말한 “반국가세력”이다. (중략)

문: 왜 “암약”을 하고 있느냐?

답: 어찌하여 우리더러 “암약”을 한다 하느냐? “암약”을 하는 건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 그리고 수사조작, 증거조작, 고발사주, 조사농단, 마약밀수, 역사왜곡 따위에 대해 전혀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너희 정치 검사들 아니냐?

문: 허위 정보와 가짜뉴스, 사이버 공격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험에 빠뜨리고 국민의 정신을 혼란하게 만드는 게 ‘암약’이 아니고 무엇인가?

답: 자유도, 민주주의도, 역사까지도 망가뜨려 국민을 혼란하게 만든 건 우리가 아니라 바로 너희 ‘가짜 한국인들’이다. 우리가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온 건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국민들 삶의 질과 민주주의를 고양하고자 할 따름이다. (중략)

문: 그럼 너희들도 최시형(해월)에게서 촛불 봉기의 허락을 받았는가?

답: 민주주의를 하자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 정의(正義)란 본심(本心)이다. 당신 발등에 똥이 떨어졌다면 당신은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

문: 아직 할 말이 남았는가?

답: 제발 정신 좀 차려서, 세계 공멸 앞당길 ‘전쟁 준비’ 같은 건 않으면 쓰것다! 쿠바의 호세 마르티 선생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려 들지 않는 사람만이 자유를 말할 자격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점점 강해지는 자본의 지배력, 대통령 이광수와 돌아온 아베

물론, 이런 식으로 전봉준처럼 깡다구 있게 ‘프레임 전쟁’을 압도하기는 쉽지 않다. 돈, 정보, 권력, 네트워크, 협박 등을 활용한 자본의 지배력(길들이기 전략)이 너무나 거대하고 교묘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돈(화폐 권력) 앞에 무너진다. 돈이 아니라도 ‘발목’이 잡힌 경우도 많다. 지배권력(자본과 정치의 동맹)은 정보력을 이용해 평소에 요주의 인물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른바 ‘검찰 캐비닛’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기에 선거 직전엔 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처럼 세상을 바꾸겠다고 목소리 높인 사람들도 막상 당선되고 나면 ‘슬슬 알아서 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가 임기가 끝나고 나면 한가하게 언론에 나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식의 한담이나 나누기 일쑤다. 나는 일제가 남기고 간 ‘밀정들’이 죽(이)도록 밉지만, 이런 식의 ‘가짜 혁명가’는 더 밉다. 그래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공부가 필요하다.

특히, 1945년 8월 광복 당시 조선의 마지막 일제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가 이런 말을 하고 떠났다 한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인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란 세월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이미 이 땅에 대통령 이광수도 돌아왔고 아베 노부유키도 무수히 많이 돌아온 듯하다. 아, 식민지 노예 교육! 오호, 통재라!

사태의 진실을 파악하기가 이래서 힘들게 되었는데, 하물며 본질보다 현상에만 눈이 곧잘 쏠리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자본의 지배력이나 자본 독재의 실상이 잘 보일 리 없다. 설사 본인이 직접 피해당사자가 되는 불행한 시간이 닥쳐 어렴풋이나마 자본 독재의 실상이 보여도, 자본의 지배력에 맞서 싸울 능력도 기운도 의지도 대체로 약하다. 그래서 대다수는 기껏 ‘떡고물’이나 좀 더 많이 챙기려는 분배투쟁에만 목숨을 걸 뿐, 근본 문제를 뿌리 뽑으려는 의지는 약하다. 그러나 좌절과 포기는 영원한 패배일 뿐!

 

24일 촛불대행진을 벌이는 시민들이 대통령실을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촛불행동TV 화면 갈무리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끊임없이 균열을 내며 행진하자

따라서 스페인 카탈루냐오베르타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로라 로스 선생의 말(<녹색평론> 186호, ‘지역의 자치, 왜 중요한가’)처럼 “사람들은 비록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는 없을지라도 거기에 균열을 낼 수 있다.” 그리고 “(균열을 내는 식으로) 성취감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비관주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렇다. 반인간, 반민주, 반생명 체제의 틈새를 뚫고 부단히 균열을 냄으로써 우리는 성취감과 효능감을 느끼게 된다. 민주주의의 완성을 향한 행진이다!

마치 (전봉준과 비슷하게 꼬박 40년만 살았던) 세계혁명가 체 게바라(1928~1967)가 쿠바 혁명에 성공한 뒤 혁명 동지 피델 카스트로를 떠날 때 했던,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란 말처럼, 우리 역시 ‘영원한 승리의 그 날까지’ 결코 민주주의 행진을 포기할 순 없다. 세상이 아무리 비관적이고 정치가 아무리 더럽고 치사해도, 오늘 우리가 여기저기 뿌린 민주주의의 씨앗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이미 딱딱해진 땅조차 균열을 내며 소록소록 새싹을 틔우게 될 것이니!

[편집인 칼럼] 한민족 출애굽기

● 칼럼 2024. 8. 23. 13:0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한민족 출애굽기

 

 

광복절을 지나며 하도 어수선하고 답답하다 보니, 성경에 기록된 출애굽기를 떠올려 비춰보게 된다. 해방된 지가 79년인데, 기다렸다는 듯 한꺼번에 뛰쳐나온 ‘친일 노예근성’의 준동을 보며 우리 민족이 어쩌면 노예에서 풀려난 이스라엘 유민들 처럼 여전히 광야를 헤매고있는 처지는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들어서다.

성경의 출애굽기는 선민(選民)을 인도하는 창조주의 구원의 이야기로 알려져있다. 애굽(이집트)에서 노예상태로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입성까지의 계획과 섭리, 그리고 놀라운 ‘역사하심’이 그려진다. 그 구속사의 줄기는 전능자의 무한한 은혜의 손길에 의지하면서도 노예습성을 버리지 못한 채 불순종과 배반을 반복하고, 징벌에 놀라 회심을 되풀이하는 인간의 속성과 민낯을 생생하게 드러내며 우리에게 삶의 교훈과 메시지를 던진다.

야곱 가족의 이주로 시작한 애굽생활 430년 동안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려 60만명이 넘는 민족으로 번성했다. 그러나 요셉 총리시대의 영화는 가고, 노예신분으로 전락해 민족차별과 박해, 노역에 시달리게 된다. 그 신음소리에 하나님은 모세라는 지도자를 세우고 구원의 언약을 이행하여 백성을 해방시킨다.

Exodus(탈출)를 저지하는 왕권을 10가지 이적(異蹟)으로 깨뜨리고, 홍해를 갈라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구해낸 불가사의와 기적을 찬양하며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지만, 사람들은 광야생활 불과 사흘 뒤부터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광야의 자유보다 옛 노예시절이 차라리 낫겠다는 것이다. 물과 음식, 굶주림, 적대세력 등 불만과 곤경에 처할 때마다 만나와 메추라기,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보살피는 데도, 우매한 사람들은 광야의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원망하며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불경의 죄를 범하기까지 한다.

결국 그들은 자업자득의 징계를 받는다. 당대에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한 채 40년간 광야의 고통을 감내하며 단련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가나안’에 합당치 않은 노예시절의 관념과 습성들을 모두 버리도록 혹독한 훈련을 받는 것이다. 그렇게 노예근성 탈색과 광야의 연단을 거쳐 비로소 영광의 가나안 시대를 열게 된 승리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2세들이었다.

그렇게 출애굽은 광야를 거치는 환골탈태의 교훈, 곧 시련과 고난을 넘어 옛사람의 구태를 철저히 벗어던지지 않고는 영광스런 낙원에 이를 수 없다는 구원의 섭리를 강조해 준다.

 

엊그제 한민족 전세계 동포들은 해방 79년을 맞아 기쁨의 감회보다는 안타까운 탄식으로 광복절을 보내야했다. 마치 봇물이 터진 듯 '친일'과 ‘매국’ 논란이 쏟아진 때문이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던 선열들의 후예가 모인 광복회와 독립운동가 단체들이 이른바 ‘뉴라이트 사관’을 가진 인물의 독립기념관장 임명에 반발해 광복 이후 처음으로 광복절 행사가 두쪽이 났다. 국방부는 군 정신교육 교재를 새로 발간하면서, 홍범도, 김좌진 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모두 뺐다. 공영방송 KBS는 광복절 당일, 일본국가 ‘기미가요’가 나오는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을 내보냈고, 좌우가 바뀐 태극기 그래픽을 배경으로 송출하기도 했다. 서울교통공사는 지하철역 여러 곳에 설치된 독도조형물을 철거했다가 반발 여론이 거세자 뒤늦게 재설치하겠다고 했다. 대통령실 외교안보 책임자는 속칭 ‘중일마’ 발언으로 국민 마음을 들쑤셨다.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보다) 일본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모두 광복절을 전후로 약속이나 한 듯 벌어진 ‘민족 자존심을 짓밟은’ 사례들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 산하 25개 역사관련 기관을 이른바 ‘뉴라이트’ 친일 인물들이 장악했다고 한다. 일제식민의 과거사를 ‘미화’하는 비루하고 사대적(事大的)인 역사관을 2세들에게까지 주입하려는 광범위하고 치밀한 공작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항일 자주독립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할 목적으로 건립된 독립기념관장에 “친일인사들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장담하는 자를 앉히는 반역적 행태가 그 단적인 예다.

미국의 외교전문지 Diplomat는 최근 “윤석열은 일본의 역사를 세탁하는 데 있어 기시다 내각이 발견한 완벽한 공범”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에 귀화한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은 윤석열 정부가 낮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고, 다음 정권은 다시 진보 정권이 될 것 같기 때문에, 윤 정권 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보려는 움직임”이라고 전했다. 윤 정권이 과거사 세탁에 목을 매는 일본과 한 몸이 된 공범이거나 만만한 호구노릇을 하고 있다는 참담한 고발들이다.

그렇다. 광복 80년을 내다보지만 우리는 여전히 눈앞에 둔 ‘가나안 땅’, 참 광복의 낙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노예근성을 못버린 자들이 설치는 광야에서 ‘매국적 친일종자’들에게 발목이 잡혀있는 답답한 처지다. 어떻게 이 치욕적인 광야의 늪을 벗어나 참 광복의 길을 열어갈 것인가. 한민족의 출애굽기는 우리의 역사 정의를 향한 결기와 투쟁의 끈질긴 대장정에 결말이 달려있다.                 < 김종천 편집인 >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크리스천의 자존심- 국가 기도회 및 Jesus in the city Parade)

 

박웅희 <새빛장로교회 담임목사>

Jesus in the city Parade 준비위원장

 

사람이 살아가는데 프라이드(pride), 즉 자존심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자존심에 따라 직업도 갖게 되고 그 자존심을 따라 도전하는 자로써의 삶을 살게 됩니다. 자존심은 자기 인생의 가치관이며 목적이며 비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아가진 신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a royal priesthood)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세상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그어놓은 선이 희미해져서 믿는 사람인지 안 믿는 사람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세상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분명한 인생의 가치관, 세계관, 종말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지만 오늘날 신자와 불신자와의 구별이 쉽지 않음을 주변에서 많이 느끼게 됩니다.

과거 우리 신앙의 선진들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진실함과 선한 양심을 따라 생활하면서 세상에서 의로운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올바른 분별력과 행함이 있는 믿음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옳은 것을 붙잡고 핍박도 각오하며 전적으로 순종하는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대단한 신앙의 연합과 응집력으로 지역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신앙인의 분별력이 갈수록 흐릿해지고 세상적 불의에 타협하는 풍조로 인해 우리 주변에 정체성을 잃고 공의에 도전하는 타락상이 크게 번지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프라이드를 비웃듯 벌어지는 도심의 ‘Pride 행사’가 바로 그런 사례의 하나입니다.

한국 등에서는 ‘퀴어축제’라고 하고 캐나다에서는 ‘Pride Parade’라고 하여 매년 6월 말이면 토론토 다운타운에서 성적 소수 성애자들이 거리 행진을 합니다. Parade 참여를 위하여 수만 명의 사람들이 많은 경비를 쏟아 세계 각국에서 모여들어 자신의 정체성이 떳떳한 양 자부심을 드러내고 퍼포먼스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까요? 신앙인의 양심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될 때입니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에 대적하는 심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뜻을 모아 중보하기 시작한 것이 국가기도회이고, 미스바 광장에 모여 찬양의 함성을 외치게 된 것이 십자가 예수 대행진입니다.

우리가 불씨를 당긴 국가기도회는 이번에 11회로 모이게 되고, 다운타운 Queens Park에서 출발하는 대행진 ‘Jesus in the city Parade’는 올해 25회로 열리게 됩니다.

한인 교회뿐 아니라 각 나라 다민족 교회들이 참가하여 토론토와 캐나다를 위하여 회개하며 합심 기도한 후에 거리 행진을 하고 전도와 함께 여러 행사를 합니다. 예수대행진은 한국과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많지 않은 행사로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토론토에서 정식으로 허락된 귀한 행사입니다.

작년에 20여명의 목회자들과 대부분이 중소형인 교회 성도들이 참여하여 뜻깊은 행사를 치렀습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온타리오 한인교회협의회에는 가입한 회원교회가 170여개나 됩니다. 토론토와 온타리오에 살고 있는 우리 한인교회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번 9월3일 오후 6시 소망교회에서 열릴 ‘캐나다 국가 기도회’와 9월7일 정오 퀸즈파크에서 시작될 ‘Jesus in the City Parade’에 성도 여러분들과 교회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토론토에 살게 하시고 한인교회 멤버로서 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따라 용기있게 동참하시기를 권면합니다. 생명이시고 자존심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개인의 구주이실 뿐 아니라 이 도시의 왕이시며 주인임을 선포하면서 행진할 때에,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교회를 찾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많은 성도들의 참여와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시/류/정/론/ 

‘친일-숭일’ 이 활개- 민족의 치욕 망각했나!

역사부정 맞서 제2 독립 횃불을!

 

 

광복절이 두 쪽으로 갈리고, 사방에서 친일과 숭일의 괴성을 질러댄다. 전국각지에서 꼴뚜기처럼 설치니 해외에서도 망둥이 뛰듯이 부화뇌동들을 한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역사 퇴행이 참담하다.

오호 통재라! 어찌 이 나라의 자존이 이렇게까지 무너지고, 민족의 긍지가 이처럼 짓밟히게 되었는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의 현장이던 일본 사도광산이 ‘강제’가 ‘자발’로 둔갑했음에도 한국정부의 도움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오죽했으면 미국의 외교전문지 <디플로맷>에 “윤석열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의 역사 세탁을 하는 데 발견한 완벽한 공범”이라는 내용의 글이 실렸겠는가. 현 정권의 망국적 대일외교 현실을 보여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이 5년 뒤 나라의 주권마저 빼앗긴 비극의 역사가 연상되기도 한다.

일본 극우세력이 식민지배나 침략전쟁과 관련된 각종 범죄를 부정하고 책임을 회피하려 내세우는 역사수정주의는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는 역사부정 세력이 발호한 지 20년 가까이 지났다. 이들은 ‘뉴라이트’라 자처했다. 우리말로 옮기면 ‘신우익’ 정도일 텐데 사실은 친일 극우세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이명박 정권 이후 세를 넓혀나가다가 윤석열 정권에서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정부 곳곳에 친일극우세력이 똬리를 틀고 역사쿠데타를 벌이는 중이다. 동북아역사재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리고 마침내 독립기념관장 자리마저 ‘친일파의 명예회복’을 주장하는 인물이 점령했다. 그리고 광복회장을 ‘일본 극우의 기쁨조’라고 매도했다. 친일을 나무라는 독립지사의 후손을 ‘기쁨조’라니, 실제로 일본 극우와 일심동체가 되어버린 자신들을 빗댄 고백이 아닌가.

독립기념관이 친일기념관이 됐고, 3·1절과 광복절은 ‘친일절’이 됐다고 탄식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제10대 조선총독’이고 용산대통령실은 ‘용산총독부’라는 비아냥도 널리 퍼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취임 이후 한·일간 과거사 현안은 거의 ‘일본 마음’대로 지워지고 있다. 식민지배는 합법적이었고 조선인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강변하며 반성도 사과도 왜 하느냐는 일본에 면죄부를 주었기 때문이다. 원전 핵오염수 방류를 변호해주고, 욱일기를 단 자위대와 합동훈련에 열심을 다하면서 우리 땅 독도를 ‘분쟁지’로 만들어 영유권을 고집하지 않고 있다.

동학농민 수십만과 명성황후를 학살하고,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은 군국주의 침략 역사를 진정으로 반성한 적이 없다. 요사이는 군국주의 부활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런 일본과 가치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식민지배는 불법’이며 3.1운동 정신과 임시정부 법통을 규정한 헌법의 근본정신을 깔아 뭉개고 있다. 민족정신을 오염시키고, 국정의 피폐에 지친 국민들을 피곤하고 화나게 한다. 사태가 심각한 지경인데도 정권 내부는 물론이고 소위 레거시 언론조차 ‘꿀벙어리’가 되어 제대로 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이러다가 대한제국이 그랬듯이 고유의 영토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나라, 주권을 포기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나라로 돌아가는 불행이 현실로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선열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훈계했다. 우리가 잘못된 역사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다. 두 눈 부릅뜨고 매국적인 친일정권과 역사부정 세력의 행태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민족 정기를 말살하는 비굴한 정권이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지고 우리 땅에 역사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는 그날까지 싸움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바야흐로 국내외 온 동포들이 제2의 독립운동 횃불을 높이 들어 올릴 때다.               < 고걸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