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다시 반동의 시대, 눈 부릅떠야

● 칼럼 2024. 12. 23. 14:4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다시 반동의 시대, 눈 부릅떠야"

 

 

마치 극적인 테러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공격헬기에서 뛰어내린 중무장 특공부대 군인들이 국회에 진입하는 숨가쁜 모습과 이에 맞서는 국회직원과 보좌관들의 안간힘이 영상에 생생하게 잡혔다. 대통령 지시대로 “국회의원들을 끌어내기 위해’ 본회의장으로 침투하려고 유리창을 ‘깨부수는’ 섬찍한 장면도 국민들이 직접 보았다. 나중 열린 상임위에서 군인들의 양심적 증언도 있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국회가 만의 하나, 비상계엄 해제안을 처리하지 못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무리 많은 국민들이 민의의 전당인 국회침탈 장면을 직접보았다며 피눈물로 증언해도 성공한 총칼 앞에서는 허공에 부르짖는 신음소리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내란범과 음모 세력은 눈엣가시 정치인과 언론인, 심지어 판사까지 체포조를 동원해 붙잡으려 했고, 국회의원들을 끌고가 지하벙커에 감금할 작정이었다. 병원에 병상 확보와 수혈준비, 구치소엔 감방 먀련까지 지시한 것도 드러났다. 실제 유혈사태를 예비한 것이다. 선관위는 총선을 무효로 돌리려는 서버자료 탈취작전이 벌어졌다. 전국 지자체는 포고령 발령 이후 계엄군에 행정이양을 대비한 것도 밝혀졌다.

군 통수권을 적국이 아닌 자국민 제압용으로 발동한 친위 쿠데타의 전말이 양파껍질처럼 드러날 때마다, 등골이 오싹하고 손바닥에 땀이 배어난다. 40여년 전 수많은 국민이 나라를 걱정하다 무도한 독재자의 권력욕에 짓밟혀 총칼에 목숨을 잃거나 반신불수가 되고 철창에서 고난을 겪었다. 신문 방송은 군 검열관의 통제하에 천편일률의 홍보기사로 채워졌다. 비판과 반론의 도전은 지하실 몽둥이 물고문에 목숨을 각오해야 했던, 살벌한 시절로 되돌아갈 뻔 했다는 이야기다.

천만다행, 내란수괴로 전락한 대통령 윤석열과 공범들의 처벌이 시작됐다. 국민 75%가 탄핵하라는 분노의 함성 속에 국회가 탄핵안을 가결해 ‘수괴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헌법재판소는 즉각 내란수괴 파면여부 심리에 착수했다. 반란소동이 일단락 되어 정상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순탄하게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국회 탄핵안은 겨우 4표가 넘어서 가까스로 가결됐다. 여당 108명 가운데 85명은 확실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계엄이 뭐가 문제냐, 합법적인 통치행위였다.”고 우겨댄다. “정권을 야당에 헌납할거냐”고 일부 소신파들을 윽박 지른다. 탄핵 찬성 입장이던 당대표를 쫓아내고, 찬성표 12명 색출에 나서 “쥐새끼들”라고 욕하며 탈당과 제명요구 등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

“끝까지 싸우겠다”고 오기를 과시한 ‘헌법 파괴범’ 내란수괴와 입을 맞춘 것처럼, ‘의회주의’의 폭파위기를 겪은 국회의원들이 불법을 합법이라고 자기부정을 하며 사죄 기색 전혀없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나섰다. 법적 권한이 없는 ‘정치검찰’의 수상한 수사 독주. 구속된 주범 국방장관이던 자는 “내란 수사가 내란”이라고 궤변을 꺼내며 돌연 진술 거부를 시작했다 한다. 광장에서는 극우 단체와 종교인 등이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헌재의 주심 재판관이 ‘내란수괴’가 임명했던 극보수 인물로 정해졌다는 뉴스까지 나오면서, 이상해진 분위기에 국민적 공포가 다시 불거지는 상황이다. 그야말로 반동(反動)의 시기, 정의와 진실과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내란동조 세력의 파렴치한 판뒤집기 시도가 본격화했다는 불안이다.

무려 100년에 가까운 반동기(反動期)로 나라와 국민이 고초를 겪은 프랑스 혁명의 사례를 들 것도없다. 우리의 민족 수난사 역시 그 반동의 환란이 불과 최근까지도 수없이 반복됐다. 해방 후 친일 매국노와 부역자를 처벌하려던 ‘반민특위’가 독재권력의 반동적 훼방으로 무산된 일, 4.19 민주혁명이 1년 만에 군사쿠데타로 무위에 그친 사실, ‘서울의 봄’과 5.8 항쟁이 전두환의 군홧발에 무참히 짓이겨진 역사, 그리고 6.10 시민항쟁이 ‘6.29 기만선언’으로 물타기 되었고, 노무현의 참여 민주주의가 탄핵위기를 겪었으며, 광우병 촛불은 명박산성과 종편허가 등이 말해주는 수구적 우경화 공세로, 2016년 촛불혁명은 잠시의 민주시대 방심에 괴물 항명검사가 치받고 나와 검찰독재와 파시즘적 군주를 꿈꾸는 상황을 맞았다. 마침내 친위쿠데타로 본색을 드러냈다가 실패한 것인데, ‘본심’을 바꿀 생각이 없는 주범은 물론 그 동조 비호세력이 궁지에 몰린 쥐떼 처럼 발악을 시작한 것이다. 불행히도 그들에게는 국민이나 나라와 민족, 역사·정의·상식 등은 안중에 없다. 오로지 권력과 이권, 일가의 안위와 호사(豪奢)가 정의이고 목적인 부류들이다. 그래서 ‘수구 반동’이 성사됐을 경우 역사 왜곡은 물론 엄청난 국가적 난맥을 초래하곤 했던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선진과 후진의 기로에 서 있다. 만에 하나 내란세력이 되살아난다면, 지난 2년반 남짓에 무너져 내린 국가적 퇴행과 손실은 급속히, 몇 배 더 심각한 풍파로 덮칠 것이며, 앞으로 수년 수십 년의 암흑기를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거듭 강조하지만 그들이 저질러 온 막가파식 반동의 폐해와 지난 민족사, 그리고 세계사가 증명하고도 남는다.

탄핵을 추동한 수백만 민주시민과 든든한 청년 학생들의 애국 열정에서 불퇴전(不退轉)의 저력과 도약의 미래 희망을 보지만, 끈질긴 반동세력에 낙관은 금물이다. 내란은 끝난 게 아니다. 부릅뜬 눈으로 감시하며 목줄을 단단히 움켜쥐지 않으면 안된다. 

[목회칼럼] 내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 칼럼 2024. 12. 23. 14:4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내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박용덕 목사 (토론토 소망교회 담임목사)

 

지난 2023년 12월 12일 외국의 어느 유력 언론 기사에 “대한민국은 사라지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뉴스가 실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같은 시기에 CNN 뉴스에서도 “한국의 가장 큰 적은 낮은 출산율”이라는 충격적인 뉴스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저출산 문제를 심각하게 경고하고 나서는 중입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저출산 문제는 심각하다 못해 이제는 충격 그 자체입니다. 장기적으로는 이 문제가 심각한 경제적 문제를 가져오겠지만 그보다도 당장 군대에 보낼 젊은이들이 줄어들어서 과연 이대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지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점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이전에 “대한민국 교회에게 미래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가 저출산과 인구 절벽에 대해서 이렇게 심각한 경고를 여기 저기서 터뜨리기 전에 한국 교회는 이미 충격적인 주일학교 인원 감소와 젊은이들의 대거 교회 이탈이라는 어려움에 직면해 왔기 떄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파는 이민 교회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주변을 보아도 몇몇 대형 교회들을 제외하고는 변변한 주일학교가 갖추어져 있는 교회가 적고, 그러다보니 더더구나 젊은 부부들이 중소형 교회에 갈 수도 없고, 있던 사람들도 교육 체계가 잘 갖춰진 대형 교회를 찾아 나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형교회에서는 이러한 심각성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그 안에 있다보면 찾아오는 수 많은 젊은이들로 인해 일종의 환각 증상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결국 이 모든 절벽의 마지막 보루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답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지금이라도 우리가 가진 거의 모든 가용 리소스들을 총 동원해서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을 위한, 자녀들을 신앙훈련을 위해 투자해야 할 때입니다. 누군가는 교육을 제2의 선교라고 했지만 저는 반대로 교육이 제1의 선교가 되야 할 시점이 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큰 교회들은 그들이 가진 최고의 장점을 다해서 함께 교회 교육을 일으키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정말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당장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큰 교회에서 젊은 부부들을 좀 더 집중적으로 양육시켜서 평신도 교육 지도자(Lay Director of Christian Education)로 세우고 이들을 중심으로 실제적으로 작은 교회들로 파송하는 제 2의 선교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렇게 훈련된 평신도 교육지도자들이 각각 교회에 몇몇 가정들과 같이 파송되어 그 교회들을 살리기 시작한다면 10여년 안에 교회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회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제 토론토 안에 있는 대형 교회들부터 이 사역을 실천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우리는 “교회에 미래가 있느냐”고 묻기 이전에 “누가 이 땅의 교회를 위해 자신의 귀한 옥합을 먼저 깨뜨릴 수 있는가?”를 먼저 묻는 것이 빠를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땅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헌신의 향내가 이제 절망의 냄새를 덮어가기를 기도합니다.           

[편집인 칼럼] 사법 폭주와 민의의 선택

● 칼럼 2024. 11. 25. 06:5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사법 폭주와 민의의 선택

 

 

미국 대통령에 돌출 이단아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 공직사회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사법리스크를 주도해온 법무부와 FBI 등에 보복하겠다고 호언해온 때문에 해당부서 고위직들은 불안에 떨면서 변호사를 만나 대책을 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선동으로 의회난입 폭동을 벌여 범죄자가 됐던 사람들은 트럼프가 사면해줄 거라는 기대에 희색인 것과는 극히 대조적이다. 이런 상황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의와 불의, 합법과 불법을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도움도 되지 못하게 되었다.

무려 34건의 범죄혐의로 유죄평결까지 받은 ‘중범죄자’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하루아침에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현실이다. 인권과 정의의 기준을 내세우며 전세계에 민주주의를 자랑하고 수출했던 나라가, 도무지 선악을 구분할 수 없는 ‘트럼프 잣대’가 만능인 사회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그것도 4년 전 이미 경험했던 ‘거짓과 망발’의 발호를 다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허용한다는 미국인들의 선택의 결과다.

한국에서는 일부에서 ‘코리안 트럼프’라고 칭하는 윤석열의 등장 이후 미국사회와 비슷한 ‘가치전도’현상이 만연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물론 비슷한 좌충우돌 성향에, 범죄에도 무뎌진 윤리 도덕의 추락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측면이 없지 않으나, 따져보면 미국하고는 연원이 다름을 알 수 있다. 트럼프는 중범죄자임을 알고도 그의 ‘노회한 박력’에 표를 던져 이른바 ‘면죄부’를 줬다면, 윤석열은 ‘정의로운 검사’라는 거짓된 위장과 포장술로 유권자를 속여 대권을 잡았다는 증거들이 뒤늦게 쏟아져 나왔다. 트럼프는 국민의 선택으로 정권을 잡은 뒤 으름장을 놓은 상태지만, 윤석열은 거머쥔 검찰권을 휘두를 때마다 내로남불 위선과 무도함, 그 것도 야당과 정적을 끝없이 짓밟는 비열한 발톱을 드러내, 기만 당했다는 자괴감과 분노로 탄핵을 요구하는 국민들이 7할에 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속았다는 국민 감정을 능가하는 유능과 역량으로 무마해 나가든가, 아니면 자숙하고, 회개하여 용서라도 구해야 봐줄까 말까 고민할 그나마의 최선책이련만, 염치는 눈곱만큼도 없이 “그래 어쩔건데”라며 ‘배째라’는 식의 가장 최악의 선택지인 후안무치와 몰상식으로 국민들의 열불을 돋우고 있다. 수두룩한 일가 범죄를 대통령 권력으로 덮고 뭉개는 뻔뻔함에 눈뜨고 지켜보는 국민들은 기가 찰 뿐이다. “장모가 10원 한 장 피해준 적 없다”더니 법원의 판결로 새빨간 거짓임이 드러났고, 대표적인 경제범죄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과 ‘명품백 수수’도 검사를 동원해 아무렇지 않은 일로 지우려 했다. 특검여론이 비등한데도 남편이랍시고 반헌법적 거부를 반복하며 오히려 ‘특검이 삼권분립에 어긋난 반헌법적’이니, ‘다른 나라에는 없는 일’이라는 궤변으로 우겨댄다. 탄핵 뇌관이 될 수도 있는 대통령 부부의 명태균 거래와 뇌물건은 축소수사로 치닫는 중이라니, 과연 무슨 재주를 부리는지 두고 볼 일이다.

그처럼 살아있는 권력에 너그럽고 모른척 하는 검찰의 무딘 칼날이, 야당과 정적을 향해서는 양날의 비수로, 물불 안가리는 사냥개가 되어 사정없이 후벼파고 물어 뜯는다. 아마 정권을 넘겼을 때 자기들이 했던 것처럼 혹독한 보복을 당할까 지레 겁먹고 싹을 자르려는 속셈인지 모른다.

거대야당 지도자이자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 부부를 수백 번 압수수색으로 샅샅이 털어 ‘먼지 기소’하고는 최대치 구형을 하더니, 벌금형과 징역형이 나오자 자신감을 얻었는지 이번엔 경찰이 송치하지도 않은 사건을 검찰이 또 기소하는 지독한 끈기를 보였다. 어쩌면 검사정권이 잘하는 단 하나, 검찰권 악용을 무기로 정권 임기 내내 정적 죽이기에 세월을 지샐 작정인 것으로 보인다. 무능정권의 궁지 탈출에 다른 뾰족한 전략도 묘수도 없기 때문이다. ‘양승태 사법농단’ 이후 검찰에 덜미가 잡혀있는 법원의 약점을 최대한 활용할 호기라는 악랄하고 교활한 회심의 미소까지 지으면서.

대통령 부부 무능과 무책임, 무속적 국정농단 의혹과 정치브로커 명태균을 통한 여론조작 대선, 공천개입, 공직거래 등 각종 의혹에 전쟁위기 조장까지, 지지율이 10%대를 맴돌면서 초초해졌을 게다. 그동안 쌓인 탄핵사유가 차고 넘칠 뿐더러, 자칫 대통령 당선무효로 번질 수도 있으니 막다른 골목에서 안달이 난 것이다. 김건희 특검법을 계속 거부했다가 이탈표 8만 나오면 끝장일 상황이니, 여권 행동대원들이 더욱 날뛰며 정신나간 듯 ‘윤건희 방탄’의 궤설을 읊어대는 것을 보면 단말마가 아닌가 싶다. 갈수록 거센 퇴진과 탄핵 벼랑끝에서 유력한 야당 적수를 죽이면 정국이 반전될 요술램프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광장의 탄핵과 퇴출 함성은 반비례해 커져만 가니 어쩌랴.

‘트럼피즘(Trumpism)’ 흉내를 내고 싶은지 모르나, 트럼프는 그렇게 비루하고 쪼잔하고 무능한 정치인이 아니다. 비록 중점죄자를 택했다지만, 미국은 유권자의 판단에 사법권력이 감히 대들지 못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검사출신 해리스가 외면당한 것이다. 국민의 심판이 아닌 사법의 폭주에 정치와 정치인의 명운을 거는 기묘하게 굴절된 민주주의의 타락상을 한국의 현명한 주권자들이 언제까지 두고볼까. 오로지 검찰권력에 정권의 안위를 의탁한 ‘검사 쿠데타’ 세력의 배째라 공세를 용납지 않으리라는 것은 철퇴를 든 우리 국민의 역사적인 경험칙이다.

[목회칼럼] 아프니깐 인간이다

● 칼럼 2024. 11. 25. 06:2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아프니깐 인간이다

 

고영민 목사  < 본한인교회 담임>

 

모든 사람은 아프다. 한두 군데 아픈 것이 아니라, 많이 아프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도 아프다. 최근의 목회 데이터 연구소가 개신교인 1000명, 담임목사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 우울증을 겪고 있는 교인이 20%로 나타났고, 담임 목사의 경우도 20% 이상이 자신의 정신 건강을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개신 교인중에서 5명이 있으면 1명은 자신의 정신 건강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교인들의 멘탈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 코로나 이후 이런 현상이 더 심각해지고 있다. 정신 건강 문제가 목회자 교인 가리지 않고 심각하게 다가오고 있다. 정신 건강 문제는 이제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다루어야 할 심각하고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3주 전에 나는 교회에서 사도행전 18장을 강해하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에 포비아(phobia)와 트라우마(trauma)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설교의 왕자 찰스 스펄전 목사도 27년 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했다고 이야기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정신 질환을 지나치게 영적으로만 보는 태도를 교정하기 위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교회는 육체적이든 정신적 질병이든 선입견 없이, 정죄하는 마음 없이 편하게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아프다. 아프니깐 인간이다. 이 사실을 우리 마음에 기억하면 적어도 우리에게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첫째, 상처를 받고 아파하고 있을 때, 누구나 아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큰 위로가 된다. 그동안에는 나만 당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나만 피해서 다니시는 것 같았는데, 겉으로 멀끔해 보이는 저 사람에게도 그 나름의 상처가 있고, 불행할 것 하나도 없어 보이는 저 사람에게도 나름대로의 상처가 있음을 알고 나면, 버틸 힘이 생긴다. 둘째,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의 죄로 인해서 깨어진 세상이다. 모든 것이 깨어졌다.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상처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 서로를 보듬어서 치유의 길을 찾을 수 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문제는 대부분 내가 입은 상처에서 발생한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의 행동도 알고 보면 그 사람이 가진 상처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자꾸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우리 마음에 긍휼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서로 고백하면서 서로를 보듬어 주면서 함께 주님 앞으로 치유의 은혜를 구하며 나가자. 조개가 자신의 상처로 진주를 만들어 내듯이, 우리의 상처를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영롱한 진주로 함께 바꾸어 가자. “인간이 된다는 것은 상처를 진주로 바꾸는 것이다”(힐데가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