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코미디 연속극 시대

● 칼럼 2023. 12. 24. 13:1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코미디 연속극 시대

 

 

검찰이 국정 농단과 부정부패 혐의가 있는 전직 대통령을 잇달아 쇠고랑 채우자 국민들은 환호했다. 특수통 검사들은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강골’들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증언대에서 큰소리 치는 바람에 더더욱 스타덤에 오른 윤석열 검사는 당시 이명박과 박근혜를 잡아넣었던 특수부의 중심 멤버였다. 두 전직 대통령에게 윤석열은 ‘저승사자’였던 셈이다.

그런데 벼락부자가 되듯 어느날 대통령이 된 ‘강골검사’ 윤석열은 언제 내가 잡아넣었느냐는 식으로 박근혜와 이명박을 서둘러 사면했다. 제 손으로 옭아넣었던 범죄자들을 제 손으로 풀어준 자가당착의 코미디 같은 일을 벌인 것이다. 남은 형기가 창창하고, 갚아야 할 벌금도 엄청난 액수였지만, 전혀 따지지 않고 돌연 ‘은전’을 베푸는 객기에 기가 막힌 것은 국민들이었다. 내 손으로 결박했으니 내가 풀겠다는, ‘결자해지’로 치부되기에는 너무나 이해가 안되는 황당한 처사였기 때문이다. 막대한 국가적 손실과 상처를 떠안은 국민들은 사회정의와 정치부패 근절의 여망이 무참히 짓밟히는 상실감과 박탈감, 정치-사법불신의 트라우마를 되씹어야 했다. 아마도 윤석열 시대 블랙코미디의 서막을 여는 예고편이 아니었을까.

엑스포 유치에 참패한 이후 부산시민들을 달랜다며 기업활동에 바쁜 대기업 총수들을 동원해 벌인 국제시장 ‘떡볶이 먹방쇼’는 어떤가. 프랑스 파리의 폭탄주 파티에 이어 시장바닥에 들러리 세운 재벌 총수들과 기업 또한 윤석열 자신이 특수부에서 국정농단의 공범들로 처벌했던 ‘묵시적 뇌물’의 당사자들이다. 탄핵당한 ‘윤 사단’의 이정섭 검사가 자신이 수사한 재벌의 향응을 받고도 당당한 이유를 설명해 주고도 남는다.

코미디나 개그 같은, 아니 진짜 블랙 코미디 혹은 즉흥 코미디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검찰정권’의 정치희극이 하루가 멀다하고 전개되어 쓴웃음과 탄식에 분노까지 유발하고 있다.

윤석열이 자신을 검찰총장 시절 ‘채널A 사건 감찰 및 수사 방해’ 등으로 징계한 처분이 잘못됐다며 제기한 소송의 피고가 채널A 사건의 당사자인 한동훈의 법무부인 재판이 ‘역시나’로 선고된 전말도 그 대표적 코미디의 하나로 손색없이 등극했다. 원고와 피고가 ‘형님 아우’인 한통속이니 짜고치는 게임이라는 예상을 적중시킨 법기술에, 법원까지 주눅들어 맞장구를 치고나온 사법코미디의 결정판을 선보인 것이다.

1심은 꼼꼼히 법리와 사안을 따져 ‘징계 2개월은 약하다. 면직도 마땅하다’는 추상같은 판결로 법무부 승리를 선언했다. 그런데 대통령과 법무장관으로 윤석열과 한동훈의 신분이 바뀐 뒤, 피고 법무부는 패하려고만 애를 쓰는 기괴한 소송을 했다. 승소 변호사들을 해임해 버리고, 공판에서는 증인 한사람 부르지 않은 채, 제출하라는 서면이나 답변은 미루고 버텼다. 원고와 피고의 증인신문 시간이 70대 7이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초록동색이 된 2심 판사는 징계사안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는 법구절 하나를 아전인수 해석하는 잔머리를 굴려 법무장관이 징계에 관여해선 안되는데 절차에 하자가 있었다며 ‘징계취소’를 선고했다. 윤석열 징계에 나섰던 전 장관 추미애는 “검사징계법을 그런 식으로 자의적 해석하면 검찰총창이 무슨 잘못을 해도 징계할 수 없다는 말”이라며 “덮어주기 위한 곡학아세를 위해 무지 애썼구나 하는 헛웃음이 나온다. 사법 치욕의 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직격했다. 여러 법학자들도 대법원 판례까지 무시한 판결이며 법무부의 징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오판이라는 지적들을 한다. 이제는 패소 목적을 이룬 한동훈이 과연 상고를 하겠느냐는 코미디 속편을 기대하는 상황이 됐다.

첫 각료인선에서 “여성가족부를 없애겠다”는 인물을 여가부 장관으로 보내는 코미디로 시작한 윤 정부다. 전광훈 집회에서 ‘문재인 목을 따겠다’던 극우인사를 국방장관으로 밀어부치고, 그는 과거 자기 부하 사병의 오폭 사망사고 진실을 장관권력으로 셀프 방어하는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다.

이명박의 BBK가 아니라는 면죄부를 주어 대통령이 되는데 일조했던 김홍일이라는 검사는 이명박이 특검수사로 처벌을 받았어도 ‘무탈’하더니 윤석열 시대에 다시 두꺼운 얼굴로 승승장구 중이다. 억울한 국민을 보살핀다는 준엄한 기관 ‘국민권익위원장’도 버겁고 낯 간지러울 터인데, 사표도 내지않고는 전혀 생소한 ‘방송통신’위원장직 청문준비에 나서 “낙방하면 되돌아갈 작정이냐”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과거 변호사 시절 공수처에 대해 “사법절차 안에 난데없는 이질분자, 공수처는 괴물기관”이라고 혹평했던 사람은 공수처장 후보자가 되어 최종 추천절차까지 뻔뻔하게 버티고 있다. 불행하게도 코미디 시리즈가 끝이 없다.

코미디는 웃기고 즐겁게 하며 카타르시스와 평안을 안겨줄 때 존재가치가 있다. 국민적 스트레스와 분노를 배가시키는 블랙(Black) 코미디·데드팬(Deadpan) 코미디류의 범람은 정치 사회 희화화는 물론 국가 저질화와 국민정신의 사막화를 재촉할 뿐이다.

 

고향 통영 그리고 어머니의 함박웃음.

 

임순숙 수필가

이른 아침 지척에 있는 ‘남망산 공원’ 산책길에 나섰다. 공원은 삼면이 바다인 통영의 지형을 축소한 듯, 어디에서든 선 자리에서 고개만 돌리면 크고 작은 섬을 품은 남해안 바다가 다양한 풍경으로 뭇시선을 사로잡는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출중한 외형적 요소에다 나의 문학소녀의 꿈을 키우던 곳이라 수시수시 드나들기를 좋아한다.    

 흔히 동양의 나폴리라 일컫는 아름다운 통영항구를 끼고 약간 돌아가면 제법 가파른 공원길이 시야에 들어온다. 시작부터 난이도가 꽤 있지만 길 위에 흩뿌려진 붉은 동백꽃을 손바닥 위에 하나 둘 올리다 보면 어느 사이 산 중턱에 올라와 있다. 대나무 숲 사이로 멀리 통영대교가 아른거리고, 새벽 조업을 위해 분주했을 아침바다엔 겹겹의 산 그림자가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자연의 경이로움과 나의 미욱함이 뒤엉켜 아! 하는 탄성이 새어나올 즈음 청마 유치환의 ‘깃발’ 시비(時碑)가 발길을 잡는다. 새파랗게 이끼 낀 행간 사이 사이로 그냥 너답게 살라는 강한 펄럭임이 온몸을 전율케 한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중략)              < 청마 유치환의 시, ‘깃발’ 중 >

꼬불꼬불 이어지는 노송숲, 동백숲을 거닐다 보면 이 고장이 배출한 문화, 예술계 거장들의 숨결을 도처에서 느끼게 된다. 자연이란 거대한 전시장에서 다도해의 잔잔한 물결을 배경 삼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큰 축복이지 싶다. 두어 시간 자유로운 행보 끝엔 습관처럼 우리집 찾기에 열중한다.

 보일 듯 말 듯, 아흔을 훌쩍 넘긴 어머니의 숨소리를 닮은 정든 집이 아련하게 잡히면 마음은 또 나락으로 떨어진다. 긴 타국살이의 불효를 조금이라도 면하려 당신 곁을 지키고 있지만 늘 미흡하여 반성문 쓰기 바쁘다. 나이가 들면 다시 아이가 된다는 그 시점의 어머니를 인지하지 못하고 예전의 당신으로 착각하여 번번이 우를 범하고 있다. 다행히 어머니를 함박웃음 짓게 만든 사건이 최근에 있어 스스로 면죄부를 주려 한다. 

‘비진도’에서 낚시를 즐기는 친구부부와 제법 큰 고기를 몇 마리 낚아 올렸다. 하지만 이놈들은 낚시바늘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어서 번번이 놓아주어야 했다. 결국 빈 망태기로 돌아온 사연을 들으신 어머니가 얼마나 웃으시든지 …

머리 허연 노장들이 어린 고기한테 당했다며 내내 함박웃음을 터트리셨다.

며칠 후엔 예전의 실수를 만회하려 또 낚싯대를 드리웠다가 손바닥만한 고기 한마리를 잡았다. 이를 보신 당신은 또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평생 낚시를 즐기시던 아버지의 망태기에선 한번도 보지 못한 고기를 낚았다며 또 얼마나 즐거워하셨는지 모른다. 아무리 고기가 귀해도 낚시꾼의 망태기엔 결코 들지 못한다는 ‘망상어’란 고기가 또 한번 큰 웃음을 선사했다. 장모님을 위한(?) 고기잡이 구실이 생긴 셋째 사위는 오늘도 겨울바다에 나설 궁리를 한다. 

 돌아오는 길은 늘 활어(活魚)로 넘쳐나는 중앙어시장을 경유한다. 삶에 대한 열기가 최대치로 치솟는 현장의 아침은 고요했다. 불과 몇 시간 후 또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질 그곳에서 밑반찬 몇 가지를 샀다. 돌아와 장바구니를 펼쳐보니 낯선 봉지가 또 나온다. 상인이 몰래 넣어준 감사의 표시,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함인가 보다. 이미 몇 번의 경험이 있음에도 그때마다 전해지는 감동은 배가 된다. 오랜 타국생활에서 잊고 지냈던 통영인심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음에 고무된 산책길이었다.  

[목회 칼럼] 삶이 흔들릴 때

● 칼럼 2023. 12. 24. 13:0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삶이 흔들릴 때

 

김치길 목사 <빌라델비아장로교회 담임목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미래가 불투명한 시대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통계를 너무 중요하게 여기는데, 그 이면에는 확신이 아니라 확률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확신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확률을 따라 사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맞이할 때, 사람들은 쉽게 흔들립니다. 자세히 보면 상황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중심이 바로 서 있지 않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확실한 것이 제거되면 한번 해 보겠다’라고 말합니다. 불확실함을 제거하고 가려고 하면 일평생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불확실함은 인간 세상의 한계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불확실함은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해보지 않은 길,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갑니다. 중요한 것은 불확실함을 제거하려 하면 안 됩니다.

불확실한 시대에 할 수 있는 것은 확신의 강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동일합니다. 세상이 흔들린다고 우리의 신앙도 같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상황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견고하지 못할 때, 흔들리는 것입니다.

나는 상황에 휘둘리지 않을만한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인생은 내가 흔들리고 싶지 않아도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흔들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흔들고 계십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온 세상을 흔드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세상과 우리를 흔드실까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붙들고 있는 게 과연 붙들만한 것이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흔드시며, 흔들리지 않는 것을 붙들라고 우리에게 사인을 보내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열심히만 살면 되는 줄 압니다. 내가 꽉 붙잡으면 그게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훅 불기만 해도 한 방에 날아갑니다. 2023년 한해도 많은 것들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새해에도 많은 것들이 흔들릴 것입니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뿐입니다. 오직 그것 만이 영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흔들릴 때마다 내가 진리 안에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반석 되시고 요동치 않는 그리스도 위에 우리의 삶이 올려져 있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편집인 칼럼] 둔화된 지각과 주권의 펀치

● 칼럼 2023. 12. 3. 07:4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둔화된 지각과 주권의 펀치

 

 

사람이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콧속에 있는 후각상피 세포가 냄새분자를 인지하고 이를 전기신호로 뇌중추에 전달해 구분해내는 신경전달 시스템 덕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후각세포는 아주 예민해서 미약한 자극에도 금방 반응을 보이는 반면, 예민한 만큼 금세 피로해지는 특징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심한 악취도 조금 지나면 별 것 아닌 냄새처럼 익숙해지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장실에서 대변을 볼 때 처음엔 심한 냄새가 엄습하지만 얼마안가 둔해지는 이유도 그렇게 설명된다.

후각세포의 기능이 단발성이어서 곧 둔감해지는 게 천만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한없이 강한 악취를 지속 감지하는 ‘고성능’을 자랑한다면 그야말로 견디기 힘든 고역일 것이다. 물론 후각세포의 둔감이 악취 뿐은 아닐테니, 향기에 대해서도 곧 둔해지는 것은 마찬가지 이겠지만.

감각이 짧은 시간에 둔해지는 것은 비단 후각 뿐만이 아니다. 피부의 촉감도 자극이 오래가면 둔해지고, 반복되면 무감각해진다. 고통 역시 길어지고 되풀이 되면 익숙해지며 면역력이 생겨서 무덤덤 해진다. 훈련을 통해 인내력을 키우면서 단련하는 것도 사람의 그런 감각적 적응력과 내성, 혹은 둔감화의 순작용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일 게다.

문제는 사람의 ‘둔감 적응력’이 형이하학적 말초 감각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성적인 부분, 즉 지성(知性)과 감성(感性) 등 지각(知覺)능력에도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순진하던 사람도 폭력영화를 자주 보면 폭력에 대한 반응이 무뎌지고, 누군가에게 욕설과 험담을 지속적으로 듣는 사이 그러려니하고 무감각해지는 현상, 커닝을 반복하다 보면 시험 때마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커닝에 의존하게 되고, 뇌물을 하나 둘 챙기다 나중에는 거액을 수뢰해도 양심적 거리낌을 느끼지 못하는 윤리의식의 마비 등 사례들이 그렇다. 예민한 반응으로 인간의 고통과 불편을 덜어주는 순기능도 있는 반면, 고통스런 환경과 불편한 상황에 무신경해져서 삶의 질이 낙후되는 역작용의 후유증에 내몰리게 된다.

거짓말과 허풍으로 똘똘뭉친 트럼프가 등장했을 때 미국은 물론 전세계가 충격을 받았다. 매일이다시피 쏟아내는 그의 폭탄발언과 기행을 지탄하고 진저리를 치면서도 사람들은 차츰 무덤덤해져 갔다. 과격한 말과 허세의 되치기, 덮어 씌우기가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이제는 차기 대통령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당당한 정치거물 트렌드로 자리잡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한국에서 한층 더 심각한 둔감화의 역기능 현상을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윤석열 정권이 등장한지 이제 1년 반이 지났건만, 하루가 멀다하고 상식과 원칙과는 거리가 먼 사례들이 돌출하면서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겼는데, 이제는 다들 무감각해진 것인지, 아예 그러려니 포기한 건지 피로감인지, 무거운 침묵에 빠져있는 감 마저 느낀다.

검사 대통령에 정부부처 요소요소를 검사들이 장악한 이른바 ‘검찰공화국’이 되어 국정이 검찰청처럼 움직이는 바람에 정치부재, 경제추락과 외교 안보의 파탄 등등 숱한 폐해에도 모두가 그런가보다 익숙해진 듯하다.

대통령 일가의 범죄의혹은 덮기에 바쁜 것과 달리 야당과 비판세력에는 가혹하고 끈질긴 검찰 총력수사로 날을 지새는데도, 비리검사 탄핵론에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핍박받고 노예 취급을 당했던 국민들이 엄연히 살아서 사죄를 요구하는데 압제자들 편이 되어 과거사는 덮어버리자고 입막음에 나섰다. 최근 법원이 다시 배상책임을 인정하자 일본은 ‘한국정부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큰소리치고 나왔다. 국민 대다수가 제2의 침략이라고 규탄하는 핵폐수 방류를 정부예산 들여 홍보해주는 일본의 대변정권, 욱일기를 달고 영해를 누벼도 동해를 일본해라고 못박아도 끽소리 못하는 비굴한 외교에도 반응이 별로없다. 국가 미래를 좌우할 예산과 복지부문은 뭉텅뭉텅 잘라 낸 반면 정권홍보와 해외순방 예산은 대폭 늘려 극우단체들 설치게 하고, 한달 단위 호화외유를 즐기는데 ‘여사 패션’과 미용 운운 기사만 넘쳐난다.

친정권 언론이 90%를 넘는 현실에도 성이 안차는지, 공영방송들을 장악하려고 온갖 꼼수와 편법을 동원하는 무리수에도, 해당 언론사 외에는 반발의 함성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같은 국민적 ‘지각 둔감’ 현상에 우둔한 자신감이 붙은 것일까. 남북간에 최소한의 평화장치인 ‘9.19 군사합의’의 무력화를 시도해 휴전선 일대는 물론 긴장과 충돌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강구하기는 커녕 정세 판단능력이 위태로운 힘의 논리와 강국 추종의 저돌성만 드러내고 있다. 와중에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이어야 할 국정원은 파벌싸움으로 지리멸렬상을 드러냈고, ‘역전승’할 것처럼 온통 법석을 떤 월드엑스포 유치는 ‘폭망’과 낙담으로 수치를 안겼다.

모두가 무신경·무감각 해지면 사회전체에 부패와 폭력이 난무해도 제어할 수가 없게 된다. 폐수가 스며드는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결국은 나라와 민족이 오염돼 패망의 길로 향할 수 밖에 없다. 복싱 강자는 펀치가 날아와도 절대 눈을 감지 않는다고 한다. 눈을 부릅뜨고 노려봐야 허점을 노려 일격에 KO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둔감에 눈을 감지말고 감각과 지각을 깨워야 한다. 매의 눈으로 지켜보며 주권의 펀치를 가다듬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