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정적 제거의 비열함

● 칼럼 2023. 10. 10. 12:5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정적 제거의 비열함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지난 18일 하원 긴급연설에서 인도 정부를 공개 비난한 내용은 놀랍다.

지난 6월 BC주에서 총격 피살된 시크교도 분리주의 운동단체 지도자가 인도정부 요원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것이다. 트뤼도 총리는 신뢰할 만한 정보분석 결과를 들어 “캐나다 국적 시민이 캐나다 영토내에서 살해된 것에 외국정부가 개입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주권침해”라고 인도를 맹비난했다. 트뤼도 총리는 지난 주 인도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에게 이 문제를 강력 제기했다고도 덧붙였다. 외교관 맞추방과 FTA(자유무역협정) 협상 중단 등 양국 관계가 극히 험악해졌다.

캐나다의 인도계 140~180만명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시크교도의 지도자로 알려진 피살자 하디프 싱 니자르(45)는 시크교도 독립국가 건립운동을 펼쳐, 인도 정부가 ‘테러분자’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니까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 세력을 정치기반으로 하고 있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 정부가 캐나다 시민인 눈엣가시 시크교도 정적을 자국 정보원을 보내 살해했다는 이야기다.

사실이면 캐나다 정부는 암살을 실행한 인도 요원을 붙잡아 캐나다 법으로 처벌했어야 옳다. 자국내에서 시민을 살해했는데도 단순히 추방에 그친다면 그야말로 위험한 선례가 되지 않겠는가.

모디 총리는 2002년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총리 시절 관내에서 힌두교도가 무슬림 1천∼2천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편파적인 태도를 보여 일부에선 ‘구자라트의 도살자’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제반 상황으로 볼 때 모디 혹은 그의 정부가 시크 지도자 암살의 배후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파키스탄의 전 외교장관 빌라왈 부토 자르다리는 이를 두고 “인도가 깡패 힌두 테러리스트 국가가 됐다”고 힐난하기도 했다.

정적을 핍박하다 못해 목숨까지 빼앗은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까지 권력의 마수를 뻗쳐 암살을 마다않는 정권은 전제-독재권력이 아니면 현대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국제법 위반이며, 비열하고 추악한 범죄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 2013년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한데 이어 2017년에는 말레이시아에 암살요원들을 보내 이복형 김정남을 공항에서 독살했다. 앞서 1997년에는 경기 성남에 거주하던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이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피살당한 일도 있다.

지난 6월 하루살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비행기 사고로 죽은 러시아 용병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 사건은 푸틴의 보복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동안 러시아에서 망명한 요인들이 독살 혹은 피살되는 일이 잇달면서 배신자나 반대자 제거작전이라는 관측이 나오곤 했다. 푸틴의 정적 알렉세이 나발리가 독살위기를 넘긴 뒤 감옥에 갇혀 20년형을 받은 것도 정적 죽이기의 본보기 사례 중 하나다.

요즘 중국에서는 국방부장(장관) 리샹푸가 3주일이 넘도록 행방이 묘연해 숙청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번지고 있다. 앞서 지난 7월에는 촉망받는 실력자라던 친강 외교부장이 장기간 사라졌다가 면직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사실상 1인 지배 독재권력의 민낯이라고 할 수 있다. 푸틴이나 시진핑이 민주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지도자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들이다.

아무리 권력 감시와 통제 시스템이 훌륭한 민주국가라 해도 권력자가 자신을 비판하고 대드는 사람들을 좋아할 리는 없다. 하다못해 욕을 하든, 귀쌈을 한 대 먹이든 보복하고픈 마음이 간절할 것은 보편적 인간심리다. 그렇지만 민주국가 정치제도는 권력의 작동 메카니즘 자체가 민주적으로 운용되게 설계되어 있다. 권력자의 위험한 독선적 행동을 제어하고 견제하도록 법적·제도적 장치를 두고있고, 밖으로는 언론과 시민의 매서운 감시망이 있어, 자제하고 대화하고 타협하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이고 원리이다.

그런데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 일본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한 최고법원의 판결을 묵살한 채 ‘제3자 보상’을 밀어붙이고, 최근에는 대법원이 유죄 확정했는데 3개월도 안돼 “법원판결이 잘못됐다”고 주장한 자를 특별 사면·복권시켜 보궐선거 재출마를 시킨 무법적 코미디가 벌어졌다. ‘시행령 정권’이라는 말도 상위법 무시를 지적한 말이다. 대통령이 나서서 비판 시민들을 공산-반국가세력이라 매도하고, 비판 언론에는 명예훼손 당했다고 고발한다. 한술 더 떠 “가짜뉴스” “괴담 제작소”라며 언론인을 “사형시켜야 한다”고 독설을 퍼붓는 민주국가 여당 대표를 본적이 없다. 특히 거대 야당의 대표를 출범이래 한번도 만나지 않고 범죄인 취급 적대시하면서, 손발처럼 부리는 검찰이 4백번 가까이 압수수색하고도 증거를 못잡아 몇 년째 특수수사로 괴롭히는 정권이 민주화 이후 있었던가. 더구나 단식 19일째 쇠진해 입원한 날 그 야당대표를 기어이 구속해 보겠다고 영장을 청구한 잔인무도의 극치를 21세기 ‘민주’국가에서 보고들 있으니… 정적 취급에도 금도가 있는 법이다. 하물며 선열들의 피끓는 민주항쟁으로 오늘까지 지켜 온 나라가 아닌가.< 편집인 >

[편집인 칼럼] ‘뉴요커’의 비판

● 칼럼 2023. 10. 10. 12:1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  ‘뉴요커’의 비판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이유로 이라크를 침공해 후세인 대통령을 무참히 살해했다. 부시의 도발을 무조건 찬동하며 참전하는 바람에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영국 역사상 최악의 실패한 외교정책이었다는 이른바 ‘칠콧보고서’의 혹평으로 역사에 두고두고 오명을 남겼다. 블레어 전 총리가 ‘부시의 푸들’(Bush’s poodle)이라는 모욕적 별명까지 얻은 업보다.

영국은 미국의 ‘세계경영’에 거의 보조를 맞추며 적극 지지하고 협력해 ‘역시 형제국’, 최강의 동맹이라는 느낌을 줄 때가 많다.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으로 독일과 싸운 ‘혈맹’인 미국과 영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끈끈한 우정으로 협력하며 승전을 합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실상은 처칠이 얼마나 루스벨트에게 반감을 가졌는지, 역사의 뒤안길을 파헤치는 사가(史家)들은 전쟁 막바지 루스벨트가 뇌출혈로 죽었을 때 처칠이 그의 장례식을 외면해 버린 것을 사례로 든다.

 

독일의 침략으로 프랑스가 무너진 뒤 영국은 끝없는 공습에 시달리며 고군분투했다. 처칠은 미국에 달려가 때로는 한달 씩이나 머물며 루스벨트에게 무기와 장비지원을 애걸했지만, “무상 지원할 수 없으니 현금거래하자” “영국이 항복하면 독일에 무기를 바치는 꼴”이라며 3개월을 끌었다. 다급한 영국은 캐나다 뉴펀들랜드와 카리브해에 있는 여러 해공군기지를 99년 무상 대여하고 미국내 자국 자산을 헐값 처분하는 등 굴욕적인 손실를 감수했는데, 미국이 제공한 건 쓰지도 않던 중고 구축함 50척을 제공하는데 그쳤다. 처칠은 사석에서 온갖 욕설로 분을 쏟아냈다고 한다. 영국은 2차대전 기간 미국에 진 ‘빚’을 2006년 12월에야 다 갚았다.

 

영국의 역사가이자 언론인인 M. 헤이스팅스는 영국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두 나라가 특수한 관계라는 생각, 즉 미국이 영국에 대해 우호적 조처를 취해 줄 것이라는 기대, 그것은 환상이다.”

 

한국의 윤석열 정권이 중-러와의 관계악화를 감수하고 굴종까지 마다않으면서 미국에 일본까지 포함한 ‘이념·가치외교’와 ‘동맹’에 몰입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바이든의 푸들’이 아닌가 할 정도다. 그러면서 국내에서는 극우 전체주의적인 양태로 비판세력과 ‘이념’전쟁을 벌여 아예 진멸해 버리겠다는 태도다.

 

주요 언론들이 ‘윤비어천가’만 부르며 무도한 행태에 눈을 감고 있는 사이, 미국의 영향력 있는 주간지 ‘뉴요커’가 윤 정권과 바이든 정권을 싸잡아 비판하고 나서 눈길을 모은다. 뉴요커는 윤 정부가 언론탄압과 시민사회 및 노조탄압, 야당 정치인 수사 등 30년 전의 군사독재를 떠올리게 한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소위 민주주의 가치를 외치는 바이든 정부가 인도의 모디 정부와 베트남 공산당과 같이 탄압과 독재적 통치로 기운 윤 정부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환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윤 정부에는 인도나 베트남 같은 폭력적 억압 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비평을, 바이든의 미국은 이를 묵인하는 이중성을 고발한 것이다.

 

실제로 큰 형님 모시듯 미국의 눈치를 살피는 윤 정부가 만약 바이든으로 부터 쓴소리를 들었다면, 야당대표 구속에 그렇게 기를 쓰고 덤볐을까. 야당 당사며 언론사와 노조사무실을 막무가내 압수 수색할 수 있었을까. 자기들이 눈총을 주면 그렇게까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아마 미국도 잘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 모처럼 말 잘듣는 정부, 여러모로 국제역학 관리에 효용가치가 좋은 인물을 만났으니, 독재든 극우든 구태여 제동을 걸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국에 보수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의 보수인사들과 싱크탱크들이 기뻐했다는 말이 그걸 뒷받침 해주고도 남는다.

 

이른바 ‘혈맹’의 허상, 자유와 민주의 본산처럼 여기는 미국의 허구, 그 미국을 하늘처럼 받드는 ‘가치외교’의 허망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세계 곳곳 정치와 분쟁에 개입하며 국제질서 재편을 주도해 온 미국의 족적을 보면, 정의로운 나라이며 악과 싸우는 자유의 수호천사라거나. 민주주의의 보루라고까지 생각하는 미국의 민낯은 유감스럽게도 허상임을 확인해 준다. CIA를 활용해 벌인 더럽고 추잡한 공작과 전쟁들은 한 둘이 아니다. 그때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밷는(甘呑苦吐) 철저한 자국 이기(利己)와, 힘을 선(善)으로 포장해 패권만을 쫓는 ‘이중인격 국’임이 역사의 고비 고비에서 입증되고 있다.

 

한반도에서도 다르지 않다. 조선을 넘긴 일본 제국주의와의 밀약, 소련을 막겠다는 38선과 신탁통치, 친일 매국노들을 활용한 반공통치, 전범국 일본을 부활시키고 독도까지 묵인한 정략거래, 쿠데타 마다 추인까지…지금도 전작권을 담보로 한국을 속국처럼 여기는데, 윤 정권은 미국의 압박에 일본 비위를 살피고, 동해를 ‘일본해’라는 데도 한마디 항의조차 못하며 처분만 기다린다.

 

‘허구’와 ‘허상’을 망각하면 허망에 빠질 수 밖에 없다. 혈맹이며 형제국인 “특수한 관계라는 생각, 그것은 환상”이라는 영국의 한탄을 미리미리 귀담아 새기지 않으면 험악한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미국에선 트럼트가 꿈틀대고, 북한은 러시아·일본과 교섭 중이다. 불안한 징조들은 사방에 널려있다.                                                                                                           편집인 >

 

 

[목회 칼럼] 감사의 훈련

● 칼럼 2023. 10. 10. 12:08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기쁨과 소망]   감사의    

 

 노희송  목사

- 토론토 큰빛교회 담임목사 - 

 

청명하고 높은 하늘 그리고 따스한 햇볕 아래, 곳곳에 붉고 노란 옷들을 입은 단풍으로 가을이 와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추수감사 주일을 맞으면서 감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감사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감사를 잘하도록 양육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감사하는 훈련을 잘 받은 사람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감사함을 표현합니다. 반면에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좋은 것을 받고 누려도 표현하는 것에는 인색합니다. 쑥스러워하기도 하며, 굳이 표현까지 해야 하냐고 여길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좋은 것을 받아도 당연하게 여깁니다.

평소에 감사의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이 관계도 잘 가꾸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늘 감사하고,관계도 원만합니다. 신앙생활 가운데도 이런 감사의 훈련은 필요합니다. 기도, 예배, 찬양 등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들은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삶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의 제사로 나아오는 자녀들의 예배와 삶을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십니다. 성령 충만한 자들에게는 감사의 열매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 가운데 감사의 훈련은 필요합니다.

첫 번째, 감사의 훈련이 감사하는 습관을 만듭니다. 늘 감사하는 습관이 있는 분들은 다릅니다.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감사한 것들이 눈에 보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늘 감사함을 표현하다 보니 관계가 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도 감사로 대화를 시작하면 분위기가 달라지고 일도 순조로워지는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가끔 은행, 전화 서비스, 보험회사 등에 전화할 때, 오랜 시간 동안 연결되기를 기다리다가 지치기도 하지만, 과중한 업무를 이해하고 또 도와줘서 고맙다는 짧은 인사를 했을 때 상대에게 위로를 줄 뿐만 아니라 해결하고자 했던 일도 잘 풀리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합니다. 만약 불평을 했다면 될 일도 어려워졌을 텐데, 쉽지 않은 일도 되도록 도와주려 합니다. 감사의 습관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감사할 제목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어려움을 통과하고 극복합니다. 문을 열어 주셔도 감사, 닫아 주셔도 감사하게 됩니다. 응답받은 기도도 감사, 기다리는 시간도 감사, 그리고 거절을 당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음을 신뢰하며 감사하는 비결을 깨닫게 됩니다.

두 번째, 감사의 훈련이 더욱 감사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평소에 감사할 내용이 많은 분들은 감사를 축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성도에게 더 풍성한 것들을 부어 주십니다. 그것이 영적인 법칙입니다. 감사가 감사를 낳습니다. 감사는 배로 번식합니다.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하는 분들이 많이 모이는 모임은 감사로 가득합니다. 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영적 법칙을 깨닫지 못한 분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불만과 불평이 많은 분들의 삶을 보면, 불만이 많은 분들에게는 늘 불만 거리가 쌓여 있습니다. 누가 도와주고 섬겨주어도 불만, 도와주지 않아도 불만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하는 직장이나 사업장에서도 마음과 관계가 어려워집니다. 결국 인생이 힘들어집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감사로 나아가는 분들에게는 인생의 역전이 일어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감사하는 자들에게 감사의 열매로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믿음과 신뢰와 연결된 씨앗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를 많이 뿌리는 자들에게는 감사의 열매도 풍성합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서로에게 감사의 인사와 표현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의 훈련을 가볍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훈련만 잘해도 많은 기회와 관계들이 원만하게 됩니다. 그동안 감사하지 못하고 소홀했던 관계들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회복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편집인 칼럼] 작은 펜도 두렵고 떨리는데

● 칼럼 2023. 9. 11. 12:4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마당 편집인칼럼] 작은 펜도 두렵고 떨리는데

 

권범철 기자 만평

 

신출내기 신문기자 시절부터 귀에 따갑게 들어 온 말 가운데 하나가 그 흔한 ‘펜은 칼보다 강하다’ (Calamus Gladio Fortior)는 금언이다. 방송인들이야 그리스 작가 유리피데스가 말했다는 ‘혀는 칼보다 강하다’는 말에 매력을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기사를 써서 글로 할 말을 하는 기자로서는 ‘펜이 더 강하다’는 말을 은근한 자부심, 또한 무게감으로 가슴에 품고 일을 해온 게 사실이다. 공권력을 자랑하는 경찰·검찰이나 군부대를 취재할 때도 주눅들지 않고 큰소리치며 추궁할 수 있는 힘과 배짱의 원천이기도 했다. 국민의 알권리를 뒷배로한 언론을 입법·사법·행정에 이은 ‘제4부’ 라고 권력기관처럼 여기는 연원의 하나다.

글 한 줄에 반향이 일고 세상이 변하고 역사가 바뀌기도 하는 데서 펜이 총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27일 동아일보가 낸 이른바 ‘신탁통치 오보사건’은 찬탁과 반탁의 대립과 분열을 심화시켜 결국은 한반도 분단으로 이어지게 만든 역사적 ‘펜의 재앙’이 되어버렸다. 정치적 의도에 오염돼 사실이 뒤바뀐 기사 몇 줄이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되돌리기 힘든 고난의 길로 몰아간 것이다.

정의감으로 쓴 기사에 불의한 일들이 파헤쳐지고 사회적 징벌이 주어지는 경우 펜의 힘을 실감하게 되지만, 글 한 줄이 갖는 무게, 그 순작용 만이 아닌 역작용과 위험성에 대한 중압감과 책임감 또한 엄청나게 커지게 된다. 선하고 의로운 글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생명과 활력을 불어넣기도 하는 반면, 악하고 불의한 글은 불신의 씨앗과 사악한 죽음의 독소를 뿌려대는 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글은 아무나, 아무렇게나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글 한 줄의 위력를 생각하다 보면 두려움이 엄습해 함부로 펜을 휘두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총칼도 잘 쓰면 문명의 이기(利器)가 되지만, 잘못쓰면 파괴와 살상의 도구로 쓰이니 함부로 다뤄선 안된다. 꿈의 에너지라는 원자력도 그렇다. 잘 활용하면 놀라운 에너지원이지만, 단 한 발에 수백만 명을 몰살시킬 수 있는 핵폭탄일 경우 인류 생존의 위험요소가 된다. 일본 후쿠시마 폭발원전 방사능 오염수가 태평양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처럼 인류의 미래를 환경재앙으로 물들일 수도 있다.

요즘 화제가 되고있는 영화 ‘오펜하이머’는 천재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핵개발 프로젝트를 주도하며 전쟁사를 바꾸는 원자폭탄을 만들어 내지만, 그 위력에 놀라 핵무기 회의론자로 변신해 고뇌하고 고난을 겪는 인간적 딜레마를 생생히 보여준다. 지난 5월 인공지능(AI) ‘딥러닝의 대부’로 불리는 토론토대학교 제프리 힌턴 교수(76)가 10년간 몸담고 연구해온 구글의 부사장급 석학연구원직을 그만 두면서 AI의 위험성을 경고한 적이 있다. 그는 방대한 데이터를 습득한 AI가 자율 무기인 '킬러 로봇'이 되어 인간을 공격하는 현실이 두렵다면서, AI 연구개발사에 큰 족적을 남긴 지난 50년간의 자신의 연구를 “후회한다”고 까지 말했다.

오펜하이머도, 힌턴도, 인류를 위협하고 지구를 파멸로 이끌지 모를 ‘괴물’을 만들어냈다는 자책감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실수’가 선의(善意) 보다는 ‘악의’로 인류사에 영원히 기록될 미래에 대한 공포까지 더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펜을 대함에 옷깃을 여미는 것도 후세까지 각인될 기록의 힘 때문이다. 총칼을 멋대로 휘둘렀다가 영원한 오명을 남긴데서도 입증된다. 멀게는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의 살인에서부터, 시저 황제를 찌른 브루투스의 배신, 1차 세계대전을 부른 사라예보 암살의 총성, 그리고 히틀러를 비롯해, 뭇솔리니와 스탈린…이웃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조 히데키 등등까지,

조심스레 다루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은 정치권력도 마찬가지다. 오만에 빠져 함부로 휘둘렀다가는 천심(天心)인 민심의 무서운 심판을 부를 뿐더러, 역사에 두고두고 저주받는 악행자·패륜아 단정을 피할 수 없다. 당장은 ‘세상이 다 내 것이요, 누가 감히 날 건드려~!’ 하고 거들먹거려도, 한낱 어느 봄날의 꿈 같고(一場春夢), 잠시 화려하나 곧 지는 꽃(花無十日紅)과 진배없다는 냉엄한 경고를 무시한 자들의 말로는 하나같이 비참한 기록으로 남았다.

지난 1년반 윤석열 정권을 겪은 안팎의 한국민과 해외의 한인동포들이 흑역사로 남을 수많은 권력의 비행(非行·卑行)과 비정상을 목도하며 불안과 울분에 안절부절 못하는 현실을 본다.

밖에서는 자존심을 내팽개친 채 굴종과 굴신의 냉전적 행보를 추종하고, 안에서는 구석구석 멋대로 들쑤셔 망가뜨리고 원칙없는 내로남불과 철지난 이념을 외쳐 갈라치기 분열책만 매달린다고 지적한다. 핵폐수 비판을 괴담·가짜라며 일본 정부보다 더 흥분하는데, 욱일기나 ‘동해 아닌 일본해’라는 데는 꿀벙어리가 되더니 독립영웅의 흉상과 정신을 육사에서 제거한다는 저들의 민족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해병 익사사건을 축소 은폐하려고 강직한 수사단장을 항명 처벌하겠다는 그들의 군인정신은 비굴일까. 민주 진보단체들의 외침은 공산세력으로 몰아치는가 하면, 소수에 불과한 비판언론은 가짜뉴스 정치공작소란다. 심각한 경제악화에 복지예산, 연구예산은 마구 칼질하면서도 들러리 어용단체에 거액을 몰아주는 머릿속에는 무슨 철학이 들어있나, 이기적 탐심 외에 그들 안중에 국민과 나라가 티끌만큼이라도 있을지, 혹평이 싸다. 나라를 도탄에 빠뜨리고 먹칠하는 사료(史料)가 넘쳐나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라고 말한다. 잠시 거쳐갈 못된 권력이 나중에 치유와 회복조차 불가능한 상채기만을 남기는 것은 아닌지 마음들을 졸인다.

하물며 작은 펜도 두려움으로 대할진대, 권력이야말로 극히 노심초사할 대상이다. 국민을 하늘같이 받들면서 떨리고 삼가는 심정으로 정의롭게 행사하지 않는다면 참혹한 심판이 기다림을 역사가 말해준다.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