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김민호 목사(우리장로교회)

 

여러분이 캐나다에 처음 이민 오셔서 하나님께 드린 첫 기도가 기억나십니까? 어쩌면 우리의 첫 기도는 캐나다에서의 정착과 번영, 자녀들의 잘됨과 행복을 꿈꾸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한번 여러분의 이민 생활 중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손길들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굵직굵직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을 것이고, 그런 경험을 하기까지 간절히 기도했던 여러분의 기도와 결단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지금은 어떠한가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드릴 영광과 감사보다 여전히 내 자신의 번영과 명예, 가족의 행복과 평안에만 맞추어져 있는지는 않습니까?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 온 이민자들과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지파별로 약속하신 땅을 받았습니다. 이미 건설되어 있는 건물, 경작해 놓은 땅, 그들이 심지 않은 포도원과 감람나무 열매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기에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재정립하고 하나님과 맺었던 시내산 언약을 갱신하는 고별 설교를 합니다.

이 언약갱신은 아주 역사적인 세겜이란 곳에서 이루어졌는데, 세겜은 일찌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첫 번째로 제단을 쌓은 곳 (12:6,7)이었고, 야곱이 삼촌 집에서 돌아올 때 우상들을 다 묻은 곳이었습니다.(35:4) 여호수아도 가나안 입성 초기에 이곳에 있는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우고 축복과 저주의 율법을 낭독케 해 신앙적 결단을 촉구한 곳입니다.(8:30-35)

이 의미있는 땅, 세겜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모아놓고, 그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오셨는지를, 아브라함부터 이삭, 야곱, 요셉, 애굽, 출애굽, 광야, 그리고 가나안 정복까지의 스토리를 한 편의 영화처럼 쭉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24:15) But as for me and my household, we will serve the LORD.

이 부분을 읽다가 여호수아의 이 고백이 제 가슴속에 확 들어왔습니다.

I will serve the Lord라고 한 것이 아니라 We will serve the Lord 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우리도 쉽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자녀가 다 장성한 후에도 우리는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Silence Exodus(조용한 출애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미국의 이민교회를 경험한 한인이 교회의 청소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면서 신앙도 떠나는 모습을 보고 한 말입니다.

여호수아의 이 고백은 모든 백성들이 자신들의 번영만을 꿈꾸고 있을 때 했던 고백입니다. 그는 지금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미 그의 자녀들도 장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 있게 모든 백성들 앞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섬길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고백이 아닌 그의 평생의 삶이 담긴 묵직한 고백이며, 그의 자녀들도 여호수아가 살아낸 삶의 모습을 보고 배워서 함께 고백했던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정착과 번영을 꿈꾸는 그 자리에서, 여호수아는 진정으로 해야 할 고백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하고, 그들이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는 고백을 하게 만들며 그의 생을 마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다음 세대가 우리가 그토록 바랬던 이 땅에서의 정착과 번영을 성취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만이 우리가 바라고 소망해야 했던 것일까요? 우리의 처음 소망이 그러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정말 바래야 할 소망은 여호수아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나와 함께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편집인 칼럼] 한국의 ‘트럼프 리스크’

● 칼럼 2024. 2. 21. 10:0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한국의 ‘트럼프 리스크’

 

 

유럽이 혼란에 빠졌다. 미국에서 트럼프가 던진 말폭탄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10일 사우스 캐롤라이나 유세에서 “방위비를 부담하지 않는 나토 회원국을 공격하도록 러시아를 부추기겠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미국이 요구하는 방위비를 내지 않는 나라에 대해 러시아에게 공격하라고 독려하겠다는 것이다.

제3자가 들어도 도대체 제정신으로 내뱉은 말인지 의아하다. 아무리 돈이 중하다지만, 돈을 내지 않으면 적에게 동맹국을 공격해달라고 부탁한다니 놀랍고도 반역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당사자인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이 느낀 배신감과 충격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유럽에는 트럼프의 지난 집권기인 5~6년 전에도 비슷한 언동으로 나토를 들쑤시고 동맹의 불신과 불안을 불렀던 트라우마가 있다. 그런데 ‘악몽’이 재연될 수도 있다는 강한 적신호가 켜진 것이다. 더구나 미국과 나토의 지지부진한 지원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갈수록 기세등등해지고 있는 상황과도 맞물려 유럽에 일고있는 우려와 충격은 엄청나다.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는 원래부터 미국 주도로 창설된 군사-안보동맹이다. 1949년 출범 당시 소련의 위협과 군국주의 부활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출범했지만, 이후 정치·경제적 위기와 대테러 및 대량살상무기 확산 저지 등 북미와 유럽의 공동안보와 평화를 추구하는 집단 방위체제로 기능하고 있다. 당초 12개국이던 회원국도 31개국으로 크게 늘었다.

국제 상황과 역학 변화에 따라 나토의 위상과 역할도 달라지고 있지만, 창설이래 불변의 원칙은 ‘회원국 일방에 대한 무력공격은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고 명시된 조약 제5조의 집단방위 확약이다. 거기에 ‘돈을 내지 않으면 회원국이라 해도 공격을 방관한다거나 조장한다’류의 숨은 의미는 없다. 설령 돈을 내지 못해도 침략을 당하면 자동적으로 무력개입하여 공동 방위한다는 약속이 ‘동맹’에 내포된 것은 상식이다. 최근에 중립국 지위를 버리고 31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한 핀란드와 가입을 눈앞에 둔 스웨덴 모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에 자극받아 나토의 ‘공동방위’ 안보 울타리가 절박해진 것도 그런 기대와 신뢰에 기반한다.

그런데 트럼프는 미국의 세계 최강 군사력이 나토 전력을 좌우하는 것을 무기로 ‘안보 무임승차론’을 디밀며 유럽 동맹들에게 돈을 강요한다. 그는 아예 나토를 탈퇴해 버리겠다는 위협에 더해 적국에 공격해달라고 부탁할 것이라는 극언의 겁박까지 서슴치 않았다.

트럼프는 미국에서 다시 집권할 가능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11월 대선에서 바이든을 누르고 4년 만에 다시 권좌에 오른다면, 악몽은 현실이 된다.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은 좌충우돌하는 그의 언행들로 보아 동맹을 적국만도 못하게 취급할 수 있다는 협박이 헛소리로 끝나지만은 않을 것이기에 안절부절하는 것이다.

 

유럽의 ‘트럼프 쇼크’가 먼 산의 불이 아닌 ‘한국 리스크’로 다가오는 것은, 미군 철수를 거론하며 천문학적 방위비 분담금을 쥐어 짠 ‘살벌한 추억’이 생생한 까닭이다. 더구나 한국 현 정부의 어리숙한 외교-안보 역량과 그로인한 위기가 날로 고조되고 있는 남북대치와 한반도 정세의 위태위태한 현실 때문이다.

트럼프 말폭탄과 관련해 전현직 대통령을 통틀어 전례가 없다고 지적한 미국 뉴욕 타임즈는 “유럽의 동맹국들이 미국에 기댈 수 없게 된다면 상호 안보협정을 맺은 다른 나라들 역시 미국의 도움을 확신하기 어렵다”면서 이는 과거 한국전쟁과 같은 상황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상기시켰다. “역사는 이런 상황이 전쟁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유발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며 “1950년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한국을 제외한 ‘극동 방위선'을 발표한 지 5개월 뒤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다”고 적시, 6.25 남침을 초래했다고 보는 ’애치슨 라인‘에 비견하기도 했다.

어쩌면 한국에 있어 트럼프 충격의 재발은 유럽 그 이상의 태풍으로 닥칠지 모른다. 트럼프가 재등장하면 주한미군과 전략자산을 담보로 한 공박은 몇 배 거셀 것이다. ‘동맹’이나 ‘우방’에 의미를 두지않는 트럼프가 “한국방위에서 손을 떼겠다”든가, 유럽동맹에 겁을 준 것처럼 설마하니 “내 친구 김정은에게 공격하라고 부추기겠다” 식의 청천벽력 같은 괴설을 늘어놓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다.

이제 머잖았는데, 자주국방은 내팽개치고 미군철수와 전작권 보유에 겁을 내면서, 상전처럼 떠받드는 미국의 군사력에 목을 매단 세력들은 경재도 폭망상태니 어떻게 해야하나… 북한과는 철천지 원수가 되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 우크라이나에서 암암리 대리전을 치르면서 중국과 러시아 마저 적으로 만든 외눈박이 무능정권의 ’트럼프 리스크’를 떠올리면 아찔하다. 사면초가에 빠져 “독도를 넘겨줄게”라며 일본으로 달려가 자위대에 매달리는 것은 아닐까.

[목회칼럼] 축복의 삶

● 칼럼 2024. 2. 21. 09:58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축복의 삶

 

이영정 목사 (덴토니아파크 연합교회 담임)

 

오늘날 세상은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충돌로 사회는 점점 복잡해 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진리와 가치관이 각자가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세상에는 온전한 절대적 진리는 없다. 단지 지엽적인 진리만 있을 뿐이다” 라고 주장을 합니다. 따라서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이 대화의 시작부터 자신의 주장을 문화와 종교라는 테두리안에서 하는 제한적이고 상대적인 것 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신의 주장도 수많은 진리주장의 하나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지 못하면서 다른 종교의 교리를 무분별하게 기독교와 혼합하면서 새로운 진리라고 현혹하는, 착각속에 빠져있는 목사와 그들의 그럴듯한 주장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때에  “진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은 쉽지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자체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학자가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바른말을 하기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똑바로 이해해야 하고 이를 표현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독교 안에서도 수많은 교단과 교파로 갈리어서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기 보다는 교단의 지엽적인 믿음을 대변하는 교리주의가 범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제기되는 논점에 대한 대답을 성경을 통해서 찾고 있는데 그 당시의 문화와 사회상황을 참고하며 이해 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다원주의가 마치 지식인의 전유물인 것 처럼 착각하는 사회에서 서로 다른 믿음의 실체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도 없이 그럴듯한 궤변으로 현혹하고 현혹되는 요즈음의 현실에 절실히 요구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나타난 창조의 의지를 ‘정의와 자비’라는 대 명제를 통해서 성경에 증거된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삶 그리고 고난과 부활의 십자가를 통해 기독교의 정체성을 이야기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내용은 정의와 자비의 실천을 깨달음에서 그치지 않고 이 세상 안에서 “삶을 통해 증거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과 봉사로 이룬 선교가 중심이 된 삶의 핵심요소입니다. 참교회의 모습을 어거스틴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룬 믿음 공동체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은 정의와 자비를 깨닫는데 머무르지 않고 이를 삶에서 실현시키는 공동체의 선교하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제기된 한 신도의 질문이 오랬동안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하는 토론과 성경공부는 선교라는 차원에서 볼 때 준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준비를 언제 까지 하고만 있을겁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 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손과 발이되어 그의 자비로운 따뜻한 마음을 품고 우리에게 되갚을 수 없는 어려운 이웃에게 선교를 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숨이 살아 있는 축복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인 칼럼] 미치광이와 신부님들

● 칼럼 2024. 1. 28. 06:4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칼럼- 한마당] 미치광이와 신부님들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뭐라고 하는지 아시느냐? 사전에서는 '미치광이'라고 한다. 저는 미치광이를 이렇게 풀이하겠다.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전쟁과 죽음으로 몰아넣는 사람들이라고…"

신부님은 말을 이어갔다. "국민을 앞세우며 국민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사람들, 법과 원칙을 주문처럼 외우지만 실상은 한줌 권력의 밑바닥을 핥는 내로남불의 사람들, 이른바 언론의 이름을 지녔지만 조잡한 가짜뉴스를 양산하며 가증스럽게 말과 글과 정신을 더럽히고 자기욕망과 이익에 복무하는 사람들, 스스로를 새롭고 개혁적이고 미래지향적이라고 그럴 듯 주장하면서도 실은 제 잇속만 챙기는 정치 낭인들, 이런 사람들을 미치광이라고 풀이한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 사회는 이런 미치광이들이 주름잡는 시대인 것처럼 보인다.”고 한탄했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 요즘 정기적으로 열고있는 '오염된 바다, 흔들리는 민주주의를 우려하는 월요시국기도회'에서 한 신부님이 진단한 시국 현실이다. 필자가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어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려는 성직자의 매서운 외침은 우리들 가슴에 울림을 준다.

세상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그런 ‘미치광이’들의 세상이 아닌지 의심이 들게된다.

자국민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는데 2년째 공방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호전광들을 본다. 병력 부족에 우크라 장병 평균연령이 43세가 되고, 푸틴은 감옥의 살인범들까지 총알받이로 내몰고 있다. 요즘엔 북한이 보내주는 포탄과 미사일로 득의만만인 반면, 전선이 밀린 젤렌스키는 미 유럽에 애걸복걸이다.

중동은 어떤가. 무차별 기습공격으로 1천3백여명을 죽이고 240여 명을 인질로 납치한 하마스의 무모한 도발, 그에 분노해 ‘씨를 말리겠다’는 이스라엘의 잔학한 보복전. 겨우 3개월여 만에 2만5천여명이 사망하는 참상에도 여전히 버티는 하마스의 130여명 인질극에 지친 여론으로 극우 네타냐후는 사면초가다.

트럼프의 재등장이 현실화하고 있는 미국은 미치지 않은 건가. 중범죄를 포함한 91건의 혐의, 4번의 기소, 그것도 민주주의 본산인 의회를 유린한 내란선동의 주역이다. 희대의 거짓말쟁이로 확인된 그가 공화당의 압도적 1인자이고, 여론조사 마다 바이든을 앞선다. 대법원이 명줄을 쥐었다지만, 그가 임명한 다수의 보수판사들이 미치광이 유권자들처럼 미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가 있을까.

“남이야, 지구야 망하든 말든” 마약과 마피아, 광물과 동물과 환경수탈, 권력에 눈멀어 정적 죽이기에 미친 자들이 횡행하는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동족을 이제부턴 동족이 아니라며 연일 적개심을 쏟아내고 있는 북(北)의 지도자와 그를 궁지로 내몰며 화를 돋우는데 열심인 남(南)의 대통령은 과연 제정신 인가. 하긴 여당대표를 앉혔다가 쫓아내는데 재미들린 듯 옥신각신 미심쩍은 ‘윤-한 소동’도 그들만의 ‘광대극’은 아닐지.

우리들 가까이 득실대는 미치광이들도 다시금 수오심(羞惡心)을 부른다. 본분을 망각하고 즐겨 뇌물성 명품까지 챙겼다는 영부인부터, ‘야당대표 살인미수’라는 정치테러 대사건과 범인을 쉬쉬 덮고 왜곡하고 가짜뉴스로 뭉개는 배후 의심 세력들, 대통령과 악수하며 쓴소리 했다고 국회의원의 입을 틀어막고 사지를 들어다 내동댕이 친 횡포권력. 혹한 속에 1만5900배 철야행동으로 159명이 참사한 이태원 특별법을 애소하는데도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비정한 자들…

시국기도회의 신부님들은 또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에겐 부끄러운 친일의 역사도 있지만 그보다 더 숭고하고 위대한 수많은 의병과 독립운동 역사가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광풍의 역사도 있지만 그것을 극복해낸 4·19 혁명이 존재한다. 엄혹했던 군부독재 시련과 아픔의 역사도 있지만 5·18 민주화운동을 씨앗으로 87년 6월 민중항쟁과 6·29 선언을 이끌어낸 환희의 역사도 있다. 그리고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혁명 승리도 있다" 신부님들은 아파하는 마음들을 다독이며 용기를 북돋운다.

"가난한 이들의 친구, 죄인들의 피난처, 병자들의 치유자이셨던 예수님의 삶이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예수의 죽음이라는 절망과 아픔, 시련을 가지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부활의 당신을 보이시고 사명도 주셨다. 우리에게 죽음이 끝이 아님을, 새로운 시작임을 알려주셨다. 예수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는 것, 바로 거기에 길이 있지 않겠느냐. 이 시대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걸어가도록 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런 사회 집단을 '패거리'라고 강력하게 비판한 바 있다. 이제 우리 자신이 세상의 온갖 미치광이 패거리들의 패악질을 불태울 수 있는 들불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다짐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