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칼럼] 가증한 기도

● 칼럼 2024. 6. 9. 03:40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가증한 기도

 

 송만빈 목사  < 노스욕 한인교회 담임 >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젊은 부인이 식료품 가게에 들어가서 가게 주인에게 성탄절 저녁식사에 아이들을 먹일 양만큼 식료품을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가게 주인은 돈이 얼마나 있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남편이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제 수중엔 돈이 없습니다. 기도밖에는 정말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이 말에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이 했다는 기도를 종이에 써주세요. 그러면 그 무게만큼 주겠소.”

    가게 주인이 이 부인을 정말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종이 무게만큼 식료품을 주겠다는 것, 이 말은 안주겠다는 말이나 똑같잖아요. 하지만 부인은 주인의 말대로 합니다. 주머니에서 작은 공책을 꺼내 주인에게  건네줍니다. 주인은 공책에 무슨 기도가 적혔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양팔 저울 한쪽에 공책을 올려놓습니다. 그리곤 “자! 당신의 기도가 얼마치의 무게가 나가는지 달아 봅시다”라고 중얼거리며, 빵 한 덩어리를 저울의 다른 팔에 올려놓았어요. 주인 딴엔 빵이 공책보다 무거울테니 당연히 빵을 올려놓은 팔쪽으로 기울어질 거라 생각했겠죠. 그리고 기도의 무게가 너무 안나가서 줄게 없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빵쪽으로 기울어져야 할 저울 팔이 움직이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은 다른 식료품도 올려놓아봤어요. 그런데 이번에도 팔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주인은 당황합니다. 그리곤 이렇게 말합니다. “저울에 더 이상 올려놓을 수 없으니 당신이 원하는 만큼 알아서 봉지에 담아 가시요.” 부인은 가게 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곤 필요한 식료품들을 봉지에 담아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 가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저울이 고장났던 겁니다. 주인은 며칠 뒤에서야 저울이 고장난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한 거예요. 그동안 멀쩡하게 작동하던 저울이 왜 하필 그 부인이 왔을 때 고장났던 걸까?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그렇다면 젊은 부인이 공책에 적은 기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 오늘 제 어린 자식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였어요.

    세상의 관점에선 이 사건이 단순히 우연의 일치로밖에 안보이겠지요.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귀기울여 들으세요. 그리고 가장 선한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쳐서 그렇지, YES로든, NO로든, 아니면 WAIT으로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세요.  우리의 모든 기도는 응답받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잠언 28:9 보면,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기도가 있어요.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의지해서 기도해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인데, 말씀을 듣지 않고 기도하니 내 맘대로 하는 기도,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 내 욕심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기도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은 채 드리는 기도는 자칫 잘못 하다간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기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드리기를 바랍니다.

 

 

 

[편집인 칼럼] 5.18에 되새기는 의분의 혼

● 칼럼 2024. 5. 27. 06:0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5.18에 되새기는 의분의 혼

동학 농민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났을 때 조선 조정은 동학의 거두 최제우를 처형해 기세를 꺾으려 했다. 그러나 교조의 억울한 죽음은 더욱 거센 반발을 부른다. 학정에 시달린 농민들의 항의와 시정요구가 빗발치는데, 위 아래 관청은 모두 외면하고 오히려 ‘처벌능사’의 태도로 민심을 짓밟았다. 부패와 무능으로 도탄에 빠진 국정을 척신들과 무속 주술정치로 주무르며 권세유지에 급급한 자들에게 백성의 신음과 절규는 ‘동구 밖의 개짖는 소리’쯤이나 여겨졌던 것이다.

분노한 민심이 폭발하자 왕실은 허둥대며 사익과 당파적인 권력의 득실 활용에 급급하다 외세를 끌어들인다. 마치 홍수에 빠져 허우덕대다 악어 등에 올라간 격이니, 나라 꼴이 어찌되겠는가. 동학혁명은 그렇게 미완에 그쳤고, 조선은 악어의 제물이 되어 망국의 길로 달려갔다.

일제의 국권침탈과 민생수탈에 견디지 못한 민족적 봉기가 3월1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번졌다. 방방곡곡의 남녀노소가 “왜놈은 물러가라”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불의와 부정에 민감한 백의민족의 정의감과 저항의 피와 혼이 되살아 난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총칼로 무도하게 진압했다. 거기에 부역하며 호사한 민족의 배반자들, 가령 이완용 같은 매국노는 “독립운동이라는 선동은 미친 짓” 이라고 나무라고 “깨닫지 못한 불쌍한 자들이 몰지각한 행동을 하니 몽둥이를 들 수밖에 없다”고 동족을 위협했다. 강경대처로 소요가 잦아들자 이제는 “여러분이 잘못과 오늘의 시국을 깨달아서 그런 줄로 알고 기분이 상쾌하다”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객의 비수에 당해 시름시름 앓다 저승사자에게 끌려갔다. 불행한 말로는 자업자득이요, 후손들까지 수치 속에 사는 저주를 원망하게 만들었다.

삼일혁명으로 부터 40년이 지날 즈음, 이승만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민족의 의로운 피는 다시 들끓기 시작한다. 4.19 혁명의 전운이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인물이 친일 고등경찰을 등용해 독립투사들을 핍박했다. 6.25 와중에 수도 서울을 버리고 도주했던 트라우마의 발로였는지, 반공을 빌미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패악질의 상처는 지금도 아프다. 헌데 그것도 모자라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영구집권을 꾀하다, 민심의 거대한 파도에 맞닥뜨린 것이다.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번져 경찰이 무차별 발포하는 사태까지 이르자 이승만은 개각과 자유당 탈당, 내각제 개헌 운운 급조한 수습책을 내고 게엄령 선포로 맞선다. 하지만 권력자의 무능과 무지한 현실인식은 성난 민심에 불을 붙였을 뿐이다. 이승만의 담화는 사태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제시하지 않은 채, 시위가 “그저 불평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호도했다. 민의가 버린 정권은 하루 아침에 무너졌고, 그는 이른 새벽에 허겁지겁 하와이로 망명,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5.18 민주화운동은 4.19 혁명으로부터 20년만에 일어났다. 무소불위 독재자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뒤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일당에게는 보이는 게 없었다. 정치와 행정에 깜깜이 군인들이 국가권력을 석권하고, 국회와 언론, 경제와 문화까지 입맛대로 칼질했다. 박정희를 능가하는 전두환 성역화에, 국민을 겁박하는 독재공포로 뒤덮었다. 어김없이 독재 장기화를 꿈꾸며 재계를 쥐어 짠 수렴청정의 토대까지 만든다. 하지만, 민족의 의로운 저항의 혼과 피는 결코 권력의 오만과 못된 짓거리들을 두고보고만 있지는 않는다. 대학의 젊은이들이,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들이 주먹을 부르쥐었다. 서울의 봄을 외친 신군부 타도의 함성은 전국에 번져 부마항쟁의 기세가 살아난 부산에서, 대구에서, 대전에서 거센 풍랑을 일으켰다. 그 중에도 광주는 동학이 휩쓸었던 곳이고 일제 치하 학생운동이 잦았던 곳이다. 전두환 일당이 두려워할 만한 경계지역이었다. 5.18 광주학살은 그래서 은밀히 표적이 된 계획범죄 였다.

무고한 시민을 향해 뭉둥이질에 대검과 총탄, 헬기사격까지 자행한 전두환 쿠데타 세력의 짐승같은 만행과 달리 광주시민들은 의분의 항거 속에서도 질서를 지켰고, 나눔과 베품과 희생으로 민주주의와 ‘대동세상’의 비전을 보였다는 사실. 그것은 동학혁명 때도, 3.1혁명 때도, 4.19에도, 그리고 지난 6.10과 촛불혁명 때도 볼 수 있었던 우리 민족의 근성이고 저력이었다. 올해 5.18 항쟁 44주년 기념식을 통해 그 정신을 되새기며, 여전히 흐르고 있을 저항의 피와 혼, 정의로운 기개를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 정권이 드러내고 있는 말기적 증상을 떠올리게 된다. 나라의 경제와 외교는 삼류국으로 전락하고, 민생은 도탄지경인데, 권력방어에 몰두해 국가기관을 총동원하고 있다. 일가 비리를 덮으려 공권력을 사유화하고 거부권을 남발하는 후안무치와 법치유린-. 5.18 기념식에 몸은 참석했다 하나, 허언으로 장식한 기념사와 식장 안팍의 원성들을 보노라면 민중의 분노와 외침을 ‘개짖는 소리’쯤으로 여겼던 불행한 역사의 권력자들이 오버랩 된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주말마다 경고의 촛불을 켜들었고, 지난 4.10 총선에서 거듭 적신호를 주었다. 임계점에 이른 국민의 의분을 거슬러 무슨 험한 꼴을 당할 작정인가.

[목회 칼럼]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 칼럼 2024. 5. 27. 05:0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 기쁨과 소망]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박원철 목사 (늘사랑교회 담임)

 

     ‘주’(헬, 퀴리오스)라는 말은 ‘최고의 권세자, 으뜸인 분, 모든 것 위에 뛰어난 분, 만유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성경이 계시하는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왕이시고, 주님이시고, 주권자이신 나라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이다. 그러나 세속화된 교회 안에는 인간 중심의 복음이 만연하다. 이 복음은 염가 판매되는 싸구려 복음이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성공과 건강과 풍요와 축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님께 작은 것을 드리면, 그 분이 몇 배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항상 사람의 관심에 호소한다. 그래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중심은 ‘나’이다. 나 중심의 신앙에서는 믿음이 알라딘의 램프와 같다. 램프를 흔들기만 하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들이 세속 기업들과 똑같은 성장 전략으로 교회를 키우려고 하였다. 그 결과 실제로 수많은 대형 교회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교인의 수가 수천명, 수만명, 아니 수십만명으로 늘어날 지라도 이것은 자란 것이 아니라 단지 비대하게 살찐 것일 뿐이다.

      지난 2007년에 윌로우크릭 교회의 32년을 돌아본 목회 보고서를 엮은 책 <Reveal: Where Are You? 드러남: 당신은 어디에?>를 통해서 빌 하이벨스 목사는 지난 32년간의 자신의 목회가 실패하였다고 고백하였다. 빌 하이벨스 목사가 이렇게 실패하였다고 고백한 요지는 교회가 성도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줄 생각을 안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생각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심판, 정죄, 회개, 변화, 헌신, 충성, 고난, 이런 말씀들을 원하지 않는다. 성도들은 축복, 용서, 치유, 건강, 성공, 번영 같은 말씀들을 원한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곳에는 성도들이 모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가 성도들에게 정말 필요한 십자가의 복음, 어린양 예수의 진리는 외면하고 성도들이 원하는 달콤한 것만 주는 교회가 되어 버렸다. 다시 말해, 솜사탕 교회가 되어 버렸다. 영적 성장과 제자도의 회복에는 관심이 없고 성도들이 원하는 달콤함을 채워주는 가벼운 기독교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도나 말씀 묵상, 교회 봉사와 헌금 등 신앙생활을 하지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뚜렷하지 않은 이른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렸다. 이런 현상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통계가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 기독교인의 66.7%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오퍼레이선월드는 전세계 기독교인의 60%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발표하였다. 또한 한국 기독교인의 40%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한국 목회데이터연구소가 2023년에 발표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나 중심의 신앙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바뀌어야 한다. 세상 중심의 가치관에서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예수 잘 믿으면 무조건 복받는다는 ‘기복주의 신앙’과 풍부한 물질과 재물(부)가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성공(번영)신학’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신앙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정말 우리 신앙의 구심점을 바꾸어야 할 때이다. 더 늦기 전에.

[편집인 칼럼] 초심을 잃어버린 업보

● 칼럼 2024. 4. 15. 06:3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초심을 잃어버린 업보

 

 

이번 총선에서 ‘채상병 사건’은 판세에 영향을 준 주요 이슈의 하나였다.

수해 현장 해병대 장병 익사 사고의 책임규명 과정에 대통령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난 때문이다. 험한 물살에 들어가라고 명령한 사단장을 처벌하지 말라고 대통령실이 외압을 행사한 사실이 밝혀지고, 출국금지 된 피의자 전직 장관을 대사로 발령하는 꼼수까지 쓰면서다. 격노했다는 대통령의 개입이 확인되면 탄핵 사유라는 지적이 나왔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탄핵에 몰려 임기중 사퇴한 닉슨 대통령에 비견되는 사건이라는 진단도 한다.

닉슨은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을 지냈고, 부통령도 역임했다. 대통령 재임 중에는 ‘데탕트’와 월남전 종전, 아폴로11호 달착륙 등 업적을 쌓아 압도적으로 재선됐다. 하지만 거기까지 였다. 대통령선거 과정에 ‘워터게이트’ 사건을 지휘한 사실이 드러나며 마침내 역사상 처음으로 중도 사퇴하는 불명예로 마감했다.

닉슨은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의원 시절부터 그야말로 충직하게 봉사하며 신망을 얻어 최고 권좌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의 초심은 권력이 커질수록 ‘변심’이 되어갔고, 결국은 대통령 권력을 지키려고 무리수를 쓰면서 일거에 파탄을 맞았다.

강직한 검사로 대권까지 거머쥔 윤석열도 취임연설에서는 ‘국리민복’에 성심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는 취임 직후부터 그 초심을 져버렸다. 언행과 국정 모두에서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안하무인(眼下無人)과 내로남불로 일관했다. 국민들에게는 불편과 불안과 고통을 안기면서 자기 식구들은 감싸고 덮기에 급급했고, 정책실패 경제악화로 나라 곳간은 비는데 국비를 제 주머니 돈처럼 펑펑 썼다. 오죽하면 선거 와중에 채상병 사건을 포함한 이른바 ‘이-채-양-명-주’라는 조어까지 유행이 됐을까.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에 하나님이 마지못해 왕으로 세워준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다. 그는 준수하고 신심이 깊은 지도자였으나, 연전 연승하면서 교만해져 하나님을 후회하게 만든다. 법도를 무시하고 제사장 사무엘을 대신해 제사를 행했고, 전쟁터에서 적군을 전멸하고 노획물도 챙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 그는 진정한 참회를 외면하고 정적인 다윗을 죽이는데 몰두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초심을 져버린 업보를 잘 보여준다.

초심을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해마다 각오를 새로이 하는 년초의 결심조차도 지켜내기가 어려울진 대, 수십 년을 처음의 마음가짐과 자세로 성심을 다하기가 어찌 말처럼 쉽겠는가. 특히나 갈수록 영역이 넓어지고 막강해지는 권한에 자부심과 자만이 생겨 도취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초심이란 온데간데 없어지는 것이다.

검사로, 판사로, 또 경찰관으로 임용되면서 국민을 하늘같이 섬기고 봉사하겠다는 공복의 자세를 선서하지만, 차츰 국민이 어리석게 보이고 함부로 대해도 될 존재들로 여겨지는, 의식 속의 ‘신분역전’ 현상이 벌어진다. 정론직필을 결심했던 기자가 회유와 권력에 굴복해 ‘기레기’소리를 듣고, 페스탈로치를 신봉했던 교사가 학생 차별에 익숙해지고 학부모들 향응에 넘어간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친 의사, 나이팅게일을 품었던 간호사에게 언젠가부터 환자는 시혜의 대상으로, 돈벌이 수단으로도 변질된다. 안수받으며 하나님의 종으로 충성하겠다 맹약했던 목사와 장로들이 자기도 모르게 성도들의 상급자로, 교회의 주인으로 거들먹거리는 변심도 얼마든지 본다.

그만큼, 시종여일(始終如一), 초지일관(初志一貫)의 삶이란 참으로 어렵고 힘든 도정이고 또한 성취할 귀한 가치이기도 하다.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시경(詩經)에는 옛 군왕들에게 진언했다는 “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 鮮克有終: 시작은 쉬울지 모르나 유종의 미는 어렵다는 뜻)과 “행백리자 반구십”(行百里者半九十: 백리를 갈때 구십리가 반으로 여겨지듯,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뜻) 이라는 말이 있다. 특히 지도자들에게 초심을 잃지말고 노력하라는 훈계라고 하겠다.

이번 총선을 돌아보면 초심과 변심을 지켜보고 준엄하게 던진 표심과 민심을 읽게된다. 대통령과 정부의 무지막지한 변심에 뿔이난 민심이 그야말로 혹독한 심판의 표를 던졌음이 드러났다. 많은 국회의원들은 초심을 잃어버린 오만의 업보로 공천 혹은 경선에서 탈락하는 징벌을 받았고, 선거에서 표를 얻지못해 쓴잔을 마시고는 뒤늦게 후회하는 구차스런 몰골들도 보여준다.

그렇다고 당선자 모두가 초지일관의 평가로 영예를 얻은 것은 물론 아니다. 혹은 재수가 좋아서, 어떤 이는 유권자를 기막히게 속여서 표를 모은 정치꾼도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선거의 가르침을 실감했음에는 틀림없다고 보아, 앞으로 4년간 과연 어떤 자세로 국정과 의정활동을 하는지에 향후의 정치적 생명과 행로가 좌우되리라는 것도 자명하다.

총선결과를 받아든 집권세력은 과연 개과천선할 것인가. 민심을 엎고 정권심판을 공약한 야당은 다수 국민의 여망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받들어 실행해 나갈 것인가. 지금의 초심이 지켜지는지를 국민들은 다시 냉철하게 감시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