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동키호테 불장난

● 칼럼 2024. 10. 21. 14:4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동키호테 불장난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청와대 행정관 오정은과 사업가인 한성기·장석중 등 3명은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의 조선 아태평화위원회 소속 박충 참사관을 만난다. 이들은 박충에게 대통령 선거 직전 휴전선 인근에서 무력시위를 벌여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접전을 벌이며 이른바 ‘차떼기 사건’과 아들 병역의혹 등으로 고전하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돕기 위해 북한에 무력시위를 해달라는 상식 밖의 이적성(利敵性)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선거승패에 목을 매달 정도로 다급했다 하나, 적군에게 아군을 향해 총을 쏘아달라는 제안과 거래를 하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자칫 남북간 전쟁으로 비화할 수도 있는 무력도발을 적에게 요청하는 충격적 발상이 청와대 직원까지 나서 ‘선거용’으로 악용됐다는 데서 비판여론이 폭발했다. 보수정권들이 민심을 돌리기 위한 충격요법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온 ‘북풍’ 사건의 하나인, ‘총풍사건’(銃風事件)이었다.

앞서 전두환 군사정권 막바지에 민심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열망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당시 궁지에 몰린 정권은 1986년 10월30일 갑자기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해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고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려 한다며 ‘평화의 댐’ 건설계획을 터뜨렸다. 모든 매체가 동원돼 금강산댐으로 북한이 수공작전을 펼치면 서울이 완전히 잠긴다는 공포여론 조성에 나서 국민적 모금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그런데 10.30 금강산댐 발표 다음 날, 정부는 재빠르게 건국대학에서 점거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헬기까지 동원해 강경진압, 1천5백여명을 연행해 그중 1천288명을 ‘용공좌경분자’로 구속하는 대규모 특공작전을 벌였다.

비현실적인 금강산댐 수공설을 퍼뜨리며 시위 학생들을 용공분자로 낙인찍은 군사정권의 반공몰이 공세로 인해, 반정부적 민주회복 투쟁은 잠시 주춤하고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안기부가 벌인 ‘북풍공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 다음해 1987년 초여름, 6.10 민주항쟁으로 직선제개헌이 쟁취되었으니, 거짓과 폭력이 결코 오래 가거나 승리할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역대 군사 독재정권이 고비마다 ‘북풍’을 악용했다는 사실은, 과거 북한을 방문했던 특사에게 김정일이 “남쪽에서 총선을 앞두고 우리 군대에게 돈을 줄테니 판문점에서 중화기를 흔들어 달라고 주문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는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의 회고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취약한 남북정권 간에 암묵적인 소위 ‘적대적 공생’의 일단을 엿볼 수도 있는 증언이다.

민주화 이후 그 속셈을 간파당해 ‘양치기 소년의 늑대’처럼 효용이 사그러든 그 북풍과 총풍이, 독재를 흉내내는 어리숙한 정권 아래서 전쟁망령으로 되살아 나는 것일까.

한국의 드론이 평양 상공에 침략해 전단을 살포했다고 북한이 연일 펄펄뛰며 ‘끔찍한 참변’을 들먹여 위협하고 있다. 북은 특히 “한국 군부가 주범”이라면서 전방부대에 전투태세 명령까지 내려 일촉즉발의 불안을 자아낸다. 한국 국방부는 “북 정권의 종말”을 경고하며 ‘할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강하게 맞받아 치지만, 드론을 보낸 주체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애매한 태도를 보여 사태를 조장한다는 불신도 사고있다. 일부에서는 “윤 정권이 국정난맥의 늪을 벗어나려고 신북풍을 이용하는 게 아니나”는 지적도 나온다. 이번 사태의 근본원인이 대북 풍선 전단살포에서 비롯돼 북이 오물풍선으로 받아치고, 대북 확성기에 북 또한 대남 확성기 대응으로 에스컬레이트 된 끝에 무인기로 강대 강 선제위협을 가한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번 사태에 미국의 책임도 거론했다. 한국이 ‘전작권’도 없는데 미국 용인없이 감행했겠느냐는 것이다. 민간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암암리 지원한다는 CIA를 겨냥한 것일 수도 있다.

드론을 한국 군이 보낸 것인지, 민간단체가 보낸 것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어느 쪽이든 위험한 불장난 임에는 틀림없다. 만에 하나 남북간 충돌로 번져 전쟁에 휘말린다면, 그야말로 상상조차 하기싫은 민족공멸의 참상을 감당해야 한다. 혹여 정권의 치부를 가리고 곤경을 모면해 보겠다는 꼼수의 발상이라면, 나아가 충돌을 빌미로 ‘계엄’ 운운까지 노린 공작이라면, 그야말로 민족을 불구덩이 제물로 삼은 천인공노할 반민족 반인륜적 만행이고 동키호테 같은 전쟁놀음이 아닐 수 없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물론이고 이스라엘-하마스, 헤즈볼라 전쟁도 현대 첨단전쟁이 얼마나 잔학한지를 보여준다. 과거 전쟁은 나름대로 정의를 앞세운 응징과 보복에 그쳤던 것과 달리, 이제는 전쟁의 명분도 원칙도 불분명한데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특징을 보인다고 말한다.

노벨상을 받은 한강 작가는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매일 죽어 나가는데, 잔치를 할 수는 없다”며 수상 회견을 피했다. 그런 품격과 인간애를 지닌 노벨상 작가를 배출한 한쪽에서는 최고의 작가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전쟁 불장난을 ‘소꿉장난’쯤으로 여기는 모리배들이 설치는 요즘 한국이다.   < 편집인 김종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