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믿음이란 무엇인가?

● 칼럼 2024. 7. 7. 12:5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믿음이란 무엇인가?

 

송민호 목사 < 토론토 영락교회 담임 >

 

1871년 시카고 대화재가 일어났을 때 온 시가지가 불바다로 변했습니다. 화마는 순식간에 다운타운 건물을 삼키면서 번져 나갔습니다. 10월 8일 주일 저녁에 시작된 화재는 10월 10일 화요일에 가서야 끝났고, 이로 인해 3백 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엄청난 재산 피해가 있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린 드와이트 무디는 그가 섬기던 교회가 불에 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실의에 차 있는 무디에게 한 신문기자가 냉소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당신의 교회를 지켜주지 않으셨습니까?” 이때 무디는 믿음을 잃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늘 더 큰 교회당을 달라고 기도해 왔는데, 이번에 하나님께서 큰일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더 큰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극심한 재앙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무디는 한마디로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자기의 경험을 믿거나 지식에 따른 판단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고 행동합니다. 무디는 자기 능력이나 가진 재산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만을 믿으며 더 큰 예배 처소를 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의 믿음대로 커다란 예배당이 세워졌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믿음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 인도, 그리고 개입을 믿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또한 그 하나님은 우리가 찾을 때 상주시는 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얼마나 큽니까? 절망 중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소통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삶에 어떻게 개입하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임재, 인도, 그리고 개입을 분명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목회 칼럼]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 칼럼 2024. 6. 25. 06:3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권영정 목사 <세계로교회 담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시편 42:1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고백하는 것과 같이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사슴은 열이 많은 동물이기 때문에 물을 자주 마셔서 체온을 조절해야 하지만, 그 지역이 물이 부족하고 그나마 물이 있는 곳에는 각종 천적들이 물을 마시러 오는 사슴을 노리고 있기에 쉽게 물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물을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것은 생명을 건 갈급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아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수도원’ 하면 우리는 금욕적인 생활과 사회와의 차별 혹은 단절된 개인이나 공동체 생활을 생각합니다. 초기 수도사들과 중세 수도원들을 보면 혼란한 사회적 현실에서 떠나 개인의 금욕과 사회와의 단절이 수도사들의 삶을 대표하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동방 수도원이 서방으로 전파되면서 은둔자의 삶에서 현실적 복음사역에 관심을 가지는 형태의 변화에 큰 역할을 한 수도사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람으로 베네딕트가 있습니다. 베네딕트는 규범집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때 참된 행복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네딕트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첫 단추가 순종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면서 순종이란, 듣는 것으로 시작하여 들은 것을 실행할 때 온전한 순종임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소음 속에 살아갑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소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듣는 것을 넘어서 우리는 경청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수도자들은 듣는 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세상의 소리를 듣고, 세상 사람들의 소리를 경청하였습니다. 우리는 듣더라도 잘 들어야 합니다. 듣고 싶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침묵 가운데 마음의 문을 열고 들으라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자는 교만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말이 앞서기 전에 먼저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므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기고] "6월은 온타리오주 노인의 달입니다"

● 칼럼 2024. 6. 9. 03:4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기고]  6월은 온타리오주 노인의 달입니다

 

조성준 온타리오주 노인복지장관

 

온타리오주 성장의 밑거름이 된 노년 인구의 업적을 기념하고 그들이 우리 삶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을 되새겨 보기 위해 1984년 6월 제정된 ‘온주 노인의 달’이 올해로써 4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수많은 노인의 크나큰 기여가 있었기에 온주가 현재와 같이 성장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온주의 시니어들은 인구 집단 중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그룹이 됐습니다. 65세 이상 성인의 수는 2021년 200만 명에서 2046년에는 440만 명까지 가파르게 증가할 예정입니다.

올해 노인의 달 주제인 ‘노인들을 위해 일하다(Working for Seniors)’에는 온주의 성장에 기여했던 고령화 인구가 더욱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온주 정부가 앞으로도 다양한 지원 대책을 꾸준히 이어갈 것이라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정부의 노력을 바탕으로 올해 ‘노인의 달’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공헌한 우리 시니어들의 노력을 치하하는 훌륭한 기회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저는 온주 정부가 노인들이 지역 사회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의 각종 요구 사항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해왔고 또 앞으로 해나갈 각종 노력들이 결실을 맺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온주 정부가 실시 중인 프로그램과 서비스들은 언제나 노년 인구들의 건강한 삶과 웰빙에 중점을 둘 것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니어들의 건강하고 독립적인 노년 생활을 목표로 실시되고 있는 노인복지부의 노인 활동 센터(Senior Active Living Centre)는 온주 전역에서 약 316개의 프로그램을 통해 노인들의 교육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돕고 있습니다.

또한 시니어들의 사회적 고립을 막고 활기찬 노후를 보내기 위해 다양한 노인 관련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비영리 지역단체에 매년 시니어 커뮤니티 그랜트를 통해 자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노인복지부의 새 웹사이트 ontario.ca/seniors 와 서비스 안내서에는 노인들을 위한 간병인, 재정, 주택, 보안과 관련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온타리오 시니어 공로상(Senior Achievement Awards)과 온타리오 올해의 시니어상(Ontario Senior of the Year Awards) 수여를 통해 시니어들의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고 그들의 사회적 공헌을 기리는 것도 노인복지부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입니다.

온주정부는 우리의 고령화 인구가 각종 지원을 통해 고립감에서 벗어나고 더욱 활동적일 때 지역사회의 유대감이 강화되고 더 나아가 전 주민이 이에 따른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노인의 달인 6월 한달 동안 저희는 지방단치단체 및 지역 사회 파트너들과 협력해 시니어들의 건강과 복지를 증진하기 위한 각종 자원을 제공할 것입니다.

비단 노인의 달이 아니더라도 저는 독자 여러분들이 항상 여유를 가지고 여러분의 삶 주변에 있는 시니어들에게 먼저 다가가 그들이 지금껏 저희를 위해 해왔던 노력과 희생을 기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니어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사회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함께합시다.

노인의 달과 관련된 세부 정보는 웹사이트(www.ontario.ca/seniors)에서 확인 바랍니다.

[편집인 칼럼] 김호중의 추락과 윤석열

● 칼럼 2024. 6. 9. 03:44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러- 한마당]  김호중의 추락과 윤석열

 

대중음악에는 문외한인데다 흘러간 옛 가요나 흥얼거리는 사람으로 이른바 ‘팬덤(fandom)’은 조용필·나훈아 같은 유명 가수에게나 있는 것으로 여겼다. 한걸음 나아가 업그레이드 됐다고 해봤자 BTS 혹은 BLACKPINK 같은 세계적 K-Pop 인기그룹이 구름 떼 같은 젊은 팬들을 끌고다니는 것 쯤으로 아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 세계에 얼마나 까막눈이었는지는, 김호중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가수가 천정부지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다. 그건 흔히 귀결되는 ‘세대차’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를 확장하고 뛰어넘은 신 팬덤문화의 생소함 때문이라고 할까. 그가 어느 날 혜성처럼 등장한 벼락출세 탓인지도 모르겠다.

나훈아를 좋아하는 아주머니들 보다도 훨씬 더 나이많고 주름지고 머리도 허연 할머니들, 70넘어 80줄에 접어든 노년 여성들까지 그에게 환호하고 공연장을 가득 메운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어쩌면 인생살이의 공허가 짙어가는 시절에, 가슴 한구석 허허로운 빈자리를 청아유려한 그의 노래와 아이돌 매력의 외양이 소녀적 연애 감정처럼 채워준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음주 뺑소니 소동에 휘말려 쇠고랑을 차고 경찰 포토라인에 서자 극성 할머니 팬들 중에는 패닉에 빠져 입맛이 없어졌다며 눈물을 쏟기도 했고, “그럴 리 없다”고 적극 감싸는 반응이 부지기수였다. 삭막한 일상에 모처럼의 낙(樂)이요 위로 메시지를 주었던 황혼길의 우상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렸으니, 연로한 팬들의 상심이 오죽했을까.

불과 수년 만에 부와 인기를 거머쥐면서 스타덤에 오른 김호중은 왜 어느 날 급전 직하해 저 순진무구하고 하소연할 데도 없는 할머니 팬들을 울렸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진 점을 꼽는다면 그가 급변한 삶의 방식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하고 옛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 습성과 본색이라는 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김호중은 어린 시절 불운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 밑에서 자랐고, 사춘기를 전후해 방황하며 말썽이 잦았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음악적 소양을 발견한 스승에 의해 성악을 공부했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아 대중음악에 눈을 돌려, 때마침 유행처럼 번진 트롯 경연에 도전했다가 인생역전의 꿈같은 시기를 맞는다. 그는 고진감래를 되씹으며 입지전의 성공신화를 계속 써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 ‘환골탈태’가 어디 쉬운 일인가. 흔히 벼락부자들이 ‘졸부’에 머물고 마는 것처럼, 속사람은 쉽게 변치않는 법. 오랜 술버릇과 위기모면을 위한 임기응변의 거짓이 그의 인생에 또 다른 반전을 부르고 말았다. ‘제 버릇 남 주나’하는 비아냥이 말해주듯 그는 현실 부조화와 인지(認知) 부조화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다.

김호중의 추락에서 윤석열과 그 일가의 행태가 오버랩되는 것은 상당부분 흐름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벼락출세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요동시키더니, 못버리는 ‘제 버릇’ 남발로 본색을 드러내면서 자승자박, 추락일로를 걷는 모습이 여러모로 닮지 않았는가.

8번이나 낙방했다가 9번째 겨우 고시에 붙었다는 윤석열은 명석한 검사는 아니었다. 그래서 검사생활에 부침도 많았다. 그저 물고 늘어지는 외고집 끈기와 ‘퉁치기’ 수법으로 특수부 정치검찰 패거리문화에 젖어들게 되고, 우연히 김건희를 만나 무속과 세속이 뒤섞인 공적·사적 카오스 행보를 걷게된다.

지난 2년여 동안 드러난 그와 일가의 수준과 본색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말해준다. 여전히 ‘검찰에서 놀던’ 습벽의 굴레를 벗지못해 대통령 자리에 앉아서도 일개 검사같은 국정을 폈다. ‘법사’의 주장대로 취임하자마자 청와대를 기피하고 용산을 고집해 수천억을 허비하더니, 그 법사의 주장대로 동해 석유탐사를 들고 나오기에 이르렀다. 취임하자마자 처가를 위한 고속도로 노선변경을 꾀하더니, 주가조작에 명품백 스캔들 혐의자인 김건희를 수사하겠다는 검사들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그 역시 옛 습성을 버리지 못한 심각한 현실부조화와 인지부조화 탓에, 하루가 멀다하고 충돌을 일으키며 침몰의 길을 걷고 있다. 그와 그 일가가 손대고 휘저은 국정과 민심은 불과 2년만에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 나라 안팎 어느 한군데 성한 곳이 없다.

밖에서 보기에도 불안하고 수치스럽기 짝이없는 외교안보가 모든 걸 말해준다. 미국에 예속돼 중국·러시아를 적대시한 실책의 댓가는 경제 하나만으로도 혹독하다. 무슨 연유인지 일본에 굴종하면서 과거사를 뭉개고 핵폐수를 변호하더니, 이젠 네이버의 라인을 넘겨라, 욱일기를 인정하라고 윽박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독도가 불안하고 자위대가 한국 땅에 상륙할 태세다.

검사들이 장악한 정부기관들의 불협화에 상호조율이 되지 않는 정책 난맥상까지 국정은 비전없이 표류한다. 총선 참패에도 습벽은 여전해 국회가 만든 법안마다 거부하고 특검마다 피할 속셈이다. 오직 일가 비리 덮기에만 국력을 총력 소진하니, 민생이 눈에 보일 리가 없다.

그와 그 일가를 위해 얼마나 많은 국민이 고통을 겪고, 나라가 어디까지 망가져야 하나.

애초에 가지 말았어야 할 길을 갔다가 잠시의 영화가 영원한 지옥길이 되곤 하는 게 인간지사다. 못된 저질 습벽을 속여 그 자리에 간 것부터 잘못이지만, 그 버릇 못버리겠다면 어서 속히 그만두는 게 그나마 상책이다. 22대 국회가 시작되자 마자 거대야권의 화력이 심상찮다. 억지와 궤변으로 버티려 하나 돌아선 민심이 언제까지 참아줄까. “차라리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땅을 치며 후회할 날을 기다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