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사순절에 시도한 헌혈

● 칼럼 2024. 3. 31. 12:20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사순절에 시도한 헌혈

김덕원 목사 <열린교회 담임목사>

 

작년 이맘때 쯤, 그러니까 사순절 어느 날, 나는 헌혈 부스에 누워 도우미의 만족해 하는 얼굴을 올려보고 있었다.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쉽게 헌혈 팩이 채워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사실은 접수하고 헌혈 적합성 검사를 할 때부터 모처럼 튼실한 헌혈자를 발견했다는 듯 미소를 머금은 직원들을 보면서 괜히 어깨가 으쓱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가느다란 호스가 터지기라도 할 듯 내 심장은 힘차게 펌프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교회는 해마다 되풀이 되는 습관처럼 지나가는 사순절이기 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헌혈 캠페인을 시작했다. 헌혈차를 부를까, 헌혈하는 곳을 다같이 방문할까, 다양한 생각들을 해 보았지만, 캐나다의 행정 특성상 각자 가까운 장소를 선정하여 예약하고, 헌혈한 다음에 사진을 올려 서로 격려하기로 결정을 했다.

오래 전 한국에 있을 때, 헌혈차를 도로에 세워두고, 행인들을 억지로 끌고 가던 때와는 달리, 예약도 쉽지 않았고, 시간 맞추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예약된 날짜에 현장에 와 보니, 수많은 민족이 모여 사는 도시답게, 각양 각색의 서로 다른 인종들이 같은 목적으로 팔을 걷어 붙이는 것을 보는 것은 참 가슴이 벅차 오르고, 행복한 일이었다. 겉 모습은 그렇게도 다른데, 그 안에는 서로 주고 받고 할 수 있는, 그러니까 공유할 수 있는 같은 종류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니……

옆 부스에 미리 채혈을 시작한 동양계 한 아가씨는 팔을 주무르기까지 하면서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는 듯 했고, 또 저 쪽에 있는 중년의 한 남자도, 손에 든 공을 연신 주무르며, 가뭄에 깊은 샘 두레박질이라도 하는 듯 열심을 내고 있다. 감사하게도, 늦게 들어왔지만, 누구보다도 빠르게 헌혈 팩을 채운 나는 도우미의 칭찬과 박수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 것을 나눠 주면서 이렇게 기쁘고 행복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일주일쯤 지나 헌혈을 관리하는 기관으로부터 일곱 장이나 되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가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각설하고, 편지의 요지는 “성의 있게 헌혈에 참여한 것은 고맙지만, 다음에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예방접종을 통해서 항체가 생기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증세가 스쳐 지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되면 피에 그 흔적이 남기 때문에 안전상 피를 수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올 해도 여전히 같은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지만, 나는 참여할 수가 없다. 단 한 사람을 위해서조차 피를 공유할 수 없는 부족한 나를 보며, 이천 년이 넘도록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에게, 더 새로운 새 생명을 나눠주시는 주님의 피의 효력이 그저 놀라운 사실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을 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 26:28)  

[목회칼럼] ‘His eye is on the sparrow’

● 칼럼 2024. 3. 17. 08:30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His eye is on the sparrow’

 

이진우 목사 <낙원장로교회 담임목사>

 

 ‘His eye is on the sparrow’는 약 120년전에 발표된 가스펠송으로, 지금도 널리 불리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참새 한마리까지도 보살피시는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시니, 나는 낙심하지 않고, 새처럼 자유롭고 기쁘게 주님을 찬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Why should I feel discouraged, Why should the shadows come, Why should my heart be lonely, And long for heaven and home; When Jesus is my portion, My constant Friend is he; His eye is on the sparrow, And I know he watches me; … / I sing because I’m happy, I sing because I’m free; For his eye is on the sparrow, And I know he watches me.”

이 곡을 작사한Civilla Martin은 이 노래의 가사를 쓰게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 1905년 봄, 남편과 나는  뉴욕 엘미라 체류중에 Doolittle부부를 알게되었다. 그 부인은 거의 20년 동안 병으로 누워 있었고, 그녀의 남편은 휠체어를 타고 일을 하는 장애인이었다.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그 부부는 지인들에게 위안과 감동을 주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날 내 남편은 그 부부에게 ‘늘 희망차고 긍정적인 비결’을 물었다. 그 부인은 "His eye is on the sparrow, and I know He watches me."라고 간결하게 답했다. 그 깊은 믿음의 표현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곡은 그 경험의 결과물이다.”

햇빛이 모든 이들을 두루 비추는 것처럼,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보살피십니다. 새 한마리, 들꽃 한송이까지 세심하게 돌보십니다. 그 하나님의 시선이 항상 지켜보고 계심을 믿을 때, 우리는 용기를 얻고 절망에서 일어설 수 있으며, 고난 중에 있는 이들을 향해 "His eye is on the sparrow, and He watches you.”라고 희망의 메세지를 알리며 격려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눈은 성도들의 삶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폐허속에 있는 어린이들, 우크라이나 전쟁터에 있는 젊은이들, 남수단과 시리아 난민촌의 가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절망의 현장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참새 한마리까지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시선이 그 현장에도 있음을 그들이 깨닫게 될 때, 그들의 삶에 희망이 싹틀 것입니다. 이 복음이 절망으로 고개숙인 모든 이들을 다시 일어나게 하도록, 나라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선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바랍니다.

“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참새)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29-31)

 “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47)

[편집인 칼럼] 한국 총선, 왜 걱정하나?

● 칼럼 2024. 3. 17. 08:2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한마당]  한국 총선, 왜 걱정하나?

 

 

요즘 유튜브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한국의 4.10 총선관련 이슈가 많이 나돈다. 재외선거는 3월27일부터니까 이제 2주도 남지 않아 여야간 대립 격화속에 국내외적 관심도 그만큼 높아진 때문일 것이다.

이번 총선이 정말 중요한 선거라고 이구동성 외친다. 잘못하면 한국의 장래를 그르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왜 그런가. 한마디로 우리 조국 한국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위태하고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바로 엊그제까지 놀랍게 빛을 발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평창올림픽과 남북 정상의 만남으로 평화 선도국임을 각인시켰고, 세계최고의 코로나 팬데믹 대처로 G8 예우를 받기도 했다, 영화와 음악, 문학 등 예술인들이 K-Culture를 과시했다. IT와 자동차, 선박에 방산 등 세계 일류를 자랑하는 한국은 특히 민주주의를 수출하는 명실공히 선진반열의 나라였다. 그게 한낱 신기루였단 말인가, 불과 2년도 안돼 곤두박질 쳐버렸다.

군사합의마저 파기한 남북은 ‘동족이 아닌 적국’이 되어 언제 미사일을 쏴댈지 불안하게 됐다. 이미 우크라 전선에서는 남북의 무기로 대리전이 벌어진 참이다. 무역적자에 경제가 동반추락해 기업과 가계의 신음이 가득하다. 압수수색을 남발하는 검찰이 대통령의 사조직처럼 국정을 지탱하며 야당과 언론, 시민사회의 입을 틀어막는 독재가 부활했다. 그래서 폭망정권, 검사독재, 입틀막 정권이라는 비판이 나돈다. 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연구소는 최근 한국을 독재화가 진행중인 나라라고 공표했다.

해외에서도 한국 총선에 쏠린 관심은 대단하다. 결과에 따라 부정적 여파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일본이나 미국은 물론, 유럽,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호주 등 직간접 연관과 관심을 가진 나라들이 한둘이 아니다. 아마 북한도 내심 주목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현 정부에 가장 짭짤하게 득을 본 나라가 미·일이다. 한일간 오랜 앙금인 과거사 문제를 비롯해 원전 핵폐수, 합동군사훈련, 중국·대만문제 공조와 우크라 지원, 기업유치와 투자 등등 한국을 맘껏 울궈먹으며 재미를 봤다. 이들은 마치 상전이나 된 것처럼 구는데, 중국은 만나주지도 않는다. 러시아는 사상 처음 한국인을 간첩죄로 구금했다. 윤 정부가 ‘매국적 굴종외교’ 비판을 듣는 이유다. 거기에 대통령과 부인의 스캔들, 이태원 참사와 잼보리 엉망 개최에, 범죄혐의자를 대사로 보낸 황당한 뉴스까지, 달갑지 않은 해외토픽 거리가 줄을 잇는다.

이번 22대 총선에 나라의 운명이 걸려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들이다. 국민의 권리는 무시하면서 권력 주변의 부패비리는 덮고 없애는데 급급한 정권, 자국민에겐 매정하나 남의 나라에 친절하며 국익보다 타국을 위해 일하는 것 같은 비정상적이고 무책임한 정권의 폭주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민족의 앞날에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라는 염려에서, 모국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기도하며, 소중한 한 표를 용기와 지혜로 투표하자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 토론토 총영사관 관내의 경우 3천100명, 캐나다 전체는 7천129명이 투표권자로 등재되는 등 전세계적으로는 영주권자 2만8천여명을 포함해 총 14만7900여명이 유권자로 확정됐다. 이들 중 실제 투표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2012년 19대 총선부터 시작된 재외선거는 대통령 선거 때만 70%이상의 투표율을 보였을 뿐, 총선은 19대 당시 45.7%, 20대 41.4%였고, 팬데믹 선거였던 21대는 23.8%에 그쳤다.

투표권을 가진 재외국민이 약 240만명이라고 할 때, 이번 총선 유권자 14만7900여명은 6.1%에 불과한데, 그 중에도 실제 투표 참여는 투표율을 50%로 높여 잡아도 8만명이 채 안돼 전체의 3~4% 밖에 안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재외선거가 실시되는 전세계 178개 공관 중 캐나다를 비롯한 22개 공관에는 재외선거관을 1년간 파견하는 등 막대한 국민 세금이 들어간다. 재외선거 1표에 대략 10만원 꼴로, 국내의 1표에 비해 평균 50배는 더 든다는 통계도 있다. 당연히 비효율적인 재외선거를 없애라는 무용론이 선거 때마다 비등하다. 재외국민의 겨우 3~4%만 관심을 갖는 선거가 무슨 도움이 되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일리있는 말이지만, 수많은 국적자가 해외에 나가있는 지구촌시대에 재외투표를 없애기는 사실상 어렵다. 선진 각국이 일부는 시민권자까지도 포함해 재외국민에게 투표권을 주는 이유가 왜 이겠는가. 이왕에, 그리고 존치해야 할 재외선거라면, 우리의 정치에 대한 관심, 참정권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 봐야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 이라고 간파한 것은 인간의 공동체적 삶 자체가 정치이기 때문이다. “정치에는 관심없다”는 말은 자신의 인간적 정체성에 대한 부정이고 몰이해인 것이다. 우리는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는가에 개개인이 영향을 받기도 하는 시대에 산다. 캐나다 집권당과 총리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이민정책이 바뀌고, 정치인들에 의해 세금과 그랜트 등이 달라지는 것도 잘 안다. 최근 세상을 떠난 브라이언 멀로니 총리가 한 때 211석을 얻어 역사적 다수집권을 자랑했는데, 부가세와 FTA에 반발해 돌아선 국민들 심판에 전국에서 단 2석만 얻는 참패로 당의 존재마저 사라졌던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다시 논해본다. 우리들 모국의 일은 그저 먼산의 불이고, 잘되든 못되든 나와 상관없는 일인가, 아니다. 지금의 우리, 그리고 후손들에게도 직결될 수밖에 없다. 일제치하 독립운동을 열렬히 성원한 해외동포들의 결기에서 살아 숨쉬는 민족 정체성의 맥박을 상기해 보자!. 영주권자든 시민권자든, 투표권이 있든 없든, 모국을 품고 걱정해야 할 우리들이다.

[편집인 칼럼] 언론의 굴종과 타락

● 칼럼 2024. 3. 5. 09:4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언론의 굴종과 타락

 

요즘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한국의 국회의원 선거판에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설치한 ‘선거방송 심의위원회’라는 기구가 있다. 이 심의위가 최근 한 민영방송사를 대통령 부인의 이름이 들어간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검을 ‘김건희 특검’으로 호칭했다고 “행정지도!”라며 트집 잡았다. 영부인 예우를 안하고 정부여당을 비판해 공정성을 해쳤다는 것이다. “그러면 ‘영부인 김건희 여사 특검’이라고 해야 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코미디 같은 이야기다. 요사이 한국의 언론사정을 단적으로 드러낸 해프닝이자 ‘공정성’의 의미가 어떻게 변질되고 오용이 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선거방송 심의위는 모체인 방송통신심의위가 이미 그처럼 뒤틀린 공정성을 주장하며 방송시장을 뒤흔들어 온데다 인적구성도 편향적인 인물들로 채워, 생겨나기 전부터 ‘불공정을 목적으로’ 설치됐다는 지적을 받아 온 터다.

‘방송통신위원회’와 함께 방통심의위원회는 정권과는 거리를 둔 독립기관으로 엄정한 운영이 기본이다. 그럼에도 현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권력 하수기관이 되어 비판언론의 입을 틀어막는 ‘입틀막 기동타격대’로 전락해 버렸다. 한 예로 검찰과 정부비리를 들춰낸 탐사보도 매체 ‘뉴스타파’에 칼을 겨눠 위원장이 자신의 친인척 등을 동원해 처벌 진정을 넣게 한 이른바 ‘민원사주’ 사건이 들통난 일이다. 뉴스타파는 인터넷 유튜브 기반 매체여서 심의대상도 아니다. 그런데 방통위·방심위를 필두로 여권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압수수색까지 벌이는 ‘조자룡 헌칼’소동을 연출했다. 다른 비판적 매체들에게 조심하라는 공개적 ‘엄포쇼’를 벌인 것이다.

국회의 탄핵 직전 위원장이 도망가듯 물러나 오명을 떨친 방통위는 일찌감치 언론파괴의 권력돌격대로 선발됐다. 눈엣가시인 MBC의 지배권을 강압적으로 바꾸려다 법원 제동으로 실패했지만, YTN은 단 2명이서 매각을 승인하는 불법적 행태로 말썽이다. 앞서 대한민국 대표 공영방송 KBS는 시청료 징수문제로 압박한데 이어 편법으로 이사진을 쫓아내고는 끝내 운영권을 장악했다. 시청자들이 전두환 시절의 ‘땡전뉴스’ 같은 ‘땡윤뉴스’ 시청을 날마다 강요당하게 된 배경이다. 대통령 신년회견 대신 녹화된 ‘기획대담’을 두 차례나 내보내 국제적 웃음거리가 된 것도 KBS의 추락한 현주소를 말해준다.

윤석열 정권 출범이후 이같은 언론 파괴적 현상들은 빙산의 일각이고, 그 사례는 차고 넘치게 됐다. 검찰을 앞세운 정부기관들의 전방위 강박에 언론사들이 굴종하고 주눅든 현실뿐 만이 아니다. 검찰정권 하에서 법조기자 출신들의 입지가 우월해지고, 입김도 거세지면서 언론보도의 친검찰·친정권화 현상이 뚜렷해졌다. 권력 비판의 강도가 약해지고, 줄어들고, 아예 사라진 언론이 대부분이다. 소위 진보언론이라는 매체들도 무뎌지고 눈치를 보는 것은 예외가 아니다. 거기에 원래 친정부적인 권력 밀착형 보수매체의 보도행태는 글자그대로 ‘애완견’이니 ‘나팔수’라는 치욕적 지칭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즐기고 영합하여 ‘검·언·정 카르텔’을 과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요즘 한국의 뒤틀리고 타락한 언론현실이다. 허울뿐인 언론자유 속에 참 언론을 찾을 수 없는 이유다.

언론전반에 말과 기사와 보도는 넘쳐나는데, 냉철한 비판과 분석 대신 왜곡되고 포장된 정보와 교묘하게 버무려진 뉴스들로 눈과 귀를 가리고 미혹할 뿐이다. 국민들은 진실에서 멀어지며 편견을 세뇌 당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언론이 이렇게 망가진 적은 없었다. 평생 40여년을 기자요 언론인으로 살아 온 나의 경험칙에 비추어 보아도, 지금의 한국처럼 기자들이 문제적 사안을 접하고도 아예 글을 쓰지 않거나 대놓고 편파적 기사를 쓰는 경우는 드물었다. 군사독재하 검열 삭제에도 불구하고 지사적(志士的)인 비판 필력을 고집하며 기자들은 행간에 진실을 담으려 노심초사 했다. 그런데 어쩌다 이리도 굴종하며 타락해 버린 것인지. 정론직필(正論直筆)과 파사현정(破邪顯正)은 고사하고 이권 편승·조장세력, 어용·권력카르텔 언론으로 지탄받는 현실은 참담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떻게 정상으로 되돌릴 것인가. 결국은 수용자인 독자와 시청자, 곧 국민들의 몫이며, 분별과 선택과 심판만이 해결책이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다면 그나마 판단의 지혜와 이성과 양심이 살아있다는 뜻이다. 해외토픽에 오른 ‘명품백’ 수수를 슬그머니 덮고 특검을 거부하는 저의가 뭔지, 왜 변호에 기를 쓰며 총선 공천까지 ‘방탄’에 악용하는지, 열심히 맞장구 쳐주는 언론의 행태에서 그 냄새를 맡는다면 다행이다. 선거 코앞에 대통령이 전국을 돌며 헛공약을 남발하고, 그린벨트를 완전히 풀어 국토를 망칠 작정인데도 모른척 ‘입꾹’인 현실이 개탄스럽다면 아직 분별력이 살아있다는 희망이다. 시류에 따라 독재와 폭정에 비판과 영합을 오가는 능란한 변신에서 친일 매국과 권력 아부의 뿌리와 속성을 읽는다면 자존감이 숨쉰다는 증거다, 유독 야당에는 가혹하고 여당에는 우호적인 기사와 논조의 범람에 의도적 편파의 꼼수를 꿰뚫고 심판한다면 깨어있는 시민의 정의감이다.

구태여 학문적인, 또는 정치·사회적인 역할과 소명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 언론의 부패와 타락은 권력의 부패와 타락에 직결된다.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강자의 횡포와 독재를 부른다. 깨어 직시하지 않으면 앉아서 바보들이 된다, 독재권력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싸우지 않고 방관하면 나라가 무너진다, 역사와 정의가 사정없이 짓밟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