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키세스들이 원하는 세상

● 칼럼 2025. 3. 13. 11:3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 한마당]   키세스들이 원하는 세상

눈폭풍 속에 빛을 발한 인고(忍苦)의 영웅들 ‘키세스 시위대’, 그리고 주말마다 광장에 나와 ‘정의’를 외치는 시민들을 생각한다. 무엇을 위해 저리도 고생하나, 시키지도 않은 행동에 발벗고 나서 열정을 쏟아내는 저들이 원하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문득 몸도 마음도 편하게 행복을 누릴 살기좋은 세상은 어디일지, 잠시 주변을 가늠한다.

산좋고 물 좋은 양지바른 초가삼간에서 유유자적 사는 ‘신간이 편한’ 삶이려나?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같은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오순도순 즐기는 정감어린 인생일까, 아니면 대도심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재미’로 사는 삶일까, 바닷가 값비싼 별장을 오가면서 하인들 부리고 친우들과 어울리며 풍족하고 부유하게 즐기는 ‘부티나는’ 삶이면 좋을까.

 

저마다 취향과 기준이 다르니 당연히 각양 각색이겠지만, 어쩌면 그 모두를 조화롭게 하나로 만든 것이라면 최고일지 모른다. 마음이 평안하고, 정감이 넘치며, 일하는 재미에 부와 명예와 권력도 따르는 삶이면 부러울 게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또 조건이 있다. 그런 삶이 어디에서 가능하며 만족도가 높아지겠느냐는 것이다. 가령 북미와 아프리카, 혹은 캐나다와 러시아를 비교해 본다면 어떤 결론이 나오나.

 

캐나다에서 그런 여건과 환경을 갖춘 일상이라면 꽤나 부러운 삶일 것이다. 정치와 사회가 안정돼 있고, 차별이 덜하고, 시스템이 비교적 잘 작동되고, 또한 생활환경도 우수한 편이어서다. 그런데, 갱단이 설쳐 사회질서가 불안하고 정치가 혼미한 중남미 혹은 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의 소요가 심한 나라들이라면 어떨까. 사회적 악의 카르텔과 국가폭력이 일상적으로 안위를 위협하는 곳들에서도 ‘신간 편하게’ 여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마음 편히 여유를 만끽하며 살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풍요보다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만족과 평안이 중요하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의 하나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위협과 공포에 시달린다면 불안과 초초, 스트레스에 결코 행복감을 맛볼 수 없는 일상인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왕정이나 독재가 아닌 민주적 정치체제는 물론이고 사회질서와 복지체계가 안정적이고 공평하며 공정하게 법과 시스템이 유지되는 나라가 ‘살기좋은 곳’으로 평가를 받고, 행복을 누릴 만한 곳으로 선호되는 것이다.

 

그러면 광장의 시민들이 바라는, 우리들의 고향 땅은 어떤가. 살기좋은 곳인가.

 

삼일운동은 일제 군국주의에 저항해 자주독립국의 소망으로 전국이 결집된 민의의 맹렬한 분출이었다. 그런데 그 땅이 나뉘면서 남과 북은 불행히도 다른 길을 걸었다.

 

북한은 세습 왕조와도 같은 1인 독재국가다. 자유도 항거도 생각할 수 없는 곳이 됐다. 사람들이 평안하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다. 분단 80년동안 그렇게 굳어지고 습성화된 일상을 산다.

 

반면 남한은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오면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파열음에 ‘피와 눈물’이 밑거름되어 세계적 수준의 민주국가로 성장했다. 물질적 풍요와 함께 자유를 향유하고, 권리를 주장하며, 할 말은 하고, 하고싶은 일을 하는 사회가 됐다. 심각한 빈부 격차 등의 문제는 있지만, 사람들은 그래도 자긍심을 느낀다. 적어도 자유 평등과 민주적 시스템에 대한 체질적 선호와 믿음은 확고해 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그에 대한 의문과 불신이 커지면서 정치 사회적 갈등이 깊어지는 불길한 조짐에 평범한 시민들이 나선 것이다. 집권 이후 공정과 상식을 뭉개고, 법치의 오남용으로 균열을 키우던 윤석열 정권이 느닷없는 계엄사태를 촉발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국정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국민 행복권에 심각한 도전장을 던진 때문이다.

더구나 탄핵의 심판정에서까지 불법을 특권으로, 부당을 정당으로, 그리고 야당 탓 부하 탓이라는 오기와 억지로 덮어씌우기와 판 뒤집기 선동에 목매달면서 사람들에게 심한 불안과 스트레스를 준 것이다.

 

계엄발동 소식에 뛰쳐나간 시민들은 박정희 전두환 독재 트라우마에 심한 공포감을 안고 국회로 달렸다고 증언했다. 윤석열 구속을 촉구하며 눈폭풍을 버틴 시민들도 그 두려움이 원동력이었다. 국회의원들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즉생의 각오로 국회 담장을 넘었다고 했다. 모두가 평안과 행복을 누려야할 나라가 억압과 공포의 독재국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조기에 성직자들까지 동원된 극우광장에서는 상식이 통하지않는 폭력적인 선동과 ‘행복 파괴-불안 조장’의 언동이 넘쳐난다.

소명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며 성스런 ‘제사장’ 직분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쏟아진 악담과 요설, 성적비하 발언들은 귀를 의심케 한다.

온갖 상스런 욕설과 믿거나 말거나인 주장들, 막무가내 편승해 흥분한 목청에는, 그들 자신이 누리고 혜택을 받았던 헌법과 법치와 민주주의를 향한 ‘자폭(自爆)적’인 저주와 살기마저 느껴질 정도다.

스스로 맘껏 누리는 자유를 ‘자유 파괴’의 흉기로 휘두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소위 집권당의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다투어 선동대열에 영합해 정치와 사회를 이간질하고, 국민 행복욕구에 독물을 뿌리며 선량한 시민들 마음을 후벼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