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광장이 아닌 광야의 영성으로
김주엽 목사 (토론토 강림교회 담임)
지난 3월 첫 주일 예배는 전교인 연합예배로 드리면서 3.1절 기념주일로 지켰습니다.
남, 녀 젊은이들이 나와서 한글과 영어로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공약 3장은 전교인이 함께 낭독하며 축도 후에 애국가 1절을 제창하였습니다. 어지러운 조국을 멀리서 바라보며, 모처럼 조국의 미래를 위해 어느 주일보다 간절히 기도하는 주일이었습니다.
제 모교 신학교의 대학원 건물 로비에는 3. 1 독립운동 대표 33인가운데 졸업생 출신인 7인의 흉상이 나란히 있습니다. 일개의 신학교에서 일곱명의 30, 40대 젊은 졸업생들이 민족대표가 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선교사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조선 기독교의 출발이 굉장히 현실 참여적인 신앙 운동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선 땅에 들어온 기독교는 조국의 해방과 독립이라는 조선인들의 보편적인 가치와 소망에 적극 동참하는 현실참여적임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도 머나먼 타국에서 이민교회들이 기도제목으로 삼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다’는 기치는 한국교회의 보편적 가치와 전통을 따라 오늘날에도 한국교회에 이어져 오고 있는 가치입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참석하였던 에큐메니칼 예배나 기도 모임에서는 이런 기도제목이 아닌 다른 접근과 내용들이 있는 것을 보면, 굉장히 독특한 한국교회의 전통이요 흐름이라 하겠습니다.
7인의 대표들 가운데 김창준은 30세에 민족대표가 될 정도로 리더십도 있고, 1919년이전에 이미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서 신학교에서 교수하는 전도유망한 목회자였지만, 6.25중에 자진 월북하여 남한에서는 잊혀 버린 존재가 되었고, 흉상을 세우는 것에 대한 많은 논란도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두 인물은 3.1운동 이후에 노골적 친일운동에 참여하며 변절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은 감리교회에서 출교, 면직당하게 되었고, 2000년 대 초반에 청주의 삼일공원에 세워진 동상이 공개적으로 무너지는 불명예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헌신보다도 이념과 신념의 가치, 자신의 미래에 대한 영달과 안위가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고 있기에 예수의 영(耶蘇 - 靈)이 아닌 이데올로기와 자기 영달에 사로잡혀서 영원한 나라의 생명을 잃어버린 안타까운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최근 한국 기독교의 일부가 정치적 이슈에 스스로 뛰어 들면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고백한 그리스도의 노예가 아닌 이념의 노예가 되는 안타까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는 6.25을 겪으면서 북한 공산주의의 엄청난 핍박을 경험하고 순교를 당하면서, 어떤 종교보다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고, 반공 이데올로기에 앞장 설 수 있는 정당성이 역사적 아픔가운데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방식과 내용이 예수님의 방식이 아닌 것 같습니다.
광야의 영성으로 세워지고, 땅끝의 절박함에서 하나님을 만나 그 분의 영으로 자신을 굳게 세워져야 할 기독교가 광장의 종교가 되고, 거리의 종교가 되어서 숫자의 힘을 내세우는 안타까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26: 52-53절),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다. 칼의 힘과 숫자로 상징되는 세상의 권세가 세상과 사람의 마음을 정복할 수 없음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살려 내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부활을 경험케 합니다. 바울이 강조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절) 고백이 자신의 뜻과 감정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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