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 번째 선택하는 대통령

● 칼럼 2025. 5. 31. 14:2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지난 3년 나라가 너무 망가졌다

                                                     고상만 인권운동가(전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 사무국장)

 

21대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다. 며칠 후면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고 대한민국은 희망의 새 시대를 열어갈 것이다. 돌아보면 참으로 아득하다. 어쩌면 ‘내란 수괴’ 윤석열이 20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2022년 3월 10일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날 우리의 정신적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0.73% 차이로 정권이 바뀐 그때, 정부 내 인권기구에서 공직자로 일하고 있던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온 나라가 김건희 모시기에 매달리지 않았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2022년 5월 10일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직후 나는 회의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고 용산 대통령실을 찾아갔다. 가서 들은 말은 간단명료했다. 내가 사무국장으로 일하던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 기간 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일방적 통고였다. 2020년 5월 현재 국방부 공식 발표에 의하면, 징병제 나라에서 비순직 군인이 3만 8009명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 역시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처럼 그 죽음에 억울함이 없도록 해 주는 것이 국가의 의무다. 그런 역할을 해 온 국가기관이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인데, 그들은 그런 의미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고 설명마저 귀찮게 여기는 태도였다.

 

그뿐인가. 윤석열 내란 권력은 집권 3년 동안 국민의 삶은 전혀 돌보지 않았다. 사실상 단 한 명을 위한 권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김건희, 그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대한민국 검찰이 존재했고 거기에 모든 국정이 매달렸다는 말에 과연 어느 누가 부정할까. 지난해 12월 3일 내란 역시 ‘결국 막을 수 없는’ 김건희 특검을 저지하려고 무리수를 쓰다가 위대한 국민의 저항 앞에 좌절한 것이 아니겠는가.

 

파면된 윤석열 전 대통령(가운데)과 그가 임명한 안창호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왼쪽), 박선영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오른쪽). 

 

윤석열의 3년 임기를 인권적 측면에서 살펴보자. 정부 내 인권기구의 황폐화는 측정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세계에서 ‘인권위 모범국가’로 평가받던 대한민국이 지금은 ‘등급 보류판정’ 중이다. 2002년 김대중 정부 출범 후 박근혜 집권 시기를 제외하고 줄곧 A 등급을 유지한 우리나라 ‘국가인권위’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바로 ‘윤석열 방어권 보장 권고 결의안’을 처리한 것이 이유였다.

 

왜 인권기구들이 집중적으로 무너졌을까?

 

‘군인권보호관’ 역시 마찬가지다. 군인권보호관 제도를 한 사람의 악의로 어떻게 희화화시킬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빠른 시간에 한 조직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 완벽하게 증명한 사례였다고 나는 평가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 박선영 역시 그렇다. 극우세력인 뉴라이트 출신 인사를 기용함으로써 악의의 임명권자가 기대한 그대로 진실화해위는 ‘배가 산으로’ 갔다. 유족들의 가슴 속 한은 산을 이루고, 눈물은 강처럼 흐르는데 파면된 윤석열이 임명한 이들 기관장들은 그 자리에서 사퇴할 생각이 없다.

 

인권위원장 안창호의 행보는 더욱 가관이다. 그는 경찰을 대동한 채 5.18 기념식장에 나타나 강제 진입을 시도하여 유족들의 가슴을 후벼파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국민의 인권을 지키는 자리에서 피해자 인권을 능멸하는 행동을 하고, 더 나아가 가해하는 발언을 일상으로 하고 있다. 그런 안창호의 법적 임기는 2027년 9월 5일까지다. 아직도 2년이 넘게 남았다. ‘내란 수괴’ 윤석열이 ‘알박기’한 ‘알’은 굵고도 두껍다.

 

나는 만 20세 성인이 되어 투표권이 생긴 이래 어떤 선거에서도 투표권을 포기한 적이 없다. 그래서 50대 중반이 돼 맞은 이번 투표는 여덟 번째 대통령 선거다. 지금까지 일곱 번 투표에서 내가 선택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경우는 세 번에 불과하다. 이제, 나는 내가 선택한 네 번째 대통령을 만들고자 6월 3일, 투표하러 갈 것이다.

 

내가 대통령 선거에 투표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한결같다. 나라가 나라다운 세상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간결하게 표현한다면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선택했던 ‘두 번째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1988년 국회의원으로 처음 당선되어 국회 단상에서 행한 연설이 생각난다. 

 

노무현 민주당 의원이 현대중공업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중인 노조원과 담배를 같이 피우고 있다. 1990.5.1 연합
 

 

인권이 보호받고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통령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그리고 국무위원 여러분. 부산 동구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노무현입니다. (…)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세상’, 모두가 입는 것 먹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신명나게 이어지는 세상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사회라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에 하나만 덧붙이고 싶다. 국가기관이 제 역할을 하는 나라, 국가인권위는 국민의 인권을 제대로 옹호하고, 군인권보호관은 군인의 생명과 인권을 지킴으로써 그 부모를 안심케 하는 나라, 진실화해위는 과거사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을 위해 최후의 변호인이 되어주는 나라. 그렇게 모든 정부 부처와 공무원이 제 역할을 함으로써 국민이 더 이상 서럽고 고통받지 않는 대한민국.

 

나는 그런 나라를 구현할 철학과 신념을 가진 후보를 내가 선택한 ‘네 번째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다. 그런 희망으로 투표장에 갈 거다.

 

조적 조(朝敵朝)와 조적 조(曺敵曺)

● 칼럼 2025. 5. 21. 01:39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조희대가 옳았다"는 방씨 조선일보 박정훈

"그들의 적은 바로 그들이었다"

 

조희대가 이끄는 사법부가 최대 위기에 처했다. 원인은 간단하다. 조 씨가 주권자인 국민의 무시한 채 뜻을 거스르며 무리하게 판결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있다. 사법부의 권력도 당연히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조 씨는 사법부가 이어오던 오랜 관행과 절차를 무시하며 결과적으로 국민의 권력 행사를 막으려 했다. 특히 내란 우두머리 피고인 윤석열의 반국가범죄를 막고 나선 이재명 후보에 대한 요상한 상고심은 사법부의 구성원들조차 의구심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방씨조선일보의 논설실장 박정훈 씨는 대법원이 왜 민주당 반발을 무릅쓰고 이재명 대선 후보에 대한 선고를 강행했는지, 재판부는 명시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고 쓰고 있다. 언론인의 본분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끈질기게 묻는 일이다. 박 씨는 대법원이 사건 배당과 동시에 전원 합의체에 회부해 전광석화처럼 2차 심리까지 마치고 선고 기일을 5월 1일로 지정하는 등 속도전을 펼쳤다고 전한다. 대법원이 전광석화처럼 속도전을 벌였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개인을 넘어 국가의 운명까지 좌우할 수 있는 중차대한 판결을 이처럼 무리하게 서두른 이유를 대법원은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박 씨는 끝까지 묻고 그 까닭을 밝혔어야 했다.

 

조적조(朝敵朝)라는 말이 있다. ‘조선일보의 가장 큰 적은 조선일보’라는 뜻이다. 방씨조선일보가 원칙보다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자들이기에 흔히 관찰되는 모습이다. 박정훈 씨는 조희대 대법원장을 원칙주의자라고 하며 대법원이 전광석화처럼 속도전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원칙주의자가 전광석화처럼 속도전을 했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광석화나 속도전이 원칙이라는 뜻일까? 박 씨는 대법원이 그 이유를 명시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질문을 잃은 박 씨의 추측에 의하면 대법원이 선고를 대선 전에 하려 했으리라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개입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박정훈 씨가 조희대 씨를 원칙주의자라며 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이다. 

 

조선일보 5월17일자 박정훈 칼럼. 

 

국가 지도자를 뽑는 중요한 선거에 대한 판결일수록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과정과 절차를 거쳐 양심적으로 선고해야 마땅했다. 누군가에 쫓기듯 전광석화나 속도전처럼 판결을 해치운 대법원을 이해할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사법부만이 진실을 밝힐 수 있다는 오만은 또 어떤가? 윤석열의 내란 사태는 물론 극우 폭도들의 서부지원 침탈이나 추문에 휩싸인 지귀연의 윤석열 탈옥 허용에도 단 한마디 없던 사법부에 진실을 기대하는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조희대의 오만이 사법부의 몰락을 재촉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윤석열의 임명을 받았다. 그는 취임사에서 ‘지난날 서슬 퍼런 권력이 겁박할 때 사법부는 국민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다시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국민을 지켜주겠다는 뜻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사법 절차의 공정성과 일관성을 훼손하며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에 타격을 주었다. 대법원판결을 앞둔 시점에 내란 세력과의 우려스러운 행보에 대한 구체적인 풍문이 돌고 있다. 새삼 대법원의 뒤에 서슬 퍼런 권력의 겁박은 없었는지 묻게 된다.

 

조 대법원장은 또한 취임사에서 어떤 선입견이나 치우침 없는 판단을 강조했다. 또한 국민의 눈높이와 상식에 맞는 재판을 하도록 노력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불공정하게 처리한 단 한 건이 사법부의 신뢰를 통째로 무너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한결같은 마음가짐과 자세를 갈고 다듬어 재판의 독립을 수호하는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기를 부탁하고 있다. 이쯤에서 조적조(曺敵曺)라는 말이 떠오른다. 조 대법원장이 조 대법원장에게 가장 큰 적이라는 뜻이다. 그가 취임사에서 한 말을 보란 듯이 스스로 뒤집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조희대 대법원장. 연합
 

박정훈 씨가 ‘조희대가 옳았다’라는 칼럼을 쓴 날, 방씨 조선일보 권순완은 ‘기자 수첩’을 통해 “이재명에 묻는다, 국회는 깨끗한가”라고 썼다. 박정훈 씨의 칼럼과 연결하니 묘한 생각이 든다. 마치 사법부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국회는 사법부에 “깨끗한 법정” 운운할 만큼 깨끗한지를 되묻고 있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헌법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며 유독 법관에게 양심을 요구한다. 지킬 수 있는 사람들에겐 무한히 자랑스럽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참으로 끔찍한 저주처럼 들릴 말이다.

 

이제 조희대가 옳았다는 박정훈을 생각해본다. 그동안 방씨조선일보 지면에서 박 씨가 보여온 행적을 바탕으로 그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양심의 직업인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묻는다. 최근 당신이 이끄는 사법부가 당신이 옳았다고 단정하는 박정훈 씨 말에 침묵할 만큼 양심적이었는지를 말이다. 내 생각에는 방씨조선일보의 논리나 주장은 틀려먹었고, 박 씨의 심보는 한참 글러 먹었다. 그리하여 다시 방씨조선일보는 폐간만이 답이다.  < 이득우 언소주 정책위원·조선일보폐간시민실천단 단장 >

[편집인 칼럼] 한 표의 위력 보일 역사적 선거

● 칼럼 2025. 5. 15. 15:34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한 표의 위력 보일 역사적 선거

 

 

모국의 제21대 대통령 선거 재외투표 기간이 다음 주(5.20~25)로 다가왔다.

 

이번 선거에 해외에 있는 한인 동포 약 26만 명이 유권자로 등록됐다고 한다. 캐나다는 1만5천여명, 그리고 토론토 총영사관 관할지역은 6천214명으로, 북미를 통털어 LA(10,341)와 뉴욕(8,502), 그리고 밴쿠버(7,314)에 이어 4번째로 많다. 재외투표 비중으로 볼 때 캐나다도 만만찮은 지역인 셈이다.

 

하지만, 토론토 지역의 경우 약 4만명으로 추산되는 ‘참정권자’, 즉 모국 선거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한인 동포 재외국민 수치로 따져본다면 약 15% 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전세계로 범위를 넓혀 보아도 약 7백만명인 해외 한인동포 가운데 외국 국적자를 제외한 재외국민은 246만 여명으로 집계되는 것을 감안하면, 26만명 가량인 재외유권자수는 더 낮아진 10% 남짓에 그친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 투표하겠다는 유권자들 중 실제로 투표하는 인원은 얼마나 될까?. 지난해 22대 총선때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던 재외투표율 62.8%를 적용한다고 할 때 대략 16만여명이 해외에서 투표에 참여할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토론토의 경우는 약간 높아서 66.7% 였으므로 약4천1백여명, 캐나다 전체로는 지난 22대 68.7%를 대입하면 약 1만 5백여명이 실제 투표한다는 추정치가 나온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밝힌 이번 21대 대선의 재외선거 비용은 약115억원에 달한다. 이는 전체 대선 예산 3,867억원의 약 3%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단순 계산으로 115억원을 들여 재외투표자 16만 여명이 참여한다면, 1인당, 즉 한 표당 비용이 7만2천원 꼴로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된다. 캐나다 달러로는 70달러 쯤 된다. 결코 싸게 먹히는 비용이 아니다. 물론 더많은 재외국민이 투표에 참여해 투표율이 높아지면 한 표당 선거비용이 낮아져 투입 예산 대비 효용성이 높아지겠고, 반대로 투표율이 낮아지면 이른바 ‘가성비’가 떨어져, 예산을 쏟아부은 만큼의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지난 2016년부터 가능해진 재외국민 참정권은, 해외동포들에게도 모국의 정치에 참여하여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해외에 거주하면서도 대한민국 국적을 버리지 않고, 모국의 안위에 관심을 기울이는 동포들이 총선 때는 정당에, 대선 때는 후보자에게 직접 표를 던질 수 있다. 하지만 매 선거마다 투표율이 기대치를 하회하면서 “재외선거 무용론‘이 심심치 않게 거론된다. 투표에 적극 참여해 투표율을 높여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한 표 한 표마다 주권자의 소중한 뜻이 담겨있는 이상, 투표율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참정권 부여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캐나다와 미국을 포함해 선진 각국이 전자투표·우편투표 등을 활용하면서 해외거주 국민의 참정권을 확대-보장하는 추세를 감안하면, 재외동포 참정권은 제도적으로 유지하면서 보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재외동포들의 바램이고, 지구촌 SNS소통 정보화시대에 맞다는 국내 학계와 정치권 등의 압도적 주장이기도 하다.

 

특히 선거에서 단 한 표 차이로 당락이 갈리는 경우도 더러있다. 지난 4.28 캐나다 총선에서 퀘벡의 테르본 선거구는 재검토 끝에 단 한 표 차이로 당선자가 바뀌었다. 단 12표, 35표 차이로 승패가 결정된 곳도 있었다. 바로 한 표의 위력을 증명해 준다.

 

지난 20대 대선에서는 불과 0.73%, 24만7천여 표 차이로 대통령이 당선됐다. 대략 재외 유권자수에 버금간다. 그런데, 그 ’하찮은‘ 표 차이의 선거결과 때문에, 나라와 국내외 동포들이 얼마나 뼈아픈 후회와 고통을 견뎠는가. 3년도 채 되지않아 탄핵과 파면이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민주주의와 역사는 퇴행하고, 국격은 추락했고, 나라 곳곳 엉망진창이 되어 엄청난 물량적, 정신적 피해가 국민부담으로 남았다. 자칫 ’서울의 봄‘과 ’5.18 항쟁‘이 재연될 뻔한 위기도 겪어야 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내 한 표를 정말 냉철하고 현명하게 행사해야 한다는 살아있는 교훈이다.

 

지난 20대 대선에 앞서 경고음과 적색 신호는 수없이 발령됐었다. 검찰출신 벼락 후보의 문제점부터 일가의 부패비리와 무속정치 우려까지 낱낱이 지적했건만, 다수 유권자들은 마이동풍, 쇠귀에 경 읽기였고, 세심한 후보 분별을 하지 않았다. 그 소홀했던 업보로 혹독한 댓가를 치른 것이다.

 

이번 대선은 그런 성찰 위에 유권자들은 소중하고 정의로운 나의 한 표를 절대 포기하지 말고 행사해야 한다. 내란을 사죄하기는 커녕 오히려 옹호하고 제2 제3의 내란을 꾀하는 세력이 다시 외피만 바꿔 표를 구걸하고 있지는 않은가. 불법 공작과 술수로 반전을 노리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들 사악한 이권권력 카르텔에 본 때를 보여야 할 역사적인 선거일 진대, 귀하고 귀한 한 내 표를 행사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허투루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투표의 대상 또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유권자라면, 내란혐의로 파면된 권력자를 끝까지 감싸고 도는 정당이나 후보자에게 표를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는 헌정 파괴나 친위 쿠데타 같은 반민주적인 권력행사는 꿈도 꾸지 못하도록 주권자의 단호한 한 표 위력을 압도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역사적인 선거가 바로 다음 주, 21대 대선이다. 바야흐로 투표의 힘을 보여줄 때가 왔다.

                                                                                                         < 김종천 편집인 >

[목회 칼럼] 때로는 위로보다 도전이 필요하다

● 칼럼 2025. 5. 15. 15:30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때로는 위로보다 도전이 필요하다

 

송만빈 목사 (노스욕 한인교회 담임)

 

    주위에 고통받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할까요? 당연히 위로와 격려, 희망의 말을 해주어야겠지요. 베드로전서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던 초대 교회 성도들, 특히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지역에 흩어진 성도들을 위해 쓰인 서신서입니다. 따라서 이 서신서의 내용이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로 가득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겐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요. 하지만 베드로전서를 찬찬히 읽어보면,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위로와 격려보다는 도전과 명령의 메시지를 더 많이 전합니다. 믿음의 행동을 취하여서 행진하고 싸우라는 강한 도전의 언어가 주를 이룹니다. 그 당시 성도들은 극심한 핍박 하에 있었기에 위로와 격려를 받아도 버텨내기 힘겨웠을 상황인데, 행진하고 싸우라는 도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니 너무 냉정하고 가혹하다는 느낌이 들죠. 하지만 진정한 위로란 때론 따뜻한 말보다,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게 하는 강한 도전의 말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실망하고 낙담할 때, 상처 받고 두려울 때, 본능적으로 내 자신만을 챙기고 싶은 생각, 내 문제만 해결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야가 좁아집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연약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단순한 위로에 그치지 않고 성도들에게 고난을 견디며 나아갈 수 있는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위로 대신 강력한 도전을 통해 성도들에게 믿음의 길을 걷도록 이끌었어요.

 

    베드로전서 1:17입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위로의 말로 전혀 느껴지지 않지요. 도전과 명령으로 읽혀지잖아요.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두려움은 무엇이겠어요? 단순히 무서워하는 공포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존경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이예요. 사랑과 존경심을 동시에 품는 마음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존경심이 없으면, 그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니지요.

또한 존경심 없이 사랑하는 것 역시 참된 존경심이 아닙니다. 사랑과 존중은 함께 있어야 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 마음대로 밀어붙이시는 사랑인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실 정도로 희생하셨으니까, 잔말 말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우리에게 강요하시는 사랑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존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은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빚지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를 인격체로 존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 사랑을 받아들일 때까지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시는 거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존경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것, 쉽지 않은 선택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마음 먹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도전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전으로 우리는 위로 이상의 힘과 용기를 받는 것이예요. 힘들때 때로는 우리에게 위로보다 도전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