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칼럼] "아니 아니시나?"

● 칼럼 2024. 8. 10. 08:0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제목: 아니 아니시나?  

 

박태겸 목사 (캐나다 동신교회 담임 : 해외한인장로회 총회장)

 

지난 주간 위키미콩 원주민 보호구역에 선교를 다녀왔다. 이들이 속한 원주민 ‘오즈브웨 부족’은 미국에 10만명, 캐나다에 7만 6천명이 사는 큰 부족이다. 오즈브웨 부족이 사용하는 원주민 언어가 43개에 달한다. 그 중 온타리오 위키미콩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말이 “아니 아니시나?” 이다.  여러해 동안 원주민 단기선교를 다니지만 항상 한계와 절망에 잠긴다. 16세기에 최초로 북미 선교를 담당했던 예수회(Jesuit) 가톨릭 선교사들과 지난 세기 어두운 역사로 알려진 원주민 기숙학교의 운영을 맡은 캐나다 기독교단의 많은 시행착오를 기억한다. 캐나다 정부가 원주민 단체에 사과를 하고 그들에게 물질적인 배상도 하고 보호구역 내에 사는 사람들에게 지원금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원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한번 점검해 보아야한다. 이것이 한인교회가 원주민 선교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의 숙제이다.

현지 원주민선교를 당당하는 한인선교사의 고백은 나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한인들은 누구보다도 빨리 빨리 선교를 열심히 한다. 우리는 상처받은 자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변화의 과정을 무시하고 복음을 먼저 제시하여 전도를 하고 세례를 주고 교회부터 세워려한다. 결과에 초점을 맞추므로 거쳐야할 과정을 무시하게 되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처럼 잎만 무성한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서로 경쟁하듯 선교를 하려한다. 경쟁은 필요하고 좋은 것이나 그 뿌리를 하나님께 두지 않고 사람에게 둠으로 조급하게 서두르게 되어 상대의 마음을 얻기에 역부족이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점수나 숫자나 돈으로 환산하려 한다. 원주민들은 훨씬 영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데 서구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면을 향상시키려 함으로 초점을 잘 맞추지 못했다. 그래서 경쟁하듯 선교하면 인내와 지구력이 부족하여 2-3년 안에 그만두게 된다. 사랑은 경쟁이 아니라 오래참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며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썸만 타지말고 진정한 사귐으로 나가야 한다. 썸을 타는 것과 시귐의 차이는 책임감과 구속력을 동반한다.  참된 선교는 무엇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함께 사귀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 안에 거하면 열매는 하나님이 맺게 하신다. 계속 방문하고 베풀고 사랑하고 믿어주고 신뢰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진심은 통하고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전도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내가 전문가인 척 모든 것을 자신이 다 아는 척하며 상대를 가르치려 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신앙성장을 가장 크게 방해한다. 겸손하고 배우려 할때 영적 성장이 있고 성령님께서 우리 둘 사이를 하나로 매어줌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게 된다.

구약의 복음서가 ‘욥기’하고 한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 아내가 그를 떠나고 친구들이 욥를 정죄하며 가르치며 판단해도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결코 자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고 기다리며 인내한다. 나중에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의 이런 옳지않은 행위를 지적하며 욥에게 번제를 드리고 기도받기를 제시한다.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그 허물에 갇혀 죽고, 매미가 허물을 벗지 못하면 울지 못하므로 질식사한다. 독수리가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부리가 무뎌지고 발톱이 약해져 먹이감을 감아쥘 수 없게 된다. 독수리가 40세가 되면 동굴에 들어가 스스로 바위에 자신의 부리를 쳐부수고, 낡고 기름져 공중을 날기에 둔한 날개를 뽑고, 약화된 발톱을 뽑아 던진다. 이 때 새 깃텰이 나고 새 발톱과 새 부리를 만들어 30년을 더 살게 된다.                   

 

 

[편집인 칼럼] 위기를 모르는 리더십

● 칼럼 2024. 7. 7. 13:00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 한마당]   위기를 모르는 리더십

 

                           김용민 화백

 

지난 7월1일 ‘Canada Day’에 쥐스탱 트뤼도 연방총리는 영상메시지를 내고 "캐나다의 이야기는 157년 전 이 땅을 고향이라 불렀던 원주민들로부터 시작됐다"면서 "출신과 배경, 종교, 사랑하는 대상에 관계없이 모든 이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는 나라를 실현해 나가는 가치야말로 캐나다인들을 하나로 묶는 힘“이라고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하며 장밋빛 비전을 역설했다.

국경일을 맞아 연휴와 불꽃놀이를 즐기며 국민 모두 기뻐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최근 나온 한 여론조사는 응답자의 70%가 “캐나다가 망가졌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특히 18~34세 젊은 층은 78%나 “국가 시스템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이같은 불만이 고스란히 드러난 게 지난달 24일 치러진 토론토-세인트폴스 보궐선거 결과다. 31년간이나 Liberal 아성이었던 곳이 Conservative로 허망하게 넘어간 것이다. 불과 590표 차이의 하원의원 한 석이라고는 하나 자유당 정부에는 큰 충격을 안겼고, 기다렸다는 듯 트뤼도 총리의 퇴진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삶은 팍팍해지고 격차는 커졌으며 국력만큼의 생활을 누리지 못한다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무능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9년 째 총리로 ‘장기집권’하고 있으니, 이젠 인기가 시들해지고 사람들도 싫증이 날 때가 되었는지 모른다. 획기적인 반전이 없다면 자유당 선거전략가가 지적한 것처럼 ‘내가 머무를 위험은 얼마인가?’를 자문하고 가을 총선을 결단하지 않으면 안될 ‘트뤼도 딜레마’를 본다.

트뤼도의 위기에 즈음해 여러나라 지도자들의 동병상련, 그리고 수렁에 빠진 한국 윤석열의 처지가 비교된다.

최근 전쟁으로 인한 경제난에 기후위기까지 겹치며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촌을 보면, 비단 트뤼도 뿐만이 아니다. 독재 지도자들은 그렇다치고 특히 민주주의 정치시스템을 가진 G7의 면면을 보아도 많은 리더들이 지도력의 곤경에 처해 정권의 위기를 맞고 있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정부의 여당은 6월30일 총선 1차 투표에서 20% 득표에 그쳤다. 반면 극우정당인 국민연합은 33.1%를 차지해 ‘변방의 소수당’이 제1당으로 등극하며 총리를 낼 수 있는 집권당을 바라본다. 이번 총선은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극우세력의 득세로 골머리를 앓는 가운데 치러진 EU의회 선거에서 수모를 당하자 마크롱이 국면 전환을 위해 의회를 전격 해산하며 실시됐다. 하지만 승패는 그대로 재연돼 ‘회사 CEO같다’는 비판을 듣는 마크롱 대통령은 정치적 궁지를 헤어나기 어렵게 됐다.

최초의 인도계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총리에 오른지 2년도 안된 영국의 리시 수낵 총리 역시 지지율 고전을 면치못한 끝에 7월4일 총선을 결정했다. 하지만 집권 보수당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20%에 불과한 반면 노동당은 41%에 달해 금명간 14년만에 정권을 빼앗길 게 확실하다.

일본은 더 심각하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 내각은 요즘 지지율 10%대까지 허덕인다. 암살당한 아베 신조 이후 정권을 맡아 ‘혐한 조장’ 등으로 한때 과반 지지를 얻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주요 언론조사에서 14%~21%의 사상 최저치를 기록 중이다. 미국을 등에 업고 군사대국화를 밀어부치며 한국 때리기 등으로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통일교 연루의혹에 비자금 스캔들 등 부패와 무능으로 국민 신뢰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최강국이라는 미국은 어떤가.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금 11월 대선에 출마를 고집하고 있으나 민주당 내에서 조차 후보 사퇴를 요구받는 지경이 됐다. 세계 각국은 이미 포스트 바이든을 염려하며 동키호테 ‘무데뽀’ 정치인 도널드 트럼프의 재등장 채비를 서둘고 있다.

이들 서방 지도자들의 위기는 개인적 무능과 부패 못지않게 근래 세계적인 혼란과 무질서가 가중되며 ‘정글화’가 심화되는 와중에 득세한 이기주의와 국수주의 등의 영향이 큰 것도 사실이다. 전쟁과 신냉전, 그리고 경제난과 양극화, 난민, 기후변화와 자연재난 등등 각국과 인류는 가히 존망의 위기를 걱정할 상황이다. 그 위기를 연대와 연합, 포용의 힘으로 극복하기보다는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트럼프식 자국 이기에 눈을 돌리는 것에서, 극우세력 득세의 한 단면을 유추하게 된다.

그러면, 한국은 어떤가?. 이 혼돈의 난세에 지혜로운 대처, 유능한 리더십을 찾아 볼 수 있는가. 문제는 다른 나라들의 위기국면과는 그 성격과 정도가 크게 다를 뿐더러, ‘위기를 위기로 인식 못하는’ 훨씬 심각한 증상에 암울해진다.

대통령 탄핵 국회청원이 100만을 넘어서고 있다. 겨우 2년여 만에 드러난 지도력은 ‘완전 맹탕’이었고, 일가 부패 비리를 덮는데 급급한 권력 오남용만이 확연해 지면서 ‘끌어내리자’는 여론이 들끓게 된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총체적인 국가위기와 민족대결의 불안을 오로지 무식한 압박과 미-일에 종속적인 힘에 기대 더욱 악화시키는 어리석고 위험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지난 4.10 총선의 강한 경고마저 전혀 개의치 않는 국민무시, 정도(正道)무시의 오만무도한 권력 놀음만이 설치는 것을 날맏 목도한다.

탄핵청원 폭주사태와, 국민 80%를 향하는 반감 여론에도 겁 없이 싸우려고만 대드는 무모한 돌진, 임박한 민심의 비등과 폭발의 화상을 어찌 당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목회칼럼] 믿음이란 무엇인가?

● 칼럼 2024. 7. 7. 12:5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믿음이란 무엇인가?

 

송민호 목사 < 토론토 영락교회 담임 >

 

1871년 시카고 대화재가 일어났을 때 온 시가지가 불바다로 변했습니다. 화마는 순식간에 다운타운 건물을 삼키면서 번져 나갔습니다. 10월 8일 주일 저녁에 시작된 화재는 10월 10일 화요일에 가서야 끝났고, 이로 인해 3백 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엄청난 재산 피해가 있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린 드와이트 무디는 그가 섬기던 교회가 불에 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실의에 차 있는 무디에게 한 신문기자가 냉소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당신의 교회를 지켜주지 않으셨습니까?” 이때 무디는 믿음을 잃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늘 더 큰 교회당을 달라고 기도해 왔는데, 이번에 하나님께서 큰일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더 큰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극심한 재앙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무디는 한마디로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자기의 경험을 믿거나 지식에 따른 판단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고 행동합니다. 무디는 자기 능력이나 가진 재산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하나님만을 믿으며 더 큰 예배 처소를 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의 믿음대로 커다란 예배당이 세워졌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믿음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 인도, 그리고 개입을 믿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또한 그 하나님은 우리가 찾을 때 상주시는 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얼마나 큽니까? 절망 중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소통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나아갈 때, 우리의 삶에 어떻게 개입하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임재, 인도, 그리고 개입을 분명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목회 칼럼]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 칼럼 2024. 6. 25. 06:3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권영정 목사 <세계로교회 담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시편 42:1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고백하는 것과 같이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사슴은 열이 많은 동물이기 때문에 물을 자주 마셔서 체온을 조절해야 하지만, 그 지역이 물이 부족하고 그나마 물이 있는 곳에는 각종 천적들이 물을 마시러 오는 사슴을 노리고 있기에 쉽게 물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물을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것은 생명을 건 갈급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아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통 ‘수도원’ 하면 우리는 금욕적인 생활과 사회와의 차별 혹은 단절된 개인이나 공동체 생활을 생각합니다. 초기 수도사들과 중세 수도원들을 보면 혼란한 사회적 현실에서 떠나 개인의 금욕과 사회와의 단절이 수도사들의 삶을 대표하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동방 수도원이 서방으로 전파되면서 은둔자의 삶에서 현실적 복음사역에 관심을 가지는 형태의 변화에 큰 역할을 한 수도사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람으로 베네딕트가 있습니다. 베네딕트는 규범집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때 참된 행복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베네딕트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첫 단추가 순종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면서 순종이란, 듣는 것으로 시작하여 들은 것을 실행할 때 온전한 순종임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소음 속에 살아갑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소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듣는 것을 넘어서 우리는 경청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수도자들은 듣는 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세상의 소리를 듣고, 세상 사람들의 소리를 경청하였습니다. 우리는 듣더라도 잘 들어야 합니다. 듣고 싶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침묵 가운데 마음의 문을 열고 들으라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자는 교만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말이 앞서기 전에 먼저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므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