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글] 밀레니엄 세대의 육아 모습

● 칼럼 2024. 8. 10. 08:3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임순숙 에세이 - 삶과 글]  밀레니엄 세대의 육아 모습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상큼한 아침햇살을 가르며 아들이 손주와 함께 들어섰다. 아이는 나를 보자 두 팔을 한껏 벌리며 온몸으로 안겨온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겨우 엄마, 아빠뿐이건만 사랑스런 표정과 큰 몸짓으로 찐한 애정을 표현하니 세상에 이 보다 더한 감동이 또 있을까 싶다. 일주일에 두 세 번 참석하는 유아 놀이방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마다 부자는 선뜻 찾아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안긴다. 느긋했던 아침이 아이의 출현으로 갑자기 분주해지며 녀석의 뒤를 쫒는 우리들 이마엔 이내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다.

재택근무를 하는 아들이 본격 업무에 들어가기 전 몇 시간 육아를 담당하는  사이 어미는 그 시간을 활용하여 하루를 준비하는 일정으로 돌아가는 듯 하다. 부부가 함께 양육하는 모습이 생경하지만 아이에겐 더 없이 좋은 여건이니 복 많은 녀석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위대하다고 했다. 나는 아들 내외의 육아 모습을 지켜보면서 새삼 이 말이 진리임을 깨닫는다. 신생아 때부터 지, 덕, 체를 겸비한 아이로 키우고자 열과 성을 다 하는 그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가끔 예전의 육아 방법과 혼동하기도 하고 좀 지나치다 싶은 부분도 있어 마음이 짠 할 때도 있지만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볼 뿐이다.

내가 처음으로 그들의 육아 모습을 보면서 기함했던 때는 아이가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때 였다. 먹고 자기를 무한 반복하는 아기를 일정한 시간에 먹이고 재우는 습관을 들이느라 고생하던 모습에서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가련만, 젊은 부모는 아이의 생활 습관은 빠를수록 좋다는 지론으로 무리 없이 다음, 그 다음 단계로 이어 간다.

우리 세대의 육아법은 약간의 육아 이론을 바탕으로 어른들의 경험을 많이 참고 한데 비해 지금 세대는 다양한 이론을 골고루 섭렵한 후 SNS 를 통해 비슷한 연령층의 다수와 소통하며 궁금증을 해결해 가는 모습이다. 가끔은 만남을 가져 아이의 사회성을 깨우쳐주기도 하고 도서관, 체육시설, 놀이방, 농장 견학 등 가능한 많은 경험을 하게 하는 열정은 상상 그 이상이다. 비록 인지 능력은 아직 미진해도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겠기에 기회가 되면 열심히 동참한다.

최근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육아법이 정반대여서 가족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이해시키려는 토론의 장이 열렸었다.

다양한 장난감 중에서 유난히 자동차를 좋아하는 손주를 유심히 관찰한 할아버지는 어느 날 노란 스쿨버스를 사다 주었다. 새로운 장난감을 받아 쥔 아이는 스쿨버스를 굴리며 신나게 놀고 있는데 이를 지켜보던 며느리가 조용히 제안을 했다. ‘사오신 스쿨버스를 감춰놓았다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꺼내주시면 좋겠다’고.  이유인즉, 연령에 비해 장난감이 많은 편이며 하나하나 집중해서 놀기에 충분하다는 견해였다. 이를 듣고 있던 할아버지는 어릴수록 다양한 장난감을 접해야 잠재된 뇌기능이 활성화 되고 탐구력 또한 발달 한다고 했다.

나는 상반된 의견을 들으면서 물자 풍요의 시대에 사는 아이에게 귀함까지 가르치려는 며느리의 교육관에 한 표 던졌다.

어른들의 마음을 알리 없는 아이는 오늘도 노란 스쿨버스를 부르릉 거리며 신나게 논다.

이제 17개월 된 아이를 보며 어른들은 매일 매일 다양한 꿈을 꾼다.

그래서 아이는 꿈나무인 모양이다.

[편집인 칼럼] 참 광복을 가로막는 원흉들

● 칼럼 2024. 8. 10. 08:3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한마당]  참 광복을 가로막는 원흉들

 

다시 광복절을 맞는다. 빛을 되찾은 날-, 그러나 눈부시게 빛나야 할 민족의 광영(光榮)은 언제일지, 지구가 태양을 79번이나 돌았는데도 여전히 짙은 그늘을 드리운 채 우리들 가슴을 짓누른다. 삼천리 온 산하를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런 흑암의 구름이 마치 놀부의 심술처럼 덮고 있다. 과연 우리가 간절히 열망하는 진짜 눈부신 광명천지는 얼마나 더 참고 부대끼고 씨름하고 쏟아내야 그 소원의 문이 활짝 열린단 말인가.

돌아보면 어둠의 본체인 일제의 패망이 남의 손으로 이뤄진 탓이기도 하다. 그 어둠의 세력을 완전히 걷어내지 못한 여한을 남기며 미완의 광복시대를 시작한 민족의 비운이다. 기를 쓰고 ‘참 광복’의 길을 가로막아 선 질긴 악연들, 그 방벽들을 혁파하여 떨쳐내지 않는다면 우린 언제까지고 먹구름 낀 세상을 탄식하며 가야할 수도 있다. 어쩌면 다시 캄캄한 암흑의 세력 손아귀로 되돌아 갈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광복을 생각할 때, 나는 이 땅의 참 광복을 훼방하는 최악의 암적존재, 곧 원흉은 당연히 우리들 내부의 친일족(親日族)이라고 단정한다. 일제치하 악행을 참회하지도 않고 광복 후에도 독립투사들을 괴롭힌 악질형사들과 같은 부류들이다. 그리고 오로지 자국과 자파의 이기(利己)로 분단국의 핸디캡과 지정학적 유불리 악용에만 관심이 있는 안팎의 권력집단과 호전세력 및 강국들이 두 번째요, 거기에 빌붙어 이념과 색깔로 갈라치기와 덧씌우기를 즐기는 공존거부, 상생 거부의 무리들이 세 번째이며, 절대로 반성없이 제국의 망령에 매달려 사는 일본 극우세력이 그 뒤를 이어 포진해 있다고 여긴다.

참 광복의 길은 무엇보다 국민이 주인인 진실되고 정의로운 민주주의 완성과 민족 자존으로 하나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믿기에 그렇다.

광복회는 며칠 전 격앙된 성명을 냈다. 항일운동과 대한독립의 상징인 독립기념관 이사진을, 일제 찬양 ‘뉴라이트’인사들이 장악하고 관장까지 차지할 위기라는 격노의 항의였다. 하지만 정부는 들은체 만체 임명을 강행했다. ‘군대위안부’의 강제성에 대해 “논쟁적 사안”이라고 얼버무린 부적격 인물도 다른 장관들처럼 서둘러 기용했다. 이례적으로 국회의장이 호통을 쳐서 알려진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의 이면에는 ‘강제노동’ 지우기를 묵인하고 동조한 굴욕적 외교가 있었다.

일본을 대변하다 못해 일본인의 짓인지, 일본정부가 아닌지 의심케 하는 한국인과 한국정부의 수많은 언동들이 친일족의 발호 때문인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요즘 잇달아 민족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소식들에서 친일족이 얼마나 반 민족, 반 광복적 존재들인지를 실감케 한다.

분단을 만들어 내고 고착시켜 대립과 갈등을 즐기는 주변 열강의 이기적인 행태와 그에 굴종·영합하는 정통성 없는 권력과 반통일 세력들 역시 설명이 필요없는 엄연한 실체다. 또한 이념과 색깔팔이 족들의 음흉한 속셈도 늘 보아온 구태요 적폐인 반 광복 무리의 하나다.

일본에 처음 등장한 사회당 출신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하얀 눈썹이 인상적인 촌티나는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광복 50년의 해인 1995년, 일본으로는 ‘8.15 종전 기념일’에 그는 “침략과 사죄”를 처음 언급해 평가받은 역사적인 담화를 발표했다. 당시 특파원으로 그의 담화를 직접 들었던 필자는 총리실을 나오면서 무라야마를 맹비난하는 우익들의 확성기 시위를 보고 담화의 수명이 얼마나 길까 의구심이 났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의 자민당 정권은 ‘담화 탈색’을 계속했고, 아베 신조에 이르러서는 거의 휴지조각으로 만들었다. “과거사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는 뻔뻔한 당당함이다. 군대위안부와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욱일기를 고집하여 부산에 입항하는가 하면 독도를 내놓으라고 큰 소리치면서, 한편으로는 북한과 수교에 열을 올리고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을 노리는 오늘의 일본. 그리고 그들의 비위를 상할까 전전긍긍하는 현 한국정부의 비굴에서, 참 광복을 훼방하는 극우의 ‘파묘’ 악령을 본다.

다시 강조하지만, 참 광복은 자주적 정체성을 가진 국민이 주인인 나라, 진실되고 공의로운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동서 남북이 하나되어 통일과 번영을 이룰 때 비로소 구가할 수 있는 8천만 한민족의 비전이다. 그 절실한 미래를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 김종천 핀집인 >

[목회 칼럼] "아니 아니시나?"

● 칼럼 2024. 8. 10. 08:05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제목: 아니 아니시나?  

 

박태겸 목사 (캐나다 동신교회 담임 : 해외한인장로회 총회장)

 

지난 주간 위키미콩 원주민 보호구역에 선교를 다녀왔다. 이들이 속한 원주민 ‘오즈브웨 부족’은 미국에 10만명, 캐나다에 7만 6천명이 사는 큰 부족이다. 오즈브웨 부족이 사용하는 원주민 언어가 43개에 달한다. 그 중 온타리오 위키미콩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말이 “아니 아니시나?” 이다.  여러해 동안 원주민 단기선교를 다니지만 항상 한계와 절망에 잠긴다. 16세기에 최초로 북미 선교를 담당했던 예수회(Jesuit) 가톨릭 선교사들과 지난 세기 어두운 역사로 알려진 원주민 기숙학교의 운영을 맡은 캐나다 기독교단의 많은 시행착오를 기억한다. 캐나다 정부가 원주민 단체에 사과를 하고 그들에게 물질적인 배상도 하고 보호구역 내에 사는 사람들에게 지원금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원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한번 점검해 보아야한다. 이것이 한인교회가 원주민 선교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의 숙제이다.

현지 원주민선교를 당당하는 한인선교사의 고백은 나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한인들은 누구보다도 빨리 빨리 선교를 열심히 한다. 우리는 상처받은 자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변화의 과정을 무시하고 복음을 먼저 제시하여 전도를 하고 세례를 주고 교회부터 세워려한다. 결과에 초점을 맞추므로 거쳐야할 과정을 무시하게 되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처럼 잎만 무성한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서로 경쟁하듯 선교를 하려한다. 경쟁은 필요하고 좋은 것이나 그 뿌리를 하나님께 두지 않고 사람에게 둠으로 조급하게 서두르게 되어 상대의 마음을 얻기에 역부족이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점수나 숫자나 돈으로 환산하려 한다. 원주민들은 훨씬 영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데 서구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면을 향상시키려 함으로 초점을 잘 맞추지 못했다. 그래서 경쟁하듯 선교하면 인내와 지구력이 부족하여 2-3년 안에 그만두게 된다. 사랑은 경쟁이 아니라 오래참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며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썸만 타지말고 진정한 사귐으로 나가야 한다. 썸을 타는 것과 시귐의 차이는 책임감과 구속력을 동반한다.  참된 선교는 무엇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함께 사귀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 안에 거하면 열매는 하나님이 맺게 하신다. 계속 방문하고 베풀고 사랑하고 믿어주고 신뢰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진심은 통하고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전도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내가 전문가인 척 모든 것을 자신이 다 아는 척하며 상대를 가르치려 하는 태도이다. 이것은 신앙성장을 가장 크게 방해한다. 겸손하고 배우려 할때 영적 성장이 있고 성령님께서 우리 둘 사이를 하나로 매어줌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게 된다.

구약의 복음서가 ‘욥기’하고 한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 아내가 그를 떠나고 친구들이 욥를 정죄하며 가르치며 판단해도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결코 자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고 기다리며 인내한다. 나중에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의 이런 옳지않은 행위를 지적하며 욥에게 번제를 드리고 기도받기를 제시한다.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그 허물에 갇혀 죽고, 매미가 허물을 벗지 못하면 울지 못하므로 질식사한다. 독수리가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부리가 무뎌지고 발톱이 약해져 먹이감을 감아쥘 수 없게 된다. 독수리가 40세가 되면 동굴에 들어가 스스로 바위에 자신의 부리를 쳐부수고, 낡고 기름져 공중을 날기에 둔한 날개를 뽑고, 약화된 발톱을 뽑아 던진다. 이 때 새 깃텰이 나고 새 발톱과 새 부리를 만들어 30년을 더 살게 된다.                   

 

 

[편집인 칼럼] 위기를 모르는 리더십

● 칼럼 2024. 7. 7. 13:00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 한마당]   위기를 모르는 리더십

 

                           김용민 화백

 

지난 7월1일 ‘Canada Day’에 쥐스탱 트뤼도 연방총리는 영상메시지를 내고 "캐나다의 이야기는 157년 전 이 땅을 고향이라 불렀던 원주민들로부터 시작됐다"면서 "출신과 배경, 종교, 사랑하는 대상에 관계없이 모든 이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는 나라를 실현해 나가는 가치야말로 캐나다인들을 하나로 묶는 힘“이라고 다양성과 포용성을 강조하며 장밋빛 비전을 역설했다.

국경일을 맞아 연휴와 불꽃놀이를 즐기며 국민 모두 기뻐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최근 나온 한 여론조사는 응답자의 70%가 “캐나다가 망가졌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특히 18~34세 젊은 층은 78%나 “국가 시스템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전한다.

이같은 불만이 고스란히 드러난 게 지난달 24일 치러진 토론토-세인트폴스 보궐선거 결과다. 31년간이나 Liberal 아성이었던 곳이 Conservative로 허망하게 넘어간 것이다. 불과 590표 차이의 하원의원 한 석이라고는 하나 자유당 정부에는 큰 충격을 안겼고, 기다렸다는 듯 트뤼도 총리의 퇴진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삶은 팍팍해지고 격차는 커졌으며 국력만큼의 생활을 누리지 못한다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무능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9년 째 총리로 ‘장기집권’하고 있으니, 이젠 인기가 시들해지고 사람들도 싫증이 날 때가 되었는지 모른다. 획기적인 반전이 없다면 자유당 선거전략가가 지적한 것처럼 ‘내가 머무를 위험은 얼마인가?’를 자문하고 가을 총선을 결단하지 않으면 안될 ‘트뤼도 딜레마’를 본다.

트뤼도의 위기에 즈음해 여러나라 지도자들의 동병상련, 그리고 수렁에 빠진 한국 윤석열의 처지가 비교된다.

최근 전쟁으로 인한 경제난에 기후위기까지 겹치며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촌을 보면, 비단 트뤼도 뿐만이 아니다. 독재 지도자들은 그렇다치고 특히 민주주의 정치시스템을 가진 G7의 면면을 보아도 많은 리더들이 지도력의 곤경에 처해 정권의 위기를 맞고 있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정부의 여당은 6월30일 총선 1차 투표에서 20% 득표에 그쳤다. 반면 극우정당인 국민연합은 33.1%를 차지해 ‘변방의 소수당’이 제1당으로 등극하며 총리를 낼 수 있는 집권당을 바라본다. 이번 총선은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극우세력의 득세로 골머리를 앓는 가운데 치러진 EU의회 선거에서 수모를 당하자 마크롱이 국면 전환을 위해 의회를 전격 해산하며 실시됐다. 하지만 승패는 그대로 재연돼 ‘회사 CEO같다’는 비판을 듣는 마크롱 대통령은 정치적 궁지를 헤어나기 어렵게 됐다.

최초의 인도계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총리에 오른지 2년도 안된 영국의 리시 수낵 총리 역시 지지율 고전을 면치못한 끝에 7월4일 총선을 결정했다. 하지만 집권 보수당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20%에 불과한 반면 노동당은 41%에 달해 금명간 14년만에 정권을 빼앗길 게 확실하다.

일본은 더 심각하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 내각은 요즘 지지율 10%대까지 허덕인다. 암살당한 아베 신조 이후 정권을 맡아 ‘혐한 조장’ 등으로 한때 과반 지지를 얻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주요 언론조사에서 14%~21%의 사상 최저치를 기록 중이다. 미국을 등에 업고 군사대국화를 밀어부치며 한국 때리기 등으로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통일교 연루의혹에 비자금 스캔들 등 부패와 무능으로 국민 신뢰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최강국이라는 미국은 어떤가.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금 11월 대선에 출마를 고집하고 있으나 민주당 내에서 조차 후보 사퇴를 요구받는 지경이 됐다. 세계 각국은 이미 포스트 바이든을 염려하며 동키호테 ‘무데뽀’ 정치인 도널드 트럼프의 재등장 채비를 서둘고 있다.

이들 서방 지도자들의 위기는 개인적 무능과 부패 못지않게 근래 세계적인 혼란과 무질서가 가중되며 ‘정글화’가 심화되는 와중에 득세한 이기주의와 국수주의 등의 영향이 큰 것도 사실이다. 전쟁과 신냉전, 그리고 경제난과 양극화, 난민, 기후변화와 자연재난 등등 각국과 인류는 가히 존망의 위기를 걱정할 상황이다. 그 위기를 연대와 연합, 포용의 힘으로 극복하기보다는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트럼프식 자국 이기에 눈을 돌리는 것에서, 극우세력 득세의 한 단면을 유추하게 된다.

그러면, 한국은 어떤가?. 이 혼돈의 난세에 지혜로운 대처, 유능한 리더십을 찾아 볼 수 있는가. 문제는 다른 나라들의 위기국면과는 그 성격과 정도가 크게 다를 뿐더러, ‘위기를 위기로 인식 못하는’ 훨씬 심각한 증상에 암울해진다.

대통령 탄핵 국회청원이 100만을 넘어서고 있다. 겨우 2년여 만에 드러난 지도력은 ‘완전 맹탕’이었고, 일가 부패 비리를 덮는데 급급한 권력 오남용만이 확연해 지면서 ‘끌어내리자’는 여론이 들끓게 된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총체적인 국가위기와 민족대결의 불안을 오로지 무식한 압박과 미-일에 종속적인 힘에 기대 더욱 악화시키는 어리석고 위험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지난 4.10 총선의 강한 경고마저 전혀 개의치 않는 국민무시, 정도(正道)무시의 오만무도한 권력 놀음만이 설치는 것을 날맏 목도한다.

탄핵청원 폭주사태와, 국민 80%를 향하는 반감 여론에도 겁 없이 싸우려고만 대드는 무모한 돌진, 임박한 민심의 비등과 폭발의 화상을 어찌 당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