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나를 아는 지혜, 서로를 품는 마음

● 칼럼 2025. 10. 17. 13:0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나를 아는 지혜, 서로를 품는 마음

 

                                              임재승 목사 (다운스뷰장로교회 담임)

 

최근 심리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메타인지(Metacognition)’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능력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의 경계와 한계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지요.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모두가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된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손안의 작은 화면을 통해 얻은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우리는 건강 전문가가 되고, 정치 평론가가 되며, 경제학자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사회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태도입니다. 내 의견만 ‘정의’이고 나와 다른 생각은 ‘무지’ 혹은 ‘악의’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습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애국심이 없거나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으로 낙인찍힙니다.

 

이러한 현상의 뿌리에는 어쩌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만이 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경험과 지식은 유한하며, 시선은 자신의 입장에 매여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이 한계를 인정하는 것, 즉 건강한 ‘메타인지’야말로 성숙한 소통의 출발점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무지에 빠지게 되고,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닫게 되며, 갈등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에게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발견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은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지혜의 근원이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분이야 말로 완벽한 ‘메타인지’를 가지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스스로 한정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립보서 2:6-7) 라고 기록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셨지만,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알지만 배우는 자리에 서셨고, 죄가 없지만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죄의 짐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인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다는 것은, 종교 활동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는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와 한계, 즉 나의 연약함과 죄인됨을 겸허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주장만을 절대선으로 내세울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신념과 의견이 있지만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을 열게 됩니다. 내 주장을 포기하거나 타협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상대를 무조건 비난하고 정죄하는 교만한 태도를 버리고, 존중과 겸손의 자세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이미 신앙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우리의 언어와 태도가 예수님의 겸손을 얼마나 닮아 있는지 돌아보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직 신앙이 없거나 다른 믿음을 가지신 분들은, 기독교의 ‘믿음’이란 이처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허함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생각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유한함을 아는 지혜, 그리고 그 지혜 위에서 타인을 품는 마음. 이것이야 말로 분열과 갈등으로 지쳐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요? 깊어가는 가을, 우리 모두의 가정과 삶에 성숙한 지혜와 따뜻한 포용이 깃들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편집인 칼럼] 뻔뻔한 낯짝들

● 칼럼 2025. 10. 4. 01:3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뻔뻔한 낯짝들

 

 

오늘은 공자님의 가르침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공자는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 29장에서 2500년이 지난 오늘도 모두가 새겨들을 경구를 남겼다.

 

위나라의 28번째 군주였던 위령공을 공자는 무도한 혼군, 즉 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군주였다고 보았다. 실제로 위령공의 아들이 왕후인 어머니를 죽이려다 실패해 다른 나라로 도주하는 일도 있었다니,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와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인 것 같다.

 

공자는 논어 위령공 편에서 41장에 달하는 문답 가운데 29번째 장에서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니라”고 했다. 풀이하면 "허물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허물이다." 라는 준엄한 꾸짖음이다. 공자는 논어 학이편에서도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즉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고 가르쳐, 잘못은 인정하고 바로잡을 것을 강조했다. 앞서 위령공편 14장에서는 ‘궁자후이박책어인(躬自厚而薄責於人)이면 즉원원의(則遠怨矣)니라’고 했다. "자신에게 엄하게 꾸짖고, 남에게는 가볍게 꾸짖으면 원망이 멀어진다."는 것이다.

 

 

짐작들 하겠지만, 공자의 교훈을 거론하는 것은 내란청산 작업이 진행 중인 요사이 ‘과이불개’의 인물들 민낯을 너무 많이 보는 괴로움 때문이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사과나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모르쇠 발뺌이나 책임전가, 뭉개기, 심지어 “그래서 어쩔건데” 라는 적반하장까지, 뻔뻔한 얼굴들과 몰염치 작태가 국내외 동포들의 스트레스와 불안을 조장하고, 나라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을 본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내란우두머리 윤석열 부부의 남탓과 오만과 억지, 교활한 오리발 행진을 필두로한 공범과 종범들, 당시 주도적 고위직들의 발언과 행태는 몰양심·철면피 외에 묘사할 말이 없다. 자기들만 살겠다고 발버둥칠 뿐, 국민과 국가는 안중에 없다.

 

탄핵과 선거로 명백한 심판을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윤 어게인’을 외치며 내란선동과 국정혼란을 꾀하는 국민힘당과 소속 의원들, 그들은 사이비 종교단체에서 뇌물과 당원가입에 의한 선거개입이 드러나는 데도 극구 부인하며 “탄압과 보복”이라는 물타기와 되치기 수법 후안무치로 일관하고 있다.

 

유례없는 법해석으로 내란수괴를 석방해 국민을 놀라게 하고, 늘어진 재판으로 지탄받는 지귀연 판사, 그는 룸살롱 접대의혹에도 꿋꿋이 버티는 쇠심줄을 과시한다. 윤석열 간택에 보은행태인지 모르나, 항소심 무죄사건을 단 9일만에 파기환송해 대통령후보를 제거하려 한 ‘사법쿠데타’ 장본인 조희대 대법원장은 법원직원들의 규탄에도 아랑곳 없이 “사법독립”만을 중얼대며 역시 두꺼운 얼굴로 버티고 있다.

 

민족 정체성을 더럽히는 식민사관으로 무장한 뉴라이트들은 어떤가. 국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한국학중앙연구소, 동북아역사재단 등 국가 주요 역사단체를 장악한 자들도 물러날 기미가 없다. 권위를 자랑하던 인권기관의 국내외 위상을 망친 국가인권위원장, 권익 향상이 아니라 국민고충을 가중시킨 국민권익위원장, 진실화해위원장, 대통령 하명 감사에 열올렸던 감사원장도 안면몰수는 마찬가지다. 사죄와 개심(改心)도 부족하거늘, 헌법소원을 하겠다는 둥 파렴치 반발하는 패가망신 정치검찰족의 일부와 방송장악의 앞잡이로 온갖 구린내를 풍긴 방통위원장까지….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다. 이스라엘이 국기에 다윗의 방패를 의미하는 육각별을 새긴 연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신임을 한 몸에 받은 다윗왕은 그러나 일생일대의 악행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다. 수많은 처첩을 거느렸음에도 부하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적진에 내몰아 죽이는 잔인하고 사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앞서 그는 밧세바가 임신하자 전장에서 우리아를 호출해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술수를 부리기도 했다. 두 차례나 명하는 다윗의 ‘음흉한 호의’에도 불구하고 우리아는 전쟁 중에 전우들 처지를 아는 군인이 호사를 누릴 수 없다고 고사하며 자기 집에 가지 않고 왕궁문에서 잠을 청한다. 아무 죄없는 충직한 참 군인이 여색에 눈먼 다윗의 비열한 모략에 아내를 빼앗기고 목숨까지 희생을 당한 것이다.

 

인면수심의 죄악을 범한 다윗은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해 태연한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선지자 나단을 통해 하나님의 서릿발같은 징벌경고를 듣게 된 다윗은 자신의 중죄를 자인하게 된다. 그리고 곧바로 사죄한다. 진정어린 참회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 이후 왕자의 모반을 비롯해 책벌과 저주를 감당해야 했지만.

 

다윗은 그런 악독한 범죄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잘못을 덮거나 회피하지 않고, 즉시 솔직하게 인정하며 엎드려 회개, 사죄했기에 하나님의 신임을 회복했던 것이다.

 

성경에는 다윗 외에도 죄를 자복(自服)하고 회개하여 용서받고 사함을 받은 수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를 필두로, 십자가에 달려 죽기 직전 구원받은 강도는 대표적 사례다. 인류의 원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대속으로 사면하고 구원한 ‘사랑과 용서’가 기독교의 본령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세상을 미혹하는 일부 정치목사와 교계원로라는 이들은 범법처벌을 ‘종교탄압’이라고 강변하며 회개와 용서를 외면하고 있다.

 

 

누구나 죄는 지을 수 있고, 허물없는 인간도 없다. 다만 범죄와 허물을 쌓은 이후의 개과천선 여부다. 죄과를 성찰하는 양심과 인성, 지성, 도덕과 윤리감각 등을 얼마나 발휘하느냐에 죄와 벌의 경중과 인간됨의 척도가 달려있을 것이다. 특히 공직에 나가 국민을 섬길 사람들은 거기에 더해 멸사봉공의 소양이 필요하니, 최소한  ‘뻔뻔한 낯짝’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한다.

                                                                                  

[목회칼럼] 낙엽 단상

● 칼럼 2025. 10. 4. 01:1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낙엽 단상(斷想)

                                               박헌승 목사(서부장로교회 담임)

 

가을이 익어갑니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숲은 붉고 노란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화려한 색채 사이로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집니다. 흙빛에 황적색을 띤 낙엽을 보니 가을이 짙어가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가을비에 젖은 낙엽, 세찬 바람에 이리저리 뒹구는 낙엽, 길 한 모퉁이에 모여 속삭이는 낙엽, 발에 짓밟혀 아파하는 낙엽….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한참이나 바라다보면, 내 마음에도 한잎 두잎 떨어지는 낙엽을 보게 봅니다. 그렇게 푸르고 당당했던 나뭇잎도 떨어지니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어느새 마음이 쓸쓸해지고 서글퍼집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낙엽 지는 날에는 거닐지 말라”고 했나 봅니다. 가슴에 지는 낙엽을 보며 이별의 슬픔에 눈물을 흘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낙엽이 지는 날’과 같은 상실, 슬픔, 고독의 계절이 찾아옵니다. 그런 때에는 안 떨어지려고 발버둥 치거나, 애쓰기보다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풍성함을 자랑하던 나뭇가지들도 정들었던 나뭇잎을 떠나보냅니다. 초록빛으로 가득했던 친구들을 더는 붙들지 않고 놓아줍니다. 앙상한 빈 가지가 되어 홀로 있게 되더라도 떠나보냅니다. 내려놓음의 미학을 배우게 됩니다. 내려놓을 때 비로소 자유롭게 됩니다. 내일을 기약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말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그렇습니다. 버릴 때가 있습니다. 버려야 할 때 지키기 위해 붙들고 있다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내려놓는 자를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십니다. 영원을 사모하게 하십니다.

 

이 가을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나의 삶에서 내려놓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자만심, 상처, 원망, 집착, 우울감, 두려움, 걱정…. 지금 십자가 앞에 나의 연약한 낙엽들을 내려놓습니다. 내려놓는 비움의 공간에 하나님은 더 풍성한 봄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라게 하시며 마른 검불을 뒤쫓으시나이까”(욥13:25)

[편집인 칼럼] 언제까지 비굴한 혈맹인가

● 칼럼 2025. 9. 12. 12:0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편집인 칼럼- 한마당]   언제까지 비굴한 혈맹인가

 

 

미국 조지아주에 건설 중인 현대-LG 배터리 공장 근로자들에 대한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모욕적인 폭거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민간인을 무차별 포박한 대테러 작전 혹은 전쟁같은 상황이었다니. 미국 내에 살면서 그렇잖아도 과도한 단속에 불안해 하던 우리 동포들은 얼마나 큰 수치와 공포감을 느꼈을까.

 

일제 치하 강제동원으로 극심한 고초를 겪은 민족적 상처 이후로, 한국인이 해외에서, 더구나 최고의 동맹국에서 4백명 가까이 굴욕적으로 강제 연행돼 포로처럼 감금시설에 내동댕이쳐진 일이 있었나 싶다. 엄청난 중범죄자들도 아닐진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 쇠고랑을 채우고 휴대폰도, 접견도 금지되고 비위생적 시설로 소문난 외딴 감방에 쳐넣은 비인간적 처우에 우리 한인동포들이 내몰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는 미국의 이중성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대규모 투자를 강박해놓고, 필수 인력의 합법적 비자 발급은 외면해 왔다. 다급한 기업들을 단기비자 인력 충당이라는 '관행적 편법'으로 내몬 게 미국정부였던 것이다. 한국측이 해마다 통사정을 해도 매몰차게 거절하는 취업비자(H-1B) 만 보아도 얼마나 박대하는지를 보여준다. 매년 추첨하는 8만5천개의 쿼터 중 한국은 1%에 불과하다. 이는 싱가포르와 칠레에도 미치지 못하며, 인도 70%, 중국 10%에 비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 한다.

 

트럼프의 집요한 MAGA 압박에 순응한 한국의 투자액은 일본에 버금가는 거액이다. 더구나 ‘혈맹’이라 부르는 세계전략의 핵심 우방이다. 자기들이 도와달라 아쉬운 말을 꺼낼 정도인 맹방에, 돌연 ‘깡패나 다름없는’ 반 동맹적 난동을 부린 저의는 무엇인가. 단순한 단속기관의 한건주의 산물인가, 트럼프의 ‘교활한 거래술수’에서 나온 충동요법의 하나인가. 아니면 미국의 속성 그 자체인가?

 

이번 사태는 한미동맹의 본질에 대한 재인식과 대미 외교자세 재정립 등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웅변해주었다.

 

트럼프 비위 맞추다 뒷통수 맞아 허둥대는 외교에 머물러선 안된다는 경종이다.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동키호테 변덕에 장단맞추다 보면, 재미붙인 ‘호구 이지메’ 농간버릇은 끝이 없을 것이다. 냉정하게 챙기며 단호히 선을 그어야 한다. 나무랄 것은 호되게 꾸짖어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도 받아내야 한다.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여전히 최고의 우방이다. 6.25 남침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준 은인의 이미지에 기인한다. 하지만, 엄밀히 짚어보면 짝사랑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한국과 인연을 맺은 140여년 동안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랑’이 아니라,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는 한반도 정책을 펴왔기 때문이다.

 

간단히 예를 보자. 조선말 1882년 미국이 한국과 역사적 ‘통성명’을 한 얼마 후, 일제 군국주의의 강탈위기에 처했을 때 카스라-태프트 밀약으로 국권상실을 재촉한 게 미국이다. 태평양전쟁 종결 당시는 38선을 그어 분단의 길을 열었다. 패망 일본이 우리 땅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게 만든 것도, 6.25 직전 애치슨 선언으로 북의 남침을 초래한 것도 미국이다.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을 기용하며 처벌을 막고 이승만 독재와 양민학살을 두둔한 사실, 박정희 쿠데타와 전두환의 권력찬탈, 광주학살을 묵인한 것도 미국이었다.

 

전시작전권을 거머쥐고 통제하는 미국이 이젠 한국민 뜻과는 무관하게 북의 남침 제어보다 중국을 견제하고 대만을 방어하는데 한국군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러면서 천문학적인 미군 주둔비를 요구하고, 이제는 제조업 조선업을 망라한 기업이전과 무리한 투자를 강요하고 있다. 비단 트럼프 뿐만이 아니라, 변함없는 미국의 ‘혈맹 한국’을 대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전작권 환수 이야기만 나오면 나라가 망할 듯이 호들갑 떠는 장군들이 수두룩하다, 미국의 극우인사들을 떠받들며 이재명 정부를 헐뜯는 자들은 ‘윤 어게인’을 외면했다는 이유로 트럼프를 좌파라 부른다고 한다. 내란사태 와중에 범죄혐의가 드러난 한 ‘원로’목사는 미국 요로에 호소하며 특검출석을 거부한다는 소문도 나돈다. 일제 침탈과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의 미국식 재건과 인재양성을 지원하며 치밀한 그루밍 작업을 벌여 온 친미와 숭미 효과의 단편들이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주변 강국들의 영향과 그 역학관계를 외면할 수 없다. 특히 미국과의 강한 유대를 저버려서도, 버릴 수도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미국 그늘에 머물 것인가. ‘인지부조화’ 좌충우돌의 이기적 횡포와 신뢰도 의리도 없는 ‘안면몰수’의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친구를 마냥 짝사랑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시야를 넓히고, 보다 담대하며 자주적인 외교행보가 긴요해졌다. 계제에 대등과 호혜를 강단있게 밀고 나가 국익과 국민적 자존을 세우는 명분과 실리의 결단이 필요하다. 더이상 약소국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시대가 아닌 것이다.

 

K문화, K기술, K국방에, 나아가 K국력과 K민주주의가 세계의 선망을 받는 열강의 반열에 들어섰다면, 그에 맞는 처신과 외교를 강구해야 한다. 양복입고 갓쓰고 짚신을 신은 우스꽝스런 모습에 언제까지 자족할 것인가. 이제 그 낡은 의식적-무의식적 열등과 사대의 옷을 서둘러 벗어던지지 않으면 만년 미숙아, 약소국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