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칼럼] 늦게라도 기도하라

● 칼럼 2025. 2. 24. 15:5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늦게라도 기도하라

                                                                     서부장로교회 박헌승 담임목사

 

지난 목요일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폭설로 온 동네가 눈으로 뒤덮였는데, 새벽기도를 가려고 나섰다가 큰 낭패를 당했습니다. 자동차가 집 앞 거리에서 쌓인 눈 더미에 박힌 것입니다. 바퀴 주위를 삽질하며 차를 빼느라 엄청나게 고생했습니다. 눈은 계속 내리고, 온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고, 허리는 아프고 정말 난감했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자동차 안에 들어와 지쳐 쓰러졌습니다. 그때 비로소 기도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처음부터 기도하지 못하고 지금 와서 기도하려는 내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래도 염치 불구하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새벽에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밖에 없습니다. 진작 기도하지 못했음을 용서해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어린아이처럼 매달렸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기도하고 운전을 하니 신기하게도 자동차가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힘을 얻어 거리에 쌓인 눈을 치웠습니다. 차고 앞의 눈도 치우고 힘들게 자동차를 들여놓았습니다. 시계를 보니 두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입에서는 그저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번 눈사태로 인해 배운 기도의 교훈이 있습니다. 매사에 기도부터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늦더라도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당황하면 기도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포기합니다. 낙심하며 절망을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도는 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기도만은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이제라도 기도하면 내가 응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늦었다 하더라도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기도에는 늦는 것이 없습니다. 늦더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꿉니다. 모세의 기도, 한나의 기도, 다윗의 기도, 다니엘의 기도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시대의 역사를 움직이십니다.

 

스코트랜드의 존 낙스(John knox 1513-1572)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피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Mary 여왕이 수백 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러나, 존 낙스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십시오.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 목숨을 걸고 밤낮 부르짖어 기도할 때, 1560년 종교개혁을 이루게 됩니다. 메리 여왕이 죽기 전에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존 낙스 한 사람의 기도가 백만 대군보다 더 무서웠다.”

 

북이스라엘 아합왕 때, 가장 악하고 패역한 시대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기도의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기도로 하늘의 문을 닫고 열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요의 신, 바알을 섬기며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을 주께로 돌이키기 위해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알리려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을 했습니다.

 

바알 제단에는 불이 내리지 않았지만, 엘리야가 기도할 때 그의 제단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렸습니다. 승리 후 그는 믿음으로 빗소리를 듣고 갈멜산 정상에 올라 7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3년 6개월 동안 닫혔던 하늘에서 비가 내렸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약5:17-18)

[편집인 칼럼] 헛된 믿음이 꿈꾸는 세상

● 칼럼 2025. 2. 10. 13:1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마당- 편집인 칼럼]   

헛된 믿음에 빠져 열렬히 추구하는 그들의 꿈의 나라는 과연 어디인가? 

 

남북 고위급(총리)회담의 취재기자단으로 방북했던 1990년 10월의 기억이다. 개성을 출발하는 열차 안에서 내게 접근해온 북의 안내원은 우직해 보이는 중년이었다. 그는 북에서 지낸 3박4일 회담 기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내 곁을 맴돌았다. 평양시내 회담장 밖의 시민을 만나보려고 잠깐 거리로 나가면 대화를 듣다가 곧 중단시키며 그만 들어가자고 했다. 그래도 친숙해져서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에 들어가면 냉장고에 준비된 백두산 들쭉술을 기울이며 밤늦도록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역시 같은 얼굴, 같은 말을 나누는 동족이니…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 같기도 했다.

 

혹여 속사정을 엿볼 수 있으려나 싶어 가족이 몇이냐, 생활은 어떠냐, 직장은? 등등 질문이 이어졌는데, 거리의 몇몇 시민에게서 같은 답을 반복해 들었던 것처럼, 그 역시 작은 빈틈도 보이지 않았다. ‘남쪽 사정은 좀 아느냐’ 는 물음에 그가 했던 대답은 생생하다. “우리도 남쪽이 잘 사는 것 안다. 하지만 부러워하지 않는다. 수령님 영도하에 다들 행복하게 산다”

그러나 개성역에서 그와 웃으며 헤어진 후 머리에 맴 돈 잔상은 안쓰러움이었다. 당시 떠올랐던 평양 3박4일의 느낌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오세아니아 같았다는 것, 거대한 드라마 세트 같은 곳에서 우리 동포들이 ‘사육’ 혹은 관리 감시하에 숨막히는 삶을 살고있지 않나 하는 안타까움이 가시지 않았던 기억이다.

 

 

12.3 계엄사태에 대해 윤석열은 ‘공산 전체주의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고 야당의 입법독재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계몽령’을 발동한 것이라며 ‘고도의 통치권 차원 조치’였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2시간짜리 내란'이 가능하냐고 우긴다. 

 

긴박하고 아찔했던 12.3 밤 계엄군의 국회와 중앙선관위 침탈 상황은 검찰 공소장에 나온대로 군을 동원한 폭동이었다는 것을 온 국민과 전세계 동포들이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전시 사변, 그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전혀 아닌 평온한 밤에, 난데없이 국군을 동원해 국가 비상상황을 만들어 온국민을 공포에 몰아넣었고 국가신인도를 추락시켰다.

 

12.3 계엄이 노렸던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주장과 포고령대로 라면, 눈엣가시 국회와 야당을 없애고 비상 입법기구를 만들어 멋대로 하겠다는 것이고, 비판세력과 언론을 일거에 쓸어내 귀에 거슬린 집회 시위와 보도를 제거하며, 말 안듣는 전공의들은 ‘처단’하겠다는 것까지, 한마디로 ‘공산 전체주의’ 독재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독재적 권력을 꿈꾼 친위쿠데타요, 헌정파괴 내란이며 반란사태였음은 수많은 눈과 귀, 현장의 영상들, 투입된 병력이 증거하고 증언했다. ‘잠시의 계몽’ 운운 말장난으로 오리발을 내미는 건 그야말로 후안무치다.

 

그런데 요즘 지지자들 외침과 ‘여론조사’라는 것들을 보면 국민의 3할 안팎은 그들 언동에 동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당까지 ‘12.3 내란’을 엄호하는 반헌법적 작태로 윤석열 석방과 헌재 기각을 윽박지르고 있다. 기어이 전체주의 독재권력을 만들어 누리겠다는 제2, 제3 내란의 망상적 염원에 목을 매는 꼴이다.

 

소위 법 전문가라는 사람들, 최고의 공복인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과 집권 공당의 책임자들이 국민과 국가야 어찌되건, 헌법도 사법시스템도 깡그리 무시하고 온갖 법기술로 법치를 농락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삼권분립과 대의 민주주의를 부정하며, 집회와 결사와 양심과 언론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짓밟으려 한 저들이 바라는 세상이란 어떤 모습인가? ‘파블로프의 개’처럼 속박 당하면서도 이구동성 ‘우리는 행복하다’고 합창하는 나라, 혹은 소설 ‘1984’의 오세아니아 같은 세상을 꿈꾸는가, 아니면 북한과 같이 반대세력 없는 무소불위 수령독재를 원하는 것인가, 푸틴의 러시아나 시진핑의 중국이 부러운가? 아니면 히틀러의 나치정권이나 무솔리니의 파시즘? 아니 일본군국주의 시대를 원하는 것은 아닌가?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라고 했다. 기독교인들은 전혀 본적이 없어도 예수의 동정녀 잉태를 믿고, 부활과 승천, 그리고 영생을 믿는다. 아이러니 하게도 윤석열 내란세력의 주장을 가감없이 믿고 옹호하는 사람들 가운데 보수기독인들이 많다는 것은 이 히브리서(11:1) 성구 때문인가, 말세적 적그리스도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간 탓일까?.

 

“하나님 까불면 죽어”라고 ‘하나님 위에 있는 목사’ 전광훈이 믿거나 말거나 떠드는 소리에 미혹된 맹신자들, 그리고 극우 선동가와 돈에 눈먼 조작 유튜버들, 극렬 지지그룹 등은 윤석열이 영웅적 거사를 했는데 억울하게 구속됐고, 미국이 구해줄 거라는 헛된 믿음에 빠져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 이스라엘기까지 흔들어대 지구촌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그들은 야당이 입법독재를 했다, 야당대표는 빨갱이 범법자다 라고 무조건 믿는다. 헌재에 여당과 대통령이 추천한 우파 재판관은 보이지 않고 야당이 추천한 좌파 재판관만 득실거리는 것으로 보인다. 윤석열 동기인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이 “부정선거는 있을 수 없다”고 외쳐도 중국 해커가 개입했다며 거짓으로 치부한다.

 

‘내란수괴’의 복귀를 외치는 그들이 믿고 열렬히 추구하는 꿈의 나라는 과연 어디인가? 성경(요 10:11~15)에는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양을 버리고 달아나 이리가 양을 해친다’는 말씀도 있다. 부하들은 모두 단죄 당하는데 자신은 책임없다는 ‘삯꾼 수괴’를 살려서 무슨 덕을 보려는 것일까?.

 

제자 도마는 예수의 손과 옆구리를 직접 만져보고 부활한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 한다. 부디 차고 넘치는 증거와 증언들을 새기며 공의로운 심판과 한국 민주주의와 민권승리를 예감, 확신했으면 한다.          < 김종천 편집인 >

[목회칼럼] 가난한 자의 축복

● 칼럼 2025. 2. 10. 10:30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가난한 자의 축복

 

권영정 담임목사  (토론토 세계로 교회) 

 

우리의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많이 가진 것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자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어떻게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천국이 그들의 것인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가난해지기를 원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은 상대적인 가난이 아니라 파산과 같은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집도 있고 직장도 있지만 대저택에 사는 자들을 보며 평수도 작고 수입이 부족하여 누리지 못하는 가난이 아니라 하루하루 벌어먹기 힘들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가난입니다.

 

우리는 풍요로운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먹지 못하고, 입을 옷이 없어서 벗고 다니는 사람이 없는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풍요 속에 빈곤이라고 경제적 발전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첨단화로 많은 것을 누리고 있지만 그로 인해 인간관계는 단절되고 가정의 행복을 위해 부모님들이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여 자녀들에게 많은 투자를 하고 있지만 자녀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은 없어지고 성공을 위해 열심히 달려갔지만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알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령이 부족함 없이 풍성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심령이 가난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그 가난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가난함을 깨닫지 못하고 풍요롭다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고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기에 누구의 도움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뿌리가 뽑힌 나무와 같습니다. 지금 당장은 살아있는 것 같지만 그 나무는 죽은 나무입니다. 잎이 달려 있다고 하지만 곧 시들어버릴 나뭇잎입니다.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나무가 스스로 세워질 수 없고 시내가 흐르는 물가로 걸어갈 수 없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들어 시냇가에 심겨주심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뿌리 뽑힌 나무가 복된 것은 주인이 시냇가에 심겨주기 위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시간들이 너무나 힘들도 어려운 여정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그 시간들이 하나님을 만남의 시간이 되고 인도함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축복의 시간입니다. 축복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가난함을 고백할 때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과거 합격자를 집중적으로 배출하고, 중앙의 청요직(淸要職)을 독점, 그러나...

강명관의 고금유사

  •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의 한 장면. 쇼박스 제공

 

1780년(정조 4년) 5월11일 사간원 정언 정익조(鄭益祚)는 정조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대저 밭에서 흘린 땀으로 거둔 곡식과 베틀에서 손가락이 찢어지도록 짜낸 옷감은 허망하게도 부호들이 독차지하는 물자가 될 뿐입니다. 이 때문에 한번 번곤(藩閫)을 거치면 곧 거창한 집을 짓고, 기름진 고을 수령을 하고 나면 농토를 광점(廣占)합니다. 지금 근기(近畿)에서부터 호남과 해서(海西)에 이르기까지 물길이 편리한 곳은 깡그리 경화거실(京華巨室)의 소유물이 되었고, 그 땅에 사는 백성은 밭을 갈고 그 반을 얻어먹는 데 불과합니다. 이것이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는 까닭입니다.”

 

번곤은 관찰사와 병사·수사, 곧 지방 행정의 최고위직인 관찰사와 지역 병권(兵權)의 총책임자인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다. 관찰사와 병사·수사 아래에는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을 다스리는 수백개 수령직이 있었다. 정익조의 말인즉 관찰사와 절도사, 수령을 거치면, 거창한 집을 짓고, 농토를 광점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던가? 이들이 민(民)의 생산물과 노동력을 수탈하는 방법은 실로 다양하였다. 그중 하나를 보자. 수령은 봄에 환곡을 높은 값으로 팔아 돈을 챙긴다. 그러고는 돈을 조금 남겨 가을에 곡식값이 쌀 때 채워 넣는다. 이것은 ‘입본’(立本)이란 방법이다. 입본은 하나의 예일 뿐이고, 환곡을 가지고 농민을 이중, 삼중으로 착취하는 방법은 허다하였다.

여러 곳의 수령을 지내고 관찰사와 절도사까지 역임하면 거창한 재산을 형성한다. 서울과 가까운 경기와, 수운(水運)이 편리한, 곧 곡식을 손쉽게 서울로 옮길 수 있는 호남과 황해도 바닷가 고을의 토지가 모두 ‘경화거실’의 소유인 것은 이런 방법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관찰사와 병사, 수사 자리는 18세기 이래 예외 없이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의 거대한 사족가, 곧 ‘경화거실’의 독점물이었다. 이들은 흔히 벌열(閥閱)로 부르는데, 벌열은 과거 합격자를 집중적으로 배출하고, 중앙의 청요직(淸要職)을 독점하였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문음(門蔭)으로 지방 수령직을 차지했다.

 

이병정(李秉鼎)은 1766년 문과에 합격한 이래 설서(說書), 수찬, 응교,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 충청도 관찰사 등 청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1780년 7월3일 정언 홍주익(洪柱翼)은 이병정을 충청도 관찰사 재직 시의 부패 혐의로 탄핵했다. 조사에 의하면, 이병정은 소의 불법 도살에 대한 속전(贖錢, 벌금) 1876냥을 추징하여 사용했고, 고을과 역(驛)에 공문을 보내 자기 생일 잔치에 물품을 강제로 징수하였다. 찰방 홍창원(洪昌源)을 협박하여 자신의 전지(田地)를 이인(利仁) 역(驛)의 좋은 위전(位田)과 바꾸었고, 안면도의 금송(禁松) 16그루, 판재(板材) 70판을 베어낼 때 홍산(鴻山) 등의 백성 1600명을 품삯 없이 동원하였다. 또 부자 천광주(千光周) 등의 좋은 전지를 자신에게 강제로 팔게 하였다.

 

지방관들은 관찰사의 불법에 협조했다. 찰방 홍창원은 위협과 공갈에 겁을 먹고 땅을 바꾸어주었고, 수사 유진열(柳鎭說)은 안면도 금송의 벌채를 묵인했고, 남포 현감 이상현(李尙顯), 홍산 현감 서직수(徐直修), 비인 현감 이가환(李家煥), 청양 현감 이명우(李命瑀)는 이병정의 말을 듣고 백성을 돈 한푼 주지 않고 강제로 동원했던 것이다.

이병정을 단천부(端川府)에 정배하면서 정조는 탄식해 마지않았다.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는 가문’(世祿之家)이 예(禮)를 지키는 경우가 드물어, 조정에 서면 헌신하는 자세가 없고, 벼슬을 하면 제 잇속만 챙긴다는 비방이 있다. 불행하게도 2, 3년 이래 죄를 저질러 형벌을 받은 자는 탐오(貪汚)가 아니면 역적질을 저질렀다. 그 결과 조정이 텅 비어 일망타진된 것과 같고, 이와 같은 경우를 모면한 사람이 드물다. 아아,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찌 세신(世臣)만의 불행이랴. 곧 국가의 불행인 것이다.”

 

세록지가, 즉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는 가문’이 곧 ‘세신’이고 벌열이다. 18세기 이래 조선의 모든 관직은 수십개 벌열 가문의 독점물이었다. 벌열의 관심사는 관직의 독점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었다. 백성과 나라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권력과 치부(致富)를 위해 이들은 정조의 말처럼 역적질까지 서슴지 않았다.

 

무슨 대학의 무슨 학과를 나와서, 무슨 고시에, 무슨 시험에 합격하고, 검사, 판사, 장관, 차관과 국회의원과 시장과 지사를 지냈거나 지금 그 자리의 명함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자들은 내란을 내란이라 부르지 못하고, 폭동을 폭동이라 하지 않는다. 국민이 빈곤해지건 나라가 망하건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기 권력의 유지에 있을 뿐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벌열이 아닌가?

 

아, 이병정은 어떻게 되었냐고? 귀양지에서 놀다가 돌아와 억울하다는 말을 늘어놓았고, 같은 패거리의 도움으로 다시 관로(官路)에 들어섰다.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 홍문관 제학, 강원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거치고, 이조판서, 병조판서까지 올랐다. 과연 벌열이었다.

사족. 만약 대한민국에 개혁이 있어야 한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인문학 연구자

 

 

강명관 인문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