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 칼럼] 터널의 끝은 아직도

● 칼럼 2020. 10. 4. 15:53 Posted by SisaHan

[1500 칼럼] 터널의 끝은 아직도

박성민 작가

요즘 힘들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19 때문이다. 며칠 전에 온타리오 주의 하루 확진 자가 거의 500명이 되며, 캐나다 전체에서는 1000명이 되고, 이제 막 개학한 고등학교에서도 확진 자가 나왔다는 뉴스를 보았다. 깜짝 놀란 이유는 이제 9월이면 어느 정도 컨트롤 할 수 있고, 그 동안 해왔던 많은 사회적 제약들을 풀어 줄 수 있고, 터널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어떤 해결책이 나오리라 믿었다. 지금 어떤 예방책이나 해결 방법이 나와서 규제들을 풀어준 것아 아니다. 이 상태로 계속 나가다 보면, 국가의 경제 자체가 위기를 맞을 수 있고 많은 사업체들이 더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캐나다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방역 시스템에 관한한 한국이 선진국이고 미국과 캐나다는 후진국이다.

이제 계절이 바뀌어 가을로 접어 들었는데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우리는 지루하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을 달리고 있다. 이런 상황은 캐나다에 국한 된 상황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어느 나라가 더 심하고 덜한 차이거나, 어느 나라가 솔직히 밝히거나 숨기려느냐는 차이이다. 코로나라는 전염병 때문에 전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가장 모범적으로 그리고 잘 대처하고 있다는 소식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은 처음부터 문제를 숨기려 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밝히고 정면으로 부닥쳐, 빠른 검사를 하였다. 정은경 질병 본부장과 직원들의 노력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들을 전적으로 믿고 밀어준 국민과 정부도 잘 했다고 생각한다. 처음 사태가 터졌을 때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은 아베 총리가 상황을 설명했는데, 한국은 솔직히 웬 초라한 그리고 피곤해 보이는 아줌마가 나와 설명하는가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전문가답게 할 말을 하고 차분하게 설득력 있게 브리핑하는 것이 더 신뢰감을 주었다. 그녀는 늘 피곤한 표정이었다. 어느 기자가 안쓰러운지 하루에 몇 시간을 자느냐고 물어본 기억도 난다. 그러나 얼마 전에 그런 그녀를 두고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죄로 누가 고소를 했다.

이건 정말 해도 너무한 상황이고 나가도 너무 막 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광화문 집회에 연관된 사람들의 행동이다, 그들은 정부가 광화문 집회를 탄압하기 위해 확진 자 수를 늘렸고 코로나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주장이다. 정치판에서는 공작과 음모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한 행동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선 생각도 않고 있다. 그들의 행동이 세계적으로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는 일인지 모르고 있다. 캐나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50몀 이상 모이면 안되게 임시 법이 제정되어 있었다.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요즘 상황이 나빠지자 50명이 10명으로 하향 조정 되었다. 실내이든 실외이든 상관 없이, 그런데 제일 모범적인 방역 국가인 한국에서 여기는 10명도 못 모이는데, 몇 만 명이 모여 집회를 한다는 게 과연 정상적인 일일까? 당연히 막고 금지시켜야 하는 일이 아닐까? 이 상황에서 야당은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기 보다 은근히 집회를 지지하고 있다. 근래에 보기 드문 전염병과 싸우는데, 여당과 야당의 구별이 있어야 하는가? 야당은 이번 일에 정부가 하는 일에 대놓고 반대하지는 못하지만, 비협조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정부의 정책을 의심하면 끝이 없다. 그리고 야당이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반대만 하지 말고, 야당이 신뢰를 잃는 것은 무조건 반대만 하기 때문이다. 반대할 땐 반대하고 찬성할 땐 찬성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이 번에 개천절에 또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계획한다고 한다, 정부는 이 번에는 적극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 다시 전 세계에 모범이 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 잘 할 수 있지 않는가? 우리 잘 해오지 않았는가? 여야나 진보 보수의 구별 없이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박성민 작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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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의대생은 학교를 떠나라

● 칼럼 2020. 9. 29. 14:27 Posted by SisaHan

[칼럼] 의대생은 학교를 떠나라

              

가만히 있으라는 기성세대의 말에 또 속지 마라. 의대를 떠나는 것이 환자를 위해서 좋고, 무엇보다 당신들에게 좋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돈이 아니라 힘세고 돈 많은 이들의 돈으로 되라. 떠나기 싫으면 의과대학을 좋은 의사를 키우는 곳으로 바꿔라. 기성세대는 틀렸다.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의대생은 학교를 떠나라. 의과대학에서 20여년 교수생활 한 이가 의대생들에게 전하는 충심의 조언이다. 현재의 의과대학 교육은 좋은 의사를 양성하는 데 실패했다. 젊은 의사들이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떠나기로 결정하여 응급환자가 거리를 헤매고, 중환자 수술이 미뤄졌을 때, 한국 의학교육은 조종을 울렸다. 의과대학생들의 집단행동 유보선언이 국가시험 응시라는, 선배들의 통역이 그 실패를 다시 확인해주었다. 며칠 전 본과 4학년 학생들이 의사국가시험 재응시를 표명한 이유가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국민건강권이 위협받고있어서라면, 똑같은 이유로 응급실과 중환자실 철수에 동조하지 말았어야 했다.

물론 이런 의학교육 실패의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기성세대와 그 위 선배들에게 있다. 이들의 주요 죄목은 다음과 같다. 공부만 잘하면 집안일, 학교 청소까지도 면제해 준 죄, 한 반에서 대학 가는 몇 명을 위해 수십 명의 학생들을 엑스트라로 만든 죄, 체육·음악·미술 시간을 빼앗은 죄, 새벽까지 학원 뺑뺑이 돌리고 잠 못 자게 한 죄,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오래 참은 아이가 성공한다고 거짓말 한 죄, 사춘기조차 심하게 앓지 못하게 한 죄, 장편소설 요약본만 읽게 한 죄, 3등급 이하의 아이와는 놀지도 말라고 한 죄, 가고 싶던 수학과·천체물리학과 못 가게 한 죄, 부실한 예과 교육과정 운영한 죄, 편법과 불법으로 큰돈 번 의사들을 성공한 선배로 소개한 죄, 인턴과 전공의를 피교육자가 아니라 임금 싼 노동자로 대한 죄, 괜스레 젊은 전공의와 의대생 부추겨 파업하고 자신들은 쏙 빠진 죄.

하지만 정부도 이에 못지않은 잘못이 있다. 학교와 국립병원까지 돈벌이 기관으로 육성한 죄, 규제 프리존, 규제 샌드박스 시행으로 영리유전자 검사 등, 과학적 근거도 없는 각종 검사를 돈 벌라고 허용한 죄, 데이터 3법 개악으로 환자 정보를 영리기관에 넘기는 것을 합법화한 죄, 해외환자는 유인 알선을 독려한 죄, 공공의료 강화하겠다고 하면서 예산은 쥐똥만큼 배정하여 국민을 기만한 죄, 그중에서도 가장 파렴치한 죄는, 자기네들은 이렇게 의료 영리화에 혈안이 되어 있으면서 파업한 의사들한테 공공성운운하는 죄일 것이다.

하여 의대생들이여, 기성세대를 마음껏 욕하라(하지만 조심하라! 우리도 한때는 당신들처럼 젊었다). 무엇보다 기성세대에 속지 말라. 의사란 직업은 기성세대가 알려준 것과는 전혀 다른 직업이다. 의사란 평생 환자들의 피, 고름, 대소변 속에서 뒹굴어야 하는 직업이다. 종종 허벅지를 꼬집으며 졸음을 참아야 하고, 식사를 하다가도 뛰쳐나가야 하며, 모처럼 떠난 휴가길에서도 입원 환자의 혈압을 틈틈이 확인하고 어쩌면 가족들을 놔두고 먼저 돌아와야 하는 직업이다. 8시간 넘는 대수술을 마치고 탈진해 수술실 바닥에 벌렁 누웠을 때 죽을 듯 밀려오는 피곤 섞인 희열을 반복적으로 즐겨야 하는 이상한직업이기도 하다. 전쟁이 터져도 환자를 두고서는 중환자실을 떠날 수 없는 숙명을 가진 직업이다. 무엇보다 환자보다 먼저 아프고 더 오래 아파야 하는 직업이다.

그러니 그런 직업을 갖기 싫다면, 지금이라도 의대를 떠나라. “가만히 있으라는 기성세대의 말에 또 속지 마라. 의대를 떠나는 것이 환자를 위해서 좋고, 무엇보다 당신들에게 좋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돈이 아니라 힘세고 돈 많은 이들의 돈으로 되라. 떠나기 싫으면 의과대학을 좋은 의사를 키우는 곳으로 바꿔라. 기성세대는 틀렸다. 하지만 여러분이 뭉치면 바꿀 수 있다. 아주 떠날 결심을 하기 어렵다면, 잠시라도 의대를 떠나라. 1, 2년 빨리 의사 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70년 전, 졸업을 6개월 앞둔 한 의대생도 낡은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학교를 떠났다. 칠레,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국경을 넘으며 그는 마음의 경계를 하나하나 지워 나갔고 마침내 생각이 온 세계만큼 커졌다. 그가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진짜 의사가 되어 있었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는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불렀다. 그를 진짜 의사로 만든 건 여행길에서 만난 이들과 담요 한 장으로 지새운 가장 추운 밤이었고, 손가락이 하나도 없어 손에 막대기를 달고 하는 연주에 맞춰 앞 못 보는 한센병 환자가 부른 노래였다. 당연히 그것은 결코 학교가 줄 수 없는 것들이다.

의대생은 의대를, 공대생은 공대를, 법대생은 법대를 떠나 용감하게 낡은 오토바이에 올라라. 그 오토바이에 포데로사 II’보다 더 멋진 이름을 붙여도 좋다. 함께할 친구가 있다면 더욱 좋다. 떠나거든 부디 이 위선, 탐욕, 거짓으로 가득 찬 기성세대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지 말라. 혹시 돌아온다면, ‘진짜가 되어 오라.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로 오라.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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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기쁨과 소망] “목사님, 왜 벌써 은퇴하나요?“

임수택 목사 (갈릴리 장로교회 담임)

 요즘 내가 많이 듣는 질문들이 있다. 첫째는 "목사님 왜 벌써 은퇴 하나요?" 하는 질문이다. 주변 교회에 은퇴하는 목회자들을 둘러보면 보통 내 나이보다 더 들어서 은퇴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니까 나를 보면 은퇴하기에 좀 이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위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렇다. 내가 나이 많아 목회가 힘들어서 은퇴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금년에 환갑을 지낸 내가 젊은 사람은 아니지만 아직도 나는 웬만한 스포츠 종목에서 젊은이들과 겨루어도 밀리지 않는 체력과 기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까운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은퇴를 결심한 것은 선교를 향한 새로운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선교에 대한 부르심을 분명하게 알려 주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분명한 방법으로 소명하지 않으셨다면 나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담임목회를 좀 더 하다가 은퇴하였을 것이다.

내가 선교사로 니카라과에 가능한 한 살이라도 더 젊고 건강할 때에 가려고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내가 매년 여름마다 니카라과 단기선교단을 구성하여 현지 여러 도시에 가서, 사역을 하고, 돌아 온 경험이 20차례나 있다. 그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곳은 기후가 매우 덥고, 생활하는 환경이 여러 면에서 매우 열악하여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땅에서 선교하며 산다는 게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두 번 째 많이 듣는 질문은 "왜 하필 니카라과 선교사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민목회지에는 내가 아니어도 목회할 좋은 목사님들이 많이 계시지만 니카라과에는 그렇지 않다. 거기엔 자생적으로 발생한 많은 교회와 교회를 맡은 많은 교역자가 있으나 그들 가운데 다수는 성경을 체계적으로 배운 경험도 없고, 또한 배울 수도 없는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나처럼 신학을 공부한 후 일생동안 성경을 연구하며 가르치고, 설교하며 목회했던 경험자가 찾아가서 도와주어야만 하는 절박함이 있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온 세계에 있는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와 좋은 강의들을 들을 수 있으나 니카라과의 거의 모든 성도들은 인터넷도 안되고, 컴퓨터도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선교사가 직접 찾아가서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필요성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세 번 째로 많이 듣는 질문은 "코로나19 때문에 어떻게 선교하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세계 곳곳의 선교현장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분들도 코로나19 때문에 선교를 중단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나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코로나19가 창궐하고, 의료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한 그곳에 들어 갈 수가 없다. 하루 빨리 백신과 치료약이 나와야 한다. 이것은 나카라과 선교와 교회를 위해서 뿐 아니라 캐나다와 한국과 세계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하루빨리 이 팬데믹 전염병 사태가 해결되어야 한다.

바라건대 금년 안에 믿을 만한 백신이 나와 우리 모두가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회복하고, 내년엔 내가 꿈꾸던 니카라과 선교를 할 수 있게 될 것을 소망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 임수택 목사: 갈릴리장로교회 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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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 칼럼] “빼앗긴 계절에 대하여”

● 칼럼 2020. 9. 14. 23:44 Posted by SisaHan

[1500 칼럼] 빼앗긴 계절에 대하여

 장 계 순

 

 지난 8월에는 주말이 다섯 번이나 있었다.

 그 반가운 휴일도 외출다운 외출을 못한 채 지나갔다. 마치 봄이 훌쩍 건너뛴 낯선 세상에서 여름을 맞이했던 것 같다. 분명 그곳에 있었을 텐데, 한창 벚꽃이 만발한 하이파크(High Park)에도 다녀갔을 아지랑이 봄날은 내 기억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않다. 도시의 폐쇄(Lockdown)가 시작된 늦봄, 옅은 잠에서 깨어난 아침이면 이름 모를 우울이 몰려오곤 했다. 생명체도 아닌 COVID19이 창궐하던 계절 한가운데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 확진자와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에만 온통 시선을 빼앗긴 채 멍하니 하루하루를 보냈다. 코로나에 전염된 시체를 거두어 들이는 냉장 트럭이 매일 질주한다는 뉴욕 거리를 상상하노라면 책 읽는 내 머릿속이 어지럽기만 했다. 도무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계절에 책을 읽은 들 무슨 소용인가, 내 일기장에도 회의에 찬 무력감이 묻어난다.

 처음 우한 폐렴으로 불리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두어 달 만에 세계적 유행병이 된 이후로 오직 세 단어만 무성했다. 거리 두기, 마스크 쓰기, 손 자주 씻기. 어린이 놀이터에서부터 내가 즐겨 찾던 산행길 마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거의 다 닫혔다. 노마드적인 내게 갈 곳이 없어 졌다. 도심의 공원길을 찾아 나섰다.

 모처럼 맑아진 공기와 새소리 냇물 소리에 갑갑했던 마음을 씻고 돌아오곤 했다.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경계의 빛으로 걷는 사람들에 비해 밀착한 채로 노니는 오리들이 부럽기조차 했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거리 두기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전보다 더 자유로워졌다고나 할까. 거리를 두다 보니 내 자신에 집중할 시간도 많아졌다. 그런 만큼 상대방도 더 잘 보였다.

  정상적인 삶이 뒤바뀐 그 계절에서야 비로소 아름다운 슬픔을 발견했다. 코로나에 전염된 엄마를 저세상으로 떠나 보낸 딸의 통곡 소리에도, 병원 중환자실에서 코에 호스를 낀 아버지가 아이패드 화면을 통해 가족들과 만나는 장면에서도 온통 슬픔이 배어 있었다. 서로 부둥켜 안을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이 불현듯 아름답게만 여겨졌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그리운 마음은 더 애절했을 거라고, ‘아름다운 슬픔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라고그런 경황 가운데서도 나 우선이 아닌, 따뜻하게 내민 손길이 항상 있었다.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 독거 노인들에게 음식을 나르는 젊은이들과 장애인들의 집집을 돌면서 식품을 배달해 주는 숨은 봉사자들사람 사이를 갈라 놓았던 코로나였지만 이 아름다운 모습만은 앗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다. 서로 양보하면서 타인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는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코로나가 설 곳이 없을 거라는, 마침내 왕관을 벗고 시나브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계절이 올 것이란 믿음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누구나 각자의 생애에서 한 번쯤은 빼앗긴 계절을 경험하는 것 같다. 전쟁터에 불려간 젊은이들,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로부터 학대받은 원주민이나, 어린 나이에 납치범에게 유괴당해서 유년 시절을 강탈당한 여인에 이르기까지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라도 운명적으로 자신의 계절을 빼앗긴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진리 아닌 진리를 전파하는 거짓 종교에 세뇌 당한 사람들 역시 생애의 중요한 계절을 빼앗긴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 또한 내 생애 절반을 타인의 시선에 구속당한 나 아닌 나로 살아온 게 아닌가 싶다.

  이러한 처지에 놓인 우리 인간들에게 들려주는 메시지가 있다. 19세기 독일 철학가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 <좋든 나쁘든 고난과 역경까지도 받아들이라, 달라진 운명 앞에서 비관이나 증오에 앞서 삶의 주체인를 창조적으로 바꾸라, 고통, 상실 같은 불운을 탓하지 말라, 앞으로 나아갈 책임은 바로 에게 있다>는 개념이다.

이 바이러스로 인해 생계의 위협에 휘말린 사람들, 일상이 허무가 되어버린 계절을 맞은 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 지에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장미 넝쿨 아래 흐트러진 꽃잎에서 여름의 끝을 본다. 

그 어떤 비극적인 일에도 별로 놀라지 않은 시대에 사는 현대인, 백신도 낫게 할 수 없는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amor fati “. 빼앗긴 계절에 연연치 말자. 이것 또한 지나 가리라

< 장 계 순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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