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칼럼] 정치는 쉬쉬하면 괴물이 된다

● 칼럼 2025. 11. 15. 11:07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마당 - 편집인 칼럼]     정치는 쉬쉬하면 괴물이 된다. 

 

 

요즘 모임에서 흔히 듣는 말 가운데 하나는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하지말라”는 것이다. 간극이 커서 얼굴 붉히기 일쑤인데 공연히 ‘지뢰밭’에 들어가지 말자는 것이다. 종교의 정치화도 문제이지만, 심화된 정치 양극화 시대의 씁쓸한 사회상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의도적인 회피’(Intentional Evasion)이고 ‘작위적 무관심’(Artificial Indifference)인데, 본질은 민주적 대화법의 부재 탓이다. 모처럼 만난 친우 간에 감정싸움과 의가 상하는 일을 미연에 막겠다는 뜻이긴 하나, 무언가 목에 걸린 듯 답답하고 개운치 않은 뒷맛은 어쩔 수가 없다.

 

아무리 무관심하려 해도, 캐나다의 이민정책과 트럼프의 좌충우돌 논란은 모두의 화제이고 관심사다. 지난 1년 고국의 정변과 윤건희 망동에 귀막고 살았다면 산속 수도승과 다름없다.

 

정치이야기여서 곤란하다면, 고국의 안위와 흥망, 그리고 체통이 걸린 민족적 문제부터, 일상에서 매일 맞닥뜨리는 정치사회 현안 이슈들 가운데 우리네 삶의 영역에 직결되지 않는 것이 과연 몇이나 되나?. 유학과 교육, 일자리, 먹거리, 복지, 금융, 의료, 주거, 종교, 문화, 여행…. 더구나 세금 꼬박꼬박 내고, 연금 받고, 투표권도 가진 주권자들 아닌가.

 

인간은 원래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 공동체의 다양한 정치적 작동원리의 영향 하에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다. 당연히, 또한 매일 직면하는 문제들이 정치적-사회적 연계 속에 이뤄져, 나와 가족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이 명백할 진대, 억지로 모른 척, 무관심한 척 제쳐두고 “좋은 게 좋아”라며 소소한 신변잡담으로 서로 비위 맞추며 시간을 넘기자는 것이니, 스스로 우민화(愚民化) 하는 일이요, 어쩌면 비겁하고 따져보면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받는 징벌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고 깨우친 철학자 플라톤의 말이나, “정치에 무관심한 자는 자기 일에만 신경쓰는 사람이라고 말할 게 아니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고 멸칭한 페리클레스와 같은 고대 선각자들의 가르침은 현대사회라고 다를 바가 없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것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Edmund Burke) 혹은 “나쁜 관료는 투표하지 않는 좋은 시민들에 의해 선출된다.”(George Jean Nathan)는 교훈으로 경종을 울리고 있어서다. 눈길을 끄는 것은 ‘쓸모없는 사람’을 ‘아무 것도 하지않는 선한 사람’과 ‘투표하지 않는 좋은 시민’으로 순화적 대비법 표현을 써서 강조한 사실이다.

 

그처럼 동서고금 정치가 우리 삶에서 떨쳐버릴 수 없는 불변·불금(不禁)의 명제라면, 정치이야기를 많이 해야 도움이 되겠는가, 위선적인 공론금지가 합당한가.  차라리 활발한 토론의 광장에 맡기되, 건전한 대화와 설득의 논전을 통해 삶에 유익을 줄 정치로 만들어 가는 게 현명하지 않은가 말이다.

어려서부터 민주시민 교육에 정성을 기울여 좌우불문 건전한 토론문화가 정착된 정치선진국 독일의 사례는 그래서 본받을 만한 타산지석이다.

 

정치이야기를 쉬쉬하면 정치는 어둠속에 오염되고 부패하고 퇴보한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팔을 걷어부치고 정치를 광장에 펼쳐야 한다, 정치인의 자격을 엄격히 묻고, 논리도 실력도 품격도 가려 함량미달은 매섭게 심판해 퇴출하는 집단지성의 저력을 키워야 한다. 냉정한 판단과 분별의 힘, 행동하는 민주역량을 발휘해야 정치가 투명하게 발전하고 기능한다.

 

정치는 말로 한다. 정치판은 말의 유희와 성찬으로 유권자를 미혹한다. 첨예한 이슈 마다 자화자찬, 아전인수, 책임전가, 물타기와 적반하장의 궤변, 심지어 마타도어까지, 모든 화법과 술수를 동원하는 저질 정치인의 자극적 언사에 넋을 뺏기면 판단력이 마비되고 마약처럼 중독된다.  입맛에 맞는 컨텐츠만을 제공해 편견을 고착시키는 유튜브 알고리즘과 똑같은 구조다.

진정성과 논리를 찬찬히 따지고 분별해, 시시비비와 정의-불의,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지 못하면 언제까지고 그들의 정치모략에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평온 중의 계엄이 합법인지, 매국적 뉴라이트 문제가 뭔지, 정치검찰과 사법개혁 등의 시비곡직을 제대로 판별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연유다. 솔로몬의 지혜를 빌릴 것도 없다. ‘이견은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라는 건전한 민주적 토론문화라면 쉽게 결론 날 쟁점들이다.

 

유권자들이 지혜롭게 분별했다면 윤석열류가 등장했을 리 없다. 나라를 이권과 치부의 수단으로 망가뜨린 패악질이 양파 껍질처럼 드러나는데도 회개없는 궤변과 거짓의 합리화에 발버둥치는 것은, 그렇거나 말거나 ‘윤어게인’을 외치는 무지막지에 솔깃해서다.

더우기 그런 인물을 지도자로 만든 원죄를 뭉개면서 토해내는 야당의 파렴치한 언설에 2할이 넘는 국민이 포획된 현실 또한 무분별 편집증의 산물이요 시대의 수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제질서를 뒤흔들고 미국을 혼란에 빠트린 트럼프를 방관했다가 ‘No King’을 외치는 미국인들, 그중에도 한인동포를 비롯한 이민자들의 고통에서 우리는 플라톤과 버크의 경고를 되새긴다. 누구를 위해 어떤 언동을 하는지, 정치지도자 분별과 선택의 중요성을 다시금 절감하게 된다.

 

광장에서 정치를 활발히 논하자. 민주주의와 정치문화 발전, 함께 어울려 잘사는 상생과 포용의 공동선 구현을 위해서도 정치를 더 많이, 생산적으로 토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