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캐나다 사이의 온타리오호를 '아메리카호'로 바꾸라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맞서 캐나다 온타리오주가 호숫가에 '온타리오호'라고 적힌 초대형 표지판을 설치했다.
더그 포드 캐나다 온타리오주 수상은 29일 온타리오호에 '온타리오호. 지금도, 언제나'(Lake Ontario. Now and Always)라고 적힌 표지판을 세우고 공개했다.
가로 24피트(7.3m), 세로 12피트(3.6m) 크기의 이 표지판은 6피트(1.8m) 높이의 지지대 위에 세워졌다. 꼭대기가 대략 2층 건물 높이에 이른다.
포드 주수상은 소셜미디어에 올린 영상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을) 떠나고 한참 뒤에도 이곳은 여전히 온타리오호라고 불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명칭 논란은 관세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캐나다 관계가 악화하는 가운데 불거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호수 이름 변경으로 캐나다를 자극하는 듯한 도발적 조치에 나섰고, 캐나다에서는 이를 두고 조롱과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앞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도 온타리오호 명칭이 캐나다 연방의 탄생이나 미국의 독립선언보다 오래된 것이라며 개명 요구를 일축했다. < 임수정 기자 >
공화당서도 '아메리카호 개명' 비판…버몬트주지사 "유치한 일"
불필요한 감정 싸움 경계…민주당도 "말도 안돼" 개명 저지 법안 추진
미 · 캐나다 무역전쟁 악화…"캐나다 총리, 찬사받지만 외로운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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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 [AP=연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과 캐나다 국경지대의 온타리오호 이름을 아메리카호로 바꾸자 여당인 공화당에서도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28일 미 언론에 따르면 공화당 소속인 필 스콧 버몬트주 주지사는 소셜미디어 엑스에 글을 올려 "(호수 개명은) 유치하고 실망스럽다"고 트럼프 대통령을 직격했다.
스콧 주지사는 "우리는 협상을 통해 미국과 캐나다 경제를 강화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추가적인 긴장 격화는 미국이나 캐나다 가정과 기업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버몬트주는 캐나다와 무역·관광 분야에서 연결고리가 깊어 양국 관세전쟁으로 직접적인 타격이 예상되는 지역이다.
버몬트주는 전통적으로 민주당 강세 지역이지만 온건 보수 성향의 스콧 주지사는 트럼프 대통령을 공개 비판하며 2024년 주지사 선거에서 73%의 득표율로 압승했다.
위스콘신주 주지사 공화당 후보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를 받고 있는 톰 티파니도 "온타리오호는 그대로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시 캐나다와 무역으로 밀접하게 연결된 위스콘신주는 경합주다. 트럼프 대통령이 호수 개명으로 실익 없는 감정싸움을 벌이면서 11월 주지사 선거에서 불이익을 입는 상황을 경계한 셈이다.
민주당도 호수 개명에 반발하고 있다.
민주당 데비 딩겔 하원의원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몹시 분개한다"면서 개명 저지를 위한 법안을 내겠다고 밝혔다.
2016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패했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도 엑스에 "온타리오호다"라고 짧게 올리며 개명 시도를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카니 총리(오른쪽) [AFP=연합]
트럼프 대통령의 호수 개명으로 미국과 캐나다의 관세전쟁이 한층 악화하는 가운데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에게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금은 반미 정서 확산 속에 트럼프 대통령에게 '맞짱'을 뜬 카니 총리가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지만 관세전쟁의 타격이 현실화해 캐나다 가계와 기업에 부담이 커지면 캐나다 여론이 뒤집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CNN방송은 "카니 총리가 위기의 순간에 찬사를 받고 있으나 결국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중견국 연대'를 주창했던 카니 총리에게 미국과의 무역전쟁이라는 시험대가 너무 빨리 찾아왔다는 지적도 나온다.
카니 총리는 지난 1월 다보스포럼 연설에서 미국이 예전의 미국이 아님을 인정하고 중견국이 힘을 합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아직은 중견국 연대에 대한 국제적 지지가 규합되지 않은 상황에서 카니 총리가 혼자 외로운 싸움에 나선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우선주의에 시달리면서도 고강도 보복을 피하려 하는 각국의 분위기가 여전히 큰 탓이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초강대국으로부터 다변화를 꾀해 연대를 구축하는 데는 몇 년이 걸릴 수 있고 트럼프에 맞서는 데 대한 동맹국의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는 특히 그렇다"면서 "중견국 연대를 촉구하고 7개월 뒤 카니는 사실상 트럼프와 혼자 싸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 백나리 기자 >
캐나다 퀘벡에서 태어난 신문기자가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조선 땅을 밟았을 때, 그는 그저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기사를 송고하는 종군기자였을 뿐이다. 처음엔 일본에 딱히 나쁜 감정도 없었다. 오히려 근대화를 이룬 신흥강국이라는 호감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사람은 눈으로 보고 마음을 바꾸는 법이다.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 1869~1931)는 조선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본의 만행을 직접 목격한 뒤, 펜끝의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그는 백년도 더 전에 이 땅에 왔다가, 사진 한 장과 책 두 권으로 후대 한국인들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남겼다.
프레드릭 맥켄지(위키피디아)
을사년 이후의 목격자
맥켄지는 런던의 신문사 데일리 메일 소속으로 1904년과 1906년, 두 차례 조선을 찾았다. 첫 방문은 전쟁 취재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1906년 여름 다시 찾아온 그는 이번엔 아예 조선에 눌러앉다시피 하며 약 1년 반을 머물렀다. 1907년에는 순종의 즉위식 현장을 눈으로 지켜봤고, 같은 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한 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의 활동을 취재하러 다녔다.
경기도 양평 지평면 인근 야산에서는 낡고 녹슨 총을 든 젊은 의병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훗날 그는 이때 만난 의병이"우리는 어차피 죽겠지만, 일본의 노예로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이 장면은 훗날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마지막 회에서 재현될 만큼 깊이 남은 순간이 되었다.
1907년 맥켄지가 촬영해 '대한제국의 비극'에 실린 의병들 사진(위키피디아)
사진 한 장, 책 두 권
맥켄지가 이때 남긴 사진은 오늘날까지 전하는 사실상 유일한 의병 기록사진이다. 제복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청년들이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선 이 사진은, 문서보다 더 강한 방식으로 그날의 진실을 증언한다. 그는 이 경험을 담아 1908년 '대한제국의 비극'이라는 책을 펴냈다. 을사늑약 이후 조선에서 벌어진 일제의 탄압과 의병의 항쟁을 세계에 소개한 최초의 서양어 기록 가운데 하나였다. 이 책에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꾸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재판 기록까지 부록으로 실려 있어,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하나의 고발장에 가까웠다.
1910년부터는 런던 타임스로 자리를 옮겨 1914년까지 일했지만, 조선에 대한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다시 펜을 들었다. 당시 캐나다 출신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1970)의 증언을 바탕으로 제암리 학살의 진상을 세상에 알렸고, 이 기록을 바탕으로 1920년에는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이라는 책을 펴냈다. 같은 해 런던에서는 한국친구회를 조직해"한국의 독립은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에도 이익이 된다"는 신념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항일 언론활동을 벌였던 영국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도 비슷한 시기, 비슷한 신념으로 목숨을 걸었던 서양인 언론인이었다. 맥켄지와 베델처럼 낯선 땅의 약자 편에 서기를 택한 외국인들이 있었기에, 조선의 참상은 완전히 묻히지 않고 세계에 전해질 수 있었다.
한국정부는 2014년 삼일절을 맞아 맥켄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조선 땅에 잠시 머물다 간 외국인 기자 한 사람에게, 백 년도 더 지난 뒤에야 갚은 감사였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위키피디아)
기록하는 자가 지켜야 할 것
맥켄지가 남긴 것은 단순한 특종이 아니다. 그는 힘없는 자의 편에서, 강자의 논리에 휩쓸리지 않고 눈앞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었다. 그는 캐나다 퀘벡 태생이었지만, 당시 캐나다는 영국의 자치령(Dominion)이었고 그 자신도 평생 런던의 신문사에 몸담았다. 그가 소속된 영국 언론사는 하필 일본과 동맹을 맺은 나라였다. 자신이 몸담은 언론사와 국가의 외교적 이해관계와 정반대되는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책의 머리말에서, 힘없는 이웃 나라의 재산과 목숨을 짓밟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제국의 팽창은 인간의 양심에 반한다고 분명히 적었다. 자기가 속한 언론사와 동맹국의 체면보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진실을 앞세운 선택이었다.
지금 한국을 돌아보면 어떨까. 2024년 12월 3일 밤, 국민들은 텔레비전과 휴대전화 화면을 통해 윤석열이 선포한 비상계엄이라는 낯선 단어와 다시 마주해야 했다. 그 순간 시민들의 휴대전화 영상, 기자들의 현장취재, 국회의 담을 넘는 사람들을 찍은 사진 한 장 한 장이 훗날 진실을 증언하는 자료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맥켄지의 사진 한 장이 백년 넘게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이야기되듯, 지금 이 순간의 기록들도 언젠가 역사의 증거로 다시 소환될 것이다.
언론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강자가 아니라 약자의 편에서 사실을 붙잡아 두는 일. 이것이야말로 맥켄지가 백 년 전 조선 땅에서 몸소 보여준 언론의 본분이었다. 지금 한국언론이 되새겨야 할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누가 권력을 쥐었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진실인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 김성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