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010년 1기 조사위 당시 시가 2천373억원 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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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본회의 통과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국가귀속 특별법  [연합]

 

2010년 이후 사라진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16년 만에 올 연말부터 재가동된다.

국가 차원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환수가 다시 본격화할 전망이다.

16일 법조계에 따르면 친일파 재산을 국가에 환수하는 내용을 담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은 오는 12월 3일부터 시행된다.

 

특별법은 2006년 설치된 1기 조사위가 2010년 해산된 이후 새로운 친일 재산을 찾아낼 법적 기구가 없다는 미비점을 보완하고자 마련됐다.

 

특별법은 친일 재산 은닉 시도를 막기 위해 친일파 후손들이 관련 재산을 처분했더라도 그 처분의 대가까지 환수 대상으로 명시한다.

 

친일 재산을 적발해 신고한 사람 등에 대한 포상금 규정을 신설하는 조항도 포함됐다.

 

법무부와 공식 백서 등에 따르면 1기 조사위는 2006년 7월부터 2010년 7월까지 4년간 친일파 168명의 2천359필지에 대해 국가귀속을 결정했다.

 

이미 친일 재산을 제삼자에게 처분한 친일파 후손 24명에 대해서는 친일 재산 확인 결정을 내렸다.

이를 통해 국가가 환수한 재산은 당시 시가 기준 총 2천373억원으로 집계됐다.

 

이후 법무부는 1기 위원회에서 밝혀진 친일 재산에 대한 소송 관련 업무를 수행해 왔다.

작년 10월에는 친일파 이해승 후손이 경기 의정부시 호원동 토지 31필지를 매각해 챙긴 78억원에 대해 부당이득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법무부는 지난 6월 22일 조사위 설립준비단을 발족하고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설립준비단은 법무부를 비롯해 행정안전부, 국가보훈부, 산림청 등 관계 부처 인력 11명으로 꾸려졌다.

 

단장은 이영창 검사(사법연수원 33기)가 맡았다.

이들은 조사위 출범 전까지 관련 법규를 마련하고 조사 계획을 수립하는 등 친일 재산 환수를 위한 기초 역할을 담당할 예정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추후 환수된 친일 재산은 순국선열·애국지사 사업기금에 우선적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  최윤선 기자 >

 

법무부, 친일재산조사위원회 설립준비단 발족 정성호 법무부 장관(왼쪽)이 22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이영창 친일재산조사위원회 설립준비단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기념 촬영하고 있다. 2026.6.22 [법무부 제공]
 
 
 

민문연 "안상호 친일...친일파 기득권 대물림 성찰해야"

이토 히로부미 추모, 대정친목회 가입 등 행적
『친일인명사전』 빠진 건 기준에 못 미쳤기 때문
등재 안 됐다고 친일파 면죄부 주어진 것 아냐
전문직을 모두 배제했다는 주장은 명백한 오해

 

임종국 "친일 행위보다 반성 없는 태도가 문제"
박유하 "친일 강박증과 순결 강박증 빚은 결과"
배기성 "어떻게 '오욕을 끌어안으라' 말하는가"
"조봉암 손가락 잃은 사연 안다면 그럴 수 있나"

 

광복절 81주년을 하루 앞두고 일제강점기 전문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안상호 관련 논란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최근 언론 및 온라인 공간을 통해 배우 하영(본명 안하영)의 증조부 안상호(1874∼1927)의 친일 행적과 후손들의 언행에 대한 논란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는 것이 계기가 됐다.

 

민족연구소는 대체로 사실에 부합하지만 일부 과도한 해석이나 오류가 있어 적지 않은 혼란이 일어나고 『친일인명사전』에 안상호의 이름이 수록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았다면서 안상호의 실제 행적과 역사적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보도자료는 세밀한 내용으로 짜였다.  ▲ 안상호의 주요 친일 행적 ▲ “어떤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고 친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신중론에 대해 ▲ “친일인명사전에서 전문직은 모두 다 뺐다”는 주장에 대해 ▲친일파 명단마다 수록 인원이 다른 이유 ▲ 친일인명사전 미등재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 연좌제적 비난 경계와 구조적 성찰의 필요성 등이다.

 

연구소는 먼저 안상호가 대한제국 관립일어학교와 도쿄 자혜의원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전문직 의사였지만, 화려한 이력 이면에 다음과 같은 친일 · 부일 협력 행적이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라고 정리했다. 

 

● 일제침략의 원흉 이토 추도 : 1909년 11월,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해 민간에서 조직한 ‘국민대추도회(대한국민추도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실제 추도회가 진행되지는 않았으나, 관민추도회와 별도로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식민통치 및 수탈기구 참여 : 경성부윤의 자문기구이자 일제 식민통치를 뒷받침한 지방행정 보조기구인경성부 협의회원(1914, 1918, 1920, 관선 임명직)을 역임했다. 또 식민지 금융수탈기구인 경성 종로금융조합의 조합장(1922∼1927)을 지냈다.

● 내선융화 및 친일단체 활동 : 경성신사의 씨자총대(신도 대표, 1915), 내선융화 단체인 대정친목회(대정실업친목회) 평의원(1916), 반일운동 배척을 표방한 동민회 회원(1924) 및 평의원(1925∼1927)으로 활동했다.

● 동화주의의 내면화: 『매일신보』(1918.12.10.) 기사에서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일본 사람과 똑같다”, “조선 사람과 상관이 없다”라며 밝히는 등 일제의 동화정책을 전면적으로 내면화한 대표적 인물로 소개되었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 '일선동화'의 모범가정으로 소개된 안상호의 가족 사진. 1918년 12월 10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안상호는 "나는 일본 사람과 똑같다. 지금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매운 음식은 조금도 못 먹는다"며 "다섯 자녀들은 일본어만 쓰고 조선말은 전혀 하지 못한다. 조선 사람과는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연합

 

「왕세자전하(王世子殿下) 가례(嘉禮) 전에 일선동체(日鮮同體)의 가정방문(家庭訪問): 전연(全然)히 내지화(內地化)한 의사 안상호씨의 가정」

-> 安商浩씨는 일선동체의 가정을 만드는데도 제일 먼저 성공의 기를 들었다. (중략) 기자는 먼저 살림 재미를 물었다. 안씨는 ‘그렇지요 별수 있나요 나는 무엇[무릇] 일본사람과 똑같지요. 나는 지금 조선옷은 한 벌도 없습니다. 그리고 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어요. 일본사람과 똑같지요. 그러하니까 불편한 점은 조금도 없어요. (중략) 조선 사람과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어요. (중략)’ 안씨는 지금부터 열두해 전에 의친왕이 동경에 계실 때에 의친왕의 시의로 있었는데 그때에 씨의 부인 磯子와 서로 알게되어 기자부인의 모친에게 청혼을 하여 전후 열한해 동안 고락을 같이 하였는데 (중략) 자녀가 모두 5남매이며 (중략) 안씨가 도리어 아내를 따라서 일본사람이 된 셈이다. (중략) ‘나는 조금도 조선사람하고 상관이 없으므로 일본에 사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고 열 한 해 동안을 조선에 있었어도 조선말은 한마디도 못해요’

 

물론, 대정친목회와 동민회에 이름을 올렸다고 친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신중론을 펴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대정친목회는 고문 이완용 · 민영휘, 회장 조중응 등 거물 친일파들을 중심으로 조선인 전직 관료 · 귀족 · 대지주 · 실업가들이 결집하여 ‘내선융화’를 표방하며 결성한 단체다. 

 

조선인의 단체 결성과 결사 활동이 극도로 억압되던 1910년대 무단통치 아래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1930년 전시체제기에 반강제적으로 조직된 전쟁협력단체와는 결성 배경과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당시 조선인 단체로는 종교단체를 제외하면 대정친목회가 거의 유일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친일 엘리트의 모임이었던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유력자와 일제 당국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자임했다. 나아가 3·1운동 전후 일제가 이른바 문화통치(민족분열책)를 획책할 당시, 대정친목회는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민족의 저항 의지를 무력화하는 정신적 · 사회적 협력기구로 기능했다. 이들은 3·1운동을 반대하고 일제 통치에 순응하면서 ‘독립불능론’을 주장하는 한편, 산업의 발달과 문화 향상을 내세우는 개량주의적 ‘실력양성론’을 펼쳤다.

 

안상호는 이 단체의 평의원(1916.11.29)으로 명단이 확인된다고 밝힌 연구소는 시대적 상황과 단체의 성격을 고려할 때, 평의원(일종의 대의원 격)으로 참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친일 행위라고 강조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부 유튜브 방송 등에서 “친일파인명사전 708명에서 전문직(의사, 변호사) 이런 사람들은 다 뺐다”, “시대의 아픔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취지의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전하며 두 가지 명백한 사실관계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2009) 수록 인원은 총 4389명이다. 한 방송에서 언급된 “708명”은 2002년 광복회가 자체 선정한 692명에 국회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의원모임)이 16명을 추가하여 발표했던 ‘친일파 708인 명단’을 혼동한 것이다.

 

둘째, 『친일인명사전』이 전문직을 일괄 배제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해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문화·예술·종교·법조·언론·교육 등 각 분야 친일 인물이 다수 등재되어 있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기준에 따르면, 기술직이나 전문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 수록 대상이 되지는 않지만, 복수의 친일협력단체에 가담했거나 지속적이고 능동적인 부일 행적이 입증된 전문직 인사는 엄격한 심의를 거쳐 사전에 수록하였다. 즉, 핵심 기준은 친일행위의 자발성·반복성·지속성과, 식민통치기구 내 특정 지위(귀족, 중추원, 고등관, 경찰간부, 군장교, 친일단체 간부급) 여부였으며, 전문직 여부는 면책 사유가 될 수 없었다.

 

안상호의 경우, 단순한 의료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경성부 협의회원, 대정친목회 및 동민회 평의원, 경성종로금융조합장 등 식민통치기구와 관변단체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지식인과 전문직 인사들의 친일은 사회적 영향력과 이데올로기 확산 효과가 막대했다는 점에서 결코 그 역사적 책임을 가볍게 볼 수 없다.

 

자연스럽게 친일파 명단마다 수록 인원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그 차이는 기준의 자의적 왜곡 또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 아니라, 조사 주체의 성격, 조사 목적, 법적‧학술적 기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48년 제헌국회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인신 구속과 공민권 제한 등 직접 처벌을 목적으로 출범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조직적 방해와 경찰의 특위 습격으로 조기 와해되었다. 2005년 출범한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는 법적 행정처분이 따르는 국가기구였기 때문에 지위 자체보다는 엄격한 행위 입증에 집중하였고, 입법 당시의 여야간 절충 등 태생적 한계로 인해 규모가 1006명에 머물렀다.

 

반면 민간 학술단체가 주도한 『친일인명사전』은 반민족행위자만이 아니라 부일협력자까지 포함하였으며, 식민통치를 지탱한 고등관료, 고등경찰, 군 장교 등 ‘지위범’을 포함하고 만주 등 해외 지역까지 범위를 확장하였으며, 지식인과 전문직의 역사적 책임을 가장 포괄적이고 엄정하게 물었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안상호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연구소는 강조했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여부는 편찬위원회의 선정 기준과 행위의 자발성, 적극성, 반복성, 지속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뒤 결정했다는 것이다. 2009년 발간 당시 민족문제연구소가 축적한 자료로는 안상호의 친일 행적이 선정 기준에 미달했기 때문에 편찬위원회의 결정으로 수록을 보류하였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해방 60여 년 만에 결실을 맺은 사전 편찬 작업은 당시 축적된 학술 연구 성과와 사료의 한계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인력과 자료 부족으로 인해 판단이 보류된 인물도 다수 존재했다. 『친일인명사전』을 비롯한 과거사 기록 사업은 완료된 결과물이 아니라 사료의 발굴과 검증을 통해 ‘보유편’과 ‘개정증보판’으로 이어지는 현재진행형 학술 사업이다. 새롭게 확인되는 관보, 신문 기사, 단체 명부 등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학술 검증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라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번 논란의 본질에 대해 배우 개인이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조상의 식민지 협력 이력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 성찰 없이 발언하여 대중에게 상처를 준 ‘역사인식과 성찰 부재의 문제’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조상의 과오를 성찰 없이 미화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소비한 태도에 대한 겸허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역사적 과오에 대한 법적·정치적 책임은 행위 당사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원칙이며, 선대의 과오에 대한 단죄를 후손에게 전가하는 연좌제적 발상은 민주 사회에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연구소는 분명히 했다. 그러나 강성현 교수가 지적했듯, “어떤 제도가 그 이력을 씻어주었나… 이 질문들이 ‘연좌는 안 된다’는 한 문장에 막혀버릴 때 가장 크게 손해 보는 쪽은 친일 청산이라는 의제 자체다”라는 경고를 새겨야 한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단순히 ‘후손에 대한 연좌제 금지’라는 방어 논리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 하에서 형성된 전문직 계보와 사회적 자산이 해방 후 청산 없이 어떻게 기득권으로 승계되고 세습되었는지에 대한 구조적 질문과 역사적 성찰로 이어져야 마땅하다는 것이 민족문제연구소가 내린 결론이다.

 

 

앞서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사무처장은 지난 13일 YTN 라디오 '장성철의 뉴스명당'에 전화로 출연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싣는 기준, 검증 문제, 이번 논란의 의미와 파장 등을 짚어봐 눈길을 끌었다.  방 처장은 이번 논란이 불거진 파장의 의미를 묻는 진행자에게 "연초부터 우리는 스타벅스 탱크 데이, 배재고 사태를 겪지 않았나?" 되묻고 "지금도 우리는 그 문제가 비단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지 않나?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하영 씨의 행동이나 태도가 적절치 않았지만, 그러면 과연 우리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 얼마나 성찰하고 지속적으로 보고 있는가. 이렇게 스스로 돌아봐야 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역사를 돌아보는 한 방법으로는 올해 초 네덜란드에서 약 40만 명의 나치 당원 명부가 공개돼 화제가 됐던 일을 떠올렸다. 독일 역시 1000만 명의 나치 당원 명부가 공개됐다. 독일 인구 6명 중의 한 명정도가 나치 당원이었다. 그 명단이 언론사 <디 차이트> 홈페이지에 공개돼 독일 사람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만들어놓았다고 소개했다.

 

아울러 방 처장은 "이렇게 명단을 공개하는 뜻은 '저 집안은 나치 당원 집안이야'라고 지목하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찰하는 계기, '우리 할아버지가 집안에서 인자한 어르신이었는데 역사적으로 이런 악행에 가담했거나 방관했구나' 이렇게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태도로 사건을 들여다봤으면 좋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방 처장은 "평생을 친일파 연구에 바친 임종국 선생께서 살아계셨다면 오늘의 하영 씨 논란에 어떤 말씀을 해주셨을까?" 묻는 진행자에게 "이런 어록을 남기셨다. '친일했던 일제 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반성과 화해,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더 문제다. 이런 문제를 우리가 철저하게 바꾸지 않는다면 민족사의 기강은 헛말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바꾸지 않는다면 민족 사회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런 말씀이 요즘 상황에 적절하지 않나 싶다"고 답했다.

 

아울러 방 처장은 "앞서 모범적인 사례가 있다. 한 여배우(이지아)는 처음에 할아버지가 친일파로 등재돼 있어서 억울해 했지만, 비공식적으로 (연구소를) 찾아와 저희와 함께 그(할아버지의) 행적을 함께 공부를 했다. 그 분은 지금도 계속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상의 행적을 반성하고 있지 않나?"고 되묻고 "연예인은 어쨌든 공인으로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런 공적인 태도가 필요하고, 하영 씨가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성숙하고 훌륭한 배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배우 하영과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넷플릭스와 연합 자료사진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자 '제국의 위안부'로 숱한 비난과 질타를 받았던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까지 나섰다. 박 교수는 11일 밤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당대 최고의 의사" 안상호를 둘러싼 친일 논란을 두고 "친일 강박증과 순결 강박증이 빚은 결과"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안상호에 대해 "조선의 양의 1호이자 대한제국 1호 국비유학생으로, 대한제국이 만든 인재였다"고 소개한 뒤 "귀국 후 순종 주치의가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고 부도 따라왔을 것"이라며 "친일로 쌓은 명예라기보다 스스로의 실력과 국가의 지원으로 의료계 파이오니아(개척자)가 된 이로 보인다"고 적었다. 특히 안상호가 을사오적 이완용을 치료한 이력과 관련해서는 "이완용이 아니라 서민이라도, 가능하다면 당대 최고 의사였던 그에게 치료받고 싶었을 것"이라며 "아픈 사람이라면 실력 있는 의사에게 치료받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한 발 나아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도층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도 "정치·경제·문화·교육 모든 분야에서 리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교육부터 활동까지 구조적으로 친일파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들을 부정한다면 일제시대 내내 인재를 키우지 말았어야 했다"며 그렇게 한다면 조선인 정치가와 기업인, 학교장 등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된다고 지적했다.

 

또 하영을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인 조상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수십만명이 모였다는 지원병 지원자들 가운데 당신의 조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창씨개명을 신청한 조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자신이 이런 발언을 하는 이유를 "규탄부터 하고 보는 당신의 폭력이 한 사람을 사정없이 죽이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순결 강박, 친일 강박증이 이 모든 걸 만든다"며 "치유하려면 오욕을 내 것으로 끌어안는 태도부터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역사 강사 배기성 씨는 13일 유튜브 채널 '최욱의 매불쇼'에 나와 "과거 일본군 병사와 위안부가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고 망언을 늘어놓은 박 교수가 또다시 수많은 일본 식민지배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씨는 특히 "치유하려면 오욕을 내 것으로 끌어안는 태도" 운운한 것은 일제 식민 지배에 희생된 많은 이들을 참담하게 모욕하는 언동이라고 격분했다.

 

재판정의 죽산 조봉암. 그는 늘 의수였던 일곱 손가락을 가리기 위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마치 결박당한 것처럼 보이는 자세로 앉아 있곤 했다. 

 

그는 죽산 조봉암이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재판받을 때 왜 늘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는지 아느냐고 진행자 등에게 묻고는 일곱 손가락을 잃은 사연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만주의 교도소에서 7년 수감돼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첫사랑이었던 아내가 옥바라지를 하다 동사했다는 소식을 전하던 일본인 간수가 '아내가 세상을 떠나게 만들었으니 너 같은 존재는 목숨을 끊는 게 낫지 않느냐'고 모욕하자 흥분해 이로 손가락들을 끊었는데 실제로 끊어졌다는 것이다. 너덜너덜해진 손가락들을 당국이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그 상태로 지내다 감옥을 나와서야 어렵사리 의수를 마련해 손가락들을 감춘 채 살아갔다는 슬픈 얘기를 전했다. 

 

배 강사는 "이런 잔인하게 슬픈 얘기들을 안다면 어떻게 감히 '오욕을 내 것으로 끌어안으라'고 망발을 늘어놓을 수 있느냐"고 따져물었다.

 

당연히 누리꾼들의 박 교수 비판도 이어졌다. 한 누리꾼은 "시대적 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업을 수행한 '구조적 친일'과는 다른 문제"라며 안상호가 당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어를 사용하지 않고 의복과 음식, 생활방식 등을 일본식으로 했다고 자랑한 것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생계형 협력과 자발적 내선일체를 같은 선상에 놓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안상호처럼 최초의 서양의사 가운데 한 명이었던 김필순, 이태준, 박서양 등은 근대 의학을 배운 엘리트였지만 망명과 의료 활동, 독립운동 지원의 길을 선택했다. 따라서 "그 시대에는 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만으로 모든 행적을 덮기는 어렵다는 비판이 나온다.

 

또 다른 누리꾼은 "그럼 독립운동가들은 물욕이나 명예욕이 없어서 목숨 걸고 항일했느냐"며 "시대가 지났다고 친일 매국노들이 이해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지금이라도 청산해야 할 대상"이라고 비판했다.                                                  < 임병선 기자 >

 

 

 

100년 전에는 나라를 지키려 했고,
오늘은 우리말을 지키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면우 곽종석 선생의 후손이
30년 가까이 이어 온 ‘우리말 독립운동’

 

남상락 자수 태극기, 한국독립운동인물사전

 

독립운동가 남상락 선생께서 손수 만드신 자수 태극기가 물결치는 광복절입니다. 올해로 광복 81돌을 맞았습니다. 81년 전 우리는 나라를 되찾았습니다. 나라를 빼앗겼던 겨레가 다시 나라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광복절을 맞을 때마다 저는 한 가지 물음을 던져 보게 됩니다.

 

나라의 '광복'은 이루어졌는데 우리말의 '광복'도 이루어진 것일까요?

 

우리는 오늘도 수많은 어려운 한자말과 외래어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정기관의 문서도, 학교의 배움말도, 언론의 기사도, 새로운 기술의 이름도 많은 사람에게 낯선 말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제는 생성형 인공지능까지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달라진 세상에서 만들어지고 퍼지는 말 가운데 우리말의 자리는 얼마나 든든하게 지켜지고 있을까요?

 

저는 그래서 오래 전부터 ‘우리말 독립’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우리말 독립'은 한자말이나 외래어를 모두 몰아내자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의 말과 문화를 닫아걸자는 것도 아닙니다. '토박이말'을 바탕으로 우리말을 튼튼하게 가꾸고, 필요한 말은 우리 힘으로 살펴 받아들이며, 우리 생각과 삶을 우리말로 당당하게 펼칠 수 있는 언어의 주권을 세우자는 뜻입니다. 저는 그 일을 서른 해 가까이 해 오고 있습니다.

 

면우 곽종석 선생상, 유림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공가의 후손, 교실에서 우리말 독립을 시작했습니다

 

저의 외증조부는 을사늑약 뒤 항일 의병을 일으키고 유림 독립운동인 파리장서 운동을 이끄셨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이십니다. 증조부께서도 일제강점기에 단발령과 창씨개명을 거부하시며 겨레의 자존을 지키며 사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선조들의 이야기는 제게 단순한 집안의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는 이 물음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아왔습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 답을 조금씩 찾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어려워하는 까닭이 정말 아이들의 능력이 부족해서일까요? 혹시 교과서에 나오는 낯선 말 때문에 배우기도 전에 겁을 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교실에서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말을 옛날 교과서에서 썼던 쉬운 우리말로 풀어 주었습니다.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맞모금', '약분' 같은 낱말을 아이들이 그 말의 뜻과 생김새를 바로 떠올릴 수 있도록 '포유류'는 '젖을 빨리니' '젖빨이짐승', '양서류'는 '물에도 살고 뭍에도 사니' '물뭍짐승', '파충류'는 '기어 다니니' '길짐승', '대각선'은 '마주보는 금끼리 이은 금이니' '맞모금', '약분'은 '분모와 분자를 똑같이 줄이니' '맞줄임'과 같이 풀어 설명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말을 쉽게 바꾸었더니 생각이 살아났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우리말을 살리는 일은 말만 살리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을 살리는 일이기도 하구나. 그것이 제가 평생 해 온 우리말 운동의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문해력 위기는 어려운 한자말이나 외래어를 몰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쉬운 토박이말을 바탕으로 생각의 뼈대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제 굳은 믿음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30년을 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저는 서른 해 가까이 학교 안팎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토박이말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수업도 하고 강연도 하고 글도 써 왔습니다. 언론과 방송을 통해 우리말의 가치를 알렸고, 시민들과 함께 토박이말을 배우고 나누는 일도 이어 왔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의 책임자들, 국회의원과 지방의원, 도지사와 시장, 교육감, 정치인과 유명 방송인들에게도 수없이 제안하고 도움을 부탁드렸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많지 않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체감할 만큼의 응답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뜻을 같이해 주시는 교사와 학부모, 시민의 수도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임인 (사)토박이말바라기의 참모람(정회원) 수를 보면 그런 현실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때로는 가까운 분들에게서 이런 말도 들었습니다.

“남들처럼 승진 점수나 챙겨 교감·교장이나 되지, 왜 돈도 안 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데없는 일에 돈과 시간과 힘을 낭비하느냐?,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그림8)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정위원들이 현충사를 방문하고 찍은 기념 사진이다. 표준어사정위원회에는 서울 출신 26명, 경기 11명, 각 도 대표 36명 등 73명의 위원이 참여해 표준어의 어휘를 사정(司正)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가운데 검은 안경테 안경을 쓴 이가 민세 안재홍이다. 출처: 한글학회

 

영화 《말모이》에서 주인공 아버지가 주인공을 보고 "조선이 독립될 것 같으냐? 조선이란 나라가 없어진 지 삼십 년이다, 삼십 년! 삼십 년을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라는 대사가 떠올랐고 영화 속 인물들이 품었던 ‘이 일이 정말 가능하겠느냐’는 의심이 오늘날 제 주변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0년 가까이 했는데도 세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것일까요? 저는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30년을 했는데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둘 이유가 아니라, 아직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한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제가 혼자 바라는 것만으로는 우리말의 큰 흐름을 바꾸기 어렵습니다. 정치인과 학자, 교육자와 시민 가운데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많아도 이루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모습은 때로 캄캄한 어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또 한 걸음을 내딛고자 합니다.

 

독립운동에도 이름 없이 함께하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 독립운동가들 곁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분들이 계셨습니다. 자신의 형편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독립운동 자금을 보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내놓고, 독립운동가들을 도와주셨습니다.

 

토박이말바라기 누리집

 

우리말 운동에도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토박이말바라기에는 해마다 회비를 꼬박꼬박 내주시는 참모람(정회원)도 계시고 일이 있을 때 마다 돈 또는 물품으로 우리말 독립운동을 이어 갈 힘을 보태 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도 않고 특별한 보상을 받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도움에 보답하는 길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차가운 외면 속에서도 우리말의 가치를 믿고 손을 잡아주시는 그분들의 마음에 보답하는 길은, 어떤 비바람이 불어도 뜻을 굽히지 않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임을 굳게 믿기 때문에 이 길을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자연 환경운동'이 이룬 기적처럼, '말 환경운동'의 새길을 열어야 합니다

 

저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을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종 큰 임금님처럼 백성의 말을 살피고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지도자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힘들게 이룬 부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내놓으셨던 분들처럼 우리말의 앞날을 위해 마음과 재산을 내놓으시는 훌륭한 기업인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젠가는 많은 국민께서 이 일의 가치를 알아주시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 가능성을 환경운동에서 보고 있습니다.

 

환경운동이 그랬듯, 우리말 운동도 언젠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환경을 지키자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합니다. 쓰레기를 줄이고, 물과 공기를 지키고, 생태계를 보전해야 한다는 데 많은 국민께서 공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수십 년 전 환경운동이 처음 태동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먹고살기 바빠 죽겠는데 무슨 환경 타령이냐", "당장 공장 돌려 돈 버는 게 급하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밥 먹여 주느냐"며 차갑게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일찍부터 환경의 소중함을 깨달은 분들이 계셨고, 그분들과 뜻을 같이하는 시민들이 하나둘 모였습니다. 학교에서는 환경교육이 이루어졌고, 법과 제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신문과 방송은 끊임없이 환경 문제를 알렸습니다. 기업도 환경을 중요한 과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환경운동은 우리 사회의 큰 흐름이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말 운동도 그렇게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말을 좀 편하게 쓰면 어떠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우리가 생각하고 배우고 서로의 느낌과 생각을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환경입니다. 자연환경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 애쓰듯이, 언어환경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우리말 환경 지킴이’로 키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저는 교육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토박이말을 배우고 익혀 마음껏 부려 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토박이말을 옛날에 쓰던 낡은 말로 여기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쓸 수 있고, 새로운 생각을 담아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살아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토박이말을 잘 알고 부려 쓸 수 있게 된다면 그 아이들은 미래의 ‘우리말 환경 지킴이', '우리말 환경 운동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쓸모를 알고, 어려운 말을 만나면 왜 어려운지 묻고, 더 알맞고 쉬운 말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문해력의 한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해력은 어려운 낱말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을 듣고 읽어 뜻을 제대로 헤아리고, 자기 생각을 알맞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힘입니다.

 

앞으로 개정할 교육과정에는 누리과정부터 고등학교까지 넉넉하면서도 촘촘하게 토박이말을 어릴 때부터 즐겁게 배워 익혀 부려 쓸 수 있도록 성취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말의 바탕을 알고, 우리말로 생각하고, 우리말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우리말 도로 찾기-국립중앙박물관

 

글자는 지켜 왔지만, 말은 충분히 지키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되찾은 뒤 우리는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을 비롯해 우리 말과 글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우리 글자를 갖고 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글자는 말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릇을 잘 지키는 일만큼 그 안에 담긴 말의 삶을 돌보는 일도 중요합니다.

 

저는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말의 광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우리말의 민주화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행정과 교육과 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여러 정책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겨레가 오랜 세월 이어 온 고유한 말, 토박이말을 가꾸고 살리는 정책은 어디에 있을까요?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정책과 운동이 있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언어환경을 건강하게 가꾸기 위한 사회적 노력은 충분할까요?

 

인공지능(AI) PG. 연합

 

이제는 이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습니다.

 

지은슬기(인공지능, AI) 시대, 우리말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무엇보다 지은슬기(인공지능, AI) 시대에는 이 문제가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아이들은 사람뿐 아니라 지은슬기(인공지능, AI)와도 말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은슬기(인공지능, AI)가 우리말의 뜻과 결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의 토박이말을 얼마나 풍부하게 알고 있는지도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저는 토박이말 자료와 옛말 자료를 살펴 지은슬기(인공지능, AI) 시대에 우리말의 바탕을 어떻게 넓혀 갈 수 있을지 연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낯선 외국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우리말로 그 뜻을 헤아리고 알맞은 이름을 찾아보는 일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은슬기(인공지능, AI)가 우리말을 가르치는 시대가 아니라, 우리도 지은슬기(인공지능, AI)에게 우리말의 깊이와 결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새로운 언어 주권입니다.

 

광복 81돌, 이제는 함께 걸을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저는 지난 서른 해 가까이 혼자 앞장서 온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혼자는 아니었습니다. 학교와 강연장에서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신 분들이 계셨고, 글을 읽어 주신 독자들이 계셨습니다. 토박이말을 함께 배우고 쓰자며 손을 내밀어 주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무엇보다 말 없이 회비를 내며 토박이말바라기를 지켜 주신 참모람들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이 계셨기에 저는 지금도 이 길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광복 81돌을 맞아 다시 한 번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나라를 되찾은 지 81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말의 광복도 함께 생각해 주십시오.

 

정치인들께는 토박이말 정책을 고민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교육자들께는 아이들의 배움 속에 토박이말의 자리를 넓혀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학자들께는 우리 토박이말의 가치를 더 깊이 연구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언론과 방송인들께는 쉬운 우리말을 쓰는 일이 얼마나 큰 사회적 힘을 갖는지 보여 주고 쉬운 토박이말을 바탕으로 한 말글 나눔을 일상화 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기업인들께는 돈이 되는 일만큼 다음 세대의 말과 문화를 위한 일도 가치 있다는 것을 살펴 달라고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는 하루에 한마디라도 토박이말을 더 살펴 써 보자고 부탁드립니다.

무엇보다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서로 만나 힘과 슬기를 모을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말을 사랑하는 일이 한 사람이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모이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광복은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나라를 되찾은 뒤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가꾸며 살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100년 전 독립운동가들께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내놓으셨다면, 오늘 우리는 다음 세대가 살아갈 말의 터전을 가꾸어야 합니다.

 

​방탄소년단(BTS)의 월드투어 '아리랑' 지난 11일과 12일 독일 뮌헨 공연 모습 @빅히트뮤직 X(트위터)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문화에 열광하는 오늘, 그 문화의 가장 깊은 곳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써 온 말이 있습니다. 노래도, 드라마도, 영화도, 음식도, 이야기도 결국 말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 고유의 말인 토박이말을 문화의 바탕으로 다시 바라볼 때입니다. 먹고사는 일도 중요합니다. 돈을 버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음 세대가 어떤 말을 배우고, 어떤 말로 서로 생각을 나누며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을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우리 고유의 글자인 '한글'을 지키는 일만큼이나, 그 글자에 담기는 알맹이인 우리의 고유한 말인 '토박이말'을 지키는 일에 국가적 힘을 쏟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말을 쓰느냐가 내일 아이들이 살아갈 언어의 풍경을 만듭니다.

 

광복절에 태극기를 다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우리 토박이말 한마디를 더 살펴 써 보시면 어떨까요? 그리고 저와 같은 뜻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이제는 혼자 걷지 말고 함께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서른 해 가까이 걸어왔습니다. 아직 세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이 길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100년 전에는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고, 오늘은 우리말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을 함께 걸을 한 분 한 분을, 저는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 이창수 기자 >

 

이승만이 지워버릴 뻔한 귀한 한글 이름 ‘서울’

 

한성→ 경성→ 서울, 이름 변천사에 아롱진 사연들

조선 때부터 백성들은 한성 보다 서울 더 즐겨 써
80년 전 서울시 헌장, 미군정 법령으로 서울 확정
미국 유학파 김형민 초대 서울시장이 강력 주장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자유시→ 서울특별시
이승만 호 딴 우남시로 바꾸려다 반발 크자 철회
중국어 표기는 수교 이후 ‘汉城’에서 ‘首尔’로 변경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경성부(京城府)를 서울시라 칭하고 차(此)를 특별자유시로 함. 서울시의 관할 구역은 현 중구, 종로구, 동대문구, 성동구, 서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영등포구로 하되 금후 법률에 의하야 차를 변경함을 득(得)함.”

 

1946년 8월 10일 미군정장관 아처 린 러치 소장이 공표한 서울시 헌장의 제1조 조문이다. 미국의 도시자치 헌장을 본떠 만든 7장 58조의 서울시 헌장은 경성(京城)이란 수도 명칭을 서울로 바꾸고 경기도에서 분리해 도(道) 수준으로 승격시킨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는 그해 9월 18일 공표되고 10일 뒤부터 시행된 미군정 법령 제106호에 의해 확정됐다. 서울특별자유시가 서울특별시가 된 것은 지방자치법이 발효된 1949년 8월 15일이었다.

 

1946년 8월 10일 미군정청 관보에 실린 서울시 헌장 한글 공포문 표지(왼쪽)와 영문 공포문 본문 첫 장(오른쪽), (서울시)

 

서라벌 소부리 쇠벌… ‘서울’의 어원은 무엇일까

 

서울이란 이름이 공식화된 지 올해로 80주년을 맞았다. 훨씬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서울이라고 불렀으나 법령으로 정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어서 그때부터는 글로도 모두 서울이라고 썼다. 마을이나 도로에 한글 지명을 쓰는 경우는 있지만 도시명을 우리말로 지은 것은 서울이 유일하다.

 

사전적으로 ‘서울’은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첫 번째는 보통명사로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곳’이고, 두 번째는 고유명사로 ‘한강 하류에 위치한 면적 605㎢의 도시’를 가리킨다.

 

서울의 어원은 신라 수도 서라벌(徐羅伐·경주)에서 비롯됐다는 학설이 다수다. 소수설은 백제 수도 사비(泗沘·부여)를 일컫는 소부리(所夫里·소벌)나 후고구려(태봉) 수도 철원(鐵原)의 우리말 쇠벌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도성의 범위를 놓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논쟁을 벌이다가 눈 녹은 자리를 경계로 삼았다는 일화를 들어 ‘눈울타리’를 뜻하는 ‘설(눈)울’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일찍이 백제가 서울의 한강 남쪽에 위례성(慰禮城)을 쌓고 도읍을 삼았다가 고구려가 점령해 남평양성(南平壤城), 혹은 북한산군(北漢山郡)으로 불렀다. 통일신라 때는 한산주(漢山州)에 속한 한양군(漢陽郡)이었다. 고려에 들어와 양주(楊州)로 바뀐 뒤 문종 때인 1067년 남경(南京)으로 승격했다. 숙종은 비기(秘記) 예언에 따라 1104년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궁궐을 짓고 천도를 추진하기도 했다.

 

260년 전 서울 경계는 중랑천(동), 불광천(서), 한강(남), 북한산(북)

 

조선 태조 이성계는 개국 2년 만인 1394년 한양으로 천도했으니 올해로 정도(定都) 632주년이다. 왕자의 난을 거치며 1399년 정종이 개경으로 환도했으나 1405년 태종이 다시 옮겨오면서 지금까지 수도의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자 2004년 헌법재판소는 관습헌법을 내세워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인왕산의 서울 성곽. 조선 태조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뒤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따라 도성을 쌓았으나 한성부 권역은 성밖 10리까지였다. (이희용 촬영)

 

한양 도성(한성)은 내사산(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 마루금을 따라 쌓았지만 한성부 구역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해서 도성 밖 10리까지였다. 지형에 따라 경계가 일정하지는 않아 동북쪽에는 ‘5리를 더했다’는 가오리(加五里)란 지명도 있다. 일설에는 미아리고개에서 장사 지내는 곡소리가 임금에게 들리지 않도록 5리를 더 가라고 했다고 한다. 1765년(영조 41년) 간행된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 따르면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불광천, 남쪽은 한강, 북쪽은 북한산까지를 경계로 삼고 벌채나 매장 등을 금했다.

 

1820년경 한양 도성과 주변의 모습을 그린 실측 지도 수선전도(首善全圖).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벼슬 이름은 판한성부사와 한성부윤을 거쳐 예종 때 한성판윤으로 개칭했다. 품계는 판서와 같은 정2품이었다. 조선 왕조 512년 동안 한성판윤이 2012대를 내려왔으니 평균 재임 기간은 3개월에 불과했다. 특히 고종 재위 43년간은 429명이나 됐다.

 

한성부 청사는 이조와 호조 사이 지금의 KT 광화문빌딩 자리에 있었다. 행정구역은 5부(部) 52방(坊)으로 구분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양주군 고양주면 일부(중곡동 일대)와 고양군 하도면 일부(수색 일대)가 각각 한성부 두모방과 연희방에 편입되고 5부가 5서(署)로 개편됐다.

 

1904년의 한성부 관아 정문. KT 광화문빌딩 자리에 있던 한성부는 조선 말기 들어 여러 군데를 전전했다. (서울역사박물관)

 

19세기 독립신문도 발행처를 서울로 표기

 

일반 백성은 공식 명칭인 한성보다 서울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덕무의 『앙엽기』,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는 각각 ‘徐蔚(서울)’, ‘徐兀(서올)’, ‘徐鬱(서울)’로 표기했다. 서양인들도 서울로 불러 나라 밖에 그렇게 알려졌다.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은 국문판과 영문판에서 발행처를 각각 ‘조선 서울’과 ‘Seoul Korea’로 표기했다.

 

1896년 8월 27일 자 독립신문(62호) 한글판(위)과 영문판(아래). 발행처를 각각 ‘조선 서울’과 ‘Seoul Korea’로 표기했다. (독립기념관)

 

일제는 1910년 8월 27일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뒤 10월 1일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개칭하고 경기도 소속으로 격하시켰다. 성저십리 가운데 대부분을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시키고 일본인 거류지가 있는 용산 일대와 동대문·서대문·서소문 밖 일부만 경성부에 남겨놓았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5서는 5부로 환원되고 각 방은 동(洞)과 면(面)으로 바뀌었다. 일부 지역에는 통(通), 정(町), 정목(丁目) 등의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을 도입했다.

 

1936년 조선총독부가 대경성계획을 추진하면서 북쪽은 정릉천,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홍제천, 남쪽은 안양천과 대방천까지 경계가 늘어났다. 한강 이남의 영등포도 비로소 서울로 편입됐다. 1943년에는 구제(區制)를 실시해 7개구로 나누고 이듬해 마포구를 신설했다. 경성부 기관장은 초창기에 사무관급이었다가 1933년 이후 장관급으로 격상됐다. 18명 모두 일본인이었고 평균 재임 기간은 23개월이었다.

 

1930년대 경성(서울) 중심부 모습. 왼쪽의 경성부청(서울시청)에서 세종대로가 뻗어 있고 오른쪽 위에 지금은 철거되어 없는 조선총독부가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을지로 충무로 등 이름 붙인 2대 경성부윤 김형민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이뤄지자 금산 군수와 전남도청 관리를 역임한 김창영이 쓰지 게이고 경성부윤으로부터 업무를 인계받았다. 9월 9일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업무가 이원화됐다. 군정부윤은 제임스 킬러프 소령에 이어 제임스 윌슨 중령, 민정부윤은 총독부 관리 출신 이범승에 이어 김형민이 각각 맡았다. 각각 1대와 2대로 치지만 김창영을 초대 경성부윤으로 보기도 한다.

 

김창영과 이범승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수록된 인물인 반면 김형민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다.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와 미시간대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할 때 친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됐다. 해방 직후 3·1석유상사를 운영하다가 웨슬리언대 인맥으로 주한미군 사령관 존 하지 중장에게 발탁돼 경성부윤이 된 데 이어 1946년 9월 28일 서울특별자유시 초대 시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나이 39세로 최연소 기록이다.

 

광복 후 2대 경성부윤이자 초대 서울시장인 김형민. 최연소 서울시장인 그는 일본식 지명을 우리 식으로 바꾸고 서울시 이름을 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독립기념관)

 

김형민은 1946년 6월 30일 부임하면서 일제 잔재인 정, 통, 정목을 각각 동, 로(路), 가(街)로 바꾸면서 한국사의 위인 이름을 붙였다. 황금정통(黃金町通·고가네마치도리)은 을지로, 본정통(本町通·혼마치도리)은 충무로, 죽첨정(竹添町·다케조에초)은 충정로, 원정(元町·모토마치)은 원효로가 됐다.

 

미군정이 서울이란 이름을 정할 때도 김형민이 강력하게 서울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도 식자들은 한성 등 한자식 옛 명칭을 선호했다. 각계 인사 90명으로 구성된 경성부 고문회의는 “한성시라고 쓰고 서울시라고 읽는다”는 어정쩡한 결론을 냈다. 그러나 미군은 영문 표기 ‘Seoul’과 일치하는 서울을 선호해 미국 유학파인 김형민과 의견이 일치했다.

 

김형민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로도 넉 달 더 시장에 재직하다가 윤보선에게 물려줬다. 3·1석유상사로 돈을 벌어 대한극장도 세웠으나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낸 국쾌남에게 넘겼다. 1998년 5월 2일 별세해 고향인 전북 익산에 묻혔다가 2003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됐다.

 

미군정청 주요 인사들. 왼쪽부터 민정장관 안재홍, 사령관 존 하지 중장, 부사령관 앨버트 브라운 소장, 김형민 서울시장, 고문 서재필. (국가기록원)

 

서울시 명칭까지 우남 이승만에게 바치려던 아첨꾼들

 

서울이란 명칭은 법제화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아 도마에 올랐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5년 9월 18일 개정을 제안하는 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서울이 수도를 일컫는 보통명사이지 땅 이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성 이름을 묻는 프랑스 선교사의 질문에 사람들이 서울이라고 답하자 프랑스 사람이 소리낼 수 있는 음을 취해 쓴 것이 외국에 잘못 알려졌으니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뜨거운 논쟁이 펼쳐졌다. 이승만에게 아부하려는 권력 추종자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당대의 지식인들도 가세했다. 한글 전용론자인 최현배는 ‘큰 벌판’을 뜻하는 ‘한벌’을 제안했다. 국무위원과 정부위원 등으로 수도명칭제정연구위원회가 발족했고 서울시도 수도명칭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여론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이승만 호인 우남(雩南)이 1423표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한양 1117표, 한경(韓京) 631표, 한성 353표였다.

 

당시는 파고다공원(탑골공원)과 남산공원 등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지고 남산 정상의 팔각정과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건설 중이던 시민회관을 각각 우남정과 우남회관으로 명명하는 등 이승만 우상화가 한창일 때였다. 이승만시라고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1950년대 후반에 촬영한 서울 남산 정상의 팔각정. 우남정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수도 이름을 살아 있는 집권자의 호로 바꾸려는 시도는 거센 반발을 불렀다. 결국 이승만은 1957년 1월 20일 한도(韓都)가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하며 “내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서울의 이름을 우남특별시로 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여러 사람이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렇게 될 것(우남시로 바뀔 것)이니 그냥 둬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내가 강권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4·19혁명이 일어나 없던 일이 됐다.

 

서울대 총장 모시려다 한성대 총장 잘못 초청

 

80년 전 서울이란 명칭이 확정됐어도 한자 문화권에서는 한동안 옛 명칭대로 불렀다. 그래도 일본은 일찍부터 가타가나를 써서 ‘게이조(京城)’ 대신 ‘ソウル(소우루)’로 바꿔 부르고 있는 반면 중국은 늦게까지 ‘한청(汉城·漢城)’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서울과 한성을 다른 도시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한성상회와 서울상회를 구분하지 못하고 서울신문과 서울방송을 한성신문과 한성방송이라고 불렀다. 서울대 총장을 초청하려다가 한성대 총장에게 초대장이 잘못 가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인왕산 범바위에서 남산 쪽으로 내려다본 서울시 야경. 서울시는 세계인들이 가장 방문하고 싶은 도시의 하나가 됐다. (이희용 촬영)

 

정부는 1992년 한중 수교 직후부터 개선 방안을 마련하려고 했으나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나와 좀처럼 결론을 내지 못했다. 2005년 1월에야 중국식 발음으로 ‘서우얼(Shouer)’인 ‘수이(首尔·首爾)’로 확정하고 중국과 대만 정부에 협조를 요청했다. 관공서나 공항 등을 시작으로 바꿔나가고 있지만 아직도 기존 명칭대로 부르는 사례가 간혹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지형 특성을 반영하고 주요 관광명소를 시각화한 서울 일러스트 관광지도. (서울관광재단)

 

서울은 80년 전 이름이 법제화됐을 때보다 면적은 4배 이상, 인구는 10배 이상 늘어났다. 특히 1970년대 영동 지구 개발이 서울의 팽창을 가속화했다.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이란 의미였으나 1975년 성동구에서 떨어져나올 때 강남구로 명명되면서 차츰 사라지고 영동대교, 영동대로, 영동시장, 영동고등학교 등 일부에만 지명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서울의 구가 25개에 이른다.

 

서울의 발전은 외형적 성장에만 그치지 않았다. 1988년 올림픽 개최 이후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가 됐고 경제 성장, 민주 혁명, 한류 등으로 세계인이 가장 방문하고 싶어하는 도시의 하나가 됐다. 만일 그 이름이 서울이 아니라 우남이었어도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누릴 수 있었을까?                                                                                                < 이희용 기자 >

 

남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본 서울시 전경. 고층빌딩이 빼곡한 가운데 왼쪽부터 인왕산, 북악산, 낙산이 감싸고 있고 뒤로 북한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이희용 촬영)
 
 

 

 

 

광복절 경축사서 "당사자 논의 시작하자"
"적대행위 중지 넘어 평화공존 체제로"
"북핵 고도화 멈출 실효적 방안도 논의"
일본엔 "신뢰는 아픔 이해·공감서 나와"

 

"친일재산 환수해 독립유공자 예우·지원"
"한국 한 단계 도약할 새로운 광복 필요"
"희망·기회·균형·평화의 광복 이뤄낼 것"
"증오, 배척, 갈등이 국가 전진 막아선 안돼"

 

이재명 대통령이 1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8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2026.8.15. 연합

 

이재명 대통령은 광복절인 15일 "대한민국의 번영은 결코 경제성장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세계질서가 뒷받침돼야 한다"며, 한반도 '평화공존'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북한을 향해 "오래된 전쟁을 끝내기 위한 당사자들 간의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 체제 존중과 흡수통일 불추구, 적대행위 중단이라는 대북 원칙을 천명한 데 이어 올해는 '평화 공존'이라는 실천적 구상을 내놓은 것이다.

 

적대중지 넘어 평화공존 청사진 제시
"오랜 전쟁 끝낼 당사자간 논의하자"

 

이 대통령은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81주년 광복절 경축식 경축사에서 "대체 불가 대한민국의 비전에는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에 공헌하고자 했던 독립투사들의 꿈과 오늘날 대한국민들의 의지가 함께 담겨 있다"며 "(독립투사들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냉혹한 국제질서가 나라를 집어삼켰던 그 순간에도, 모든 국가들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평화와 공존의 미래를 꿈꿨다"고 말했다.

 

이어 "그 절박한 소망 위에서, 오늘의 우리 대한민국은 전 세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나라,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매력적인 나라로 거듭나고 있다"면서도 "대한민국의 번영은 결코 경제성장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세계질서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지난해 저는 이 자리에서 북의 체제를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구하지 않으며, 일체의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1년이 지난 오늘, 원칙을 넘어 실천으로 나아가기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고자 한다"며 '포용적 평화 공존' '안정적 평화 공존' '책임 있는 평화 공존' 등 세 가지 원칙을 천명했다.

 

이 대통령은 첫째로 '서로를 존중하는 포용적 평화 공존'을 제시하며 "남과 북이 서로를 존중하고 불필요한 대결을 멈춰야 한다. 서로가 인식과 규범, 제도에서부터 적대성을 하나씩 줄여 나가야 한다"고 했다. 이어 "남북이 평화 공존과 공동 성장을 위해, 함께 마주 앉길 바란다"며 "이는 양보가 아닌 공존의 출발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둘째로 '싸울 필요가 없는 안정적 평화 공존'을 제안하며 "긴장과 갈등을 통제할 제도, 위기와 확전 방지를 위한 여러 겹의 안전장치를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이 대통령은 "한반도 주변의 안보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며 선제적이고 지속적인 평화 조치를 취해 나가겠다"면서 "북측의 호응을 이끌어, 안정적인 한반도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의 한 걸음이 접경지역의 군사적 긴장을 낮추고, 신뢰 구축의 마중물이자 안정적 한반도의 토대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셋째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책임 있는 평화 공존'을 제시하며 "한반도의 평화는 곧 동북아의 안정과 협력을 촉진하고, 핵 없는 세계를 향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면서 "분쟁으로 고통받는 세계에 희망과 가능성을 선사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전쟁을 종식하고,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바꾸는 여정에 나설 것"이라며, 북한을 향해 "서로에 대한 상호 위협 의사를 내려놓고, 아주 오래된 전쟁을 끝내기 위한 당사자들 간의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이를 통해 북의 핵 능력 고도화를 멈출 실효적 방안도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적대와 대결에 갇힌 대한민국의 모습은 우리 국민의 잠재력과 역동성을 실현하기에 걸맞지 않다"며 "적대와 대결의 에너지를 평화 공존과 공동 번영의 동력으로 바꿔내겠다. 페이스메이커이자 한반도 평화의 당사자로서,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1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8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2026.8.15. 연합

 

일본엔 "신뢰는 아픔 이해·공감서 나와"
"친일재산 환수해 독립유공자 예우·지원"

 

이 대통령은 일본을 향해선 "지난 1년 동안 한일 양국은 활발한 셔틀 외교를 이어가며 신뢰의 기반을 다져왔다. 공급망과 에너지, 첨단산업 분야의 협력을 넓혀왔고, 미래세대 간 교류의 기반도 꾸준히 확대돼 왔다"고 평가하면서도, "그동안의 성과가 흔들림 없이 이어지려면 무엇보다, 두 나라 국민 간의 굳건한 신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신뢰란 상대의 아픔을 이해하고, 서로에게 공감하는 진정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며 "오늘까지도 과거의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이 계신다"고 했다.

 

이어 "한일관계의 역사에는 갈등도 있었지만,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처럼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와 진정성을 토대로, 미래를 함께 열고자 했던 노력들도 있었다"면서 "한일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지금, 우리가 만들어 갈 새로운 한일관계의 빛은 역사의 그늘 속에서 여전히 아픔을 감내하고 계신 분들께  따뜻한 온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립유공자 예우와 관련해선 "생존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들을 더 각별하게 예우하고, 미서훈 독립운동가에 대한 발굴과 포상을 확대해 나가겠다"면서 "독립운동의 가치가 우리의 일상에 더 깊이 뿌리 내리도록 국내외에 독립운동 기념 시설을 적극 조성하고, 자랑스러운 역사의 발자취를 반드시 미래세대에 더 널리 전하겠다"고 했다.

 

아울러 "지난 6월 2일 '친일재산귀속법'이 공포된 만큼,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이 부당 축적한 재산을 조사·환수하여 역사에 대한 확실한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며 "국가에 귀속된 친일 재산을 더욱 책임 있게 관리해, 그 재원이 독립유공자와 유가족에 대한 예우와 지원에 온전히 쓰일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말했다.

 

"한국, 한 단계 도약할 새로운 광복 필요"
"희망·기회·균형·평화의 광복 이뤄낼 것"

 

이 대통령은 이날 광복절 경축사의 상당 부분을 '대체 불가 대한민국' 구상과 미래를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이 대통령은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어떤 빛으로 미래를 비출 것인가. 그 굴곡진 현대사가 오늘의 우리에게 묻고 있다"면서, "광복의 빛, 산업화의 빛, 민주화의 빛을 밝혀 온 우리에게 대한민국을 한 단계 도약시킬 새로운 광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대한민국은 높은 파고에 휩쓸려 난파될 것인지, 아니면 무한한 기회를 누리는 선도자로 도약할 것인지, 절체절명의 분수령 위에 서 있다"며 "문명사적 대전환과 국제질서의 대격변 앞에서, 우리는 불가능을 헤아리는 대신 가능성을 창조해야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세계가 꼭 필요로 하는 나라, 모든 나라가 협력하고 싶은 나라, 어떤 나라도 대신할 수 없는 대체 불가 대한민국을 향해 우리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1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8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2026.8.15. 연합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자원과 역량을 완전히 재배치하고, 대한민국의 성장 지도를 다시 그려내, 우리의 마음속 희미해졌던 꿈과 희망을 반드시 되살려내겠다"면서 "대한민국의 성장 거점을 전 국토로 확장해 나가며, 누구든 어디서나 꿈을 펼칠 수 있는, 그런 희망 있는 나라를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미래에 대한 적극적 투자로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높이고, 그 결실을 전국의 모든 국민들께 고루 돌려드리겠다"면서 "특히,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들이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언제나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생애주기 전반을 아우르는 두터운 기회의 사다리를 만들어내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참으로 어렵고 또 어려운 일임을 너무 잘 안다. 그러나 위대한 대한국민들이 그간 이겨낸 수많은 위기들을 떠올리면,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이루지 못할 이유가 없다"면서 "치열했던 과거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으켰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 국민들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확실하게 열어낼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이 대통령 "우리 안의 장벽부터 허물어 가야,
증오, 배척, 갈등이 국가 전진 막아선 안돼"

 

연설 말미에서도 이 대통령은 "대체 불가 대한민국이라는 비전은 화려한 구호도, 먼 훗날 이뤄야 할 희망 사항도 아니다. 엄중한 현실을 함께 이겨내고 모두의 성장을 이루겠다는 절박한 약속"이라며, 이를 위한 '국민 통합'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 안의 장벽부터 허물어 가야 한다. 차이가 적대가 돼선 안 되고, 증오와 배척, 갈등이 국가의 전진을 가로막게 해서도 안 된다"면서 "세계 경제의 지형이 뒤바뀌는 국가대항전 앞에서, 국민과 정부, 중앙과 지방, 기업과 노동자 모두가 원팀"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성장의 좌절과 미래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희망의 광복, 불균형과 불평등의 격차를 넘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기회의 광복, 온 국토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피어나는 균형의 광복, 전쟁과 대결의 위협을 완전히 걷어내는 평화의 광복을 이뤄내겠다"면서 "대한민국의 도약이 전 세계의 번영으로 이어지고, 우리의 문화가 전 세계를 연결하며, 한반도의 평화가 전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는, 대체 불가 대한민국의 광복을 이뤄내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 김성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