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측 종전 MOU 발효 9일만에 무력충돌…미·이란, 상대 향해 "합의 어겼다"

미-이란 모두 합의 깨는 데는 신중할 이유 존재…돌발상황 따른 확전 우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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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수도 테헤란의 반미 광고판 =지난 1월 31일(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의 거대한 반미 광고판 근처를 한 여성이 지나가고 있다. [EPA=연합]

 

미국과 이란이 종전을 위한 양해각서(MOU)에 정식 서명한 지 9일 만인 26일(현지시간) 다시 무력충돌했다.

 

미국과 이란이 MOU 체결 이후 후속 협상을 이어가던 상황에서 양측이 다시 화력을 주고받음에 따라 종전 합의가 고비를 맞게 된 모습이다.

 

중동 지역 미군을 관할하는 중부사령부는 이날 엑스(X·옛 트위터)에 올린 성명에서 "중부사령부 소속 부대는 26일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던 상선에 대한 어제(25일) 공격에 대한 강력한 대응 조치로서 이란을 상대로 공습을 실시했다"고 밝혔다.

 

미군 항공기들은 이날 이란의 미사일 및 드론 저장 시설들과 해안 레이더 기지를 타격했다고 중부사령부는 설명했다.

 

미군이 이번 공격의 명분으로 삼은 이란의 25일 공격은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시도하던 싱가포르 선적 컨테이너선 '에버 러블리'에 대한 드론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부사령부는 "상선에 대한 이란군의 부당한 공격은 명백히 휴전을 위반한 것"이라며 "나아가 이란의 위험한 행동은 이 중요한 국제 무역 통로를 지나는 상업 물동량이 점점 더 많아지는 상황에서 항행의 자유를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중부사령부 전력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상선들에 대해 안전한 통항 조정 및 지원을 계속 제공하고 있다"며 "미군은 이란과의 합의 사항이 모든 측면에서 준수되고 이행되며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도록 보장하기 위해 현지에 주둔하며 경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엑스에 올린 글에서 "이란은 휴전 합의에 서명했다. 우리는 그 합의를 준수해 왔다"고 밝힌 뒤 "만약 그들(이란)에게 MOU의 이행 방식에 대한 이견이 있다면 그들은 전화로 연락하면 된다. 하지만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설 것"이라고 썼다.

 

이에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상선 공격에 대해 "명백히 어리석은 휴전 합의 위반"이라고 비판하면서 대응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 종전 양해각서 서명=백악관이 공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7일(현지시간) 프랑스 베르사유 궁에서 종전 양해각서에 서명하는 모습(왼쪽)과 이란 대통령궁이 18일(현지시간) 공개한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이 서명한 종전 양해각서를 보여주는 모습. [백악관 홈페이지/이란 대통령궁·EPA=연합]

 

미군 공습에 이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는 미군의 이날 공격을 '휴전 위반'으로 규정하며 중동 내 미군 기지들을 타격했다고 밝혔다.

 

혁명수비대는 현지시간 27일 발표한 성명에서 "시온주의 정권(이스라엘)의 남부 레바논 휴전 위반에 이어 몇 시간 전 약속을 저버리는 미국 정권 역시 늘 그랬듯 (휴전) 합의를 위반했다"며 "혁명수비대 해군이 이런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역내 미국 테러리스트 군대 기지 여러 곳을 타격했다"고 발표했다.

 

혁명수비대는 이어 "미국은 다양한 구실을 대며 호르무즈 해협의 비인가 경로를 통과하던 위반 선박의 통항을 이유로 이란 해안을 공격했다"며 자신들에 대한 미군의 공격 사실을 확인했다.

 

앞서 이란 국영방송은 26일 호르무즈 해협에 인접한 이란 남부 항구도시 시리크의 통신탑이 발사체 2발에 맞았다고 보도했다. 국영방송은 또 호르무즈 해협의 케슘섬에도 발사체 2발이 떨어졌다고 전했다. 발사체의 발사 주체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란 의회의 에브라힘 아지지 국가안보외교정책위원장도 27일 엑스에 "미국이 또 협상 도중 이란을 공격했다"며 "실패한 미국 대통령이 협상이나 휴전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아지지 위원장은 이어 이슬라마바드 합의서(종전 MOU) 5조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 통항에 대한 통제 절차와 권한은 이란에 있다고 주장한 뒤 미국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위반하려 한다며 향후 위반이 반복되면 더 광범위하게 대응하겠다고 경고했다.

 

미국과 이란이 지난 14일 합의하고 17일 정식 서명을 거쳐 발효된 종전 합의 MOU는 모든 전선에서 군사작전을 즉각적이고 영구적으로 종료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후 양측은 이란의 핵 프로그램과 대이란 제재 해제 등을 놓고 후속 협상을 이어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레바논 내 친이란 무장세력 헤즈볼라에 대한 공격을 이어가면서 한때 협상이 연기되는 등 위기를 겪었고 이번 공방으로 종전 MOU는 잉크가 마르기 무섭게 시험대에 선 형국이다.


호르무즈 해협 [로이터 연합]

 

미군의 대이란 공격은 우선 이란에 대한 미국의 경고 메시지로 읽힌다. 트럼프 행정부가 MOU를 통한 이란과의 종전에 나서면서 염두에 둔 최대 목표는 호르무즈 해협 통행 정상화였는데, 이란의 상선 공격으로 해협 통항에 다시 차질이 조성되자 군사공격으로 대이란 강경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의 공격을 받은 이란이 다시 미군 기지에 대한 반격에 나선 것은 자신들이 열세의 입장에서 MOU에 합의한 것이 아님을 보여줌으로써 앞으로 비핵화 및 제재 해제 등을 놓고 진행할 대미 협상에서 호락호락 양보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 것으로 읽힌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어 전쟁 재개에 따를 정치적 부담이 큰 미국 트럼프 행정부나, MOU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성과로 여기는 이란 모두 확전을 통해 종전 합의를 파기하는 데는 신중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다만 상호 신뢰가 부족한 양측이 자국 내 여론을 의식한 채 강대강의 군사대응을 이어가다 상당한 군인 인명 피해 등 통제가 쉽지 않은 돌발 상황에 직면할 경우 위태로운 양국 간 MOU 체제가 좌초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질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 강훈상 ·이유미 ·조준형 기자 > 

 

'매관매직'1심, 특검 구형 7년 6개월 근접 선고
"영부인 책무 외면한 채 사익 추구 수단 활용"
3억 원어치 금품 챙긴 것 모두 인정하고 "유죄"

"수수 않거나 청탁 목적 없어" 안 받아들여져
위법성 인지하고 은폐하려고 일부 금품 반환
이봉관, 서성빈, 최재영 등은 집유나 벌금형

 

금거북이 등 건네고 증거인멸 이배용 집유형
주가조작 등 3대 의혹은 대법원 2부 심리 중
통일교 집단 가입 의혹은 8월 14일 첫 공판

 

"피고인은 영부인이라는 지위가 요구하는 사회적 책무를 외면한 채 이를 그저 사적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법원이 인사·이권 청탁과 함께 각종 고가 귀금속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김건희 씨에게 26일 징역 7년을 선고하며 양형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압수된 이우환 화백의 그림 등에 대한 몰수 등도 명령했다. 특검팀이 지난달 15일 재판부에 구형한 징역 7년 6개월에서 6개월이 모자란 양형이었다. 민중기 특별검사팀은 "국민의 법 감정에 부합하는 적절한 판결이 선고됐다고 생각한다"고 반겼다. 김씨 변호인들은 즉각 항소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각종 고가 귀금속과 함께 인사·이권 청탁을 받은 이른바 '매관매직' 혐의로 기소된 김건희 여사의 1심 선고가 26일 서울역에서 생중계되고 있다. 2026.6.26 연합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조순표 부장판사)는 26일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김씨에게 금품을 제공하며 청탁을 넣은 혐의로 함께 재판을 받은 이봉관 서희건설 회장에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로봇개 사업가 서성빈 씨에게는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최재영 목사에겐 벌금 800만원이 각각 선고됐다. 이우환 화백 그림의 공여자로 지목된 김상민 전 부장검사는 청탁금지법 위반 등 혐의로 별도 기소돼 최근 2심에서 3년 징역형의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상고했다. 

 

같은 재판부는 인사 청탁 명목으로 김건희씨에게 265만원 상당의 금거북이와 세한도를 제공한 뒤 비서를 통해 증거인멸을 교사한 혐의로 기소된 이배용 전 국가교육위원장은 이날 별도의 선고공판을 통해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함께 재판에 넘겨진 비서 박모씨와 양모씨에게는 각각 700만 원과 500만 원의 벌금형을 언도했다.

 

재판부는 김씨가 여러 청탁을 알선해주는 대가로 약 3억원어치 금품을 받았다는 공소사실을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구체적으로 2022년 3월 15일∼5월 20일 이 회장으로부터 맏사위 인사 청탁과 함께 반클리프 아펠 목걸이, 티파니앤코 브로치, 그라프 귀걸이 등 총 1억 380만원 상당 귀금속을 수수했다고 판단했다.

 

같은 해 4월 26일 이배용 전 위원장으로부터 임명 청탁과 함께 금거북이와 세한도 복제품을 받은 혐의, 9월 서씨로부터 사업 지원 청탁과 함께 3990만원 상당 바쉐론콘스탄틴 손목시계를 받은 혐의도 사실로 봤다. 같은 해 6∼9월 최 목사로부터 공무원 직무에 관한 청탁과 함께 총 540만원 상당의 디올 가방 등을 받은 혐의, 2023년 2월께 김상민 전 부장검사로부터 공천 청탁과 함께 1억 4000만원 상당 이우환 화백 그림을 받은 혐의도 모두 인정됐다.

 

영부인이라는 특수한 지위 때문에 김씨에 대한 구형에 소극적이었고, 수사에 협조했다는 이유 등으로 부정한 청탁을 하며 금품을 건넨 이들을 모두 가벼이 처리한 것은 논란이 될 것 같다. 특히 이배용 전 위원장은 금품을 건넨 혐의로 기소한 것이 아니라 이를 은폐하려 하고 교사했다는 혐의로 기소한 것이어서 문제가 된다. 

 

김씨 측은 금품을 받은 사실이 없다거나 구체적 청탁의 알선 명목으로 받은 게 아니라고 주장해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김씨에 대한 양형 이유를 설명하며 "피고인은 대통령 배우자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저버린 채 자신의 영향력을 알선의 대상으로 삼아 반복적으로 금품을 수수했다"고 질책했다.

 

재판부는 "특가법상 알선수재죄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사람 중 대통령 배우자 지위는 그 영향력에 있어 가장 중한 경우"라며 "각종 청탁과 이해관계가 집중되기 쉬운 위치에 있으므로 누구보다도 더 엄격하게 스스로를 절제하고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짚었다. 이어 "피고인은 일반 국민이 평생에 한 번도 쉽게 취득하기 어려운 고가 물품들을 별다른 거리낌 없이 수수해왔다"며 "사회 각 분야 인사들이 저마다 청탁을 품고 피고인에게 접근해 금품을 제공한 사실은 피고인을 둘러싼 비공식적인 청탁 구조가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형성됐음을 보여준다"고 질책했다.

 

그러면서 "마땅히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뤄져야 할 공적 의사결정 과정이 금품과 결부돼 피고인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거래 대상으로 전락했다"며 "그 폐해는 단순한 금품 수수의 차원을 넘어 공적 의사결정의 공정성과 신뢰를 근본적으로 훼손했다"고 꾸짖었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은 수사가 본격화하자 일부 금품에 대해 뒤늦게 '빌려준 것에 감사하다'는 변명과 함께 반환하거나 스스로 구매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책임을 회피해 왔다"며 "이는 자기 행위의 위법성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은폐하려 했음을 보여준다"고 판단했다.

 

김씨의 변호인은 선고 공판을 마친 후 취재진에 "재판부가 피고인에게 불리한 정황을 너무 확대했다"며 "판결문을 면밀히 검토해 항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각종 고가 귀금속과 함께 인사·이권 청탁을 받은 이른바 '매관매직' 혐의로 기소된 김건희 여사의 1심 선고가 26일 서울역에서 생중계되고 있다. 2026.6.26 연합
 

김씨는 지난 1월 28일 도이치 모터스 주가조작(자본시장법), 통일교 청탁(특가법상 알선수재), 명태균 여론조사(정치자금법) 등 이른바 '3대 의혹'에 대한 1심 선고공판에서 각각 무죄, 일부 유죄, 무죄가 선고돼 징역 1년 8개월, 벌금 1281만 5000원이 선고됐으나 지난 4월 28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각각 일부 유죄, 유죄, 무죄가 인정돼 징역 4년 벌금 5000만 원, 추징금 2940만원이 선고됐다. 특검의 구형은 1심과 항소심 모두 징역 15년, 벌금 20억 원, 추징금 9억여 원이었는데 한참 선고 형량이 모자라 사법부가 김씨 앞에만 가면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다는 뒷말이 나왔다.

 

대법원은 지난달 26일 이 사건을 오경미·권영준·엄상필·박영재 대법관으로 구성된 대법원 2부에 배당했다. 주심은 박영재 대법관이 맡았다.

 

김씨는 이들 재판과 별개로 통일교 교인들의 국민의힘 당원 강제 가입에 관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오는 8월 14일 1심 첫 공판을 앞두고 있다. 담당 재판부가 김씨의 디올백을 첫 번째는 무죄, 두 번째는 유죄라고 선고해 빈축을 샀던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우인성 부장판사)라 우려하는 이도 적지 않다.

 

김씨와 한학자 통일교 총재, 건진법사 전성배 씨 등의 정당법 위반(정교 유착) 혐의 사건으로 김씨는 2022년 11월쯤 전씨와 공모해 윤영호 전 통일교 세계본부장에게 교인들의 집단 국민의힘 당원 가입을 요청한 혐의로 민중기 특별검사팀에 의해 지난해 11월 재판에 넘겨졌다. 2023년 3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후보의 당선을 바랐던 김씨가 통일교 측에 교인 입당을 대가로 교단 지원 등을 약속했다는 게 특검팀 판단이다.                                                                                                    < 임병선 기자 >

김건희 7년 선고, 책임 없는 권력이 좀먹은 민주주의 덫

홍순구 만평작가의 '동그라미 생각'

 

권력은 국민의 신뢰 위에서만 정당성을 얻는다. 그러나 그 신뢰가 사적 거래의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 민주주의의 근간은 흔들린다.

 

김건희가 인사·이권 청탁을 받고 각종 고가 귀금속 등을 수수한 ‘매관매직 의혹’에 대해 1심 법원이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이번 판결의 핵심은 '공적 의사결정이 금품과 결부되어 사적 이익의 거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부분을 명시 함으로서, 사적 욕망이 민주주의의 근간인 공적 시스템을 어떻게 무력화하는지를 법적으로 규명한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은 ‘영부인’이라는 자리의 실체다. 법적으로는 권한 없는 민간인이나, 현실적으로는 국가권력의 정점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기묘한 위치. 권력의 파생물은 누리면서도, 그로 인한 비위 앞에서는 ‘법적 책임의 회로’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제도적 공백이 이번 판결로 그 민낯을 드러냈다.

 

한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청탁자 명단’의 면면이다. 건설사 회장, 사업가, 종교인 등 각계 유력 인사들 속에서도 전직 부장검사 김상민의 존재는 검찰 조직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법의 수호자여야 할 검사가 영부인에게 고가의 그림을 건네며 인사 청탁을 했다는 것은, 검찰의 정치화가 단순히 수사 표적을 고르는 수준을 넘어 조직 구성원의 사적 이해관계가 권력의 핵심부와 직접 접속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검찰의 존재 가치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너졌는지 그 뿌리를 철저히 파헤치는 별도의 수사가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이유다.

 

불과 10년 전, 우리는 ‘비선 실세’ 국정농단이라는 참담한 역사를 경험했다. 그러나 사법적 단죄가 이뤄진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시 권력자 주변에서 반복되는 ‘매관매직’의 악순환을 목격하고 있다. 만약 김건희가 공무원이었다면 이는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할 중대 범죄다. 신분상의 이유로 법의 그물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현행 제도의 헛점은, 결국 대통령 배우자를 둘러싼 측근 비리를 근절할 수 없는 구조적 원인이 되고 있다.

 

입법부는 이제라도 대통령 배우자의 법적 지위를 명확히 하고, 견제와 감시가 가능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무소불위의 영향력에 그에 상응하는 책임의 의무를 지우는 것, 그것이 민주공화국의 상식이다.

 

권력은 국민의 신뢰 위에서만 정당성을 얻는다. 그러나 그 신뢰가 사적 거래의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 민주주의의 근간은 흔들린다. 김건희에게 선고된 징역 7년의 1심 판결은 개인에 대한 처벌을 넘어, ‘책임 없는 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법부의 단호한 심판이다.

                                                                                        < 홍순구 기자 >

 


공동체 파괴 극단주의엔 국가가 적극 개입해야
민주주의 방어논리 약해지면 극우 언제든 부활
압도적 우세 보이지 못한 지선이 던지는 경고
민주공화정에 대한 철학적·제도적 인식 불충분
정권 획득 넘어 시민참여, 사회규범으로 다져야

 

2024년 12월 국회의사당 앞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 집회에 모인 시민들의 모습. 
 

2026년 2월 독일에서 열린 뮌헨안보회의는 세계가 이미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자리였습니다. 올해 포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표현은 ‘under destruction(파괴되고 있는)’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약 80여 년간 유지되어 온 국제질서, 즉 국제연합(United Nations)을 중심으로 한 국제협력 체제와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을 근간으로 유지되어 온 국제규범 질서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국제사회 지도자들의 입에서 공개적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Reuters, 2026.2.15 / Financial Times, 2026.2.16).

 

회의 전체를 지배한 분위기는 매우 냉혹했습니다. 협력의 시대는 빠르게 저물고 있었습니다. 규범과 질서, 타협과 협상을 통해 갈등을 조정하던 시대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미국 중심의 1극 체제는 흔들리고 있었고, 국제사회는 각국이 자국의 생존과 이익을 우선하는 다극체제로 이동하고 있다는 진단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세계는 이제 공존보다 거래가 우선되는 시대로, 협력보다 각자도생이 강조되는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 주요 국가의 외교·안보 책임자들 스스로 인정한 셈입니다(Politico Europe, 2026.2.15).

 

문제는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가 외교와 안보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국제규범과 협력의 질서가 흔들릴수록 민주주의와 인권, 공동체 가치 역시 함께 위협받기 시작합니다. 특히 경제 불안과 정치적 혼란이 심화될수록 극우세력은 빠르게 성장합니다. 미국의 MAGA 세력을 비롯해 유럽과 남미, 아시아 곳곳에서 확산되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닙니다. 극우는 언제나 불안과 공포를 먹고 성장합니다. 그리고 차별과 혐오를 조직하고, 조롱과 음모론을 확산시키며 공동체의 규범과 공공성을 잠식합니다.

 

오늘날 한국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한국 극우는 2000년대 초반 ‘뉴라이트(New Right)’라는 이름 아래 전국적 조직체계를 갖춘 이후 보수·극우정권 형성의 핵심 기반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이들은 식민지근대화론과 시장근본주의, 강한 반공주의를 결합하며 기존 보수세력을 더욱 우경화시켰고, 이후 이명박정부와 박근혜정부, 윤석열정부를 거치며 정치·언론·종교·온라인 플랫폼 영역 전반으로 영향력을 확대해왔습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과 기무사가 주도한 댓글공작과 온라인 여론조작 구조는 오늘날 한국 극우 생태계 형성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극우세력은 유튜브와 온라인 커뮤니티, 일부 종교세력과 결합하며 거대한 정치 생태계로 성장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MAGA 세력과 사실상 수직계열화되며 중국 혐오와 선거 음모론, 혐오정치를 본격적으로 유통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극우는 혐오와 음모론, 조롱과 공포를 플랫폼 알고리즘 안에서 끊임없이 증폭시키며 대중의 감정을 조직하는 새로운 정치기술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번 6·3 지방선거 역시 이러한 현실을 선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중국이 선거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과 부정선거 선동은 선거기간 내내 반복되었고, 혐오와 조롱은 정치적 동원 수단처럼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국 시민사회는 윤석열의 12·3 내란을 가까스로 저지했고, 이재명정부를 탄생시켰습니다.

 

현재 한국은 내란세력 청산과 민주공화정 회복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실제로 이재명 정부는 출범 이후 코스피 9000선 돌파와 사상 최대 무역수지 기록, 비교적 안정적인 외교 성과와 실용 중심 정책을 바탕으로 전국 단위 국정지지율 60%를 상회하는 강한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진영은 압도적 우위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서울시장 선거를 근소한 차이로 내주었고, 경남지사 선거 역시 아쉽게 놓쳤습니다. 한때 앞서가던 대구시장 선거도 끝내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평택을 선거에서는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협력 대신 상호 비방 속에 선거를 치르며 결과적으로 국민의힘 후보 당선을 허용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왜 내란을 극복하고 높은 국정지지율과 경제성과를 확보한 정부 아래에서도 민주진영은 정치적 헤게모니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극우는 반복해서 재조직되고 공론장을 잠식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민주공화정의 토대를 허물려는 극우세력으로부터 민주공화정의 가치와 제도를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 것일까요. 협력과 공존, 공동체 가치와 시민정신은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어렵게 발전시켜온 정치적 자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도적으로 구현된 형태가 민주공화정입니다. 민주공화정은 시민들이 서로를 시민으로 존중하며 공공성과 사회규범을 유지하고, 권력을 감시하며, 혐오와 차별이 공동체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막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공존 질서입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민주공화정이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대한민국 안에서 근본적으로 도전받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민주공화정을 선언하는 일이 아닙니다. 극우의 공격으로부터 민주공화정의 가치와 제도를 실제 사회규범과 제도 속에 뿌리내리고, 시민의 힘으로 그것을 지켜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이 칼럼은 바로 그 문제를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보려는 시도입니다.

 

■ 왜 민주진영은 압도적 승리를 만들지 못했는가

 

이번 6·3 지방선거는 여러모로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는 기묘한 선거였습니다. 숫자만 놓고 보면 민주진영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거의 내용과 결과를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결코 가볍게 넘기기 어려운 장면들이 곳곳에서 드러났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선거는 매우 특수한 정치적 조건 속에서 치러졌습니다. 한국 시민사회는 불과 1년 전 윤석열의 12·3 내란을 가까스로 저지했습니다. 내란세력 청산과 민주공화정 회복은 국민적 과제가 되었고, 시민들은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위기와 중요성을 다시 절실하게 경험했습니다. 이후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안정적인 외교 성과와 실용 중심 정책, 경제 회복 흐름을 바탕으로 높은 국정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코스피 8000선 돌파와 사상 최대 무역수지 흑자 기록은 한국 경제가 다시 안정과 성장의 전기를 마련한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한 상징적 장면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최근 한국은 경제·외교·국방·문화 전반에서 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주요 외신들 역시 윤석열 내란 사태 이후 짧은 시간 안에 국가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복원해낸 한국 사회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는 한국 민주주의가 “심각한 정치위기를 제도적으로 흡수해낸 보기 드문 사례”라고 평가했으며(Financial Times, 2026.5.18),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 역시 한국이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경제·기술·문화 경쟁력을 드러내며 민주주의 회복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The Washington Post, 2026.5.22). 반면 국민의힘은 내란세력과 명확히 결별하지 못했습니다. 윤어게인 세력과의 모호한 공존 속에서 극우와 거리두기에 실패했고, 선거기간 내내 중국 음모론과 부정선거 프레임, 혐오정치에 의존하는 모습을 반복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민주진영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도 이상하지 않은 선거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선거 결과는 기대와 판이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번 선거 결과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 민주개혁세력 내부의 이완된 분위기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차기 권력을 둘러싼 경쟁과 계파적 이해관계, 몸 사리기식 선거 캠페인, 장기적 민주개혁 비전의 부재, 민주진영 전체를 아우르는 연대 유지의 실패 등을 우려하는 평가가 나옵니다. 특히 평택을 선거는 이러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시민들이 기대했던 것은 내란 청산과 민주개혁의 연대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선거판은 민주진영 내부 경쟁과 상호 비방으로 흐르며 본래의 정치 의제를 약화시켰습니다. 타 지역에 비해 낮은 투표율 역시 이러한 시민들의 피로감과 실망을 반영합니다. 그 틈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은 국민의힘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단순한 선거전략 실패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입니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단순한 지지율 문제가 아닙니다. 내란을 극복하고도, 높은 국정지지율과 경제성과를 확보하고도 민주진영이 압도적 정치 지형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민주공화정의 사회적·제도적 토대 자체가 여전히 취약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민주개혁세력이 오랜 시간 ‘생존 중심 정치’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가능합니다. 물론 민주당계 정치세력의 역사적 공헌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군부독재와 국가폭력, 지역주의와 색깔론, 검찰권력과 보수언론 카르텔 속에서도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축적했습니다.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 문재인정부를 거쳐 결국 이재명 정부까지 네 차례의 민주정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은 분명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성취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민주공화정에 대한 철학적·제도적 인식은 충분히 깊어지지 못했습니다. 민주공화정은 단순히 선거를 통해 정권을 획득하는 체제가 아닙니다. 시민주권과 권력 견제, 공공성과 사회규범, 시민참여와 숙의민주주의를 끊임없이 제도화해가는 과정 전체를 의미합니다. 특히 혐오와 차별, 극단주의와 권위주의가 공동체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민주주의 스스로를 방어하는 구조까지 포함합니다. 민주공화정은 선거의 승리가 아니라 시민공동체의 자기방어 체제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한국 정치에서 민주공화정은 종종 ‘정권 획득’의 문제로 축소되어왔습니다. 독재와 싸워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시민참여와 사회규범, 권력기관 개혁과 민주주의 자기방어 체계로 끝까지 제도화하는 데는 반복적으로 실패해온 것입니다.

 

민주공화정은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시민의 참여와 감시, 공론과 연대가 멈추는 순간 민주주의 역시 내부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촛불혁명 이후였습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촛불혁명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민적 성취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수백만 시민이 광장을 지켰고,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시민 스스로 지켜냈습니다. 문재인 정부 역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복지 확대, 검찰개혁 논의의 본격화 등 일정한 역사적 성과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촛불혁명이 요구했던 구조개혁은 끝내 완결되지 못했습니다.

 

촛불은 광장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권력기관 개혁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은 반복적으로 지체되었습니다. 권력기관 구조개혁 역시 부분적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국민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반민주 세력의 구조적 문제를 끝까지 도려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윤석열 검찰권력의 집권이라는 역설적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개혁은 멈췄습니다.

 

극우는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극우세력은 조직을 재정비했습니다. 플랫폼 알고리즘과 혐오정치, 음모론과 감정동원을 결합하며 민주주의의 공론장 자체를 잠식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일부 정치세력 내부에 존재했던 안이한 현실 인식이었습니다. 검찰과 사법권력, 보수언론과 극우세력을 구조개혁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일정 수준 관리와 통제를 통해 공존할 수 있다는 인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민주공화정은 권력기관의 자율적 절제를 기대하는 체제가 아닙니다. 시민주권 아래 권력을 구조적으로 제한하고 감시하는 체제입니다. 그러한 민주공화정에 대한 철학적 인식과 실천 의지가 충분히 강고하지 못했던 결과가 결국 윤석열 검찰권력과 극우세력의 재등장을 허용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 문제를 가장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 바로 천주교정의평화연대의 성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이번 6·3 지방선거 직후 발표한 성명서 「민주당 지도부는 답하라 — 왜 내란 의혹 핵심 인물들을 기소하지 못하게 방치했는가」(천주교정의평화연대, 2026.6.4)에서 민주당 지도부를 향해 다음과 같이 직격했습니다. “개혁은 느리면 실패한다. 정의는 지연되면 조롱당한다.”그리고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민주주의를 파괴한 세력에게 시간을 주면 그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조직을 정비하고, 얼굴을 바꾸고, 다시 권력을 향해 돌아온다.”이 성명이 던지는 경고는 분명합니다.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하면 언제든 다시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여러 차례 민주개혁의 기회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개혁은 반복적으로 지체되었습니다. 그 사이 극우세력은 다시 조직되었고, 민주주의는 내부에서 잠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역사는 반복되어왔습니다. 김대중 정부도, 노무현 정부도, 문재인 정부도 ‘국민통합’이라는 이름 아래 반민주 세력의 구조적 뿌리를 끝까지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검찰권력과 극우정치, 보수언론 카르텔은 반복적으로 부활했고, 결국 윤석열 정권과 12·3 내란이라는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공화정의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권력의지는 정치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문제는 그 권력의지가 무엇을 지향하는가입니다. 민주공화정에 대한 철학적 인식과 제도적 실천 의지가 분명하다면, 권력의지는 시민주권 확대와 권력분산, 당원민주주의 강화와 참여민주주의 확대 방향으로 이어져야 합니다.특히 민주공화정에 대한 의지는 당원민주주의를 대하는 태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시민과 당원의 참여를 확대하고 공론과 숙의를 강화하려는 노력 없이 민주공화정을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권력의지가 시민주권 확대와 참여민주주의 강화로 이어질 때 그것은 민주공화정의 힘이 됩니다. 그러나 공적 가치보다 권력 재편 경쟁이 우선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쉽게 계파정치와 붕당정치로 추락하게 됩니다.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파당정치가 강화될 경우 시민주권과 공공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이 복잡해질수록 민주공화정에 대한 더 투철한 인식과 제도화 노력이 요구됩니다. 국제질서가 흔들리고 경제 불안과 극우 포퓰리즘이 확산될수록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방어할 제도적 구조를 더욱 강하게 요구받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선거제도 개혁 역시 민주공화정의 중요한 과제로 등장합니다. 민주공화정이 단순 다수결 체제가 아니라 공존과 숙의의 질서라면, 선거제도 역시 극단적 적대정치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재설계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승자독식 구조는 극단적 진영대결을 반복적으로 강화하고 있습니다. 정치세력은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지지층을 극단적으로 결집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습니다. 혐오와 공포, 음모론 정치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습니다.

 

유럽 여러 국가들이 결선투표제를 유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프랑스 대통령선거의 경우 결선투표를 통해 과반의 사회적 동의를 확보하도록 강제하고 있습니다. 이는 극단주의 세력의 일방적 집권을 억제하는 민주공화정의 안전장치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BBC, 2025.7.8 / Le Monde, 2025.7.9).

 

특히 프랑스에서는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질 때마다 공화주의 연합이 결선투표 과정에서 형성되어 극단주의 확산을 억제해왔습니다. 민주공화정은 단순 승패의 체제가 아니라 사회적 공존을 유지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결선투표제는 단순한 선거기술이 아닙니다. 연합정치와 타협, 공론과 사회적 합의를 제도적으로 촉진하는 민주공화정의 장치에 가깝습니다. 비례대표 확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한국 정치는 지나치게 거대 양당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청년과 노동, 지역과 환경, 시민사회와 소수자의 다양한 요구가 실제 정치 구조 안에서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시민들은 정치를 거대한 진영 싸움처럼 인식하게 되고, 그 틈을 극우 포퓰리즘이 파고들게 됩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2018)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한다』(2023)를 통해 민주주의 붕괴는 군사쿠데타만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민주주의는 극단주의 세력을 정상 정치세력처럼 방치하고, 제도개혁을 지연시키며, 정치엘리트들이 민주주의 자기방어를 포기할 때 내부로부터 서서히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는 단순한 정권 유지나 선거 승리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민주공화정을 실질적 사회질서로 뿌리내릴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 시민들이 서로를 시민으로 존중하며 공공성과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정치적 토대를 다시 구축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방치될 때 가장 먼저 내부에서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시민의 참여와 감시, 공론과 자기방어의 제도가 멈추는 순간 민주공화정 역시 언제든 다시 위기에 놓일 수 있습니다.

 

■ 민주공화정은 왜 스스로를 방어해야 하는가

 

— 뉴라이트, 인지전(認知戰), 그리고 전투적 민주주의의 시대

 

극우 문제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현실인식입니다. 왜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시민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민주화를 진척시켜왔음에도 민주공화정을 여전히 안정적으로 제도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극우는 반복해서 부활하는 것일까요. 왜 시민들은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지켜냈지만 혐오와 차별, 음모론과 역사왜곡은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국제질서 변화와 한국 사회 내부 변화의 유기적 흐름을 충분히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전 세계를 뒤덮은 신자유주의 흐름은 한국 사회의 극우정치에도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냉전 시기 한국 극우의 핵심 기반은 반공주의였습니다. 군사독재와 국가주의, 반북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지배체제를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나 냉전이 붕괴하고 세계질서가 급격히 재편되면서 기존 극우세력 역시 새로운 언어와 전략이 필요해졌습니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극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극우는 시대의 언어를 바꾸어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바로 뉴라이트(New Right)였습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등장한 뉴라이트는 스스로를 “합리적 보수”, “시장주의 개혁세력”, “선진화 세력”으로 포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핵심에는 여전히 냉전적 반공주의와 권위주의적 국가관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다만 표현 방식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기존 극우가 노골적인 국가주의와 반공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뉴라이트는 여기에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와 친재벌 정책, 식민지근대화론과 역사수정주의를 결합했습니다. 노동과 복지, 공공성의 가치는 비효율과 반시장 논리로 공격받았고, 시장 경쟁과 효율 중심 질서는 절대적 가치처럼 제시되었습니다.

 

협력과 규범의 국제질서가 흔들릴수록 민주주의와 공동체 가치 역시 함께 위협받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뉴라이트의 세계관은 단순한 보수주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가 축적해온 민주공화정의 역사적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시민공동체보다 시장과 경쟁, 자본의 논리를 우위에 두려는 흐름에 가까웠습니다. 이들에게 시민은 공동체의 주권자라기보다 경쟁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개별 단위에 가까웠습니다. 연대보다 경쟁, 공공성보다 효율, 시민주권보다 시장질서가 우선되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흐름은 한국 사회를 세계자본주의 질서 속 하위 생산기지와 시장체계에 더욱 깊게 편입시키려는 방향과 결합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민주공화정의 역사적 기반 역시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식민지근대화론은 단순한 학술논쟁이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법통, 항일독립운동과 민주공화정의 역사적 정당성 자체를 약화시키는 작업에 가까웠습니다. 5·18광주민주항쟁왜곡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극우세력은 민주주의 역사 자체를 흔들어야만 자신들의 권위주의 정치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이명박정부 시절을 거치며 훨씬 조직적 단계로 진입하게 됩니다.

 

특히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동과 고 노무현대통령 서거 당시 폭발했던 시민사회의 집단적 애도와 분노는 보수권력 내부에 강한 위기의식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선거경쟁만으로는 시민사회의 민주주의 열망을 억누르기 어렵다고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시기부터 극우정치는 본격적인 ‘인지전(認知戰·cognitive warfare)’ 단계로 이동하게 됩니다. 인지전의 핵심은 정치 자체를 혐오와 조롱의 놀이문화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유튜브 플랫폼을 중심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 희화화와 세월호 조롱, 여성혐오와 지역혐오, 중국혐오와 난민혐오 등이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치는 토론과 숙의의 공간이 아니라 분노와 조롱, 혐오를 빠르게 소비하는 감정시장으로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조롱과 혐오가 놀이가 되는 순간 시민은 더 이상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아니라 제거하고 비웃어도 되는 대상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공동체는 공존의 공간이 아니라 서로를 의심하고 공격하는 생존경쟁 체제로 변해갑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러한 흐름이 미국 극우정치와 매우 유사한 경로를 보였다는 점입니다.

 

미국 MAGA 정치가 보여준 음모론 정치와 문화전쟁 전략은 빠르게 한국 극우정치 안으로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반PC주의와 부정선거 프레임, 언론 불신 선동 역시 같은 흐름 위에서 확산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이 시기부터 한국 극우세력이 미국 극우의 전략과 문법을 빠르게 학습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형성된 극우 문화는 극우 개신교 세력과 뉴라이트 세력, 보수언론 일부와 결합하며 훨씬 거대한 정치생태계로 성장하게 됩니다. 국정교과서 논란은 그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그리고 윤석열정부 시기 이러한 흐름은 훨씬 노골적 단계로 진입했습니다. 극우는 더 이상 거리의 구호만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교육과 역사, 플랫폼과 종교 영역 안으로 훨씬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리박스쿨 논란(2025)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리박스쿨은 뉴라이트 성향 역사교육 콘텐츠와 강연 등을 통해 청소년층에 극우 역사관을 조직적으로 확산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한겨레, 2025.8.12 / 경향신문, 2025.8.14). 단순한 역사교육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국가권력과 연결된 장기적 ‘극우 진지전’ 시도라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신호였습니다. 역사기관 장악 시도 역시 같은 흐름 위에 있었습니다. 윤석열 정부 시기 독립기념관과 국사편찬위원회 등 역사 관련 기관 인사를 둘러싸고 뉴라이트 편중 논란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습니다(오마이뉴스, 2025.9.3 / 한겨레, 2025.9.5).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축소하거나 왜곡하려는 시도가 반복되었다는 비판 역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관과 국가관으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정신 자체를 압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윤석열의 내란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극우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극우세력의 전면적 제도화 시도는 제동이 걸렸지만, 그들은 잠시 청와대와 권력 핵심에서 밀려났을 뿐입니다. 여전히 온라인과 종교, 플랫폼과 지역조직 속에 기반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조직과 네트워크, 플랫폼과 자금, 종교적 기반과 국제적 연결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특히 한국 극우와 미국 MAGA 세력의 연결은 여전히 매우 강고합니다.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모스 탄(1958– )이 한국에 들어와 극우 집회와 선동 활동을 벌인 사례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뉴스민, 2026.5.29 / 한겨레, 2026.5.31). 한국 극우는 더 이상 단순한 국내 정치세력이 아닙니다. 글로벌 극우 네트워크와 연결된 국제적 정치현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승리감보다 훨씬 냉정한 현실인식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왜 일부 시민들이 이러한 극우적 감정정치에 쉽게 끌려가는가 하는 문제 역시 함께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기화된 경제 불안과 청년세대의 좌절, 고립감과 경쟁 피로, 플랫폼 중독과 인정 욕망의 확대는 사람들을 점점 더 감정적 정치에 취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혐오와 음모론, 단순한 적대 구도는 복잡한 현실에 지친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감정적 해방감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극우 문제는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현대사회 구조 위에서 함께 바라보아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까지 무제한 허용해야 하는가. 혐오와 차별, 역사왜곡과 내란선동, 음모론과 극단주의를 방관하는 것이 과연 민주주의인가.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20세기 유럽이 이미 보여주었습니다. 카를 뢰벤슈타인은 1930년대 나치의 집권 과정을 분석하며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에 대해 무기력하게 방관할 경우 결국 스스로 붕괴하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이를 ‘전투적 민주주의(wehrhafte Demokratie)’라고 불렀습니다. 이 개념은 이후 독일 민주주의 질서의 핵심 원리가 됩니다.

 

독일은 나치 찬양과 홀로코스트 부정을 처벌하고, 극단주의 조직과 반헌법 세력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왔습니다. 혐오표현 제한과 반헌법 정당 해산 역시 민주주의 방어 원리로 제도화했습니다.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 공화주의는 단순한 다수결 체제가 아닙니다. 공화국의 가치와 공동체 질서를 파괴하려는 극단주의에 대해서는 국가가 적극 개입할 수 있다는 인식 위에서 운영됩니다.

 

즉 민주공화정은 단순한 방관 체제가 아닙니다. 시민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방어하는 체제입니다. 한국 역시 이제 민주공화정을 스스로 방어할 제도적 원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도 무기력한 중립주의가 아닙니다. 민주공화정을 스스로 방어하려는 전투적 민주주의(wehrhafte Demokratie)의 원리입니다. 극우의 세계관은 공동체의 공존과 협력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혐오와 배제, 음모론과 권력독점을 통해 공동체 규범 자체를 파괴합니다. 결국 그 끝에는 시민주권이 아니라 특정 세력의 권력독점과 전제정치가 자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우에 대한 대응은 단순한 정당정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가 오랜 시간 쌓아온 공동체적 가치와 민주공화정의 유산을 지키는 문제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개혁 과제들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문제는 무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무엇이 필요한지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계산과 기득권 논리, 눈치보기와 안이한 타협 속에서 개혁이 반복적으로 미뤄져왔을 뿐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막연한 경계심이 아닙니다. 민주공화정을 실질적으로 방어할 제도적 개혁입니다. 시민적 감시와 공론, 그리고 민주주의 자기방어의 원리가 흔들리는 순간 극우는 언제든 다시 권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다음의 마지막 글에서는 한국 민주공화정의 안착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개혁과제가 우리 눈 앞에 제시되고 있는지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 민들레 이병권 인문연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