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간첩단 조작…국정원, 취소 요청 안해
공적서에 기재되지 않았다는 기계적 이유
국정원 86건, 국방부 76건, 경찰청 36건
국방부 신군부 76명 무공 훈포장 무더기 철회
박종철 고문치사 강민창·박처원·이근안 취소
경찰청 남민전 사건 관련 포상 29건 등 포함
5·18 민주화운동 진압·삼청교육 관련자 진행 중

김기춘 중앙정보부 공안수사국장은 1975년 11월 22일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유신 정국의 한복판에서 교포 유학생 20여 명이 간첩으로 몰려 무더기로 기소된 것이다. 1970년대와 80년대 툭하면 발표됐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재판 결과 유학생 4명에게 사형이 선고됐고 10여 명도 무기징역 등 중형이 언도됐다. 민주화 이후 감형되긴 했으나 다수가 10년 이상 옥고를 치러야 했다. 2010년대 들어서야 피해자들의 재심 청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돼 이들의 법적 명예가 회복됐으나 잃어버린 청춘을 보상받을 순 없었다.
수사를 지휘해 피해자들에 의해 '조작 주역'으로 지목된 김씨는 나중에 검찰총장과 국회의원(3선)이 되고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는 등 일세를 풍미했다. 그는 수사 결과 발표 이듬해에 공안수사 업무 수행 전반에 공로를 세웠다는 이유로 보국훈장 천수장을 받았다.
정부가 21일 국무회의에서 정부포상 취소를 의결했는데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가 1970~1990년대 대형 실적으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 다수 포함됐다. 이날 결정된 포상 취소 총 198건 중 86건(43%)이 국정원 소관(중앙정보부와 안전기획부), 그 중 간첩조작 사건이 19건이었다. 포상이 취소된 인물 167명 가운데 71명이 중정과 안기부 소속이었다.
국정원에 따르면 재심 무죄가 확정된 17개 사건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국정원 진실위원회가 지적한 2개 사건 등 19개 사건에서 수사절차 위반과 인권침해 사실이 확인됐다.
정부는 반헌법적 행위와 간첩조작사건 등 국가폭력 사건 연루자에게 수여된 정부포상을 바로잡기 위해 국방부·경찰청·국가정보원과 함께 포상의 적절성을 검토한 뒤 당사자 사전통지와 공적심사위원회 개최 등 행정절차를 진행했다. 취소된 포상 가운데 국방부 소관 76건, 경찰청 소관 36건이었다.
이번 정부포상 취소는 지난 1월 보국훈장 등 11건, 3월 무공훈장 10건에 이어 올해 들어 세 번째다.

당시 사건에 관여한 중앙정보부 직원들에게 주어진 포상이 대거 취소됐는데 정작 수사를 지휘한 김기춘 공안수사국장의 이름은 명단에 들어 있지 않아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앞서 법무부는 김씨가 유신헌법 기초 작업에 참여한 공로로 1970년대 받은 훈장의 취소를 검토한다고 밝힌 바 있으나 아직 결론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국정원 추천으로 주어진 포상은 국정원이 취소를 요청하게 돼있다. 하지만 국정원은 수사 지휘자의 훈장 취소 요청을 하지 않았다. 국정원은 그 이유를 "김기춘 공안수사국장이 1976년 보국훈장을 받았지만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공적으로 수훈한 사실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시민언론 민들레 등 각종 언론 보도 등을 통해 김씨의 보국훈장 공적으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 자주 거론됐으나 정작 공적서에 이 사건 수사가 기재되지는 않았다는 점이 확인된 셈이다. 국정원은 "현재 상훈법상 서훈 취소는 공적 내용이 허위인 경우에 한하여 시행하는 것으로, 국정원은 실정법 테두리 내에서 취소 여부를 검토했다는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당시 그가 이 사건 수사를 지휘하긴 했지만 이 사건이 훈장 사유로 공식 기재된 것이 아닌 만큼 해당 훈장을 취소할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너무 기계적으로 자구에만 얽매인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국정원도 이번 포상 취소 명단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국정원은 김영수 행안부 의정관이 대독한 발표문을 통해 "현재 추가 조사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 서훈 취소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며 "향후 재심 무죄사건 등을 확인하거나 기존 취소사건 관련 수훈자를 발견하면 총괄부서인 행정안전부와 협의해 서훈 취소절차를 신속히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날 상훈이 취소된 사건 중에는 신군부 집권 초기인 1981년 전남 보성의 명망가인 봉강 정해룡 일가 30여 명을 간첩단으로 조작해 멸문에 가까운 비극을 초래한 '보성 가족 간첩단 사건' 담당자들에게 주어졌던 상훈도 포함됐다. 또, 김성식·민병두 전 의원에게 징역형이 선고된 '제헌의회(CA)그룹 사건'(1987), 미국과유럽에 유학한 학생들을 북한에 포섭된 간첩 혐의로 수사한 '구미(歐美) 유학생 간첩단 사건'(1985)도 들어 있다.
이날 발표 현장에는 국방부와 경찰청 당국자는 참석했지만, 국정원은 불참해 행안부가 대신 피해자들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김영수 의정관은 "국정원은 브리핑 참석이 불가하여 (발표문을) 행안부가 대독한다"며 "국가정보원은 당시 인권 침해로 고통받으신 당사자 및 유가족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취소 목록에는 1979∼1981년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비상계엄 업무 관련자 76명에게 수여된 무공훈장·무공포장 76건과 1960∼1990년대 간첩조작사건 등 관련자 91명에게 수여된 훈·포장, 대통령표창, 국무총리표창 122건이 포함됐다. 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관여한 강민창 전 내무부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수여된 정부포상도 취소됐다.
국방부는 지난 3월 12·12 군사반란 중요임무 종사자 10명에게 수여된 충무무공훈장을 취소한 데 이어 1980∼1981년 무공훈장과 무공포장을 부당하게 받은 76명을 추가로 확인해 취소 절차를 밟았다. '국가안전보장 유공'으로 서훈받은 42명은 근무 경력과 당시 대간첩 작전 기록 등을 전수조사한 결과, 무공훈장 수여 요건인 '전투에 준하는 직무 수행'이나 무공포장 수여 요건인 '국토방위에 대한 헌신·노력'에 해당하는 공적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여기에는 12·12 군사반란 성공을 기념하며 전두환과 함께 보안사 앞마당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조홍, 최석립, 백운택에 대한 충무 무공훈장이 포함됐다. '계엄업무 유공'으로 서훈받은 34명도 상훈법상 거짓 공적에 해당한다고 국방부는 판단했다.
비상계엄이 헌정질서를 파괴한 국헌문란 및 내란행위로 사법적 평가가 확정됐고, 계엄사령부와 예하 부대에서 수행한 업무도 신군부의 불법적인 권력 장악과 내란에 조력한 행위여서 서훈 공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국방부는 서훈 일부가 취소됐다고 해서 국가유공자 자격이나 국립묘지 안장 자격이 자동으로 박탈되는 것은 아니며, 관련 요건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판단할 사항이라고 밝혔다.

경찰청 소관 36건은 훈장 15건, 포장 3건, 대통령표창 12건, 국무총리표창 6건이다. 이 가운데 1979년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80여명을 검거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관련 포상이 29건으로 가장 많았다.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 관련 포상 2건, 서울대 무림사건 3건, 함주명 간첩사건과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 사건 관련 포상 각 1건도 취소 대상에 포함됐다.
취소 대상에는 강민창 전 내무부 치안본부장에게 수여된 보국훈장 삼일장·천수장·국선장과 홍조근정훈장 등 4건이 포함됐다. 박처원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처장이 받은 녹조·홍조근정훈장과 대통령표창 2건 등 4건도 취소됐다. 이근안에게 수여된 국무총리표창 1건도 취소 대상에 포함됐다. 경찰청은 장관 표창 51건도 관계기관에 취소를 요청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박처원·이근안·강민창에게 취소되지 않은 서훈이 남아 있느냐는 질문에 "재심 무죄나 인권침해 사실이 확인된 사건과 관련해 수여된 서훈은 이번에 모두 취소된다"며 "장기근속 표창 등은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답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번 취소를 포함해 이근안에게 수여된 7건의 정부포상은 모두 박탈됐으나 강민창은 8건, 박처원은 11건이 남아 있다. 여태수 경찰청 인사담당관은 "약 10만건의 정부포상에 대한 전수조사를 진행 중이다. 이번에는 재심 무죄 사건을 중심으로 검토했고 현재 민주화운동 탄압, 인권침해, 진실화해위원회 관련 사건 등을 대상으로 포상 173건에 대한 재검토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은 정부포상을 대거 취소한 것에 대해 "오랫동안 누적된 왜곡을 잘 정리했다"고 밝혔다고 강유정 청와대 수석대변인이 국무회의 후 서면 브리핑을 통해 전했다. 이 대통령은 '서훈 취소 대상자들이 더 있을 수 있는지'를 묻는 자신의 말에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이 "조사를 하고 있고 더 살펴볼 예정"이라고 답하자 "잘못되거나 반론에 부딪히지 않게 꼼꼼하게 파악해 잘 다뤄달라"고 당부했다.
박강배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이날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자국민을 죽여서 받게 된 훈장을 지금까지 유지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46년이 지난 현재 바로 잡혀 다행이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법망을 피해 여전히 훈장을 유지하고 있거나 처벌받지 않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며 "5·18 진상규명을 이어가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극정 5·18 부상자회 회장도 "5·18 당시 시민군을 진압한 사실만으로 국가의 서훈을 받은 것은 유가족들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며 "국가가 그들에게 표창·서훈을 내렸기 때문에 부당한 일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윤남식 5·18 공로자회 회장은 "시민군을 짓밟은 계엄군을 지휘한 신군부 세력에 대한 잔재 정리가 덜 된 탓에 현재까지 왜곡과 폄훼가 이어지고 있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스타벅스' 판매촉진 행사, 5·18 조롱 응원 사태가 반복되지 않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양재혁 5·18 유족회 회장은 "서훈 취소 결정은 정의와 역사를 바로 세우는 당연한 조치"라며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5·18은 시간이 흘러도 민주주의를 바로 세운 역사로 기록돼야 한다"고 전했다.
행안부는 이날 반헌법적 행위와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돼 부적절한 정부포상을 받은 167명과 198점에 대해 무공 훈·포장을 취소했다.
이 가운데 76명은 1980∼1981년 12·12 군사반란, 5·18, 계엄 업무 관련으로 포상받았다.
< 임병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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