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계 자본 견제하려는 미국의 이해관계 협상에 영향"

한국형 원전 2기 건설·웨스팅하우스 지분 5∼10% 인수 합의

 
 

한국형 원전인 APR1400 노형으로 지어진 UAE 바라카 원전 4호기 [한국전력 제공]

 

지난 1일 발표된 대미 투자 프로젝트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미국에 한국형 원전 2기를 포함해 원전 8기를 건설하는 내용을 담은 '한미 원전 프레임워크'였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해외 노형에 원전 종주국의 안방을 내준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 셈인데, 그 이면에는 미국과 캐나다 간의 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1일 한미 원전 프레임워크에 따르면 한국은 총 2천억달러 규모의 대미 전략투자기금 중 60%에 해당하는 1천200억달러를 투자해 8기의 신규 대형 원전을 미국에 짓기로 큰 틀에서 합의했다.

 

8기 중 2기는 한국형 원전인 APR1400, 나머지 6기는 미국 원전 기업인 웨스팅하우스의 AP1000이다.

 

양국 간 협력 구상에 따라 지난해 1월 한국전력, 한국수력원자력과 웨스팅하우스가 지식재산권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맺었던 타협협정(SA)도 손본다. 해당 협정은 한국형 원전의 미국 진출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꼽혀왔다.

 

웨스팅하우스는 협정 개정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미국 내 원전 확대에 한국의 시공 역량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한 미국 정부가 웨스팅하우스를 압박하며 돌파구가 열렸다.

 

한국은 또한 웨스팅하우스 지분 5∼10%를 인수한다. 웨스팅하우스가 상장할 경우 공모가의 10% 할인된 가격으로 인수할 수 있는 조건을 포함했다.

 

현재 웨스팅하우스는 캐나다 사모펀드 운용사 브룩필드가 51%, 캐나다 우라늄 광산업체 카메코가 4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웨스팅하우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가 개입해 한국형 원전 도입을 허용하고 유리한 지분 인수 조건까지 안겨준 데에는 캐나다 자본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미국 입장에서는 자국 원전의 핵심 기업 주주가 전부 외국계(캐나다)라는 점이 상당한 부담이었을 것"이라며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최근 북미 간 기류가 영향을 미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캐나다는 전통적인 우방이지만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관세 문제를 둘러싸고 정면충돌했다. 미국의 보복 관세에 똑같은 보복 관세로 대응한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브룩필드 부회장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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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과 카니 총리  [AP 연합 자료사진]

 

카니 총리와 연결고리가 있는 브룩필드를 미국이 얼마나 경계하는지는 미국 정부가 마련한 안전장치에서도 드러난다.

 

산업부가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우재준 의원실에 제출한 답변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웨스팅하우스 상장 과정에서 황금주를 확보할 예정이다.

 

황금주는 단 한 주라도 가지고 있으면 경영의 중요 사항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이다. 앞서 일본제철이 US스틸 지분 99.9%를 인수했을 때도 미국 정부가 황금주 1주를 확보해 공장 폐쇄와 본사 이전 등 주요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를 확보했다.

 

여기에 미국 정부의 이해관계도 걸려 있다.

미국 정부는 작년 10월 웨스팅하우스 주주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미국 내 800억달러 규모의 원전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미국 정부는 각종 인허가 편의와 저리 대출 등 금융 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웨스팅하우스 기업공개(IPO) 몸값에서 175억 달러를 제한 가치의 20%만큼 지분을 인수할 권리를 확보했다.

 

예컨대 웨스팅하우스의 기업 가치가 500억달러에 달하면 미국 정부는 65억달러 규모의 지분을 챙길 수 있는 구조다.

 

결국 미국은 웨스팅하우스의 기업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시공 능력이 검증된 한국과 원전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이와 함께 캐나다계 100%의 지분 구조를 희석하기 위해 한국에 지분 인수를 허용한 셈이다.

 

원전업계 관계자는 "만약 웨스팅하우스가 미국 자본으로 구성된 토종 기업이었다면 한국형 원전이 미국 본토에 들어가거나 지분을 인수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북미 간의 갈등이 이번 협상의 지렛대가 됐다"고 짚었다.                            <  신창용 기자   >

 

 

"무극파의 난동" 위험하다

● COREA 2026. 10. 11. 11:3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비판을 사심으로 단정하는 순간, 개혁을 둘러싼 건강한 논쟁은

실종되고 충성심 검증이라는 위험한 정치만 남게 되는데..."

                       

                 홍순구 만평작가의 '동그라미 생각'

 

당대표의 본령은 대통령을 향한 충성 경쟁이 아니라, 정부가 놓치고 주저하는 지점을 당의 책임으로 완수하는 데 있다. 이재명 정부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란다면, 말로 하는 진영 정치에서 벗어나 행동으로 증명하는 정치를 보여주어야 마땅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SNS를 통해 ‘무극파’라는 신조어를 꺼내 들었다. 최소한의 근거도 없이 사람들을 현혹하는 무책임한 극단주의자를 겨냥한 표현이라 한다. 앞서 등장한 ‘좌아한’에 이어 연달아 신조어를 창조하는 정치적 수사에 눈길이 간다.

 

표면적으로 특정 인물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김지용 중대범죄수사청장 후보자 인선을 둘러싸고 반발했던 범여권 내부의 강경 검찰개혁론자들, 즉 추미애 지사와 김용민·박은정 의원 등을 향한 경고성 메시지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대통령이 내놓은 발언의 맥락은 명확하다. 개혁 성과의 독점이나 사심(私心)을 경계하고, 권한에 대한 실행과 책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들이 과연 근거 없는 선동만 일삼았는가. 돌아보면 추미애·김용민·박은정 등은 매번 나름의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인선에 반대해 왔다.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들과의 비판을 ‘무극파의 선동’으로 몰아가는 것은 경계해야 할 프레임 씌우기다. 그들의 주장이 타당한지 여부는 감정이 아니라 그들이 제시한 근거를 바탕으로 냉정하게 판단하면 될 일이다. 비판을 사심으로 단정하는 순간, 개혁을 둘러싼 건강한 논쟁은 실종되고 충성심 검증이라는 위험한 정치만 남게 된다.

 

여기에 김민석 당대표까지 가세해 당내 비판자들을 제어해야 한다는 논리를 거들고 나섰다. 그러나 지금 집권여당 대표가 해야 할 일은 대통령을 엄호하며 당내 소수의 목소리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 독립을 명분으로 재제청마저 거부하는 조희대 대법원장 탄핵 문제와, 산적한 민생 현안에 더 큰 책임감을 보여야 하는게 우선일듯 싶다.

 

당대표의 본령은 대통령을 향한 충성 경쟁이 아니라, 정부가 놓치고 주저하는 지점을 당의 책임으로 완수하는 데 있다. 이재명 정부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란다면, 말로 하는 진영 정치에서 벗어나 행동으로 증명하는 정치를 보여주어야 마땅하다.

 

이쯤에서 대통령의 ‘무극파’ 발언을 되물어 보자. 진정 누가 개혁의 성과를 독점하려 하며, 누가 개혁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소모하고 있는가. 비판을 향해 타당한 근거를 요구하는 것과, 정당한 비판자에 근거 없는 ‘낙인’을 찍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최고 권력자가 이 아득한 차이를 분간하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잃게 되는 것은 반대파의 표심이 아니라 개혁을 묵묵히 지지해온 지지층의 신뢰일 것이다.           < 홍순구 시민기자 >

 

이재명 대통령 “국민과 소통하다 조롱받던 노무현 대통령 떠올라”

 

“현장 방문도, SNS 소통도 계속할 것”

 
 
이재명 대통령(왼쪽)과 노무현 전 대통령. 연합

 

이재명 대통령이 “품격없다, 권위없다 비난하겠지만 경호를 최소화한 뒷골목 삶의 현장 방문도, 에스엔에스(SNS) 소통도, 그분들의 언어로 교감하는 일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0일 밤 엑스(X·옛 트위터)에 “댓글로 국민과 소통하시다가 품격없다고 비난받고 조롱당하시던 노무현 대통령님이 떠오른다”며 이렇게 적었다. 이 대통령은 “경호에 사전답사에 국민들 불편하실까봐 시장 방문조차 자제하셨다는 말도 전해진다”며 “정치와 권력은 낮은 곳으로 향해야 한다. 지위 높은 유력자들보다는 힘없고 못가진 장삼이사들이 더 귀하고, 그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그러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면 굳이 힘든 정치를 계속할 이유가 없다”며 “힘없고 덜 가지고 소외되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좁은 뒷골목의 부모형제자녀들과 소통하고 그분들의 숨결을 느끼며, 국정의 막중한 책임감을 되새기는 순간들이 저에겐 그래서 귀하디 귀하고 또 포기할 수 없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 서영지 기자 >

 

김용민 “자리 탐해서 정치한 건 아냐”…이 대통령 비판에 반박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1일 “정치를 시작한 건 이루려는 과제가 있어서지 자리를 탐해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여권 내 강경파를 향해 “능력도 안 되면서 큰 자리를 요구하고 (있다)”고 비판한 뒤 당내에서 자신을 향한 비판이 일자 대응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김 의원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지금도 국회의원이라는 과분한 자리에서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검찰개혁, 사법개혁에 동지들과 함께 진군하고 있을 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어 “설사 그 권한마저 잃더라도 계속 나아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지난 9일 엑스(X·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순수한 급진성도 문제겠지만, 능력도 안 되면서 큰 자리를 요구하고 인사나 국가정책까지 자기 뜻대로 하려다가 잘 안 되니 대의명분 삼아 급진 개혁을 내세우며 내부 공격을 하는 것이 더 문제”라고 말했다. 김지용 중대범죄수사청장 후보자 인선에 반대해 온 추미애 경기지사, 김용민 의원 등 여권 내 검찰개혁 강경파를 겨냥한 것이라 해석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 대통령은 같은 글에서 민주진보 진영 분열 양상을 분석한 조희연 전 서울시 교육감의 언론 기고 가운데 “무엇이 동지를 적으로 바꾸었는가. 출발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순수한 열망이었다. 마침내 전도가 일어난다. 혁명을 위해 동지를 치는 게 아니라, 동지를 치는 일 자체가 혁명이 돼 버린다”, “혁명(자기희생적 운동)이 체제(권력)가 되는 이익의 시선이 흘러들고 자기 정치와 자기 집단정치의 동학이 작동한다”는 대목 등을 직접 인용하기도 했다.                                                                                                    < 하어영 기자 >

 

‘적’을 향한 증오가 동지를 향할 때

 

 

지난 8월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선거는 끝났지만 여진은 가라앉지 않았다. 집권 1년 반, 대통령 지지율은 예상 밖의 수준으로 낮아졌고, 당 안에서는 서로를 멸칭으로 부르는 일이 일상이 됐다. 내가 ‘장기 민주화시대’라 부르는 지난 40년을 되돌아보면 정치와 사회운동 내부에 늘 균열은 거기 있었다. ‘적’과의 대립, 동지와의 균열, 진보 안의 정당과 정당, 그룹과 그룹 사이의 균열. 물론 갈등이 곧 불행은 아니다. 상처는 드러나야 치료할 수 있다. 다만 갈등이 어디서 터지고 어디에 선이 그어지는지는 시대의 공기에 따라 자리를 옮긴다. 12·3에서 4·4를 거쳐 6·3에 이른 시간, 그 이후는 벌써 다른 계절이다.

 

민주주의와 진보의 다원성

 

1980년대, 전두환의 시대에 우리가 다툰 것은 ‘누가 더 뜨거운가’였다. 더 뜨거운 사람이 존경받았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부르던 대중의 갈망이 그 뜨거움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중을 향하던 불꽃이 방향을 틀어 동지들 사이에서 타오르기 시작한다.

 

내가 눈여겨보는 것은 갈등의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그 갈등을 어떤 눈으로 마주하는가이다. 견해와 전략이 다르다는 사실보다 그 다름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다.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어떻게 한 지붕 아래 살아갈 것인가.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행위”라는 익숙한 정의는 정치의 심장부에 갈등이 있다는 통찰을 준다. 그러나 끝내 답하지 않은 물음이 따른다. 동지 안의 차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적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다. 어려운 것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길을 고집하는, 바로 곁의 그 사람이다. 오랫동안 민주화운동과 민주진보정치를 지켜보며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적을 향한 증오는 때로 동지에게로 번진다. 불은 바람을 가리지 않는다. 처음엔 적을 향하던 분노가 어느새 충분히 싸우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덜 급진적인 동지를 겨눈다. 그다음엔 “저 사람이 성공하느니 차라리 실패하는 게 낫다”는 감정이 고개를 든다. 일종의 ‘적대의 내향화(內向化)’이다. 나는 이것이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비극의 첫 장이라고 생각한다.

 

그 극단의 얼굴은, 다행히 우리 안이 아니라 1972년 일본 아사마 산장 사건과 그 과정에서 노출된 ‘베이스캠프’ 사건에서 볼 수 있었다. 연합적군은 경찰과 총구를 마주하기 전 이미 스스로를 허물고 있었다. “사상성이 부족하다” “혁명성이 철저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동지를 둘러싸고 때렸고, 끝내 죽였다. 쓰러진 건 적이 아니라 동지였다. 그 겨울 이후 일본 신좌파는 대중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었다.

 

무엇이 동지를 적으로 바꾸었는가. 출발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순수한 열망이었다. 비극은 그 열망이 절대가 되면서 시작됐다. 혁명이 문턱에 와 있다고 믿는 순간, 장애물은 타방(他方)의 적만이 아니라 아방(我方)에서 걸음을 늦추는 사람이 된다. 마침내 전도가 일어난다. 혁명을 위해 동지를 치는 것이 아니라, 동지를 치는 일 자체가 혁명이 돼버린다. 나는 “20세기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막이 올랐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로 막을 내렸다”고 말한다. 희생적 투쟁에 몸과 마음을 맡길 때 투사들은 순수 그 자체였지만, 혁명(자기희생적 운동)이 체제(권력)가 되는 순간 순수의 근저에 이익의 시선이 흘러들고 자기정치와 자기 집단정치의 동학이 작동한다. 여기에 고양기와 퇴조기의 다른 결의 균열이 작용한다. 고양기의 전투성은 쉽게 적을 향하지만, 열기가 식는 퇴조기에는 상황의 복잡함이 동지의 불철저함 탓으로 돌려진다. 적은 그대로인데, 시선은 안쪽을 향한다.

 

1980년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선 정의로운 싸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많은 청년은 ‘레닌’을 꿈꾸었고, 나는 그 급진성을 지금도 아름답게 기억한다. 문제는 치열함이 절대가 될 때였다.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순간, 생각이 다른 동지는 타도의 대상이 된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견디지 못하는 역설이 거기서 태어난다. 순수성의 역설이라 부를 만하다.

 

동지 사이의 다름을 견디는 능력

 

여기서 우리는 동지 안의 다원성이라는 문제와 마주한다. 이것은 원칙 없는 타협도, 모든 의견이 옳다는 말도 아니다. 정당도 운동도 본래 한 덩어리가 아니다. 여러 갈래의 생각이 모여 흐르는 강이다. 민주주의란 그 갈래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함께 흐르며 하나의 물길을 내는 과정이다. 건강함은 차이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차이를 다스릴 수 있는 상태에 있다. 한 진영이나 정당의 수명은 얼마나 많은 다름을 품을 수 있는가, 즉 ‘동지적 다원주의’에 달려 있다.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도저히 함께할 수 없다면 ‘분립(分立)’이 더 생산적일 때도 있다. 여기서 아무도 진리를 독점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동지를 향한 증오로까지 번지는 치열함이 대중에게 버림받을 과잉인지, 끝내 더 큰 진보를 이끄는 치열함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맬컴 엑스를 함부로 폄하할 수 없듯이, 그 판단은 결국 대중의 몫이다. 정치는 대중을 관객으로 한 공감 창출의 전략예술이다. 안쪽의 차이에 발이 묶인 싸움이 대중의 외면을 받는 순간, 정치는 이미 제자리를 떠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찰의 여백이 아닐까. 지금 내가 그어놓은 적과 동지의 경계도 역사의 긴 눈으로 보면 모래 위의 선일지 모른다. 나 스스로도 극단적인 치열함 속에서 강렬한 전투성을 내뿜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의 발언과 언행을 지금 돌이켜보면, 얼굴이 후끈거릴 때도 많다. 치열함은 역사를 전진시키지만, 매 순간의 그 치열함이 역사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1980년대의 치열함은 온건한 열망까지 품는 리버럴의 자리를 남겨뒀지만, 지금의 균열 속엔 리버럴이 설 자리가 없다. 어쩌면 성찰적 여유를 가지고 증오했던 동지와의 공통성을 찾는 것이 역사적으로 올바른 경로였을 때도 있다. 물론 아무도 ‘전지적’ 평가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니다. 당연히 겸손이 필요하다.

 

민주주의 정치의 지속성을 위해서는 적과 동지를 가르는 능력만큼 동지 사이의 다름을 견디는 능력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어쩌면 그 성숙함 하나일지 모른다.

                                    조희연 성공회대 석좌교수·전 서울시교육감

 

 

 

 "캐나다 시인 앤 카슨은 재치와 상상력,

그리고 온전히 그녀만의 스타일로 고전을 재창조했다"

 

 
2026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앤 카슨  [로이터=연합 자료사진]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8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자국 작가 앤 카슨(76)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며 "캐나다에도 자랑스러운 순간"이라고 말했다.

 

카니 총리는 이날 엑스(X·옛 트위터)에 "캐나다 시인 앤 카슨은 재치와 상상력, 그리고 온전히 그녀만의 스타일로 고전을 재창조했다"며 "그녀는 고대 이야기를 새로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문학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꿔놨다"고 적었다.

 

그는 "앤,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린다"며 "이는 대단한 성취이자 캐나다의 자랑스러운 순간"이라고 덧붙였다.

 

카슨은 캐나다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고전학자, 번역가, 에세이스트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나 토론토대에서 고전학을 전공했으며, 이후 캐나다와 미국 대학 여러 곳에서 고전을 가르쳤다.

 

2022년 아이슬란드 시민권을 취득한 복수 국적자로, 캐나다와 아이슬란드를 오가며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스웨덴 한림원은 카슨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카슨은 고전 전통과 유희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현대 문학을 위한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내 대담하고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고 밝혔다.

 

캐나다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두 번째로, 2013년 앨리스 먼로 이후 13년 만이다.                                                                                               < 김연숙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