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역사를 망각한 시대착오적 행위, 개탄"
다카이치 총리는 공물, 현직 방위상 직접 참배
“다카이치 총리의 영령에 대한 마음 불변”
국가 책임과 가해 역사 덮으려는 ‘영령 타령'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쟁범죄자 14명도 합사
강제합사 한국인 2만 1000여 명 유족들 소송
일본 최고재판소, 청구 기한 지났다며 기각
그럼에도 유족들의 소송은 오히려 늘어나

 

8월 15일,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서 제2차 세계 대전 항복 81주년을 맞아 우익 단체 회원들이 일본 국기와 플래카드를 들고 전몰자를 추모하고 있다. 2026.8.15. 로이터 연합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전일(‘종전기념일’)인 15일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대신(방위상)을 비롯한 현직각료와 집권 자민당 핵심간부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또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도 스즈키 슌이치 간사장을 통해 ‘다마구시료’(玉串料. 신사 제사의식에 내는 공물과 신주에 대한 사례비)를 냈다.

 

이날 도쿄 구단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는 현직 각료(국무위원)로서는 고이즈미 방위상 외에 기가와타 히토시 어린이·여성정책담당상, 오노다 기미 외국인정책담당상 이 직접 참배했으며, 이로써 현직 각료들의 패전일 야스쿠니 참배는 7년 연속 이어졌다.

 

이에 한국과 중국 등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만행을 겪었던 나라들은 거세게 비판하고 나섰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정부는 이날 외교부 대변인 논평을 통해  "정부는 일본의 과거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전쟁범죄자를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의 책임 있는 지도급 인사들이 또다시 공물을 봉납하거나 참배를 되풀이하는 등 역사를 망각한 시대착오적인 행위를 한 데 대해 개탄을 금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일본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이 역사를 직시하고 과거사에 대한 겸허한 성찰과 진정한 반성을 행동으로 보여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외교부도 대변인 입장 자료를 통해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군국주의의 정신적 도구이자 상징"이라고 지적한 뒤 "이는 역사적 정의에 대한 모욕이자 문명의 기본 규범에 대한 도전이며 전후 국제질서에 대한 도발"이라고 비난했다.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방위상이 8월 15일 일본 도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제2차 세계 대전 항복 81주년을 맞아 전몰자를 추모하고 있다. 2026.8.15. 교도 로이터 연합
 

“다카이치 총리의 영령에 대한 마음은 불변”

 

자민당 핵심간부들로는 스즈키 간사장 외에 아리무라 하루코 총무회장, 니시무라 야스토시 선거대책위원장이 참배했으며, 원래 참배할 예정이었던 고바야시 다카유키 정조회장은 자신의 지역구 치바현의 폭우피해지를 둘러보기 위해 이날 참배를 미뤘다.

 

스즈키 간사장은 참배 뒤 다카이치 총리의 다마구시료를 대리로 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총리가 자민당 총재로서 사비(개인 돈)로 다마구시료를 냈다며 “다카이치 총재의 평소 영령에 대한 마음은 나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총무상과 경제안보상 재임 중에는 매년 패전일에 계속 참배했으나, 2024년 자민당 총재선거에 입후보했을 때는 기자들에게 “내심, 마음의 문제다.앞으로도 (참배를) 계속하고 싶다”며 총리에 취임하더라도 참배를 계속하겠다는 생각을 밝혔다. 그러나 2025년 10월 총리 취임 뒤에는 올해 4월의 춘계례대제(봄철에 일본 각지 신사에서 올리는 주요 제사행사) 기간을 포함해 야스쿠니 신사에 직접 참배하지는 않았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참배 뒤 기자들의 질문에 응하지 않고 바로 차를 타고 떠났다. 그는 농림수산상, 환경상 시절을 포함해서 매년 8월 15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2025년 10월 방위상 취임 뒤의 기자회견에서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 분들에 대해 존숭의 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부전(不戰)의 맹세를 하는 것 자체는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8월 15일,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항복 81주년을 맞아 도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일본 국회의원들이 신토 사제를 따라가고 있다. 2026.8.15. 지지통신 AFP 연합
 

아사히 “중국과 한국의 반발 피할 수 없을 것”

 

일본 패전일에 방위상이 참배한 것은 2024년에 기하라 미노루 당시 방위상(지금은 관방장관)이 참배한 이후 두 번째이며, 그 이전에는 2021년에 기시 노부오 당시 방위상이 패전일 이틀 전에 야스쿠니를 참배했고, 방위성이 성으로 승격되기 전인 2002년에는 나카타니 겐 방위청장관이 패전일에 야스쿠니를 참배했다.

아사히신문은 이날 현직 방위상의 야스쿠니 참배에 중국과 한국이 반발할 것은 필지의 일이라고 지적했다.

 

국가책임과 가해 역사 덮어 감추는 ‘영령’타령

 

이와 관련해 포토저널리스트(사진작가) 야스다 나쓰키 D4P 부대표는 아사히에 기고한 논평에서 “다카이치 총재의 평소 영령에 대한 마음은 나도 잘 알고 있다”고 한 스즈키 간사장 말을 겨냥해 “‘천황을 위해’ 전사하면 ‘영령’이 될 수 있다고 선전하면서 전쟁에 동원한 국가폭력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다는 것인가. ‘영령’은 그런 국가책임과 가해의 역사를 덮어 감추려는 말로 기능해 오지 않았나”라고 비판했다.

 

야스다 부대표는 또 식민지 지배 때문에 일방적으로 ‘황국신민’이 돼 가족들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야스쿠니에 ‘합사’된 (조선)사람들이 지금도 계속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며 “이런 역사적 경위까지 포함해서 (진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면, 각료와 총리의 참배를 ‘내심, 마음의 문제’로 왜소화하고 바꿔치기할 순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8월 15일 '모두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으로 참배한 오노다 기미 외국인정책담당상. 2026.8.15 아사히신문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쟁범죄자 14명도 합사

 

야스쿠니에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주범인 도조 히데키 육군대장·총리를 비롯한 A급 전범자 14명도 합사돼 있다. 이들은 ‘쇼와 순난자’ 명목으로 1978년 10월 17일 합사됐으며, 이는 일본정부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는 도쿄 전범재판 판결을 사실상 부정하고 그들을 애국순국자로 추모함으로써 일제의 전쟁범죄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14명은 도조와 함께 사형당한 도이하라 겐지 육군대장·관동군 관계자, 마쓰이 이와네 육군대장·중지나 방면군 사령관, 무토 아키라 육군 중장·군무국장, 히로타 고키 총리·외무대신, 이타가키 세이시로 육군대장·관동군 참모장, 기무라 헤이타로 육군대장·버마 방면군 사령관, 병사한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 그리고 종신형을 받은 고이소 구니아키 육군대장·총리,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대장·관동군사령관·참모총장, 시마다 시게타로 해군대장·해군대신 등이다.

 

고이즈미 방위상 야스쿠니 참배의 5가지 문제

 

아사히는 고이즈미 방위상의 야스쿠니 참배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5가지로 정리했다.

 

먼저 ‘A급 전범’들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에 현직 방위상이 참배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짚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예전 군국주의 시절(일제) 정신적 지주였던 국가신도의 중심적 시설이고, 극동국제군사재판(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군 등 연합군이 주도한 전범 처리 ‘도쿄 재판’)에서 ‘A급 전쟁범죄자’로 판정받은 14명이 합사돼 있다. 일본 방위성은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육해공 3자위대의 야스쿠니 신사 ‘부대(군대) 참배’를 금지하고 있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사인(개인)’ 입장에서 하는 참배임을 강조하지만 그가 국가조직의 수장이라는 점은 지워질 수 없어 사실상 자위대원들의 야스쿠니 참배를 부추기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두 번째로, 고이즈미 방위상의 발언을 문제삼았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참배 뒤 기자들의 취재에 응하지 않았으나, 2025년 10월의 방위상 취임 때는 기자회견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 분들에 대해 존숭의 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부전의 맹세를 하는 것 자체는 어느 나라에서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야스쿠니 참배를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기 위한 당연지사라는 강변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전의 농림수산상, 환경상 시절을 포함해 매년 8월 15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그의 아버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도 2001년 총리 취임 뒤 매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해 한국, 중국과의 관계를 경색시켰다. 특히 총리 퇴임 직전인 2006년에는 8월 15일 패전일 당일에 참배했는데, 현직 총리가 패전일에 참배한 것으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 21년만의 일이었다.

 

세 번째, 특히 지금 악화일로인 중국과의 관계에 끼칠 영향에 대해 짚었다. 다카이치 총리의 지난해 10월 ‘대만 유사시’ 관련 국회 답변 이후 중일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가운데 중국은 다카이치 정권의 방위력(군사력) 강화에 대해 ‘신형 군국주의’라며 거듭 비판해 왔다. 일본은 중국에 동조하는 나라들이 늘어날 것을 경계하면서 중국의 주장을 부정하는 대응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고이즈미 방위상의 참배를 근거로 중국이 일본의 ‘신형 군국주의’ 비판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

 

81주년 광복절을 맞아 서울 보신각 앞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끝장 낸 것을 기뻐하며 참가자들이 세 차례 만세를 외치고 있다.환호를 보내고 있다. 2026.8.15 AP 연합
 

한국과의 관계 악화 가능성 우려

 

네 번째, 한국과의 관계 악화 가능성에 대한 우려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참배가 ‘양호한 기조’ 위에 있는 한국과의 관계에도 찬물을 끼얹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취임 뒤 한국의 안규백 국방장관과 여러차례 회담하고 한국 공군기의 오키나와 급유 지원 등 ‘방위협력·교류를 조금씩 진척시켜 왔다.

 

일본은 자위대와 한국군간 연료 등의 물자를 원활하게 상호융통할 수 있게 하는 ’물품역무 상호제공협정‘(ACSAㆍ상호군수지원협정)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한국에는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를 배경으로 특히 ’진보(혁신)계‘의 이재명 대통령 지지층에서 일본과의 방위협력 강화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뿌리 깊다. 고이즈미의 참배는 이런 과제를 한층 더 복잡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다섯 번째로 고이즈미의 정치적 행보로 인한 대외관계 악화 가능성, 특히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외무성 등 관련 부서의 우려다. 외무성 관계자는 고이즈미 참배와 관련해 “중국과의 관계는 이미 악화될대로 됐으나 문제는 한국이다. 양호한 분위기가 끝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고이즈미는 방위성의 우두머리이자 장차 총리 후보 물망에 올라 있기도 한 정치가다. 총리관저의 관계자는 “공인으로서의 방위상 역할보다 우파의 지지라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강제합사당한 한국인 2만 1000여 명 유족들 소송

 

한국과는 일제 강점기에 강제동원당했다가 사망한 수만 명의 한국인(조선인)들을 본인은 물론 유족과의 상의도 없이 일본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을 제사지내는 야스쿠니 신사에 일방적으로 합사한 중대한 문제가 문제가 있고, 이를 둘러싼 유족들의 합사 폐지 및 배상 요구 소송 제기로 재판도 진행 중이다.

 

자료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어서 정확한 수를 확인할 순 없으나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는 ’2만 1000여 명‘의 조선인 강제동원 전몰자들이 합사돼 있다. 대다수는 식민지배 시절 일본군의 군인, 군속으로 강제동원당했다가 전사한 사람들이다.

 

조선인 전몰자들의 야스쿠니 합사는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으나 일본 패전과 군국주의 해체 뒤인 1959년에 1만 9650명이 한꺼번에 합사되면서 그 차원과 의미가 달라졌다. 조선인 합사는 한일 국교정상화 1년 전인 1964년에도 82명이 합사되는 등 1975년(509명)까지 계속돼 왔다.

 

문제는 일본의 일방적인 합사와 그에 대한 유족들의 반발이다. 유족들은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조선인 전몰자 합사가 본인과 유족들의 동의 없이 일본정부의 자료와 결정을 토대로 일방적으로 이뤄졌다고 반발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2001년 이후 유족들은 일본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상대로 합사 취소와 손해배상 등을 요구하며 잇따라 소송을 제기해 왔다.

 

일본 최고재판소 청구기한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

 

2025년 1월 17일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는 유족들 27명의 상고를 기각했다. 그 근거는 ’제척기간‘이었다. 1959년에 합사된 지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국가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간이 지났다는 얘기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 합사가 정신적인 피해를 안겨 주지 않았다”고 적극적으로 판단해서가 아니라 20년이라는 기간 제한으로 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 최고재판관들 중엔 이에 대한 다른 의견을 낸 재판관도 있었다. 미우라 마모루 재판관은 유족이 자신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합사로 사망한 근친자들을 경애하고 추모하는 평온한 정신생활이 방해받을 수 있다며 “유족의 고통에는 법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도 결국 “이번 청구에 대해서는 제척기간 문제가 있다”며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진상규명과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매번 이런 제척 사유 등을 들이대며 거의 모두 배상 불가 판결을 내려 왔다.

 

8월 15일, 일본 도쿄에서 욱일기 문양의 옷을 입은 남성들이 제2차 세계 대전 항복 81주년을 맞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 전몰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2026.8.15. 로이터 연합
 

그럼에도 유족들의 소송은 오히려 더 확대

 

지금도 소송은 진행 중이다.

2025년 9월 제3차 소송에서 한국인 유족들 6명은 도쿄 지방재판소에 새소운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에는 ’손자 세대‘가 처음으로 원고로 나섰다.

요구 내용은 “야스쿠니 신사의 제사 명부 등에서 고인들의 이름을 삭제할 것”, “합사에 대해 사죄할 것”, “일본정부의 정보제공 행위에 대해 책임 질 것”, 그리고 “손해를 배상할 것” 등이다.

 

2025년 12월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소송이 제기됐다. 12월 23일 한국인 유족 10명이 서울 중앙지법에 제소한 이 소송은 야스쿠니 신사의 한국인 합사에 대해 한국 법원에 제소한 최초의 소송이다. 원고 쪽은 일본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상대로 합사 취소와 총액 8억 8000만 원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원고 쪽은 사전합의 없는 일방적 합사가 인격권과 추모 애도의 자유, 양심과 종교의 자유 등을 침해했다고 주장한다.

 

또 올해 6월에는 재일동포 3세 여성이 처음으로 합사 취소 소송에 참여했다. 이 여성의 경우 조부모 형제 2명이 일본해군 군속으로 강제동원돼 전사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사실을 조사를 통해 확인한 뒤 제소했다.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 소송문제는 일본 최고재판소의 기각으로 끝난 게 아니라 여전히 현재 진행중이다.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법정투쟁이 한국에까지 무대를 넓혀가면서 손자 세대까지로 확대되고 있다.              < 한승동 기자 >

 

민문연 "안상호 친일...친일파 기득권 대물림 성찰해야

 

이토 히로부미 추모, 대정친목회 가입 등 행적
『친일인명사전』 빠진 건 기준에 못 미쳤기 때문
등재 안 됐다고 친일파 면죄부 주어진 것 아냐
전문직을 모두 배제했다는 주장은 명백한 오해

 

임종국 "친일 행위보다 반성 없는 태도가 문제"
박유하 "친일 강박증과 순결 강박증 빚은 결과"
배기성 "어떻게 '오욕을 끌어안으라' 말하는가"
"조봉암 손가락 잃은 사연 안다면 그럴 수 있나"

 

광복절 81주년을 하루 앞두고 일제강점기 전문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안상호 관련 논란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최근 언론 및 온라인 공간을 통해 배우 하영(본명 안하영)의 증조부 안상호(1874∼1927)의 친일 행적과 후손들의 언행에 대한 논란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는 것이 계기가 됐다.

 

민족연구소는 대체로 사실에 부합하지만 일부 과도한 해석이나 오류가 있어 적지 않은 혼란이 일어나고 『친일인명사전』에 안상호의 이름이 수록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았다면서 안상호의 실제 행적과 역사적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보도자료는 세밀한 내용으로 짜였다.  ▲ 안상호의 주요 친일 행적 ▲ “어떤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고 친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신중론에 대해 ▲ “친일인명사전에서 전문직은 모두 다 뺐다”는 주장에 대해 ▲친일파 명단마다 수록 인원이 다른 이유 ▲ 친일인명사전 미등재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 연좌제적 비난 경계와 구조적 성찰의 필요성 등이다.

 

연구소는 먼저 안상호가 대한제국 관립일어학교와 도쿄 자혜의원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전문직 의사였지만, 화려한 이력 이면에 다음과 같은 친일 · 부일 협력 행적이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라고 정리했다. 

 

● 일제침략의 원흉 이토 추도 : 1909년 11월,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해 민간에서 조직한 ‘국민대추도회(대한국민추도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실제 추도회가 진행되지는 않았으나, 관민추도회와 별도로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식민통치 및 수탈기구 참여 : 경성부윤의 자문기구이자 일제 식민통치를 뒷받침한 지방행정 보조기구인경성부 협의회원(1914, 1918, 1920, 관선 임명직)을 역임했다. 또 식민지 금융수탈기구인 경성 종로금융조합의 조합장(1922∼1927)을 지냈다.

● 내선융화 및 친일단체 활동 : 경성신사의 씨자총대(신도 대표, 1915), 내선융화 단체인 대정친목회(대정실업친목회) 평의원(1916), 반일운동 배척을 표방한 동민회 회원(1924) 및 평의원(1925∼1927)으로 활동했다.

● 동화주의의 내면화: 『매일신보』(1918.12.10.) 기사에서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일본 사람과 똑같다”, “조선 사람과 상관이 없다”라며 밝히는 등 일제의 동화정책을 전면적으로 내면화한 대표적 인물로 소개되었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 '일선동화'의 모범가정으로 소개된 안상호의 가족 사진. 1918년 12월 10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안상호는 "나는 일본 사람과 똑같다. 지금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매운 음식은 조금도 못 먹는다"며 "다섯 자녀들은 일본어만 쓰고 조선말은 전혀 하지 못한다. 조선 사람과는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연합

 

「왕세자전하(王世子殿下) 가례(嘉禮) 전에 일선동체(日鮮同體)의 가정방문(家庭訪問): 전연(全然)히 내지화(內地化)한 의사 안상호씨의 가정」

-> 安商浩씨는 일선동체의 가정을 만드는데도 제일 먼저 성공의 기를 들었다. (중략) 기자는 먼저 살림 재미를 물었다. 안씨는 ‘그렇지요 별수 있나요 나는 무엇[무릇] 일본사람과 똑같지요. 나는 지금 조선옷은 한 벌도 없습니다. 그리고 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어요. 일본사람과 똑같지요. 그러하니까 불편한 점은 조금도 없어요. (중략) 조선 사람과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어요. (중략)’ 안씨는 지금부터 열두해 전에 의친왕이 동경에 계실 때에 의친왕의 시의로 있었는데 그때에 씨의 부인 磯子와 서로 알게되어 기자부인의 모친에게 청혼을 하여 전후 열한해 동안 고락을 같이 하였는데 (중략) 자녀가 모두 5남매이며 (중략) 안씨가 도리어 아내를 따라서 일본사람이 된 셈이다. (중략) ‘나는 조금도 조선사람하고 상관이 없으므로 일본에 사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고 열 한 해 동안을 조선에 있었어도 조선말은 한마디도 못해요’

 

물론, 대정친목회와 동민회에 이름을 올렸다고 친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신중론을 펴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대정친목회는 고문 이완용 · 민영휘, 회장 조중응 등 거물 친일파들을 중심으로 조선인 전직 관료 · 귀족 · 대지주 · 실업가들이 결집하여 ‘내선융화’를 표방하며 결성한 단체다. 

 

조선인의 단체 결성과 결사 활동이 극도로 억압되던 1910년대 무단통치 아래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1930년 전시체제기에 반강제적으로 조직된 전쟁협력단체와는 결성 배경과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당시 조선인 단체로는 종교단체를 제외하면 대정친목회가 거의 유일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친일 엘리트의 모임이었던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유력자와 일제 당국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자임했다. 나아가 3·1운동 전후 일제가 이른바 문화통치(민족분열책)를 획책할 당시, 대정친목회는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민족의 저항 의지를 무력화하는 정신적 · 사회적 협력기구로 기능했다. 이들은 3·1운동을 반대하고 일제 통치에 순응하면서 ‘독립불능론’을 주장하는 한편, 산업의 발달과 문화 향상을 내세우는 개량주의적 ‘실력양성론’을 펼쳤다.

 

안상호는 이 단체의 평의원(1916.11.29)으로 명단이 확인된다고 밝힌 연구소는 시대적 상황과 단체의 성격을 고려할 때, 평의원(일종의 대의원 격)으로 참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친일 행위라고 강조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부 유튜브 방송 등에서 “친일파인명사전 708명에서 전문직(의사, 변호사) 이런 사람들은 다 뺐다”, “시대의 아픔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취지의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전하며 두 가지 명백한 사실관계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2009) 수록 인원은 총 4389명이다. 한 방송에서 언급된 “708명”은 2002년 광복회가 자체 선정한 692명에 국회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의원모임)이 16명을 추가하여 발표했던 ‘친일파 708인 명단’을 혼동한 것이다.

 

둘째, 『친일인명사전』이 전문직을 일괄 배제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해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문화·예술·종교·법조·언론·교육 등 각 분야 친일 인물이 다수 등재되어 있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기준에 따르면, 기술직이나 전문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 수록 대상이 되지는 않지만, 복수의 친일협력단체에 가담했거나 지속적이고 능동적인 부일 행적이 입증된 전문직 인사는 엄격한 심의를 거쳐 사전에 수록하였다. 즉, 핵심 기준은 친일행위의 자발성·반복성·지속성과, 식민통치기구 내 특정 지위(귀족, 중추원, 고등관, 경찰간부, 군장교, 친일단체 간부급) 여부였으며, 전문직 여부는 면책 사유가 될 수 없었다.

 

안상호의 경우, 단순한 의료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경성부 협의회원, 대정친목회 및 동민회 평의원, 경성종로금융조합장 등 식민통치기구와 관변단체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지식인과 전문직 인사들의 친일은 사회적 영향력과 이데올로기 확산 효과가 막대했다는 점에서 결코 그 역사적 책임을 가볍게 볼 수 없다.

 

자연스럽게 친일파 명단마다 수록 인원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그 차이는 기준의 자의적 왜곡 또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 아니라, 조사 주체의 성격, 조사 목적, 법적‧학술적 기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48년 제헌국회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인신 구속과 공민권 제한 등 직접 처벌을 목적으로 출범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조직적 방해와 경찰의 특위 습격으로 조기 와해되었다. 2005년 출범한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는 법적 행정처분이 따르는 국가기구였기 때문에 지위 자체보다는 엄격한 행위 입증에 집중하였고, 입법 당시의 여야간 절충 등 태생적 한계로 인해 규모가 1006명에 머물렀다.

 

반면 민간 학술단체가 주도한 『친일인명사전』은 반민족행위자만이 아니라 부일협력자까지 포함하였으며, 식민통치를 지탱한 고등관료, 고등경찰, 군 장교 등 ‘지위범’을 포함하고 만주 등 해외 지역까지 범위를 확장하였으며, 지식인과 전문직의 역사적 책임을 가장 포괄적이고 엄정하게 물었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안상호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연구소는 강조했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여부는 편찬위원회의 선정 기준과 행위의 자발성, 적극성, 반복성, 지속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뒤 결정했다는 것이다. 2009년 발간 당시 민족문제연구소가 축적한 자료로는 안상호의 친일 행적이 선정 기준에 미달했기 때문에 편찬위원회의 결정으로 수록을 보류하였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해방 60여 년 만에 결실을 맺은 사전 편찬 작업은 당시 축적된 학술 연구 성과와 사료의 한계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인력과 자료 부족으로 인해 판단이 보류된 인물도 다수 존재했다. 『친일인명사전』을 비롯한 과거사 기록 사업은 완료된 결과물이 아니라 사료의 발굴과 검증을 통해 ‘보유편’과 ‘개정증보판’으로 이어지는 현재진행형 학술 사업이다. 새롭게 확인되는 관보, 신문 기사, 단체 명부 등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학술 검증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라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번 논란의 본질에 대해 배우 개인이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조상의 식민지 협력 이력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 성찰 없이 발언하여 대중에게 상처를 준 ‘역사인식과 성찰 부재의 문제’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조상의 과오를 성찰 없이 미화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소비한 태도에 대한 겸허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역사적 과오에 대한 법적·정치적 책임은 행위 당사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원칙이며, 선대의 과오에 대한 단죄를 후손에게 전가하는 연좌제적 발상은 민주 사회에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연구소는 분명히 했다. 그러나 강성현 교수가 지적했듯, “어떤 제도가 그 이력을 씻어주었나… 이 질문들이 ‘연좌는 안 된다’는 한 문장에 막혀버릴 때 가장 크게 손해 보는 쪽은 친일 청산이라는 의제 자체다”라는 경고를 새겨야 한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단순히 ‘후손에 대한 연좌제 금지’라는 방어 논리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 하에서 형성된 전문직 계보와 사회적 자산이 해방 후 청산 없이 어떻게 기득권으로 승계되고 세습되었는지에 대한 구조적 질문과 역사적 성찰로 이어져야 마땅하다는 것이 민족문제연구소가 내린 결론이다.

 

 

앞서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사무처장은 지난 13일 YTN 라디오 '장성철의 뉴스명당'에 전화로 출연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싣는 기준, 검증 문제, 이번 논란의 의미와 파장 등을 짚어봐 눈길을 끌었다.  방 처장은 이번 논란이 불거진 파장의 의미를 묻는 진행자에게 "연초부터 우리는 스타벅스 탱크 데이, 배재고 사태를 겪지 않았나?" 되묻고 "지금도 우리는 그 문제가 비단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지 않나?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하영 씨의 행동이나 태도가 적절치 않았지만, 그러면 과연 우리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 얼마나 성찰하고 지속적으로 보고 있는가. 이렇게 스스로 돌아봐야 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역사를 돌아보는 한 방법으로는 올해 초 네덜란드에서 약 40만 명의 나치 당원 명부가 공개돼 화제가 됐던 일을 떠올렸다. 독일 역시 1000만 명의 나치 당원 명부가 공개됐다. 독일 인구 6명 중의 한 명정도가 나치 당원이었다. 그 명단이 언론사 <디 차이트> 홈페이지에 공개돼 독일 사람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만들어놓았다고 소개했다.


아울러 방 처장은 "이렇게 명단을 공개하는 뜻은 '저 집안은 나치 당원 집안이야'라고 지목하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찰하는 계기, '우리 할아버지가 집안에서 인자한 어르신이었는데 역사적으로 이런 악행에 가담했거나 방관했구나' 이렇게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태도로 사건을 들여다봤으면 좋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방 처장은 "평생을 친일파 연구에 바친 임종국 선생께서 살아계셨다면 오늘의 하영 씨 논란에 어떤 말씀을 해주셨을까?" 묻는 진행자에게 "이런 어록을 남기셨다. '친일했던 일제 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반성과 화해,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더 문제다. 이런 문제를 우리가 철저하게 바꾸지 않는다면 민족사의 기강은 헛말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바꾸지 않는다면 민족 사회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런 말씀이 요즘 상황에 적절하지 않나 싶다"고 답했다.

 

아울러 방 처장은 "앞서 모범적인 사례가 있다. 한 여배우(이지아)는 처음에 할아버지가 친일파로 등재돼 있어서 억울해 했지만, 비공식적으로 (연구소를) 찾아와 저희와 함께 그(할아버지의) 행적을 함께 공부를 했다. 그 분은 지금도 계속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상의 행적을 반성하고 있지 않나?"고 되묻고 "연예인은 어쨌든 공인으로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런 공적인 태도가 필요하고, 하영 씨가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성숙하고 훌륭한 배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배우 하영과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넷플릭스와 연합 자료사진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자 '제국의 위안부'로 숱한 비난과 질타를 받았던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까지 나섰다. 박 교수는 11일 밤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당대 최고의 의사" 안상호를 둘러싼 친일 논란을 두고 "친일 강박증과 순결 강박증이 빚은 결과"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안상호에 대해 "조선의 양의 1호이자 대한제국 1호 국비유학생으로, 대한제국이 만든 인재였다"고 소개한 뒤 "귀국 후 순종 주치의가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고 부도 따라왔을 것"이라며 "친일로 쌓은 명예라기보다 스스로의 실력과 국가의 지원으로 의료계 파이오니아(개척자)가 된 이로 보인다"고 적었다. 특히 안상호가 을사오적 이완용을 치료한 이력과 관련해서는 "이완용이 아니라 서민이라도, 가능하다면 당대 최고 의사였던 그에게 치료받고 싶었을 것"이라며 "아픈 사람이라면 실력 있는 의사에게 치료받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한 발 나아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도층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도 "정치·경제·문화·교육 모든 분야에서 리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교육부터 활동까지 구조적으로 친일파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들을 부정한다면 일제시대 내내 인재를 키우지 말았어야 했다"며 그렇게 한다면 조선인 정치가와 기업인, 학교장 등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된다고 지적했다.

 

또 하영을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인 조상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수십만명이 모였다는 지원병 지원자들 가운데 당신의 조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창씨개명을 신청한 조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자신이 이런 발언을 하는 이유를 "규탄부터 하고 보는 당신의 폭력이 한 사람을 사정없이 죽이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순결 강박, 친일 강박증이 이 모든 걸 만든다"며 "치유하려면 오욕을 내 것으로 끌어안는 태도부터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역사 강사 배기성 씨는 13일 유튜브 채널 '최욱의 매불쇼'에 나와 "과거 일본군 병사와 위안부가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고 망언을 늘어놓은 박 교수가 또다시 수많은 일본 식민지배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씨는 특히 "치유하려면 오욕을 내 것으로 끌어안는 태도" 운운한 것은 일제 식민 지배에 희생된 많은 이들을 참담하게 모욕하는 언동이라고 격분했다.

 

재판정의 죽산 조봉암. 그는 늘 의수였던 일곱 손가락을 가리기 위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마치 결박당한 것처럼 보이는 자세로 앉아 있곤 했다. 

 

그는 죽산 조봉암이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재판받을 때 왜 늘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는지 아느냐고 진행자 등에게 묻고는 일곱 손가락을 잃은 사연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만주의 교도소에서 7년 수감돼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첫사랑이었던 아내가 옥바라지를 하다 동사했다는 소식을 전하던 일본인 간수가 '아내가 세상을 떠나게 만들었으니 너 같은 존재는 목숨을 끊는 게 낫지 않느냐'고 모욕하자 흥분해 이로 손가락들을 끊었는데 실제로 끊어졌다는 것이다. 너덜너덜해진 손가락들을 당국이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그 상태로 지내다 감옥을 나와서야 어렵사리 의수를 마련해 손가락들을 감춘 채 살아갔다는 슬픈 얘기를 전했다. 

 

배 강사는 "이런 잔인하게 슬픈 얘기들을 안다면 어떻게 감히 '오욕을 내 것으로 끌어안으라'고 망발을 늘어놓을 수 있느냐"고 따져물었다.

 

당연히 누리꾼들의 박 교수 비판도 이어졌다. 한 누리꾼은 "시대적 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업을 수행한 '구조적 친일'과는 다른 문제"라며 안상호가 당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어를 사용하지 않고 의복과 음식, 생활방식 등을 일본식으로 했다고 자랑한 것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생계형 협력과 자발적 내선일체를 같은 선상에 놓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안상호처럼 최초의 서양의사 가운데 한 명이었던 김필순, 이태준, 박서양 등은 근대 의학을 배운 엘리트였지만 망명과 의료 활동, 독립운동 지원의 길을 선택했다. 따라서 "그 시대에는 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만으로 모든 행적을 덮기는 어렵다는 비판이 나온다.

 

또 다른 누리꾼은 "그럼 독립운동가들은 물욕이나 명예욕이 없어서 목숨 걸고 항일했느냐"며 "시대가 지났다고 친일 매국노들이 이해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지금이라도 청산해야 할 대상"이라고 비판했다.                                                     < 임병선 기자 >

 

전쟁국가 미국, 광복 81년에 다시 본다

● Hot 뉴스 2026. 8. 16. 10:16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주권을 실제로 잘 쓰는 능력까지 함께 갖춰야
우리 자신의 결정능력을 재설계하자

 

광복 81주년이다. 그 하루 전에, 태평양 건너에서 조용히 마무리되고 있는 일 하나를 먼저 짚어야겠다. 미국이 자기 부처의 이름을 바꾸고 있다.

 

78년 만에 벗은 이름

 

2025년 9월, 트럼프 대통령은 국방부(Department of Defense)를 전쟁부(Department of War)로 부르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튿날 국방부 누리집의 이름이 바뀌었고 주소도 war.gov로 넘어갔다. 부처의 법적 개명은 의회의 몫이지만 그 절차도 진행 중이다. 지난 6월 상·하원 군사위원회가 2027회계연도 국방수권법안에 개명 조항을 넣었고, 7월 22일에는 하원 본회의가 216 대 212로 이를 통과시켰다. 78년 만의 복귀다.

 

주목할 것은 '전쟁부'가 미국의 발명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19세기까지 영국은 War Office, 프로이센은 전쟁성, 일본은 육군성이었다. 전쟁은 주권의 정당한 도구였고, 그래서 부처 이름에 '전쟁'을 넣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그 이름이 세계에서 사라진 것은 1928년 부전조약이 전쟁을 국가정책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게 하고, 1945년 유엔헌장 2조 4항이 무력의 위협과 행사 자체를 금지한 뒤였다. 각국이 '전쟁부'를 '국방부'로 바꾼 것은 그 규범 전환의 언어적 반영이었다. 미국의 국방부도 1947년 국가안보법의 산물이다.

 

 안규백 국방부 장관과 엘브리지 콜비 미국 국방부(전쟁부) 정책담당 차관이 면담을 한 가운데 26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회원들이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6.1.26. 연합

 

그러니 이번 되돌림은 미국이 자기 과거로 돌아가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부전조약 이전의 언어체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유럽이 두 차례 대전을 겪고 스스로 폐기한 원형을, 유럽연합이라는 기획 전체가 그 폐기 위에 세워진 그 원형을, 미국이 되줍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정직해진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정복은 유럽식 세력균형 전쟁의 형태가 아니라 개척과 문명화의 형태를 띠어 왔다. '명백한 운명'은 정복을 정복이라 부르지 않는 언어였다. 유럽은 그래도 전쟁을 전쟁이라 불렀지만, 미국은 그것을 '방어'라, '해방'이라, '자유의 확산'이라 불렀다.

 

인디언 학살이 국가적 기억에서 끝내 청산되지 않은 것도 애초에 그것이 '전쟁'으로 명명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번 개명은 원형의 계승이라기보다 위장의 해제다. 1947년에 전쟁을 방위로 바꾼 것이 냉전기의 자기 정당화였다면, 2026년에 그 옷을 도로 벗은 것은 더 이상 정당화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신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1일 미국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합동기지에서 에어포스원에서 내린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6. 08. 11 [AFP=연합]

 

그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이름이 바뀌었을 뿐, 우리가 겪어온 실체는 늘 그 이름이었다.

160년 전 제너럴셔먼호와 신미양요가 한반도를 외교·군사적 실험장으로 취급했다. 20세기에는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애치슨 라인이,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한국인의 생명과 주권을 전략적 계산의 부차적 요소로 처리했다. 21세기에도 오산기지의 탄저균, 지난달 같은 기지에서 흘러내린 백린, 조지아주에서 쇠사슬에 묶인 기술동맹의 엔지니어들이 이어졌다. 형태는 시대마다 달랐지만 인식체계는 하나였다. 한국을 주체가 아니라 수단으로 보는 시선.

 

그 관성의 가장 이르고 가장 무거운 얼굴이 원폭이다. 두 도시에서 죽거나 병든 이들 가운데 조선인이 10만 명이었다. 그들은 전쟁의 당사자도, 항복 협상의 주체도 아니었다. 타자의 생명은 셈에 넣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계산 — 이것이 원죄의 원형이고, 아직 청산되지 않았다.

 

청산의 길은 법리적으로 이미 열려 있다. 2007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전쟁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을 실체법적으로 소멸시키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여기에 하나를 더 짚어야 한다. 1951년 그 조약이 체결될 때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이유로 서명국 명단에 없었다. 그렇다면 일본과 미국 사이에 오간 상호 청구권 포기가, 애초에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조선인 개인의 대미 청구권까지 지울 수는 없다. 원폭을 설계하고 투하를 결정하고 실행한 나라를 직접 상대할 길이 논리적으로 열려 있다는 뜻이다.

 

방어의 언어를 벗은 나라와 마주 서게 된 지금, 이 오래된 빚을 다시 꺼내는 것은 과거로 가는 일이 아니다. 상대가 자기 이름을 정직하게 되찾았다면, 우리도 정직하게 셈을 청구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안에도 있다

 

여기서 방향을 돌려야 한다. 상대의 이름만 탓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가 속국이 되는 것은 대개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정체(停滯)를 통해 온다. 구한말이 정확히 그 경로였다. 조선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그런데 세도정치가 결정을 소수 가문에 가두면서, 시대의 압력에 반응하는 속도 자체를 잃었다. 군사적으로 정복당하기 훨씬 전에 이미 결정할 능력을 잃은 나라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백은 반드시 밖에서 메워진다. 안에서 결정하지 못하면, 밖에서 결정한 것을 통보받게 되어 있다. 동맹국의 전투기가 통보 없이 우리 상공을 드나들고, 주둔지의 유해물질 사고가 10년 전과 판박이로 반복되어도 국가 차원의 신속하고 일관된 대응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장면들이 그 증거다.

 

백린 사고 이후 한국 사회가 보인 것은 분노가 아니라 피로와 냉소였다. 분노는 아직 재협상의 언어이지만, 냉소와 경멸은 위임의 비가역적 철회다. 그런데 그 경멸은 상대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지난 10년, 한국은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것을 두 차례나 해냈다. 대통령을 두 번 무혈로 끌어내렸고, 연인원 1700만 명이 광장을 지켰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광장이 두 번이나 정권을 바꿔놓은 뒤에도 그 권력을 낳는 규칙 자체는 그대로다. 소선거구제는 건재하고, 거대 양당의 적대적 공생은 여전하며, 국민발안과 시민의회는 여의도 문턱을 넘지 못한다. 국민투표도 없다. 대리인은 위임받는 순간부터 구조를 바꿀 유인을 잃는다. 규칙을 쥔 자들에게 규칙 개정의 전권을 맡겨두는 한, 혁명은 늘 정권교체로 끝나고 구조교체로 이어지지 못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선거를 하루 앞둔 2일 서울 여의도공원 마지막 유세에서 이 후보의 '빛의 혁명' 완성을 위한 승리에 대한 연설을 들은 시민들의 응원봉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2025.6.2. 이호 작가

 

광복 81년, 세 가지

 

그러므로 광복 81주년에 해야 할 일은 세 가지다.

 

첫째, 상대의 이름을 정확히 읽는 것. 미국은 방어의 언어를 벗었다. 그 나라와 맺은 동맹이 무엇을 뜻하는지, 주한미군의 성격과 전시작전권과 연합훈련의 방향을 그 바뀐 이름 위에서 다시 계산해야 한다. 이것은 반미가 아니라 산수다.

 

둘째, 81년 미뤄온 셈을 청구하는 것. 조선인 피폭자와 그 후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은 국제 여론과 미국 의회를 향한 입법 촉구, 배상기금 제안까지 여러 무대에서 계속 살아있는 의제가 되어야 한다. 아울러 미국 안에서 매파의 오판을 바로잡을 책임은 미국 시민 자신에게 있다. 1970년대 처치위원회가 CIA와 NSA의 치부를 미국 스스로 파헤치고 의회 감독체제를 세웠던 그 자기교정 능력이야말로 미국이 존경받던 이유의 실체였다. 결자해지(結者解之), 매듭을 묶은 자가 스스로 풀어야 한다. 스스로 바로잡지 않는 매듭은 남이 잘라낼 수밖에 없다.

 

셋째,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결정능력을 재설계하는 것. 국민발안이 실체적 효력을 갖도록 하고, 국민투표 발의권을 대통령 한 사람의 재량에서 풀어내는 것, 되돌릴 수 없거나 세대를 넘는 결정은 국민이 직접 답하게 하는 것, 매번 국민투표에 부칠 수 없는 사안은 추첨으로 뽑힌 시민이 충분한 정보와 시간을 갖고 숙의하는 시민의회에 맡기는 것들이다.

 

권력의 위임에는 반드시 해지 조항이 있어야 한다. 국민이 멈추게 하고 되물을 수 없다면 그것은 위임이 아니라 양도다. 그 논의를 여는 자리가 선거개혁 시민대토론회이고, 개헌 논의가 다시 열린 지금이 그 좁고도 귀한 창이다.

 

이젠 주권자다운 길을 개척해야

 

미국은 78년 만에 자기 이름을 되찾았다. 감출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니 반길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제 무엇과 마주하고 있는지 헷갈리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어떤가. 광복(光復), 빛을 되찾았다는 이름을 81년째 쓰고 있다. 그런데 되찾은 것은 주권이라는 형식이었을 뿐, 그 주권을 실제로 잘 쓰는 능력까지 함께 얻은 것은 아니었다. 이름은 되찾았으나 이름값은 아직 다 치르지 못한 것이다.

 

상대는 이름을 바꿔 자기 실체를 드러냈다. 우리는 이름을 그대로 둔 채 그 실체를 채워야 한다. 광복 81주년, 다시 원점에 서서 주인에게 물어야 하는 이유다.

                                         <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

 

'체포 방해' 줄줄이 실형 선고…나경원 등도 기소, 실형 받나

 

홍순구 만평작가의 '동그라미 생각'

 

법의 무게와 신속성이 조화를 이룰 때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음을 부디 상기하여, 사법부의 빠르고 올바른 응답을 기대해 본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을 방해한 혐의로 국민의힘 나경원, 김기현, 윤상현, 권영진 의원이 재판에 넘겨졌다. 2차 종합특검은 이들이 단순히 체포에 반대하는 정치적 의사를 표시한 것이 아니라, 관저 앞에서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인간벽'을 만들어 공수처와 경찰의 진입을 실제로 저지했다고 판단했다. 특검은 당시 현장에 있던 공무원들의 진술과 채증 영상, 녹취 등을 종합해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제 주목할 핵심은 사법부가 얼마나 신속한 재판으로 정의를 실현할 의지가 있는지다. 이번 사건은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인 만큼 특검법의 이른바 '633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가지 씁쓸한 기억이 뇌리에 스친다. 바로 2019년 '국회 패스트트랙 충돌 사건' 당시, 정치인들의 특수공무집행방해 1심 선고에 무려 6년 7개월이나 걸렸던 뼈아픈 전례 말이다.

법적 절차에서 피고인의 방어권과 충분한 심리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이지만, 그것이 지나친 재판 지연을 정당화하는 방패가 될 수는 없다.

 

특히 국가기관의 집행 현장을 조직적으로 저지했다는 이번 사건은 헌정 질서의 근간과 직결되어 있다. 법 위반 여부를 가리는 판단이 수년씩 지체될 경우, 판결이 내려질 무렵에는 당사자들이 이미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선거를 치르는 등 법의 심판이 정치적 책임보다 한참 뒤처지게 된다. 이는 결국 법치주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흔들고, 사법 정의의 실효성을 반감시키는 주원인이 된다.

 

사법부에게 바라는 국민의 요구는 명확하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철저한 방어권을 보장하되, 불필요하게 시간을 끌지 않고 신속하고 엄정하게 심리하는 것. 이번 재판마저 과거의 틀을 답습한다면, 사법부의 기소 의미와 심판 의지를 향한 국민의 불신은 더욱 팽배해질 것이다.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법의 무게와 신속성이 조화를 이룰 때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음을 부디 상기하여, 사법부의 빠르고 올바른 응답을 기대해 본다.  < 홍순구 시민기자 >

 

 

한남동 관저 앞에서 영장집행 저지 '육탄방어'
내란특검은 각하했으나 2차 종합특검 재수사
국힘 나경원·김기현·윤상현·권영진 재판 넘겨
"채증 영상 통해 폭언, 인간 벽 등 혐의 확인"

 

'체포 방해' 정점 윤석열은 이미 징역 7년 확정
경호처장 박종준, 차장 김성훈 1심 징역 4·5년
김기현 "좀비 특검의 난동, 권창영 감옥 갈 것"
나경원 "특검의 추악한 만행, 법왜곡죄로 처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경찰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2차 체포영장 집행에 나선 2025년 1월 15일 새벽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입구에서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와 나경원 의원 등이 체포 저지에 나섰다가 입장 발표를 하고 있다. 2025.1.15. 연합

 

12·3 비상계엄 사태를 일으킨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경찰의 체포영장 집행을 '육탄 방어'식으로 가로막았던 국민의힘 의원들이 마침내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내란성 불면증'에 시달리던 대다수 국민의 시선이 집중된 상황에서도 이들 의원이 버젓이 체포 방해 행위를 한 지 1년 7개월 만이다.

 

앞서 이 사건을 수사한 조은석 내란 특별검사팀은 해당 의원들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해 사실관계를 살핀 뒤 폭언이나 폭력 행사 등 혐의가 입증되지 않는다고 보고 각하 처분으로 사건을 종결한 바 있다. 그러나 권창영 2차 종합 특별검사팀은 "채증 영상 등을 확보해 분석한 결과 내란 특검팀의 수사에서 충분히 규명되지 않은 사실관계에 대해 수사할 필요성이 확인됐다"며 재수사를 결정하고 결국 기소함으로써 종합특검팀이 이룬 또 하나의 성과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종합특검팀은 14일 국민의힘 나경원·김기현·윤상현·권영진 의원을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이들 의원은 지난 2025년 1월 15일 새벽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공수처와 경찰로 구성된 공조수사본부가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에 대한 2차 체포영장 집행에 돌입했을 때 다른 국민의힘 의원 30여 명과 보좌진 및 당직자, 그리고 일반 지지자들과 함께 스크럼을 짜고 인간 띠를 만들어 맞선 혐의를 받는다. ☞ 관련 기사 <공조본, 윤석열 관저 진입 시도…국힘 의원들과 몸싸움>

 

공조본의 검사와 수사관들이 이들을 뚫고 관저 입구 쪽으로 다가가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경찰은 "영장 집행을 방해하면 공무집행방해 현행범으로 체포될 수 있다"는 경고 방송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공조본 관계자들이 돌파에 성공하자 국민의힘 의원들은 관저 앞에서 입장문을 발표하고 "불법 영장 집행을 중단하라"며 "공수처, 국수본이 권력욕에 눈이 멀어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의 눈치를 살필 것이 아니라 법과 원칙에 입각해 공권력을 적법하게 적용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2025년 1월 6일 김기현 대표와 나경원 의원 등 국민의힘 의원들이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1차 체포영장 집행을 막겠다며 인간 방패를 형성한 가운데 김 대표가 취재진에게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2025.1.6. 연합

 

당일 관저 인근 곳곳에서는 극우 단체 회원과 유튜버를 비롯한 윤석열 지지자 약 6500명(경찰 비공식 추산)이 밤새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경찰은 기동대를 동원해 관저 정문 앞에 앉거나 누워 농성을 벌이던 이들을 강제 해산하고 진입로를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지지자들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고 고성과 욕설이 난무했다. 법원이 발부한 영장의 정당한 집행을 저지하려는 일부 과격 시위대의 난동을 만류해야 할 당시 여당 의원들이 오히려 한술 더 떠 국회의원 신분을 이용해 윤석열의 인간 방패 노릇을 한 것이다.

 

종합특검팀은 이번 재수사를 통해 공수처 검사 등 체포영장 집행에 참여한 여러 공무원의 진술, 94GB(기가바이트) 상당의 채증 영상에서 확인된 폭언 등 녹취록, 동종 사안에 관한 법리 및 유죄 판결문 분석 등 객관적인 증거를 종합해 나경원·김기현·윤상현·권영진 의원의 혐의 사실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피고인들이 단순히 체포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장에 있던 다수의 사람과 함께 인간 벽을 형성해 관저 내 진입을 저지하는 등 영장 집행을 현실적으로 방해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체포 방해'의 정점인 윤석열은 이미 대법원 3부(재판장 이흥구, 주심 이숙연 대법관)에 의해 지난달 9일 특수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징역 7년의 확정판결을 받은 상태다. 여기에는 계엄 선포 전 국무회의 외관을 갖추기 위해 일부 국무위원만 소집함으로써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국무위원 9명의 계엄 심의권을 침해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에 관한 양형도 포함돼 있다.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백대현 부장판사)는 올해 1월 징역 5년을 선고했지만 2심을 맡은 서울고법 내란전담재판부 형사1부(윤성식 부장판사)는 지난 4월 징역 7년을 선고했고,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다.

 

대통령 경호처의 체포 방해를 지휘한 박종준 전 경호처장과 김성훈 전 차장의 경우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이 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6부(이현경 부장판사)는 지난달 9일 역시 특수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박 전 처장에게 징역 4년, 김 전 차장에겐 징역 5년, 그리고 이광우 전 경호본부장에겐 징역 2년 6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공수처가 체포영장 집행을 시도할 때 관저 진입을 방해한 이들의 혐의를 모두 '중대 범죄'로 규정하고, 아울러 김 전 차장이 윤석열 지시로 군사령관 3명의 비화폰 정보를 삭제하는 데 관여한 혐의(대통령경호법 위반)도 유죄로 인정했다.

 

2025년 2월 17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국민의힘 윤상현, 나경원, 김기현 의원을 비롯한 여당 의원들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권 보장을 촉구하고 헌재의 불공정성을 규탄하기 위해 헌재 사무처장을 면담하기 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5.2.17 [공동취재] 연합

 

이처럼 윤석열 체포 방해 사건에 대한 법원의 엄중한 유죄 판단이 계속되는 가운데 종합특검이 의원들까지 기소하자 국민의힘과 해당 의원들은 강력 반발했다. 당 법률자문위원장인 김태규 의원은 이날 오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 기소는 법리가 아닌 정치적 계산 위에 서 있다"며 "그날 김기현 의원은 동료 의원들에게 '몸싸움이 생기면 공무집행방해가 되니 뒷짐을 지라' '욕도 하면 안 된다'고 거듭 당부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더구나 그날 집행된 영장은 관할 없는 법원에서 발부된 것이었고, 관할부터 잘못된 영장이었다"며 또 다시 영장 발부 및 집행의 적법성을 문제 삼았다.

 

김기현 의원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억지 혐의를 조작해 없는 죄도 만들어내려는 사이비 법 기술자 '좀비 특검'의 정치 난동에 불과하다. 국민이 아닌 권력을 위해 법을 사유화하고 왜곡한 권창영과 그 하수인들이 감옥에 갈 날이 곧 올 것"이라고 날을 세웠고, 나경원 의원도 "야당 의원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사법권을 남용하고 법리를 멋대로 짜깁기한 정치 특검, 법왜곡죄로 처벌받을 것이다. 특검의 추악한 만행을 반드시 심판해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정점식 원내대표는 "이 건은 야당 탄압의 흉기를 자처했던 조은석 특검조차 기소를 포기한 건이다. 2차 종합특검이 장장 180일 수사에 빈손 특검이라는 비난이 두려워 '일단 기소하고 보자' 식으로 무책임하게 기소를 진행했다"면서 "결국 기소권을 동원해 야당 의원들에게 정치적 망신을 주기 위한 억지 기소이며, 수사 기간을 기본 90일에 90일 더 연장시켜 준 정부‧여당에 보여주기 위한 아부성 기소"라고 특검 측을 맹비난했다.       < 김호경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