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보다 잡지를 든 편집장, '박정희의 천적' 장준하

● COREA 2026. 10. 17. 10:02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일본군 탈출 6000리 걸어 중국서 광복군 활동
'사상계' 창간, 한국 지식사회의 중심에 우뚝
박정희 군사정권 월남파병에 반대하다 구속돼
1967년 옥중 출마 국회의원 당선, '사상계' 떠나
김지하 '오적' 게재했다 등록 취소로 발행 중단
긴급조치 위반 15년 선고받고 형집행정지 석방
포천 약사봉 등산 중 추락사… 타살 의혹 남아

 

일본군을 걸어 나온 학병

 

장준하(1918–1975)를 한 줄로 소개하면 이렇다. 일본군을 탈출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해방 뒤에는 잡지를 만들어 독재와 맞서다 산골짜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사람. 이력서 한 줄이 이토록 무거운 사람도 드물다.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그는 1944년 1월 학병으로 끌려갔다. 이름은 지원병인데 지원하지 않으면 집안이 곤란해지는, 참으로는 강제된 지원이었다. 그해 7월 중국 쉬저우의 일본군 부대를 김준엽(1920–2011) 등과 함께 탈출했다. 혹한과 굶주림을 견디며 6천 리를 걸어 이듬해 1월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했다. 지도도 길 안내 기계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서 이범석(1900–1972)의 지휘아래 미국 전략정보국과 국내진입 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작전은 중단됐다. 8월 18일 비행기로 여의도에 들어왔지만 일본군의 제지로 돌아가야 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입국을 거절당한 광복군이었다. 그해 11월에야 귀국한 뒤 김구(1876–1949)의 비서로 일했다.

 

장준하 1944년(위키피디아)

 

총 대신 붓을 든 편집장

 

광복군시절에도 잡지 『등불』을 만들었으니, 이 사람의 팔자는 총보다 편집 쪽에 가까웠다. 1953년 4월 월간 종합교양지 『사상계』를 창간했다. 잡지는 돈이 되지 않았다. 편집장은 발행인이자 영업사원이었고, 때로는 돈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이었다. 원고료 걱정은 끊이지 않았지만 실어야 할 말은 넘쳤다.

 

『사상계』는 대학생과 지식인 사이에서 널리 읽히며 1950~60년대 한국 지식사회의 중심에 섰다.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고, 1958년에는 필자 함석헌(1901–1989)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발표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 필화도 겪었다. 장준하와 주간 안병욱도 조사를 받았다.

 

1962년 장준하는 막사이사이상 언론부문상을 받았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잡지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셈이다. 그러나 박정희(1917–1979) 군사정권의 탄압은 그치지 않았다. 세무사찰과 판매방해가 이어졌고, 장준하는 1966년 월남파병을 비판하다 구속됐다.

 

사상계 잡지 운영했던때 장준하(위키피디아)

 

「오적」이 불러온 탄압, 등록취소라는 칼날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직후 장준하는 군사정권에 한때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길로 가자 비판자로 돌아섰다. 한 사람은 일본군을 탈출해 광복군 장교로 복무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제 때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 해방된 나라에서는 일본군 장교 출신이 오히려 권력을 잡고 광복군 장교 출신이 감옥을 드나들었다. 우리역사의 짓궂은 비극이다.

 

1967년 장준하는 옥중출마 끝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후 『사상계』의 발행권은 부완혁(1919–1984)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1970년 잡지폐간 당시 발행인은 장준하가 아니라 부완혁이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1970년 5월호에 실린 김지하(1941-2022)의 담시 「오적」이었다.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다섯 도둑에 빗대 부패한 권력층을 풍자한 작품이었다. 권력의 치부를 날카롭게 드러낸 이 글은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불러왔다. 부완혁과 편집인 김승균 등이 구속됐고 잡지발행은 사실상 중단됐다.

 

공식적인 등록취소는 그해 9월 29일 이뤄졌다. 문화공보부가 내세운 이유는 인쇄시설을 갖추지 않은 경우 인쇄인을 등록해야 한다는 관련규정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인쇄와 등록의 문제를 이유로 들었지만, 「오적」 게재 이후 이어진 탄압의 흐름에서 이를 단순한 행정처분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사상계』는 통권 205호를 끝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부완혁은 법정투쟁을 이어갔고, 1972년 4월 대법원에서 등록취소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법적으로 길이 열렸다고 잡지가 되살아난 것은 아니었다. 재정은 바닥났고 필자를 구하기도, 인쇄를 맡길 곳을 찾기도 어려웠다. 박정희는 잡지의 등록을 취소했지만, 그보다 먼저 잡지가 설 자리를 좁혀놓았던 것이다.

 

고상만의 저서

 

약사봉의 물음표

 

1973년 말 장준하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했다. 박정희는 서명대신 수갑으로 답했다.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그해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75년에도 함석헌 등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힘을 모으려 했다.

 

그러나 1975년 8월 17일, 그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정희 정권은 등산 중 실족해 추락한 사고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망경위에는 의문이 남았다.

 

2012년 8월 묘소를 옮기는 과정에서 두개골 오른쪽 귀 뒤쪽에 지름 5~6센티미터의 함몰 흔적이 발견됐다. 이듬해 유족 측이 의뢰한 법의학 감정에서는 머리를 가격당한 뒤 추락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필자가 몸담았던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앞서 사건을 조사했지만 사망원인을 규명하지 못했다.

 

타살의혹이 제기됐다고 해서 살해주체까지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규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문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약사봉의 물음표는 여전히 한국현대사의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

 

장준하와 함석헌(함석헌기념사업회)

 

장준하에게서 오늘을 배우다

 

첫째, 국가가 가진 기록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존재한다. 자료가 공개되지 않아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일이 되풀이된다면 과거사 조사는 이름뿐이다. 진실화해위원회와 같은 조사기구에는 자료를 확보하고 책임 있는 답변을 받아낼 실질적인 권한이 필요하다.

 

둘째, 진실규명에는 유효기간이 없어야 한다. 한시적인 조사기구가 활동시한에 쫓겨 미완의 사건을 남기고 문을 닫는다면 피해자와 유족은 다시 애타게 기다려야 한다. 조사기간을 연장하거나 상설적인 진실규명기구를 두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때다.

 

셋째, 잘못된 판단을 인정하고 돌아설 줄 알아야 한다. 처음에는 군사정변에 기대를 걸었던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의 실체를 확인한 뒤 비판자로 나섰다. 한 번 틀리는 것은 실수지만, 틀렸음을 알면서도 고집하는 것은 선택이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이후 장동혁, 주진우, 김진숙, 김태규 등 정치인들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얼마나 돌아보았는가.

 

넷째, 연대는 차이를 넘어서는 일이다. 편집장 장준하와 종교인 함석헌, 민중신학자 안병무(1922-1996). 해직교수 김동길(1928-2022) 등은 민주주의라는 목표 아래 만났다. 생각과 배경이 다르더라도 공동의 위기 앞에서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사상계』가 권력의 탄압을 받은 것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었고, 글을 쓰는 이들이 그 대가를 감수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누구나 글을 발표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넓어졌다고 해서 말의 무게까지 가벼워져서는 안 된다.

 

장준하는 총 대신 잡지를 들었다. 그가 남긴 것은 독립운동의 무용담이나 잡지 한 권만이 아니다. 독재 권력이 감추려는 것을 묻고, 잘못된 것을 비판하며,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는 시민의 책임이었다.

 

약사봉의 물음표가 언제 마침표를 찍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진실을 묻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장준하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숙제다.   

                                                 < 김성수 시민기자, 반헌법 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 

 

파주시 장준하 공원에 위치한 장준하의 묘소(위키피디아)

 

 

 

 

브런슨 "새 기준 필요, 대통령 지시해도 위험 보고"
MDTF 한반도 배치 추진...대중 군사 거점화 우려
국방부 "골대 옮기면 전작권 전환은 영원히 못해"
브런슨 "한국, 동북아·태평양 전체에서 중심적"
"한국, 방산 막강…현지 보수·정비 '대장간 구상'"

 

"그 관점이 보여 주는 것은 대한민국의 중심성이다. 동북아시아뿐이 아니라 태평양 전체에서의 중심성이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13일 워싱턴 D.C.의 미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주최 대담에서 '뒤집힌 지도'의 효용성을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도쿄, 마닐라로 이어 보면 그 안에는 3개의 상호방위조약이 있다"고 했다. 세계 무역의 48~52%가 지나고, 세계 조선 물량의 15%가 한국, 10%가 일본에서 생산된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지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브런슨의 '강조'는 이어졌다. 그는 "아시아 대륙에 유일한 (미국) 병력은 한국에 주둔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유리한 위치는 의미가 있다"면서 일본, 필리핀 등 다른 동맹국과 함께하며 "부러워할 만한 태세를 갖췄다"고 주장했다. 한국을 대중국 군사 포위망의 핵심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뜻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이 14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미 싱크탱크 골드 국제전략연구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6.10.15 연합

 

브런슨 "한국, 동북아·태평양 전체에서 중심적"

 

브런슨은 지난 5월 미 육군전쟁대학 전략연구소 심포지엄 후 대담에서 "중국 동부 해안에서 밖을 볼 때 보이는 건 아시아의 심장부에 있는 비수(단검)라고 할 한국"이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비수'는 공격형 무기인데, 한국을 중국을 겨냥한 '비수'에 비유해서다. 이뿐만이 아니다. 작년 5월 하와이 미 육군협회 심포지엄에서는 "한국은 베이징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동맹이자 일본과 중국 본토 사이에 떠 있는 고정된 항공모함 같다"고 말해 거센 반발을 샀다.

 

이날 대담에서 그는 '미국이 태평양 국가'라고 주장하는 이유를 두고 "단지 태평양이 캘리포니아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니다...우리가 광범위한 지역에 뻗어 있고, 그 지역에 전진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브런슨은 "지금 한국을 보자. 동해와 서해를 내려다보는 조망은 한국에 국력의 여러 요소를 활용해 이 지역에서 행동할 수 있는 주도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는 (한미) 동맹을 통해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대담은 ▲ 북한(조선)의 위협 ▲ 미 육군 현대화와 대한민국과의 상호운용성에 미치는 영향, 한반도에서의 공격 화력과 방어 화력의 중요성 ▲ 이 모든 것이 미국의 이익과 인도·태평양의 국방 관계 및 동맹들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크게 세 가지를 놓고 진행됐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군사령관은 동아시아 지도를 뒤집어보면 한국, 일본, 필리핀 3국의 전략적 협력 필요성을 느낄 수 있다고 17일 주장했다. 그는 아마 이 지도가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통찰은 한국, 일본, 필리핀을 연결하는 전략적 삼각형의 존재라며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세 파트너 국가를 각각 삼각형의 꼭짓점으로 보면 이들의 집단적 잠재력은 분명해진다고 말했다.. 사진은 뒤집힌 한반도 지도. 2025.11.17 [주한 미군 제공] 연합

 

강신철 국방부 장관이 16일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해병대사령부 및 서북도서방위사령부를 방문, 전투통제실에서 작전대비태세를 점검하고 있다. 2026.10.16 [국방부 제공] 연합

 

국방부 "골대 옮기면 전작권 전환은 영원히 못해"

 

다음날인 14일 미 싱크탱크 '골드 국제전략연구소' 주최 세미나에선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OPCON) 전환과 관련해 '돌출 발언'을 던져 풍파를 일으켰다. 이재명 대통령 정부가 전작권의 임기 내 회복이란 목표 아래 올해 중 미래연합군사령부(미래연합사)의 완전운용능력(FOC) 검증 완료를 추진 중인 상황에서 이날 브런슨이 북한의 극초음속 미사일 발사와 우크라이나 전쟁 참여에 따른 북한군의 실전 능력 향상 등을 거론하며 전작권 조건의 '변경'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세계 최고의 동맹을 현대화하는 전작권 전환에 찬성한다면서도 그는 "우리 중 누구도 여건이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며 "이번 주에 북한에서 또 한 차례 미사일 발사가 있었다...조건이 변했고 우리가 우리의 계획을 바꿨기 때문에 우리가 지켜야 할 새로운 기준(new standards)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앞서 한미는 2015년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계획'(COTP)에 합의하고, 이에 따라 향후 한국군 4성 장군이 지휘할 미래연합사의 임무 수행 능력 확보 여부를 ▲ 기본운용능력(IOC) ▲ 완전운용능력(FOC) ▲ 완전임무수행능력(FMC) 등 3단계로 검증하는 절차를 밟아 왔다. 2단계인 FOC 평가를 2022년 마쳤고, 이에 대한 검증을 올해 양국 국방장관의 한미안보협의회의(SCM)에서 완료하면서 양국 군 통수권자에게 전작권 전환 목표 연도를 건의한다는 게 정부 구상이었지만, 11월 미국 중간 선거 등으로 한미 협의가 난항을 겪는 상황에서, 브런슨 사령관이 '기름'을 붓고 나선 것이다. 이에 정빛나 국방부 대변인은 15일 정례브리핑에서 '개인적인 자격' 발언을 전제로 "골대를 계속 옮긴다면 전작권 전환은 영원히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신철 국방 장관은 연합뉴스에 "전작권 전환 조건에 대한 부분은 계속 저희가 논의를 해 나가고 있는 것"이라면서 '미측은 아직 충족이 되지 않았다는 입장인가'라는 질문에 "서로 관점이 다른 부분은 있다"고 답했다.

 

유엔 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인 이재명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뉴욕 한 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2026.9.23 [공동취재 제공] 연합

 

브런슨 "새 기준 필요, 대통령 지시해도 위험성 보고"

 

전날인 13일 CSIS 주최 대담에서도 전작권 문제를 거론했다. 브런슨은 "나는 조건에 기초한(conditions-based) 전작권 전환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점을 분명히 말한다. 그뿐이다. 이것이 바로 협정서에 명시된 내용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내 임무는 일정한 기준에 맞춰 한국 국민과 미국 국민을 지키는 것이다. 기존의 조건에서 벗어나 한국 국민과 미국 국민을 지키는 나의 능력을 침해하는 그 어떠한 조치도 나는 지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시기 또한 하나의 조건에 불과하다. 그건 내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라면서 "결국 나의 대통령과 국방 장관이 '지금 즉시 실행하라'고 지시한다면, 나는 "예"라고 답할 것이다. 다만 조건들을 완전히 충족하고, 필요한 핵심 역량을 확보하지 못한 채 이를 진행할 때 내재된 위험 요소들이 있다고 보고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군 통수권자의 지시가 있어도 주한미군사령관, 한미연합군사령관의 자격으로 전작권을 전환할 만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계속 반대 의견을 보고하겠다는 뜻을 밝힌 셈이다. 브런슨은 "내가 해야 할 일은 꼭 있어야 할 조건들을 지속해서 확실히 점검하는 것이다. 세 가지 조건이 존재하며, 달성해야 할 수많은 목표가 있다. 그 것들이 충족될 때 비로소 전작권 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브런슨 사령관의 주문대로 제1 도련선과 제2 도련선을 안내하는 지도를 90도 돌리면 한국은 아시아의 심장 중국에 단검(비수)를 꽂는 모양이 된다. 한국과 일본은 필리핀과 연결돼 중국과 대만에 맞서게 된다.  

 

MDTF 한반도 배치 추진...대중 군사 거점화 우려

 

브런슨은 미 다영역특임단(MDTF)의 한반도 배치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감지, 감지, 감지다"라면서 "한반도에서 감지 능력을 다층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군의 3개 MDTF 중 독일에 배치된 제2MDTF의 한반도 배치가 추진되고 있으며, 일부가 선발대 성격으로 미리 들어온 정황도 포착됐다.

 

2017년에 창설된 MDTF는 미 육군이 중국과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지상·공중·해상·우주·사이버 등 모든 영역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창설한 2100명 규모의 여단급 특수 전투부대다. 500명 안팎의 MDEB가 MDTF의 '눈과 신경망'에 가까운 부대로, 우주·정보·전자전·사이버 작전을 통해 적의 지휘통제, 감시정찰, 통신, 표적획득 체계를 교란하거나 무력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시민언론 민들레. '새 국면 들어선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을 차단하라. 2026. 06. 04)

 

브런슨은 "한반도가 직면한 문제는 2만8500명의 (주한미군) 병력을 빼는 문제가 아니라 더하는 문제"라며 "한반도에 적절한 역량을 배치한다는 측면에서 MDTF는 대단히 매력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주·사이버·전자전(EW) 영역에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즉 이러한 각 영역에서 필요한 핵심 역량들이 매우 매우 중요하다"며 ▲ 우주 영역에선 '위치·항법·시점'(PNT)· 정보를 제공하고 ▲ 사이버 영역에선 '방어뿐 아니라 공세적 작전도 포함'하며 ▲ 전자전은 '전자기 영역에서 신호 및 신호정보'를 기동하는 역량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이런 자산들을 도입해 한반도의 작전환경뿐 아니라 더 넓은 주변 환경까지 더 잘 이해하고자 한다"고 말해 MDTF의 배치가 북한은 물론, 중국·러시아까지 겨냥한 것임을 내비쳤다.

 

이와 관련해 이경렬 전 앙골라 대사는 "한국 입장에서 MDTF/MDEB 배치는 단순히 '미군 신형 부대가 오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본질은 한국 영토와 한미연합 지휘체계가 중국 견제 작전에 편입된다는 점이다"라면서 "한국으로서는 이 사안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보다 훨씬 더 큰 구조적 문제로 봐야 한다. 사드가 방어체계 배치 문제였다면, MDTF/MDEB는 한국을 대중국 군사망의 능동적 거점으로 바꾸는 문제이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브런슨은 또 MDTF의 다층적 감지체계에서 여러 고도의 유·무인 항공기와 함께 '고고도 풍선'(HAB)도 운용될 수 있다면서 "그런 장비를 비무장지대(DMZ) 인근에 계류시켜 그곳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주시하는, '깜빡이지 않는 긴 눈'을 확보하는 걸 상상해 보라"고 말했다.

 

 

주한미군이 사드 발사대 훈련 사진과 함께 공개한 패트리엇 사진. [미 국방시각정보시스템] 연합

 

"한국, 방산 역량 막강…창정비 거점 구축 가능"

 

이와 함께 브런슨은 북한의 극초음속 비행체 개발 등으로 북한의 위협 범위가 점점 확대되고 있다면서 다자 구도가 갖춰진 유엔사령부(UNC) 참여국들의 공동 대응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는 최근 한미연합 연습을 계기로 "우리 전력이 분산 배치된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그런 전력을 어디에 배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갖게 됐다면서 가령 "하이마스(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 대신 K9 자주포로 일부 임무를 수행하고, 하이마스는 다른 임무에 활용하면 어떨까", 그리고 "우리 미국이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인가", "우리가 동맹국에 결정적이되 보다 제한적 지원을 제공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인가", "한국이 재래식 대북 억제력의 주도권을 갖는다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라는 생각을 했다고 소개했다.

 

 

한화오션 거제조선소. 2026.08.28. 한화오션

 

브런슨은 전방 현지에서 미국의 군사 자산을 '유지·보수·정비'(MRO)를 위한 거대한 수리소로 만들겠다는 계획도 거침없이 밝혔다. 일종의 '대장간(the forge)' 구상이라고 한 그는 특히 "한국 방산 분야의 잠재력은 참으로 막강하다. 본국으로 돌려보낼 필요 없이 지역 내에서 장비를 즉시 수리할 수 있다"며 "F-16 전투기를 수리하기 위해 미국 본토 구석에서 부품이 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우리가 그 부품을 직접 깎아 만들거나 적층 제조 방식을 사용해 한국 현지 지상에서 즉시 제작해 기체에 장착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산업의 막강한 힘을 활용해 다른 지역으로 호혜적으로 부품을 공급할 전방의 창정비급 거점, 즉 '지역 지속지원 허브'(RSH) 구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허브를 일본과 필리핀에도 갖추고, 더 넓은 인도-태평양 전역에 걸쳐 부품을 유연하게 이동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시작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을 전방위적인 대중 전초기지로 만들어 나가겠다는 얘기인 셈이다.                 < 이유 기자 >

 

 

부마 민주항쟁 47주년, 그날의 함성은 끝나지 않았다

● COREA 2026. 10. 17. 03:5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1979년의 역사에서 오늘의 민주주의를 묻다
시민이 맞섰던 억압과 불평등은 해소됐는가
약자의 존엄 지키는 게 민주주의 자체의 핵심

 

계엄령 발표 후 옛 부산시청(중앙동) 앞에 주둔하고 있는 탱크와 주변 모습

 

부산의 거리에서 시작된 저항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교정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유신헌법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함성이 교정을 넘어 도심으로 번졌다. 남포동과 광복동 일대에는 학생들뿐 아니라 퇴근길 시민과 노동자, 고등학생들도 합류했다. 경찰의 진압에도 시위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이틀 뒤인 18일에는 마산에서도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고 시민들이 가세했다. 부산에서 시작된 저항은 마산으로 확산하며 유신체제를 뒤흔들었다. 이것이 부마민주항쟁의 출발이었다. 1979년 10월 16일부터 부산에서 시작된 항쟁은 18일 마산으로 번졌고, 20일까지 두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학생들의 시위가 시민들의 대규모 저항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사에 뚜렷한 자리를 차지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을 바탕으로 장기 집권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됐고, 긴급조치와 정치적 탄압으로 반대 목소리를 억눌렀다. 국회의 견제 기능은 크게 약화됐으며 언론과 시민의 자유도 제한됐다. 국민이 주권자라는 헌법의 원칙은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권력은 국민의 뜻을 묻기보다 국민에게 복종을 요구했다. 부마항쟁은 이러한 정치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 학생들이 먼저 움직였지만 거리의 함성은 대학 담장 안에 머물지 않았다. 시민들은 독재에 대한 분노를 함께 표출했다.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 거리 행진 모습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의 생각과 요구가 모두 같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권력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현실을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정서가 항쟁을 움직였다. 역사는 종종 몇몇 지도자의 결단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부마항쟁의 의미는 이름난 인물 몇 명으로 환원할 수 없다. 거리로 나선 학생과 노동자, 평범한 시민들의 용기가 역사의 방향을 흔들었다. 자신의 이름이 기록될지조차 알 수 없었던 사람들이 일상의 두려움을 넘어섰기에 항쟁은 가능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분노의 배경

 

부마항쟁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 1979년 한국 사회에는 독재정권에 대한 정치적 반발과 사회경제적 불만이 누적돼 있었다. 같은 해 8월,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은 회사의 폐업 조치에 항의하며 서울 신민당사에서 농성했다. 경찰이 강제 진압에 나서는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했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투쟁이 공권력의 폭력과 마주한 사건이었다. 노동자들의 절박한 처지는 당시 사회의 불평등과 권력의 억압적 성격을 드러냈다. 10월에는 유신체제를 비판하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다.

 

야당의 정치 활동을 제약하는 조치에 반발해 신민당 의원들이 집단 사퇴서를 제출하면서 정국은 더욱 악화됐다.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도 안에서 경쟁할 상대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는 권력의 태도가 갈등을 키웠다. 부산과 마산은 이러한 긴장이 분출한 현장이었다. 부산은 학생운동과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활발했던 도시였고, 마산 역시 산업과 노동의 현장이었다.

 

부마항쟁 이후 계엄령 발표로 공수부대가 부산대 정문을 막고 주둔하고 있다

 

그러나 항쟁을 특정 지역의 기질이나 일부 학생들의 급진적 행동으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 전국적으로 누적된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불만이 지역의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 터져 나온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참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학생들이 제기한 문제의식이 시민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시위는 정권의 통치 기반을 흔드는 대규모 저항으로 발전했다. 이는 독재체제가 겉으로 유지되는 것과 시민들의 동의를 얻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임을 보여준다. 강압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군홧발로 막은 거리, 무너진 유신체제

 

박정희 정권은 항쟁을 강경 진압했다. 부산에는 10월 18일 0시를 기해 계엄령이 선포됐고, 군 병력이 투입됐다. 마산과 창원 일대에는 10월 20일 위수령이 발동됐다. 경찰과 군의 진압으로 시위는 잦아들었으며, 참가자들은 연행과 구금, 수사와 처벌을 겪었다. 거리는 통제됐지만 시민들의 불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할 때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짚을 필요가 있다. 항쟁은 유신체제의 심각한 위기를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직접 가져온 사건은 10월 26일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피살이었다. 항쟁이 곧바로 정권을 무너뜨렸다고 단정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일이다.

 

부마항쟁 당시 마산지역에 붙은 격문

 

그렇다고 항쟁의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부마항쟁은 유신체제가 시민들의 저항에 직면했음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국가가 군과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억누를 수는 있었지만, 독재에 대한 분노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는 없었다. 거리의 저항은 정권의 통치가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였다. 더욱이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이 곧 민주주의의 실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1979년 12월 12일 신군부는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했고, 이듬해 5월 광주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군부의 폭력에 희생됐다.

 

유신체제가 무너진 자리에 민주주의가 자연스럽게 들어선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군사권력이 등장해 시민들의 열망을 다시 억눌렀다. 이 역사는 독재자의 퇴진과 민주주의의 정착이 별개의 과제임을 일깨운다. 권력자가 바뀌어도 권력 집중을 막을 제도와 시민의 감시가 없다면 억압은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퇴장으로 완성되는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권력의 한계를 정하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국가기념일이 되었다고 역사가 완성되는가

 

부마민주항쟁은 2019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항쟁이 시작된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정한 것은 부산과 마산 시민들의 저항을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역사로 공식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오랫동안 항쟁의 경험을 간직해 온 참가자와 유가족, 지역사회의 노력도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국가기념일 지정이 역사적 과제의 종결을 뜻하지는 않는다. 항쟁의 전개 과정과 피해 실태를 충실히 기록하고, 국가폭력의 피해를 입은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며, 관련 자료를 보존하고 후대에 전하는 일이 계속돼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논란이 남아 있다면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확인하고, 밝혀진 사실은 교육과 공적 기록에 반영해야 한다.

 

계엄령 발표 포고문을 읽고 있는 시민들(동아대)

 

기념식에서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그 정신을 현재의 권력 운영에 적용하는 일이다. 자신을 비판하는 시민을 불편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정치, 권력기관의 잘못을 감추지 않는 행정, 시민의 질문에 근거를 들어 답하는 공직사회가 필요하다. 국가가 민주화운동을 기리는 동시에 시민의 비판을 억압한다면 기념과 현실 사이에 모순이 생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민주주의가 저절로 성숙하는 것도 아니다. 선거에서 승리한 정치세력은 권력을 위임받았을 뿐, 무제한의 권한을 얻은 것이 아니다. 지지자의 환호가 크더라도 권력은 법과 제도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언론과 시민사회의 감시를 존중해야 한다. 반대자의 비판을 배신이나 적대 행위로 몰아가는 정치문화 역시 경계해야 한다.

 

시민에게도 책임이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의 잘못을 외면하면서 상대편의 잘못만 비판한다면 권력 감시는 정파적 도구로 전락한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내 편의 잘못에 더 엄격할 수 있어야 한다. 지지하되 숭배하지 않고, 비판하되 상대의 권리를 부정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누가 권력을 잡았느냐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

 

부마의 정신을 오늘의 삶으로

 

부마민주항쟁을 계승한다는 것은 과거의 용기를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날 시민들이 맞섰던 억압과 불평등이 오늘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살피는 일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노동 현장에서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 불안정한 일자리와 주거 문제로 미래를 설계하기 어려운 청년들, 돌봄과 생계의 무게를 홀로 감당하는 가족들이 있다. 노년의 빈곤과 고립, 장애인에 대한 차별, 이주민과 사회적 소수자를 향한 혐오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사회라 해도 삶의 조건이 심각하게 불평등하다면 민주주의는 여전히 부족하다. 민주주의는 투표권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고, 부당한 대우에 맞서 권리를 주장하며, 사회의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생존을 위해 부당함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정치가 응답해야 한다. 약자의 존엄을 지키는 일은 민주주의에 덧붙이는 선행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의 핵심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오늘 제47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석해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야 한다며 개헌을 촉구했다. MBC뉴스 갈무리

 

부산은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된 도시다. 그렇다면 항쟁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시민의 의견이 시정에 반영되는지, 공공의 예산이 누구를 위해 쓰이는지, 노동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제대로 살피는지 점검해야 한다. 개발과 성장의 성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의 삶도 물어야 한다. 기념관과 추모행사뿐 아니라 정책과 예산, 교육과 시민 참여 속에서 항쟁의 정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은 독재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역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질문한다. 권력의 잘못을 비판할 용기가 있는가. 내 편의 잘못을 인정할 양심이 있는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는가.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부마민주항쟁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무엇이며, 누가 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는지 끊임없이 묻는 현재의 역사다. 그날의 시민들을 기념하면서 오늘의 부당함에 침묵한다면 기념은 형식에 머물고 만다.

 

민주주의는 한 번 쟁취했다고 영원히 보장되는 유산이 아니다. 시민이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과 토론의 자유를 지키며, 서로의 존엄을 존중할 때 지속될 수 있다. 그 정신은 국가의 선언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일상에서 부당함을 외면하지 않는 시민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오늘 부마민주항쟁 47주년 기념일을 맞아 우리는 과거의 함성만 들을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사회가 내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지워지고 있지는 않은가. 권력의 편의가 시민의 권리보다 앞서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답을 우리의 삶과 정치 속에서 실천하는 것, 그것이 부마민주항쟁을 기억하는 가장 정직한 길이다.

 

[참고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마민주항쟁>.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록원,  <국경일과 법정기념일> 중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지정 경위. 2023 부마민주항쟁 구술자료집                                   < 박철 기자 >

 

[전국시국회의 논평] 


부마항쟁 47주년,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의 역사를 잇는 개헌을 촉구한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의 시민들은 유신독재의 폭압에 맞서 거리로 나섰다. 권력의 탄압과 국가폭력에도 굴복하지 않은 시민들의 저항은 독재정권의 종말을 앞당겼고,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의 열망이 역사를 바꾸는 원동력임을 증명했다. 부마민주항쟁 47주년을 맞는 오늘, 부마항쟁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되새겨야 할 역사적 기준이다.

부마항쟁의 의미는 2024년 12·3 내란 사태를 통해 더욱 선명해졌다. 유신독재에 맞선 시민들과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나선 시민들은 시대를 달리했지만, 권력이 국민주권과 민주주의를 위협할 때 시민이 역사의 주체로 나섰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두 사건은 권력이 결코 헌법과 국민 위에 설 수 없다는 민주공화국의 원칙을 일깨운다.

부마항쟁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과거를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12·3 내란의 진상을 철저히 밝히고 책임을 묻는 한편, 국가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고 국민의 기본권과 주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기억을 실천으로, 역사적 교훈을 제도로 이어 가야 한다.

이를 위해 부마항쟁과 5·18민주항쟁의 역사와 시민 저항정신을 헌법 전문에 명확히 담아야 한다. 내란과 헌정질서 파괴를 막을 민주적 통제와 책임의 원칙을 강화하고, 국민주권의 실질화와 국가균형발전, 지방분권 등 오랫동안 미뤄 온 헌법적 과제도 개헌으로 완성해야 한다. 부마항쟁의 정신을 담은 개헌은 과거를 기리는 일을 넘어 미래의 민주공화국을 세우는 일이다.

47년 전 부산과 마산에서 타오른 저항의 불꽃은 오늘도 살아 있다. 부마항쟁의 시민정신과 12·3의 민주주의 수호 의지를 이어받아, 독재와 내란이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 나라, 국민의 주권과 민주주의가 흔들림 없이 보장되는 나라를 만드는 것, 그것이 부마항쟁의 정신을 오늘의 역사로 완성하는 길이다. 개헌으로 부마의 저항을 국민주권의 승리로, 12·3의 항쟁을 민주공화국의 도약으로 이어가자.

2026년 10월 16일
국민주권사회대개혁 전국시국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