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현지시간) 눈이 쌓인 그린란드 수도 누크의 한 거리를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AP연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로이터연합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를 차지하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미국 과학계가 직격탄을 날렸다. 매입 시도를 당장 그만두라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미국 과학계가 학술 사안도 아닌 대외정책에 선명한 반대를 천명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린란드가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의 근원지이기 때문이다. 그린란드 자치 정부와 신뢰 관계를 구축해 기후변화 연구 교류를 강화해도 모자란 마당에 땅을 안 내놓으면 군대를 동원할 수도 있다는 협박이 웬 말이냐는 시각이다.
“그린란드가 세계 연안도시에 영향”
미국 내 지구과학자 200여명은 이달 공개한 ‘그린란드와의 연대를 표하는 미국 과학자들의 성명’이라는 입장문을 통해 “그린란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공격적 입장을 강력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성명에는 기후변화와 빙하 분석에서 세계적인 권위자로 꼽히는 에릭 리뇨 미국 캘리포니아대 어바인캠퍼스 교수와 소피 노위키 버팔로대 교수 등이 이름을 올렸다.
과학자들은 “그린란드는 지정학적·지구물리학적으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며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그린란드는 전 세계 연안 도시와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과학자들은 평소 정치·외교적 사안에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는 일을 자제한다. 그런데도 왜 이런 성명을 냈을까. 현재 그린란드 상황을 고려할 때,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 요충지 확보나 희토류 채굴장 설치 같은 얘기를 꺼낼 때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1초당 수영장 3개 물 ‘콸콸’
과학계는 그린란드의 무엇에 집중하는 것일까. 기후변화 때문에 생긴 ‘빙하 녹은 물’이다. 그린란드에서는 1초마다 올림픽 규격 수영장 3개 부피의 물이 바다로 쏟아진다.
빙하 녹은 물은 해수면을 높인다. 최근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보고서를 보면 지구 해수면 상승의 25%는 그린란드 빙하가 녹은 물 때문에 유발되고 있다. 남극 빙하(13%)의 약 2배에 이른다. 게다가 2010년대 그린란드 빙하가 녹는 속도는 1990년대보다 7배나 빨라졌다. 그린란드는 해수면을 높이는 ‘폭주 기관차’가 된 셈이다.
IPCC 보고서는 그린란드 빙하가 녹은 물로 인해 2000~2100년 전세계 해수면이 최고 27㎝ 높아질 것으로 예측한다. 이렇게 되면 심각한 상황이 펼쳐진다. 기본적인 바다 수위가 지금보다 크게 올라가기 때문에 만조 때 해안 도시 내 도로와 주택가에 짠물이 밀려 들어오는 일이 일상이 될 수 있다. 이러면 하수가 역류하고, 가스관과 통신 케이블 등이 부식된다.
지금도 미국 남동부 도시에서는 1년에 약 10일간 이런 일이 벌어진다. 앞으로 해수면이 더 높아지면 바닷물이 도심에 들어오는 일이 더 잦아진다. 기반시설이 파괴되면서 도시 기능이 망가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 태도는 ‘요지부동’
과학자들은 성명을 통해 “우리는 그린란드 연구자들의 지침을 따르고 그린란드 국가 연구 전략을 존중함으로써 책임 있는 협력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린란드는 외국 과학자들이 자신의 땅에서 연구하도록 관대한 태도를 보여왔다”고 강조했다.
미국 과학계가 이런 입장을 내놓은 핵심 이유는 그린란드와 긴밀히 협력해 기후변화 양상을 더 열심히 연구·분석해야 할 이 순간에 ‘병합 시도’로 그린란드와의 교류가 끊겨버릴 공산이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해안에 사는 미국인들의 집이 바닷물에 잠기면 그린란드를 군사적·경제적으로 차지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성토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나 지난 9일(현지시간) “우리는 러시아나 중국이 그린란드를 차지하게 두지 않겠다”며 “우리가 차지하지 않으면 그들이 차지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14일 열렸던 미국과 덴마크, 그린란드의 3자 회담도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났다. 그린란드 병합에 대한 의지가 요지부동이라는 뜻이다.
과학자들은 이번 성명에서 “그린란드는 그 누구도 사거나 차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재확인한다”며 “그린란드는 그린란드 사람들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돈으로 사지 못하면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뜻까지 내비치는 최근 미국의 태도를 볼 때 그린란드의 운명은 당분간 안갯속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 이정호 기자 >
트럼프, 그린란드 파병 8개국에 “10% 관세”…유럽 “무역협정 중단”
17일(현지시각) 그린란드 누크에서 시민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그린란드 양도 요구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그린란드가 스스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누크/로이터 연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각) 미국의 그린란드 매입 요구에 맞서 병력을 파견한 유럽 8개국을 상대로 내달 1일부터 10%, 오는 6월 1일부터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했다. 유럽연합(EU)은 미국과의 무역협정 비준 절차를 전면 중단하고, 보복 조치 검토에 착수하겠다고 밝히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핀란드 등 8개국을 지목하며 관세 부과 방침을 공식 발표했다. 그는 “이들 국가는 (그린란드에 군대를 보내는) 매우 위험한 게임을 벌이며 감당할 수 없고 지속 불가능한 수준의 위험을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 지구적 평화와 안보를 위해 강력한 조치가 필수적”이라며 “2026년 2월 1일부터 언급된 모든 국가가 미국으로 수출하는 모든 상품에 10% 관세가 부과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린란드의 ‘완전하고 총체적인 매입(Complete and Total purchase)’에 관한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이 관세는 유지될 것이며, 6월 1일에는 25%로 인상된다”고 못 박았다. 미국은 지난해 영국, 유럽연합(EU)과 각각 체결한 무역협정을 통해 영국 수입품에는 10%, 유럽연합산에는 15%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 발표한 관세는 여기에 추가되는 관세일 것으로 추정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조치의 명분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위협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중국과 러시아가 그린란드를 원하고 있지만, 덴마크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미국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린란드가 미국의 차세대 미사일 방어망인 ‘골든돔’ 구축에 필수적이라며 “매우 정교하면서도 복잡한 (골든돔) 시스템은 각도, 경계, 경계선 등의 요소 때문에 이 땅이 포함될 때 최대 성능과 효율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스티븐 밀러 백악관 정책 담당 부비서실장도 이날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덴마크는 경제 규모도, 군사력도 작은 나라”라며 “그들은 그린란드를 방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근 덴마크 요청으로 프랑스·독일·스웨덴 등 유럽 국가들은 소규모 병력을 그린란드에 파견해 합동 방어·정찰 훈련을 진행했다. 공식 명분은 주요 시설 방어와 북극 안보 협력이지만, 워싱턴에서는 이를 미국을 향한 정치적 신호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17일(현지시각) 그린란드 누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그린란드 매입 계획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이날 시위에는 누크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에 달하는 인파가 집결했다. 누크/AFP 연합
유럽 각국은 즉각 반발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성명을 통해 “집단 안보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동맹국에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또한 “어떤 위협이나 협박도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며 “관세 위협은 용납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도 “우리는 협박당하지 않을 것”이라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당사국인 덴마크의 라스 뢰케 라스무센 외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는 놀랍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불과 며칠 전 제이디 밴스 부통령,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건설적인 회담을 가졌다며 병력 파견은 “북극 안보 강화 목적”이라고 반박했다. 그린란드의 수도 누크에서는 이날 트럼프의 매입 시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유럽의회 내 최대 파벌인 유럽국민당(EPP)의 만프레드 베버 대표는 “트럼프의 위협이 지속하는 한 미국과의 무역협정 승인은 불가능하다”며 협정 비준 절차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사회당그룹(S&D) 등 다른 주요 정파들도 이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 이 협정은 지난해 여름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타결한 것으로 유럽연합산 제품에 15% 관세를 부과하는 대신, 유럽연합은 미국산 공산품 및 일부 농산물에 무관세를 적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럽연합 대사들은 18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대응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로이터 통신이 전했다.
미국 내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공화당 톰 틸리스(노스캐롤라이나), 리사 머코스키(알래스카) 상원의원 등은 성명을 내고 “소규모 병력을 훈련 목적으로 보낸 동맹국을 상대로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미국과 미국 기업, 그리고 동맹 모두에게 나쁜 일”이라며 “이는 나토의 분열을 원하는 푸틴과 시진핑에게만 좋은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관세 부과의 법적 근거가 될 국제비상경제권법(IEEPA)의 대통령 권한 범위에 대해 미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임박해 있어, 사법부의 판단이 이번 사태의 또 다른 변수가 될 전망이다. < 김원철 기자 >
1월 18일, 오늘은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32년이 되는 날이다. 시간은 그를 역사 속 인물로 밀어 넣었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민주주의가 위태로울 때마다, 분단이 일상처럼 굳어질 때마다, 종교가 자기 안전과 체제 순응으로 기울 때마다 우리는 다시 문익환을 떠올린다. 그는 이미 끝난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문익환의 부재는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그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의 호 ‘늦봄’은 계절의 비유를 넘어선 삶의 선언이었다. 늦게 오는 봄, 그러나 쉽게 지지 않는 봄. 그는 빠른 승리를 믿지 않았고, 단기적 성과에 기대지 않았다. 역사는 더디게 움직이지만 결국 옳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믿음, 그 믿음을 그는 신앙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 신앙은 개인의 위안이나 사후 구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것은 이 땅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였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겠다는 선택이었다.
문익환에게 성서는 하늘의 책이 아니었다. 성서는 땅의 책이었고, 사람의 역사였다. 출애굽은 고대 신화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반복되는 해방의 이야기였으며, 예언자들의 분노는 오늘의 권력 앞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언어였다. 그는 성서를 연구하는 학자였지만, 성서를 해석하는 데 멈추지 않았다. 성서가 요구하는 삶의 자리에 자신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의 설교에는 늘 구체적인 현실이 등장했다. 가난, 분단, 독재, 고문, 침묵의 공모. 그는 신앙이 현실을 비켜가는 순간 거짓이 된다고 보았다.
그가 남긴 가장 불편한 말 가운데 하나는 “신앙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면 거짓이다”라는 선언이다. 이 말은 종교를 위로와 안정의 장치로 소비해 온 한국 사회에 지금도 날카롭게 꽂힌다. 그는 기도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기도가 행동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신앙은 현실을 견디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힘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말했고, 걸었고, 감옥에 갔다.
1989년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문익환 목사는 김 주석을 만나서 박용수의 '겨레말사전'을 선물했다. 사단법인 통일의 집
그의 삶에서 감옥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었다. 유신 독재와 군사정권 아래 그는 반복해서 연행되고 수감되었다. 그러나 그는 감옥을 피해자의 자리로만 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감옥을 민주주의의 교실로 만들었다. 억압의 구조를 몸으로 겪으며 그는 더욱 분명해졌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헌법 조항만으로 살아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민주주의는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감수성이며, 침묵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 말하는 용기이고, 다수가 옳지 않을 때 기꺼이 소수가 되는 결단이다.
그의 민주주의는 온건하지 않았다. 동시에 폭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비폭력을 말했지만, 그것은 무력함이나 체념이 아니었다. 불의 앞에서 중립을 가장한 침묵이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권력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언제나 권력에 의해 밀려난 사람들의 언어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편안하지 않았지만, 그는 불편을 기꺼이 감수했다.
1989년의 방북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논쟁을 불러온 사건이었다. 정부의 허가 없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난 그의 선택은 곧바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이름으로 처벌되었다. 사회는 그를 둘로 나누어 평가했다. 어떤 이는 용기라 불렀고, 어떤 이는 무모함이라 불렀다. 그러나 문익환 자신에게 그 선택은 계산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분단이라는 구조적 폭력을 더 이상 관념으로만 다룰 수 없다는 절박함의 표현이었다.
검열로 일부 내용이 검게 가려진 2차 투옥 시기의 편지(1979. 11. 16.). 편지를 양껏 부칠 수 없어 봉함엽서 한 장에 원고지 28장 분량을 빼곡히 적어 넣었다. 사진=늦봄 문익환 목사 기념사업회
그에게 통일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었다. 통일은 사람의 문제였다.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게 막는 체제, 왕래해야 할 삶을 가로막는 분단은 그 자체로 폭력이었다. 그는 법을 어겼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더 큰 윤리에 충실했다. 그의 방북은 체제 승인도, 이념 동조도 아니었다. 그것은 분단의 금기를 몸으로 건너는 신앙적 실천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법은 누구를 보호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법에 복종해야 하는가.
문익환은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시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깊었다. 그는 언어를 장식하지 않았고, 언어로 숨지 않았다. 그의 시에는 분노와 연민이 함께 있었고,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노래했고, 감옥 안에서도 웃었다. 그 웃음은 체념이 아니라 저항이었고, 그 노래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관통이었다. 시는 그에게 휴식이 아니라 다시 싸우기 위한 호흡이었다.
1993년 출옥 후 그 해 5월 김의기 열사 13주기 기념 강연회를 마치고 서강대학교 교정에서. 박철 사진
문익환의 영성은 그래서 특별하다. 그것은 개인적 내면에 머무는 영성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으로 확장되는 영성이었다. 그는 신앙과 정치, 기도와 행동을 분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의 삶으로 엮어냈다. 오늘날 종교가 자주 권력과 타협하고, 중립을 가장한 침묵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할 때, 그의 삶은 더욱 또렷한 대비를 이룬다.
1985년 봄, 나는 문익환 목사님을 민통련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김의기 열사가 나의 처남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내셨다. 김의기의 삶과 죽음을 단순히 가족의 아픔으로만 여기지 않고, 민중과 민족의 고통으로 인식해 주셨다. 그 마음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민족 전체의 고통과 정의의 자리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그의 연대와 애정은 단순한 동정이나 위로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를 행동으로 구현하는 길이었다. 이 연대는 내게 신앙이 결코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와 역사 속에서 증명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었다.
32년 전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나신 때, 눈이 많이 내렸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은 유난히 고요했고, 사람들은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이 땅이 한 사람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는 듯했다. 영정 앞에서 나는 삼배를 올렸다. 사진 속 그는 여전히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절을 하며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개인의 죽음이라기보다 한 시대가 떠났다는 감각이 더 또렷했다. 장례식장을 나설 때도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눈이 오는 날이면 나는 늘 문익환 목사를 떠올린다. 눈 속에서도 봄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을.
1987년 7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치른 이한열 열사 장례식. 연단 위에 선 문익환 목사는 '조사' 대신 26명의 열사 이름을 부르며 절규한다.
문익환 목사 32주기를 맞은 오늘의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그가 던진 질문 앞에 서 있다. 민주주의는 제도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회 곳곳에서는 배제와 혐오, 침묵의 공모가 반복되고 있다. 분단은 더 이상 긴장으로조차 인식되지 않을 만큼 일상화되었고, 통일은 말하기 조심스러운 주제가 되었다. 종교는 도덕적 권위를 말하지만, 정작 가장 약한 이들의 곁에서는 자주 침묵한다.
이런 시대에 문익환이 살아 있다면 그는 아마 이렇게 물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편안함을 위해 외면하고 있는 고통은 무엇인가. 신앙과 양심을 분리한 채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언제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그의 질문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바로 그 불편함 속에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그를 기린다는 것은 과거를 추억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질문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묻는 일이며, 그의 용기를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실천해보는 일이다.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불의 앞에서 한 발짝 물러서지 않는 태도, 분단을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상상력, 신앙과 양심을 삶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끌어내리는 선택이다.
1983년 문익환 목사가 김대중 선생께 보낸 편지. 사진=늦봄 문익환 아카이브
문익환 목사는 떠났지만, 늦봄은 끝나지 않았다. 늦게 오는 봄은 늘 더 간절하고 더 깊다. 그의 삶은 완결된 답이 아니라, 우리에게 남겨진 미완의 과제다. 우리가 아직 그가 꿈꾼 세계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우리는 여전히 그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가 남긴 질문에 답하려는 순간마다, 봄은 다시 시작된다.
늦봄은 지지 않는다.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서,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문익환의 봄은 계속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