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을 향한 질주, 거대 여야의 공천 과정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87년 이후, 아니 그 전까지 포함해도 이번 선거처럼 ‘정책’이 선거판에서 사라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거대 여야 두 당의 공천은 거의 국민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수준이다. 청년들에게 투표하지 않아도 좋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변화의 진원지가 되어야 할 더불어민주당이 심각하다. 긴급 구원투수 김종인이 내놓은 더민주의 지역구, 비례대표 후보들을 보면 ‘중도 확장’의 기대감보다는 야당성을 포기한 것에 대한 실망감이 더 크다.

이쪽 공천에서 떨어진 사람이 내일 저 당으로 가고, 또 저 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해명도 없이 그를 덥석 받아들이니 여-야가 분간이 잘 안 되고 왜 정치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선거가 한 달도 안 남았는데, 거대 야당의 제대로 된 대여 공세가 없으니 무당파가 움직이지 않는다. 지난 3년 박근혜 정권의 심판의 장이 되거나, 여당의 폭주를 막아야 할 야당의 공천이 감동을 주지 못하면, 결국 조직과 돈을 가진 여당만 웃을 것이다.


국민들이 거의 망가진 더민주를 포기하지 않고 야권연대를 기대하는 이유는 이 막장 정권을 끝내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더민주가 김종인을 ‘모셔올’ 때는 안정감, 관록의 이미지, 경제정당의 성격을 강하게 부각시켜 친여 성향의 부동층을 끌어오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거공학의 관점에서만 보면 그럴듯한 대안이다.

그러나 지난 한국 정치사를 보건대 현재의 선거제도, 극히 불리한 언론 환경, 지역 기반이 없는 야당으로서는 정치에 좌절하고 실망한 무당파의 가슴에 불을 붙이지 않고서는 정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고, 설사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강고한 관료 집단, 재벌이라는 큰 벽이 떡 버티고 있어서 애초의 공약을 접기 십상이다. 필리버스터, 청년 비례 선출 등 오랜만에 타오를 조짐을 보인 불씨마저 꺼버린 김종인의 ‘정치 셈법’과 그가 추천했던 비례후보의 면면은 야권 성향 사람들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었다.


이번 선거가 지난 민주화 28년의 역사를 완전히 땅에 묻는 ‘죽음의 굿판’이 되거나, 65년 야당을 역사의 뒤안길로 돌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사실 ‘제2의 민주화운동’ 혹은 민주주의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 정립과 새 주체의 형성이 없이는, 그리고 힘 있는 진보정당이 등장하지 않고서는 이 난국을 벗어날 길이 없다. ‘낡은 것’이 사라지지 않고, ‘새것’을 가로막아온 ‘정당 아닌 정당들’의 정치 독점, 더민주의 기능 상실이 원인이다. 국내외의 극히 절박하고 시급한 의제가 토론은커녕 거론조차 되지 않는 이런 선거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다. 중도당으로 변신한 더민주가 총선에서 선방을 한들 그게 과연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까? 김종인의 ‘노동’이 빠진 경제민주화, ‘북한궤멸론’은 완전히 70년대 식이다.


분위기를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러나 선거가 후보 개인에 대한 인기투표가 되는 최악의 상황을 막아야 하고, 정치 변화의 작은 실마리라도 마련해야 한다. 그러자면 지역 차원에서 시민, 청년단체 주선으로 다양한 방식의 정치마당을 열어야 한다. 정의당, 녹색당 등 소수정당들과 지역의 여러 단체, 그리고 소상공인과 노동자들까지 포함하는 지역 민회(民會)를 만들어 이 정권을 심판하는 토론장을 열었으면 좋겠다. 한 선거구에서 1천명 정도 온라인·오프라인으로 참여해서 주거, 일자리, 복지 등의 의제를 중심으로 정당 및 각 당 후보를 검증하는 일은 너무 늦었나? 중요한 것은 주민이 후보 검증 과정에 직접 참여하거나 야권연대의 압박을 가할 수 있는 시민 정치 모임의 단초라도 만드는 것이다.
총선 결과가 어찌되든 선거 후 우리 정치는 새로 시작해야 한다. 새 정치 주체를 만들려는 맹아적인 노력이라도 해야만 최악을 막고 희망의 씨앗을 피울 수 있다. ‘미워도 다시 한번’ 노래, 이제 그만 부르고 싶다.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