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일본인은 다름 아닌 아키히토 일왕일 것이다. 일왕이 지난 8일 공식적으로 밝힌 ‘생전 퇴위’ 의사와 일본의 71번째 패전일 추모식 때 언급한 “깊은 반성”이라는 단어가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에 강력한 울림을 남겼기 때문이다.
일왕은 지난 7월10일 자민당 등 개헌 세력이 참의원 선거에서 개헌 정족수를 확보한 직후인 7월13일 궁내청 관계자에게 ‘생전 퇴위’ 의사를 밝혔다. 이 소식은 NHK 방송 등 일본 언론을 통해 신속히 전해졌고, 모든 일본인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면 일왕의 생전 퇴위 의사 표명은 아베 신조 총리가 ‘필생의 과업’이라고 해온 개헌을 저지하기 위한 것일까? 정확한 이유야 본인만 알고 있겠지만, 일왕은 평화헌법을 소중히 생각해온 분이시니 아주 조금은 그런 마음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본 사회는 이 질문에 답하는 것 자체를 ‘금기’로 여기고 있다.


‘역시 일본인들은 비겁하군.’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 질문을 금기로 여기는 일본인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천황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복잡한 심리나 결국 비극으로 치닫고 만 일본의 근현대사를 올바로 이해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1880년대 일본인들이 마주한 가장 큰 고민은 일왕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헌법이라는 근대국가의 성문법 틀 속에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일왕이 일본을 통치하는 근거는 뭘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헌법 초안 작성자인 사법성 관료 이노우에 고와시(1844~1895)는 일본의 건국신인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후손인 진무천황 이후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일왕가 혈통의 연속성에 주목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대일본제국헌법(1889년 제정) 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고 정해졌다. 일본이 헌법을 통해 신의 후손이 만세일계로 다스려온 신국으로 규정된 것이다. 일본 군부는 이후 일왕의 초월적인 권위를 활용해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을 일으켰고 이에 저항하는 정치인들은 쿠데타를 통해 암살했다. 그 결과가 끔찍한 전쟁과 비참한 패전이었다.


패전 이후 일왕은 신에서 인간으로 강등됐다. 그리고 일본을 통치하는 ‘원수’에서 실제 권한을 갖지 못한 채 일본 국민들을 통합하는 ‘상징 천황’의 지위에 머무르게 된다. 그와 함께 일본 사회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일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절대 해선 안 되는 ‘금기’로 삼는다는 합의를 이루게 된다. 일왕의 권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게 되면 그 뒤로는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해지며, 지난 전쟁 때와 같이 국가 전체가 한 방향으로 폭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베 총리의 역사 수정주의에 대해 일왕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추도사 속에 ‘깊은 반성’이라는 한두 단어를 넣는 정도이며, 일본인들은 그에 대한 일왕의 절실한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짐짓 모른 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사회에 필요한 것은 ‘현명한 군주’보다는 ‘영향력이 없는 군주’일 것이며, 그보다 더 바람직한 것은 군주 자체가 없는 공화국일지 모른다.
이런 기묘한 일본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현재 일본에서 천황제를 유지할 필요가 있냐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일본의 헌법 1조는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 국민통합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주권을 갖는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고 되어 있다. 일본의 주권자는 일왕인가 국민인가. 헌법은 분명 주권자는 국민이라 규정하고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평범한 일본 시민들의 생각이지 ‘자애로운’ 일왕의 마음이 아니다.


< 길윤형 - 한겨레신문 도쿄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