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나라 사랑

● 칼럼 2017. 3. 28. 20:12 Posted by SisaHan

“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애국자들은 누구일까?” 이런 것들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수 없이 던져보던 질문들이다. 내 대답은 자라면서 바뀌었다. 초등학교 때는 살수대첩의 을지문덕, 안시성 싸움의 연개소문, 한산도 대첩의 이순신, 하얼빈 기차역에서 이등박문을 쏜 안중근 같은, 외부세력에 대항해서 싸운 사람들이 전부였다. 침입자에 대항해서 싸움 한번 안해 본 사람을 어떻게 애국자로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 나의 애국자에 대한 안목이었다. 나이가 들면서부터 군인 투성이였던 애국자 집단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창의적이고 문화,예술적 업적을 보인 사람들로 슬며시 바뀌었다.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생각을 담은 책을 많이 쓴 다산 정약용, 종두법을 발명한 지석영, 측우기나 해시계 등 여러가지 과학적 기구를 발명한 장영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화가 단원 김홍도, 음악가 박연 등 백성들의 생활에 예술적 감각을 불어넣은 사람들도 애국자 집단에 들어갔다.

이들 중에 가장 위대한 애국자는 누구일까? 초등학교 2,3학년 학생들이 물어볼 한 질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이 나라 억조창생들이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 준 세종대왕을 꼽는다. 내가 지금 이렇게 세종에 관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 그의 덕이다. 그러나 세종은 단순히 지금 우리가 쓰고있는 한글을 만드신 어른으로만 기억해서는 안된다. 그는 우리민족의 역사 전체를 통털어 가장 찬란하고 화려한 민족문화를 꽃피웠을 뿐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데 후세에 모범이 되는 태평성대를 이룩한 성군이시다. 현대적 감각으로 봐도 크게 빗나가지 않는, 참으로 멋지게 나라를 다스린 임금. 그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친 눈부신 업적 뿐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 또한 지극하였다. 암군은 간신배들을 싸고 돌고 현군은 현명한 신하와 가깝다는 옛말처럼 세종 주위에는 황희나 맹사성 같은 명신들은 물론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같은 당대를 호령하던 큰 학자들이 온 힘과 정성을 다하여 그를 보필하였다.

고등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춘원 이광수의 <단종애사>를 빌려와서 밤 늦도록 읽은 적이 있다. 한밤중에 세종대왕이 집현전에 들려 책을 읽다가 잠이 든 성삼문, 신숙주에게 추울세라 가만히 이불을 덮어주던 아버지 같은 세종대왕의 따뜻한 부정을 읽던 생각이 난다. 이팔청춘에 읽은 소설 장면을 60년 세월이 넘게 흐른 오늘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한창 사회적으로 민감하기 시작한 나이에 진정한 통치자는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깊이 박혔기 때문이지 싶다.
성군 세종이지만 생전 두 며느리가 쫓겨나는 것을 보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 비극이야 세월이 가고 다른 며느리가 들어오면 시나브로 잊혀지는 일. 비극 중의 비극은 세종이 죽고 나서 자식들간에 벌어진 골육상쟁이다. 즉 세종이 낳은 자식 중에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12나이에 왕위에 오른 어린 조카 단종을 임금자리에서 내쫓아 궁산 벽지로 귀양 보냈다가 결국에는 그를 죽이고 자기 동생도 죽여버린 비극이다.

애국심은 무엇인가? 내 생각으로는 내가 태어난 나라의 산천과 거기에 보금자리를 틀고 사는 사람들, 그 나라의 문화와 예술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인 사랑이요 공경심이다. 나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도 고향에 대한 사랑의 연장으로 보는 버릇이 있다. 고향을 잊을래야 잊어버릴 수가 없는 곳. 어느 시조시인의 말처럼 고향이란 먼저 간 우리 선조와 우리세대가 함께 살고있는 곳이다. 우리 선조들은 먼저 갔어도 우리가 사는 꼴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
우리가 현충원에 가서 선열들의 묘비 앞에서 묵념을 드리는 것은 선열들이 우리를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굳게 다짐한다. 이 다짐이 곧 나라사랑의 노른자위가 아닐까.

< 이동렬 - 웨스턴 온타리오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