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순수행위입니다. 절대행위입니다. 기도에서 하나님이 빠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방법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인격입니다. 인격이신 하나님을 간절히 추구하는 것 자체가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입니다. 이런 점에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의 기도’(Prayer of Heart)를 여러분에게 추천합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마음의 기도는 사막의 교부들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음의 기도는 사막의 교부들이 사막 한 복판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간절히 추구하면서 드린 기도입니다.
시내 광야에서 독거 수도사로 평생을 살았던 사막의 교부 중 한 분인 요한 클리마쿠스(Joannes Climacus)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이 기도할 때 장식적인 말로 자신을 표현하려고 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가장 물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이시는 기도는 작은 어린이의 간단하고 반복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지성이 많은 말을 찾음으로써 신앙심을 혼란시키지 않도록 하시오. 세리의 한 마디 기도,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하나님의 자비를 얻기에 족했소. 믿음을 가지고 드린 겸손한 간청이 우리를 구하기에 충분하오.” 클리마쿠스의 말처럼 마음의 기도는 하나님만을 구하는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짧은 기도문을 반복하는 기도입니다. 그 방법은 아주 단순합니다. 마음에서 우려 나오는 짧은 기도문을 반복해서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나를 도와주소서’ ‘주님 나에게 은혜를 주옵소서’ ‘주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이런 문구 중에서 자신의 상황에 맞게 성령님께서 주시는 대로, 하나의 문장을 선택해서 마음으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문을 외우듯이 기계적으로 드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는 것은 마음이 실려 있지 않은 형식적인 기도를 경계하시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한번 복잡한 마음을 버리고 단순한 마음으로 마음의 기도를 드려 보시면 어떨까요?
한번 이 시간 저와 함께 마음의 기도를 드려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 조용히 눈을 감으십시오.
-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십시오. 깊은 심호흡을 몇 번 하시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 지금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십시오.
- 그리고 마음에서 우려 나오는 기도 문구를 선택하십시오.
 지금 제 마음에는 ‘주님 사랑합니다.’가 떠오릅니다.
- 이제 마음을 기울여서, 주님을 간절히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 주님, 사랑합니다.’를 반복하십시오.
- 중간 중간 잡념이 찾아오면, 부드럽게 물리치고, ‘주님 사랑합니다’에 집중하면서
 계속해서 반복하십시오.

처음에는 3-5분정도 기도해 보시고, 점점 시간을 늘려 보십시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운전할 때에, 길을 걸을 때에, 일을 할 때에도 마음을 놓치지 마시고, 짧은 기도를 통해서 마음을 주님께 드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단순하고 짧은 기도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줄 것입니다.

< 고영민 목사 - 이글스필드한인교회 담임목사 >


[한마당] 성경과 적반하장의 데자뷰

● 칼럼 2017. 7. 5. 13:47 Posted by SisaHan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로마서 2장 5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2장 17절).


이들 성경구절은 죄를 짓고도 회개와 용서를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가 담겨있다. 즉 죄를 지었어도 제 때에 깨달아 진실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이다. 성경에는 이처럼 죄와 회개에 대한 언급이 무수히 나온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이르는 장면이 묘사된 누가복음 23장에는 중죄를 지어 예수와 함께 십자가 참형을 앞둔 강도가 참회하여 용서받고 낙원에 이르게 되는 극적 반전이 기록돼 있다. 설령 살인 강도범일지라도 진심으로 사죄하면 단번에 죄 사함을 받아 천국 입장권도 얻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는 강력한 희망의 메시지다.
그런데 이같은 죄의 고백과 회개를 통한 용서의 원리가 단지 신앙과 영성적인 측면에만 그치는가. 그렇지 않음은 누구나 잘 안다. 실제로 세상 법정에서 눈물로 후회하며 용서를 비는 피고인이 감형과 선처를 받는 사례는 흔하다. 인간사회의 도덕과 윤리 기준에서도 얼마든지 통용되는 정리(情理)이기도 하다.


좀 더 비약해보면, 가령 독일은 나치의 역사적 죄과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무릎꿇고 사죄하여 용서와 화해의 배려를 얻었을 뿐만아니라, 이제는 도덕적으로 수준높은 지도적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이웃 일본은 전혀 그렇지 못해 경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경과는 거리가 먼 질 낮은 나라와 민족으로 인식되고 있다. 자의식도 책임감도 없는 도덕 불감의 뻔뻔한 국민, 국가철학의 수준이 형편없는 나라. 그러다 보니 정치수준도 민주주의도 후진을 벗어나지 못하는 ‘살찐 돼지’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애틀란타 인근에 ‘평화의 소녀상’이 6월30일 미국에서 세 번째로 제막될 예정인 가운데 일본의 그 지역 총영사가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저질 망언을 늘어놓아 공분을 샀다는 소식이다. “일본군이 성노예로 삼았다는 증거가 없고, 소녀상은 예술 조형물이 아니라 증오의 상징이며 일본에 대한 분노의 상징물”이라는 것이다. 아베 총리 조차 과거 일제의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를 표명한다고 소위 ‘불가역적 최종적 위안부문제 정부간 합의’라는 것에 담아서 발표하고 지키라고 윽박지르면서도, 자기들끼리 앞뒤가 맞지 않은 망발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했듯, 스스로 소녀상을 ‘증오와 분노의 상징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망언을 내뱉는 사이 일본 외무차관은 미국 국무부장관을 만나 “한일간 위안부 합의 이행이 중요하다”며 동의를 구걸했다니 정말 저급한 나라의 외교관들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마침 미국의 하원 외교위원장은 독일의 사례를 상기시키면서 “아베총리는 역사를 직면해야 하고 정직하게 대해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고 한다. 그는 “일본은 침략과 위안부와 같은 인권유린의 역사를 젊은이들이 배우는 역사에 집어넣는 것이 중요하다”고 훈계를 덧붙이며 “독도는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에 자신들의 영토라고 지도에 기록했을 뿐 과거에도 한국의 영토였고, 지금도 한국의 영토”라고 강조, 우리가 할 말을 속시원히 대변해 주었다는 보도다.
‘이전에 언젠가 경험하였거나 보았던 것처럼 여겨지는 느낌 혹은 착각’을 프랑스어로 ‘데자뷰’라거나 ‘기시감(旣視感)’이라고 한다. 마치 일본이 과거사를 깔아뭉개며 적반하장인 것과 너무도 닮은 행태들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요즘 한국의 일부 야당에게서도 바로 그 억지의 기시감을 실감하곤 한다.


압도적인 국내·외 한인들의 선택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 높은 지지율 속에 50일을 맞고 있다. 그런데 헌정유린과 국정농단으로 탄핵당한 전 대통령의 지지그룹인 한 야당은 여지껏 반성의 기미조차 없이 무조건적으로 국정을 걸고 넘어지는 후안무치를 뽑내고 있다. 그런가하면 법의 심판대에 선 탄핵대통령의 재판정에서는 “우리 대통령님”을 외치고 법관들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호통을 치는 막무가내 신봉자들의 허망한 목소리도 들린다. 토론토에서도 “탄핵은 무효다, 석방하라”고 열을 올리는 이들이 있다하니, 그들의 심중과 가치관은 과연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성경은 또 이렇게 말씀했다.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에스겔 18장 30절) 잘못을 회개하고 반성하면 결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거듭된 가르침이다. 그런데도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고 과오 덮어버리기와 변명에 급급한 모습은 마치 썩어 문드러진 우상을 붙잡고 구세주라고 외치며 매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십자가에서 극적으로 구원받은 강도의 깨달음이요, 깨닫지 못한 자들에 대한 징벌의 경고이며 지극히 합당한 지적이다.


< 김종천 편집인 >


조선은 27대 518년을 이어온 왕조다. 이 정도면 세계 기록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에서는 단연코 가장 오랫동안 이어온 왕조다.중국에서 가장 길었던 왕조로 알려진 당은 20대 289년 밖에 안된다. 조선 왕조의 절반 조금 넘는 셈이다.
이것이 자랑거리일까 아니면 수치스런 일일까? 내 생각으로는 둘 다이지 싶다. 유교 전통에 기반을 둔 충효 절개와 신의가 유별나서 그렇게 오래도록 이어갈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 수치스럽다는 것은 주군에 거머리처럼 달라 붙어서 배를 채우며 부와 권세를 자손대대 누리려는 기득권 무리들이 많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조선조에 역모를 꾸미는 것을 보면 특이한 점 하나가 눈에 띈다. 즉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역모를 꾸미는 사람 자신이 스스로 왕이나 황제임을 선포하고 역모 행동에 나선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역모를 꾸미는 사람들이 임금 자리에 앉을 왕족 혈통을 가진 사람을 미리 골라서 점 찍어놓고 역모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말들이 많다. 내가 보기에 그는 사악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주위 몇몇 사람들과 자기 보좌관들에게 미구 휘둘린 대단히 어리석은, 그러나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 같다.


오늘도 박근혜 대통령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던 고위 관리 몇 사람들이 법의 심판을 받으러 법정을 드나드는 것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쳤다. 모두 잘 먹고 잘 입고 얼굴에 번지르르 기름기가 도는 인사들. 이들에게 현대판 간신이란 칭호를 갖다 붙인 언론도 있었다. 이들이 간신이냐 아니냐는 좀 더 무겁게 생각해 봐야 하겠지만, 쌓이고 쌓인 울분이 터지고 말아서 그렇게 되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박근혜 대통령을 보좌하는 고등관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 자신을 그 상황에 대입시켜보는 버릇이 있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가 나의 핵심 윤리 기준과 크게 어긋나는 것이라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했을까? 아니면 “나 이것은 못하겠소” 하고 일어서서 나와 버렸을까. 아마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나올 용기는 없는 위인이니 시키는 대로 꾸역꾸역 일은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교수처럼 조교를 시켜 시험지를 갈아 끼운다거나 어느 보좌관처럼 차명폰을 주선해 줄 주제도 못되는 인물이니 직위는 항상 제자리걸음, 더 높은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에게 까지 돌아올 쇠고랑이 어디 있겠는가.
테두리 밖에서 용감해지기는 쉽다. 그러나 조직 안에 있는 동료들과 등을 지며 “나 이거 못하겠소” 하며 내 던지고 초연히 걸어 나오기는 세상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오늘 지나친 충성으로 쇠고랑을 차고 감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어린 시절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학창시절에는 불의에 분노하고 자기가 앞으로 커서 사회에 나가면 불의와 싸우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고 여러 번 다짐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젊은 시절의 포부는 크면서 세상만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분개…, 이런 경험을 수없이 되풀이 하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이해타산 따라 잔머리를 굴리다 보니 오늘에 이른 것.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 것이다.
간신은 최고의 권좌에 앉은 지도자의 능력 부족으로 생길 때가 가장 많다. 현명한 군주는 간신을 두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예는 조선 제 22대 임금 정조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정조는 임금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홍국영이라는 능력이 뛰어나고 패기에 찬 젊은이로부터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에서 여러 번 구제를 받았다. 홍국영이 없었더라면 정조가 임금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의심이 갈 정도다. 정조가 임금이 되고 홍국영은 서른도 못 된 나이에 총무, 재무, 병무, 의무, 학무의 실무 권리를 모조리 거머쥐게 된다. 조선왕조의 첫 세도 정치가 시작 된 것이다. 그는 몸과 마음을 바쳐 일편단심으로 임금 정조를 떠받들었다.


그러나 정조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는 홍국영을 아꼈지만 냉정하게 그의 성향과 기량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홍국영이라는 사람은 덕망과 어진 인품으로 자신을 도와서 천하대사를 이끌어 갈 위인은 아닌 것으로 보았다. 이제 그는 더 큰 비극이 오기 전에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용히 그를 불러 은밀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정조는 그 자리에서 홍국영에게 은퇴를 권고하였다. 박근혜로 말하면 김기춘이나 우병우를 해고한 것이다. 박근혜는 정조처럼 사람 보는 식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역모의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다면 모르지만 주군을 위해서 한마음 한 뜻으로 몸 바쳐 일한 홍국영은 충신인가, 아니면 간신인가? 내 대답은 간단하다. 이쪽에서 보면 충신이요, 저쪽에서 보면 간신이다. 역사는 진 자가 아니라 이긴 자에 의해 쓰여진다. 간신으로 말하면 조카 단종을 임금자리에서 쫒아내고 자기가 그 자리에 앉을 음흉한 생각을 품은 수양(세조)을 따를 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수양을 간신이나 부르는 사람은 없다.
오늘도 텔레비전에서는 법정으로 향하는 박근혜 보좌관들의 얼굴을 보여준다. 이들이 충신인가, 아니면 간신들인가? 얼른 판단이 나질 않아 몇 자 적어보았다.

< 이동렬 - 웨스턴 온타리오대 명예교수 >


[칼럼] 한미동맹, 누가 평가하는가

● 칼럼 2017. 7. 5. 13:42 Posted by SisaHan

서울에는 한국은 미국과 철저하게 공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철저함” 속에는 “동맹 차원”의 결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믿는다. 이들 가운데 “천성적으로 미국의 모든 것에 동조적(naturally sympathic to all things American)인 사람들”도 있다. 이 말은 2006년 7월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본국에 보낸 외교 전문에 나오는 표현이다. 한국의 소위 주류 외교안보 전문가들을 묘사하면서 사용했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중국이나 일본 전문가 그룹보다 수적으로 빈약하다. 그들은 한국 언론매체의 영문판 뉴스와 번역 서비스를 이용하여 한국의 소식을 듣는다. 이들의 지식과 의견은 한국 뉴스와 언론에 도드라지게 등장한다. 마치 그들이 미국의 정책이고 대표적 의견인 듯 말이다.


이들은 북한과 협상은 불가능하며, 더 강력한 제재를 통해 북한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이 곧 붕괴할 것이라고 믿는 전문가들도 꽤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들과 천성적으로 미국에 동조적인 전문가들은 끈끈한 유대와 연대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같은 학교를 다녔거나, 오랜 기간 세미나에서 교류했거나, 정책 용역을 공동으로 진행했거나, 아니면 단순히 서로 간의 필요가 맞아떨어져서 매우 세밀하고 조직적인 연결망을 유지한다.
이 연결망이 사실상 동맹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한-미 관계의 평가가 180도 뒤바뀔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무현 정부 시기, 한-미 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평가는 이들이 생산해 놓은 그들의 담론이다. 양국 간의 공조가 흔들렸고, 동맹이 약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동맹 공조가 흔들렸다면, 어떻게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으며, 왜 한국이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규모의 지상병력을 이라크전에 파병했으며, 어떻게 미국의 지원 없이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되었을까? 이들이 한-미 간 공조가 흔들리고 동맹이 약화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면은 노무현 정부가 대한민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과 다른 의견을 피력하고 상호호혜적인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협상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정부가 미국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들은 여전히 건재하고 강력한 담합체제를 유지한다. 자신들의 사고와 접근법을 일종의 기준으로 설정하고 그 이외의 것들은 반동맹적인 방안으로 아주 불손하게 취급한다. 최근 문정인 교수(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가 미국 학회에서 했던 “사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미 동맹이 깨진다는 인식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게 무슨 동맹이냐?”라는 발언으로 촉발된 소동이 아주 전형적인 예이다. 서울과 워싱턴의 전문가들은 한-미 동맹이 굳건하다면서 한국이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거나, 합의가 바뀔 경우 동맹의 기초가 흔들린다고 역설한다. 그 역설의 핵심은 “미국 말 잘 들어”라는 심리가 가득하다.
곧,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마주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끔찍하게 나쁘다고 생각하는 미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동맹에 무임승차 중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국민의 안전과 한반도의 평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한국의 대통령은 당당히 협력외교를 할 것이라고 피력한다. 이 회담을 통해 한반도 문제에 대한민국이 주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길 바란다. 그것이 이 회담의 목적이어야 할 것이다. 동맹이 “천성적으로 미국의 모든 것에 동조적인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 최종건 - 연세대 교수, 정치외교학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