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환영 한국방송(KBS) 사장이 이 방송사 김시곤 보도국장의 발언 파문과 관련해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민 대변인, 유족에 부적절 발언
박대통령 “분열 야기 언행 안돼”

세월호 유족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면담을 요구하며 청와대 앞마당까지 항의방문을 왔다가 되돌아간 9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긴급 민생대책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사회 불안이나 분열을 야기하는 언행들은 국민경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말했다. 같은 날,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청와대 앞을 찾아온 유족들을 언급하면서 ‘순수 유가족’이라는 표현을 썼다.
유족들의 청와대 앞 항의방문으로 초긴장 상태에 휩싸였던 청와대는 이날 길환영 한국방송(KBS) 사장의 사과를 받은 뒤 유족들이 돌아가자,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박 대통령과 민 대변인의 말을 보면,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여전히 ‘불순세력이 유가족들을 정치적으로 선동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 ‘불순세력, 유언비어’ 걱정하는 청와대
박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 참석한 고위 관료들 앞에서 “여기 계신 분들이 잘못 보도되고 왜곡시킨 정보들이 떠돌아다니고, 이런 것에 대해 바로잡고 이해를 시키고, 그래서 사회에 다시 희망을 일으킬 수 있도록 힘을 내시고 힘써주시길 바란다. 만약 이대로 계속 나아간다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경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심리가 아니겠는가. 이 심리가 안정돼야 비로소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박 대통령의 발언은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에 대한 비판이 잦아들지 않는 데 대해, 이를 ‘사회분열 세력’이 주도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런 비판이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어 경기악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월호 참사를 이용해 야권과 진보진영이 정부·여당 공격을 선동하고 있다’는 보수언론의 주장과 거의 똑같은 논리다.
 
또 얼마 전까지 한국방송 소속이었던 민 대변인은 “지금 (청와대 진입로에) 유가족분들이 와 계시는데, 순수 유가족분들의 요청을 듣는 일이라면 누군가가 나서서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입장이 정리가 됐다”고 밝혔다. ‘순수 유가족이 무슨 뜻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유가족이 아닌 분들은 (청와대가 말씀을 듣는) 대상이 되기 힘들지 않겠느냐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유족들 사이에 정치 선동을 하는 불순한 인물들이 섞여 있다는 청와대의 인식을 은연중에 드러낸 셈이다. 결국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서 드러난 박근혜 정부의 잘못에 대한 비판은 일부 세력이 주도하는 ‘정치 선동’에 가까우며, 청와대가 억울한 매를 맞고 있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두 차례에 걸쳐 언급한 것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그리고 이달 2일 종교지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해 사과의 말을 하면서도 “너무 많은 유언비어와 확인되지 않은 말들이 퍼져 사회에 혼란을 일으킨다”고 말한 바 있다.

■ KBS 사퇴·사과는 예스, 대통령 면담은 노
유족들이 청와대 앞으로 찾아오자 청와대는 새벽부터 비서실장 주재로 수석비서관회의를 여는 등 비상이 걸렸다. 청와대는 박 대통령에 대한 면담 요청에 대해 박준우 정무수석과 이정현 홍보수석이 대신 나서는 선에서 무마하려 했다. 청와대 내부적으로 ‘직접 면담할 경우, 앞으론 참사 수습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안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될 수도 있다’며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청와대는 대신 김시곤 보도국장의 사의와 길환영 사장의 사과 등 한국방송과 관련된 유족들의 요구사항에 대해선 상당히 신속한 대처를 한 것으로 자체 평가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청와대가 한국방송에 협조 또는 수습을 요청했느냐’는 질문에 “(청와대가 한국방송에) 현재 상황에 대한 의견은 전달한 것으로 안다”고만 말했다. 한국방송은 전날까지도 유족들의 사과 요구에 강경한 반응을 보였다. 유족들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청와대는 유족들이 길 사장의 사과 뒤 물러난 것에 대해 크게 안도하는 분위기다.
<석진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