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전작권 환수

● 칼럼 2014. 10. 13. 17:38 Posted by SisaHan
9·11 테러 후 부시 정부는 2002년부터 주한미군의 ‘신속기동군화’를 위해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한국에 반환하고자 했다. 그래서 2007년 한-미가 합의한 것이 ‘2012년 4월17일 전작권 한국에 반환’이었다. 그걸 이명박 정부가 미국에 간청하여 2015년 말로 연기시켰다. 이제 2015년 말이 1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23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에서는 그 환수 일정을 확정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후보 때 ‘2015년 전작권 전환 차질 없이 준비’를 공약했다.
‘전략적 유연성’ 때문에 미국은 자진해서 전작권을 반환하려고 한다. 이슬람 강경파 문제 외에 미-중 갈등 때문에도 이 입장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전작권은 미국이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직도 나온다. 전작권 환수 연기를 간청하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약화를 보전해 주어야만 한다. 우리 국방비가 그만큼 더 든다. 그런데도 올해 초 한-미 정상회담 후 ‘2020년 환수’설이 나돈 적도 있다. 주권국가의 군사주권과 관련해서 주객이 전도된 해괴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1950년 7월14일, 6·25 동란 발발 19일 만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겼다. 한국군이 도저히 북한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한국의 국력이 북한에 비해 월등해지자 미국은 1994년 8월1일 평시작전통제권(평작권)을 한국에 반환했다. 그날 김영삼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44년 만에 작전권을 환수한 것은 우리 자주국방의 기틀을 확고히 하는 역사적 사건이며 제2의 창군이라고 할 수 있다.” 국방부는 2000년까지 전작권도 환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제2의 창군’, ‘전작권 환수’ 같은 말들은 1960년대 말부터 우리의 비원(悲願)이었던 전작권 환수가 가능할 만큼 국력이 커졌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전작권 환수가 왜 우리의 비원이었나?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을 살해하려 한 김신조 사건(1968.1), 아내를 저격한 문세광 사건 (1975. 8) 때 북한을 응징할 수 없었다. 아웅산 사건(1983.10) 때 전두환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 전작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작권을 가진 미국은 작은 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기에 그때마다 우리는 ‘한 대 맞고 끝내는’ 수밖에 없었다. 전작권을 남의 나라에 맡기고 나니 정당방위도 맘대로 못하게 된 것이다.
 
군사회담에서도 북한은 남한을 무시했다. 1984년 1월10일 북한이 미·북·남 3자회담을 제안했다. 미-북 평화협정과 남북 불가침 문제를 협의하자면서 “군사실권을 가진 미국과 먼저 얘기하고 나서 남측과도 할 얘기가 있으니 방청은 해도 좋다”는 식이었다. 1986년 6월9일 북한이 제안한 미·북·남 군사당국자 회담도 같은 논리였다. 남·북·미·중 4자회담이 1997년 제네바에서 몇 차례 열렸을 때도 북한은 미국과만 대화하려 했고, 미국은 그걸 받아 줬다. 전작권이 없다는 이유로 남한은 북한한테 수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전작권이 우리 수중에 있는데도 북한이 대남 군사위협·도발을 맘놓고 하고, 군사문제 회담에서 한·미를 상하관계로 상대했을까? 북한의 대남 군사위협 때마다 국방장관들은 “원점을 때려부셔버리겠다”고 호언했지만, 아직은 평작권만 있고 전작권은 없는 나라의 국방장관이 독자적으로 대북 군사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큰소리는 쳤어도 실제로 ‘원점’을 속시원히 때린 적은 아직 없었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은 대선 때의 ‘전작권 환수’ 공약을 이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방장관에게 전작권을 환수해 오라고 지시해야 한다. 전작권을 환수해 오면 내년부터 박 대통령은 명실상부한 주권국가의 대통령이 된다. 앞으로 북한이 군사적으로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도 우리와 체결하자고 할 수밖에 없다.
< 정세현 - 원광대학교 총장 전 통일부 장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