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자존심에 자신이 없을 때

● 칼럼 2014. 11. 18. 17:51 Posted by SisaHan
이민을 결행한 사람들의 많은 사연들이 있겠지만, 조국에 대한 실망과 자존감이 무너진 경우도 드물지 않다. 아이들이 억울하게 불에 타죽고 수학여행 길에 수장되는 참사는 다른 나라에서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발단이 된 배후의 부패와 비리의 커넥션을 들춰내 원인을 명백히 규명하고 재발을 차단하려는 줄기찬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때, 지친 부모들은 “이 땅을 떠나겠다” 고 절규했다. 억울함이 없는 사회, 생명이 최우선인 나라, 진실과 정의가 바로 서고 승리하는 국가를 소원하건만, 아무리 용을 써도 물거품이 되고 외면당하고 결국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다면, “우리 후손들은 어떻게 키우나” 절망하며 내 나라 내 조국을 향한 애정이 사그러들 수밖에 없다. 
반만 년 유구한 역사에 자부심을 가진 한국인으로 해외에서 쳐다보는 시각과 인식에 당황하고 불쾌할 때가 있다. 중국인 혹은 일본인이냐고 묻는 것은 흔하다해도, 아예 중국의 오랜 속국이 아니었느냐는 ‘왜곡된’ 동아시아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다. 그게 아니라고 적극 우겨보지만, 찜찜한 것은 한국 역사에서 상당기간을 중국에 조공바치며 살아왔으니, 왜 우리 조상들은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지 못하고 사대(事大)에 빠졌던 것인지, 어쩔 수 없이 자존이 자신을 잃곤 한다.
 
그런데 그 사대의 망령은 지금도 여전히 설쳐대고 있다. 세계 15위권 경제대국이라는 이 시대의 위상은 어디로 가고… 전시작전통제권, 이른바 ‘전작권’ 반환을 미국에 사정사정해서 무기 연기시킨 일은, 새삼 국민적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다. 사실상 포기나 다름없는 ‘역사적 사건’의 파장이 나라 안팎으로 번지면서, 사대의 수준을 넘어 군사주권을 넘겨버린 ‘영혼없는 정권’이라는 힐난이 이어진다. “차라리 미국의 주로 편입해 버려라” 라고 미국인들이 손가락질을 해댈 정도니, 나라 꼴, 국민들의 얼굴이 말이 아니다. 그렇잖아도 대미일변도 외교와 의존으로 미국에 예속된 나라라는 현대판 사대주의 논란이 가슴 아픈데, 전작권을 갖다 바치고 그 것도 수십조 원어치의 무기를 사줘가며 ‘달성’했다고 의기양양해 하는 국방책임자들은 두뇌구조가 어찌된 걸까, 역시 조공을 바치며 왕권을 지켰던 고려나 조선의 피가 흐른다고 자부할 텐가.
 
순진한 국민들은 월드컵 축구가 승승장구할 때 ‘대~한민국’을 외치며 가슴 뿌듯해 했고, LPGA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골프낭자들에 박수를 보내면서 조국을 대견스레 생각한다. IT와 스마트폰과 자동차와 조선 강국에, 한류가 각광받는 다이나믹한 나라, 한때는 OECD가입을 내세우기도 했는데, 이젠 G20소속 국가라고 뽐내는 정권에 늘 맞장구 쳐준 국민들이다.  
번지르르한 겉모습의 이면에 부끄럽게도 멍들고 썩고 문드러진, 줏대없는 속살이 감춰져 있는 것을 몰라서인가. 아니다. 그래도 내 나라 내 조국, 미워도 내 핏줄이라고 삭였다. 일제와 일본을 타도하며 극일을 외치면서도 친일세력이 득세하는 현실을 참았다. 국가기관의 불법개입으로 선거민의를 왜곡했어도 반성이나 당선 무효는 커녕 더욱 강권을 발동하는 집권세력도 눈 감았다. “정치활동이지만 선거개입은 아니”라는 궤변으로 정부 비호에 급급한 사법부가 건재한 몰꼴도, 그러려니 친다. 어디 그게 한국만의 특수현상인가. 여전히 지구촌 구석구석에는 더 못한 나라들이 많으니까. 
그런데, 그 정도는 약과였다, 군권(軍權)을 남의 나라에 바치고도 좋아하는 습벽을 제대로 된 나라라면 이해할 수 있는가. 국방비를 30배 이상이나 더 쓰면서도 북한에 열세라고 기가 죽어있는 장군들은 분명 ‘똥별’들이라고 지탄해야 맞다. 자존심 깔아뭉개고 군권을 줬으니 식민이나 예속이 아니냐는 규탄도 틀린 말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힐 일은, 그런 중대한 결정을 국민과 상의하는 공론화 과정도 없이, 심지어 국무회의에서도 전혀 논의한 바 없이 정부 수뇌 몇몇이서 결정해 뚝딱 해치웠다는 것이다. 그리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동의를 구할 일이 아니라고 우긴다. 대통령은 반드시 회수하겠다는 공약을 손바닥 뒤집듯 깨버리고도 일언반구 말이 없다. 국민을 무시하고 나라를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라고 착각하는 오만과 독선의 극치가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군권을 청국에, 러시아에, 또 일제에 맡기고 정권만을 지키려다가 나라가 망한 조선말의 비극이 불과 1백여년 전이다. 여전히 사대와 외세의존의 두뇌구조가 맹위를 떨치니, 그야말로 국제 호구요, 과대 포장된 허상을 그대로 드러낸 민낯에 한국사람 낯이 뜨거울 뿐이다. 
갈수록, 모든 면에서 예속되어 있고, 더 예속되어 가는 나라라면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냐고 우기는 말에 어떻게 변명할 생각인가. 대만이 중국 군사력이 두렵다며 군지휘권을 미국에 맡겼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외화내빈-속빈 강정’이라는 국제사회의 비웃음 속에 자주외교란 헛구호일 뿐이다. 결코 자학의 비아냥이 아니다. 5천년 역사의 문화민족이요 자주독립의 정체성을 지닌 한민족의 자존심을 품었다면, 냉정히, 그리고 후세를 생각하며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짚어보고 참회해야 옳지 않은가.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