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할머니가 뿔났습니다

● 칼럼 2015. 1. 30. 18:18 Posted by SisaHan

지척에 사는 손녀들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손가락을 꼽아보니 녀석들이 다녀 간 지 일주일도 채 안되는데 무척 오래된 듯합니다. 남편은 빙판길을 살피며 조심 운전하는 동안 저는 아이들의 꼬물거리는 광경을 상상 해 봅니다. 지금 쯤 큰 녀석 서현이는 인형 놀이 하느라 갖가지 도구들을 펼쳐 놓았겠고 무법자 리아는 뒤뚱거리며 그 위를 휘젓고 다니겠지요. 그러면 서현이는 동생을 어르고 달래다가 끝내는 멀찍이서 딴 살림을 차릴 겁니다. 두 아이가 몇 번 살림살이를 폈다 접었다 하는 사이 집안은 온통 장난감 천지가 되겠지요. 이때 쯤 어미의 숨겨놓은 카드가 발동을 할 겁니다. ‘자, 장난감 정리 하세요. 할아버지 할머니 오실 거예요.’ 어미의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은 신나서 폴짝거리며 창가에 가 붙어 서겠지요. ‘하버지 할머니가 왜 이렇게 안 오시지?’ 녀석들이 지나가는 불빛을 보며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는 사이 우리는 성큼 안으로 들어섭니다. 그다음 달콤한 뽀뽀 세례가 폭포수처럼 퍼부어지겠지요. 신호등을 몇 개 더 지나야 하는데 마음은 이미 녀석들을 품에 안고 양 볼을 부빕니다.


근데 오늘은 저의 상상이 과했던 탓인지 왁자지껄해야 할 현관이 조용합니다. 조급한 어미가 채근을 해도 안에서는 미동조차 없습니다. 그나마 무법자 리아의 열렬한 환영이 있어 위안이 됩니다. 오랫동안 독차지 하던 가족들의 사랑을 동생과 나눈 서현이는 ‘아니, 싫어.’ 만을 내세우는 속상한 네 살입니다. 거기다가 배꼽인사 하랴, 존댓말 하랴, 식사 예절 지키랴, 어른들의 성화에 아이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 아닐 겁니다. 때문인지 우리의 출현에 극과 극으로 반응합니다. 기분 좋은 날은 최고의 환대를 그렇지 못한 날은 눈길도 안줍니다. 오늘 같이 흐린 기운은 어미와의 전작이 있었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눈치 구단인 우리들이 이런 호기를 놓칠 리 없지요. 손녀의 인사쯤은 생략하기로 하고 얼른 녀석의 모드로 돌입합니다. 단 몇 초 만에 아이는 우리를 놀이방 친구로 끌어들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녀석의 하수인이 됩니다. 숨바꼭질 할 땐, 몇 번이고 정해준 장소에만 숨어야 하고 병원놀이며 구연동화며 모두 녀석이 주관하지요.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따르다 보면 가끔 팁으로 저희 어미에게 혼난 일을 고자질 해 옵니다.


‘할머니 어제 밤에 엄마한테 쫓겨났어요. 너무 너무 추워서 팔을 이렇게 했어요. 그리고 깜깜해서 무서웠어요. 오줌도 마려웠어요.’ 한손으로 어깨를 감싸고 다른 한손으로 아랫도리를 쥐어짜며 밖에서 벌 받을 때의 모습을 재현합니다. 그런 모습이 귀엽고도 안쓰러워 녀석을 안으면 바로 뿌리치고 일어나 ‘할머니, 이렇게요 이렇게.’ 하며 똑 같은 동작을 반복합니다. 이럴 땐 마음이 쏴아 합니다. 온 동네를 몇 번 들었다 놓았을 아이의 울음소리와 네 살배기 철부지를 길들이겠다고 초강수를 둔 어미의 마음이 읽혀진 탓이지요. 이렇듯 어미가 아이에게 주는 사랑의 체벌도 가슴이 저린데 올 연초부터 불거진 조국의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은 아픔을 넘어 경악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서현이와 똑 같은 네 살배기 아동들을 편식한다는 이유 혹은 글자 터득이 늦다는 이유, 수면 시간에 돌아다닌다는 이유, 등등 가당치 않은 별의 별 이유로 무차별 상습 폭행을 행했다니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요. 폭행 방법도 토끼 귀 비틀기, 슬리퍼로 때리기, 가슴 쥐어박기 등등 감히 유아들의 교육현장에서 일어났다고 상상할 수 조차 없습니다. 그동안 수면아래 놓였던 사건들이 한 달 내내 전국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떠오르고 있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지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단순히 사명감 없는, 인성이 삐뚤어진 교사들의 횡포로만 여겼는데 알고 보니 그 뒤엔 가당치도 않은 법이 존재하고 있었군요.


출산 장려의 일환으로 여성들의 육아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아동무상보육을 실시한지 2년차 법이 빚어낸 비극이었습니다. 어설픈 두 살짜리 법 때문에 전국 각지의 수많은 서현이들이 수난을 겪고 있으니 이 할미는 뿔이 납니다. 자식 양육은 모든 어미들의 자연스런 본분이 아닌지요. 우리의 현명한 젊은 어머니들이 알아서 할 일을 엉뚱한 분들이 나서서 그르치고 있으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제발 이번 사태가 아픈 만큼 성숙하여 우리의 꿈나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토양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