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전철밟기의 어리석음

● 칼럼 2015. 9. 18. 18:19 Posted by SisaHan

징비록(懲毖錄)은 임진왜란의 교훈을 집대성한 ‘전쟁백서’다. 당시 재상이었던 서애 유성룡이 전쟁의 참화 속에 국정을 지휘하며 직접 체험하고 깨달은 바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후세에 교훈을 삼도록 기록한 귀중한 역사서다. ‘징비’란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시경(詩經)의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한마디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대비한다는 뜻이다. 저자 유성룡은 거기에 이렇게 경고했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화를 회고하면서,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한다.”
그러나 불과 30년도 안돼 정묘호란, 38년 후에는 병자호란 등 조선은 다시 외침을 당해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국권이 무참히 유린을 당했으니, 징비록의 교훈을 깊이 새겨 국난을 방비하지 못하고 똑같은 참상을 다시 겪은 것이다.


명군 세종은 대마도 정벌을 단행해 빈번한 왜구의 침범에 쐐기를 박은 지혜로운 군주였다. 상습적으로 반복되는 왜적의 출몰을 면밀히 분석한 토대위에 근거지를 제압함으로써 근본적인 대책을 실행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국정 주도권을 쥔 세력들은 임시방편의 대처에 그쳤을 뿐, 왜구의 뿌리부터 차단하는 철저한 방비책은 외면했다. 일본에 ‘조선 통신사’를 보내느냐 마느냐는 논란으로 허송세월한 것처럼, 백성과 국가의 안위는 제쳐놓고 오로지 어느 편이 유리하고 목소리가 크냐는 국정 주도권 싸움의 갑론을박에만 골몰했기 때문이다. 그런 어리석음의 반복 끝에 결국은 하찮게 여기던 왜(倭)의 한 입 먹잇감으로,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적 치욕의 시대를 맞는다, 징비록이 상세하게 지적하고 가르친 경고를 뼛속깊이 새겨 실천하지 못한 까닭이다. 역사의 교훈을 잊으면 참화는 반복된다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이치다.


1970년 12월 서귀포발 부산행 남영호 침몰로 326명이 숨진 뒤에도 크고작은 해상사고가 났다. 20여년 전(1993년) 서해페리호 침몰사고 때는 귀중한 인명 292명이 수장됐다. 이같은 대규모 해난사고를 당했으면, 철저하고 근본적인 분석과 안전대책을 세웠어야 함에도 지난해 4월에는 세월호 참사가 났다. 선박 안전과 운항관리, 선원과 승객의 해난사고 대비태세, 그리고 구난시스템과 원활한 작동, 그 위에 관련분야 행정과 업계의 얽히고 설킨 공생 부패구조 척결 등이 이뤄졌다면 또 다시 3백명이 넘는 귀한 생명을 잃고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는 참사가 되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진상규명 조차 외면하더니 이번에 다시 낚싯배 돌고래호 침몰사고가 터졌다. 그야말로 알고도 당하는 어리석음의 되풀이요. 전철 밟기의 전형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무려 852명이 발트해에 수장된 스웨덴 여객선 에스토니아호 침몰 참사는 다시 우리에게 교훈으로 다가온다. 스웨덴 정부는 사건이 나자 조사위원회를 꾸려 사고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규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재발방지 대책 가운데는 여객선의 구조를 바꾸는 설계혁신부터 어린이를 위한 안전교육까지 새 매뉴얼을 만들었다. 그렇게 나온 재발 방지책들은 하나씩 철저히 적용해 시행에 들어갔고, 그 이후로 대형 선박사고는 사라졌다.
넓고 거대한 바다에서의 사고를 인간의 힘으로 백% 막을 수는 없다. 천재지변과 불의의 사고란 항상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항상 예비하며 대책을 세워두고, 위기에 처했을 때 대처방안을 주도면밀하게 마련해 숙지한다면, 대형 참사를 줄일 수 있고 단 한명의 인명이라도 살려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 바로 앞서의 잘못을 통해 깨닫고 배워 발전해 나가는 학습효과로 인류역사의 발전에 초석이 됐던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역사의 교훈을 잊고 전철을 밟아 후회한다. 학습은 잠시의 소나기성 외침일 뿐, 금세 망각의 늪에 빠져들곤 한다. 특히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철저한 반성은 없이 축소와 덮기, 면피와 남 탓에만 열을 올려 흐지부지 넘어가는 바람에 다시 재발되곤 하는 고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천암함이 침몰했으면 그 원인을 과학적이고 철저하게 분석해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게 했어야 함에도, 여지껏 북한은 오리발을 내밀고 있고, 국민들은 의혹의 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북한 병사가 넘어와 문을 두드렸다는 3년 전의 이른바 ‘노크귀순’과 올해 6월 ‘대기귀순’ 등 DMZ에서 북의 침투사례가 빈번했지만, 그 역시 ‘덮기’에 급급하다 보니 ‘지뢰폭발’ 사건이 터졌는데 이번에도 철저한 대안이나 책임자 규명 없이 북한규탄만 하다 “확성기에 북이 굴복했다”며 대북정책을 잘해 인기가 오른다고 희희락락이다. 북은 이번에도 여전히 근거를 대라며 오리발인데….


김대중 정부시절 드러난 도청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국정원이, 여전히 그 교훈을 망각하고 민간인 사찰과 해킹의혹의 중심에 선 것을 본다. 댓글사건으로 선거민의를 왜곡하고 국헌을 문란시킨 잘못을 범하고도 어영부영 뭉개기와 꼬리자르기로 넘어간 것이나, 불법적인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로 파문을 일으키고도 조직방어와 물타기, ‘아니면 말고’식 여론호도로 넘어가는 악습도 발본색원이 없으니 언제든 재발의 여지는 살아있는 것이다. 이렇듯 정보기관의 정치습벽과 검찰·경찰 등 수사·권력기관, 심지어 엄정 중립이 요구되는 군과 감사기관에 언론과 사법부까지도 정권 호위무사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전철을 되풀이하는 한국사회의 고질병이요 어리석음의 표출에 다름 아니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