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가고 싶은 길

● 칼럼 2015. 10. 30. 19:31 Posted by SisaHan

어려운 결단을 했다. 마침내 포트 호프(Port Hope)를 떠나고자 한다. 이곳은 내 생애에 가장 오래 살아온 곳이자, 내 자식들이 학창시절을 보낸 곳이라 고향인 셈이다. 정작 은퇴를 하고도 이곳을 떠나지 못한 명분이 있었다. 생업에 매여 즐기지 못한 시골생활에 대한 동경심과 아들네가 사는 오타와를 왕복하기 쉽다는 편리함이 주요인이었다. 비록 그렇다 해도 막연하게나마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수시로 갈등하며 망설여왔는데 이제는 때가 되었는지 더 이상 아무 것도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눈에 밟히던 귀여운 손주들도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더 늦기 전에 나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을 뿐이다.
 
우연히 이곳에 코너 스토어를 사게 되었을 때만 해도, 1년만 살고 다시 토론토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뀔 그 긴 세월을 이곳에서 지내게 될지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사올 때만해도 도시와 시골의 교육제도에 대한 선입견으로 염려가 앞섰었다. 그것은 쓸데없는 기우였다. 정작 문제는 아이들이 아닌 나 자신에 있었다. 이 아름다운 작은 시골 마을에 마음 붙이기가 힘이 들었다. 당시 30대 중반인 나는 양 날개를 힘껏 펴고 하늘을 날고 싶었던 때였다. 헌데 마치 또 다시 이민을 온 셈이라 몹시 절망에 빠져들며 외로웠던 것이다. 미지의 섬으로 귀양을 온 듯 마음이 휘청댔다. 결국 시골아줌마로 적응하는데 5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다.

내가 희망 포구(Port Hope)라고 부르는 이곳은 경치가 아름답고 역사 깊은 작은 마을이다. 백여 년의 역사를 담은 건물들이 마을을 고풍스럽게 만들어 준다. 온타리오 호수와 마을을 가로지르는 가나라스카 강둑에서 무지개송어와 연어를 낚을 수 있고, 보랏빛 라일락 꽃이 만발한 멋있는 마을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가파른 언덕길이 여러 곳에 나있다. 남빛의 푸른 호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살랑대고, 어둠을 밝히는 한여름 밤의 밝은 달빛과 빛나는 별들을 머리 위에서 가까이 바라볼 수 있다. 마음이 답답할 땐 호수길을 벗삼기도 하고, 소나무가 우거진 숲길로 산책을 나설 수도 있다.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때문에 아침잠을 설쳐야 하는 호젓한 곳이기도 하다.

모처럼 나를 찾아온 지인들은 이구동성 이곳의 조용함과 평화스러움에 감탄하며 시골생활에 대한 동경을 표한다. 짓궂은 친구는 도(道)를 얼마나 닦았느냐고 물으며 놀려대기도 한다. 만약에 인간이 안이함과 적막함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 것이다. 억지로 내키지 않는 모임에 갈 필요도 없고, 귀찮은 전화도 반갑지 않은 손님도 없다. 나와 나의 가족만의 세계를 즐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충만하게 살아가기엔 고독과 싸워 이겨야만 했다. 마음을 나눌 벗들이 모두 도시에 있어 자주 만날 수가 없었기에 정작 내겐 우리라는 둥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곳은 은퇴 후 도회지에서 벗어나고 싶어 이사온 주민들이 많다. 허나 나는 그 반대다. 젊은 날의 열정과 꿈을 접고 살아온 곳이라 이제라도 그간에 잃어버린 삶을 다시 찾으려면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 훈훈한 사람냄새와 다양한 삶을 접하여 생기를 되찾으며 비록 인간공해로 잠 못 드는 밤이 생길지언정 나 홀로보다는 우리 속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추억의 나래를 펴며 오후 산책을 나선다. 4월이면 무지개송어가, 9월이면 연어가 산란기를 맞아 알을 낳으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댐에 이르렀다. 근래에는 이곳이 관광코스의 하나가 되어 방문객이 빽빽이 들어서있다. 한창 연어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댐을 넘으려 높이뛰기를 하고 있다. 이게 웬일인가. 수산청에서 마련한 통로를 찾지 못하고 전혀 엉뚱한 곳에서 높이뛰기를 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길인데도 길게 줄까지 서있다. 마치 사기꾼에게 걸려든 어리석은 사람들 같다. 그 모습은 기실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에너지를 소모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어쩌면 지금 내가 가고 싶어 하는 이 길 역시 최선의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든다. 설사 그렇다 해도 나는 이 길을 선택하련다. 더 늦기 전에 떠나리라.

< 원옥재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