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엄마~, 엄마~아” 한 번으로 부족하여 두서너 번 연거푸 불러야만 속이 후련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신비하게도 부르면 부를수록 더욱 가슴이 채워지던 이름이 ‘엄마’였다. 동심의 세계를 마술사와 행복의 여신이 되어 가득 채워 주셨던 분. 내 서러움과 아픔을 한꺼번에 도맡아 주실 수 있었던 유일한 분. 가난했던 시절이어서 내 것이란 제대로 가져 본 적이 없었지만, 엄마만큼은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 엄마를 어느 날 ‘어머니’로 부르게 되면서 딸은 슬픔을 배운다.
 
분주했던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야 한 남자의 아내 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씩 터득되었고, 신혼여행지로 가면서 비로소 부모님의 둥지를 떠나야 함이 실감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철없던 시절에 대한 깊은 회한에 빠져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잘 도착했어요.” 처음으로 ‘어머니’라 어색하게 불렀던 것이다. 첫 아이를 분만한 후, 아들을 낳은 기쁨과 함께 깊은 슬픔에 빠졌었다. 내 생명에 숨겨진 어머니의 육신적 고통을 직접 체험했으니 말이다. 어머니로부터 나와 아들로 이어진 창조의 비밀과 사랑의 신비를 깨달으며 되돌아가 보상해 드릴 수 없는 안타까움에 서러웠었다. 이렇게 늘 기쁨과 슬픔은 함께 있었다.

결혼 생활의 연륜이 길어가며 어머니 삶을 반복하는 닮은 꼴이 되면서부터 나는 어머니를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았다. 아들을 기숙사로 떠나 보내며 이민 간 자식들을 그리며 눈물 짓는 어머니를 이해하고, 말대꾸하며 거부하는 아이들을 통해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던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내 육신이 아파 누워서야 어머니 병환에 무심했던 그때가 죄스러워지고, 맛있는 반찬은 자식들에게만 주고 자신은 잡술 줄 모른다고 시침을 떼시던 진심도 이해되었다. 또한 부부 싸움에 익숙해지고, 내 잔소리가 심해지며, 가끔 두 아이들조차도 귀찮아질 정도로 삶에 지치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어머니를 ‘어머님’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부르면 부를수록 가슴이 메어지고 시려지는 ‘슬픔의 이름’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생전 처음 학부형 회의에 참석하셨던 엄마가 자랑스러워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운동장에서 서성거렸다. 얼마 후 기대와 기쁨으로 가득 차서 창문 틈으로 교실 안을 들여다보던 나는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했는지 모른다. 멋을 부린 다른 젊은 엄마들 틈에 끼어 앉으셨던 할머니 같은 내 엄마는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그런데 그 일이 내 일생을 통하여 어머니에 대한 연민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당시의 내 어머니에게 학부형 회의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얼마나 삶에 지쳐 시달리고 힘들었으면 딱딱하고 낮아 불편하기 짝이 없는 초등학생 의자 위에서 잠이 다 드셨을까. 과학 문명의 혜택을 최대로 누리며 세상 편하게 살면서도 힘에 겨워 쩔쩔매며 짜증내는 내 삶이 부끄럽기만 하다.

1995년, 그해 여름 모국방문길에 어머님과 어쩌면 영원한 이별이 될 작별을 하고 왔었다. 어린 시절에 ‘약손’이었던, 이제는 핏기 없는 바짝 마른 어머님의 손을 마주 잡고 두 육신은 하나가 되어 오랫동안 침묵하였다. 바람결에 날아갈 듯 빈약해진 여든넷 어머님의 초라한 가슴에 안긴 채 서러움의 강물에 빠졌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막내딸을 다시 떠나 보낼 생각에 밤마다 슬픔을 참아 내느라고 돌아누운 뒷등이 들먹이시던 것과 잠결에 깨어보면 내 손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삼키고 계시던 어머님. 얄궂은 시간 때문에 보행이 불편한 어머님을 집문 밖에서 작별했었다. 어쩔 수없이 뒤를 돌아보고 돌아보며 점처럼 작아지는 어머님을 가슴에 소중하게 품으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 것이 불과 2개월 전의 일이었는데도, 당시 나는 벌써 내 가족들에 파묻혀 어머님을 무심하게 잊고 살아가고 있었다.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도록 되어 있다며, 내 아이들을 잘 키우는 일이 우선이고, 그것이 어머님에 대한 효도라며 잘도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생각날 때마다 우는 슬픈 이름이여!
꿈 속에서도 나를 울리는 슬픈 이름이여! 어머님 !

< 원옥재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