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 탈퇴를 선택하면서 ‘브렉시트’가 이 시대의 혼란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고 있다. 1990년대 초반의 ‘소련 해체’와도 일맥상통하고,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의 브렉시트’라는 조합은 ‘1929년 대공황 이후의 파시즘 득세’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브렉시트의 파장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적어도 브렉시트는 진로를 예측할 수 있는, 그래서 지구촌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사안이다.


브렉시트는 일단 영국의 문제다. 이슈 자체가 ‘영국 독립’이라는 선동적인 구호와 연결돼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세계 5위 경제권인 나라가 독립을 말하니 우습지만, 브렉시트 지지자들의 머릿속엔 과거 세계를 호령하던 대영제국이 자리 잡고 있다. 옛 기억이 현재와 미래보다 앞서는 현상은 모든 고령자에게 흔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라의 진로를 왜곡한다면 심각한 문제다.
영국은 근대 세계의 주역이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웨일스 등이 합쳐 국민국가의 한 전형을 만들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세계화에서 다른 나라보다 늘 한발 앞섰다. 이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경제력에서 미국·중국·일본·독일 등에 현저히 뒤지는 것은 물론 한때 세계가 주목했던 ‘영국적인 것’의 매력을 찾기도 쉽지 않다. 브렉시트 소동은 이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자 ‘근대 영국’의 해체를 내보이는 사건이다. 브렉시트 투표 이후 스코틀랜드 독립 문제가 다시 불거지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21세기 세계에서 영국 모델이 설 자리는 좁다.


브렉시트 소동은 또한 이민·난민 문제가 새로운 역사적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브렉시트 투표의 최대 이슈는 영국 인구의 13%까지 커진 이민자 문제였다.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를 쓴 이언 모리스 미국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이민·난민 등 이주 문제는 기아·전염병·국가실패·기후변화와 더불어 역사의 방향과 내용을 바꿀 수 있는 다섯 기수(또는 묵시록) 가운데 하나다. 과거 게르만족의 이동은 지금 유럽의 토대가 됐고 미국 역시 이민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지난해 세계 이민자 수는 2억4400만명으로 2000년보다 41%나 늘었다. 난민도 6530만명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지구촌 이주자들의 다수가 유럽으로 향하는 것은 유럽이 역사의 최전선에 있음을 뜻한다. 유럽이 이들을 받아들여 발전의 동력으로 삼지 못한다면 이들은 거꾸로 유럽을 집어삼킬 수 있다. 브렉시트 지지자처럼 이들을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다. 이민·난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나라만이 지구촌의 지도국이 될 수 있으며, 영국은 그 대열에서 이미 탈락했다.


브렉시트는 아울러 세계사의 큰 물줄기가 바뀌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브렉시트에도 불구하고 유럽 통합이라는 역사적 실험은 꾸준히 진전될 것이다. 하지만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본격화한 나라·정파·이념·세대 사이의 갈등이 수시로 불거지면서 우여곡절을 겪을 것이다. 이는 유럽 통합이라는 이상의 문제라기보다 유럽이 전성기를 지난 늙은 대륙이기 때문이다. 유럽은 이전처럼 세계사를 짊어지고 갈 역량이 없다. 브렉시트 투표 이후 유럽연합이 ‘더 큰 유럽’이 아니라 ‘다른 유럽’ ‘단단한 유럽’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는 것은 타당하다. 지구촌을 이끌던 미국과 유럽 사이의 연대도 매개자인 영국의 이탈에 따라 약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미국 역시 늙어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브렉시트를 노골적으로 칭찬하는 것은 약해지는 미국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오는 11월 선거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미국의 패권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 분기점이 미국에서 출발한 2008년 경제위기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동아시아는 브렉시트 소동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선 어느 나라든 독선적이어서는 실패한다는 사실이다. 국민국가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나라 안팎의 주체들과 협치할 수 있어야 한다. 이주자를 포함한 인구 문제에 대한 고민은 동아시아 사회의 생존과 발전에도 근본적이다. 우리에게는 통일 문제가 여기에 직접 연관된다. 나아가 동아시아 공동체를 바라보는 데까지 진전된다면 역사의 큰 흐름은 급격하게 동아시아 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때 가서 돌아보면 브렉시트 사태가 한 분수령이었음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 한겨레신문 김지석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