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벤진의 추억’을 넘어

● 칼럼 2016. 7. 13. 08:21 Posted by SisaHan

사람은 누구나 평소의 언행을 통해 보편적인 평가를 받는다. 선거 때 표의 심판도 물론 그렇다. 특히 공직에 나서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 이기가 아닌 이타(利他)정신이 투철한지 여부가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거론된다. 봉사와 헌신의 섬김의식과 자세가 몸에 밴 사람이 아니면 유권자를 속이는 표의 구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인사회에 있어서도 평소 동포들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고 희생하며 덕을 쌓은 인물이라면 자연스럽게 추앙을 받고, 원한다면 주류정치의 문턱도 쉬이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동포들의 후원 열정이 저절로 달아오를 테니까.
하나의 추억을 꺼내보자. 캐나다 한인사회의 주류정치 도전사에서 2006년 3월30일 치러진 온주의원 보궐선거는 아마 가장 기억에 남는 극적이고 뿌듯한 선거전일 것이다. 선거에서 한인후보는 분패했지만, 한인의 단결과 저력을 보여준 사례로는 오늘 현재까지 단연 일등감이기 때문이다.


당시 한인후보 벤진, 42살의 이 젊은 후보는 혜성처럼 정계에 나타난 한국명 진병규였다. 그는 한인사회에 얼굴을 내민 일이 별로 없었다. 특히 동포사회를 위한 봉사와 헌신의 측면에서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다만 그는 주류방송사의 기자와 앵커로 16년간 명성을 쌓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부친이 캐나다 대사를 지낸 연고가 있었다. 주수상의 보좌관 자리에 보임됐다가 수상의 천거로 보선에 나선 그는 그래서 한인사회에 친근하게 다가왔다. 「유명 방송인 출신 한인을 주의원으로 만들어 큰 정치인으로 키우자」는 캐치프레이즈가 작동되면서 그의 선거전은 마침내 한인들의 ‘원풀이 대상’으로 부상해 동포사회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당시 후원회장을 맡은 원로 이상철 목사는 이렇게 호소했다. 『~벤진은 동포들을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어서 정계에 등단하면 한인 동포사회를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해낼 것도 분명하다. 동포사회는 벤진을 도와 그를 큰 인물로 키워 캐나다 전체를 위해 창조적인 일을 해내는 정치인이 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면서 이 목사는 동포사회가 할 수 있는 일 두 가지로 선거활동을 적극 돕는 일과 선거 자금조달을 위한 모금운동에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이 목사의 호소와 설득이 아니어도 한인사회에서는 주의원과 연방의원을 내야 한다는 한인 정치인 대망의 목마름이 강했던 터라, 좀 과장해서 남녀노소가 모두 나서다시피 캠페인을 도왔다.
하지만 선거구는 NDP거물 고 잭 레이튼의 아성이었던 토론토 댄포스였다. 자유당 사상 가장 높은 39.9%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아깝게 2천4백여 표 차로 분루를 삼켰다. 그럼에도 한인사회는 큰 아쉬움 못지않게 서로 박수를 치며 자부심을 주고 받았다. 선거운동 불과 25일만에 후원금을 15만 달러나 모으는 저력으로 자유당과 온주정부를 깜짝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벤진은 졌지만 동포사회는 이겼다」는 말이 시사 한겨레 지면에 등장하고 한인사회에 널리 회자됐다. 선거 열흘 후 한인회관에서는 이례적으로 ‘후원 감사의 밤’이 열려 주정부 인사들과 한인동포 등으로 붐빈 행사장은 마치 당선감사의 밤 같은 분위기를 보였다.
이날 벤진은 이렇게 말했다. 『한인사회의 힘을 이제는 자유당과 주정부 등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됐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후원금을 보내주고 희망을 보내준, 동포애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여러분을 위해서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으며 정계에 많은 후배들이 진출할 길을 여는 정치적 경력을 쌓아 나가겠다…』 당시 살아있던 부친 진필식 전 대사는 『뜨거운 성원에 감사하며 가족의 영광…우리 민족혼이 바람을 타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그렇게 뜨거운 사랑을 누렸던 벤진은 선거 후 한인사회에서 잊혀졌다. 그의 당시 약속은 빈말이 됐고, 한인동포들은 한 때 그런 젊은이가 있었다는 아련하고 허탈한 추억으로 간직할 뿐이다. ‘벤진의 추억’의 전말에서 느끼듯 한인사회와 정치인의 여망과 보응(報應) 사이에 거리감이 없지 않음을 많은 이들이 토로한다.
벤진에 이어 2012년에는 실협 전무를 지냈던 김근래 씨가 주의원에, 그리고 2014년에는 연방 총선에 조성용 씨와 주총선에 조성준 시의원이 잇달아 도전했다. 그 때마다 한인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한인 정치인을 만들자!”며 힘을 모아 도왔다. 특히 조성용 후보는 불과 9표 차이로 후보경선에서 분패하는 아슬아슬한 고지까지 오르기도 했다.
이번에는 다시 조성준(Raymond Cho:80) 시의원이 온주의원 보궐선거에 보수당 후보로 나섰다. 그런데 왠지 조 후보를 후원하는 열기가 종전처럼 뜨겁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 시의원 8선에 이르기까지 돕는데 동포들이 지친 것일까?
온주 보수당이 당수까지 나서 전력 지원하고, 선거구가 시의원 선거구와 겹친데다 사퇴한 당선 의원과 한번 겨룬 적이 있는 지역이어서 승리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 조 시의원은 8선을 거치며 선거에는 경험도 많고 노련하다. 나이가 많은 것이 걱정이지만, 꼭 당선돼 이번만은 한인사회의 ‘원한’을 꼭 풀어줬으면 좋겠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