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모두가 같은 조건을 가지고 나오지는 않았다. 혈연, 건강, 재산, 지능이나 재능등 모두가 다르게 태어났다. 따라서 나 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인생이란 경주에서 보다 유리하게 출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을 제치기는 힘들다. 그들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시간으로 경쟁 하는것 뿐이다. 그러나 시간 역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하루 24시간으로 주어졌기 때문에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습관을 통해서만 그들과 경쟁할 수 있다.


삶의 질은 습관의 질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할 수 있는 습관을, 실패한 사람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습관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느냐는 지금까지 어떤 습관을 가지고 살아 왔느냐의 결과인 것이다. 모든 일은 편해지기까지는 불편하고 힘 들지만 습관이 되면 전혀 힘들지도 불편하지도 않음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경험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하고, 양치질 하고, 신문 보고, T V 보는 것을 귀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미 습관이 되어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하루를 24시간이 아닌 더 많은 시간을 활용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모든 사람이 힘들다고 시도조차 안하는 습관도 한번 내게 습관이 되면 전혀 불편하지도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성공의 법칙’이란 책을 쓴 멕스웰 몰츠는 하나의 습관을 만드는데 21일이 걸린다고 말하고 있다. 손과 발이 절단된 사람은 얼마간은 그 사실을 잊은 채 물건을 잡으려고 하고 무의식중에 일어나 걸으려 하는 행동을 21일간은 반복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행동에 주의 한다고 한다. 하나의 습관을 만든데 단 21일간의 훈련이 필요 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것이 좋은 것이고 나쁜 습관인지는 다 알고 있다. 단지 귀찮고 힘들다는 이유로 바꿀려고 노력조차 하지않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새해 첫 달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목표, 실천 사항을 정하고 굳게 다짐하고 마음 먹지만 몇일 못가서 그 결단이 무너지고 마는것은 이미 길들여진 자신의 습관 때문이다. 따라서 그 습관을 끊고 새로운 습관을 만들기 위해 21일간 노력하는 동안은 힘 들고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 인생을 변화 시키고 새롭게 리모델링 하는데 그런 노력쯤이야 참고 견딜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습관은 마치 중력을 돌파하는 것과 같다. 일단 돌파하기만 하면 새로운 공간을 끝없이 순항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는 무한 경쟁의 시대요, 승자가 독식하는 시대이다. 잠시 한 눈을 파는 순간 우리는 뒤쳐질 수 밖에 없다. 새롭게 출시한 제품은 곧 바로 구형이 되어 버리는 광속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타인과 경쟁하고 그들 보다 앞 서기 위해서는 하루 24 시간이란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어떤 습관을 갖고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시간은 습관에 따라, 그리고 쓰는 것만큼 늘어 난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은 무엇하며 시간을 보내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를 먼져 생각하고 기획해야 하는 것이다.

< 신성균 - 빌라델비아장로교회 장로 >


사회학자 에릭 프롬은, 인간생존의 두 가지 양식을 이야기 한다. “소유냐 존재냐?”
어떤 사람은 소유양식의 삶을 지향하고 어떤 이는 존재양식으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전자는 재산이나 지식, 지위나 권력 같은 소유에 전념하는 삶이고, 후자는 자기능력을 발휘하며 삶의 희열을 확신하는 삶이다. 소유의 양식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즉 돈, 학위, 지위 등으로 자기의 가치, 주체성, 존재를 확인한다. 그런데 이것은 ‘죽은 관계’라고 지적한다. 반면, 존재의 양식은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성장하는 삶으로, 다른 사람하고 나누고 관심하는 살아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되기 위해, 또 보다 더 풍요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소유를 넘어 관계를 풍요롭게 해야 한다. 소유를 넘어 관계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 시대, 아니 인류역사를 통해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보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돈 때문에 사람들 관계가 깨어지고 분란이 많다. 돈 때문에 부부관계가 깨어지고, 형제들끼리 치고 박고 싸운다. 돈 때문에 이웃과의 관계 또한 수없이 깨어진다. 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길, 소유를 넘어서 관계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길, 어떻게 가능할 까? 그것은 자신 안에 가득 차 있는 자기(ego)를 비우고 하늘의 거룩한 뜻을 품는 데 있다.
어떤 졸부가 나이가 들어 묘비명을 쓰긴 써야겠는데 마땅히 쓸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유명한 작가를 찾아가 묘비명을 부탁했다. 그러자 작가가 물었다. “그동안 지내오시며 하신 일을 말씀해 주시지요.” 그런데 졸부가 생각해보니 딱히 기억될 만한 일을 한 게 없었다. 그래서 답했다. “뭐 딱히 내세울 게 없네요. 그래도 당신은 유명한 작가니까 잘 써주쇼. 내가 값은 후하게 쳐드리겠소.” 그러자 작가는 그에게 묘비명을 다음과 같이 써주었다고 한다. “낳다. 먹다. 죽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낳고 먹고 죽는 인생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채워진 삶이라면 매우 불쌍한 인생이다. 성서를 보면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소유와 관계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셨다. 보통 ‘탐욕’이라 하면, 무엇을 지나치게 탐내거나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다. 십계명처럼 남의 것 이웃의 것을 부러워하거나 갖고자 하는 욕심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탐욕은 보다 진보적이다. 탐욕은 분배하지 않는데 있음을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내 집, 내 차, 내 가족, 내 자신의 삶, 내 돈, 내 통장...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보면 내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은 대개가, 다른 사람의 손길을 통해 얻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내가 먹는 한 끼의 식사만을 생각해보아도, ‘내 밥’이기 전에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노고들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밥 숟가락을 들 수 없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고 감사하며 섭취하고 또한 나누어야 할 것이다.
내 것이라는 자기중심성, 자기 집착, 이기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기중심성,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이 이 세상을 슬프게 한다. 지금도 수많은 어린이들이 기아로 병들고 죽어가고 있다. 이 세상에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다. 미국에서 나는 식량만으로도 전 세계 사람이 충분히 먹고 살고 살 수 있다. 문제는 나누지 않는데 있다.


구약성서에는 가을에 추수할 때 한 귀퉁이를 추수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바닥에 떨어진 낟알을 거두어 가지 말라고 한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남겨 두라고 한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약1:27) 이라 말한다.
물질로 인해 불행하게 된 이 시대에 다시 한 번 예수께서 주신 가르침에 귀를 기울어야 할 것이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3-15).

< 문은성 목사 - 기쁜 소래교회 담임목사 >


[1500자 칼럼] 한 여름 밤의 추억

● 칼럼 2017. 7. 19. 14:20 Posted by SisaHan

사면은 아득하고 고요했다. 가끔 발자국 소리에 놀란 날벌레가 튈 뿐 그 어떤 소리도  깊은 어둠에 묻혀 버렸다. 갑자기 촛불 심지처럼 불을 밝히며 눈 앞에서 날아다니는 귀엽고 신기한 물체가 나타났다. 반딧불이었다. 도시에선 본 적이 없는 그것은 밭과 논길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에는 손을 뻗으면 머리 위에서 만져질 듯한 별무리가 가로등인양 반짝이며 앞서 길을 밝혀 주었다. 한적한 농촌에서 맞이한 여름 밤은 감상적이고 매혹적이나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다. 지금쯤이면 하루의 마무리 회의를 기다리면서 앞마당은 떠들썩해야 마땅한데 우리 대원들이 묵은 숙소로부터 인기척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에 남녀 8개 고교생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농촌계몽 활동이 목적인 클럽에 참여한 적이 있다. 여름방학이 시작된 7월 중순경 30여명의 대원들이 7박8일 일정으로 지금은 마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충북의 한 농촌으로 떠났다. 마침 장마철이 지나간 직후라 크거나 작거나 모든 도로가 패이고, 개울물이 넘쳐 네 시간 넘게 돌아가는 산길이 험악하고, 후덥지근한 찜통 더위에 입은 옷이 땀으로 젖어 들어 불쾌지수가 만만치 않아 순간적으로 후회가 앞서곤 하였다. 그곳은 60년대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 모습을 담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밭과 논을 에워싼 나지막한 산이 있고, 그 산밑으로 옹기종기 초가집들이 사이 좋게 웅크리고 있던 고즈넉한 곳이다. 우리 숙소는 마을 중심지에 자리잡은 마을회관이다. 주민들은 그곳에 모여 회의도 하고 마을 잔치도 연다고 했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우리는 여러 그룹으로 나눠져, 낮에는 동네 산등성이에서 마을 아이들을 맡아 율동과 학습을 지도하고, 집집을 방문하여 약품도 나눠주고, 집 안팎을 소독도 해주고, 일손이 딸리는 밭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준비해간 시멘트로 주민들과 함께 도로 보수에 참여하기도 했다. 밤에는 청•장년부와 처녀반, 부녀반을 열어 주민의 어려운 애로점을 듣고 배우며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도시생활에 익숙한 우리로선 농민을 계몽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농촌을 경험하는 유익한 기회였지 싶다.


나와 한 팀을 이룬 동갑내기 Y는 말이 없으나 체격이 좋은 호남아였다. 사춘기의 남녀 학생들이라 엄격한 통제 아래 그와 나는 처녀반을 맡아 당시 사회문제로 떠오르던 <시골 처녀들의 무작정 서울 상경>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하며, 문맹자들이 있는 만큼 <한글을 깨우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 날도 여름 밤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고 Y와 나는 수업을 마치고 곧장 숙소로 돌아왔는데, 이미 가지런하게 놓인 대원들의 신발을 보니 뭔가 잘못된 것을 직감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이 몽롱해오며 퍼뜩 짚이는 게 있어 시간을 확인했다. 분명히 9시쯤 되었어야 하는데 수업 중에 한번 들여다본 똑같은 시간인 7시30분이 아닌가. 농촌봉사대를 이끌고 온 단장은 대원들 앞에서 지금 10시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계가 고장난 줄도 모른 채 규정대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것을 증명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규칙을 어기고 둘이 데이트하다 돌아온 것으로 간주될 판이었다. 아마도 로맨틱한 농촌의 밤이기에 그리 상상하고 싶었으리라. 대원들의 표정은 은근히 우리가 걸려들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는데 단장만이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나는 멈춘 시계를 풀어 확인을 요청하며 수업 도중에 딱 한번 확인한 시간과 똑같음을 정직하게 말했다. 얼마간 정적이 흐른 후, 결국 우리는 무죄를 선고 받았다. 만약 유죄가 인정되었다면 일주 내내 식사당번과 반성문 제출을 해야 하고, 심하면 클럽에서 불명예 퇴출되는 벌칙을 당할 수 있었는데,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래도 진실이 통할 수 있던 시절이었기에 지금까지도 위로가 된다. 황당했던 그 추억은 문득 Y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킨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 아직 건강하게 살아나 있는 걸까?...


내 잃어버린 시간 속을 더듬다 숨은 그림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때묻지 않은 그 추억은 방금 피어난 꽃처럼 싱그럽다. 오해는 불신으로 치달아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일깨워준 나의 첫경험인 그 날의 추억! 그 후 5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삶은 내게 가르쳐 주었다. 진실이 왜곡되었을 때는 반드시 그 진실이 밝혀질 것을 믿고 때를 기다려야 하며, 아무리 하찮은 경험일지라도 결코 인생에 무의미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모처럼 추억 따라 귀여운 반딧불과 어울려 농촌의 밝은 달빛 아래 논길을 걸으니 은은한 그리움이 바람결에 일렁인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한마당] ‘국격’은 어디서 오나

● 칼럼 2017. 7. 19. 14:18 Posted by SisaHan

이달 초 독일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는 미국의 영향력 쇠퇴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양대 주요 의제인 ‘파리 기후협약’과 ‘자유무역’이라는 국제규범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참가 20개국 가운데 19개국이 한 목소리를 낸데 반해 미국만이 ‘협약 탈퇴’와 ‘보호무역’이라는 독자노선을 고수해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어 버렸다. 현지 발 통신들은 19대 1의 ‘반 트럼프 전선’이 형성됐다고 전했다. 미국의 새 지도자인 트럼프가 국제사회의 이단아로, 더구나 지구환경의 미래에 관한 문제와 글로벌 무역장벽 해소라는 보편적 ‘공동선’에 반기를 들고 나와 ‘왕따’를 당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퇴조는 세력권에 있어서 위축이라는 가시적 현상 보다는 ‘도덕과 철학’이라는 가치의 평가에서 하대(下待) 당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즉 지구오염과 온난화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데도 공동의 대처를 외면하고 혼자만 편하겠다는 ‘나 몰라라’식 태도에다, 무역에 있어서도 혼자만 득을 보겠다는 심보의 발로여서, 한마디로 더 이상 세계 최고의 가치와 국격을 지닌 나라가 아닌, 이기적이고 경박한 미국으로 보는 시각인 것이다.
그 연원이 바로 도날드 트럼프라는 인물 한사람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온갖 기행과 튀는 언동으로 미국과 세계를 당황케 한 그는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국제적 지도력을 기반으로 공조·구축한 규범의 틀을 깨고 무너뜨리기에 바쁘다. 외교적인 매너 조차 엉망이어서 악수 때문에 구설이 잇달고, 다른 지도자들을 밀쳐내고 포토라인에 서는 등 상식마저 초월하고 있다.


‘이제 미국에만 의존할 때는 지났다“라고 선언한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이번 정상회의를 주관하면서 트럼프와 대비되는 든든하고 신뢰할 만한 지도자로 우뚝 섰다. 덩달아 독일의 국격과 지도력 또한 위상이 한층 높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원래 독일의 국력과 유럽연합 내에서의 지도적 위치 등이 우월했다고는 하겠지만, 독일의 국격 상승은 역시 메르켈이라는 탁월한 지도자 한 사람의 품격과 지도력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아니할 수가 없다.
소탈하고 소통에 능한 것으로 인기를 끄는 메르켈은 일찍이 ‘탈 원전’으로 미래를 위한 안전과 청정의 환경 정책을 전개했다. 그는 유럽의 각국이 난민 수용을 회피할 때, 더욱이 국내적인 반발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과감하게 난민을 받아들이는 용단으로 ‘인류애’를 보여주었다. 그는 끊임없이 나치의 죄과를 반성하고 회개하며 혹여라도 나치의 전쟁범죄를 찬양하거나 나치를 옹호하는 세력에는 강력 대처하는 역사의식과 민주체질을 지녔다. 일본을 방문했을 때 과거사를 사죄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지도국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충고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수준높은 가치와 철학을 지닌 정치인이요 내실있는 민주적 지도자인 것이다.


메르켈 총리가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을 정성껏 환대했다는 소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지구촌을 놀라게 한 촛불혁명에 큰 관심을 보였고, 부패 무능한 권력자를 탄핵한 뒤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새 지도자, 민권변호사 출신이며 큰 국민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문 대통령에게 깊은 관심과 동지애를 드러냈다는 분석들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그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해 각별하게 챙겼다는 견해도 덧붙였다. 이번 G-20에서 많은 나라 정상들이 문 대통령과의 회동을 원하는 이례적인 인기를 끈 것도 같은 이유라는 것이다.
지난 번 미국 방문에서 한인동포들이 다들 기뻐한 것도, 이번 독일 방문에서 만난 재독 동포들의 감격과 눈물도 바로 그런 가슴 뿌듯한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온갖 정치공작과 국정농단, 민생피폐의 음습한 국내정치와 민주주의 파괴적 행태들을 일삼으면서도 무역규모가 10위권이며 국민소득이 얼마라는 등을 자랑한 물량주의적-가시적인 국격은 얼마나 천박한 허세에 불과한지,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여전히 그런 맘몬주의적 허상숭배를 버리지 못하고 저질의 뻔뻔한 우월감과 고집에 빠져있는 자들도 많은 현실이지만…. 이제, 한 국가의 국격은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고 정의와 도덕과 철학이 존중되며 구현되는 데서 출발함을 거듭 되새기는 시절이다. 그런 수준높은 국격은 지도자의 따뜻하고 바른 품성과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가치관에서 지도력이 발휘되는 나라, 국민들이 그런 지도자를 택하고 함께 힘을 모으는 나라의 몫 임을 독일의 메르켈과 함께 한국의 문재인이 새삼 강조해 주고 있는 요즘이다. 문 대통령의 지지도가 80%를 오르내리는 걸 보면 한국민들도 ‘지도자다운 지도자, 나라다운 나라’의 실상과 의미를 실감하고 있는 듯 해서 다행이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