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딸이 심은 라일락

● 칼럼 2014. 5. 20. 16:48 Posted by SisaHan
새벽녘 뒤뜰을 내다보며 화들짝 놀랐다. 마치 요술담요를 타고 얼음왕국에 도착한 듯 온 세상이 유리알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무와 잔디, 멀리 있는 숲과 도로, 그리고 전신줄까지도 온통 얼음으로 덮여있는 게 아닌가. 밤새 내린 비가 기온이 내려가면서 얼음비(freezing rain)로 변하며 불과 하루 만에 딴 세상을 만든 것이다. 넘실대는 파도 위로 반사된 한 여름의 불타는 햇살보다도 한층 영롱하고 신비한 정경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도 잠깐, 뒤늦게 그 얼음 밑에 깔려 신음하고 있는 생물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사력을 다해 버둥댔는지 수 십 년 동안 지탱해온 나무들의 생가지들이 허연 살을 내놓은 채 부러지고, 더러는 뿌리 채 뽑혀 나와 그 모습이 참담했다. 얼음왕국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대가치고는 무자비하였다.
 
십여 년 전 퀘벡과 온타리오 킹스톤 지역이 얼음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적이 떠오른다. 당시 대학생이던 딸이 일주일이 넘도록 도시 전체에 전기도 물도 공급이 끊긴 암흑상태라 아무도 오가지도 못하고 있었을 때 마치 엔테베 작전에서나 볼 수 있는 방법으로 킹스톤을 탈출했었다. 개인 헬리콥터를 가진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그 지역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토론토를 포함하여 온타리오 동남부 지역을 강타한 얼음비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보낼 크리스마스 연휴를 암흑 속에서 불편과 추위와 싸우며 지내야 했었다. 현대인이 누리고 있는 물질문명의 반작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겪어본 시간이다.
 
그날 우리도 작은 피해를 입었다. 이 집으로 이사하면서 딸과 남편은 두 그루의 라일락을 뒤뜰에 심었었다. 30년 전에 심은 그 흰빛, 자줏빛 라일락은 울타리가 없는 우리 집 뒷마당의 경계선으로 수문장 역할을 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를 보호해 줄 듯이 뒤에서 떡 버티고 서있다가 매년 5월이 오면 겨우내 무디어진 우리의 눈과 마음을 윤기 나게 만들었다. 라일락이 한창 꽃을 피울 땐 향긋하고 은은한 향내로, 소담스러운 꽃송이로, 집 주위의 품격도 높여주었다. 몇 송이 잘라 꽃병에 꽂으면 언제 들어갔는지 모를 수많은 개미떼가 그 속에서 쏟아져 나와 멀리서 명화를 감상하듯 하였다. 매년 5월이면 잡초 하나 피어나지 않은 푸른 잔디 위에 우뚝 선채 여왕다운 위용을 한껏 품어내는 자줏빛, 흰빛 라일락을 바라보노라면 옛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나며 결혼한 딸의 어릴 적 추억을 불러왔던 것이다.
 
단 하루 밤사이 내 딸 같이 정겨운 그 자줏빛 라일락이 네 동강이가 났다. 비록 비스듬히 기울어지긴 했어도 네 가지 중 성한 가지 하나를 살릴 수 있어 천만다행이긴 하였다. 그런데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모범수(樹)로 올곧게 잘 자란 자줏빛 라일락은 무참하게 부러진 데 비해 심을 때부터 불량하여 삐딱하게 기울어졌던 흰빛 라일락은 잔가지 몇 개만 내버린 채 멀쩡한 게 아닌가. 마치 삶의 길목에서 인생의 거센 비바람을 헤치며 자란 사람의 강인함을 흰빛 라일락에서 보는 듯 했고, 아무 어려움 없이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닥친 난관 앞에서 무참하게 쓰러진 연약함을 자줏빛 라일락에서 보는 듯 했으니 말이다.
라일락은 ‘젊은 날의 추억’ ‘첫 사랑의 감동’ ‘아름다운 맹세’라는 감상적인 꽃말을 지녀 젊은 연인들에게 사랑을 속삭여주고, 시정(詩情)을 일으키며,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에겐 딸이 심은 라일락인 만큼 세월이 흐를수록 연정(戀情)보다는 자식을 향한 모정이 더 절실하게 느껴왔다. 특히 타국에 살고 있는 딸과의 아련한 추억을 되살려주는 라일락 향기와 빛난 자태에 취하여 눈시울이 젖는 그리움에 빠져들곤 하였다.
 
그런데 지난 3월, 십 년을 기다려온 외손녀를 얻었다. 기다림에 지쳐 희망을 접어가고 있었을 때 귀엽고 건강한 외손녀를 순산하여 놀라운 희열을 누릴 수 있었다. 나와 딸과 사랑스런 외손녀로 3세대간 이어진 생명의 신비감은 이제 겨우 가냘픈 목숨줄 붙잡고 여린 꽃망울을 내밀기 시작한 자줏빛 라일락에서도 희망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몸체 대부분이 잘려나간 가련한 자줏빛 라일락, 그것이 살붙이를 떼어낸 고통을 딛고 어떤 꽃을 피어낼지 사뭇 기다려진다. 

< 원옥재 - 에세이문학으로 등단 (2000),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수필집「낯선 땅에 꿈을 세우며」여성동인집「세여자」 외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