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슬픔의 힘

● 칼럼 2014. 9. 2. 16:01 Posted by SisaHan
올여름 ‘베트남 평화 기행’을 다녀왔다. 한국군과 미국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행해졌던 지역을 돌아보며 참배하고 사죄하고, 우리의 내일이 서로에게 평화이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는 시간이었다.
 
여행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이 나라는 아주 놀라웠다.
베트남은 1858년부터 프랑스의 침략을 받기 시작해서 1885년 완전히 그 지배하에 놓였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지배 아래 잠시 들어갔다가 일본 패전 뒤 다시 지배권을 욕심낸 프랑스로 인해 1946년 제1차 베트남 전쟁인 항불전쟁을 치른다. 1954년 결국 승전하여 프랑스를 베트남에서 철수시키지만 이 사이를 치고 들어와 남베트남에서 실력을 행사하던 미국으로 인해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다시 제2차 베트남 전쟁인 항미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때 미국의 공세는 엄청났다. 이 나라를 석기시대로 돌려놓겠다고 공언하고는 제2차 세계대전의 3배에 달하는 폭탄을 퍼부었다. 그러나 전쟁은 1975년 미국의 패배와 베트남 남북통일로 끝이 났다. 약 100년에 걸친 식민지배, 약 30년에 걸친 강대국과의 전쟁. 그 전쟁을 결국 승리로 끝낸 베트남이었다. 놀라울밖에.
무려 130년. 학대와 수탈 100년, 폭탄과 함께 자고 깨며 ‘내일’이란 단어도 잊고 살아야 했던 30년. 지하로 토굴을 3층까지 파들어 가서 빛 한번 못 보고 살아도 포기하지 않은 시간들. 
베트남 사람들이 지닌 이 힘이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들은 ‘위트와 낙관’이라고 답했다. ‘전쟁과 함께 살자!’는 표어로 30년 전쟁을 견뎌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들은 ‘끝’을 꿈꾸지 않았던 것임을 알았다. 해피엔딩을 꿈꿨다면 미국과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비교 자체가 안 되게 초라한 자신들의 현실을 보면서 그래도 한번 가 보리라 결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베트남 기행 내내 윤동주 시인의 ‘팔복’이란 시가 떠올랐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시인은 원래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오’라고 썼다가 다시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고 고쳐 썼다. 
슬픔으로 가득한 땅에서 해피엔딩을 바라던 시인은 슬픔에 참여하는 것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해피엔딩을 바라는 마음은 외려 슬픔으로 가득한 이 순간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끝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지치는 속도도 더 빠르다. 시인은 슬픔의 오늘을 온전히 함께하는 것으로 슬픔을 극복한다.
세월호의 진실을 제대로 알고 진심으로 아파하기도 전에 각종 여론 매체들이 자꾸 ‘일상 복귀’를 종용한다. 그들이 말하는 일상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동년배의 죽음을 잊지 않고 슬퍼하며 살아가는 것이 학생들의 일상이 아니며, 자식 같은 아이들의 죽음을 잊지 않고 슬퍼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른들의 일상이 아니라 말하는 것인가?
 
용산참사도, 쌍용차 사태도, 밀양 송전탑도, 철도민영화도, 의료민영화도, 4대강도, 세월호도 그 어떤 슬픔도 끝나지 않았다. 이 모든 슬픔이 우리의 일상이다. 해피엔딩으로 되레 절망을 가르치며 어쩔 수 없는 포기가 우리가 살아야 할 일상인 양 말하지 말라. 지금 흐르는 슬픔을, 끝나지 않은 슬픔을 일상으로 가져와 우리도 30년쯤 함께 걷다 보면 돈과 힘이 아닌, 꿈이 결국 승리의 깃발을 삶의 복판에 꽂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함께하는 슬픔의 힘이 이제 나의 일상이다.

< 임자헌 - 한국 고전번역원 번역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