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농사를 짓는 두 형제가 있었다. 그들의 논은 산 중턱에 있었고 다른 사람의 논은 산 아래 있었다. 그들은 아주 무더운 날 오후 논에 물을 대고 밤에 잠을 잤다. 그런데 그 아래 논의 주인은 매일 밤에 논둑에 구멍을 내어 형제들 논에 있는 물을 매일 훔쳐 갔다. 그렇지만 두 형제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기에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를 붙잡아 혼내주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인이기에 아무 말도 하지않고 참았다. 그들은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참았으므로 매우 즐겁고 기쁘고 승리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날마다 물을 채우고 남이 물을 훔쳐간 것을 허락하면서도 그들의 마음에 평강이 없었다. 그래서 두 형제는 지혜로운 사역자를 찾아갔다. “형제님, 우리는 이미 일주일이 넘도록 참았는데도 왠지 마음의 평강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이 무엇을 훔쳐가도 참고 그냥 두어야 하는데 마음 속에는 왜 여전히 평강이 없는지요?” 지혜로운 사역자는 두 형제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그렇게 참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형제들은 가서 물을 훔친 사람의 논에 먼저 물을 채우고 그 다음에 형제들의 논에 물을 채우십시오. 그러고 나서 속에 평강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십시오.”하는 것이었다.

두 형제는 지혜로운 사역자의 말대로 이튿날 특별히 일찍 일어나 물을 훔친 사람의 논에 먼저 물을 채운 후에 자신들의 논에 물을 채웠다. 이상하게도 물을 훔쳐간 사람의 논에 물을 채우던 그 반나절은 마음 속이 갈수록 즐겁고 기뻤다. 그들이 자기들의 논에 물을 다 채운 후에는 마음속에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삼일이 지났을 때 논의 물을 훔치던 사람은 그 두 형제를 찾아와서 잘못을 고백했다. “당신들이 믿는 기독교는 참 놀랐습니다. 나도 가서 복음을 들어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타당하고 옳으면 다 좋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는 부족하고 하나님의 생명이 만족하는데 이르러야 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법에 따른 믿음의 생활인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생명을 주는데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생명을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왜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일까? 여기서 ‘더 풍성히 얻는다’는 말은 ‘생명을 나누는 삶’을 의미한다. 생명을 나눌 때 생명을 더 풍성해 진다는 말이다. 참된 목자는 ‘잡힐 양떼’처럼 행동하는 목자다. 목자는 ‘잡는 사람’이 되지 말고 ‘잡힐 양떼’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양떼를 잡아먹으려고 이 땅에 오시지 않고, 잡아 먹혀서 성도들의 마음에 들어오려고 이 땅에 오셨다. 그 방법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최적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무엇을 버리셨는가? 양들을 얻기 위해 목숨을 아낌없이 버리셨다. 예수님은 하늘의 기득권도 포기하시고, 아들의 권리도 포기하셨다. 오직 양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자기 생명을 담보로 내놓으신 것이다. 이것이 선한 목자 최후의 모습인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교회와 성도들이 회복해야 할 영성이다.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르고, 생각과 행실이 다른 모습으로는 안 된다. 예수님 닮기를 원하는 그 마음을 지켜 이 땅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야 한다. 이제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어 열매를 맺게 하시는 예수님을 선포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한다.

< 김석재 목사 - 순복음 영성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