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왜 역사정립이 중요한가

● 칼럼 2015. 8. 21. 18:02 Posted by SisaHan

종전 70년을 맞아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혹시 사죄를 하려나 하던 기대는 한여름 밤의 꿈이 되고 말았다. 본인은 사과하지 않고, 과거의 사과로 대체하는 그 약삭빠름. 미래 세대는 더 이상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 주제넘음. 과연 군국주의 전범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답다. 이러니 일본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이지만 문명적으로는 아직 후진국인 것이다. 일본인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다. 잘 가려서 봐야 한다. 무라야마 담화를 보라. 며칠 전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여 무릎을 꿇고 사죄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를 보라. 그래도 일본에는 전쟁 범죄를 사과하고 고개 숙이는 좌파, 진보파가 있다. 반면 소위 친한파라고 불리는 일본의 극우파는 식민지와 전쟁에 대해 아무런 죄의식이 없고, 한국이 이만큼 발전한 것도 일본 식민지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일본을 국제질서의 피해자로 보는 왜곡된 역사관을 갖고 있으니 이들에게 사죄를 기대하기란 연목구어일지도 모른다.


왜 역사의 정립이 중요한가? 그것이 나라의 수준과 품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19세기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조선민족을 순박하고 착하다 했건만 지금은 이기주의자, 막가파, 얌체가 이렇게 늘어난 까닭이 무엇인가? 무엇보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 때문일 것이다. 해방 후 친일파가 심판받기는커녕 각계 요직을 독점했던 역사가 비극의 뿌리다. 민족정기를 바로잡고자 했던 반민특위가 폭력에 의해 해산되고 매국노 응징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우리 역사는 뿌리째 뒤틀려버렸다.
그 책임은 압도적으로 이승만과 미국에 있다. 요새 광복보다 건국을 중시하면서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모시자고 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다. 이승만은 역사를 왜곡시킨 치명적 잘못을 저질렀다. 이승만의 과오 세 가지를 들자면 첫째, 권력 장악에 눈이 멀어 남북 분단을 조장한 죄, 둘째,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국내 권력 기반을 만들어내기 위해 친일파를 살려주고 중용한 죄, 셋째, 왕처럼 군림하며 독재한 죄. 민족 반역자들이 처벌받기는커녕 요직을 독차지함으로써 신생 독립국 한국에서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했다. 광복인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고, 흑백이 뒤바뀌고 사회정의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무능하고 부패한 이승만 독재정권이 학생들의 피의 희생으로 쫓겨난 뒤, 모처럼 찾아온 기회는 일본 육사를 나오고 일왕에 충성을 맹세했던 박정희의 쿠데타에 의해 다시 사라져버렸다. 그는 중앙정보부를 앞세운 공포정치를 도입하고, 헌법을 걸레조각으로 만들면서 정권 연장에 급급하였다. 박정희는 철저한 일본군 군인이었다. 조갑제가 쓴 책을 보면 박정희는 수시로 일본말을 했고, 5.16 쿠데타 날 새벽에 부대 출동 명령도 일본말로 했다. 이승만, 박정희의 30년 집권 기간 동안 역사 바로 세우기는 무한정 뒤로 미루어졌다. 내가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국어 교과서에는 친일파 문인들의 글이 버젓이 실려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주요한의 ‘불놀이’를 좋아해 암송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국어 선생님들은 ‘해에게서 소년에게’ ‘무정’ ‘불놀이’가 대단한 작품인 양 가르치면서도 최남선, 이광수, 주요한의 친일 행각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고 다닌 것이 어디 문단뿐인가. 관계, 법조계, 학계, 군, 경찰 할 것 없이 친일파가 나라의 중추를 몽땅 차지한 나라, 이건 광복이 아니다. 프랑스는 독일 점령하에 4년간 존속했던 비시정권에서 나치에 협력했던 민족반역자 2만6000명을 투옥하고 1500명을 사형 집행했으나 우리는 단 한 명도 처벌하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2만달러를 훌쩍 넘기고도 아직 선진국이 못되는 이유는 제대로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데 있고, 우리 국민이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도 여전히 공중도덕이 낮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반칙을 벌하지 않고 상을 주면 사람들은 반칙을 예사로 하게 된다. 인간은 역사의 산물이다.


독립운동가는 감옥에 가고, 그 후손은 3대가 망하고, 친일파, 매국노들은 부귀영화를 누린 것이 해방 후 우리의 역사가 아닌가. 역사를 똑바로 가르치지 않고는 우리 국민에게 정의감, 도덕심을 기대할 수 없으며, 도덕적 국민 없이는 결코 문명국의 대열에 끼일 수 없다. 우리는 아베의 후안무치에 분노하면서 다른 한편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 속에 아베는 없는가? 일제 식민지, 군부독재가 좋았다고 강변하는 뉴라이트, 일베가 아베와 다를 게 무언가. 광복 70년이라지만 진정한 광복은 아직 오지 않았다, 광복은 언제 오려나.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 이정우 - 경북대 교수 경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