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관련 발언은 듣는 귀를 의심하게 한다. 김 대표는 17일 새누리당 중앙위원회 산악회 발대식에서 “역사 전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대한민국의 국사학자들은 90%가 좌파로 전환돼 있다”며 “좌파의 사슬이 강해서 어쩔 수 없이 국정 교과서로 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황당함을 넘어 섬뜩하기까지 하다. 정부여당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가 ‘역사 쿠데타’라는 비판이 얼마나 이번 사태의 정곡을 찌른 것인지 김 대표 스스로 자백한 꼴이다.


여당 대표가 내년 총선의 공천을 두고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 수세에 몰린 뒤 납작 엎드려 무조건 충성을 맹세하는 모양새로 비치니, 딱하기는 하다. 설령 국정화가 김 대표의 소신이더라도 민주주의 원칙을 지켜야 하는 정치인의 발언이 이래선 안 된다. 역사 기술을 토론 대신 전쟁의 대상으로 삼는 발상 자체가 위험하다. 좋은 정책으로 역사의 새 장을 열 생각보다 입맛대로 역사책을 뜯어고쳐 어두운 과거를 감추고 실정을 덮겠다는 것은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다.
‘국사학자 90%가 좌파’라는 발언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정부의 국정화 방침에 반대하면서 대학의 역사·역사교육 관련 학과 교수들이 국정 교과서 집필에 불참하겠다고 잇따라 선언하고 있다. 국내 최대 역사연구단체인 한국역사연구회도 16일 국정 교과서 집필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서명에 참여하고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학계 인사 거의 대부분을 이렇게 극언으로 매도하는 몰상식은 일찍이 없었다. 김 대표의 발언은 정권의 국정화 추진이 우리 사회 지식인 일반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하고 있음을 자인한 것이기도 하다. 이들을 모두 탄압 대상으로 삼겠다는 협박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국정화 방침에 대해선 ‘위험한 교과서를 아이들에게 건네지 말자, 오사카 모임’ 등 일본 교과서 관련 17개 시민단체도 16일 성명을 냈다. 한국의 국정 교과서는 정권의 역사인식을 국민에게 밀어붙이는 수단이며, 한국의 국정화 시도가 아베 정권의 교과서 개악 시도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일본 시민단체들이 자국의 일도 아닌 한국의 교과서 정책에 반대 성명을 낸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군국주의 시절을 미화하는 극우파 아베 일본 총리도 감히 시도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는 아베 총리에게 칭찬이라도 듣고 싶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