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비빔밥 가족

● 칼럼 2014. 11. 3. 19:33 Posted by SisaHan
한식에 대한 인기가 북미에서 나날이 높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한식 세계화’를 위한 다양한 행사가 국내외에서 자주 열리고 있다. 우리 고유의 전통 음식을 만드는 경연대회는 물론이고 한식의 우수성과 색채의 다양화에 착안한 강습회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어떻게 하면 한국 음식도 일본의 스시, 타이의 패타이, 이태리의 스파케티와 피자처럼 세계인이 즐겁게 자주 찾을 수 있게 만드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한식 본연의 모습을 갖추고도 외국인의 입맛에 맞게 조리와 세팅(setting)에 중점을 두고 한식의 독특한 맛과 향을 내어 고유의 맛을 살리는데 주력해야 하리라. 특히 세계 만방에 한국기업들이 진출하고, 싸이 김연아 박세리 같은 월드 스타들을 배출하며,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G20국에 속하여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치솟고 있는 현실이니 국가 이미지 상승과 직결될 수 있는 한식의 인기를 드높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의 며느리와 사위는 한식을 특별히 좋아하는 서양인들이다. 우리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한결같이 한식을 기대하고 있어 장거리에 살고 있는 그들을 방문할 때마다 내 몸은 분주하고 고달프다. 그러나 마음만은 날아갈 듯이 가볍다. 결혼한 자식들로부터 한국음식 조리법에 대한 문의를 들을 때나 함께 한식을 나눌 때만큼 보람된 일은 없다. 저절로 신바람이 나서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을 준비하면서도 입은 함박만하게 벌어진다. 그들 역시 우리 식구가 되어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이제는 한식 몇 가지는 자신 있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한식의 맛도 제법 낼 줄 알아 자신감이 붙은 며느리는 김치 담그는 일에 도전장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한 집안에 동, 서양의 혼합문화가 있으니 조심스러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언어 소통이 수월치 않은 나와 음식을 공유할 수 있음은 천만다행이다. 한식의 독특한 맛을 즐기는 그들과 적어도 음식문화의 벽은 허물었으니 말이다. 만약 한식에 손을 대지도 않고 관심조차 두지 않는 가족 구성원이 한자리에 있다면 밥상머리에서 나누는 가족애가 정상적으로 자라날 수가 없지 않은가. 서로 음식 냄새에 신경을 쓰다 보면 모처럼 마련한 그 자리가 불편하기만 할 것이다. 
 
비빔밥은 우리 애들이 자주 만드는 한식 메뉴다. 갖은 색상의 나물을 썰고 볶아 그 위에 계란 후라이를 보기 좋게 얹어 내 놓으면 먹기 아깝다고 근사하다고 사위는 사진기를 들이댄다. 고추장과 참기름 소스로 그 나물들을 비벼 먹으면 맛이 최고다. 그 맛에 빠져 건강식 메뉴인 비빔밥에 관심을 둔 아들 내외에게 몇 해 전 돌솥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다. 그들은 고슬고슬하고 따끈한 돌솥비빔밥을 지으며 한식의 우수성을 말하곤 한다. 우선 맛있고 모양있는 건강식이란다.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온 가족 사랑이 담긴 음식이 아닌가 한다. 서로 다른 개성들이 가족으로 모여 양보하고 신뢰하고 배려하며 마치 각종 나물들이 고추장 소스를 통해 하나가 되듯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가족 같은 비빔밥이니 말이다. 음식만큼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자리는 없을 것이다. 입이 즐거우면 자연히 마음이 열리고 따뜻한 정감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언젠가부터 돌솥비빔밥은 아들 집의 손님상 메뉴로 당당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 가정의 인기 메뉴인 비빔밥이 한식 세계화 메뉴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다만 한식 메뉴의 서비스와 요리사의 청결위생에 대한 의식과 한국인의 정서를 드러내는 인테리어 구상에도 힘쓴다면 ‘한식 세계화’의 전망은 밝다고 본다. 
 
온 지구촌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세계 방방곡곡은 인종을 초월한 여행객들로 넘쳐나고 다른 문화와 종교, 음식과 언어에 대한 관심의 열기가 더해가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머지않아 각 나라의 고유문화를 뛰어넘으며 세계인이 하나로 큰 조화를 이루는 비빔밥 시대가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한마당] 불안한 세상과 선한 권력

● 칼럼 2014. 11. 3. 19:31 Posted by SisaHan
위기일발이란 바로 그런 찰나를 묘사하는 말이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총리와 장관·국회의원 등이 한자리에서 괴한의 총을 맞을 뻔했다. 자칫 나라의 수뇌부가 몰살 당해, 무정부 상태에 빠질 수도 있었던 위험한 장면이었다. 의사당에서 국정을 논의 중인 회의장 바로 문밖에 총을 든 괴한이 난입해 총격전을 벌였다. 그 자리에 있던 인사들이 얼마나 놀랐으면 책상과 의자를 쌓아 문쪽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깃대를 뽑아 여차하면 창처럼 무기삼아 찌르겠다고 작정했겠는가.
정정이 불안한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톱10에 드는 캐나다의 심장부 국회의사당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다행히 범인이 국회 경위에게 사살되어 다들 무사했지만, 캐나다의 국가 운명이 좌우될 뻔한 엄청난 쑈크요 가슴 쓸어내릴 해프닝이었다.
 
라이플총을 든 한명의 괴한이 뛰어든 이 사건은 그러나 단순한 해프닝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사안이어서 충격파가 크다. 단 한 두명의 도발에도 나라가 휘청대고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을 실감나게 보여주었고, 요인경호와 국가기관 방호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내 탄식을 자아냈다. 특히 잔혹성으로 소문난 IS 이슬람국가의 비수가 마침내 이쪽을 겨냥한 것 아니냐는 위기의식을 돋게 했다. 우리는 안전하다고 방심했던 국민들에게 결코 테러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불안감이 번졌다. 한마디로 캐나다의 안전신화에 의문부호를 던지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짚어보면 ‘캐나다는 안전하다’고 믿어온 그간의 생각들이, 사실은 허상을 믿었던 것은 아닐까. 대테러 전쟁의 선봉에 나선 미국이 바로 이웃이고, 미국을 항상 뒤따르며 참전하고 적극 협력하는 나라가 캐나다다. 그런데도 미국은 어디든 접근 자체가 철통보안을 유지하는 나라인데, 그 바로 인접국임에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아니 태평스런 모습이 캐나다가 아니었나. 최강국 미국이 옆에 있어서 안심이라고 마음을 놓은 것일까.
 
정보당국이 이른바 ‘외국인 테러전투원’ 혹은 IS 등 테러단체에 가담한 것으로 보이는 백여 명을 추출해 감시 중이라는 소식도 있었다. 그렇다면 일찍이 국내테러를 예상한 대비태세를 갖췄어야 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총리와 정계 거물들이 피격 위기를 겪고서야 보안강화에 나서는 것은 정보판단과 위기관리 능력에 의문을 던지고도 남는다. 
토론토 도심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발생하는 총격과 피살사건에서 느끼는 시민들의 불안과는 차원이 다르다. 국민들이 무차별 테러를 내 이웃, 혹은 내 문밖과 앞마당에서 당할 수도 있다고 위기감을 갖는 것은, 삶의 질과 정신건강과 행복지수를 무너뜨리는 후진적 불행요인이다. 국가와 국정 지도자들의 준엄한 책무요, 결연한 방비태세가 필요한 이유다.
사실 온 세계가 극과 극으로 대립하고 처참한 보복으로 점철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지구촌 어디든 안전한 곳은 갈수록 찾기가 어렵게 되어간다. 총칼과 무단 권력의 폭압이 아니어도 일상의 모든 것이 감시당하고 추적당하는 엄혹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전화와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SNS, 그리고 거리의 CCTV들…
그렇다고 심심 산골에 쳐박혀 원시인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 어차피 사면초가의 행로요 불안한 삶이라면, 최선의 길은 ‘충직한 보호자’와 ‘착한 감시자’를 만나는 것 말고 달리 방법이 있겠는가.
 
국민 몇몇은 당해도 상관없다며 권력안보에만 급급한 정권책임자들이 아닌, 한 사람 한 시민을 소중히 섬기고 든든히 지키는 신뢰의 권력을 찾아야 한다. 국민들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며 정권안보에 위해요소를 잡아내고 트집 잡기에 혈안인 못된 감시권력이 아닌, 국민의 행복과 평안을 지키는 데만 관심을 둔 선한 권력을 만나는 것 말이다. 
결국은 우리들이 택하고 우리 손으로 창출해 내야하는 과제이긴 하지만…!
 
< 김종천 편집인 >


참여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정의당이 27일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이명박 정부의 자원개발 관련 의혹에 대한 국회 국정조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문제가 드러난 관련 공기업의 경영진에 대한 검찰 고발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 때 이뤄진 국외 자원개발 사업의 총체적 부실과 비리 의혹은 이번 정기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여러 건 불거진 만큼 엄정하고도 전면적인 조사는 마땅히 뒤따라야 한다.
국외 자원개발은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최대 치적 가운데 하나다. 이 전 대통령 스스로 국외 순방 때마다 자원외교의 선봉에 섰고 이상득 전 의원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등 측근 인사를 특사로 내세우는 등 야심차게 사업을 추진했다. 여기에는 광물자원공사, 석유공사, 가스공사 등 에너지 관련 공기업들이 총동원됐다. 양해각서(MOU)를 맺는 정도의 유아적인 성과를 마치 사업이 다 성공한 것처럼 과장되게 홍보하면서 국민들을 기대에 부풀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하다. 에너지 공기업들이 5년 동안 대략 21조원이 넘는 사업비를 투입했지만 이제까지 성과를 내 회수한 돈은 1조원가량에 머물고 있다. 확정 손실만 이미 1조원을 넘어선 대형 ‘부실 덩어리’들만 속속 드러나고 있다. 광물자원공사의 멕시코 볼레오 광산 투자, 석유공사의 캐나다 하베스트사 인수 뒤 매각, 가스공사의 캐나다 셰일가스 개발 사업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원래 자원개발 사업은 회수 기간이 오래 걸리고 실패 위험도 높다. 그런 만큼 더욱 신중하면서도 치밀하게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에서 이뤄진 대부분의 사업은 현장조사와 같은 기본적인 절차조차 생략한 채 졸속으로 추진하다 낭패를 초래했다. 이사회의 심의 등 각 공기업들의 내부검증 및 감시제도는 무시됐다. 정권의 비호와 묵인 아래 사업을 추진한 공기업들은 적자 누적에다 부채 급증으로 추가적인 재정지원 없이는 견디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는 국민에게 엄청난 빚만 남기는 대국민 사기극으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대규모 부실 국책사업의 재발을 막으려면 관련 부처의 당국자는 물론이고 해당 공기업의 경영진에게 법적 책임을 철저히 물어야 한다. 국회의 국정조사와 청문회는 당연하다. 정부와 공기업이 국민 세금을 제대로 썼는지를 사후적으로도 엄중히 따지는 것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국회의 기본적인 임무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에서 증거조작에 가담한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28일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간첩을 잡아야 할 국정원이 간첩을 만들어낸 이 사건은 국정원의 존립 기반을 흔드는 엄중한 사안이다. 정보기관이 숱한 간첩사건을 조작했던 어두운 과거사가 밝혀지고 이를 청산하자고 했던 게 불과 몇해 전인데, 또 이런 일이 벌어진 걸 보면 중앙정보부에서 안기부, 국정원으로 이어지는 정보기관의 음습한 체질은 변할 수 없는 것이냐는 한탄마저 나온다.
 
국정원이 이런 무리수를 둔 것은 조직 보호 차원이었을 수 있다. 국정원은 지난해 불거진 댓글 사건으로 가뜩이나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런 참에 ‘서울시 공무원 간첩’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기소된 유우성씨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어떻게든 2심에서 재판 결과를 뒤집어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증거조작이라는 초법적인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부메랑이 됐다. 더구나 국정원은 진지한 반성 대신 잘못을 또다른 잘못으로 덮으려는 자충수를 뒀다. 증거조작이 드러나 따가운 비판을 받던 지난 3월 ‘직파 간첩’ 홍아무개씨 사건을 발표했지만, 홍씨 역시 지난달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도 ‘끼워맞추기식 수사’의 정황이 농후했다.
이쯤이면 누구도 국정원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른 간첩사건들도 신뢰를 받지 못하는데다, 일각에서는 국정원이 유씨나 홍씨 같은 탈북자들을 간첩사건 건수를 올리는 데 이용하고 있다는 의혹마저 제기되고 있다. 탈북자 간첩사건을 들여다보면 실제로 뚜렷한 증거가 없거나 간첩이라고 보기엔 어수룩한 인물인 경우가 눈에 띄기도 한다.
 
이런 의심에 대해 국정원으로선 억울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 초래한 결과임을 인정해야 한다. 증거조작 사건에서 ‘윗선’들이 처벌받지 않았다고 해서 이를 처장·과장급 간부의 돌출행동 정도로 여기는 국민은 없다. 이날 재판부가 “국정원에 막중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한 국민의 기대와 신뢰를 훼손했다”고 지적한 대목을 뼈아프게 새겨야 할 것이다.
국정원 스스로 진지한 반성을 통해 위법•탈법적인 수사 관행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래서 간첩조작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벌어진다면, 국정원에 대공수사권을 줘선 안 된다는 주장이 더 큰 힘을 얻을 수밖에 없다. 검찰도 이번 증거조작 사건에서는 형사책임을 피해갔지만, 간첩사건을 다룰 때 국정원에 의존하는 습성을 버리고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