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스코카 호숫가에서 자연을 즐기며 한자리에 모인 사모들과 뒷바라지에 나선 목사들.

사모들 모처럼 일상 벗어나 자연즐겨

온타리오 한인목사회(회장 최태영 충신교회 담임목사)의 사모회(회장 그레이스 최)가 마련한 사모 위로 야유회가 10월17일 40여명의 사모와 목사 등이 참가한 가운데 무스코카 발라지역의 단풍관광과 크랜베리 농장 등을 둘러보고 친교를 나누는 모처럼의 즐거운 일일여행으로 진행됐다.
이번 야유회에는 목사회 임원들 외에 교회협의회 이형관 회장(성석성결교회 담임목사)과 하영기 부회장(아름다운장로교회 담임목사) 등 교협 임원들도 함께 했다. 한편 이날 참가한 사모들은 앞으로‘사모합창단’을 결성하기로 하고 단장에 박신숙 사모(소망교회 서인구 목사)를 선출했다.


지난 2007년 이후 처음 마련된 이번 야유회에 참가한 사모들은 다소 궂은 날씨에도 일상을 벗어난 밝은 모습들로 무르익은 단풍과 호숫가 공원 등 자연을 감상하며 스트레스를 삭였다. 사모들은 또 장기자랑 등 여흥을 즐기고 남편 목사들이 정성껏 준비해 서빙하는 점심을 나누며 흥겨운 하루를 보냈다.
사모들은 이날 친교를 통해 확인한 노래솜씨 등을 바탕으로 귀가버스에서 합창단 발족에 뜻을 모아 박신숙 사모를 단장으로 뽑고 앞으로 파트별 연습에 나서기로 했으며 지휘자와 반주자도 물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또 올해와 같은 위로 야유회가 매년 지속되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최태영 목사회장은 “사모님들이 ~이곳은 빈들이요 저들은 시장한지라~ 그러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저녁식사까지 풍성하게 나누고 아쉬움 속에 헤어진 12시간의 뜻깊은 여행이 되어 기쁘다”면서 “이번 위로회에 참가해 즐거워하며 마음을 나눈 사모들과 후원하신 여러 교회 및 목사님들께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문의: 416-624-4612, 647-680-9199 >


[1500자 칼럼] 결혼 주례사

● 칼럼 2016. 10. 25. 19:35 Posted by SisaHan

내년으로 은퇴를 선언한 목사가 지나간 이야기를 어찌 한 두 마디로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오늘 이 칼럼을 통해 나는 한 주례사를 소개한다.
지난 목요일 밤 나는 한 커플의 켤혼식을 주례했으니 그 의미가 남달랐다. 남다르다고 한 것은 그 날의 결혼식은 내가 목사로서 2대에 걸친 결혼식이었다는 점이다. 신랑의 아버지 장로님의 결혼식을 주례했는데 그 아들의 결혼식까지 결혼을 주례했으니 진짜 감개가 무량했다. 한 교회에 오래 있으니 이런 일도 있구나 하는 마음과 함께.
그렇게 생각할 때 나는 오늘의 주례사는 그냥 설교로서 할 것이 아니라 두 내외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하고 그것을 새길 수 있도록 하는 그 무엇이 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으로 주례사를 Word Play 하면서 1 2 3 으로 나누어 기억하기 좋게 받아들이기 쉽게 의미를 담으면서 설명해주었다.
여기 그 문장들을 소개하는데 제목은 ‘하나에서 열까지’ 였다. 영어로는 10 Marriage Commandments로 만들었다.

1. 한 분이신 하나님을 잘 섬기라. The One and only God you will serve and obey.
2. 두 사람이 하나 되어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라. The Two of you will become one family.
3. 세 개의 가정은 모두 하나의 가정임을 기억하라. The Three families, yours, hers, his wil become one.
4. 사랑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함께 극복하는 열쇄가 된다. The Four-most(Foremost) answer to all problem is love.
5. 오해와 갈등은 언제나 그 날로 해결하고 잠자리로 들라. The Five million misunderstandings in relationship should be resolved before you sleep.
6.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을 피하라 The Sixth sense is not a trustworthy guide.
7. 일곱 가지 색깔의 무지개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다양하게 나타남을 기억하라. The Seven colours of the rainbow is just as vibrant and as God’s love for you.
8. 팔 명의 노아의 가족을 살린 방주가 바로 이 가정이 되라. The Eight people were saved from the flood by the ark. Obey God and build your home like He told Noah to build ark, and it will shield you and protect you from the “floods” of this world.
9. 구차하게 변명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고 떳떳하게 살자. The Nine lives are for cats, you have one. Live honestly, fairly and good.
10. 열 가지의 말보다 하나라도 실천하고 살자. The Ten excuse is you have nothing compared to one act of service.

위의 열 가지를 신앙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하든 교훈을 주고 두 사람을 세워주고 싶은 마음이 내게 있었다. 2대에 걸친 귀한 가정인데. 이미 아버지 되는 장로님 내외분은 우리 교회에서 큰 일꾼으로 성도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계시는데 어찌 이 두 신랑 신부에게 축복하지 않으랴?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이나 내가 결혼생활에 있어 팁으로 드린 말씀이나 중심된 이야기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정이 되자는 이야기다. 시편 127편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셔야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셔야 파숫꾼의 경성함이 헛되지 않겠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그렇게 부탁한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가정, 신앙의 가정”.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한마당] 사화가 그리운 사람들

● 칼럼 2016. 10. 25. 19:31 Posted by SisaHan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지 4년째, 조선은 왕권의 기반이 다져진 반면, 당파싸움이 심화되면서 빠른 속도로 쇠락의 길을 향하는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른바 훈구파와 사림파의 치열한 권력공방이 공존이 아닌 사생결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훈구파의 유자광과 이극돈 등은 사림파 김종직과 김일손 등이 요직을 꿰차며 득세하자 큰 위기를 느낀다. 김종직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옛 중국의 초나라 항우가 의제를 죽이고 서초패왕이 된 것을 빗대어 비판하는 내용의 ‘조의제문’을 쓴 기개있는 인물이었다.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일손은 세상을 떠난 스승의 글을 자신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에 옮겨 실었다. 그런데 이 글이 훗날 자파를 몰락시키는 피바람의 단초가 될 줄이야.


사림(士林)들을 아니꼽게 보던 훈구파는 자파 이극돈이 마침 성종실록을 만드는 당상관으로 임명되자 대반격의 꼬투리를 잡아낸다.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이에 동조하며 사초에 올린 김일손의 글들을 발굴해낸 유자광 등 훈구파는, 때마침 사림의 훈계를 귀찮아 하던 연산군에게 이를 고해바치며 역모를 품은 것이라고 덮어 씌운다. 사림파가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리게 되고, 연산은 기다렸다는 듯 이들을 대역죄인으로 몰아 처형한다. 김종직은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목이 잘리는 부관참시를 당했고, 김일손은 능지처참을, 또 수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했다. 그렇게 어이없이 모반죄로 몰린 사림 사단이 초토화되고 말았다. 세조의 왕위찬탈 40여년이 지난 뒤 1498년에 벌어진 무오사화의 스토리이다.
그 뒤에 벌어진 1504년의 갑자사화, 이어 중종 때의 기묘사화(1519), 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1545) 등 조선시대 4대 사화(士禍·史禍) 모두가 하찮은 트집을 잡아 정치적 반대세력을 몰살시킨 비극적 앙갚음의 참화였다.

그로부터 500년이 흐른 현대 한국 땅,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이 시절에 정치권의 수준낮은 대립상을 보며 조선의 사화가 떠오른 것은 과도한 비약일까?
전직 장관이 무슨 의도로 썼는지는 모르나, 회고록에서 까발린 10년 전의 정부 외교시책 결정 내용을 두고 느닷없는 소동에 탄식이 나온다. 북한과 내통했느니, 북의 종이 되었느니 하며 원색적인 색깔론으로 호들갑을 떠는 여당, 그들은 야당은 물론 유력 대선 예비 주자를 깎아내리고 상처를 주기위해, 지금 당장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법석을 떨고 있다.
유엔에서 의사표시를 하는 북한인권에 대한 정부결정을 대통령을 제쳐놓고 청와대 비서실장이 최종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 중에서도 상식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남북관계가 절벽인 것과는 달리 당시는 남북간 지극히 우호적으로 공식왕래가 잦았던 때였기에, 대통령의 기권 결정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기에는 무리임이 명백하다. 그런데도 그때의 비서실장을 애먼 표적으로 삼아 ‘국기문란’이니 ‘주권포기’요 ‘반역행위’라고 바락바락 악을 쓰는 형국은 참으로 가관이고 저질이다.


근래 정권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어거지를 쓰는 말이 곧 ‘국기문란’인데, 이번에도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 나왔다. 하지만 어떤 게 진짜 국기문란일까. 수사를 받는 피의자인 민정수석이 수사감독을 하고 수사보고를 받는 검찰의 수사야 말로 변명할 수 없는 국기문란 아닌가? 대통령 비선실세라는 한 여인이 공무원을 동원해 이상한 재단들을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고, 전경련을 시켜 기업들로부터 수백억원을 긁어모으더니, 자신의 딸 해외 승마훈련에 쏟아붓는 정황, 그리고 명문 여대 입학과 학점비리를 압박해 학사관리를 엉망으로 만들어 학교망신은 물론 학생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는 것들이야 말로 국가와 대학을 사유화한 국기문란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부패 흑막은 극력 덮으면서 엉뚱한 트집으로 극한 정쟁과 국론분열을 꾀하고 있으니, 도저히 국정을 책임진 세력의 수준과 양심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저급하고 비열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유력 대선주자라 할지라도 정말 그렇게 적과 내통하고 반역행위를 했다고 믿는다면,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대공 수사당국이 왜 당장 잡아들여 치도곤을 가하지 않는가? 속이 빤히 보이는 정치공세요, 북풍공작이며 추잡한 색깔론의 재탕이다. 정치적 매장까지를 노리는 현대판 사화 획책의 술수라고나 하면 맞을 수준이다.
그러니 이 답답한 뉴스들 속에 시달리는 국민들은 얼마나 불쌍한가. 나라를 이 꼴로 만드는 지도자를 둔 국민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시대가 수백년 변해도, 내우외환의 격랑이 이는데도 한치 변함없는 파당과 적대의 정치악습에 골병드는 나라가 정말 걱정이다.


< 김종천 편집인 >


회고록은 철저히 집필자의 기억과 관점 그리고 감정으로 작성된 글이다. 회고록만 의존하여 집필한 학술논문은 학술지에 출판을 할 수 없다. 저자의 “회고”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고는 참고 정도로 활용한다.
최근 참여정부 시절 외교부 장관을 지낸 송민순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이 회고한 2007년 노무현 정부의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기권 과정이 정쟁화되고 있다. 여당은 이를 두고 내통, 국기문란, 북한결재라고 원색 비난을 하고 있다. 이 회고록만 진실로 믿고 있는 여당은 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를 그들의 극장안보 무대에 세워 놓고 색깔론을 상영하고 있는 중이다.
정말 여당한테 안보가 중요할까라는 우문이 든다. 이들은 한반도 안보위기가 엄중한 상황에서 김제동씨의 방송 발언을 국회 국방위 감사에서 쟁점화하였다. 이것 때문에 우리의 대북 감시체계가 얼마나 빈약한지, 국방예산이 얼마나 육해공 합동성을 뒷받침하고 있는지, 방산비리가 얼마나 국방력을 갉아먹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대북 군사억지 체계가 원활히 작동하고 있는지에 관한 논의를 부실하게 하였다.

이들은 이제 개인의 회고록을 진실로 둔갑시킨 후 종북몰이와 색깔론을 원색적으로 상영하는 극장안보를 개봉한 것이다. 그런데 이 극장안보에는 진짜 안보가 없다. 한국의 안보가 왜 악화되었는지에 대한 반성도, 이 악화된 안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도, 한반도의 평화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라는 계획도 없다. 오로지 이들에게 “너희들은 종북이야”라는 광기 어린 매도만 있을 뿐이다. 이 극장안보는 늘 “통일은 대박”이라는 원칙적 구호로만 그 막을 내린다. 통일에 이르는 복잡한 여정에 대한 고민은 없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극장안보처럼 쉬운 것이 없다. 적대적 분단구조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여정을 고민하는 정책과 행동은 일탈로 규정하고 빨갱이라고 갖은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사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들에게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 심각히 고민하고 몸소 부딪쳤던 “안보 현장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평화적 비핵화와 남북 화해 그리고 한반도 안정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고 관리해야 하는 남북 줄다리기 현장은 원론적인 이야기를 무색하게 하는 모순된 상황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북한 주민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면서, 한편으로는 그 유일한 창구인 북한 정권을 대화 상대로서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것은 덧셈 뺄셈의 1차원적 마인드로는 풀 수 없는 고차 방정식과 같다. 이것이 바로 외교안보 현장이다.
현실적으로 외교안보가 이루어지는 현장에서는 일도양단식으로 딱 잘라서 일을 진행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목소리만 높이기는 쉽다. 남북관계의 모순은 압박과 함께 북한과 협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편하게 원론에 기대기에는 남북 화해협력의 무게가 막중하다는 것이 바로 외교안보 현장의 논리이며 이는 여전히 유효하다. 천박한 색깔론만 방영하는 극장안보에는 자극적인 언사와 저질스런 몸짓밖에 없다.

그 가짜 극장안보가 흥행될 것 같은가? 지난 9년간 종북몰이만 했던 여당의 극장안보가 얼마나 북한의 비핵화를 실현했고 인권 개선에 공헌하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색깔론만 보여주는 여당의 극장안보 결말이 더 강력한 북핵과 더 불안한 한반도 안보 환경이라면 이 극장을 당연히 폐쇄시켜야 한다. 그 진위가 불분명한 개인의 회고록은 접어두고, 이제 진짜 안보로 경쟁하자.

< 최종건 - 연세대 교수, 정치외교학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