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일’이 인물전을 쓰면서 세상에 있는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 쓰면서도 그 속에 예수님의 이야기는 쓰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깊고 높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그 높은 본체를 보면서“야아!”하고 감격하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믿음이란 별 것 아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어느 땐가는 한 번 예수님의 인격과 사상 앞에서 “야아!”하고 감동하고 감격해 보는 것, 그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이 “야아!”라고 하는 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이성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은 이성의 차원을 넘어설 수밖에 없다. 이 이성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이성의 차원을 넘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믿음의 사람, 그리스도인이라면 일생에 한 번은 이 이성의 차원을 넘어 예수님에 대해서 “야아!”하고 한 번 뒤집어지는 감격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연인을 ‘사랑’하고,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고 산다는 말을 하는데 그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는 감격하고 사는 것을 말한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고 “야아!”할 수 있을 때 백합화가 내 속에 들어오는 것이다. 이 “야아!”하는 한 마디에 그만 내 가슴이 터지는 것이다. 그래서 내 속에 기쁨이 충만해 진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항상 기뻐하라는 기쁨의 생활이고 이 기쁨의 생활이란 감격을 느끼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실존이란 쉽게 말하면 신성(神性)이라고 한다. 신성을 느끼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성을 넘어서는 실존주의를 ‘엑지스탄스(existence)’란 말을 쓰는데 이 ‘엑스(ex)’라는 말은 ‘밖으로’란 말이고, ‘시스탄스(sistence)’라는 말은 ‘밖에 나가선다’는 뜻이다. ‘황홀’이라는 말로도 번역하는데 오묘하다, 아찔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야아!”감탄하는 것은 오묘하고 아찔한 것이다. 우리가 꽃을 보고 “야아!”하는데 사람이 이 꽃을 만들 수 있겠는가? 이 꽃 한 송이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이 꽃 한 송이를 보고 “야아!”라는 감동을 통해 꽃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하나님의 위대한 솜씨에 감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속에는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 있는데 어려운 말로 하면 ‘탈자적 실존(脫自的實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커 철학의 핵심인데 ‘탈자’란 자기 자신이 없어진다는 말이고, ‘실존’이란 십자가를 졌다는 말이다. 바로 탈자적 실존이 되어야 존재(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실존이 되고 자기가 죽어 탈자가 되어야 부활하여 존재의 소리를 듣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말로 하면 40에 불혹(不惑), 50에 지천명(知天命), 60에 이순(耳順) 인데 불혹이 십자가요, 지천명이 부활이요, 이순이 승천이라 말할 수 있다. 스승이란 탈자적인 실존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일생에 한 번은 “야아!”하고 감탄하며 무릎 꿇는 그런 체험이 있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이는 사람의 힘이나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내 영안을 열어 주셔야 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비로소 “유데모니아(eudemonia)”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 한지는 오래 되었건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못했다면, 속히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야아!”하는 감동의 체험으로 믿음, 소망, 사랑, 기쁨이 넘치는 복 있는 삶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 정태환 목사 - 한인은퇴목사회장 >


풍요한 쾌락은 상당히 ‘위험한 것’이며 많은 사람에게 사치와 육정, 주하나님과 떨어져 나가는 이생 (離生) 에로의 ‘치명적’인 유혹이다. 육신에 매달리고, 그 편안한 쾌락을 좇음은 많은 영혼을 파멸케 하며, 영혼의 이익을 해친다. 고기를 먹고 좋은 옷을 입음은 사실 타당한 것이나, 때때로 그것들이 교만과 사치의 재료와 연료가 되어 죄로 이끄는 것도 사실임을 알자! 자기와 친구들을 위해 잔치를 열면서 동시에 가난한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주하나님을 매우 노(怒)하시게 하며 영혼에게 저주가 된다. 부자의 죄는 그의 옷이나 음식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었다(눅16:19~31-부자와 나사로). 즉 불쌍하고 신앙깊은 사람들이 천대받고 소외 당하다가 죽음으로 그 불행을 벗어나 천국에 가서 축복과 기쁨을 누림을 알자!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은 ‘수고’로 그들을 도와야 마땅하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우리가 최선을 다해 임무를 행하겠다는 겸허한 약속과 아울러 주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만 한다. 특히 우리 자신이나 남을 위해서 주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할 때엔 그 은총을 얻기 위하여 열심으로 그 <기도>대로 살아야 한다. 포도원의 과원지기(눅 13:6-9)는 ‘자기의’ 할 일에 충성을 다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역자(목회자)들은 각자 맡은 바 일에 충성 하여야 될 줄로 믿는다. 이처럼 나무에 거름을 주듯 교인들을 싸매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복음>의 약속된 바를 들려 줌으로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인이 <성도>로 바뀌는 열매 맺는 주하나님의 사역이 성취되는 것이다. “만일 실과가 열면” 주인과 과원지기가 얼마나 기뻐할 것인지! 주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인에 대해서 그렇게 무한정으로 참고 계실 분은 아님을 알고 살아가자! 그분의 참는 것도 언젠가 끝이 있을 것이니 그분의 인내를 악용한 자에겐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진노의 형벌을 내리실 것이다.

열매 맺지 못한 나무들은 마침내 ’찍혀’ “불 속에 던지움”을 당할 것이다. 주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날엔 우리들의 가장 친절한 친구들도 마지 못해 정의의 심판의 결과를 인정 할 것이다. <성도>들은 그 심판을 찬양하며 환영하게 될 것이다.(계15:3-4). 주 하나님께서는 많은 경우에 우리에게 <겸손할 것을 요구하신다>(눅14:7-14). 우리는 우리 식탁에서 굶주린 무리처럼 떠들어 대는 위선자들의 무리들의 대화처럼 저속한 대화를 금해야 될 뿐아니라, 그저 평범한 대화의 한계를 넘어서 식탁에서도 주하나님의 <선> 하심을 말하고 평상적인 일들을 통해 ‘영적인’지혜를 얻을 수 있는 그런 복스러운 대화가 이루어 지도록 힘써야 될 줄 믿는다. 그렇게 되면 의로운 자의 입술은 “많은 사람들을 먹이게” 될 것이다. 평범한 일상 생활에서도 우리<주님>은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주님은 신앙적인 집회에서 뿐만 아니라 식탁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행동을 지켜 보시며, 그것을 기억해 두신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또한 주님께서는 많은 경우에 이처럼 적극적인 자들이 종종 <수치스럽게>밀려나 창피를 당하며, 오히려 겸손하게 있던 자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그 겸손으로 ‘존경 받는’ 것을 보셨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그 곳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세상적인 지위 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소양과 그 업적 등으로 우리보다 ‘더 명예로운’ 자들이 얼마나 있는가 늘 눈여겨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좌석을 권하는 자들이 많다고 자만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좌석을 권해야 하는 자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겸손>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본분을 모른 채 더 높은 대우를 받으리라고 생각 했던 것이 부끄러울 것이다. 자만은 ‘창피’를 낳게 되며 마침내 <타락>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자랑과 욕심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받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과 <자기부인>은 진실로 명예로운 것이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 지리라”(눅14:11). 우리는 다른 예를 통해서도 <인간의 자랑은 그를 낮추며 마음으로 겸손한 자에게 명예가 주어지고 , 겸손한 자가 명예를 얻게 된다.> 는 사실을 목격하게 됨을 알자! <사역>은 때때로 세상이 천하게 보고 멸시하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일과 그의 봉사를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주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참 사랑의 표시다.

<목회직(사역)>은 ‘영광스런’직분이다. 사역자(목회자)들은 주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들이요 주하나님의 ‘신비’를 맡은 <청지기>로써 그들의 일 그 자체만 가지고도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내 직분’은 <나의 사역(목회)> 이라는 뜻이다. 나의 지배력, 나의 통솔력이 아니라, 나의 <봉사>인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 김진규 - 밀알교회 장로 >


[1500자 칼럼] 우리의 소원은

● 칼럼 2018. 3. 21. 14:47 Posted by SisaHan

우리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다닐 때는 자주 불렀던 노래였다. 이 노래를 부르노라면 어린 마음에도 왠지 숙연해지며, 마치 우리 손으로 통일을 이루겠다는 듯이 그리고 그 일이 가능한 것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곤 했다. 그리고 특히 이곳 토론토에서는 작곡가인 안병원 선생님께서 사셨던 연유로 모임이 끝나면 ‘고향의 봄’을 같이 부르기도 했지만 선생님께서 직접 나오셔서 지휘하면서 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기를 잊어버렸다. 아마 우리 살아 생전에 통일이 되기는 어렵다고 판단을 했기 때문일까? 통일의 날은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지난 10년 보수정권 아래서 남북간의 소통이 단절된 채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북한은 핵실험을 가속하여 경쟁의 면으로 치달았고 남한 정부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통일이나 북한과의 대화를 논할 게재가 아니었다. 한때는 조금만 말을 잘못하면 종북으로 몰아 부치던 때도 있었다.


오히려 요즘 들어서는 통일이 된다기보다 전쟁이 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핵전쟁이… 만약에 핵전쟁이 나면 승자도 패자도 없이 둘 다 파멸 당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북한이 핵개발에 집중을 하고 미국에 대륙간 탄도탄을 발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미국이 나름대로 선제공격을 할지 모른다는 설이 지난 연말까지 심각하게 제기된 상황이었다. 한국신문 보다 이곳 신문에서 더 심각하게 다루어 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평화의 올림픽으로 기억될 평창올림픽도 끝나고 패럴림픽이 열리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 보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남도 아닌 우리의 야당 정치인들이 평창올림픽을 ‘평양올림픽’으로 부르며 틈만 나면 꼬투리를 잡아 꼭 망하기를 바라는 듯한 발언들을 서슴없이 해댔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동계 올림픽은 흥행하기 힘든 올림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물론 경제적인 손실은 나중에 다시 계산해 보아야 할 일이지만 큰 탈없이 세계의 언론들이 칭찬하는 올림픽으로 끝났고 뒤늦게라도 우리 국민들이 참여하고 즐기는 올림픽으로 끝난 점이 다행이라는 이야기다. 사실 개막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무관심했고 남의 일 보듯 한 것도 사실이다.

신년사로 김정은이 올림픽에 참가한다는 발표를 했을 때, 나의 솔직한 느낌은 그것이 진심일까 하는 의심이었다. 한마디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과의 전쟁이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림픽이 끝나면 연기되었던 한미군사 훈련이 재개되고, 북한은 그걸 빌미 삼아 다시 원점으로, 냉전상태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이 나의 추측이었다. 그러나 사태는 의외로 빨리 돌아가 특사가 파견되고 남북간의 정상회담, 그리고 북미정상회담의 가능성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이런다고 곧 통일이 된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시점에서 북한이 원하는 것은 남북회담 보다는 북미회담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들의 체제 보장을 원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미국의 군사적인 위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도 높은 경제적인 압박에 체제유지의 한계를 느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들은 미국의 압박에 의한 중국의 경제적인 압력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현실이다.


북미정상회담이 꼭 성공리에 이루어져 그 반사이익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남한과의 평화관계를 유지한다면 그 보다 좋은 일이 있을 수가 없다. 어차피 통일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질 수 없으며, 한쪽이 다른 한 쪽을 쉽게 통합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먼저 서로 적대감을 버리고 평화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아직도 통일의 길은 멀지만, 이 번 일을 기회로 잊혀진 통일의 노래를 부르며 통일의 불씨를 살렸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우리의 소원은…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한마당] 안보팔이들의 심통

● 칼럼 2018. 3. 21. 14:45 Posted by SisaHan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가시화되면서 한반도가 역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도 곧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던 험악한 위기가 맴돌다 하루 아침에 평화무드로 급변했으니, 다들 이야기 하듯 ‘격세지감’이란 말이 실감날 뿐이다.
정세분석가들은 한국정부가 끈질기게 대화와 설득노력을 편데다, 문재인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외교전략이 주효했다는 평가도 한다. 또 예측불허의 인물 김정은과 트럼프의 돌출과 파격성, 영웅심리 등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어느 쪽이든 통크게 결단하면서 남북과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의 기운이 감돌게 된 것은 분명하다. 전세계 지도자들과 언론들이 긍정적인 기대를 표하는 것도 평화의 희망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그동안 남북대치를 조장하며 ‘안보장사꾼’이라는 별칭까지 붙은 수구세력들은 당황한 나머지 ‘안보 쇼’라는 둥 헐뜯으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춰 세우려 용을 쓰고 있다. 역시 북핵 위기를 호재로 짭짭한 ‘안보팔이’와 군국주의 망령에 젖어있는 일본의 아베 정부 정도가 탐탁치 않은 표정을 드러냈다. 한국의 수구세력과 아베정권이 ‘위안부 합의’에 이어 남북 화해에도 딴쭉걸기로 서로 죽이 맞으니, 그 본색이 무엇인지 의구심이 커진다.
돌이켜 보면 지난 10년의 철저한 남북간의 단절과 힘겨루기가 남긴 것은 감정대립의 격화와 엄포대결, 위기와 신경전의 에스컬레이트로 인한 피로감 외에 달리 무엇이 있었던가 싶다. 계속 압박하고 조이면 무너져 망하고 흡수통일이 되겠지 하는 참 허망한 기대감 말고는 평가할 만한 소득이 없었다. 오랜 남북대결의 역사에서 반복된 압박과 제재의 악순환이 교훈을 남겼는데도 소위 보수정권은 그런 단선적 논리에 매몰돼 강박일변도의 대북정책을 가속했다. 그 결과는 북핵과 탄도미사일 고도화라는 결말로 드러나며 위기를 키웠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안보 등 여러 측면에서 북한 리스크만 커져가는 아이러니에 국민들만 피곤해졌고 오히려 위기에 무뎌지는 학습 역효과까지 나타났다.


물론 남북간, 또 북미간에 정상회담이 열린다 해서 무조건 평화시대가 도래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간의 깊어진 감정의 골과 불신을 고려한다면 단숨에 우정의 다리를 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의 돌변한 대화공세에 경계심을 표하며 주의를 경고하는 시각도 이해해야 한다. 저들의 벼랑 끝 전술에 번번이 당했던 기억, 시간벌기식 대화전략에 기만당한 사례들이 그런 우려를 부추기고도 남는다. 사실 북한의 외교와 대남전술은 만만치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저들은 항상 체제위기를 안고있는 정통성 없는 세습정권이다. 생존을 배수진 친 독재권력, 거기에‘외교 일꾼’들은 길게는 20년 30년씩을 외길로 매달린 전문‘기술자’들이다. 지난날 남북간 회담장 취재의 경험을 돌아보아도 남측의 대표나 실무자들은 정권교체에 따라, 혹은 근무 기간에 따라 얼굴이 바뀌지만, 북측은 거의 변함없는 같은 인물들이 회담장에 나오곤 했다. 그러니 오가는 언사나 담판에서 항상 녹록치 않은 상대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을 외면하고 ‘철의 장막’에 가둔 채 압박만 하는 것이 최선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역사가 깨우치고 가르쳤다. 지난 10년의 대북강박이 부른 전쟁위기를 우리 모두가 보았다. 설령 저들에게 교활한 속셈이 있다고 해도,‘만나야 별을 보든 뽕을 따든’뭔가 할 수 있는 법이다. 폭탄을 쥔 인질범을 무조건 자폭으로 내몰아서는 안되는 거와 같다. 만나서 들어보고 으르고 달래다 보면 돌파구가 보일 것이다. 단지 정상 간의 만남을 예약한 것 뿐인데도 대결과 대치가 대화와 화해로, 위기가 기회로 바뀌는 것을 보고있지 않는가. 설령 ‘쇼’라고 해도 거기에 평화와 통일의 염원이 담겼다면 적대와 전쟁 공포보다 백 배는 낫다. 단단히 채비하고 지혜롭게만 대처한다면 만남을 꺼리거나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거나 비겁한 일인 것이다.
더구나 남과 북은 한핏줄 한 뿌리의 같은 민족이다. 당연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통일이 되어야 한민족이 제대로 된 역량을 발휘하고 국제사회에서 명실상부한 선진대국으로 자리매김할 수가 있다. 벌써 70년이 넘었다. 통일을 위해 씨름하고 지혜를 짜내야 한다.


그런데 ‘통일은 대박’이라고 큰소리치던 지난 정권의 후예들이 통일의 첫걸음이 될지도 모를 정상대화를 무조건 비틀고 반대하는 속셈은 무언가. 그들은 미국을 신주단지처럼 받들더니 이제는 트럼프가 김정은을 만나겠다고 선언하자 놀란 나머지 미국마저 믿을 수 없다는 식이다. ‘뼛속까지’물들었다는 사대주의를 청산하겠다는 바람직한 신호라고 봐야 할지, 아니면 그저 놀부 심통인지, 나라와 민족의 장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전혀 없이 몽니를 일삼는 저들의 말로를 지켜 볼 일이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