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참회를 모르는 장로님

● 칼럼 2018. 3. 27. 18:44 Posted by SisaHan

AD 54년부터 69년까지 재위한 네로는 로마의 악독한 황제로 꼽힌다. 자기 어머니와 아내를 죽이고 스승인 세네카를 자살로 내몰았다. 로마를 불바다로 만들고는 이를 빌미로 기독교인들을 학살하고 짐승 다루듯 탄압한 악명 높은 군주였다. 방탕과 폭정을 거듭하다 비참하게 생을 마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그런 희대의 폭군도 업적이 있었다. 행정조직을 정비하고 직접세와 관세를 철폐해 자유무역의 토대를 놓았다. 노천극장을 만드는 등으로 문화를 꽃피우며 상당기간 나라가 태평해 이른바 ‘네로니아(Neronia)’ 시대였다는 평가도 한다. 심지어 마시모 피니라는 한 작가는 네로가 희대의 악한 괴물이 아니라 아주 진취적이고 업적이 많은 군주였다는 책까지 냈으니, 역사해석의 아이러니다.


조선시대 최악의 폭군으로 남은 연산군도 재위 12년간 끊임없이 악행만을 일삼은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좋은 시절은 있었다.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국정을 제법 살폈고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을 방비하는데 힘을 기울인 국방강화책은 잘한 일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는 또 포악한 성격자로 여겨지지만 시집을 낼 정도로 문예에 능하고 감성적인 면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잔혹한 폭군으로 역사에 남은 로마의 네로 황제나 조선시대의 연산군도 기록을 뒤져보면 몇몇 업적을 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써 크든 작든 책임감을 가졌다는 뜻이고, 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기 나라와 백성의 안위에 대한 최소한의 책무와 의무감은 지도자라면 너무 상식적인 소양이라고 우리는 이해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은 지도자가 그런 업적이나 소양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면 무슨 변고가 난 것일까. 정권이 아닌 ‘이권’을 잡은 거였다고 할 정도라면, 전제 왕권시대의 군주도 아니요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도대체 이해할 수 있는 일인가.


촛불혁명으로 탄핵당한 끝에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대통령에 뒤이어 철창 신세가 확실해진 그의 선배 대통령 이야기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요사이 세계적인 토픽과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오히려 한 술 더뜨고 있어서 한국인들을 저마다 낯 뜨겁다며 가슴마다 분을 삭이는 중이다. 그가 재임 중 한 일이라고는 마치 금전에만 눈독을 들인 듯, 국민을 속이고 나라를 자기 식구들의 ‘족벌기업’처럼 운영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어서다.
이미 3년 전 ‘MB의 비용’이란 책을 낸 16명의 학자들은 그가 재임 중에 탕진한 국민세금이 “최소한 189조원”이라고 주장했다. 허공에 날린 자원외교에서 42조원, 국토를 짓뭉갠 4대강 사업에 84조원, 대기업 법인세를 낮춰준 ‘부자감세’ 선심으로 63조원에, 원전비리 등을 합치면 천문학적인 국고를 날렸다는 것이다. 요즘 매관매직과 세금횡령, 정경유착, 권력남용 등 20개를 오르내리는 그의 혐의들을 보면 그저 날린 것이 아니라 소문처럼 해외 곳곳에 숨겨 챙기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나올 만 하다.


돈 문제 말고 혹시 미미한 업적이라도 없을까 되짚어 보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다. 국가기관의 댓글공작과 방송장악, 블랙리스트 등 비판 탄압에서 남북관계 파탄까지, 국민을 이간질 하고 ‘나라를 절단 낸’ 일들 외에 잘한 일은 도무지 찾기가 힘들다. 특히 그가 ‘장로님’인 탓에 기독교에 끼친 해악 또한 막대하다. 불교 인사들을 380명이나 캠프에 끌어들여 불법 선거운동을 시켰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교회들은 하는 데 불교단체는 뭐하느냐”며 당선 축하금을 가져오라고 했다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직분자의 양심은 어디로 내팽개친 것일까. 기독교는 회개와 용서와 사랑의 종교다. 그가 잘못을 회개하고 깊이 사죄의 모습을 보였다면 일말의 동정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그에겐 반성하고 되돌릴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 광우병 파동으로 광화문에 백만 항의인파가 몰렸을 때, 청와대 뒷산에서 다짐했다는 회심을 그는 곧 언론탄압과 정치보복으로 되치기 했다. 임기 말에 순리를 따랐으면 될 일을 무리한 선거공작으로 정권창출에 매달렸다. 그리고 본색이 드러난 지금도, 그는 참회가 아닌 떠넘기기와 회피의 비겁한 모습만을 보인다.
어쩌면 ‘맘몬의 우상’을 좇고도 회개와 사죄를 모르는 그에게서 기독교는 항존직(恒存職)이라는 장로직을 면탈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아마도 감옥이 그런 그에게 내리는 하늘의 징벌인지도 모르지만…. 위선과 탐심으로 점철된 MB의 말로를 보며 한국민 모두가 다시금 지도자의 덕목과 철학, 소양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우치는 자책의 시절이다.


< 김종천 편집인 >


미국에 학회 강연차 와 있는데 마음은 온통 서울에 가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전해오는 ‘미투 운동’ 소식 때문이지요. 정치판이 아무리 이상한 동네라고 해도 사람에 대한 검증이 이렇게 되지 않는 동네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예술계가 아무리 독특한 인간들이 모인 곳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폭력이 난무하는 동네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87항쟁 이후 여자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도 못 본 척, 오히려 멋진 옷을 입었다고 칭찬을 해온 그들/우리는 무슨 귀신에 씌어 있었을까요?
신자유주의 광풍이 심하게 불어닥친 지난 십여년, 적나라한 사냥꾼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의 세상이 펼쳐지면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를 익혔던 유가 전통의 나라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수신’과는 거리가 먼 사냥꾼들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배제와 억압이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차별이라는 이야기를 구태여 꺼낼 필요는 없겠지요. 호모 사피엔스가 ‘소통과 상생의 사회’를 만들어 지금껏 살아온 것은 인간의 아기는 독립적 생존이 불가능한 무력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력한 생명을 돌보면서 산모와 산모의 친밀한 가족들, 그녀의 어머니와 할머니, 여형제와 남형제와 산모의 남자친구 - 아기 아버지일 가능성이 높은 - 는 함께 돌봄과 소통의 식탁 공동체를 만들어 세대를 이어가며 살아왔습니다. 돌봄 공동체가 많아지면서 그들을 연결하는 공공영역이 생겨났고 그 영역의 어른들은 아이를 기르는 일상에서 조금 자유로운, 그러나 돌봄 공동체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지혜로운 남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조상과 신에게 감사의 제사를 지내고 풍요를 기원하며 장례와 혼례식을 주관하였지요. 영겁으로 이어질 자손들의 세상을 축복하면서 예술적으로,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스스로를 승화시키는 수양과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공공영역이 돌봄 공동체와 분리되면서 인류의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성장과 진보의 이름으로 끝없는 이윤추구의 장으로 전락한 공공영역은 사기꾼과 거간꾼이 득세하는 영역이 되어버렸습니다. 인류가 지구상에 살아남은 것은 자신이 처한 환경의 불확실성을 줄이면서 지혜롭게 적응해왔기 때문인데 이 사냥꾼들은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인류사상 참으로 기이한 시스템이 생겨나 버린 것이지요. 더욱이 돈이 국경을 넘어 권력이 된 ‘금융 자본주의’는 그간의 영토화된 영역을 탈영토화하면서 영토 안의 국민들을 난민으로 만들어버리고 있습니다.


미디어 연구자 프랑코 베라르디는 괴물이 된 권력 마니아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는 범죄, 자살, 광기로 치닫고 있다면서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으로부터의 자율을 추구하는 일은 그칠 수 없다면서 “미래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항해야 하고 사회적 연대, 인간적 공감, 무상의 활동, 자유, 평등, 우애 등에 관한 의식과 감수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근대의 미래’ 다음에 올 텅 빈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저항이 나/우리 스스로가 평화로워지는 유일한 길이기에 “자기애의 이름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투 운동은 이런 시대적 맥락에서 일고 있는 인류사적 운동이고 아주 긴 여정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정의는 공공선을 위한 지속적 돌봄이다”라는 돌봄 민주주의 운동이며, <세상의 모든 딸들> - 석기시대 인류의 돌봄 공동체를 그린 엘리자베스 토머스의 소설 제목입니다 - 과 아들들과 함께 벌여온 돌봄 공동체 운동일 것입니다.


영화인들이 임순례 감독과 심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을 만들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습니다. ‘든든’을 통해 앞으로는 범죄와 광기를 부추기는 배설의 영화를 안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저마다 가슴속에 원망과 원한을 안고 고독한 삶을 마감하는 시대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삼삼오오 모여서 자기 동네에 폭력을 당하는 이가 없는지 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세상을 위해 서로를 돌보며 즐겁게 싸워가야 합니다.

< 조한혜정 - 문화인류학자, 연세대 명예교수 >


제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범국민위)가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는 릴레이 캠페인을 지난달부터 펼치고 있다. 올해 제주4·3 70주년을 계기로 삼은 이 캠페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란 말이 언뜻 국가주의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4·3 피해자 다수가 국가폭력에 희생된 것을 고려하면,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강조하는 게 이치에 맞느냐는 의문이 들었다.


또 제주도가 분리 독립한 ‘탐라국’도 아니고 엄연히 대한민국 땅이다. 따라서 제주4·3은 당연히 대한민국 역사의 일부다. 범국민위는 이 당연한 이야기를 왜 강조하는 것일까?
범국민위는 4·3이 대한민국의 역사로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한 현실을 드러내는 역설적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4·3은 ‘제주만의 역사’로 갇혀 있다. 상당수 국민들은 4·3에 대해 모르거나 관심이 없다.
지난해 11월 제주4·3평화재단이 국민 1천명을 조사했더니, 응답자의 3분의 1은 4·3이 무슨 일인지조차 몰랐다. ‘4·3을 알고 있다’고 응답한 68.1%를 대상으로 4·3 발생 시기(1948년)를 물었더니, 한국전쟁(1950~1953년) 후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49%였다. 28.3%만이 한국전쟁 전이라고 정확하게 답했다. 또 국민(제주 제외) 인식조사에서, 4·3에 대해 ‘관심 없다’(50.2%)는 답변이 절반을 넘었다.


70년 동안 4·3은 침묵, 금기, 왜곡에 포위됐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울음마저 죄가 됐다. 1954년 1월23일 ‘아이고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날 4·3 때 600명 이상이 희생된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마을 사람들이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 군대에서 숨진 이 마을 청년의 장례절차를 밟고 있었다. 한 주민이 “오늘은 6년 전 마을이 불탄 날이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6주년 기념일이니 당시 희생된 영혼을 위해 묵념하자”고 제안했다. 설움에 복받친 주민들이 “아이고아이고”라고 대성통곡을 했다. 이 일로 경찰에 불려간 주민들은 ‘다시는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80년대 군사독재 시절까지 4·3에는 ‘빨갱이 폭동’이란 딱지가 붙었다.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지난달 범국민위가 연 4·3 70주년 기념행사 보고대회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는 기득권, 서울의 역사로, 민중의 역사가 없었고 3만명 대학살이 벌어진 제주4·3의 역사는 부정되고 외면당해왔다”고 말했다. 현 선생은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는 캠페인 구호에 대해 “이제 제주4·3도, 민중의 역사도 인정해달라는 것”이라며 “제주4·3이 제주만의 역사가 아니기에 분단과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고 기억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런 설명을 들으니 제주 여행 때 들렀던 4·3 유적지에 어김없이 걸려 있던 태극기가 기억났다. 서귀포시 성산읍 터진목 학살터, 서귀포시 대정읍 섯알오름 4·3 유적지 등의 국기게양대에는 깃봉에서 내려진 태극기 조기가 있었다. 당시에는 ‘유족들이 돈을 모아 세운 희생자 추모시설에 태극기는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다시 생각해보니 이 태극기들이 70년간의 왜곡·편견, 무지·무관심에 맞서 ‘제주4·3이 대한민국의 역사’임을 알리고 명예회복을 외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아닐까 싶다.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4·3의 전국화, 세계화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권혁철 - 한겨레신문, 사회2 에디터 >


3월 월례모임에 참석한 은퇴목사 회원들.

한인 은퇴목사회(회장 정태환 목사) 3월 정기모임이 지난 15일 오전 11시 중앙장로교회(담임 유충식 목사)에서 열려 예배를 드리고 오찬을 나누며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50여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김제화 목사 사회로 드린 예배는 김미자 목사의 기도에 이어 유충식 목사가 사도행전 7장 54~60절을 본문으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참석한 은퇴목사들은 이어 예배시간에 나라와 교회를 위해, 그리고 회원 목사들의 건강을 위해 통성 기도했다. 예배는 정태환 회장의 광고를 들은 뒤 박준하 목사의 축도로 마치고 중앙교회가 마련한 오찬을 함께하며 회원들이 친교를 나누었다.


한편 은퇴목사회는 4월 정례모임을 19일(목) 오전 11시 염광교회(담임 이요환 목사: 2850 John St., Markham, L3R 2W4)에서 가질 예정이다.


< 문의: 905-380-7966, 416-909-00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