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마음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내 몫으로 알고 나를 돌아보며 속죄하자

한 인간이 남에게 상처를 입게 되면 가면을 하나 덮어 쓰게 된다. 이는 상처 입은 나의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한 보습을 감춘다. 상처가 깊을 수록 가면은 많아진다. 인간의 사회생활이란 바로 가면무도회이다. 거기서 만나는 이웃은 선한 이웃이 될 수 없다. 무엇인가에 의해 내면의 진실은 베일에 가려있다. 이처럼 많은 인간이 가면을 쓰고 자유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런 가면이 벗겨지는 때가 있다. 세월호 선장처럼 위기를 만나면 ‘원래의 나’로 돌아간다. 알고보면 선장 역시 상처입은 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그에게 면죄부를 주려 함이 아니라, 상처는 중독성이 강해 스스로 벗지 못함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을 만나면 우리가 쓴 가면을 스스로 벗게 된다. 그 사람이 안전하지 않으면 마음을 열지 않는다. 인간 세상에 그런 곳이 있을까? 바로 어머니의 품이다. 그곳엔 예수님의 마음인 ‘긍휼’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들어 하는 사람은 자기를 받아주는 따뜻한 사람을 찾는다. 주님은 친구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주님께 데려왔을 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다. 그토록 고민하며 해결할 수 없던 문제가 주님 안에서 풀리자 그는 침상을 들고 걸어 갔다. 인간이 쓴 위선과 죄악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이다. 이는 직업적인 종교인인 제사장이나 레위인 속에는 없었다. 참된 이웃인 선한 사마리아인 속에 있었다. 결국 긍휼이 없는 자는 자신도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 되지만, 긍휼히 여기는 자는 심판을 이기고 공동체를 구하게 된다.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 아이들이 세월호 침몰사고로 죽었다. 세상은 배에 남아 아이들을 구조하지 않고 달아난 선장을 정죄하고, 늦장 대처한 해경을 비난하며, 관련된 관원에게 책임을 묻는다. 나는 곰곰히 생각에 잠긴다. 내가 세월호 선장이었다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내가 중1학년 때로 기억한다. 여름방학에 동생들과 함께 시골 할머니댁을 찾았다. 더위에 사촌들과 함께 호수에 물놀이를 나갔다. 여동생이 물장구를 치다가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나는 팔을 다친 상태였고 수영을 배운 적도 없지만 본능적으로 그냥 물에 뛰어 들었다. 내가 동생보다 키가 크므로 동생을 쉽게 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여동생이 나를 잡고 늘어지자 우리 둘은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그때 나는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이러다간 모두 죽겠구나! 둘 중에 하나만 살 수 있다면, 하나님께 동생을 살려달라고 기도하며 내가 힘을 빼게 되었다. 이런 판단은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나의 의지는 내가 먼저 살려고 했다. 당시 나는 ‘살신성인’을 생각할 만큼 성인이 못 되었고, 너그러운 인격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성령님께서 긍휼의 마음을 내게 주신 것을 확신한다. 그러자 동생은 나를 밟고 물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1시간이나 지난 후에 내가. 깨어나 보니 둘 다 물밖에 구조되어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청년이 여동생을 먼저 건졌고, 20분이 지난 후에 하수구로 나가는 통로에 박혀 있는나를 건져 인공호홉을 시켰더니 서서히 깨어났던 것이다. 우리의 인생 여정은 살다가 위기를 맞은 세월호 승객과 같다. 그때마다 참 좋은 선장을 만나 건짐을 받았기에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 주님은 선한 선장이시다. 성령님이 내게 그런 마음을 주지 않았더라면 내와 내 가족은 함께 무너졌을 것이다.
 
서로를 불신하고 정죄하는사회는 정의와 사랑이 넘치는 ‘치유 공동체’를 만들 수 없다. 사랑은 나처럼 되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먼저 상대방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내가 지는 것이다. 요즘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검사요 판사이다. 죄인은 없어 보인다. 먼저 나를 돌아보며 속죄하자. 선한 사마리아인 처럼 그것을 자신의 몫으로 알고 은혜와 긍휼을 베푸는 자리로 나아가자. 당신은 언제 상처를 가장 많이 받는가? 누군가가 자신도 다 지키지 못하는 율법의 짐을 내게 떠넘기며 의롭게 살라고 강요당할 때이다. 그들 자신은 십자가로 말미암는 고난을 면하고, 오히려 남의 희생으로 유익을 얻고자 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상처를 받게 된 것은 외적인 요인도 강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나의 내면에 특정한 자극을 상처로 받아들이는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처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나만의 기계장치 시스템을 가졌다. ‘베데스다 못가’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 주님은 그의 병이 오래된 사람인 줄 아셨다. 그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다. 이는 당연한 질문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오랜 된 병자 중에 상처를 즐기며 병 낫기를 바라지 않는 환자도 있다. 특히 장기 환자인 경우는 상처가 치유되기 보다 상처를 되씹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치유와 회복의 기회가 찾아와도 그것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많은 인간이 치료하기 위해 주신 십자가를 잡기보다 그냥 과거의 삶에 주저앉아 있다. 잘못된 신앙인은 죄책감만 씻고 자신은 십자가를 지려 하지 않는다. 죄의 쓴 뿌리는 너무나 깊어 내가 죽을 때만 죄도 죽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주님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었다. 나는 세월호 선장이 되어 승객이 물에 빠져 죽는 데 일몫을 했다. 나는 죽지 않고 교회만 잘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우리 민족이 치유공동체가 되려면 판단을 중지하고 상처를 품어야한다.우리 모두는 서로 한 몸으로 연결 된 지체이다.

< 박태겸 목사 - 캐나다 동신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