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공감능력과 좋은 지도자

● 칼럼 2014. 9. 29. 14:26 Posted by SisaHan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지 겨우 한 달 지났는데 마치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진다. 
교황이 머무는 동안 사람들 마음은 잠시나마 먹구름이 걷힌 맑은 하늘이었다. 교황의 말 한마디, 눈짓과 손짓 하나에까지 온 나라의 눈과 귀가 쏠렸던 걸 보면 한국에 머무는 동안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실상 우리 국민의 최고지도자였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은 대통령한테나 바랄 법한 관심과 배려를 교황에게 요구했고, 교황은 그 요구에 하나하나 응답했다. 
그랬던 교황이 서울을 떠나자마자 나라가 방한 전으로 되돌아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대통령은 고통 속에 뼈가 삭아가는 세월호 유가족의 진실규명 요구를 매몰차게 차버렸다. 교황 방한은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나라의 분위기와 사람들 삶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해주었다.
 
지난해 한국을 다녀간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방한 대담에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발언을 했다. 전제적인 지배자는 당연히 거부해야 하지만, 지도자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되며, 누가 지도자가 되느냐 하는 것은 여전히 정치의 핵심을 이루는 문제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바디우는 또 지도자와 대중이 ‘정신분석학적 전이 관계’에 있음을, 다시 말해 모범과 모방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했다. 사람들은 좋은 지도자에게 찬사를 보낸다. 찬사는 모방 욕구로 이어진다. 지도자는 삶의 모델이 되고, 사람들은 지도자에게서 삶의 자세를 배운다. 그것이 ‘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야말로 좋은 지도자의 사례라 할 만하다. 
교황은 어디를 가든 자기를 낮추는 태도로 일관했다.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아들을 일일이 껴안고 볼을 비비고 입을 맞췄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말은 겸허해서 더 큰 감동을 주었다. 경청과 섬김의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우리는 교황 방한 중에 그런 리더십이 중생의 고통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았다.
 
지도자와 대중의 ‘전이 관계’가 좋은 결과만 낳는 것은 아니다. 반대 경우도 있다. 얼음덩어리 같은 지도자가 들어서게 되면 그 지도자의 지배력 아래 있는 사람들도 가슴속에 얼음을 품는다. 세상은 비정하고 무감각한 곳이 된다.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인간 본성’을 다룬 저작에서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을 느낄 줄 아는 공감능력이야말로 도덕성의 바탕이라고 선언했다. 흄은 우리의 공감능력을 현악기의 떨림에 비유했다. “현 하나의 떨림이 나머지 현들에 전달되듯이 감정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옮아가며 결국 모든 사람에게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현과 현이 함께 떨려 소리를 내는 것, 이것이 공감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호응할 줄 아는 공감능력이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든다.
 
그런데 지도자가 처음부터 공감능력이 없거나 스스로 공감능력을 말살했다면, 그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도 공감능력을 억누르고 차단한다. 현이 끊어지면 동정심도 끊어진다. 그런 환경에서는 멀쩡하던 사람도 감정 없는 사람이 되고 소시오패스도 차가운 본능을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나치 지도자와 추종자 사이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흄의 벗이었던 장자크 루소는 <에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약함이다. 우리의 마음에 인간애를 심어주는 것은 우리들 공통의 비참함이다.” 
약함도 비참도 모르는 지도자 밑에서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람, 타인의 고통을 비웃고 즐기는 사람들이 번성한다. ‘일베’의 폭식투쟁 같은 반인륜 행위는 난데없이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런 야만을 목격할 때마다 좋은 지도자에 대한 그리움이 커진다. 
< 한겨레신문 고명섭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