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오만과 나라망신

● 칼럼 2014. 9. 29. 15:30 Posted by SisaHan
모든 게 분명해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본심이 무엇인지, 그리고 박 정권의 속성이 어떤 것인지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국민 각자의 몫이겠지만 적어도 박 대통령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접을 때가 된 것 같다.
세월호 특별법에 대해 박 대통령은 엊그제 국무회의와 새누리당 수뇌부들과의 청와대 회동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여야가 마련한 ‘2차 합의안’이 최종안이라고. 유족과 시민들이 기약없는 단식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해도 박 대통령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대책회의가 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후안무치하고 적반하장”이라고 질타했는데, 박 대통령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본색을 드러낸 새누리당도 마찬가지다.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에서 사실상 압승한 여당은 이제 제 갈 길로 가고 있다. 친여 언론의 우호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반쪽 국회를 열어 법안 통과를 밀어붙일 태세다. 야당까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그들이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도 솔직하게 드러냈다. 대기업과 부자들의 주머니는 그대로 놔둔 채(때로는 두둑이 채워주면서) 담뱃값이나 주민세 등을 올려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어내겠다고 노골적으로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의 이런 행태가 새삼스럽거나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지지 기반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선거에서 서민 표를 얻으려고 마음에도 없는 경제민주화, 복지 운운했지만 이제 그런 ‘양의 탈’도 다 벗어던지고 본모습으로 돌아갔다.
대통령과 여당이 이런 마당이니 권력기관이라고 다를까. 이미 청와대 ‘하수인’이 돼 버린 검찰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법원도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정치 개입’은 맞지만 ‘선거 개입’은 아니라는 기상천외의 판결을 내놓았다. 그 뒤 벌어지는 양상은 더 가관이다. 국정원장은 유죄 받은 정치 개입 부분에 대해서도 다투겠다며 기세등등하게 항소했는데 검찰은 청와대 심기를 살피는지 항소 여부를 장고했다.
 
이것이 박 정권의 실체다. 그리고 박 정권의 이런 폭주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40%대 고착 지지율에다 친여 언론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고, 야당까지 지리멸렬한 마당에 거치적거릴 게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선거가 2년 가까이 남았으니 국민 눈치 볼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박 대통령이 바라는 대로 민생경제가 살아나고, ‘100% 국민행복 시대’가 열릴까. 대통령에 대한 ‘조롱과 모독’이 사라지고,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이 올라갈까.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박 대통령은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민으로부터 국정운영 권한을 위임받은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지 전제왕조의 여왕이 아니다. 박 대통령으로서야 자기 뜻대로 나라를 끌고 가는 게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오만이고 오산이다. 지금처럼 간다면 그 끝은 파국이다.
 
힘없고 돈없는 사회적 약자와 세월호 유족 같은 가슴 아픈 국민들을 억압하고 배제하면 그 자신이 불행한 대통령이 된다. 저주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 현대정치사에서 그런 경우를 한두번 봐 왔는가.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말로가 어찌됐는지를 되돌아보는 걸로 충분하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지금 그런 파국을 재촉하고 있다. 그럴수록 국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지고, 그 와중에 민생도, 복지도, 국민 안전도 다 실종된다. 박 대통령이 진정 바라는 것도 이건 아닐 것이다.
 박 대통령이 방문한 캐나다와 미국의 동포들은 <뉴욕 타임스>에 세월호 관련 광고를 싣고, 박 대통령의 일정을 따라다니며 규탄 시위에 나섰다. 나라 망신 운운하는 지적이 나올 게 뻔해 미리 분명히 해 둔다. 나라 망신 시키는 장본인은 동포들이 아니라 박 대통령 자신이다. 왜 나라 밖에서까지 이런 대접을 받는지 곰곰 생각해보기 바란다.
< 정석구 - 한겨레신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