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해체된 사회, 새 살이 돋으려면

● 칼럼 2015. 12. 25. 11:02 Posted by SisaHan

“죽는다는 것이 생각하는 것처럼 비합리적인 일은 아닙니다.” 하루에 38명이 자살하는 세계 최대의 자살 공화국 한국에서 서울대생이 자살했다고 특별히 주목할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가 유서에 남긴 이 한마디를 며칠째 자꾸 되씹는다. 개인적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이론을 지지하는 나는 다른 청년들에 비해서는 장래가 덜 비관적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의 자살 사건과 며칠 전 고시원에서 외로움 속에 죽음을 맞았을 한 청년의 사망 사건을 참으로 무겁게 받아들인다.


며칠 전 2학기 마지막 강의 시간에 나는 오늘의 청년 문제에 대해 조별로 토론을 하게 했다. 그들 대다수는 오늘의 청년 문제를 세대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삶이 덧없다…, 무한한 고통의 연속, 더 살아봤자 희망이 있을까, 허무하다, 일상을 움직이는 힘이 없다…, 원래는 세상이 빨리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는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학생들은 이 사회가 더 좋아지리라 기대하지 않는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요즘 유행하는 ‘수저론’이 앞의 자살 학생의 유서에서도 나왔지만, 태어날 때 물고 나온 수저가 운명을 좌우한다면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고 이 세상은 ‘비합리’의 극치인 지옥인 셈이다. 나는 “왜 청년들은 분노하지 않느냐”고 기성세대 특유의 질문도 던졌는데, 그들은 “분노감은 있지만 분노할 방법을 모른다”고 응답했다. 세습자본주의의 작은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고립된 개인들의 군상을 보는 것 같았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독일 히틀러 체제의 등장은 사회의 원자화, 사회 해체의 결과라고 강조한다. 즉 전체주의 세력은 대중의 불안에 편승하여 사회적 유대를 먼저 파괴한 다음 손쉬운 방법으로 권력을 쥘 수 있었다. 국민 그 누구도 권력을 신뢰하지 않지만 아무도 권력의 일탈과 억지, 거짓과 폭력에 항의하거나 분노를 표시하지 않는 이유는 모두가 서로에 대한 감시자가 되고, 불안과 위기의식을 가진 모든 사람이 서로를 경쟁 상대로 느끼면서 적나라한 사적 욕망 외에는 드러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때는 탐욕과 범법으로 살아온 장관 후보들이 정부를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에 역겨워한 사람들이 샌델의 ‘정의론’에 비상한 관심도 가진 적이 있지만, 박근혜 정권에 들어서 이제는 정의를 말하는 것조차 쓸데없는 일처럼 느끼는 것 같다. 아무리 황당한 일이라도 계속 반복되면, 그것이 통상적인 일이 되어 버리고, 심각한 거짓말도 대형 확성기의 우격다짐의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유포되면,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도 사람들은 반박할 의욕을 상실해 버린다. 며칠 전의 세월호 청문회처럼 모든 언론이 완벽하게 외면하여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중요하고 심각한 일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면, 이제는 고발하고 폭로하는 사람이 바보가 된다.


권력의 총체적 무책임, 즉 모든 것은 개인 책임인 세상이다, 뻔뻔함, 우격다짐, 욕망 부추기기, 그리고 겁박으로 체제가 유지된다. 지치고 힘든 대중들이 분노를 표현할 능력마저 상실하게 되면, 국가의 겉은 화려하고 멀쩡해도 속은 다 썩어서 텅 비어 있다. 오직 한 사람만 말한다. 관료, 기자들은 받아쓰기만 하고 그 어떤 의견도 제출하지 않는다. 아마 더 심각한 위기가 와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모두는 시키는 대로만 했기 때문이다.


선거가 다가온다. 출마자들은 거리를 쏘다니면서 표를 달라고 악수를 청한다. 무슨 염치로 정치를 한다고 그러느냐고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은 심정은 나만의 것일까? 해체된 사회를 그냥 두고 정치가 바로 설 수 있나? 고립 파편화된 ‘을’들을 모아서 소리치게 해야 희망이 보일 것이다. 사람들 간의 관계가 살아나고 논쟁이 시작되어야 정치가 바로 설 수 있고, 그래야 이 껍데기 아래에서 새살이 돋아날 것이다.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