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다른 생각

● 칼럼 2015. 1. 16. 19:38 Posted by SisaHan

오래 전 이야기지만 여기 처음 이민 와서 학교를 다닐 때, 한국학생들과 캠핑을 간 적이 있었다. 그 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 하나가 있다. 토론을 하는 순서였는데, 토론이라고 하면 나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찬반으로 두팀으로 갈라져 논쟁을 벌이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작하기 전에 한 주제에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을 물었고 앞에 나가서 몇 사람이 대표로 토론을 하고, 나중에 다시 찬반을 묻는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찬성과 반대가 바뀌느냐로 토론의 결과를 묻는 것이었다. 그러니 앞에 나와 토론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지자가 몇 명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토론 과정을 걸쳐 몇명의 반대자를, 다시 말해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설득하느냐가 문제였다. 그 이전의 내가 알고 있는 한국에서의 토론은 나중에 찬성과 반대를 손들게 하여, 다수결인 쪽이 토론에 이기는 것이었다. 누가 토론 과정을 거쳐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지지하는 생각, 그것은 무조건 옳은 것이었다. 그리고 소수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그 다수결에 따라야만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대다수의 의견에 반대를 표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무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눈치 보다가 남 따라 손들기도 했다. 무슨 대단한 정책을 결정하거나 그런 일이 아닌, 어쩌면 형식적인 학교내의 토론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트이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왠지 불편한 일이었다.

이런 토론 방법의 실질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사실 이런 토론은 하나마나 한 것 이었다. 한국의 전통 문화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남의 말을 듣고 바꾸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받은 교육자체가 그랬다. 한번 품은 뜻이나 가진 생각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미덕이라고 은연중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얼마나 남의 의견을 마음 문을 열고 들을 준비가 되어있고, 또 다른 의견이 옳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러기 보다는 자기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고, 자기 편한대로 해석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는 말꼬리 하나라도 붙들고 물어 뜯으려 하지 않는가? 자기 생각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런 상황이라면 토론은 단지 말싸움뿐 일 것이다. 만약에 토론이 끝난 뒤에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으면 이를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 또한 한국사회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과장된 말이지만 같은 편을 버리고 반대편에 서는 게 되어, 배를 갈아타는 것으로 간주되어 일종의 배신행위가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고 한다 해도 따돌림 받기 십상이다. 대부분의 토론 자체가 하나를 선택하게, 사실은 대다수의 의견을 따르게 만들었다.

내가 지난 해 오래 전의 토론을 종종 생각했던 이유는 인터넷을 통해 만난 한국사회 때문이었다. 같은 한국 내에서도 무슨 사건이 터질 때마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 심하게 드러났다. 누구나 말 할 수 있고 때로는 가명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인터넷 특성 때문에 싸움은 더 치열했고 비난의 도가 지나치는 경우도 많았다. 단식투쟁을 하는 사람 앞에서 일부로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었다. 서로 생각이 다르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해주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똑 같은 사건을 놓고 보면서도 지극히 극한적인 대립을 하며 양자 간 한 치의 타협도 없었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은 고사하고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적대적인 감정만 보여주었다.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이란 존재도 없었다. 오로지 자기 생각만 옳은 것이었다.


나 자신은 어느 쪽인가 한 번 생각해보았다. 여기 사람들이 보기에는 분명 나는 보수다. 사회적인 이슈에 내가 서있는 쪽은 분명 옛날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보기에는 진보로 보일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도 문제가 되기 시작한 이슈들에 비교적 관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앞서 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연한 이유가 소수자의 문제나 동성애 같은 이슈는 여기서는 오래 전에 사회적인 이슈로 거쳐 간 일들이기 때문이다. 오랜 캐나다 생활 때문에 한국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는 알게 모르게 변한 셈이다. 정치 문제도 여기가 선진국이라서가 아니라,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민주주의 국가이면서도 캐나다는 사회주의적인 성격도 가진 나라다.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은 자유스러운 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믿고 있다. 그리하여 표현의 자유를 누구보다 굳게 믿고 있다. 물론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이지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나는 개인적인 성격 탓이겠지만 한쪽만 있는 사회를 건전하다고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는다. 보수가 중심을 잡고 진보가 앞으로 나가는 그런 사회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보수가 있기에 진보가 있다고, 그러므로 서로 싸워 상대방을 없애려 하기보다 함께 가는 사회여야 한다고…. 지금 20대는 60대를 향해 보수라 부르지만 그들이 60대가 됐을 때 20대에게 같은 말을 듣지 않을까? 결국 오늘의 진보는 내일의 보수인 셈이다.
마치 사람의 두 눈과 같지 않을까? 젊은 날 내가 제일 좋아했던 가수, 죤 바에즈가 한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세상을 두 눈으로 보아야 한다. 왼쪽 눈, 오른쪽 눈, 하나로가 아니라…”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한마당] 지도자 철학

● 칼럼 2015. 1. 16. 19:36 Posted by SisaHan

사회부 기자 초년병 시절이었다. 당시 사회부는 행정관서와 법조·사법기관들을 담당하며 주로 사회면 기사를 만들어 냈다. A부장은 항상 행정적인 정책기사에 관심이 많아 부하기자들이 쓴 기사들 가운데 대형 개발계획이나 행정조치들, 시민들의 민원대응 등이 톱기사가 되고 크게 다뤄졌다. 그 뒤의 후임 L부장은 사건에 비중을 두어 공무원 비위나 독직사건, 경찰의 강력사건 수사, 법원의 판결 등이 톱으로 오를 때가 많았다. 취재방식도 서로 달랐다. 술 잘하고 능글맞은 A부장은 공무원들을 자주만나며 서류를 열심히 뒤지면 큰 기사가 나온다고 강조했고, 대쪽같던 L부장은 현장을 많이 뛰라, 경찰서와 병원 같은 일선에 기사가 널려있다며 밤낮 발로 뛰라고 지시했다. 전임과 후임의 기호와 성품, 판단기준에 따라 신문의 사회면 색깔이 확 달라졌다.


앞서 대학 1학년 때 산악반 활동을 한 적이 있다. 산을 좋아하는 학생들 50여명이 모인 동아리인지라 어떤 학생들은 워킹, 즉 순수한 등산을 선호하고, 어떤 학생들은 바위를 기어오르는 암벽등반을 더 좋아했다. 공교롭게도 1년에 회장이 2번 바뀌면서 한동안은 주말마다 일사불란한 대열을 지어 산릉을 누벼야 했다. 그러더니 그 다음 한동안은 인수봉과 백운대, 만경대의 아찔한 암벽에 붙어살아야 했다. 주장이 산능선을 타면 수없이 걸어야 했고, 암벽을 즐기는 사람이면 대원들도 어쩔 수 없이 맨손이든 주렁주렁 인공등반 장비를 매달고든 바위를 기어올라야 했다. 당연히 암벽을 즐기는 대원들은 능선과 계곡을 걸으며 투덜거리고, 암벽의 공포를 싫어하는 아이들은 바위에서 추락의 위기를 감내하며 오그라드는 손발로 선배 뒤를 따르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주장이 암벽으로 끌고다닐 때 동아리 회원이 크게 줄어든 것은 물론이다.


작은 그룹들만 지도자의 취향과 방향설정에 따라 모임의 성격과 목표와 결과가 달라지는가. 아니다. 시민-사회단체나 대기업 혹은 자치단체도, 더 나아가 나라의 국정진로도, 지도자 한 사람으로 인해 바뀌고 성패가 좌우되는 것은 오십보백보다. 지도자의 역량과 소양, 철학에 의해 조직이 나아갈 방향이 바뀌고 살아남거나 패망하기도 한다.
기업오너의 판단착오가 장수하던 기업을 하루아침에 몰락시킨 사례는 많다. 역사적으로 볼 때 히틀러가 나치독일을,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이태리를, 일제 히로히토가 아시아 수천만 민중을 핍박과 참살의 고통을 겪게하고 패망한 것은 인애(仁愛)를 모르는 비정과, 무개념·철학부재 지도자의 만용과 탐욕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기본적으로 시스템이 작동하는 근대 행정기관이나 국가조직은 단 한 사람의 지도자에 의해 크게 방향을 튼다고 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한 사람의 독선에 의해 파멸로 치달은 경우는 독재국가나 왕정시대 독재자·군주의 전횡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북한정권을 늘 불안하게 여기는 것도 단 한사람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정상적인 선진 민주주의 국가라면 지도자 한사람에 의해 나라가 좌로 혹은 우로 엄청나게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지도자가 중요하고 막강한 것은, 지도자가 끌고가는 국정의 방향과 철학에 따라 국운의 부침이 있고, 국민 삶이 지대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모국에서 대통령의 신년회견이 끝나자 마자 온통 들끓고 있다. 민심과는 전혀 동떨어진 마이웨이 연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하나만 예를 들면, 그의 당선을 도왔던 한 교수는 “책임질 줄 모르는 졸렬함, 국민이 아닌 자신만 보고 가겠다는 태도로 민주국가에선 보기 어려운, 세계에는 없는 현상”이라고 힐난했다. 마치 왕정국가처럼 제왕적인 권력을 누리면서 책임은 모두 부하들이나 제도 탓으로 돌리는 전근대적 행태와 유체이탈 철학에, 지지율이 자꾸 떨어지는 것을 보면 국민들도 피곤하고 염증이 인다는 얘기다.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인 노자는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임금 보다 못한 것은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임금”이라며 백성의 신의를 중시했다, 국정은 난맥의 연속이고 뚜렷한 비전도 없으니, 신뢰를 접고 업수히 여길 정도가 되면 나라와 국민에게 더 이상 불행한 일이 없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모름지기 군림이 아닌 섬김의 자세,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철학의 소유자다. 그런 모습이 전혀 안보이고 오직 자기중심에 빠져 옳다고만 우기니 답답할 수 밖에.
두 달여 지나면 이곳 작은 한인사회도 회장을 뽑는다며 벌써부터 서두는 출마자들이 있다. 겨우 1천명 안팎의 지지로 당선되어 한인회 일을 하게 된다지만, 그들도 지도자라면 어엿한 지도자가 된다. 그런데 그들은 과연 동포들을 위한 섬김의 철학이 있는 것일까.


한인회장 자리를 대단한 권력과 감투라고 여겨 욕심을 내는 것은 아닌가. 자신을 희생하며 비전을 열어가겠다는 소신과 철학 따위 아랑 곳 없이, 얼굴 세우고 관변 대우받는 우쭐함에, 10만명이 넘는 동포사회 대표랍시고 거드름을 피워 볼 저급한 생각이라면 한인사회 먹칠이요 동포들 한탄만 늘어날 터이니 아예 조용히 주저앉는 게 낫지 않을까.
자만과 아집에 빠진 이들에게 아무리 외쳐본 들 ‘쇠귀에 경 읽기’요, 제 나르시즘 철학이 최고라고 여길 테니, 입만 아프고 속터지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지만….


< 김종천 편집인 >



박근혜 대통령의 새해 기자회견을 놓고 오랜만에 ‘여론 통일’이 됐다.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언론이 이처럼 똑같은 목소리로 부정적 평가를 일제히 쏟아낸 것도 보기 드문 일이다. 그만큼 기자회견에서 확인된 박 대통령의 ‘고집과 불통’은 심각했고, 국민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인식의 간극은 넓고도 깊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청와대는 이런 상황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듯하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13일 언론의 부정적 평가에 대해 “여러분의 시각을 존중하고, 여러분이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여론의 반응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대책을 마련하려는 긴장된 분위기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사실 이런 내용의 기자회견에 여론의 집중포화가 쏟아지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라도 비선세력의 국정개입 의혹 사건으로 청와대의 인적쇄신이 필요하다는 데는 국민의 의견이 하나로 모여 있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민심의 아우성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더욱 주목할 대목은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청와대 의사 결정의 ‘악순환’이다. 대통령의 새해 기자회견을 성공시키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책임자는 바로 김기춘 비서실장이었다. 그런데 김 실장 자신이 기자회견의 ‘아킬레스건’인 상황에서 무슨 제대로 된 참모 판단과 건의가 이뤄졌겠는가.
김 실장이 버티고 있는 한 기자회견의 뒷수습 역시 이뤄지기 힘든 구조다. 기자회견 이후 들끓는 민심을 있는 그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할 리도 만무하고, 제대로 된 여론 진정 방안을 찾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른바 ‘문고리 3인방’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에 대한 ‘무한 애정’을 과시한 대통령에게 새해 기자회견이 ‘실패작’이라고 말할 리 있겠는가. 오히려 대통령의 눈과 귀를 더욱 가리려 할 것이다. 결국 ‘청와대 인적쇄신 거부→국민 여론의 잘못된 해석→그릇된 국정운영’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새해 기자회견을 통해 ‘누가 뭐래도 내 갈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천명했다. 시쳇말로 ‘개는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 기차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박 대통령의 전통적인 지지층마저 등을 돌리기 시작한 상황에서 새해 기자회견은 민심 이반을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철길에는 적신호가 켜져 있는데 기차는 계속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회견에서 남북관계에 대해 밝힌 내용도 실망스럽다. 남북관계를 진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커지는 상황임에도 발언 내용은 기존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박 대통령이 현안인 대북전단 살포 문제와 관련해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 문제와 주민 갈등 최소화 및 신변 위협 해소 필요성을 잘 조율해 지혜롭게 해 나가겠다’고 밝힌 것은 일정한 의미가 있다. “앞으로 민간 차원의 지원과 협력을 통해 실질적인 대화와 협력의 통로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한 것도 긍정적이다. 인도적 지원과 경협 확대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할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동력이 떨어지는 원칙적 언급에 그쳤다. 설 전후 이산가족 상봉과 광복절 70돌 기념 공동행사 제안은 남북관계를 풀 전략이라기보다 할 수 있는 행사의 예시에 가깝다. 게다가 핵심 쟁점인 5.24 조치 해제 문제에 ‘그 얘기를 하려면 당국자 회담에 나와라’고 한 것은 공을 다시 북쪽에 떠넘기는 태도다.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적극적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다. 박 대통령과 정부는 지금 남북관계 개선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서서 망설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칼럼] 헌법재판소의 오래된 월권

● 칼럼 2015. 1. 16. 19:34 Posted by SisaHan

통합진보당을 해산하고 소속 국회의원 전원의 직을 박탈한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은 A4로 347쪽 분량이다. 여기서 재판관 한 명이 쓴 반대의견 180쪽과 이를 반박한 다른 재판관 두 명의 보충의견 20쪽을 제외하면 이번 결정의 근거가 되는 재판관 여덟 명의 법정의견은 147쪽이다. 이는 다시 정당 해산 관련 144.5쪽, 국회의원직 박탈 관련 2.5쪽으로 나뉜다.
이 결정문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헌재 스스로 “헌법이나 법률에 명문의 규정이 없다”고 하고서도 의원직 박탈을 정당화한 이 2.5쪽이다. 200자 원고지로 10장 남짓한 이 대목은 그 분량만으로도 재판관 8명의 지적 수준과 논리 전개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 국민이 선출한 입법부의 의원직을 사법기관인 헌재가 박탈할 수 있는가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둘러싼 깊은 성찰 같은 것은 발견할 수 없다. 당을 없애기로 한 마당에 의원직을 남겨 놓아서는 정당 해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그러니 의원직까지 함께 박탈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조야한 주장이 있을 뿐이다.

철학의 빈곤만이 아니다. 이 2.5쪽은 헌재가 헌법과 법률에 규정이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헌법의 이름을 빌려 임의의 결정을 하겠다는 ‘재판관 입법’ 선언으로 읽힌다.
기실 헌재의 ‘월권’은 뉴스가 아니다. 헌재는 1988년 창설 직후부터 ‘변형결정’이라는 이름으로 헌법불합치, 한정위헌, 한정합헌을 선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 근거는 헌법재판소법 어디에도 없다. 그 법에는 “법률 또는 법률 조항의 위헌 여부만을 결정한다”(제45조), “위헌으로 결정된 법률 또는 법률의 조항은 그 결정이 있는 날부터 효력을 상실한다”(제47조 2항)고 돼 있을 뿐이다. 헌재는 위헌이나 합헌 중 하나만 선고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헌재는 45조를 무시하는 동시에 47조 2항의 적용을 중지시키는 방식으로 법에 없는 변형결정을 27년째 계속해오고 있다.


변형결정은 종종 단순 위헌 심사를 넘어 입법권을 침해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가장 가까운 예로 지난해 10월 국회의원 선거구별 인구 편차를 현행 3 대 1에서 2 대 1로 줄이고, 이를 반영한 법 개정을 2015년 말까지 완료하라고 한 헌법불합치 결정은 국회가 논의하고 결정해야 할 대체 입법의 원칙과 시한까지 제시했다. 결국 선출된 -‘민주적 정당성’이 있는- 권력인 국회를 선출되지 않은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권력인 헌재의 명령 수행자로 만들어 삼권분립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국회는 헌재의 ‘습관적 월권’을 방임해왔다. 변형결정의 위법성을 입법으로라도 해소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 해결해야 할 난제들을 헌재로 들고 가는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를 통해 헌재의 권능만 강화시켜줬다. 재판관 후보자 인사 청문 과정에서는 도덕적 흠결을 찾는 데 매몰돼 자질과 능력의 검증은 소홀히 넘기기가 다반사였다.


학자들과 언론도 입맛 따라 ‘사법적극주의’라는 평가와 ‘사법자제’ 요구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헌재의 월권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너무 작아 무시되었다. 먹고살기 바쁜 일반 국민에게 헌재는 법원•검찰과 달리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다. 헌법에도 법률에도 없는 의원직 박탈 결정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헌재의 월권은 법률의 위헌 여부를 심사하는 독점적 권한을 부여받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것일 수 있다.
예전엔 “판사가 헌법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헌법이다”(찰스 휴스 전 미국 연방대법원장), “연방대법원이 곧 헌법이다”(펠릭스 프랭크퍼터 미 연방대법관)라는 등속의 호언이 그저 남의 얘기처럼 들렸다. 그런 말들에 ‘재판관 9인의 과두지배’라는 비판이 제기돼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 강희철 - 한겨레신문 사회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