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뻐꾸기 둥지와 뭉크

● 칼럼 2016. 1. 15. 17:50 Posted by SisaHan

희망의 새해가 왔는데, 왜 뭉크의 ‘절규’가 생각나는지, 영화 ‘뻐꾸기 둥지’가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기쁨의 외침이 이어져야 할 텐데, 경제는 어둡고, 주변의 삶들은 팍팍하고, 세상은 갈등의 소용돌이입니다. 북한의 철없는 핵 실험 뉴스까지,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더 암울합니다. 아무리 외쳐도 메아리가 없어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듯 답답한 심경들 때문일 겁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는 ‘영혼없는 삶’에 대한 저항입니다. 주인공은 감옥보다 자유롭겠지 하는 생각으로 정신병원에 도피하지만, 그 곳의 자유는 실상은 자유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간호장의 철저한 통제 아래서 숨막힐 것 같은 일상은 자유가 아니라 짓눌린 죽음의 삶이었고, 자유를 향한 그의 외침이 아무런 동조로 반향도 없음에 낙담합니다. 주인공이 절망한 것은 권력의 벽이기도 했지만,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순응하는데 지칩니다. 영혼없는 무뇌(無腦) 인간들 때문에 절규하는 것입니다. 발버둥치던 그의 삶은 끝내 죽음으로 끝납니다.
흑자를 낸 회사에서 억울한 해고와 끈질긴 복직투쟁이 핍박에 짓눌리며 벼랑에서 죽음을 택한 많은 노동조합원들의 처지도 마찬가지 일 겁니다. 절박한 처지에서 아무리 외쳐봐도 들어주는 사람 손내미는 사람 없이 냉대하고 되레 눈을 부라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기란,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최근의 그런 답답한 소식 가운데 한-일 정부가 합의했다는 일제 군대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불가역적 타결’ 발표는 또 하나의 어이없는 절망감을 안겼습니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할머니들이 분노의 눈물을 쏟고 있습니다. 무려 24년 동안 1천2백회를 훌쩍 넘긴 수요집회마다 노구의 저무는 생명들이 힘겹게 외쳐왔습니다. 법적책임과 배상, 명확한 사죄와 역사교훈적 후속조치…귀에 박힌 ‘해결원칙’은 얼마 전까지 대통령도 일본에 요구했던 것들인데, ‘합의’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명예를 더럽힌 굴욕적 외교참사’라는 비판이 그래서 들끓습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최선을 다한 대승적 결과이니 그 정도로 됐다”고 주장하고, 일본은 “다신 입에 올리지 말라”고 쾌재를 부릅니다. 아베는 제 입으론 직접 사죄할 수 없다고 대놓고 큰소리에 소녀상은 옮길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단죄’가 아닌, 오히려 ‘최종 입막음’을 안겨준 현 한국정부의 대응은 어쩌면 놀라운 일이 아닐 겁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유신회귀적 국정운영과 국정교과서에 이르기까지 일맥상통하지 않은지‥ 태생적으로, 또한 일관된 친일과 독재의 후예들이며 그런 인식의 소유자들임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뿌리가 그런데, 그들의 역사의식에서 뭘 기대할 수 있겠나요?. 일제하 성노예 전쟁범죄라는 인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반인권적·몰역사적 합의에 응해줄 리가 없을 겁니다.


유엔헌장에도 나와 있는 피해자 중심 협상이어야 함에도 피해자 의견을 전혀 듣지 않은 것에서 보듯, ‘위안부 문제’에 대한 공감대나 배려 혹은 책임의식이 갖춰지지 않았고, 협상외교의 기본과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지 못한 채 일본과 미국의 위세에 끌려간 외교력 결핍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덧붙인다면, 국민 한사람 한사람을 살펴 받들고 섬긴다는 위민(爲民)헌신의 자세보다 군림하는 제왕적 리더쉽이 몸에 배었으니, ‘까짓 귀찮은 위안부 논란 그만 끝내라’고 서둘러 얼버무리고 틀어막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한 것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성경(마 12:35)도 말씀하고 있지요.
다수 국민이 반발하고 당사자가 용납지 않는 역사적 상처를 그냥 덮으려 하는데, 할머니들을 가장 잘 이해할 것 같은 60대 이상에서 긍정적 반응이 높다니, 참 무정한 세상입니다. 이미 편향에 길들여진 많은 언론은 정부편을 들기 시작합니다. 신문방송에서 반대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지며 슬그머니 사라져 갑니다. 외교무대에서 정부는 ‘위안부’라는 말은 입도 벙끗하지 못할 판이니, 할머니들의, 아니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는 또 하나의 역사적 암덩이가 되고 말 처지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소리치다 지치고, 아예 외치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함께 외쳐주고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외면하고 심지어 손가락질 하는 이들이 더 많아진 때문입니다. 권력과 재력 등 힘있는 자들과 그들에 한통속이 된 언론마저 정권과 사익에 몰두해 작지만 정의로운 신음들을 못들은 척 깔아뭉개는 직무유기에 젖어든 탓도 큽니다.
그런데 그런 정치와 권력의 난폭운전과 역주행에 제동장치가 없는 현실이 더욱 답답하게 합니다. 주눅들고 각자도생인 야당도, 국민도, 또한 다수 시민의 각성이나 결기(決起)도 자꾸만 ‘뻐꾸기 둥지의 무골인간들’처럼 되어가는 듯 하니까요. 더 기막힌 것은 그런 후진적 ‘헬조선’의 폐습이 밖으로 수출돼 해외에서까지 기세를 부리려하니, 참 한심한 노릇입니다.


< 김종천 편집인 >